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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수/선수 경력/삼성 라이온즈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배영수/선수 경력
1. 개요2. 경력
2.1. 입단 후~2002 시즌2.2. 2003 시즌~2006 시즌2.3. 2008 시즌2.4. 2009 시즌2.5. 2010 시즌2.6. 일본 진출 시도2.7. 2011 시즌2.8. 2012 시즌2.9. 2013 시즌2.10. 2014 시즌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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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수의 삼성 라이온즈 시절 선수경력을 다룬 문서이다.

2. 경력

2.1. 입단 후~200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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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스프링캠프 시절.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았으며[1] 1999년 11월, 팀 고졸신인 역대 최고 계약금이었던 2억 5천만 원을 받고 입단했다.[2] 엄청난 기대를 받고 입단한 그는, 입단 첫 해에는 1군과 2군을 오가며 승리 없이 평균자책점 6점대를 기록하지만, 이듬해인 2001년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해 임창용과 함께 원투펀치로 활약하며 13승을 거두면서 차세대 에이스로 군림했지만, 삼성이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두었던 2002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가 심하게 보이며 주춤했으며 중요한 상황일 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며 지금에서야 의아하겠지만 새가슴 투수라고 불렸었다.[3]

2.2. 2003 시즌~2006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2004)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4 KBO 리그 각종 수상 및 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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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KBO 리그 MVP
2004 KBO 리그 다승왕
2004 KBO 리그 승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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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2005 KBO 리그 탈삼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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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2004년 한국시리즈 4차전 당시의 모습.

파일:배영수 배열사 되던날.jpg
2006년 제1회 WBC에서의 모습.

배영수의 최대 전성기이자, 2000년대 중반 KBO 리그 최고의 토종 선발 투수로, 이 시기의 배영수는 안우진과 더불어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토종 선발 파이어볼러 중 하나[4]로 꼽힌다.[5]

특히,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대구 시민구장을 홈 구장으로 쓰던 투수가 3년 연속 2점대 평균자책점을 찍는 대단한 활약을 펼쳤었다. 물론 이때가 투고타저이기는 한데, 그래도 배영수는 당시 최고의 토종 투수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던 투수였다. 2006년 시즌엔 8승 9패로 비록 10승을 달성하진 못했다 하더라도, 팔꿈치 부상을 가진 상태로 평균자책점 2.92.[6][7] 심지어 후술한 것 처럼 2006년에는 정규시즌 내내 팔꿈치 통증을 달고 뛴 선수의 기록.

2003년 30경기 동안 13승 5패를 기록하면서 임창용과 함께 팀 내 최다 승을 기록하게 되는데, 대신에 평균자책점이 4.51로 높은 편이었던 건 흠.[8]

그리고 2004년 시즌을 앞두고 당시 투수코치였던 선동열의 하체 위주의 투구법을 터득을 하는데, 그 결과 2004년 17승, 2005년 11승을 올리며 2003년부터 3년 연속 10승 이상을 거두며 눈부신 활약을 펼치게 된다. [9]

