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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18:52:17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이 남긴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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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 생애 인간관계 이야깃거리 작품 세계
베토벤의 교향곡
1번 C장조 2번 D장조 3번 E플랫 장조 ‘영웅’ 4번 B플랫 장조 5번 C단조 ‘운명’
6번 F장조 ‘전원’ 7번 A장조 8번 F장조 9번 D단조 ‘합창’ 10번(미완성)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7번 8번 9번 1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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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번 27번 28번 29번 30번
31번 32번
* 대중들에게 유명한 소나타는 굵은 글씨로 정렬
베토벤의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1번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 협주곡 제3번 피아노 협주곡 4번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삼중 협주곡 C장조
베토벤의 다른 작품
대푸가 디아벨리 변주곡 아델라이데 엘리제를 위하여 장엄 미사
피델리오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 '봄' 바이올린 소나타 제7번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크로이처' 첼로 소나타 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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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베토벤의 숨겨진 딸?3. 베토벤의 사인은 매독인가 납중독인가4. 베토벤의 성격과 질병
4.1. 작곡4.2. 무시무시한 피아노 레슨4.3. 가정부들
5. 일과6. 메모광 베토벤7. 천하의 악필 베토벤8. 수학과 지식에는 문외한
8.1. 베토벤이 배운 지식들
9. 베토벤의 생가10.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베토벤빠 로맹 롤랑11. 즉흥 연주의 달인 베토벤12. 시대연주의 어려움13. 연주 속도는 빠르지만 작곡 속도는 느렸던 베토벤14. 첫 프리랜서 음악가 베토벤15. 정치적으로 악용된(?) 베토벤16. 공포스러운 얼굴17. 흑인 여부 논란18. 음식 취향19. 형편없는 요리사20. 커피 애호가21. 스트레스 해소22. 잦은 이사

1. 개요

음악사 불멸의 거장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남긴 화제거리도 굉장히 많다.

다만 베토벤과 관련된 에피소드 중에는 과장/왜곡/창작된 것들도 많으니 상큼한 일화라고 해서 덥썩 믿지는 말자. 그래도 흥미가 있다 보니 클래시컬로이드의 베토벤처럼 각종 매체에서 일화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2. 베토벤의 숨겨진 딸?

베토벤의 일생이 본격 연구되면서 베토벤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논쟁이 끊임없이 오르내렸는데, 2010년대 이후 그에게 사생아 딸이 있었다는 주장이 점점 유력해진다. 바로 베토벤과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 백작부인 사이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젤마 아리아 코르넬리아 미노나 폰 슈타켈베르크(Maria Theresia Selma Arria Cornelia Minona von Stackelberg, 애칭은 미노나(Minona), 1813.04.08.~1897.02.27.)라는 딸이 태어났다는 것. 여기서 미노나가 태어난 지 8일 후 요제피네의 방에서 이뤄진 유아세례를 할 때 지은 풀네임 중 마리아 테레지아는 요제피네의 언니이자 미노나가 태어나는 것을 도와준 대모 테레제의 이름들 중 하나이고, 젤마 아리아 코르넬리아 중 젤마는 후술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언급된 젤마 축제, 아리아는 자신의 갈망을 부정하고 연인과의 교제를 포기하려고 노력하면서 단검으로 자신을 찌르는 강한 고대 로마인, 코르넬리아는 고대 로마에서 자녀를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한 요제피네의 롤모델에서 따왔다.

베토벤에게 딸이 있었느냐는 논쟁은 불멸의 연인 떡밥과도 큰 관련이 있다. 공식적으로 미노나는 출산 당시 요제피네의 남편이었던 에스토니아의 하급 귀족인 크리스토프 아담 폰 슈타켈베르크(Christoph Adam von Stackelberg)의 딸이라고 발표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크리스토프 아담 폰 슈타켈베르크는 요제피네의 아이들을 강탈해서 폭군 아버지로 여기기도 하지만 스위스 교육자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에게서 영감을 받은 정치 개혁가로 농부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에스토니아어를 홍보했기 때문에 에스토니아 역사에서 국가 학교 시스템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링크
파일:external/euterpe.blog.br/Minona_Stackelberg-218x300.jpg 파일:Beethoven Letronne.jpg
미노나 폰 슈타켈베르크(Minona von Stackelberg)의 35세 때 사진(왼쪽)과 44세의 베토벤의 초상화(오른쪽)를 비교해보면 광대뼈와 작은 입술, 꽉 닫은 입, 아래쪽으로의 응시한 눈이 닮은 듯하다. 게다가 둘 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성격도 괴짜였다. 하지만 미노나가 정말로 베토벤의 사생아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사진은 베토벤의 다른 초상화(링크, 한글 기사)와도 비교된다.

하지만 이 사람은 부모가 이혼했다가 재결합했을 때 태어났으며, 요제피네의 남편 슈타켈베르크는 1810년부터 에스토니아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살고 1812년 1월과 10월 단 두 번만 방문했으며, 미노나가 잉태되었다고 추정되는 날이 1812년 7월 3일인데 이때 프라하에서 남편 없이 있던 요제피네가 베토벤과 잠깐 만났고 이후 베토벤은 나중에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만나게 되는 보헤미아의 테플리츠(Teplitz, 현 체코 테플리체·Teplice)로 갔다는 설이 있고, 특히 동년 말 요제피네와 베토벤은 테플리츠에서 확실히 만나 다시금 잠깐 동안 연애를 한 적이 있고, 둘째 딸을 낳은 이후 건강 문제 때문이라며 슈타켈베르트과 일절 동침하지 않았던 요제피네였기에 이 미노나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자식이 아니냐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거기에 재결합을 줄기차게 요구했던 슈타켈베르크가 갑자기 떠나버렸고, 하필 베토벤의 유명한 편지인 '불멸의 연인'도 이 시기에 씌어진데다 두 사람이 만난 시기와 미노나가 태어난 시점 간의 기간이 9개월 6일로 통상적인 가임기간과 일치하고, 요제피네가 이름을 지었다는 설과 요제피네의 언니 테레제가 이름을 지었다는 설이 둘 다 있긴 하지만 어쨌든 둘 중 하나가 지어준 흔치 않은 미노나(Minona)라는 이름이 'Anonim(Anonym=익명)'을 거꾸로 한 것[1]이라는 민간어원이 있고, 미노나는 3세기경 갈리아의 전설적인 눈 먼 켈트 시인 오시안(Ossian)의 시에 나온 '음악가의 딸'인데다가 아이들에게 지어준 이름들은 다 상징적인 의미를 담는다는 정황이 이 의혹을 더욱 부추긴다. 이름을 지어준 아이들의 상징과 관련해서는 요제피네가 문학 교육을 받았고 후술할 요제피네가 수학교사 안드리안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인 에밀리에의 이름은 장 자크 루소의 에밀에서 따온 것이라는 가설이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친분이 있었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오시안의 시의 한 구절인 '오시안의 노래: 왜 나를 깨우는가'를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시에 미노나라는 등장인물과 젤마라는 축제가 언급된다. 슈타켈베르크가 이 사실을 알면 당시 관습에 따라 베토벤에게 결투를 신청할 수 있다는 것 등으로 인해 요제피네테레제가 이 사실을 철저하게 숨겨왔기 때문에 베토벤은 죽을 때까지 미노나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모를 가능성이 있지만, 1813년 4월 8일 미노나가 태어난 당일 베토벤의 일기에 따르면 자금조달을 위해 그라츠에 아카데미를 설립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누군가에게 묻고, 또 다른 편지에서는 "아, 나는 빈을 떠나야 할 거야"라고 적혀있으며 그것을 실행한 건 아니지만 동년 여름 이후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는데 다만 잦은 이사는 후술하듯이 다른 이유도 있다. 또한 이 시기 쯤부터 늘 잘 차려입던 베토벤이 갑자기 초라한 모습을 하고 수입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금액의 돈을 빌려서 왜 갑자기 그가 큰 돈을 필요로 했는지는 미스터리인데 이때 요제피네를 물질적으로 도왔다는 설이 있고, 베토벤의 동생이자 조카인 칼의 아버지인 카스파르가 당시에는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칼의 친권에 대해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귀족의 사생아라서 자신의 아이에 대해 친권을 주장하기 힘드니 조카의 친권으로 대신한 게 아니냐는 설이 있고, 1819년에 슈타켈베르크가 자신의 세 아이를 빈으로 잠깐 데려갔을 때 미노나는 당시 6살이었는데, 이 시기 쯤의 테레제의 일기에는 미노나가 요제피네의 아이들과는 달라보였다고 생각했는지 "아이가 이상하게 발달했어요. 그녀는 아름답지는 않지만 강인하고 언니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녀를 가정교사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자매들 중에서 가장 천재적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라고 썼고, 비슷한 시기 때의 베토벤의 대화수첩에서 누군가가 베토벤에게 "당신은 그 여자의 남편이 그의 아이들 중 음악적 재능을 가진 아이가 당신의 아이라고 의심할 정도로 그녀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합니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있고, 1820년 1월에는 "단 한 번 실수를 저질렀다고 아버지에게서? 과거에도 아버지였고, 지금도 아버지다? 아이들을 앗아갈 수는 없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당시 사람들은 베토벤을 반미치광이로 여겼기 때문에 베토벤의 헛소리 중 하나라고 치부[2]되긴 하지만 1816년 베토벤과 요제피네가 바덴에서 만났다는 것이 입증[3]되었기 때문에 혹시 베토벤이 이 사실을 안 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테레제가 미노나에게 이런 사실을 고백했지만 파장을 우려하여 세상에는 일절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혔다가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를 위시한 많은 베토벤 연구가에 의하여 비로소 이런 의혹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954년 폴란드의 지크문드 카즈넬슨(Siegmund Kaznelson)도 미노나가 베토벤의 사생아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지만 입증된 건 아니다. 당시 요제피네의 정신이 멀쩡하지 않았다는 반론이 있기는 하나, 이렇게 추측에 불과함에도 이 설은 흥미롭기 때문에 음악학자들 사이에선 거의 기정사실로 취급하고, 사실인지 아닌지와 관련 없이 음악학자들이 많이 연구하는 주제 중 하나이다.

