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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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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긍정적 평가3. 부정적 평가

1. 개요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를 논하는 문서.

2. 긍정적 평가

명성황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통 미디어에서나 사람들의 인식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에 초점을 맞춘다. 이 과정에서 명성황후는 권력에 눈이 먼 왕비로 묘사되고, 고종은 아무 힘이 없는 무능한 왕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를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권력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우선 흥선대원군은 어디까지나 대원군이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고종에게 권력을 물려줘야 할 위치였다. 하지만, 대원군은 왕의 나이가 찼음에도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고종과 대원군의 갈등이 시작된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아무리 왕이라고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대원군의 입장에서도 왕이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말하는 것과 왕비(와 그 뒤에 있는 외척 세력)가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명분에 맞는지는 뻔한 일이었다.[1] 아버지에게 직접 대항하지 못하는 고종의 입장과 왕에게 직접 대항하지 못하는 대원군의 입장은 곧 명성황후를 통한 대리전으로 변하게 된다. 실제 조선의 권력은 고종에게 있었다. 가령 민씨 일가가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기 시작할 때 고종이 이를 허가한 것은 고종이 허수아비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종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기반이 없었던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충신들로 채워진 신하들보다 황후의 친인척들을 더 신뢰했다.[2]

흔히 하는 오해로 여흥 민씨들을 명성황후가 끌어들였다고 하는데, 개화기에 활약한 민씨들의 대부분은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에 등용된 인물들이다. 흥선대원군의 어머니와 부인도 민씨였으며 명성황후가 입궐 이전부터 상당수의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 민씨였다. 흥선대원군 실각 후 고종은 이들 중 개화에 적극적인 이들을 중용해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지속시키는 한편, 흥선대원군이 반대했던 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 과정에 같은 민씨라도 부정적인 인물과 긍정적인 인물이 각기 다른데 모든 민씨들을 부정적 인물로 가정하고 이들을 모두 명성황후와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된 점이다.[3]

또한 임오군란은 기존의 5군영이 흥선대원군 집권기 때 척화정책에 따라 세를 불렸고 흥선대원군에 대한 충성이 강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친정 시 사이가 크게 틀어졌고 틈만 나면 재집권할 기회를 엿봤다. 이에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기반인 5군영을 2군영으로 축소 개편시켰고 이후 자신이 만든 별기군으로 대체하기 위해 사태를 파악하고도 구식군인을 의도적으로 차별대우한 것도 있다.

당시의 매관매직삼정의 문란 때부터 근 80~90년을 이어져 온 행태로 정부의 수입원 중 하나였다. 그런데 고종 치세에 그 관직들이 공명첩과거합격증[4] 으로 대부분이 이름뿐인 명예직이었다는 것이다.[5] 흥선대원군 치세 때 경복궁 중건에 따른 예산부족에 이어 개화정책에 따라 신문물 수입, 정부기관 개편, 군제개편 등에 따른 자금을 대기 위해 비난받아도 당대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 중 하나였다.

정부가 매관매직을 했더라도 내탕금을 통해 정책예산으로 쓰였지 이것이 명성황후의 개인적 착복으로 이어진 점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또 명성황후는 살해당하기 전 일본이 제시한 약간의 뇌물을 거부했다.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일본에 협조할 것을 대가로 명성황후에게 약간의 뇌물을 제시했으나 거절한 것이다. 사치설을 부정하는 근거 중 하나이자 명성황후가 살해당했다는 것은 일제의 조선침략을 막던 큰 걸림돌이었다는 것이다.

릴리아스 언더우드에게 결혼축의금으로 100만냥을 주었다고 알려진 내용은 cash를 냥으로 해석한 잘못된 번역으로 실제로는 100만이었으며 또한 당시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실물 가치는 역대 조선 왕실에서 하사한 부의금과 비교했을때 더 적은 양으로 이는 명성황후/사치설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명성황후의 가장 큰 실정이라 지적되는점은 500년간 건국이념인 유학에서 임금의 사적인 친인척 종친, 외척, 부마, 왕비와 후궁 등은 정치 참여가 금지 되었는데 당시 군부(君父)의 잘못은 아랫사람이 지적하는것은 강상명교(綱常名敎)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당시 임금인 고종을 욕하기 어려워서 욕받지가 된 측면이 있다.[6]

당대 명성황후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출처를 보면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으며 일본에 협력하기도 했던 급진개화파, 명성황후에 대해 비난의 기사를 쏟아내던 한성신보매일신보 등 일본의 언론과 이를 기록한 매천야록이다.

반면 정치적 대립구도가 없던 제 3국의 외교관과 선교사들은 공통적으로 명성황후가 명석하고 외국문물에 관심이 많으며, 외교에 있어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고 국익을 위해 헌신했으며 검소한 성품이라고 기록했다. 사치를 부리고 탐욕으로 나라를 망하게했다는 것과는 상반된 기록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대립 측과 한국을 침탈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죽인 일본 측 기록은 왜곡과 거짓이 있을 이유가 상당한 반면, 한국에 주재중이던 제3국의 외교관 및 선교가들의 기록이 전자에 비해 객관적일 수 밖에 없다. 이에 후자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고 봤을 때,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극도로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에는 매관매직에 대한 기록은 있어도 사치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해당 실록은 일제의 검열 하에 쓰여진 책인데도 전혀 없다.