2004년 35경기 동안 4완투(2완봉) 하면서 17승 2패 평균자책점 2.61로 다승과 승률 부문 1위를 기록하며, 선발 투수로는 1990년 선동열 이후 14년 만에 정규리그 MVP로 선정되었다.[10][11] 특히 한국 시리즈 4차전에서 10이닝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였으나, 팀 타선 또한 한점도 못내는 바람에 0대0 상황에서 연장 11회초 권오준에게 마운드를 넘겨주며 해당 경기의 개인 노히트 노런 기록은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경기는 연장 12회까지 가서 시간 제한[12]에 걸려 0:0 무승부로 끝났는데, 경기 중 권오준이 안타를 맞아 팀 노히트 노런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2005년에는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서 삼진 7개를 잡으며 완봉승을 거두며 여전한 기량을 선보였고, 두번째 등판인 2005년 4월 8일 현대전에서는 비록 2실점 완투패을 하기는 했으나, 탈삼진 14개를 잡으며 2경기 연속 완투를 선보였다. 9회 초 150의 직구를 던지며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이닝을 마무리하는게 이 경기의 백미. 세번째 등판 경기는 2000년대를 지배했던 괴물인 다니엘 리오스와의 대결에선 리오스가 7.2이닝 4실점을 기록하고 본인은 7이닝 무실점으로 승리를 가져갔고, 전반기 말미에 손민한과의 대결에서 1점차 승리를 거두며 에이스 대결에서 모조리 완승을 거뒀다. 이후 전반기까지 전시즌에 이어 다승과 방어율, 탈삼진에서 선두를 치고 나갔지만, 무릎쪽 경미한 부상으로 조금 주춤했고 올스타전 기점으로 엄청난 불운을 겪어 승을 쌓지 못했다. 승리를 따내지 못한 경기중 3실점 이하 경기가 무려 9경기나 될 정도로 부족한 득점지원에 시달렸고, 무실점으로 리드를 잡다가도 접점 상황에 무너지는 경우가 잦았다. 정규시즌 동안 11승을 올리면서 2점대 방어율에 147개의 탈삼진으로 탈삼진왕에 오르며 구위만큼은 여전히 정상궤도를 달렸고, 시즌 말미까지 손민한과 시즌 MVP 경쟁을 했으나 후반기 승수 쌓기에 실패해 정규시즌 MVP는 손민한이 수상했다. 이후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 선봉장 역할을 맡아 팀의 우승을 이끌었으나 이후 코나미 컵에선 제구가 흔들리며 부진했다. 해당 시즌의 활약으로 2006년 제1회 WBC의 국가대표 A팀에 승선했고, 본인은 선발 기회를 적극 어필했으나 정규시즌과 포스트시즌, 코나미컵까지 준비했던 터라 WBC 준비 과정에서 구속이 올라오질 않아 선발 기회는 선배들에게 밀렸다. 그래도 중간계투로 마지막 경기를 제외하곤 무실점으로 틀어막아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특히 1라운드 A조 3경기 일본과의 경기에서 6회말 1사 후 봉중근을 구원하여 올라와 ⅔이닝을 잘 소화한 다음 7회말 일본의 공격 때 선두타자였던 이치로를 초구부터 141km/h짜리 속구를 엉덩이 쪽으로 던져 맞춘 것이 유명해져 배열사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이후 2006년에 역시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섰으나, WBC 후유증으로 인해 다소 부진했고 시즌 초중반 계속 부진한 모습을 보였는데, 구속은 여전히 150km/h를 넘나들었지만 제구가 제대로 되지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후 부진을 떨쳐낸후 다시 정상급 활약을 펼치며 3년 연속 2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 배영수의 장점이던 직구와 슬라이더의 최고 구속도 2006년에 기록됐다.[13] 그러던 어느날 배영수는 팔꿈치 통증을 호소한다. 그러자 선동열 감독은 그런 그를 위해 등판을 늦추거나 하다가 시즌 말미에는 불펜진에 합류시켰다. 한국시리즈에서 2승 1세이브 1홀드를 기록한 배영수(이긴경기 모두 등판)였으나, 경기 후에는 팔꿈치가 안 펴지고 경기에 나서기 전에 진통제[14][15]주사를 맞아야 할 정도로 그의 팔꿈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미 시즌 말미인 9월부터 팔꿈치 통증이 심각해 한국시리즈 엔트리 승선조차 불분명 할정도였다. 그야말로 자신의 팔꿈치와 삼성의 통합우승을 맞바꾼 셈... 이 때 당시의 희생으로 영구 까방권을 획득해 이후 몇 년씩 부진해도 대다수의 삼팬들은 그를 욕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시리즈 후에 토미존 수술을 받게 된다. 그러나 보통 선수들이 팔꿈치 인대가 늘어나거나 일부 손상된 상황에서 수술을 받는데에 비해, 배영수의 팔꿈치는 아예 끊어진 상태로 조브 클리닉 역대 최악의 상태였다고. 수술 소식을 들은 박찬호는 배영수에게 "(재활기간)2년 생각해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게다가 배영수는 선천적으로 간수치가 높아 예정보다 2달 가량 늦게 수술했다. 하지만 선동열 감독은 박찬호의 말을 무시했다.