요제피네가 슈타켈베르크와 재결합할 때 슈타켈베르크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요제피네를 떠날 수 있으며 이때 자녀들 양육권도 자신이 갖는다는 조건을 붙였다. 요제피네는 이후 1813년 4월 초 언니 테레제도움으로 미노나를 낳았지만 당시 산후우울증 때문인지 제정신인 상태가 아니라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않아 테레제 등의 주위 사람들이 미노나를 농부에게 염소를 빌려 염소젖을 먹이면서 키웠다. 이후 1813년 5월 슈타켈베르크가 요제피네에게 에스토니아로 가자고 하나 요제피네가 거부하자 1814년 5월 갑자기 나타나 경찰에 고발하고 미노나, 마리 폰 슈타켈베르크, 테오필 폰 슈타켈베르크를 남편의 알력으로 빼앗기게 된다. 슈타켈베르크는 이때 아이들을 바로 에스토니아로 데려가지 않았고 당시 빈에 있던 보헤미아에서 온 신부에게 맡기고 자신은 여행을 떠났다. 그 뒤 슈타켈베르크 남작이 18개월이 된 미노나와 함께 아이들을 에스토니아로 데려간다. 링크, 기사. 1814년 둘의 결혼 생활은 사실상 파탄이 나게 되고 요제피네는 홀로 첫 남편의 소생인 네 자녀들을 키우면서 생활고와 실의에 빠져 있다가 성격마저 비뚤어져 버리고, 설상가상으로 이 와중에 카를 에두아르트 폰 안드레한-베르부르크(Karl Eduard von Andrehan-Werburg, 보통 안드리안(Andrian)으로 알려짐)라는 수학교사에게 빠져서 1815년 9월 16일 오두막에서 몰래 사생아인 에밀리에(Emilie)를 낳기도 했다. 안드리안도 슈타켈베르크가 결투를 신청할 수 있다보니 쫓겨나 에밀리에를 데려가 혼자 키웠지만 에밀리에는 2살때 죽는다. 이 에밀리에에 관해서는 2007년에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에 이 이전 연구에서는 미노나가 요제피네의 막내딸일 것이라는 언급이 많으나 이후에는 사장되었다. 이후 1821년 42세의 젊은 나이로 쓸쓸하게 죽는다.

미노나가 정말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딸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미노나는 작곡이나 피아노 연주에 소질이 있었다고 하지만 특별히 전업음악가로 활동하지는 않았으며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에스토니아의 도시 탈린과 타르투에서 살다가 1841년 슈타켈베르크가 사망한 후 자매 마리아 라우라(Maria Laura)와 함께 당시 미노나의 이모(요제피네의 여동생) 샤를로테 텔레키 폰 세크(Charlotte Teleki von Szék) 백작부인이 살던 Hosufalău(현 루마니아 Satulung)로 이사한다. 1843년 마리아 라우라가, 이후 얼마 안 가 샤를로테 텔레키 폰 세크 백작부인이 죽자 빈으로 가서 숙녀의 동반자(Lady's companion)로 일했는데 쉽게 말하면 친구 없는 상류층 부인의 친구로 지내는 직업이다. 발트 억양으로 말했고 괴짜로 여겨졌다. 링크. 1856년과 1858년에 야회에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났는데, 공교롭게도 리스트베토벤의 제자 카를 체르니의 제자다. 1897년 2월 27일 85살에 폐렴으로 죽었다. 마지막 거주지는 Habsburggasse 5의 Casa Cavriani이고, 빈 중앙 묘지에 묻혔다. 링크. 베토벤 연구가 세이어가 1884년에 미노나를 직접 만났을 당시, 그녀는 자신이 베토벤의 딸이라는 사실을 매우 자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노나가 그것에 대해 아는 이유는 태어날 당시 요제피네는 양육을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언니 테레제가 가르쳐 주었기 때문으로 보인다.[4]

그래서 그녀가 실제로 베토벤의 딸일 가능성은 주류 역사학계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만, DNA 검사가 이루어진 건 아니므로 정설은 아니다. 이 때문에 이 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DNA 검사를 하자고 꾸준히 주장한다. 링크(댓글), 링크 2. 하지만 브룬스비크 가문에서는 요제피네의 명예 때문에 베토벤과 미노나의 연관성 사이를 부인하고, 어차피 미노나의 무덤을 파헤친다 해도 유해에는 어머니 요제피네로부터 물려받은 미토콘드리아만 있을 것이기 때문에 베토벤과의 DNA가 일치한 지 알아보기 힘들다. 링크(오스트리아의 음악학자 미하엘 로렌츠(Michael Lorenz)의 블로그(영어)), 링크 2(헝가리어).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실제 미노나의 어머니 요제피네가 진짜 불멸의 연인인지도 불명이다.

빈이 사랑한 천재들에 따르면 이 책의 저자가 직접 미노나의 묘지에 찾아간 적이 있는데, 묘지의 관리인도 그 묘지가 베토벤의 딸의 묘지라는 걸 몰랐다고 한다. 링크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숨은 딸'이라는 주제가 나름 흥미를 끌자 독일과 프랑스와 합작으로 1996년에 Minona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또한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이한 2020년 1월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유리 레인버러(Jüri Reinvere)가, 같은 Minona라는 제목으로 오페라를 만들었고 그게 독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초연됐다. 링크. 오페라를 만들게 된 계기는 그가 사는 탈린에 미노나가 몇 백년 전에 살았기 때문이다.

2018년 5월 13일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부분에 대해 다뤘다.

그 외에도 베토벤요세피네의 언니 테레제 브룬스비크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주장은 현재까지 풍문 이상의 근거는 없다.

이 말고도 루트비히 판 베토벤 본인이 1570년대 이후의 사생아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다. 기사, 기사 2. 다만 베토벤 자체는 사생아가 아니다.

3. 베토벤의 사인은 매독인가 납중독인가

베토벤의 사인, 그리고 귀머거리가 된 원인은 당시에 창궐하던 매독과, 매독 치료로 인한 수은 중독이라는 정설이었고 카드뮴 중독 등의 설도 있는데 머리카락을 분석한 결과 납중독이었다고 연구가 뒤집어졌다. 1999년 미국 시카고의 한 연구소에서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분석한 결과 정상인의 80~100배인 평균 60ppm의 검출되었다. 기사. 또한 2006년 두개골 파편을 분석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왔다. 기사. 결정적으로 당시의 독일 및 오스트리아인들의 납 농도가 베토벤의 그것과 비슷해야 하는데 그런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베토벤이 애주가와인 마니아라는 것을 든다. 납 중독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든다.