이태진 교수는 매천야록에 대해『역사 소설 속 명성황후의 이미지』논문에서 "왕비의 미신 행위와 낭비벽에 대해서는 황현의 『 매천야록 』 에도 비슷한 비판이 있어 이는 지금도 의심 없는 사실처럼 간주되고 있다. 『 매천야록 』 은 기록 형식상 고종 즉위부터 갑오 이전까지의 수문수록 隨聞隨錄(들은 대로 적은 것) 으로 된 것과, 그 이후 강제병합까지의 일기체 두 가지로 나뉜다. 기록 방식으로 봐도 전자는 후자에 비해 사료적 가치가 낮을 뿐 아니라, 황현은 소론 계보에 속하는 인물로 당색적으로 왕비의 노론계 출신 성분에 대해 비판적이다. 심지어 고종까지도 노론 두둔 성향을 가졌다고 비난하는 대목도 보인다. 그러므로 당색적 취향을 강하게 보이는 ‘ 수문수록 ’ 형식의 글로서 절대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라고 평했다.

청일전쟁으로 경복궁을 점령한 후 일본 공사 이노우에가 고종을 겁박해서 김홍집 내각을 등용시키고 2차 갑오개혁을 추진할 때, 명성황후가 이노우에에 의해 인선되는 친일내각 구성에 제동을 건다. 그러자 이노우에는 김홍집 등 4대신을 참석시킨 가운데 고종과 대면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고종에게 왕비를 암탉에 빗대어 고종에게 불쾌감을 표한다.

1895년 일본인이 창간한 한성신보는 이때부터 명성황후에 대한 비난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한성신보의 기조는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 한성신보를 설립했던 기쿠치 겐조는[7] 대원군전, 근대조선사 등 여러 소설과 책을 써내면서 허구의 내용으로 명성황후를 사치, 향락, 부패, 시기 등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사편수회와 일본 소설가들에 의해 강화된다. 또한 기쿠치 겐조의 소설을 토대로 국내에서는 정비석의 ‘민비’(1981)가 쓰였고 드라마 ‘명성황후’(2001~2002)의 줄거리도 기쿠치 겐조 소설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허구의 내용으로 명성황후에 대해 온갖 부정적 이미지를 심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당시 교과 과정의 역사교육은 물론 일본 내에서 명성황후를 악녀로 묘사하고 비난하는 소설 등이 출간되고 국내로도 반입됐다. 반대로 일본이 지원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은 호평하고 이를 주도했던 급진 개화파 인물들은 과도하게 띄웠다. 이때 형성된 사관과 민중 의식은 오랫동안 지속되다 당시 상황과 인물들의 평가를 기록한 각국 공사관 문서가 공개되고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 인물들의 부정적인 면모가 알려지면서 중화된 편이다.

반면 소설가 이문열은 소설 명성황후를 펴내면서 다음과 같이 명성황후의 무속신앙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알려지기로는 황후는 미신에 깊이 빠져 무당을 君으로 봉하고 매사를 거기에 물으며 결정했으며 세자를 위해서는 금강산 일만 이천봉 봉우리 마다 쌀 한섬과 비단 한 필을 바치게 했다. 얼핏들으면 황당해 보이지만 이해하려고 들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토속 신앙이 미신으로 몰리고 무당이 위험스런 사기꾼처럼 격하된 것은 일본인들이 들어온 뒤의 일이다. 당시로 보면 무속신앙과 그 주관자인 무당은 대중적으로 신봉되고 있는 흠집을 잡을데 없는 신앙체계였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과 관련된 낭비벽도 그렇다. 외형상으로 거기에 바쳐진 쌀과 비단은 낭비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누군가 우리 백성이 먹고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합리와 과학이라는 믿음위에 자란 친일은 그 몇십배, 몇 백배의 쌀과 비단을 일본으로 실어내 그들을 배불리고 따뜻하게 했을 뿐이다.
대대로 궁중에서 무속 행사는 고려나 조선이나 정기적으로 이뤄져 왔으며 조선에서는 성수청·활인서 등의 기관을 두고 무속행사를 주관하는 국무당을 두었다.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은 무당 진령군도 국무당이었다.[8] 무속행사는 명산대천에서 왕실의 축복을 기원하는 별기은제와 기우제 및 왕비나 태후들의 무제를 집전하고 궁중의 병굿도 담당하였다.