결론을 내보면 배영수의 전성기라고 볼수있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퍼포먼스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리그 최고의 선발투수였다. 대략 2020년대 안우진과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탯티즈 기준 대체선수 승리기여도는 16.773으로 투수 전체 2위[16][17], 국내 선수 기준으론 단연 1위의 기여도를 자랑한다.[18] 클래식 지표로 보나 세이버메트릭스의 관점으로 보나 그 시절 배영수는 리그 최고의 선발투수였고 그와 경쟁했던 손민한과 다르게 20대 중반에 들어서는 나이라 앞으로의 기대가치도 높아 해외진출이 유력했던 기대주였다. 특히 일본에서 큰 관심을 보였는데, 임창용을 보러왔다가 배영수를 보러가는 경우도 있었고, 배영수에 관심을 갖는 일본 스카우터들이 많았다.[19] 그리고 포스트 시즌에서의 활약까지 더해지며 그 시절 삼성팬들에겐 타자는 이승엽, 투수는 배영수라는 말과 더불어 푸른 피의 에이스라는 상징적인 별명을 붙여주었다. [20]

2.3. 2008 시즌

수술 후 2007 시즌은 재활로 보냈는데, 회복이 빠른데다 팔꿈치 통증이 없어 당초 예상보다 빠른 2008 시즌 전에 복귀했다. 평균구속은 130대 후반으로 떨어지고, 변화구 위주의 피칭을 하게 되었지만 9승 8패 평균자책 4.55로 부상당했던 선수의 복귀 시즌 치고는 괜찮은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시즌 막판 두 번의 선발등판에서 연이어 시속 140km 초반까지 구속을 끌어올리며 좋은 모습으로 시즌을 마무리 했기 때문에 내년 시즌을 더욱더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회복되지 않는 구속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한 해였다.#

2.4. 2009 시즌

잃어버린 10km로 표현하는 그의 구속을 2009 시즌 들어서도 되찾지 않자 자신감을 잃어버렸고, 성적마저 나빠지자 결국 5월, 1승 7패의 상태에서 계투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6월 11일에는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 7월 초 다시 1군에 합류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자, 결국 8월 18일에 시즌 아웃 판정을 받았다.#

2009년 최종성적은 23경기 75⅔이닝 1승 12패 평균자책 7.26.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때 배영수는 야구를 그만두려고 했었다. 하지만...#

옐카에서 배영수가 이때 허삼영 전 삼성라이온즈 감독님의 도움으로 이후 재기하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2.5. 2010 시즌

2009 시즌 말 구속 회복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내용으로 다시 한번 설렘을 줬다.[21]

3월 31일 광주에서 펼쳐진 KIA와의 원정경기에서 시즌 첫 선발등판을 한 배영수는 5이닝 동안 1실점만 하며 무난한 출발을 알렸다. 당시 광주구장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세경기가 모두 우천순연 되었으며, 무등구장 역시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가 이어졌으나 1회와 4회를 제외하면 큰 위기 없이 첫 등판을 치른 모습에서 팬들에게 이번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다소 높이게 했다.

그리고 4월 7일 대구에서 펼쳐진 넥센과의 홈경기에서 7이닝 무실점 완벽투구를 보이며 344일만에 승리투수가 되었다. 2009시즌의 악몽을 떨쳐내는 정말 눈물의 감격투 그 자체였다. 이 기세를 몰아서 4월 13일 잠실에서 펼쳐진 LG와의 원정경기에서도 7이닝 무실점 또 한번의 완벽한 투구를 보이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 때 당시 평균자책점은 무려 0.47! 하지만 이 후 문학 SK전과 대구 두산전에서 각각 5이닝 6실점(4자책), 5이닝 3실점의 내용을 보이며 다소 아쉽게 4월을 마무리 했다.

이 후 5월 1일 대전 한화전에서 5이닝 동안 1실점하며 다시 승리투수를 하면서 좋은 흐름을 찾는가 했는데, 이 후 SK와 두산을 상대로 연속 5이닝 미만 투구로 조기강판되면서 강타선을 보유한 상위팀을 상대로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5월 중순까지의 투구 내용을 보면 위의 기사와 달리 실제로 구속은 회복되지 못했고,[22] 예전처럼 묵직한 구위를 앞세운 속구위주의 투구를 더 이상 보여주기는 힘들기 때문에 기교파 투수로 변신했으나 강타선을 보유한 두산, SK와의 대결에서 다소 애매한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심지어 5월 20일 대구에서 열린 LG와의 경기에서는 1⅓이닝 동안 5실점(4자책)으로 통타당하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결국 계투진으로 강등당하고 만다.