중독은 청력장애를 일으키기도 해서 베토벤이 이 때문에 청각장애를 얻게 된 게 아니냐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18세기 당시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수인성 전염병이 돌기 쉬웠는데 이때 유행한 장티푸스로 인한 후유증, 발진티푸스 후유증, 동맥경화로 인한 청각기관의 혈관 폐색, 귀경화증(이경화증)(cochlear otosclerosis), 홍역 후유증, 알코올 의존증, 내이염, 청신경염, 사르코이드증, 청각 트라우마, 결핵, 전신 홍반성 루푸스 등 다른 도 많다.

청각장애와 관련해서는 아니라고 밝혀진 설도 있다. 우선 대뇌매독설은 매독은 건강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고 수주일 내에 청력뿐만 아니라 기억력, 인지능력, 언어능력까지 잃게 되기 때문에 1999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중이염은 전음성 난청을 일으키는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귀에서 진물이나 고름이 나왔거나 귀에 통증을 느꼈다는 언급이 없어 이 사장되었고, 메니에르병은 청력이 서서히 쇠퇴되는데 이것도 베토벤이 심한 어지럼증 발작을 호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 사그러들었고, 골 파제트병은 두개골의 한쪽이 두꺼워지는 병으로 청신경을 눌러 청각장애를 일으킬 수 있지만 20대보다는 나이가 더 든 사람에게 주로 생기고, 두개골이 골고루 두꺼워졌기 때문에 아닌 것으로 보인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감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칠 때 소리를 진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전음성 난청을 일으킬 수 있는 이경화증으로 주로 추정한다. 또한 청신경 손상도 유력한데 청신경이 손상되면 저음보다 고음을 못듣는데, 후술하듯이 베토벤이 청력을 잃기 시작한 초반에는 고음을 잘 못듣는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납중독은 행동과잉증(hyperactivity)이나 폭력적인 행동 이상을 부를 수도 있다. 기사

그런데 이 중독만이 확실한 사인은 아니라는 반론도 많으며, 발진티푸스, 전신성 홍반성 결절 등의 면역 장애, 손거스러미라는 설도 있다. 또한 납중독이 외형적 사인일지라도 실질적으로는 후술하듯이 간경변의 전형적인 증상과 합병증이 있었기에, 해당 간경변이 직접적 사인으로 추정된다.

한편 베토벤의 외할머니는 알코올 중독자 였고, 부친도 자신의 아버지의 부업인 와인 사업 때문인지 알코올 의존증으로 사망했는데, 베토벤 역시 만만찮은 술꾼이었다. 한꺼번에 폭음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베토벤은 아버지처럼 되기 싫었던 모양인지 20살까지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가 나중에 조금씩 장시간에 걸쳐 마시는 것으로 간다. 문제는 그래도 몸에 술이 들어가는 건 똑같기 때문에 그도 역시 알코올 의존증 수준으로 된다. 베토벤 사후 해부 도중에 밝혀진 바로는 과음으로 말미암은 손상이 심하고 반으로 축소되어 굳어져 있었다고 한다. 기사. 알코올성 간경변에 특징적인 소결절성 간경화가 아닌, 대결절성 간경화이긴 하지만 소결절성 간경화도 심해지면 대결절성 간경화로 갈 수 있고, 만년에 황달로 고생한 것을 보면 과음으로 인한 간손상이 분명 그의 사망에 일정 부분 원인 제공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비장도 비대해져 있었는데 이것도 간경변의 합병증 중 하나이다. 기사

단, 베토벤의 청력상실과 사인이 매독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가 평생 독신이기는 했지만 금욕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26세 때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은도찰요법을 실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수은은 성병 치료 뿐만이 아니라 피부병 등 당시 다양한 치료제로 쓰였다. 또한 40대 들어서는 프란츠 슈베르트마찬가지로 가끔 사창가에 가거나 친구로부터 접대부를 소개받은 적이 있고, 성병은 그 당시에도 부끄러운 병이었기 때문에 후술할 안톤 쉰들러가 대화노트의 거의 반 이상을 없애버리고, 부검 소견서가 조작되었는데 적어도 임질같은 성병이 있지 않았냐는 이 있다. 이렇게 안톤 쉰들러가 대화노트를 없앴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기록이 남았기 때문에 이런 추정이 있는 것이다. 우선 선술했듯이 머리카락에서는 당시 매독 치료제인 수은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적어도 매독에 걸린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2023년에 베토벤의 납중독 사인에 대해 종지부를 찍을만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Genomic analyses of hair from Ludwig van Beethoven, 한글 기사. 베토벤의 머리카락으로 알려졌던 샘플 중 납 농도가 높았던 샘플이 여성의 머리카락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기존의 통설이 시료의 오염으로 인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생겼다. 해당 연구에서는 베토벤이 유전학적으로 간질환이 있었을 것을 암시하는 유전자 분석 결과와 함께 B형 간염 바이러스 감염 상태였던 것을 확인했고, 이것이 지나친 알코올 섭취 등과 함께 간질환으로 발전하여 사망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4. 베토벤의 성격과 질병

이 문서와 여기에 자주 나오듯이 베토벤은 과격한 성격에 술버릇 문제가 있던 아버지 요한에 의해 학교 수업을 빼먹어 제대로 못 다닐 정도로 혹독하게 음악 교육만 집중적으로 받았고, 삼형제 모두 요한 때문에 심한 고생을 했기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은 했지만 별로 슬퍼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별로 좋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보면 부친에 대한 기억은 평생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베토벤은 개구쟁이인데다 동네에서 또래들과 놀 때 골목대장 노릇을 하면서 닭과 달걀들을 서리했고,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살짝 곰보에다 어깨는 넓어서 친구들이 '몽골대왕'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성미가 급하고, 다혈질이라 툭하면 친구들에게 주먹질을 해대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동생들한테 폭력을 휘둘렀고, 조카 칼을 강압적으로 대했으며 말년에는 정말로 성격이 파탄자 수준으로 고집불통이며 신경질적인데다가 괴팍해 결국 본인도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의외로 젊었을 때에는 성격이 나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젊었을 때, 친절해야 할 때에는 친절했기에 베토벤의 여인들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결혼까지 간 적은 없지만 당시 청각장애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과 많이 사귀었다. 게다가 40대 때인 1812년 자신을 숭배하는 10살 난 소녀 에밀리에(Emilie, 요제피네의 사생아와는 동명이인)가 팬레터를 보냈을 때 자상하게 답장해줬다. 이 에밀리에는 손수 뜨개질한 작은 가방을 베토벤에게 선물하며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등 위대한 작곡가들과 나란히 베토벤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이때 답장에서는 그 가방을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의 표지들 사이에 보관했다며, 자신은 그들과 비교하기에는 분이 넘치다는 투의 표현을 하고, 예술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고, 자만하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말년에 성격이 심각하게 괴팍해진 이유는 선술했듯이 17살 때 어머니가 죽은 영향으로 우울증을 앓고, 20대 초반부터 장티푸스 합병증으로 추정되는 하복부 통증에 시달리고, 31세에 청각장애가 나타나 42세 때에 청력을 완전히 잃는 등 오랜 투병 과정에서 신경질적이고 우울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링크

선술했듯이 베토벤은 잦은 질병에 시달려 거의 움직이는 병동이었다. 기사. 어릴 때에는 천연두, 1797년 연주여행 중 베를린에서 걸린 '심한 설사병'(장티푸스로 추정), 이후에도 복통, 설사, 이와 교대해서 일어나는 변비 등의 위장장애를 겪는다. 1801년 때 왼쪽 귀부터 청각장애가 나타나 의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청력 문제에 대해 언급했으며 친구인 아멘다와 베겔러에게 난청을 고백하고 높은 음이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했고, 그 다음 해인 1802년에는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쓸 정도로 악화되고, 1809년에는 심한 열병에 걸린 적이 있고, "나의 약한 청력"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고, 이듬해인 1810년 "다른 사람들과 정상적인 대화를 하기가 어렵다."는 글을 일기에 남기고, 웅웅거리는 소리 때문에 귀에 면 털실을 사용했다고 말하고, 1812년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야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청력이 악화됐고, 1814년에는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는데 "아마도 자신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듯했다. 포르테 부분에서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피아노를 세게 두들겨 대었으며, 피아노 부분에서는 너무 부드럽게 쳤기 때문에 소리 자체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라는 슈포어의 진술이 있고, 이때 웅웅거리는 소리들이 더 커져 나팔형 보청기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1818년에는 보청기를 사용하고도 대화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안톤 쉰들러의 증언이 있고, 이때부터 노트에 글을 써서 의사소통 하기 시작했다.

