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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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성인 |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를 비롯한 한국의 순교자들 | |
창설자 |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 | |
영성 | 복자회 영성 (점성 · 침묵 · 대월 · 면형무아 · 완덕오계) | |
본당 및 학교 | 천주교 서울대교구 새남터 성지 · 학교법인 복자학원 (복자여자중학교 · 복자여자고등학교) |
복자회 설립자 방유룡 신부 1930년 10월 26일 사제 수품 1900년 3월 6일 - 1986년 1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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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면형무아(麵形無我)는 모든 덕의 절정이다. 주님은 면형, 즉 무(無)에 계신다. 무아는 예수님으로 나를 채우기 위해 나를 전부 비워 놓은 것이다. - 방유룡 신부 |
가톨릭의 토착화와 방인(邦人, 현지인) 수도회 설립에 힘써, 3개의 수도회를 세웠다. 이 수도회들은 한국의 순교자들의 영성을 기반으로, 이들을 주보로 모시고 설립되었기에 ‘한국순교복자수도회’, 더 간단히는 ‘복자회’라고 불린다. 복자회는 설립된 순서대로 한국순교복자수녀회,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한국순교복자빨마수녀회이다.
방유룡 신부가 세운 수도회는 한국인이 최초로 한국에서 설립한 수도회라는, 한국 가톨릭에서 크나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본래 천주교 경성대목구 소속이던 방 신부 역시 교구 사제에서 소속을 변경, 자신이 세운 남성 수도회인 한국순교복회성직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사제가 되어 1957년 종신 서원하였다. 또한, 방유룡 신부가 정립한 복자회의 영성은 한학에 대한 그의 깊은 조예와 가톨릭 신앙의 융합으로 한국적 가톨릭 신앙 사유를 크게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2023년 3월 23일, 교구 시복시성위원회 회의를 열어 브뤼기에르 주교와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방유룡 신부의 시복시성 추진을 공식 선언하였다. 즉, 방유룡 신부의 덕행과 업적은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2. 출생과 성장
한성부 서서 황화방 군기시계 확교동[2]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아버지 방경희와 어머니 손유희 사이에서 육 남매 중 네 번째 자녀로 출생하였다. 방 신부는 명동성당 제3대 주임인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푸아넬(Victor Louis Poisnel) 신부로부터 태어난 지 3일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다.방 신부의 집안은 일찍이 개화한 집안이다. 방 신부의 아버지는 궁내부 주사(宮內部 主事)로서 영국공사관의 통역관이었다. 또한 할아버지 방제원(方濟遠) 프란치스코는 한문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어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 블랑(Marie-Jean-Gustave Blanc)[3] 주교와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방제원은 손자 방유룡의 성직자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인데, 그는 천주교 박해 시대를 직접 체험한 인물로서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자주 손주들에게 전하여 신앙의 모범이 무엇인지를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한학에 정통했던 조부에게 받은 가르침은 나중에 방유룡 신부가 복자회를 통해 고유한 한국적 가톨릭 영성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어린 시절 가정에서 한문과 한글을 배우던 방유룡은 14세에 정동관립보통학교[4] 4학년에 편입했고, 졸업 후에는 미동공립간이농업학교[5]에 진학한다.
3. 신학생 · 교구 사제 생활
미동공립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한 방유룡은, 사제가 될 뜻을 품고 1917년 17세의 나이로 용산예수성심신학교(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소신학생 방유룡은 활달한 개구쟁이였으나, 나이를 먹고 철이 들자 진지해져서 열심히 신학교 생활을 했다. 처음에 방 신학생의 별명은 ‘종로 깍쟁이’였다고 한다. 동료 신부였던 임충신 신부(1907 - 2001, 1931년 수품)에 따르면, 여름방학 때 당시의 일류 건달과 같은 차림[6]을 하고 다녔던 방 신학생을 보고 동료 신학생들은 ‘신학교에서 쫓겨 나가거나 아니면 자진해서 나갈 사람이지 신부는 못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퇴학 위기까지 갔던 방 신부는 모범적인 신학생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두 번째 방학을 보낸 후 달라진 모습으로 학교로 돌아온 방 신학생은 이전과 같은 차림을 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관상생활에 전념하였다고 전해진다.이런 노력으로 소신학교와 대신학교[7]를 모두 무사히 졸업한 후, 방유룡은 1930년 30세의 나이로 사제서품을 받아 천주교 경성대목구(지금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신부가 되었다. 수품 후 강원도 춘천성당의 보좌신부로 사목생활을 시작한 방 신부는 황해도 장연성당, 재령성당, 해주성당과 경기도 개성성당 주임신부를 거쳐 서울 가회동성당, 제기동성당, 후암동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했다.
