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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제3번(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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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뮤직 매거진 선정
20대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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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저명한 현역 지휘자 151명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 20개를 설문조사한 결과 목록이다.
<rowcolor=#000,#e5e5e5> 순위 곡명 작곡가
<colcolor=#000,#e5e5e5><colbgcolor=#fff,#000> 1위 교향곡 3번 <영웅> 루트비히 판 베토벤
2위 교향곡 9번 <합창> 루트비히 판 베토벤
3위 교향곡 41번 <주피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4위 교향곡 9번 구스타프 말러
5위 교향곡 2번 <부활> 구스타프 말러
6위 교향곡 4번 요하네스 브람스
7위 환상교향곡 엑토르 베를리오즈
8위 교향곡 1번 요하네스 브람스
9위 교향곡 6번 <비창> 표트르 차이콥스키
10위 교향곡 3번 구스타프 말러
11위 교향곡 5번 <운명> 루트비히 판 베토벤
12위 교향곡 3번 요하네스 브람스
13위 교향곡 8번 안톤 브루크너
14위 교향곡 7번 장 시벨리우스
15위 교향곡 40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6위 교향곡 7번 루트비히 판 베토벤
17위 교향곡 5번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18위 교향곡 2번 요하네스 브람스
19위 교향곡 6번 <전원> 루트비히 판 베토벤
20위 교향곡 7번 안톤 브루크너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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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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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 생애 인간관계(베토벤의 여인들불멸의 연인) 이야깃거리 작품 세계
베토벤의 교향곡
초기
1번
중기
2번 3번 "영웅" 4번 5번 "운명" 6번 "전원"
7번 8번
후기
9번 "합창" 10번 (미완성)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초기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7번 8번 "비창" 9번 10번
11번 12번 13번 14번 "월광" 15번 "전원"
중기
16번 17번 "템페스트" 18번 19번 20번
21번 "발트슈타인" 22번 23번 "열정" 24번 "테레제를 위하여" 25번
26번 "고별" 27번
후기
28번 29번 "함머클라비어" 30번 31번 32번
베토벤의 협주곡
초기
피아노 협주곡 1번 피아노 협주곡 2번
중기
피아노 협주곡 3번 피아노 협주곡 4번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피아노 협주곡 6번 바이올린 협주곡
삼중 협주곡
후기
(해당 없음)
베토벤의 다른 작품
초기
아델라이데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 "봄" 바이올린 소나타 제7번 피아노 트리오 제4번
중기
피델리오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크로이처" 첼로 소나타 3번 엘리제를 위하여 에로이카 변주곡
후기
대푸가 디아벨리 변주곡 장엄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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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제3번 내림 마 장조 작품번호 55 영웅
Sinfonie Nr.3 Es-dur op.55 “Eroica”
Symphony no.3 in E flat major, op.55
‘Eroica’
창작 시기 1802년 - 1804년
작곡 루트비히 판 베토벤
장르 교향곡
초연일 1805년 4월 7일
초연 장소 오스트리아

1. 개요2. 작곡 배경3. 초연 및 출판4. 곡의 형태
4.1. 관현악 편성4.2. 1악장4.3. 2악장4.4. 3악장4.5. 4악장
5. 가필6. 평가 및 의의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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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1982년 4월 30일 베를린 필 100주년 공연 실황[1]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지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이 교향곡은 착상과 처리가 아주 힘차며, 그 양식은 숭고하며, 시적인 영감을 품고 있다. 이 교향곡을 들을 때 나는 헤아릴 길 없는 깊은 고태(古態)적 슬픔에 잠긴다”
- 엑토르 베를리오즈 #
“교향곡 제3번은 완벽한 인격에서 우러나온 작품이며, 감정의 유연성과 정력적인 힘이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완성에의 정진이야말로 이 작품의 영웅적 성격을 뚜렷하게 하는 것이다”
- 리하르트 바그너
교향곡 제9번의 완성을 앞두고, 쿠프너[2]가 베토벤에게 8개의 교향곡 중 가장 맘에 드는 곡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3번이라고 답했다. "c-minor가 아니고요?" 베토벤은 다시금 딱 잘라 말했다. "아니오, 에로이카요."