1820년 조카 양육권 재판에서는 "나는 청력에 장애가 있기 때문에 대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진술한 적이 있다. 이듬해인 1821년 7월에는 "황달이 아주 심해졌다."는 글이 있어 이 시기때 쯤 간경변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기사. 1822년 오페라 피델리오의 연습 지휘 중 청력에 장애가 있어 중단이 된 적이 있는데 이때에는 청력이 거의 손실된 상태였다. 1823년에는 "내 위장은 항상 위험한 상태다."는 글이 있고, 심한 눈병이 난 적이 있다. 1824년에는 9번 교향곡 초연을 할 때 청중의 박수소리를 잘 듣지 못했는데 이에 대한 일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 카핑 베토벤이 있다. 이 시기의 궂은 날씨를 힘겨워했는데 "위장이 거의 못 쓰게 되었고, 혀는 노란색으로 변했고, 변비까지 겹쳤다."는 글을 남기는데, 진한 설태로 인해 혓바닥이 노래지는 것은 간기능이 저하된 사람의 대표적인 증세이다. 이때 겨울부터 코피와 토혈이 시작된다. 1825년에는 "침에서 피가 섞여 나오나 코로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러한 증상은 작년 겨울에도 있었다. 위장은 점점 약해지는 듯하고 심한 설사가 있다. 장의 염증. 갈수록 몸이 쇠약해지는 듯하다."는 글을 남겼고, 이때 황달이 더욱 더 심해져 신체적·정신적으로 황폐해지기 시작했으며, 연구팀은 이때 청력을 완전히 잃은 것으로 본다.

이 시기 쯤 조카에게 "귓병이 좋아진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라는 편지를 쓴다. 코피와 토혈은 전문가들에 따르면 간경변의 후유증 중 하나인 식도 정맥류 파열로 추정된다고 한다. 1826년에도 "나는 류머티즘과 통풍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 왔다."라는 글도 있다. 간 부위에 동통이 생긴다. 또한 "형 베토벤은 식욕이 떨어져 삶은 달걀 외에는 거의 먹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주는 계속 마셨고 설사도 자주 했다. 배꼽은 점점 더 커져서 오랫동안 붕대를 감고 있었다. 12월이 되면서 그는 더욱더 식욕을 잃고 갈증과 복부 불쾌감을 호소했다. 발도 부은 상태였다."라는 동생의 증언이 있다. 이때 의사가 "화끈거리는 얼굴, 각혈, 질식의 위험, 왼쪽 편의 찌르는 통증"을 근거로 폐렴진단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심한 황달이 있었고 간은 딱딱해져 있었으며 결절이 만져졌다. 복수가 차서 배가 탱탱한 상태였다."라는 글도 있다.

이때 12월 20일부터 첫 번째 복수 천자술을 받아 25파운드(약 11Kg)의 복수를 빼내고, 1827년 2월까지 복수 천자를 4번 시행했는데 1827년 2월 27일 마지막 시술에서는 "복수가 방 한복판을 향해 솟구쳐 침구가 젖었고, 바늘을 삽입할 때마다 엄청난 양의 고름이 흘러나왔다."라며 복수 천자 중 복막이 감염되었는지 복수에도 감염 징후가 나타났으며, 황달이 심해지고, 3월 4일부터 간성뇌증 증상이 생겨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고, 3월 24일 종부성사를 받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3월 25일부터 간성뇌증으로 인한 혼수로 추정되는 의식 저하가 일어나고 간기능부전으로 3월 26일 오후 5시경 결국 사망한다.

부검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심한 간경변, 만성 췌장염, 비장염,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고 한다. 기사. 두개골의 두께는 평균 0.5인치로 보통 사람들보다 두꺼웠으며, 왼쪽이 오른쪽보다 심하게 청신경이 매우 가늘어져 있고, 청신경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에 동맥경화 소견이 있었는데 매독 같은 만성 염증에 의한 혈관염 소견은 없었다. 위축된 제8번 뇌신경, 전정신경 등이 발견됐는데, 8번 뇌신경은 청력과 관련이 있다. 기사

4.1. 작곡

청력이 약해진 베토벤은 나팔처럼 생긴 보청기를 꼈는데 이 때문에 청력 손상이 더 심해졌다는 얘기가 있다. 청력이 완전히 손실된 말기에는 악기를 연주할때 생기는 진동을 느끼며 작곡했다.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는 피아노 뚜껑에 귀를 대고 진동을 느끼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얇은 막대같은 걸 물고 악기에 대서 느껴지는 미묘한 진동을 토대로 작곡했다고 나왔다. 나중에 이를 안 악기 제작사가 피아노 줄이 그대로 보이는 피아노를 보내줬다.

4.2. 무시무시한 피아노 레슨

베토벤은 신세진 귀족들의 자제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곤 했는데, 자신의 아버지처럼 꽤나 엄격하게 가르쳤다. 맘에 안들면 30cm자로 손등을 내려치기도 했으며, 심하면 어깨를 물어 뜯은 적도 있다. 요하임이란 독일 음악학자의 견해로는 베토벤이 자기가 어렸을 때 혹독하게 당한 체험을 복수하는 것이라고. 그나마 유달리 친절히 대해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피아노 교본 체르니로 유명한 카를 체르니다. 체르니의 가장 유명한 제자가 리스트이니 베토벤과 리스트는 체르니로 인해 연결된다. 체르니는 뛰어난 피아노 실력이 있었지만 너무 내성적인 성격이라 연주회를 거의 갖지 않았다. 또한 후술하듯이 베토벤을 처음 봤을 때 무섭게 생겨서 울었다.

4.3. 가정부들

그리고 베토벤 본인이 쓴 일기장을 보면 집안일을 하던 가정부들에게도 두어 달을 못 견뎌 그만두게 할 정도로 깐깐하게 굴었다. 가정부가 청소하다가 어디 한 군데라도 대충 청소했다 싶으면 종일 잔소리를 했던 건 기본이다. 그래도 베토벤 같은 유명인을 자주 볼 수 있는 직업이라면 나름 명예로운(?) 자리였을 텐데, 이게 독이 든 성배였던 셈. 더구나 가정부들을 더욱 오래 못 있게 만든 게 있는데 바로 냄새였다, 베토벤은 평소에 작곡을 하거나 일을 하기 시작하면 자기가 나오고 싶을 때까지 방에 틀어박혔는데 씻지를 않으니 몸에 엄청난 악취를 풍겼고 가정부들은 그 냄새에 아주 진저리를 쳤다. 더구나 이런 냄새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면 일에 집중이 안 된다며 완강하게 굴기까지 해서 가정부들은 베토벤의 친지나 친구들을 동원해 그가 잠들었을때 옷을 갈아입히는 고된 작업을 해야 했다. 물론 목욕도 그때 가서야 했는데 문제는 이러면 목욕하다가 깨기 일쑤고 깨면 뭐 하는 짓이냐며 또 불같이 화를 내어 가정부들 입장에서는 정말 피곤한 고용주였다.

5. 일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점심 시간까지 작곡에 집중하고, 점심을 먹은 뒤 2~3시간 정도 산책을 하면서 음악을 구상하고, 날씨가 덥거나 추워도 산책은 거의 빠뜨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녁에는 친구들을 만나거나 술집에 들러 신문을 읽었다. 거의 매일 신문을 봤다. 밤에는 사람들과 함께 연극을 보거나 음악을 연주하고,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책을 읽었다. 실제로 베토벤은 음악가들 중에는 독서를 가장 많이 한 사람에 속한다. 베토벤은 밤 10시쯤에 집에 돌아왔고, 늦은 밤에 몇 시간씩 작곡을 해서 잠을 설칠 때도 종종 있었다. 링크, 링크 2. 또한, 식사 때마다 맥주포도주 한 병씩을 마셨다.