계투진에서도 다소간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서 또다시 부진의 늪으로 빠지는게 아닌가 했던 배영수였지만, 여름이 되면서 구속이 오르자 반등하기 시작했다. 6월 11일 대구에서 열린 넥센과의 홈경기에서 선발 장원삼이 3이닝만에 5실점하며 조기강판되자, 4회부터 마운드에 오른 배영수는 8회까지 이닝을 책임지며 5이닝 동안 3실점의 투구내용을 보여주었다. 당시 등판에서 비록 8피안타(1피홈런)를 허용하기는 했으나, 사사구가 하나도 없으며 어느정도 살아난 구위와 날카로운 변화구로 공격적인 피칭을 하면서 효율적인 투구수로 5이닝을 책임져 준 것이 위안 삼을만한 부분이었다. 이어 6월 16일 사직에서 열린 롯데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 이우선이 3이닝만에 6실점으로 무너지자, 4회부터 마운드에 오른 배영수는 3⅓이닝 동안 3탈삼진 무실점 투구내용을 보여주며 이 후 삼성으로 경기를 가져오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이 경기로 인해 배영수는 3일 뒤인 6월 19일 대구에서 열린 한화와의 홈경기에서 선발로 복귀하여 등판했는데 5이닝 2실점의 투구내용을 보이며 괜찮은 흐름을 계속 이어나가게 된다. 3일만의 등판이었기 때문에 4회, 5회에 피안타가 늘어난 것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선발진 복귀 이 후 4선발 정도의 역할로써 다소 퐁당퐁당하는 피칭을 보여주다가, 7월 15일 대구에서 열린 두산과의 선발로 나온 경기에서 김상수가 5회에만 악송구와 쉬운 땅볼타구를 잡지 못하는 클러치 실책을 두 번이나 하자 '상수야 상수야' 이름 두 번 부르고 괜찮다고 고개 한 번 끄덕이고 다시 돌아가는 대인배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 날 경기에서는 5이닝 동안 3실점(1자책)의 투구를 보이며 시즌 5승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전의 두산전 투구보다 훨씬 양호한 내용을 보여주었기에 남은 시즌의 등판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후 5경기의 선발 등판에서 1번의 ND와 4번의 패전을 떠안게 되는데, 8월 11일 사직 롯데전의 3이닝 7실점을 제외하면 선발로써 최소한의 역할은 해냈지만, 유난히 배영수의 선발 등판 때 상대팀 역시 에이스를 출격시키면서 타선의 지원을 적절히 받지 못한 것이 패를 쌓게 된 부분이기도 했다. 선동열 감독은 이후 배영수를 다시 계투로써 활용하며 컨디션 조절을 하도록 했고, 8월 22일 광주에서 열린 KIA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 차우찬이 3⅓이닝 만에 6사사구를 남발하며 투구수가 폭발하자 다음 투수로 구원등판해 2⅔이닝 동안 4탈삼진 무실점 투구를 하며 시즌 6승을 챙겼다. 특히 전광판에 146km/h까지 찍히기도 했다. 진짜 잃어버린 구속 10km/h를 드디어 찾는 것인가...!

이어 8월 26일 대구에서 열린 두산과의 홈경기에서는 무려 1,852일만에 세이브까지 기록하게 되었는데, 9회 2사 후에 피안타를 허용한 권혁을 구원하러 등판한 배영수는 첫 타자 김동주에게는 안타를 허용했으나, 선동열 감독이 직접 마운드에 올라와 격려한 뒤 다음타자인 최준석을 상대로 바깥쪽에 141km/h 속구를 정확하게 꽂아넣으며 루킹삼진으로 팀의 승리를 지켜내는 세이브를 올리게 되었다. 이 후 시즌 나머지 5번의 선발 및 구원 등판에서는 크게 무너지는 일 없이 무난하게 투구하며, 정규시즌을 마무리했다. 최종 성적은 31경기(선발 20경기, 구원 11경기) 119⅔이닝 6승 8패 1세이브에 평균자책점 4.74를 기록하였다.

4점대 후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전성기 시절보다는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을 치를수록 구속이 140km/h대를 넘기 시작했고 구위 역시 회복하면서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으며, 아직 나이도 만 서른이 안됐으니 제 2의 전성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23]

그리고 포스트시즌에서 배영수는 시리즈 균형을 맞추고 한국시리즈의 희망을 높이는 결정적인 세이브를 올리게 된다.