1. 개요

1804년에 작곡된 베토벤의 세 번째 교향곡으로 베토벤의 중기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이다. 당시까지 작곡되었던 고전기의 교향곡과는 너무나 다른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구성과 거대한 규모를 가진 작품이며, 교향곡 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촉발시킨 명작이다.

현재까지도 이 교향곡은 음악 역사상 최고의 교향곡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으며 2016년 <BBC Music Magazine>에서 전세계 저명한 현역 지휘자 151명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을 설문조사한 결과[3]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이 1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2위는 합창 교향곡.

2. 작곡 배경

베토벤은 2번 교향곡을 완성한 후인 1803년 5월경부터 이 곡의 작곡에 착수했고 1804년 초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 곡에 대한 구상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1790년대 후반부터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곡이 완성된 후 처음 표지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성인 Bonaparte의 이름이 쓰여 있었는데, 작곡 당시에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생각이 있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 교향곡에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이 붙었던 것은 1798년경 당시 빈 주재 프랑스 공사였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베토벤에게 나폴레옹에게 교향곡을 하나 써서 헌정해보는게 어떻겠소?라는 제안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루돌프 크로이처[4]로부터 베르나도트의 제안을 전달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불확실하지만[5] 다만 두 사람이 나폴레옹에 대해서 대화를 몇차례 나눈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베토벤의 제자이자 비서 역할을 했던 페르디난트 리스에 따르면 이 교향곡의 아이디어는 작곡자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베토벤은 본에 있었던 시절부터 프랑스 대혁명의 열기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새로운 시대를 구현해 줄 영웅을 기리는 작품을 쓰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이후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장악하고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각지에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퍼뜨렸는데, 이를 지켜본 베토벤을 나폴레옹을 혁명의 기조인 '자유, 평등, 우애' 를 구현해줄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공화주의보다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 등의 독재적인 행보가 계속되자 베토벤은 점차 나폴레옹의 진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영웅 교향곡을 작곡할 때까지는 여전히 나폴레옹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고 심지어 베토벤은 이 교향곡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면서 빈을 떠나 파리로 옮길 생각까지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이 마침내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자 이런 계획들은 모두 취소되었다. 페르디난트 리스의 회고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의 즉위 소식을 베토벤에게 처음 전한 것이 바로 리스 본인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황제가 다 뭐야? 결국엔 그도 사기꾼에 불과했어!"라고 온갖 욕을 퍼부으면서 정성들여 작성된 악보의 표지를 확 찢어 버렸다고 한다.[6]

리스에 의하면 이 때 찢겨나간 표지는 자필보가 아니라 필경사가 작성한 필사보의 표지였다. 하지만 자필보에서도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지워 버린 것이 이후에 확인됐는데, 거칠게 긁혀 지워진 것을 보면 베토벤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7][8]

결국 이 교향곡에 최종적으로 붙여진 제목은 Sinfonia Eroica(교향곡 영웅)이었으며 이후 영웅 교향곡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3. 초연 및 출판

파일:영웅 교향곡 초판 표지.jpg
교향곡 제3번 초판 표지

1804년에 일단 곡을 완성한 뒤 같은 해 6월 9일에 자신의 후원자였던 로브코비츠 공작의 집에서 소규모로 편성한 악단으로 비공개 리허설과 연주가 이루어졌다. 로브코비츠 공작은 이 곡의 초연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이 곡의 초연을 위해 자신이 운영하는 궁정악단 외에 22명의 연주자를 추가로 고용했으며 당시에(심지어 지금도) 생소했던 3대의 호른이 제대로 활용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이와 같은 노심초사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베토벤은 이 곡을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헌정했다.