6. 메모광 베토벤

청력장애에 시달렸던 탓인지 꽤나 메모광이었으며 악상이 떠오르면 늘 메모했는데 정작 악보는 별로 쓴 적이 없다. 주변에서 "왜 많이 메모하는데 악보는 별로 안 쓰나요?" 그러자 나온 대답이 "나는 한 번 메모하면 다 외우니까 쓸 필요없다." 베토벤이 자주 휴가를 보냈던 어느 여관에서는, 베토벤이 왔다 갈 때마다 악상을 메모한 문짝이나 벽지, 식탁보 등을 수집가에게 팔아서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나.

그리고 가계부를 썼던 몇 안 되는 음악가 중 하나다. 하이든과 만나서 핫초코와 커피를 마셨는데 비용은 베토벤이 부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후술하듯이 수학에 워낙 약해서 계산 오류가 잦았다. 이런 기록들을 모아 베토벤의 가계부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도서도 있다.

7. 천하의 악필 베토벤


5번 교향곡의 자필 악보. 이게 악보인지 낙서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다. 심지어 이런 악필 때문에 그의 교향곡 9번 4악장의 팀파니 문제 등 악상기호마저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악보 상태만 이런 게 아니라 베토벤이 쓴 편지일기나 기록도 대체 무슨 글씨인지 몰라서 연구가들을 애먹이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공책을 줘서 대화 내용을 적게 하여 그걸 보고 대화했다. 보청기도 썼지만 한마디로 작은 나팔 같은 것을 귀에 꽂고 상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당시 보청기. 1810년 초반까지는 이거라도 쓰면 조금 들렸으나 그 후로는 아예 들리지 않아 이것도 안 쓰게 된다.

8. 수학과 지식에는 문외한

베토벤은 음악적 능력과는 다르게 수리계산력은 0점이었다. 실제로 베토벤은 가감승제덧셈뺄셈밖에 할 줄 몰랐을 뿐더러 정작 그 셈조차도 틀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 예로 베토벤은 가계부를 직접 꼼꼼하게 적었는데, 169 곱하기 3을 169+169+169 하는 식으로 계산하는 뿐만 아니라 받아올림과 받아내림 등을 빼먹어서 그 합도 틀렸다. 기사. 실제로도 몇몇 베토벤에 대한 일화를 찾아보면 돈계산 등이 틀려서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고생하는 일화가 나올 정도이기도 하다.

사실 베토벤이 수학이 이렇게 쥐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유년 시절부터 기본 산수 교육조차도 제대로 못 받은 것 때문이었는데, 생애에서도 보았듯 원체 그는 자신을 음악 신동으로 포장하려고 했던 아버지 때문에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따로 과외교육이나 직업교육이나 사회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숫자계산과 같이 실생활에 필요한 실무나 대인관계는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베토벤이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해 천재성을 보인 건 맞는데, 선배인 모차르트와는 달리 유년시절에는 딱히 주목받는 위치에 있진 않았다. 베토벤 이외에도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긴 천재들 중에는 일찌감치 재능을 보였으면서도, 어렸을 때는 이것이 잘 드러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곁에 머물렀던 친구들과 지인들은 모두 그의 괴팍하고 까탈스런 성격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대인배들이었던 셈이다. 허나 모차르트는 '음악가가 되지 않았으면 천재적인 수학자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학에도 두각을 드러냈던 걸보면, 그냥 베토벤이 수포자여서 그런 것도 있다(...).

8.1. 베토벤이 배운 지식들

베토벤은 어릴 적엔 음악만 집중적으로 교육받는 바람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선술했듯이 실질적인 지식에는 까막눈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19살 때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1762-1823) 백작의 주선으로 본대학에서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과목들을 청강하면서 무식쟁이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베토벤은 그에게 나중에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헌정한다. 마침 이 해(1789)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해였고, 그 덕분에 그는 대학에서 프랑스 혁명의 새로운 정신과 칸트로 대표되는 계몽주의, 실러의 예술 사상 등 심오한 인문학을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규교육이었던 이 대학 청강은 다소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평생 그가 동경하고 그의 음악의 기반이 된 인류애나 진리의 승리와 같은 이념적 기반을 마련해준 계기가 되었다.

칸트 철학에 심취해 "하늘엔 빛나는 별. 가슴엔 실천이성"이라는 칸트의 명언을 어디엔가 써놓았다.

유품들 중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와 함께 그리스 비극호메로스의 영웅 서사시, 플루타르코스의 열전인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안경이 있는데, 말년에는 노안 때문에 안경을 쓰지 않고선 글을 읽을 수 없었다.

9. 베토벤의 생가

시내에는 베토벤의 생가가 아주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게 사실 19세기에 한차례 헐릴 뻔하다가 그 집 1층의 술집 단골들(…)의 주도로 살아 남았다. 물론 이후에는 1층에 술집이 없고 건물 전체가 베토벤 기념관이 되어 있다. 덕분에 베토벤이 22살까지밖에 살지 않았던 본이 베토벤을 열심히 팔아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본 시에서는 당시 술집 단골들의 후손들에게 사례라도 해야 할 듯. 반면 베토벤이 음악인생 대부분(35년)을 지낸 오스트리아 에서도, 빈이야말로 베토벤이 일생의 대부분을 지내면서 많은 작품을 창작한 진정한 고향이라고 본을 까면서 베토벤이 마지막을 보낸 집을 베토벤 박물관으로 만들어 전시한다.

어차피 베토벤이 거쳐간 곳은 모조리 베토벤의 이름을 팔아 명소를 만드는 분위기고 유서를 썼던 하일리겐슈타트, 요양을 위해 머무르면서 7번 교향곡을 썼던 체코의 테플리츠, 온천을 위해 자주 방문했던 바덴바이빈 등이 있다. 그가 손가락이라도 건드렸던 물건들은 모조리 경매시장에서 아주 인기가 좋은 고가의 기념품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굳이 이 두 도시의 알력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만큼 베토벤이 유명하다는 뜻이고 또 유명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니.

10.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베토벤빠 로맹 롤랑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매우 존경하여 베토벤을 연구한 책인 '베토벤의 생애'까지 썼지만, 이 책은 베토벤 전기의 스탠다드로 평가받는다. 안톤 쉰들러의 증언을 토대로 썼지만 베토벤을 지나치게 미화해서 호불호가 갈린다. 참고로 로맹 롤랑은 이 책에서 "신이 벌인 잘못 중에서도 가장 큰 잘못은 바로 베토벤이 소리를 못 듣게 한 것이다!"라고 썼다. 이 외에도 로맹 롤랑의 명작 소설 중 하나이자 그것으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장 크리스토프' 역시 베토벤을 모델로 했다. 단, 유청년기만 모티브로 삼았고, 아이러니하게도 장 크리스토프 본인이 본인을 모티브로 한 베토벤도 까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 독일 음악가인 막스 레거는 베토벤을 부풀려진 음악가라고 혹평했다. 책에서도 "베토벤이 귀가 들렸다면 이렇게 과대 평가받았을까?"라고 주장했다가 로맹 롤랑을 비롯한 베토벤 매니아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던 것은 당연지사. 하루는 어느 애송이 피아니스트가 막스 레거 앞에서 연주했는데 연주가 끝나자 "베토벤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가운데 한 사람의 흉상을 피아노에 올려놓고 싶습니다. 어디가 나을까요?"라는 질문하자 막스 레거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길. "베토벤이나 올려놓으라고. 베토벤은 귀가 막혀서 못 들을 테니까." 즉 연주 솜씨를 깐 거다. 하지만, 막스 레거 본인은 베토벤의 바가텔 Op.119 No.11의 주제를 가지고 변주곡을 쓰기도 했고, 애정이 있었는지 나중에 관현악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이 변주곡은 그의 변주곡 중에 최고로 꼽히기에 베토벤에 대하여 무조건 욕한 건 아니다. 단순히 자기의 음악적 취향과 맞지 않아 거리를 둔 것.