팀이 시리즈 전적 1승 2패로 지던 10일 1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스코어 8:7로 불안한 리드를 지키고 있던 8회말 2사 3루 상황에서 7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⅓이닝 17투구수 2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고, 한 점차를 지키는 퍼펙트한 피칭을 보여준 배영수는 시리즈 전적 2승 2패를 만드는 중요한 세이브를 따냈다, 이 경기에서 거의 전성기급 구속인 최고 구속 147km/h, 포크볼은 140km/h까지 찍어서 삼성 팬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배영수는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8⅓이닝 5피안타 5사사구 5K 3실점 3자책점 평균자책점 3.24, 1패 1세이브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경기 4⅔이닝 4피안타 3사사구 3K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3.86, 1패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배영수는 2010년 포스트시즌 9경기 중 4경기에 등판하여 13이닝 9피안타 8사사구 8K 5실점 5자책점 평균자책점 3.46, 2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

2.6. 일본 진출 시도

2010 시즌을 끝으로 FA가 되는데, 한신 타이거즈에서 배영수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으나, 한창 좋았던 시절의 배영수만 알고 있는 한신 스카우트 말이나 당시 배영수의 상태를 보면 그저 찌라시에 불과할 가능성이 99%. 그리고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스카우터가 배영수의 피칭을 보기도 했다. 과거 배영수의 가능성을 보고 이런 관심을 보이는 듯.

결국 삼성에서의 잔류를 포기하고 일본프로야구 진출을 시도 중이라고 밝혔다. 영입에 가장 적극적인 팀은 야쿠르트 스왈로즈[24]한신 타이거즈가 있으나 투수진이 전체적으로 강력한 야쿠르트보단[25] 비교적 약한 편의 한신으로 갈 확률이 높았다.[26] 더구나 타격 면에선 한신이 야쿠르트보다 좋은 편.

마침내 결정된 곳은 야쿠르트로, 등번호까지 결정되었을 정도로 계약이 거의 다 되었는데 메디컬 테스트 결과 B형 간염 보균자라는 이유로 계약이 결렬되었다고 한다.[27] 이걸 계기로 배영수는 'B형수', 'B영수'란 별명을 얻었다. 안티들은 배영수가 대구 출신이고 간염 보균자다 보니 상어를 염장하여 구운 경북 대구 음식인 돔배기에 빗대 '돔배영수'로 부르기도 한다.[28]

결국 삼성과 FA계약을 체결했다. 2년간 옵션 포함 총 17억원으로 계약 조항에 해외진출을 원하면 조건없이 보내주는 조항이 있다고.

2.7. 2011 시즌

작년 시즌 부활의 전조를 알리는 모습을 보였기에 팬들 또한 이번에는 부활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시즌을 시작했다.

4월 10일 문학 SK전과 4월 17일 대구 두산전, 4월 23일 목동 넥센전에서 연달아 승리함으로써 내리 3승을 거두었다. 삼성팬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5월 1일 한화전에서 8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고도[29] 팀 타선이 1점 밖에 내지 못해 패전투수가 되었다. 가뜩이나 삼성 자들이 부진한 데다가, 한화 선발투수가 류현진이었는지라... 지못미. 본인은 최선을 다해 던졌기 때문에 아쉬움도 후회도 없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날 경기는 철저히 투수전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5시에 시작해 7시반에 끝나는 기염을 토했다. 타 구장엔 5회말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곳도 있을 정도로.

5월 말까지 벌써 5승이나 올리면서 좋은 성적으로 선발진에 큰 힘을 보태주고 있었으나, 6월부터 슬슬 부진하기 시작하더니 7월 말까지 이 기간에만 승리 없이 3패를 떠안게 된다. 평균자책점도 3점대 중반에서 5점대 중반까지 상승하고 말았다. 사실 이 기간 중에 QS도 2번을 기록했으나 5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조기강판 된 경기 또한 4번이나 되었기에 본인 입장으로서도 매우 아쉬웠을 듯 하다.