공개 초연은 1805년 4월 7일에 빈의 테아터 안 데르 빈에서 작곡가 본인의 지휘로 이루어졌는데, 워낙 규모가 크고 파격적인 형태의 작품이라 청중들은 다들 어리둥절 했으며 전작 교향곡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심지어 베토벤을 옹호하던 진보적인 비평가들도 '곡이 너무 길고 난해하기 때문에 연주시간을 좀 줄여야 한다'고 우려섞인 평을 내놓았다. 한편 3악장의 경우 다른 악장에 비해 너무 짧아서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자존감의 사나이 베토벤은 이런 여론에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다만 곡의 규모가 너무 커서 연주가 힘들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렇다고 축소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절대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상기한 로브코비츠 공작 집에서의 비공개 초연을 다룬 BBC제작의 2003년작 TV영화가 있는데, 전대미문의 혁명적인 곡을 처음 듣게된 소수의 감상자와 연주자들의 음악적인 충격과 초연당시에 귀족들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 곡의 급진적인 정치적인 분위기에 대한 반응을 비교적 흥미롭게 그렸다.(영화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 실제 단원들이 일부 출연해서 연주(연기)했고 사운드트랙은 존 엘리엇 가디너가 지휘했다) [9]
제목: Eroica (2003) / 감독: Simon Cellan Jones / 주연: Ian Hart / 제작: BBC


영화 후반부에 초연에 참석한 하이든이 이 곡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베토벤에게 자기처럼 영국에 가면 크게 환영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10]

비공개 초연때만 해도 이 곡에는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이 곡을 처음 들은 귀족들이 받았을 충격은 한층 더 컸을 것이다. 하필 구체제의 상징이었던 도시 빈의 한복판에서 혁명과 자유를 외치는 작품이 연주되었으니.

이 곡의 출판은 초연보다 좀더 늦은 1806년 10월에 이루어졌다. 전술했다시피 이 곡은 표지와 관련해서 말고 많고 탈도 많았던 작품이었는데, 이 작품이 정식 출판되었을 때 표지에는 'Sinfonia Eroica(교향곡 영웅)'라는 제목 밑에 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 un grand'uomo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영웅 교향곡")이라는 이탈리어어 부제를 붙였으며 그 밑에는 로코비츠 공작에게 헌정한다는 헌사가 적혀 있다.

작곡자가 특별히 이 부제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은 관계로 현재까지도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4. 곡의 형태

4.1. 관현악 편성

일단 악장 구성은 일반적인 교향곡들과 마찬가지로 4악장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스케르초 형식의 3악장을 제외한 다른 악장들의 규모가 이전의 교향곡들보다 훨씬 커지고 형식적으로도 엄청난 파격이 가해지고 있다. 연주 난이도가 급상승한 것은 덤. 또한 리듬 변화와 잦은 전조, 불협화음, 대위법적인 전개 등을 통해 기존의 고전파 음악에서 볼 수 없었던 역동적이고 격렬한 음향을 구현하고 있다.

관현악 편성은 다음과 같다. 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3/트럼펫 2/팀파니/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오케스트라 규모도 크게 확대되었는데,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큰편은 아니지만[11]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전례 없이 큰 규모의 편성을 요구하고 있다. 우선 호른이 두 대가 아니라 세 대가 쓰인 것이 눈에 확 띄고 있다. 물론 선배인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도 호른을 네 대 사용한 교향곡을 남기고 있지만 상당히 드문 경우이며 더군다나 이렇게 홀수 단위로 쓴 예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거의 없다.[12] 이 세 대의 호른의 역할 분담도 주목할만한데, 세 대 모두 같은 조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1번이 최고음, 3번이 중고음, 2번이 저음 이렇게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 세 대가 모두 함께 운용되는 경우가 있지만 때때로 3번 호른이 1,2번과 독립적인 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1악장 재현부에서는 1번 호른이 F조로 잠시 이조한 후 다시 Eb조로 크룩을 갈아낄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서 3번이 한동안 실질적인 1번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콘트라베이스가 첼로와 독립적으로 연주된다는 점도 기존 고전파 교향곡과 다른 점이다.

전체 연주시간은 대략 45~55분 사이이며 시대연주 성향을 가진 지휘자들은 48분 이내로 빠르게 연주하는 반면 지휘자에 따라서는 곡의 분위기에 맞춰서 훨씬 느리게 연주하기도 한다.