방유룡 신부는 교구 사제로서도 관상생활에 열심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척박한 환경에서는 사제들에게도 천황 숭배가 강요되었고, 일본 순사들이 미사 현장, 심지어는 고해소에도 침입했다고 전해진다. 별다른 사목활동이 어려운 때, 방 신부는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반대로 사목에 적극적이었던 면모도 있다. 해주본당 주임 사제 시절, ‘세실리아 성가대’를 조직하여 사도신경에 음을 붙인 악보를 직접 만들어 제공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우리말 성가를 알려주어 민족의 혼을 끊기지 않게 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4.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설립
방유룡 신부는 신학생 시절부터 수도생활을 꿈꾸었다. 당시에는 아직 한국인이 세운 수도회가 없었고, 외국에서 한국으로 진출해온 수도회들이 몇 군데 있었다. 1888년 프랑스에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최초로 한국에 진출한 데 이어, 1909년에는 독일에서 베네딕토회가 남자 수도회 최초로 진출해왔다. 신학생 방유룡은 외국에서 진출해온 수도회들을 방문해보기도 했지만, 직접 한국인의 심성에 맞는 한국적인 수도회, 즉 방인 수도회를 창설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깨닫고 나중에 수도회를 창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경기도 개성성당에 부임한 방유룡 신부는 자신이 만났던 성당 신자들 중 수도생활에 뜻이 있는 신앙심 깊은 젊은 여성 신자 두 명을 모았다. 한 명은 과거 해주본당에서 만났던 윤병현, 다른 한 명은 개성본당에서 만난 홍은순이었다. 방유룡 신부는 최초의 복자회 수도자인 이 두 수녀와 함께 1946년 수녀회를 창설하였다.[8] 한국인의 심성에 맞는 한국적 수도회 창설이 목표였으므로, 수녀회의 주보 성인은 당연히 모든 한국 신자들의 귀감이 되는 한국의 순교복자들이었다. 이들에게서 이름을 따 방 신부는 자신이 창설한 수녀회를 ‘한국순교복자수녀회’라고 명명한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파견된 수녀들이 교육을 맡았고, 점점 규모가 커지고 발전되면서 수녀원을 개성에서 서울로 이전했으며, 1951년 교황청의 인가를 받았다. 한국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다녀오는 등의 어려움도 겪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성공을 발판으로 1953년에는 남자 수도회인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설했다. 1957년에는 ‘한국순교복자외부회’라는 재속회를 설립했는데, 세속에서 평신도로 살면서 완화된 수도규칙을 따르는 신자들의 모임이다. 1962년 창설한 ‘빨마회’에는 40세 미만의 독신 여성 신자들, 특히 사별하여 혼자가 된 여성들도 입회하여 수도공동체 생활을 했다. 빨마회는 ‘한국순교복자빨마수녀회’로 발전한다.
5. 수도 사제로서
방유룡 신부는 1955년 10월 7일 자신이 세운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 입회, 1957년 5얼 6일 종신 서원하며 교구 사제에서 수도 사제로 소속을 바꾸었다. 그는 자신의 수도명을 ’안드레아‘라고 정했는데, 이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로부터 이름을 따 온 것이다. 방유룡 신부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상술했듯 1962년 ‘한국순교복자빨마회’의 설립을 윤병현 · 홍은순 수녀에게 허락하며 창설하였다.수녀회와 수도회를 지도하며 방유룡 신부는 아주 고유한 영성 체계를 정립하였다. 한국인의 심성에 맞는 이 영성에는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는 ’면형무아‘ 정신을 수도생활로서 추구할 영성의 정점에 올려놓았는데, 이는 성체에서 밀 제병의 실체는 없어지고 예수님이 오시어 온전한 예수님의 몸이 되듯 자신의 인간적 본성을 없애 자신 안에 온전히 하느님을 담아내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면형무아’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방유룡 신부는 ‘점성정신’을 가지고 ‘침묵‘과 ‘대월’을 실천하는 삶을 강조하였고, ‘침묵’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 지침으로 ’완덕오계‘를 제시하였다.
방유룡 신부는 이러한 한국적 영성과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이 창설한 수도 단체들을 지도하였다. 그는 수도자들에게 한국 민족 문화 발전에 공헌할 것과 한국 고유문화를 보존 연구하는 데 공헌할 것, 그리고 토착화된 한국 그리스도교 정신을 우리 민족에게 전할 것을 천명했다. 그래서 수도자들을 각자의 소질과 취미, 능력에 따라 미술, 음악, 국문학 등 각 부에서 연구시킬 것을 창설 이념에서 명시했다. 현재도 복자회 수도단체는 방유룡 신부의 영성을 기반으로 국내의 성지 · 본당 · 학교 · 피정 · 선교 등 각 분야에서 활발한 사목과 순교자 현양 활동을 펼치고 있다.[9]
방유룡 신부는 1986년 1월 24일,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수도원에서 노환으로 사망(선종)하였다. 그의 장례 미사는 1986년 1월 27일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수많은 복자회 가족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애도 속에 거행되었다.
2023년 3월 23일,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브뤼기에르 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방유룡 신부의 시복시성 추진을 발표하였다. 방유룡 신부의 시복시성 추진을 이끈 업적은 학문적 가치가 큰 고유한 영성의 정립, 한국 순교자 현양 활동의 성과, 최초의 방인 수도 단체 설립 및 해당 단체들의 성공적 지도이다. 이로서 방유룡 신부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존경을 받는 인물임이 명확히 선언되었다.
[1] 서품 동기 중 노기남 대주교가 있다.[2] 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덕수궁 대한문 옆[3] 한국어명 백규삼(白圭三)[4] 현 서울봉래초등학교[5] 현 서울미동초등학교[6] 빳빳한 모시 두루마기, 빳빳한 맥고모자, 금테 안경, 귀또 구두라고 전해진다.[7] 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신학대학)[8] 이 해는 병오박해 100주년이었다.[9] 또한, 복자회 수도 단체들은 마카오, 필리핀, 세네갈, 프랑스 등 해외에서도 사목하며 베트남 출신의 성직수도자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 해외에 한국 가톨릭의 영성을 전하고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한국 순교자를 모범으로 삼아 사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으니, 복자회 수도 단체들은 방유룡 신부의 지침을 지키는 것을 넘어 초과 달성하고 있는 셈이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