베토벤빠 중에서는 프란츠 슈베르트도 있다. 다만 슈베르트는 워낙 소심해서 베토벤과 사는 거리가 불과 2km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음에도 차마 찾아가지 못하다가 베토벤이 죽기 1주일 전에야 지인들의 주선으로 겨우 찾아가서 만날 수 있었는데 베토벤은 그가 쓴 악곡을 보고 이런 사람을 일찍 못 만난 걸 안타까워했다. 다만 슈베르트답다면 슈베르트답다고 해야 할지 당시 베토벤이 죽기 직전이라 고통스러워했는데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던 슈베르트가 그만 먼저 뛰쳐나오고 말았다. 본인은 나중에 후회스러웠는듯 하지만... 여튼 생전에 베토벤을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사후에도 베토벤 곁에 묻혔다. 슈베르트는 죽기 전 남긴 유언도 "이곳에는 베토벤이 없어!"일 정도로 베토벤을 흠모했다.

11. 즉흥 연주의 달인 베토벤

현재는 클래식 분야에서 연주자들이 즉흥연주를 하는 경우가 흔치 않지만 바로크 시대는 즉흥음악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통주저음 항목 참조) 연주자의 즉흥능력이 중요했고 고전파 시기인 모차르트/베토벤 시절에도 연주자의 즉흥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오늘날처럼 녹음/녹화가 가능했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축제나 사교모임 등에 동원된 연주자들은 필수적으로 모임의 콘셉트에 맞춰서 분위기를 띄우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베토벤은 1792년 빈에 온 후 초반에는 작곡가보다는 피아노 연주자 및 선생으로 이름을 날렸고 특히 그의 즉흥연주 능력은 매우 유명했다. 당시 빈에서는 유명한 연주자들끼리 연주대결을 펼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베토벤은 이 연주대결에 기꺼이 응해서 특유의 승부근성과 즉흥능력으로 빈의 유명 피아니스트들을 도장깨기식으로 압살해 버렸다. 당시 빈에서 젊고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주목받던 요제프 뵐플(Joseph Wolfl, 1773 - 1812)이나 요한 밥티스트 크라머(Johann Baptist Cramer, 1771 - 1858) 등도 베토벤에게 밀렸으며 특히 뵐플은 베토벤과 대결 후 한동안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베토벤이 이 피아니스트들과 계속 경쟁만 했던 것은 아니고, 뛰어난 작곡가로 성장하면서 빈의 여러 연주자 및 작곡가들과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훈훈한 마무리

베토벤의 즉흥능력은 사교모임이나 연주 배틀 뿐만 아니라 연주회나 작곡에서도 빛을 발했는데, 피아노 협주곡 3번(op. 37) 1악장이나 피아노와 관현악과 합창을 위한 환상곡(op. 80) 등의 피아노 파트는 초연때까지도 악보가 완성되지 못해서 즉흥으로 연주를 했다. 또한 그가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할 때 연주자의 재량으로 삽입되는 카덴차는 매우 길고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다. 한편 그의 피아노 작품, 특히 후기작품에는 즉흥곡 풍의 패시지가 상당히 많이 보인다.

심지어 여성들에게 구애를 할 때에도 피아노 앞에 몇시간씩 앉아서 자신의 즉흥능력을 과시하면서 여성의 환심을 샀다. 사귀는 족족 어른의 사정으로 깨지는 게 문제였지만.

12. 시대연주의 어려움

베토벤 덕분에 고전 악보를 그대로 재현하는 시대연주가 어렵기로 유명해졌다. 베토벤은 메트로놈을 써보고 거기에 매료돼서 자신의 악보에 메트로놈 박자수를 일일이 지정해 놓기도 했다. 문제는 그 연주 속도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빠르기보다 2~30% 정도 빠른 탓에 낯설게 들릴 것이다. 그래서 농담 삼아 베토벤의 메트로놈이 사실은 고장나 있었던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하지만 몇몇 지휘자는 가능하면 베토벤의 연주 속도를 존중하려 노력했고 최근 녹음된 베토벤의 여러 음악은 마치 2배에서 3배 속도로 연주한 듯이 매우 빠르게 들리기도 한다. 작곡가 본인의 의도를 존중하겠다는 취지 자체는 물론 바람직한 것이지만 감상자가 듣기엔 음악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빠르게 진행되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

피아노 소나타도 피아노 소나타이지만 교향곡에서도 지휘자별 연주 시간 편차가 심해지는 원인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 같은 경우 (유명 연주자들 녹음만 보면) 오토 클렘페러는 1970년에 83분으로 연주를 끝마쳤는데 1992년 존 엘리엇 가디너경은 59분으로 연주를 끝냈다. 2006년 BBC가 맨체스터에서 진행한 "The Beethoven Experience" 녹음실황도 60분으로 끝난다. 클렘페러가 말년의 육체적 노쇠로 템포가 느려졌음을 감안해도 카라얀의 76년 녹음이 67분으로 이 연주 시간이 CD의 표준규격이 된다. 당시 필립스사 회장이 "그래도 "합창 교향곡" 정도는 한 번에 담아내야 하지 않겠나?"라고 언급했기 때문. 또한 푸르트벵글러의 51년 바이로이트 녹음이 76분임을 감안하면 매우 빠른 연주이다. 물론, 이 조차도 베토벤의 지정 속도보다는 약간 느리다.

한편 즉흥연주의 달인이었던 베토벤은 피아노로 카덴차를 연주할 때 너무 심취한 나머지 예정 시간을 훨씬 넘기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때가 잦았다. 심할 때는 1시간 이상 연주해 동료 연주자들이 기다리다 지칠 정도였다고.

13. 연주 속도는 빠르지만 작곡 속도는 느렸던 베토벤

앞서 베토벤이 직접 지정한 연주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빠르다는 일화를 소개했는데, 이와 달리 작곡속도는 당대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늦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당대 다른 작곡가들 대비 작품수도 상당히 적은 편. 특히 공연에 맞춰 작품을 의뢰받은 경우 공연 전날 완성된 악보가 도착하면 다행인 수준이었으며 공연 당일에 즉흥연주로 때우고 뒤늦게 악보를 완성해서 출판하거나 아예 공연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곡이 미완성으로 남아버리기도 했다. 이는 그의 완벽주의 기질도 한몫 했지만 기본적으로 치밀한 전개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법 스타일상 당대의 일반적인 작곡가들처럼 양산형으로 곡을 쏟아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토벤은 당시의 일반적인 작곡가들의 작곡속도에 맞춰진 공연 일정을 따라가지 못해 애를 많이 먹었으며 많은 작품이 공연 직전에야 완성되었던 탓에 연주자들은 제대로 리허설도 해보지 못하고 공연을 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게다가 연주하기 쉽기라도 하면 그나마 나을텐데, 연주기교는 뭣같이 어렵고 작곡가는 요구사항이 많고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연습조차 해보지 못하고 공연을 해야 했으니 연주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상당히 많은데 가장 처절한 에피소드로 피아노 협주곡 3번의 초연이 있다. 초연 당시 베토벤이 직접 피아노연주를 맡았는데, 초연시까지도 피아노 파트가 제대로 완성되지 못해서 악보에 대략적인 선율과 중요한 부분만 적어놓고 상당 부분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나중에 출판된 피아노 협주곡 3번의 피아노 파트는 당연히 초연시의 그것과 많이 달라졌다.

그가 손댄 오페라는 피델리오를 제외하고 모두 시작단계에서 중단되어 버렸는데, 여기에는 느린 작곡속도도 한몫 했다. 그나마 피델리오도 몇번이나 대폭적인 개작을 한 끝에 간신히 성공적으로 공연되었을 정도다.

14. 첫 프리랜서 음악가 베토벤

하이든과 모차르트 등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이전 음악가들은 대다수가 귀족 또는 교회에 속해 있는 고용인이었으며 심하면 귀족의 하인 취급 받을 정도로 대우가 안좋았다. 그러나 베토벤은 전술했던 성격과 탈 귄위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에 대한 심취로 당당히 자신을 음악가이자 하나의 예술인으로 내세웠고 귀족이나 교회의 고용인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이전의 음악가 대부분이 고용인의 의뢰에 따라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했던 것에 반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건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회를 여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명성을 높였다. 이런 베토벤의 행보는 음악가들의 입지를 높여 과거 귀족들의 하인이자 고용인에서 벗어나 하나의 예술가로서 자리매김 했다. 어떻게 보면 이후 후배 음악가들은 베토벤의 덕을 크게 본다고 과언이 아닌 셈.