1악장 - Allegro con brio (활기차게 빠르게) - E♭장조
2악장 - March funebre : Adagio assai (매우 느리게) - C 단조
3악장 - Scherzo : Allegro vivace - trio(빠르고 생기있게 - 트리오) - E♭장조
4악장 - Finale : Allegro molto(매우 빠르게) - E♭장조

4.2. 1악장

1악장은 일단 서주 격으로 두 번 꽝꽝 때려주고 시작하는데,[13] 주제 두 개를 던져주는 것은 고전 시대와 마찬가지지만 그 주제를 주물러대는 전개부는 무려 200마디를 훨씬 넘을 정도로 확장되어 있다. 이 전개부에서는 처음에는 기존의 1주제와 2주제를 잘 버무리며 곡이 진행되던가 싶더니 어느새 장7화음이라는 불협화음이 등장한 후 제3주제가 제시된다.

길이만 길어진게 아니라 리듬의 파격도 상당한데 기본 리듬은 3/4박자지만, 곳곳에 짝수 박자의 흐름을 갖는 악구가 삽입되어 박자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스코어를 펴놓고 보면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이며 대부분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는 이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협화음이 난무하게 된다.[14] 이 외에도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과감한 불협화음[15]과 잦은 조바꿈 등으로 거의 폭력적인 인상까지 주고 있다. 선배들인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경우에도 몇몇 교향곡들의 전개부에서 다양한 조바꿈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대개 원 조성의 4도 혹은 5도권 이내에서 왔다갔다 하는 정도였고 이렇게까지 길고 터프한 전개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주제를 다시 내놓는 재현부나 마무리짓는 종결부도 기존의 것과 달리 많이 변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변주가 되어 확장된 부분이 있다든가, 또는 전개부에서 제시된 제 3주제 또한 종결부에 다시 등장시킨다든가 하는 등 전체적으로 소나타 형식이 매우 확장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본래 Eb장조는 신성한 존재를 찬양하거나 엄숙하고 거룩한 분위기를 가진 곡에 쓰였던 장조인데 이 조성을 인간의 영역으로 가지고 내려왔다는 데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1악장의 첫 번째 주제는 탄호이저 서곡이나 좀 과하게 보면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에서도 그 단편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져 있다. 전반적인 형태는 모차르트의 후기 3대 교향곡 중 하나인 39번 교향곡의 1악장과도 매우 비슷하다.

4.3. 2악장

2악장은 '장송 행진곡(Marcia funebre)'이라고 작곡자가 직접 부제를 붙여 놓았는데, 부제에 어울리게 1악장의 강렬하고 달아오른 기분을 한번에 주저앉히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갖고 있다. 2악장의 기본적인 형식은 당시 장송행진곡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세도막 형식(A-B-A)인데,[16] 물론 이 장대한 악장이 3부 형식을 그대로 따를 리는 없고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상당히 복잡한 구성을 갖고 있다.

1주제와 2주제의 조성이 다른데, 처음 등장하는 1주제는 C단조인 반면 17마디에 등장하는 2주제는 Eb장조이다. 장송행진곡 답게 기본적으로 슬프고 어두운 정서를 유지하고 있지만 중간에 C단조와 나란한 조성인 C장조로 전조되면서 한층 밝아진 분위기로 고조된 후 슬프고 우울한 1주제가 다시 등장한다. 후반에는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강음을 시작으로 한 결코 암울하다고 볼 수만은 없는 매우 드라마틱한 악구가 등장한다. 느린 악장에 단조 조성을 사용하는 것은 이전에도 꽤 자주 볼 수 있던 시도였지만 이 정도로 비극적인 분위기를 큰 규모로 확대해서 감정 이입을 시도한 예는 없었다.