무제는 단군, 주몽한국사의 시조신 등에게 국가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였다. 궁중 무제는 역대 왕비들이 담당하던 직무였기에 이를 두고 사치라고 보는 것은 논란이 있다. 이를 두고 명성황후가 사치를 부린 것이라고 본다면 역대 모든 왕비들이 사치를 부린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청일전쟁과 척왜를 걸고 일어난 2차 동학 봉기로 세입이 끊기자 일본이 세운 내각이 기존에 해오던 왕실 행사 비용까지 줄이기 위해 무속을 사치라고 탄헌한 것으로, 역대 왕비들이 해오던 무제를 명성황후만 치른 것은 아닌 것이다.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장기집권을 허물고 고종의 친정을 이끌어내었다. 또한 오랜 척화정책을 깨고 개항과 신문물 도입, 서양과의 외교에 적극적이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의 침략야욕을 몰랐거나 알고도 부일에 일조했던 급진개화파와는 달리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명성황후에 대한 당대 인물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김옥균의 지략은 역사적인 것이었소. 박영효와 홍영식과 서광범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재사들이었지요.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그들에다 나까지 넣어 다섯 사람의 기지와 계략을 모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까지 일컬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다섯 사람이 함께 민비 앞에 나가면 으레 민비에게 기선을 잡혀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러나오기 마련이었지요. 민비는 실로 당할 길 없는 지략과 재략을 지닌 걸물이었소. -서재필 조선일보
외교관으로서의 황후는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황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을 감탄시키곤 했다. - 윤치호 일기
민씨는 첫눈에도 예사로운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매서웠으며 두뇌회전 또한 기민해 보였다. 성격도 대단히 차분하고 냉철하게 느껴졌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 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윤이 나는 흑단이었고 피부는 투명하여 진주빛을 띠었다. 눈빛은 차갑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중략)…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예의범절과 사려 깊은 호의, 뛰어난 지성과 당당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통역자를 통해 나에게 전달되기는 했지만 그녀의 화법은 탁월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왕비의 주위는 온통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었다. 왕비가 그녀의 재능과 권력으로 조정의 고위관직을 친인척을 등용하여 거의 석권해 버렸으므로 그녀에 대한 대원군의 반감은 엄청났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명성황후의 첫인상은 좀 창백하고 아주 바싹 마른 얼굴에 이목구비가 날카로운 느낌을 줬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총명한 눈을 지녔지만 첫눈에 아름답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서로 대화를 하면서 평가가 달라졌다. 생기발랄함과 소박함, 재치 같은 것들이 그의 용모를 환히 비추었고 단순한 겉모습의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큰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지식은 대개가 중국의 고전에서 얻은 것이었지만 정신 수준이 매우 높았다. 왕비는 질문을 많이 했고 자기가 들은 것은 모두 기억했다. #

왕비의 머리는 조선의 모든 귀부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쪽을 쪘다. 그리고 자그마한 장식(다른 여자들이 이런 장식을 한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짐작컨대, 이 것은 그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인듯하다)을 정수리에 얹고 가는 깜장 띠로 단단히 졸라매고 있었다. 뒤쪽 쪽진 머리에는 산호와 진주, 그밖에 보석들을 박은 기다랗고 정교한 황금 머리핀이 한두개 꽂혀 있었다. 거의 언제나 왕비는 조선여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진주나 호박 단추가 달린 노란 비단 저고리나 조끼, 그리고 아주 길게 질질 끌리는 파란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으며, 왕비의 옷은 모두 비단이었고, 이루 말할수 없이 우아했다.

중전마마는 장신구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고, 거의 걸친 것이 없었다. (커다란 은고리를 즐겨 끼는 북쪽지방의 젊은 소녀들을 제외하고는) 조선의 여성들이 귀고리를 하는 경우는 없는데, 왕비도 예외는 아니어서 목걸이와 브로치 또는 팔찌를 한 것을 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수많은 가락지를 가지고 있었을 테지만, 무수한 미국의 여인들이 통상적인 수단과 신분과시용으로 사용하는 만큼 그토록 큼직하거나 많은 다이아몬드가 들어있지 않는 유럽산 제품을 한 두 개 낀 것 이상을 본 일은 결코 없었다. 그녀는 결코 차본 일이 없는 멋진 시계를 여럿 갖고 있었다. 조선의 관습에 따라 그녀는 기다란 비단 술로 옆구리에 묶어 치장한 상당한 숫자의 금세공 장식을 지녔다. 복색에서 드러난 그녀의 취향이 그토록 소박하고, 그토록 완전하게 세련된 것이라면, 반쯤 문명화한 나라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그녀를 떠올려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황후는 누구보다도 국익을 위해 헌신한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가장 신랄한 그분의 반대자들도 항상 그분의 기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 릴리어스 언더우드 '상투 튼 사람들과 함께한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 -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명성황후와 대한제국》
왕과 왕후와 왕자가 차례로 환영 인사를 했고 전통 깊은 동양 왕실의 에티켓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으며 왕후의 지식과 총명함 그리고 넘치는 위트에 기쁘고 감탄했다. 왕후는 뛰어난 침착성(masterful poise)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내려는 듯한 눈빛(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 - 미국공사 부인 로즈 푸트
당시 일본으로서는 대표적 인물인 황후를 제거하여 조선과 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애는 것 밖에는 방책이 없었다.(중략)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서도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황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황후는 실로 당대 뛰어난 인물이었다. - 고바야카와 히데오 한성신보 기자
온 나라에 수재와 한재의 재변이 있을 때마다 얼굴에는 근심스러운 기색을 띠고 너그럽게 돌봐주기에 힘썼고 무더운 여름과 혹한의 겨울에는 도성의 빈궁한 백성들을 돌봐주는 것을 해마다 상례로 하였다. 빈한하여 혼례와 상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후하게 돌봐주었다.