그렇게 계속된 부진에 늪에서 헤매이다가 8월 7일 사직에서 펼쳐진 롯데전에서 7이닝 1실점으로 QS+를 기록하며 77일만에 승수를 추가하였고, 명투구를 선보여 팀을 위닝 시리즈로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후 8월 13일 대구 KIA전과 8월 23일 청주 한화전 두 번의 선발등판에서 부진하면서 작년에 이어 시즌 말미에 다시 불펜으로 이동하게 된다. 8월 말 부터 시즌 종료까지 구원등판의 기록은 7경기 등판 11⅓이닝 동안 9탈삼진을 얻으면서 단 3실점(ERA 2.38)했으며, 홀드는 1개를 추가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2승으로 앞선 2011년 10월 28일 문학에서 열린 SK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 팀이 1:2로 뒤진 8회말에 등판하여 정근우에게 안타, 박재상에게 희생번트, 최정에게 유격수 땅볼 진루타를 허용, 2사 3루에서 마운드를 내려왔다. 다음 투수인 권혁임훈을 운 좋게도 3루수 라인드라이브로 잡아내어 이닝을 끝낸 덕분에 배영수의 실점과 자책점은 없었다.

한국시리즈에서 10이닝 노히터를 기록했던 선수가 세월이 흘러 지고 있는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여 3타자만 상대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배영수의 이날 성적은 ⅔이닝 15투구수 1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으로, 이날 경기가 배영수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기가 되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했다.

2.8.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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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26일 7년만의 10승 투수에 오름과 동시에 개인 통산 100승을 기록한 경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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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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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KBO 리그 다승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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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 구단 체제 이후 최초로 8개 구단 상대 승리투수가 된 경기.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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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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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스라 하기에는 성적이 모자라지만 삼성 선발진의 한 축으로 꾸준히 뛰면서 2004년에 이어 또다시 공동 다승왕을 수상했다.