이 장송행진곡의 반주에서 등장하는 소위 "운명의 동기"는 이후 5번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한다. 교향곡 5번의 3악장인 스케르초의 착상이 1803년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이 악장을 가리켜 나폴레옹의 몰락과 죽음을 예견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베토벤 자신은 이에 대해 딱히 언급한 바가 없다. '영웅'이라는 다분히 마초적인 이름을 붙인 교향곡의 2악장이 하필 장송행진곡인 이유에 대해서는 베토벤 당대부터 많은 관심과 논란을 일으켰고 편지나 필답에서 많은 지인들이 베토벤에게 이에 대해 문의한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베토벤은 '알아서 판단하라' 정도의 답변 외에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4.4. 3악장

3악장은 전형적인 베토벤 스타일의 스케르초이며 2악장의 비통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4분음표 세 개를 한 박으로 취급하는 셋잇단음표가 연속되면서 한층 더 속도감이 느껴지며 저음역에서 지속적으로 북소리와 비슷한 리듬감을 제공하면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3악장에서 인상적인 것은 중간의 트리오에서 본격 등장하는 3대의 호른인데, 이 호른이 등장하면서 그간의 긴장감과 속도감이 넘쳤던 분위기가 차분한 분위기로 바뀌게 되며 호른은 팡파레와 같은 선율을 연주하면서 계속해서 트리오 부분을 주도한다. 트리오가 끝난 후 갑자기 박자가 확 바뀌면서 다시 처음의 주제와 분위기가 재현된 후 마무리된다.

4.5. 4악장

4악장은 특이하게 변주곡 형식으로 되어 있다. 보통 영웅교향곡 하면 1악장과 2악장이 많은 주목을 받는데, 이 4악장도 만만찮게 예사롭지 않은 악장이다. 음악적으로만 보면 오히려 4악장이 가장 파격적이고 주목할 요소가 많다고 주장하는 음악 전문가들도 많다.

4악장의 분석 영상이다.[17]


4악장의 맨 처음에는 분위기 환기를 위한 지속적으로 하강하는 강렬한 음향으로 시작한다.[18] 이후 분위기가 바뀌면서 조용하게 주제가 제시되는데,이 4악장의 주제는 다른 곡을 재활용하는 경우가 적었던 베토벤답지 않게 기존에 사용했던 주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 4악장의 주제는 비인 초기에 작곡된 WoO 14의 '12개의 원무곡(Contredanses)'중 7번 곡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이후 춤곡인 Op.43의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마지막곡과 Op.35 '피아노를 위한 에로이카 변주곡'에서 활용되었으며 다시 이 영웅 교향곡의 4악장의 주제로 다시 활용되고 있다.
파일:eroicasymphony4ththeme.jpg
4악장의 주제

이 주제가 특별한 것은 고음부의 주선율 뿐만 아니라 반주에 해당되는 저음부의 선율도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Op. 35의 에로이카 변주곡은 일종의 서주(overture) 개념으로 처음에 저음부의 선율이 먼저 주제로 제시되고 3개의 변주가 등장한 후에 고음부의 주제가 등장하는데, 이 영웅교향곡 4악장에서도 에로이카 변주곡과 마찬가지로 저음부의 선율이 먼저 등장해서 잠시 전개가 이루어진 후 본격적으로 고음부의 주제가 등장한다.

변주는 대략 8~12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19] 당시의 통상적인 변주곡과는 상당히 다른 수법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변주 중간에 푸가가 두 번 등장하는 것이 이채로운데, 처음 등장하는 푸가는 C단조로 전조된 형태로 등장하며 두 번째 푸가는 고음부의 선율과 저음부의 선율을 동시에 활용하는 이중푸가의 형태로 진행된다.

또한 주제 전체를 변주하는 통상적인 변주법 대신 주제의 일부 요소(선율 일부나 리듬, 음정 등)만을 취해서 변주하는 방법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역시 Op.35 에로이카 변주곡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던 수법이다. 이런 변주 수법을 흔히 '성격 변주'라고 하며, 중기 이후 베토벤의 변주곡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작법으로 자리잡는다.

4악장 마지막 부분은 잠시 잦아 들었다가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강렬하게 몰아치면서 웅장하고 화려하게 끝을 맺는 전형적인 '베토벤 피날레'를 보여주고 있다.

5. 가필

베토벤 교향곡 연주에 있어서 금관악기 가필 문제는 항상 논란거리다. 베토벤 시대의 호른과 트럼펫 같은 금관악기는 밸브나 피스톤 그딴거 없이 오로지 입술과 호흡의 조절만으로 얻어지는 배음만 낼 수 있었다.[20] 때문에 낼 수 있는 음이 제한적이었고 지금처럼 다양한 음들을 쓸 수 없었다.