더구나 베토벤은 음악가로서 자부심이 컸기에 아무리 높은 귀족이라도 자신의 성미에 차지 않으면 과감히 거절했고 거친 말도 서슴치 않았다. 이런 베토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바로 테플리츠 사건이다. 테플리츠에서 당시 베토벤은 평소 친분이 있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같이 걷고 있었는데 마침 앞에 오스트리아의 고위 귀족들과 황족이 보이자 예술가이지만 또 정치인이기도 했던 괴테는 모자를 벗고 자리를 비켜 인사를 하는 반면 베토벤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자에 손을 대는 가벼운 인사만 하며 꼿꼿하게 걸어갔다. 이때 베토벤은 먼저 가서 괴테를 기다리다가 그가 오자 오히려 그를 나무라며 "저런 사람들은 우리가 길을 비켜줄 만큼 위대한 인물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귀족적인 풍습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정치인의 입장이었던 괴테는 베토벤을 몰상식하다고 생각했고 베토벤은 본인이 친교 이전부터 그 예술적 감각을 높이 평가하던 예술가의 태도가 비굴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 일을 계기로 서로의 예술적 재능을 높게 평가하고 작품을 즐기던 두 친구의 왕래는 끝나고 만다. 이때 괴테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이었으면서도 다른 창작자의 예술 감각을 칭송하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았는데, 이례적으로 베토벤에게는 천재라며 격찬을 늘어놓을 만큼 그를 높이 평하고 있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행동은 귀족 사회에서 도외시 되거나 고립되긴 커녕 귀족들에게 일종의 나쁜 남자 같은 매력으로 느껴저 도리어 귀족들이 베토벤의 음악을 들어보겠다고 그의 집앞에서 서성이거나 아예 직접 배우겠다는 수제자도 넘쳤다.

15. 정치적으로 악용된(?) 베토벤

후대에 베토벤의 음악을 정치상 이용한 집단이 있는데, 바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였다. 나치가 독일인들의 베토벤 음악 애호를 이용해 베토벤 찬양으로써 독일의 민족주의를 고취했을 뿐만 아니라 베토벤의 여러 곡이 '독일 민족의 우월성과 단결'이란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9번 교향곡의 합창의 순수한 휴머니즘적인 가사를 제멋대로 왜곡해서 이 가사가 게르만 족의 단결을 촉구한다는 헛소리를 해댔다. 독재와 권위주의를 혐오하던 베토벤이 이 사실을 알면 무덤에서 뛰쳐나오고도 남을 것이다. 당연히 2차 대전에서 나치가 패망한 후 이런 주장들은 금세 사라져버렸고 유대인을 혐오한 전과가 있는 리하르트 바그너와 다르게 어떤 비난도 듣지 않았다.

살리에리 문서에도 나오는 베토벤 제자인 이그나츠 모셀레스(1794~1870)가 유대인이며, 유대교를 믿던 사람인데 베토벤은 종교 가지고 일절 뭐라고 한 적이 없다. 모셀레스 본인이 늘그막에 쓴 회고록에서도 여전히 베토벤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내비치며 "그 분은 내 종교 가지고 왈가왈부한 적도 없고 민족 가지고도 뭐라고 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실력만을 이야기했다"라고 베토벤이 죽은지 40년이 넘어도 잊지 못한다고 회고하며 자기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베토벤은 늘그막에 기독교라는게 예수라는 유대인 애송이가 만든 종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해서, 친구들이 이 말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는데 사람들은 병세가 심해져서 그런가 보다 여기면서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유대인 혐오를 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게, 베토벤의 저 말은 내용을 보면 유대인보다 기독교를 깐 것에 가깝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혐오한 명목 중에는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것도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유대인을 혐오하는)기독교도 유대인 애송이가 만든 것'이라고 비아냥댄 것이니 기독교도 까고 유대인도 깐 셈. 베토벤의 그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당시 기독교의 권위주의가 못마땅해서 전부 과감히 까버렸다고 봐도 어색하지 않다.

16. 공포스러운 얼굴

파일:Ludwig-van-Beethoven-Carel-L-Dake.jpg

파일:L.v.Beethoven.jpg

파일:Beethoven Listening To A Muse.jpg

파일:루트비히 반 베토벤.jpg

남아 있는 초상화들 속의 베토벤을 보면 본인의 괴팍한 성깔을 한껏 어필이라도 하듯(?)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이 주된 특징이다. 엉덩이턱있긴 하지만 어릴적이나 20대 초중반 초상화를 보면 제법 부드러운 얼굴이었으며, 청각장애가 온 뒤로 성격이 우울해져 표정도 어두워졌다는 친구들 증언이 있듯이 20대 후반부터 얼굴이 죄다 굳어지고 인상을 쓴 얼굴이다. 유명한 베토벤이 50대 때의 초상화가 그려신 때에는 선술했듯이 베토벤이 여러 질병을 앓던 상태였다. 심지어 베토벤에게 수업받은 카를 체르니조차 베토벤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울었다.

그래서인지 음악실에 걸린 베토벤의 초상화는 학교와 관련된 괴담의 단골이다. 학교괴담베토벤의 망령의 모티브가 되었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 중 케로로 소대가 킷쇼 학원의 7대 괴담을 연기한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중 <음악실의 움직이는 초상화>를 연기했던 기로로는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베토벤 초상화를 보고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지 마" 하며 역으로 자신이 공포에 질렸다.

17. 흑인 여부 논란

2020년 6월 미국을 중심으로 베토벤이 흑인 혹은 흑백 혼혈이었으나 베토벤 개인의 백인 코스프레와 백인 주류 역사가들의 '화이트 워싱'으로 여태껏 백인으로 묘사되었다는 개소리 논란이 확산되었다. 링크. 베토벤이 평소에 외출할 때는 분을 치르고, 그의 음악에는 흑인 폴리 음악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Beethoven이란 이름도 조상이 비트 (순무)를 재배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다만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다. 그리고 트위터는 폭발했다

흑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베토벤에게는 게르만족의 특징인 연분홍빛 피부가 아니라 남유럽계처럼 이 보다 피부색이 짙은 편이었고, 머리카락이 검은데 멜라닌 색소와 연관이 있어 남쪽으로 갈수록 빈도가 높고 북쪽일수록 빈도가 낮은 편이고 곱슬머리인데, 베토벤의 조상이 당시 스페인이 점령한 벨기에 출신인데다가 실제로 외할머니 마리아 요세파 폴(María Josefa Poll)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 동안 북쪽으로 피난간 스페인 동부 출신의 한 스페인 가계의 후손이라는 게 밝혀졌다. 링크

18. 음식 취향

평소 미식가였다. 자신이 고용한 요리사의 요리가 미흡하자 요리사를 해고하고 자신이 직접 쇠약한 몸을 이끌고 요리했다. 쉬우면서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먹고, 값 비싼 와인을 마셨다. 와인은 적포도주보다는 오스트리아산 백포도주(화이트 와인)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요리 중에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를 얹은 마카로니가 있었는데, 이 요리를 가정부에게 주문하면 가정부는 우거지상이 되는 일이 잦았다. 한 번 작곡에 들어가면 몇 시간이고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는데, 이것 때문에 베토벤의 몸에는 엄청난 악취를 풍겼고 심지어 그 옷들을 갈아 입으려고도 안했다. 더구나 여기에 뭐라고 말하면 불같이 성까지 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가 잠들때 온갖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 악취를 참아가면서 옷을 갈아입혀야 하는 웃픈 일화가 있다. 그 사이 식사 시간은 한참 지나고 준비한 요리는 불어터지고 식어서 먹지 못할 지경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 치즈나 마카로니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상당히 비싼 고급 식재료였기 때문에, 가정부는 베토벤이 언제 식탁에 앉을 지 세심하게 관찰해야 했다. 아무리 자기 돈이 아닌, 베토벤의 돈으로 산 식재료로 대신 요리해 주는 것이라고 해도 좋은 재료들이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가 되는데 그걸 좋아할 요리사, 가정부는 없다.