병자년(1876)에 큰 흉년이 들자 조세를 감면해주었고 경비가 모자라면 돈과 곡식을 내주어 보충하도록 하였다. 호위 군사들이 힘들어할 때, 출동 군사들이 비바람을 맞을 때, 특별히 음식을 공급하여 위로하였으니 심부름 하는 자들이 잇따라 오자 군사들이 다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저마다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궁궐이 여러 번 화재를 겪었기 때문에 늘 궁중 하인들에게 불을 조심하게 하면서 애완의 진기한 물품들을 아예 없애서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진전의 남쪽 전각에 둔 은그릇이 없어졌을 때 곧 내전에서 주조해 주도록 하고 추궁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무고한 사람이 횡액을 입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평소 아랫사람들을 관대하면서도 엄하게 거느려 은혜와 위엄을 함께 보이니 궁중 사람들이 감화하여 서로 이르기를“이 황후의 인자하고 두터운 혜택이 우리에게 깊이 젖어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황후는 어려서부터 배운 바가 있어서 선량하고 간사한 것을 판별하고 옳고 그른 것을 밝혀내는 데 과단성이 있어서 마치 못을 자르고 쇠를 쪼개는 듯이 하였다. 슬기로운 지혜는 타고난 천성이어서 사물의 기미를 알아차리는 것이 신과 같았다. 어려운 때를 당한 이후로는 더욱 살뜰히 나를 도왔다. 짐이 잘못하여 화합을 깨트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아침을 기다려 자리했으며,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주었다.

심지어 타국과 교섭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나에게 먼 곳을 편안하게 하는 정책을 권해 택하도록 하여 각국에서 돌아온 사신들이 말하기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모두 감복한다”라고 하였다. 황후가 일찍이 짐을 도와서 말한 것이 있는데 근래에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 황후가 일찍이 말한 것이 그대로 됨이 부신 두 쪽이 그대로 맞추어지는 것과 같다. 심원한 생각으로 미래의 일을 잘 요량하는 황후의 통달한 식견은 고금에 탁월하여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없는 것이다.

임오군란 때 황후는 침착하게 대처하여 무사히 돌아왔다. 어떤 자가 이르기를 군란을 일으킨 군사들을 모두 철저히 다스려야 한다고 하자 황후가 말하기를, “내가 부덕하였고 또 운수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어찌 그들이 한 짓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주역』에 이르기를 “크게 포용하면 덕은 끝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황후의 덕이 그러하였다.

갑신년에 역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박영교가 난리를 일으켜 거짓으로 사변이나 전과 궁이 모두 피난 가고 나라가 대단히 위급한 처지에 놓였다고 하였다. 이전에 황후가 역적 영효를 타일러 그 음모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제 함부로 난을 일으켜놓고서는 저들은 스스로 서로 의심하며 도망쳐 망명하여 난리가 곧 평정되었다. 황후는 성의 동쪽에 피해 있으면서 자성을 호위하고 세자를 보호하였는데 창황한 가운데도 시종한 사람들이 한 명도 흩어지지 않았다. 황후가 평상에 은혜로서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간난에 닥쳤어도 용부가 있었던 것이다.

갑오년에 외국 군사가 대궐에 들어오므로 짐이 황후와 태자에게 건청궁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황후가 곧 도로 함화당에 돌아와 말하기를, “한 궁궐 안에서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차라리 여기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칼자루를 잃어서 여러 역적의 머리를 베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럴 바에야 포용해서 흉악한 무기의 끝을 늦추어놓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역적의 무리가 곧 법과 제도를 고치고 크고 작은 제사도 다 없애버렸다. 황후가 크게 한숨 쉬며 말하기를, “이것들이 어찌 없애고 보탤 수 있는 것인가. 역적들이 신과 하늘에 죄를 지음이 참으로 가득하다”고 하면서 진전에 제사 지내는 물품을 하나같이 옛 규례대로 따라서 하였다. 황후는 대궐의 하인들에게 일러 이 일을 여러 역적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황후가 일찍이 인재 등용에 관해 얘기하면서 거듭 신칙하여 말하기를, “국가의 치란과 안위는 오직 인재 등용의 잘잘못에 달려 있습니다. 인재가 어진 사람인 것을 알았으면 전적으로 맡겨 의심하지 말아야 하고, 어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빨리 제거하는 것이 옳습니다. 대체로 대간은 충신처럼 보여서 요순도 사람을 제대로 알기를 어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간사할지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그대로 둔다면 이것은 화환을 키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황후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찍 용단을 내려 김홍집, 유길준, 조희연, 정병하 네 역적을 제때에 처형하지 않아서 끝내 저들이 외국 군사를 불러들이고 몰래 훈련대를 사주하여 을미년의 천하 만고에 있어본 적이 없는 큰 변란을 일으키게 하고 말았다. 아! 짐이 황후를 저버렸다. 황후는 짐에게 간절한 한 가지 생각으로 받들었다. 비록 문안하는 것과 같은 절차에 대해서도 빠짐이 있을까 봐 근심하면서 성실하기를 다하였는데, 짐은 황후의 몸을 궁 안에서 지키지 못하였다. 아! 내가 황후를 저버렸다. 지금을 슬퍼하면서 지난 일을 쫓아 생각하니 회한이 그칠 줄 모른다. - 고종 어제행록

3. 부정적 평가

명성황후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당시의 여러 기록으로 매천야록과 같은 야사(野史) 뿐만이 아니라 외국 공사관의 기록, 무엇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근거한다.