영웅 교향곡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부분은 1악장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첫 주제를 투티(총주)로 연주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곡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주 효과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실제 베토벤이 쓴 악보에는 이 부분에서 첫 주제를 트럼펫이 세게 연주하다가 갑자기 버로우하고 훨씬 음량이 약한 목관악기들이 계속 이어받는 식으로 쓰여져 있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내추럴 트럼펫으로 이 선율을 끝까지 제대로 연주하는 것이 불가능하긴 한데, 악보대로 연주한 음반을 들어보면 굉장히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항목 맨 처음에 있는 카라얀의 연주 영상에서 14분 25초~14분 40초의 부분과 악보대로 연주한 아르농쿠르 연주의 15분 5초~15분 20초의 부분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바로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웅교향곡 1악장(아르농쿠르)

이후에 금관악기에 밸브가 도입되면서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호른과 트럼펫이 모든 음을 연주할 수 있게 되자 이 부분에서 트럼펫이 목관악기로 넘어간 부분까지 모두 연주하도록 가필하는 것이 일반적인 연주법이 되었다.[21] 트럼펫 뿐만 아니라 호른 파트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등의 지휘자는 호른까지 보강해서 이 선율을 연주하기도 한다.

이 부분 외에도 베토벤의 관현악곡에서는 당시 금관악기들이 지금처럼 모든 음표를 다 연주할 수 있었다면...하는 부분들이 곳곳에 있다. 때문에 이전 세대 지휘자들의 경우 이런 부분들에서 음악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호른 등을 보강하여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 이전 녹음들에서는 금관 가필이 없는 연주를 찾아 보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과거 말러의 경우 이러한 문제점을 참지 못하고 아예 곡 전체의 금관악기 파트를 재편곡 개념으로 뜯어고쳐 공연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헤르만 아벤트로트, 칼 슈리히트, 샤를 뮌슈, 아르투르 로터, 로린 마젤, 마리스 얀손스 등이 이 곡에서 비교적 적극적으로 금관의 가필을 적용한 지휘자들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영국을 중심으로 작곡된 시대의 양식 고증을 시도하는 시대연주가 붐을 일으키면서 이런 가필이 작곡자의 의도를 그르치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일부 음악학자들은 앞서 언급된 1악장 마지막 부분에서 베토벤이 나폴레옹의 그릇된 행보를 풍자하기 위해 일부러 금관을 주저앉힌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시대연주 지휘자들 가운데서도 이 부분이 나폴레옹의 몰락을 상징한다면서 악보대로 연주하면서 일부러 트럼펫의 버로우를 강조해서 연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곡이 작곡되고 완성된 시기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으로 베토벤이 한창 나폴레옹을 숭배하던 시기였고, 곡이 완성된 후에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이 격분해서 악보의 겉장을 찢었지만, 곡 자체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 다만 어떤 영웅을 다루는 곡의 이야기 구조에서 생각한다면 바로 다음의 느린 악장이 장송행진곡이기에 '영웅의 쓰러짐'을 묘사하는 쪽이 설득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베토벤이 하도 악필이라 남아 있는 자필보는 낙서인지 악보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다. 그래서 출판된 악보들도 편집자나 출판사에 따라 저마다 상이한 부분이 종종 발견되는데, 1990년대 후반에 조나단 델 마의 편집으로 간행된 베렌라이터 음악출판사의 악보에는 4악장에서 현악기만 연주하는 첫 변주가 현악 파트 전체가 아닌 파트 당 한 명씩 현악 3중주나 현악 4중주 형태로 연주하라고 지정되어 있는 등 새로운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 있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 물론 델 마의 연구와 편집에 비판적인 여론도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현재는 이런 시대연주 음악학자들의 날선 비난의 칼날을 피해가기 위해서 가필없이 악보대로 연주하는 지휘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다. 마젤이나 얀손스처럼 그딴 비판에 상관없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가필을 추가해서 연주하는 지휘자도 있지만...