2.10.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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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25일, KBO 통산 120승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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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초에 당시 대구상고의 에이스였던 장준관이 1999년 대구 개막전 시구자로 나서며 이미 1차지명은 장준관으로 정해져 있다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장준관이 계속 슬라이더 위주의 피칭을 했던데다 지명을 앞두고 계약금을 올리고자 미국으로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삼성에선 배영수로 선회했다.[2] 이 금액은 1년 후 대구상고 이정호가 삼성에 입단하며 5억 3000만원이라는 계약금에 입단하며 경신된다.[3] 배영수의 포스트 시즌 통산 성적은 6승, 2홀드, 4세이브 36이닝 평균자책점 1.5으로 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최고의 포스트 시즌 퍼포먼스를 보인 투수였다.[4] 박동희, 김용수, 선동열같은 사례들은 너무 옛날이라 선발-마무리로 스윙맨으로 뛰던 사례이다.[5] 평균구속 약 145km/h, 최고구속 155km/h를 던졌으며 2020년대인 현 시점 기준에서도 대략 박세웅, 데이비드 뷰캐넌과 엇비슷한 구속으로 KBO 전체 선발 중 상위권, 토종 선발 중 최상위권인데 배영수는 이걸 20년 전에 해냈다. 삼성에서 스터프가 제일 좋은 원태인보다도 순수 스터프는 더 위.[6] 2007년 윤석민, 2008~2009년 봉중근, 2012년 류현진, 2015~2016년 메릴 켈리원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팀 타선 지원을 받지 못했다. (2006년 득점지원율 0.97) 무려 1점도 되지 않는다![7] 뻥뻥 터지던 삼성의 타선은 이상하게도 배영수가 등판하던 날엔 버로우탔다. 문제는 현재까지도 그런다는 거. 그러나 2013년 드디어 타선지원을 받게 되는데 이번에는 평균자책점이 꽤 높다.[8] 다만 2003 시즌에는 50홈런을 기록한 선수들 덕분에 타고투저 경향이 있는 건 감안해야 한다.[9] 선동열이 직접 자신보다 낫다, 자신의 후계자다,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에이스. 라고 평가했던 유일한 투수로 항상 중요한 경기엔 배영수를 투입하며 선동열은 배영수를 개개인으로선 정말 아꼈었던걸로 보인다. 배영수도 존경하는 사람으로 선동열 감독을 꼽는다. 다만 그로인해 빛만 보일것같던 그의 커리어가 팔꿈치 인대가 박살나며 처절하게 내리막을 향해버린건 넌센스.[10] 전체 투수로는 선동열 이후 배영수가 받기 전까지 1996년 구대성이 구원 투수로 정규리그 MVP에 오른 적이 있다.[11] 이후로 2008년까지 매년 투수가 MVP를 수상하게 된다. 순서대로 손민한(롯데)-류현진(한화)-다니엘 리오스(두산)-김광현(SK)[12] 2004년 당시에는 경기 시작 후 4시간을 넘기면 새 이닝을 시작할 수 없고 바로 무승부로 처리되는 규정이 있었다. 결국 2004년 한국시리즈는 이러한 규정으로 인해 무려 9차전까지 가는 등 역대 한국시리즈 중 제일 길게 간 시리즈였고, 무승부가 제일 많은 시리즈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단점으로 인해 경기 후 4시간을 넘기면 무승부로 처리되는 규정은 2004년 한 해에만 시행되고 사라졌다.[13] 직구 155km/h, 슬라이더 144km/h[14] 흔히 대포주사라고 알려진 데포메드롤. 이 주사는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박철순도 맞은 적이 있다.[15] 그런데 대포주사에는 스테로이드 계열의 물질인 메틸프레드니솔론이 포함되어 있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로 분류되는 일반적인 약쟁이들이 즐겨찾는 계열은 아니나 소염효과가 강력해서 치료목적으로 자주 이용되던 약물이다. 하지만 염증이 자연스럽게 치유되면서 가라앉는게 아니라 부상이 그대로 남은채로 염증만 가라앉기 때문에 선수의 몸을 망가뜨린다. 그 때문에 현재는 금지되어있다.[16] 1위는 17.80의 다니엘 리오스로 금지약물 복용자를 제외하면 전체 1위.[17] 144경기로 환산시 전성기 3년의 기여도 총합은 18.778로 연평균 6을 뛰어 넘는다.[18] 특히 커리어 하이인 2004년의 RA9-WAR은 7.00을 기록했으며 21세기에서 이를 넘는 우완 투수는 2022년의 안우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18년동안 이를 넘어선 우완 투수는 없었다. 심지어 144경기 체제가 아닌 128경기 체제에서 쌓은 값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2011년의 윤석민의 커리어하이 시즌보다도 높다.[19] 이는 2011년 일본 리그 계약 직전 스카우터들의 언급에서 드러난다. 당시 스카우터들이 전성기 시절 배영수를 기억하는데, 구속을 회복하던 배영수를 과거 임창용의 사례처럼 긁어보려 했던 경우였다. 계약 직전까지 갔었으나, 메디컬 테스트에서 B형 간염 보균자인 사실이 밝혀지며 최종 불가 판정을 받아 계약이 성사되진 못했다.[20] 이후 부상으로 인한 부진과 기력 쇠퇴가 큰 상황에서도 이 시절을 겪은 팬들은 영원한 에이스라고 부르며 그의 부활을 염원했다.[21] 정말 구속회복만 된다면 삼성은 선발 걱정할 문제가 없으니...[22] 안 되는 경우와 되는 경우의 비율이 절반 정도? 자세한 건 토미 존 문서에서 수술 부분을 읽어 보도록. 임창용이 특이한 경우.[23] 08, 09 시즌과 비교해봤을 때 피홈런 개수가 준 것이 부활의 가능성을 보인 요소 중 하나이다.[24] 임창용의 야쿠르트행을 주선했던 매니저와 만났다고 한다.[25] 주요 선발진으론 이시카와 마사노리(13승 8패), 사토 요시노리(12승 9패), 타테야마 쇼헤이(12승 7패), 무라나카 쿄헤이(11승 10패) 등이 있고 주요 불펜진으론 마츠오카 케니치(34홀드), 마스부치 타츠요시(20홀드), 오시모토 타케히코(16홀드), 임창용(35세이브) 등 리그 수준급의 투수가 넘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주전경쟁 하기가 영 쉽지 않을 것이다.[26] 어디까지나 비교적이다. 최소한 선발로는 쿠보 요시모토(14승 5패), 제이슨 스탠드릿지(11승 5패)가 있고 불펜진으론 쿠보타 토모유키(28홀드), 니시무라 켄(14홀드), 후지카와 큐지(28세이브)가 있다. 어딜가든 쉽지않다.[27] 원래 배영수는 선천적인 이유로 간 수치가 높다고 한다. 그것때문에 2006년 시즌끝나고 수술을 미룬것.[28] 기존 위키는 돔배기가 상어를 삭힌 경상도 음식이라 하였으나 주로 경북 대구 지역서 염장한 상어고기를 구워 주로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이다. 돔배기는 경북 영천이 유명하다.[29] 장성호에게 맞은 투런홈런도 실투가 아니었을 정도로 좋은 볼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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