'일본군에게 궁궐에서 시해당한 황후'라는 충격적인 사실에 가리어져 '조선의 국모'로 미디어에서 포장된 이면에는 조선 개국부터 꾸준히 국가적 중대 위협이었던 외척의 득세부터 시작해서 황후로서 지나친 정치 개입, 국가 재정 상태를 무시한 사치, 외세에 철저히 의존한 국제관계, 황실 전체를 동원한 무속신앙 등 구한말의 혼란에 정상적으로 대처한 모습은 찾을 수 없다.

특히 조선왕조 개국 당시부터 금기시되었고, 500년간 왕실의 위협이었던 외척의 세도 정치의 위세가 고종의 왕권까지 넘어섰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개화파에게 빌미를 줬다. 이는 단순히 남존여비의 유교적 차원을 넘어서 유럽 왕실에서도 보기 힘든 황후정치였고, 중국 황실에서도 황후의 국정 장악을 서태후 등의 사례로 극도로 폄훼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국왕과 부부 관계더라도 실권 왕비라는 체제 자체가 정통성이 없는 정치적 쿠데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조 초기 태조부터 세종까지 외척에 대한 견제는 왕실의 위협 수준으로 단호하게 이어져 왔음에도 명성황후대에 외척이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는 퇴보를 보인 것이다. 명성황후의 척족인 민씨 세력은 민승호, 민규호, 민겸호, 민태호 등이 왕실의 요직을 맡았고, 이어서 민영익, 민응식을 비롯하여 민영환, 민영위, 민치상, 민영준, 민영원 등이 주요 요직을 도맡아 고종의 재위 시기를 민씨가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0년대 민씨 척족으로서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진출한 인물은 무려 260명 가량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특히 갑신정변 후 살아남은 급진 개화파와 이들이 속한 독립협회에서는 명성황후에 대해 많은 비난을 한다. 명성황후의 반대파였던 유길준은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여인'이라 평했다. 명성황후의 부정적 평가가 매천야록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임오군란 당시 구식군인들과 시위대의 주 목표는 고종이 아닌 왕비 민씨와 여흥 민씨 외척들이었다. 왕비는 도주했고 민씨 일파도 도주하거나 시위대에 잡혀서 살해당했다. 민씨 일파가 군인과 백성에게 얼마나 증오의 대상이었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또한 옹호론에서 나온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인들이 대원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파였으며 따라서 고종과 민씨 일가가 의도적으로 구식 군인들을 차별대우했다는 주장은 별로 고려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 대원군 일파는 임오군란 1년 전 발생했던 쿠데타 음모에서 300명도 채 동원하지 못했을 정도로 군부에 미치는 영향력이 형편없었다. 또한 진짜로 고종이 구식 군인들이 대원군 편이라고 믿었더라도 조직적으로 수뇌부를 숙청하는 방식으로 나갔어야지,[9] 봉급 횡령하는 탐관오리를 처벌하기는 커녕 조사관으로 임명하는 비상식적인 대응을 한 것은 제대로 된 대응이라고 볼 수가 없다. 물론 이런 잘못된 대응의 주체는 고종이었지만, 그 탐관오리가 명성황후의 친족이었던 민겸호였다는 점과 명성황후 본인도 진령군의 굿판에 돈을 퍼다 쓰다시피 했다는 걸 생각하면 명성황후도 결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옹호론자들은 친러반일의 입장을 견지한 명성왕후의 정치적 스탠스로 백성들의 여론에 차마 고종을 공격할 수 없었던 일본의 비난이 집중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 극우파의 시해까지 이뤄졌다는 논리를 펼치는데 당시 명성황후의 권세는 언더우드 등 당시 황실을 드나들던 서양 인물들에게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결국 황실의 국정혼란이 명성황후와 그 외척들에서 대부분 기인한 부분이 사실인 것은 여러 사료로 확인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명성황후의 외교적 입장이 반일이라고 하여서 결코 옹호할 수만은 없다.

한편 명성황후에 비판적인 당대의 매천야록이 현재 사학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믿거나 말거나 식의 당시대 야담, 그리고 이를 당시 기득권층인 사대부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왜곡없이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천 황현이 호남에서도 서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서울서 야담만 듣는게 아니라, 당시에 조정에서 발행하는 신문 성격의 조보가 지방에도 내려오기 때문이고, 당시의 풍문인 민씨 일가들의 부패 사치는 이미 부정할수 없는 사실로 민씨 척족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당시 왕비에 대한 여론과 행적이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당시의 언론 보도와 여론, 구전을 집대성한 시사 평론집에 가깝다.