6. 평가 및 의의

애초에 이 교향곡의 제목 영웅(에로이카)[22]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가 엄청난데 제목에 걸맞게 베토벤 특유의 격렬함과 마초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이다. 이 영웅은 이 교향곡뿐만이 아니라 베토벤의 중기 스타일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볼 수 있는데, 중기의 작품 상당수가 '마초적', 또는 '폭력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음향과 에너지가 넘치고 있다. 그래서 베토벤의 중기 시기를 흔히 '영웅 시기'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영웅교향곡은 초연 당시부터 청중과 음악인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놀라움을 선사했으며 교향곡의 역사에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온 작품이다. 이 영웅 교향곡은 기존 고전파 음악의 특징이었던 화성을 바탕으로 한 간결한 구성, 협화음 위주의 깔끔한 음향의 구현,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수법 등 정형화된 작법을 통해 천편일률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작법을 완전히 버리고 대위법의 전폭적인 적용과 대담한 화성법 및 불협화음, 전조와 리듬의 변화 등을 통해 훨씬 복잡하고 격정적인 음악을 구현하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음악 전문가들은 이 교향곡을 '최초의 낭만주의적 교향곡'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영웅교향곡 이후 교향곡은 더 이상 귀족들의 여흥이나 특정 행사를 위한 부수음악이 아니라, 작곡가의 개인적인 사색과 작곡 역량을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이고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 교향곡이라는 장르와 형식을 정립한 사람이 하이든이었다면, 교향곡을 작곡가의 음악적 역량, 철학을 발휘해낼 대표 장르로 만든 사람이 바로 베토벤이었고 바로 이 영웅교향곡이 그 시초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교향곡은 베토벤의 본인에게도 음악적으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변화는 베토벤의 청각 장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801년부터 본격 악화되기 시작한 청각장애로 인해 베토벤은 큰 정신적 고통을 겪었고, 심지어 자살을 생각하고 유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위기를 어렵게 넘긴 베토벤은 자신의 고통을 음악을 통해 극복할 것이며 앞으로 그 누구와도 다른 음악을 쓰겠다고 결심했는데, 바로 이 결심이 영웅 교향곡을 비롯한 중기의 중요한 명작들을 낳는 바탕이 되었다. 청각 장애로 인해 사람들과 소통이 힘들어진 베토벤은 좀더 자기 내면의 세계에 집중했고 이 덕분에 좀더 개성적이고 자신의 내면적 감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내면적인 창작욕에 당시 유럽을 휩쓸던 거대한 기운인 외면적인 영웅 '나폴레옹'에 대한 기대감이 결합되어 이 곡의 탄생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베토벤 입장에서) 그 영웅은 진정한 유럽의 구원자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져서 좌절감을 안겨줬지만.

전술한 쿠프너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베토벤 본인은 평생 이 곡을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작곡가의 이런 자부심은 현재까지도 유효한데, 역사상 최고의 교향곡을 꼽을 때 본인이 나중에 작곡한 합창 교향곡과 더불어 반드시 거론되는 교향곡이 바로 이 영웅 교향곡이다. 이 영웅교향곡은 지금도 수없이 많이 연주되고 해석되고 녹음되어 베토벤의 홀수번 교향곡의 높은 인기를 입증하고 있다.

7. 기타

파일:Eroica record(Psycho).png

* 2023년 11월 24일 대구시립교향악단 제500회 정기연주회에서 동년 11월 12일 사망한 제10대 상임지휘자인 줄리안 코바체프를 추모하는 의미로 2악장을 연주하였다.