고향인 본에는 라인강이 근처에 있어서 그런지 선술했듯이 민물생선 요리를 좋아했다.

단순한 종류의 스튜, 스트라키노 치즈, 베로나 살라미, 영국의 피시 앤드 칩스와 비슷한 독일 요리좋아했다. 특히 스트라키노 치즈와 베로나 살라미는 작곡할 때 식사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방에 보관했다.

이외에도 매주 목요일마다 먹는 브로트주페(Brotsuppe)를 좋아했는데 맛이 밍밍했다. 이때에는 건강이 나빠지고 난 후라 소화 문제 때문이었다. 이 수프에 날달걀을 10개 까넣고 휘저어 먹는 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날달걀의 위생을 중시해서 직접 일일이 검사하고 먹었는데, 계란을 빛에 비추고, 냄새를 맡아 신선한지 확인했다.

건강이 나빠지고 난 후 설사로 고생도 했고 복수(腹水) 때문에 배가 점점 불러와 복대를 하고 다닐 정도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점심 때 계란 반숙 비슷한 음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와인만큼은 마셨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맛있는 요리를 먹는 것으로 투병 생활에 대한 위안을 찾았다.

식사 후에는 촛불의 심지를 자르고 시커멓게 그을린 가위로 이를 쑤시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는 촛불이 거의 유일한 조명 수단이었는데, 촛불을 자주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촛불은 녹아 내려도 심지는 까맣게 타기만 하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좀 길어졌다 싶으면 반드시 가위로 잘라내야 했다. 이 촛불 심지 자르는 데만 쓰는 가위도 있었으며, 귀족 집안 같은 곳에는 이런 촛불 심지 자르는 일만 담당하는 전속 하인도 있었다. 굳이 하인까지 필요한가 싶지만, 그런 큰 집 여기저기에 놓여 있을 초의 개수를 생각해 보면 바로 이해할 것이다. 촛불 1개의 광속이 약 13루멘인데, 현대에서 흔히 쓰는 10와트 LED 등 1개가 900루멘 정도 된다. 즉, 당시에 지금 LED등 1개 정도의 광속을 얻으려면 70개 정도의 촛불이 필요했던 것.

19. 형편없는 요리사

베토벤의 친구 중 한 명인 이그나츠 폰 자이프리트에 따르면 한 번은 당시 베토벤의 가정부가 해고된 후 그 사이에 그가 친구들을 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베토벤이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해서 친구들을 초대한 것이었는데 베토벤의 기행을 잘 아는 친구들은 마지못해 초대에 응했다. 역시 베토벤은 친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베토벤은 머리카락이 뻣뻣한 상태로 잠옷 위에 짧은 이브닝 재킷을 입고 허리에는 파란색 앞치마를 두른 상태로 난로에서 요리를 했는데, 까맣게 타 버린 구이, 묽은 수프, 익지 않은 야채로 차려진 식탁에서 친구들은 머뭇거렸지만 베토벤은 혼자서 황홀한 표정으로 정말 맛있게 식사를 즐겼다. 친구들은 '형편 없는 요리사'라는 별명을 베토벤에게 붙여 주었는데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이 별명으로 서명을 했다. 이후에 가정부가 다시 고용되었다.

20. 커피 애호가

와인만큼이나 커피를 좋아했다. 과거에 널리 사용되었던 퍼콜레이터라는 커피추출주전자를 이용해 직접 추출하여 아침형 인간답게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작곡을 시작하며 아침식사 때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추출할 때도 작곡을 할 때처럼 신중을 기해서 커피한 잔에 원두 낱알 60개를 정확히 세어 넣었다. 손님이 오게되면 온 손님의 수만큼, 커피 낱알을 일일이 세어 커피를 추출했다. 기사. 그의 친구인 카를 마리아 폰 베버는 베토벤의 방 안이 온통 악보와 옷으로 어질러져 있으나, 테이블에는 악보 용지 한 장과 끓는 커피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21. 스트레스 해소

베토벤의 하숙집 주인들은 위대하지만 괴팍한 작곡가를 하숙생으로 들이면서 여러가지 고충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틈만 나면 들려오는 베토벤의 괴성과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베토벤은 작곡 작업이 잘 안 풀리면 그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괴성을 지르거나 책상을 두드리고, 혹은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심지어는 벽에 머리를 박거나 그냥 물을 한가득 머리에 확 뿌려 열을 식혔다. 문제는 그 빈도가 너무 잦았다는 것. 따라서 다른 방에 거주하고 있던 집 주인이나 다른 하숙생들이 밤에 베토벤의 괴성과 소음에 의해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하소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물을 하도 뿌리니 결국 물이 새는 통에 참다 못한 집주인이 버럭거리며 내쫓은 적도 있다. 한국의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현대식 건물이 아니라 이 시기 중부 유럽의 건물은 목조+흙벽으로 이뤄져있다. 물론 궁궐이나 귀족들이 사는 저택은 석조건축이지만 하숙생이 세들어 사는 집이면 그냥 플로어링 나무 바닥이다. 당연히 물을 잔뜩 뿌리면 아래층으로 새기 마련. 이는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도 베토벤이 머리에 물을 뿌려 열을 식히는데, 이에 집의 다른 층에 있던 사람들이 항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다보니 현대 정신의학자들은 이런 베토벤의 증세를 간헐적 폭발 장애, 우울장애, 양극성장애로 평가한다.

22. 잦은 이사

빈에서 살던 35년동안 무려 40번 이상을 이사다녔다. 이는 위에 나온대로 저런 민폐를 끼치니 화가 난 집주인이 내쫓아버린 경우가 많았다. 황당한 것은 때론 집주인이 너무 잘해줘서 자신이 부담간다고 그냥 이사가던 적도 있다. 그래서 아쉬워하는 집주인에게 사인을 해주던 적도 있는데 위에 서술되듯이 베토벤이 죽고나서 전설이 되며 이런 사인을 거액에 파는 경우도 있었다고. 1970년대에 나온 학연(学研)만화 전기 시리즈의 일본 위인전 만화 베토벤(위에 나온 1981년 삼성서적 베토벤 만화가 이걸 그대로 표절한 거다.)에서 피아노를 큼직한 짐마차에 통째로 놔두고 이사가는데 그 짐마차 위에 둔 피아노에서 작곡하는 베토벤을 그리기도 했다. 물론 이건 만화 속 이야기이고 실제로 이런 적은 없다.


[1] 해리 골트슈미트(Harry Goldschmidt), 불멸의 연인에 대하여(Um die Unsterbliche Geliebte: Eine Bestandsaufnahme), Eine Bestandsaufnahme, 라이프치히: 독일 음악 출판사(Deutscher Verlag für Musik) 1977, 160쪽마리-엘리자베스 텔렌바흐(Marie-Elisabeth Tellenbach), 베토벤과 그의 "불멸의 사랑" 요제피네 브룬스비크, 그들의 운명과 베토벤의 작품에 미친 영향(Beethoven und seine „Unsterbliche Geliebte" Josephine Brunswick. Ihr Schicksal und der Einfluß auf Beethovens Werk), 취리히: 아틀란티스, 1983, 127쪽[2] 나성인, 베토벤 아홉 개의 교향곡 (자유와 환희를 노래하다), 서울 : 한길사, 2018, 311-314쪽.[3] 마리-엘리자베스 텔렌바흐(Marie-Elisabeth Tellenbach), 베토벤과 그의 "불멸의 사랑" 요제피네 브룬스비크, 그들의 운명과 베토벤의 작품에 미친 영향(Beethoven und seine „Unsterbliche Geliebte" Josephine Brunswick. Ihr Schicksal und der Einfluß auf Beethovens Werk), 취리히: 아틀란티스, 1983, 142쪽, 및 리타 스테블린(Rita Steblin), Auf diese Art mit A geht alles zu Grunde: A New Look at Beethoven’s Diary Entry and the “Immortal Beloved,” in, Bonner Beethoven-Studien 6, 2007, 147-180쪽[4] 크리스 슈타트랜더, 《베토벤과 그의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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