야담이 있다는 것이 매천야록의 가치를 깎아내리거나 신뢰성 없는 허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역사서 혹은 실록들 또는 당시에 조선과 교류했던 여러 외국의 자료 등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독특한 내용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빠트릴 수 없는 소중한 자료이다. 무엇보다 사학에서 무척 중시하는 것이 1차 사료[10]이다. 1차 사료 자체가 전부 진실이라 볼 수는 없지만 귀중한 기록인 것이다. 사료의 가치는 다른 사료와 교차 검증해서 판단하는 것이지 한국에서만 나누는 정사-야사 여부로 결정하는것이 아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매천야록을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사료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한말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반드시 읽어야 정도로 가치가 매우 높다.'고 서술하고 있다. 매천야록의 사실 자체가 잘못 전달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역사서와 교차 검증해 어느 정도 사실로 밝혀진 부분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11]

그리고 단지 막대한 선물을 받아먹은 선교사 부인들이나 손탁, 여행가 비숍여사들이 총명하다라는 칭찬이 사실이더라도 국정능력을 평가하는것과 다른 차원이다.

민씨 척족들의 부정부패와 사치, 매관매직의 중심에 명성황후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가뜩이나 국력이 열악한 현실로 기울어 가던 조선의 재정을 제대로 파탄냈을뿐만 아니라 부정부패를 더욱 심화시킨다. 결과적으로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민란을 제대로 진압하거나 달래지 못한 사태에서 명성황후와 그 일족 정권이 생각한 건 외세인 청나라에게 반란 세력 진압을 명분으로 군사력을 빌린다는 말도 안 되는 일들 뿐이었다. 개항에서도 조선을 거의 다 내주다시피 했다.

또한, 명성황후는 고종의 내정에서의 무능한 행태에도 한 몫을 했다. 임오군란을 직접 촉발한 건 명백하게 민겸호였는데, 명성황후는 사실상 민씨 일파의 최고 권력자였음에도 민겸호의 탐학질을 방관했다. 만약 그녀에게 양심이나 판단력 둘 중 하나라도 있었다면 당연히 자기들 목숨을 직접 지키는 군인들까지 등쳐먹는 민겸호의 행태를 민씨 일족 단위에서 저지하거나, 고종에게 직접 자기 일족의 무능한 자들을 등용하지 말라고 제안을 했어야 했다. 오히려 민겸호가 열심히 군인들을 등쳐먹는 동안 자기 자신도 아들의 호화 결혼식에 돈을 퍼다 쓰다시피 했으니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문제는 임오군란 전이나 이후나 조선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병사들 급료는커녕 관료는 물론 외국인 고문들에게도 임금이 체불되었고 고종이 친정 이후로 나라가 망할때 까지 이런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임오군란때 병사월급을 주는 선혜청 당상 민겸호가 맞아죽었음에도 다음해 주조 당상으로 민태호를 임명하고 돈찍기에 시동을 걸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당시 조선의 통화량은 2천만냥정도 였는데 1893년에는 7~8천만냥으로 늘어났다. 조선 경제가 그만큼 성장할리는 없고 당연히 나라안의 재화는 그대로인데 악화를 유통시켜 백성들 재산을 통화량이 팽창하는 비율 만큼 삥을 뜯은 것이다. 그래도 모자르면 궁에서 일하는 궁속의 임금을 체불하고 왕실 거래 상인들 대금을 떼먹었고, 조선 시대 내내 공명첩은 공식적으로 매관매직은 비공식적으로 권세가들이 하던 것이지만 최초로 과거 합격증을 팔아먹는 매과까지 저질렀다. 과거는 3년에 1번 열리고 합격자는 33인이 공식이지만 고종과 민씨 집권기에는 1년에 2~3번이 열리고 합격자도 한번에 80명 100명씩 팔아먹었다.