[1] 소문으로는 100주년을 기념하여 베토벤 9번을 연주하려 했으나 막판에 곡이 바뀌어 단 한 차례 리허설만 진행하고 들어간 공연이라고 한다.[2] Christoph Kuffner(1780~1846), 오스트리아의 시인. 베토벤의 합창 환상곡(Op.80)의 가사를 써준 이력이 있다.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완성한 후 다음 작인 합창 환상곡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협주에 성악을 믹스하는 신선한 형식을 시도했고, 이 곡에서 얻은 자신감과 경험이 합창 교향곡의 바탕이 되었다.[3] 자세한 내용은 교향곡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4] 베토벤에게 크로이처 소나타를 헌정받은 그 크로이처가 맞다.[5] 베르나도트는 빈 주재 공사 시절부터 나폴레옹과 살짝 어긋나는 행보를 보였으며 스웨덴 왕이 된 후에 나폴레옹의 몰락을 방관했기 때문에 그가 베토벤에게 교향곡을 쓰라고 했을 정도로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다.[6] 이후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극도로 싫어하였으며 이 문제 때문에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 공작과도 절교하게 된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인간관계 항목 참조.[7] 베토벤의 생애를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도 베토벤이 직접 악보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모습을 담은 장면이 나온다.[8] 얼마나 분노한 상태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지워버렸는지 종이에 구멍이 다 날 정도였다고. 이 구멍이 난 흔적은 지금도 잘 보관 되어 있다고 한다. #[9] 이 영화에서 영웅 교향곡의 초연에 앞서 7분 43초부터 연주되는 곡은 베토벤의 곡이 아닌, 모차르트의 곡인 String Serenade No.13 "Eine Kleine Nachtmusik" 세레나데 13번 중 3악장이다.[10] 다만 하이든이 실제로 이 곡의 비공개 초연에 참석한 것은 아니며 단지 영화상의 설정일 뿐이다. 많은 음악팬들이 1809년까지 생존해 있었던 하이든이 이 파격적인 곡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해 하는데, 아쉽게도 하이든은 1800년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아 음악활동을 거의 중단한 상황이었으며 이 곡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영화에서도 하이든은 노쇠하고 많이 아픈 상태로 등장한다.[11] 현대음악까지 갈 필요도 없이 베토벤 말년에 완성된 합창 교향곡만 봐도 영웅 교향곡에 비해 편성이 훨씬 커진다. 합창 교향곡의 오케스트라 편성은 현재 기준으로도 상당히 큰 규모이다.[12] 굳이 홀수로 사용한 예를 찾자면 말러 교향곡 제1번에서 호른이 7대 사용되었다. 그런데 말러 교향곡 1번도 첫번째 버전에서는 호른이 네 대였다. 이후 개작하면서 7대로 증강했다.[13] 일단 이것만 해도 엄청난 파격. 베토벤을 가르쳤던 하이든의 교향곡과 비교해봐도 일단.../ 레너드 번스타인은 그의 영웅교향곡 해설에서 1악장 서주의 두 번의 타격을 제우스가 내리는 천둥과 벼락 및 북유럽 신화토르의 망치(묠니르)의 강타에 비유한 바 있다.[14] 하지만 이 덕분에 곡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 거의 무한정으로 뿜어나온다.[15] 대표적으로는 곡의 중간에 유니즌을 통해 등장하는 장7화음과 일명 호른 조크가 있다. 오케스트라가 Eb장조의 속7화음에 해당하는 화음을 트레몰로로 연주하고 있을 때 호른은 여기서 Eb장조의 멜로디를 그대로 연주해버린다. 사실 이 부분 직전에 등장하는 트레몰로 화음들도 보통 고전적으로 잘 쓰이는 화음은 아닌 불협화음들이 난무한다 [16] 이 3부 형식은 바로크 시기부터 유행했던 다카포(da capo) 아리아에서 즐겨 사용되었던 형식이며 이것이 기악곡을 비롯한 다른 장르의 음악에도 확대 적용된 것이다. 이 3부 형식은 단순하고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서 성악곡에 적용하기 매우 쉽기 때문에 오늘날 대중음악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17] 이 영상에서는 주로 4악장에 등장하는 두 개의 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18] 후에 작곡된 합창 교향곡의 4악장에도 이와 같은 시끄럽고 강렬한 음향이 등장한다.[19] 통상적인 변주곡처럼 작곡자가 직접 제 1변주, 제 2변주 이런식으로 구분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분석에 따라 변주곡의 갯수가 달라질 수 있다. 참고로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10개의 변주로 구분해 놓았다.[20] 호른의 경우는 손으로 바람을 조절하여 좀 더 많은 음을 낼 수 있었다.[21] 가필된 트럼펫의 선율은 보통 클라이맥스 직전에 등장하는 호른의 선율을 따른다.[22] 정확히는 '영웅적인'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Eroico의 여성형 Ero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