결국 1888년에 좌의정에 임명된 김병시가 임명받자마자 거듭 사직을 청하며 재정개혁에 대한 필요성을 울분을 토했지만 고종은 이미 민씨척족들이 장악한 주전소에서 당오전 찍기에 맛이 들여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현재 백성과 나라에 대한 계책이 위기에 처한 상황은 비록 항간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라도 오히려 서로 두려워하여 하루의 안전도 보장할 수가 없으니, 해와 달을 아우르는 우리 전하의 거룩한 지혜로 의당 안위(安危)를 환히 꿰뚫어보시고는 일찍이 간곡하게 잘 다스릴 방도를 구하느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괴로워하지 않은 적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의 시행과 조처를 보건대, 모든 것이 어긋나기만 하니, 이것은 혹시 성상의 이목에 막힘이 있어 미처 많고 복잡한 정사를 두루 살피지 못해서가 아닙니까.
매번 한 번 지시가 내릴 때마다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그 내용을 깨닫지 못하거나 또 더러는 승정원을 경유하지 않는 것도 있으니, 전하께서 함께 일을 의논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고종 25년 음력 8월 26일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가장 큰 문제는 외척의 세력으로 세도정치를 부활시키고, 삼정의 문란을 다시 일으킨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명성황후의 정치 입지가 커지자 민씨 일족들이 세력을 잡았고 흥선대원군이 간신히 막은 매관매직이 다시 성행했다. 백성들 입장에는 이런 민폐가 따로 없다. 민심은 민씨 일족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권력을 잡았으면 민심을 다잡아 권력을 단단히 해야 했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명석한 머리는 나쁘게 볼 여지가 더 많다. 차라리 머리가 나빠서 이용당했다면 변명이라도 있겠지만 그렇게 현명하다고 알려진 사람이[12] 자신의 개인적인 사치와 향락을 위해 척족을 양산하고 재정을 파탄냈으며, 타국에 마지막 남은 권리들을 퍼줬다면 더 평가가 나빠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고종이 개인적인 비자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매관매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이 크다.[13] 고종이 비자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사치를 안 했다고 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여흥 민씨들의 부정부패를 뒷받침했고 임오군란갑신정변 때는 청군을 끌어들였다. 청일전쟁으로 일본경복궁을 점령하고 일본이 내세운 친일 내각이 갑오개혁을 실시하자 러시아를 끌어들여 축출시켰다. 이로 인해 앙심을 품은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역사학계에서 명성황후 평가는 극과극으로 갈리는 반면, 명성황후를 옹호하려는 경향은 대중적이다. 특히 여흥 민씨 일가에서는[14] 21세기인 현재에도 명성황후를 위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심지어 명성황후를 옹호하는 이들은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일제의 식민사관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명성황후를 옹호하는 주장에 따르면 을미사변을 주도한 미우라 고로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후 일본의 20년 화근을 제거했다고 기뻐한 것을 들며 명성황후가 조선이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다 의로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평하고 있다. 또 프랑스 르땅지의 극동 특파원 빌따르 드 라게리는 오직 명성황후만이 조선을 이끌 수 있었던 정치가였다고 기술하면서 명성황후가 죽음을 당하자 조선은 맥없이 무너졌다는 평가를 한 것, 미국 외교관 출신인 윌리엄 플랭클린 샌즈가 명성황후를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 이라고 평가한 것도 인용하고 있다.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는 흥선대원군 세력과 급진 개화파에게 매우 비판의 대상이었고 당대의 민중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매천야록에 이러한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다. 이는 흥선대원군 하야 이후 개화를 받아들여 수입품이 쏟아져 국산품을 밀어내고 당백전당오전의 발행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닥쳐서 생활고를 겪었던 상황을 민중들이 왕비가 국고를 탕진했다고 믿었던 탓이다. 그리고 실제로 민겸호, 민영휘 같은 부패한 민씨 척족들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을만큼 명백한 사실이다.

명성황후는 조선말기에 조선를 구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녀가 등용한 민씨일족들 상당수가 조선을 망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민겸호는 군납비리를 저질러서 조선의 중앙군들을 결과적으로 공중분해시켰고 민영휘는 청군파병을 주장해서 조선을 청일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이런 일이 쌓여서 결국 터진게 임오군란이었고, 결국 명성황후의 친위세력이 뒷수습을 잘못하여 외국 군대가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15] 동학농민운동 당시 정신을 못 차리고 일본군이 파병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자기 목숨까지 잃게 만든 것을 생각해보면 호평하는 부분도 높게 평가할 이유도 사실상 전무하다.

명성황후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명성황후 자신과 민씨 일가에게 이익이 되는 길이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에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라고 맹렬히 비판한다. 특히 개혁 세력들의 주장을 묵살하며 제국을 운운[16]하는 시대 착오적인 주장을 내세운 고종을 부추겼다.

당시 민씨 일파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민영준은 백성들이 하도 씹어대는 통에 이름까지 민영휘로 바꿀 지경이었다. 그가 평안감사로 일하면서 평안도 백성들을 끔찍하게 수탈한 탓에 후일 그가 휘문의숙을 세웠을 때 이들의 주요 수탈 대상이었던 평안도 출신들은 발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민씨 일파의 패악질은 놀랍게도 일제강점기까지 계속되었는데, 가장 적극적인 친일파 중에 상당 지분을 민씨 일파가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자행한 친일 행위의 비중이나 악영향도 역시 가늠할 수 없이 막대하였다.
먼저 흥선대원군은 최익현의 상소대로 지위에 있지 않고 다만 종친의 반열에 속하는 사람은 그 지위만 높여주고 후한 녹봉을 줄 것이며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명성황후와 그의 일가인 여흥민씨 척족 역시 외척에 속하며 품계만 높여주고 부귀영화는 누리게 해주되 정사에 간섭하면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조선 왕조 500년내내 국법으로 종친 외척 부마는 지위만 누리고 잘먹고 살게는 해주되 정치에 관여는 금지되었다.

이를 종합할 때, 고종의 왕후의 친정을 신뢰한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왕비의 도리로는 사양해야 할 일이지 덥썩 친정식구들을 중용한건 백번 양보해도 잘한 일도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여흥 민씨 상당수를 쓴것은 사실이나 여흥민씨 일가 전체를 등용한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당대인들의 평가이다. 윤치호는 을미사변 소식을 듣고 왕비의 참혹한 죽음에 충격과 분노를 느끼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결코 왕후[17]의 집권이 좋은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녀의 음모와 사악한 총신들을 포기하도록 어떤 방식으로든 조처할 수 없다면 그녀를 폐위해야 한다고 주장할 터이다. 그러나 일본인 암살자가 그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행위는 결코 용인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외국인들은 암살을 자행한 그 무리,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그들을 혐오한다.
(다음날) 내각에서 왕후를 폐서인하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외부대신 김윤식을 방문해 그 조처를 강력히 항의했다.
“외국인들은 왕후의 비열한 시해행위에 매우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는 내 말을 끊고 다소 온화하게 말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공정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왕후가 자신에게 포도주를 주거나 자신들과 악수를 나누곤 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도 공정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나빴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나는 말했다. “왕후의 악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어떤 외국인도 그녀가 이 나라를 해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맞이한 가장 참혹한 죽음, 가장 비열한 범죄자일지라도 치욕스러워 할 죽음은 외국인에게 동정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윤치호의 일기 1895년 10월 8일~9일


[1]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단을 직접 겪어 본 세대다.[2]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황후의 친척이라기 보다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의 친인척들이다. 흥선대원군의 처남, 처형, 처조카 등 이면서 고종의 어머니의 척족인 것이다.[3] 흥선대원군이 간택을 할때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이 촌수로 먼데다 이미 죽고 형제들 또한 어린시절 다 죽은 한미한 집안에서 골랐기 때문에 민씨들 대부분이 명성황후와는 촌수로 거리가 멀고 흥선대원군의 어머니와 부인에 훨씬 가깝다. 대표적으로 비난받는 인물인 민겸호와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과 친남매 사이로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외척으로 이들을 등용했던 것이다. 명성황후의 오라버니라지만 친오라비가 아닌 흥선대원군의 의지로 양오라비가 되었기에 혈연은 아니다. 그리고 민겸호의 양자가 된 민영익은 명성황후와 12촌 사이, 민영휘와는 15촌 사이이다.[4] 과거 합격증인 공명홍패는 팔지 않고 군공을 세울때만 제한적으로 주었다. 그것도 무과 합격증이었다. 고종시대 이전에 매관매직으로 과거합격증을 자주 팔았다는것은 사실이 아니다. 과거제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지금의 인식과 달리 조선시대 가치는 벼슬<<과거합격증이었다.[5] 이는 조선 후기 양반 족보 매매에 따라 경제력이 높은 자본층이 신분 상승을 하게 된것과 비슷한 사회현상이다.[6] 상소에 임금 비판하는건 뭐냐는 질문이 있을수 있는데 임금의 비판하려고 하더라도 예를 갖춰서 해야하고 직접적인 언급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며 비판 내용은 둘째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에 어느정도 각오를 해야 했다.더군다나 조선왕조 내내 매관매직이나 축재는 나쁜 것이긴 하나 결정적으로 임금 못해먹을 잘못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광해군의 폐위 명분 처럼 강상과 관련된 문제가 아닌이상.[7] 기쿠치 겐조는 을미사변에도 가담해 명성황후 살해에 일조하였다.[8] 기은제를 주관한 것은 성수청에 소속된 국무당이었을 것이다.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국사편찬위원회)#[9] 정작 이 작업은 5군영이 2군영으로 개편되면서 완료된 뒤였다.[10] 당대인이 그 시대를 겪고 서술한 자료.[11] 매천야록의 신빙성을 말하는 것과 별개로 이 항목에선 다양한 정황들을 근거로 명성황후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천야록의 신빙성에 대한 논쟁이 무의미하다곤 할 수 없다.[12] 실제로 중전에 간택된 것도 현명하다는 이유였다. 무엇보다 똑똑하지 않았다면 그때까지 의회정치를 멀쩡히 하던 일본이 굳이 여러 리스크를 감수하고 주권이 아직 존재하는 나라의 왕비를 궁궐까지 침투해서 죽일 이유가 없다.[13] 조선시대 매관매직 문서 발견 한때는 매천야록을 쓴 황현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도 있었지만 사료가 발견됨으로서 고종 시기에 매관매직이 이뤄진 것은 확실하다.[14] 명성황후와 같은 씨족이니 당연한 것이다.[15]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정황상 고종이 했을 확률이 높다. 옛 교과서에서는 왕비가 원병을 요청했다고 나오나 2006년 7월 1일 '임오유월일기'가 발견되며 학설이 깨져버렸다. 따라서 소거법상 고종 외에는 원병을 부를 수 있는 인물이 남지 않게 된다.[16] 러시아 제국차르 체제나 독일 제국카이저 체제와 같은 전제왕권을 추구했다고 한다. 민씨 일가가 친러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종 본인이 왕권 강화에 관심이 많았다.[17] 원문은 Queen 이다. 윤치호의 일기는 영어로 작성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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