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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4 05:00:49

브라이언 멀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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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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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제18대 총리
마틴 브라이언 멀로니
Rt Hon. Martin Brian Mulroney
파일:Brian-Mulroney-Former-Prime-Minister-of-Canada.jpg
<colbgcolor=#700F1E> 출생 1939년 3월 20일
캐나다 자치령 퀘벡주 베코모
사망 2024년 2월 29일 (향년 84세)
미국 플로리다팜비치
재임기간 제18대 총리
1984년 9월 17일 ~ 1993년 6월 25일
서명 파일:브라이언 멀로니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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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00F1E><colcolor=#fff> 배우자 밀라 멀로니 (1973년 결혼)
자녀 장남 벤 멀로니[1]
장녀 캐롤린 멀로니[2]
차남 마크 멀로니
삼남 니콜라스 멀로니
학력 세인트프란시스사비에르 대학교 (B.A.)
달하우지 대학교
라발 대학교 (LLB)
종교 가톨릭
최종당적
지역구 센트럴 노바
마니쿠아 강
샤를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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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평가3. 사망4.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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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캐나다의 정치인, 제18대 총리. 캐나다 진보보수당 소속으로 총리를 역임했다. 영국마거릿 대처 총리와 미국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비해 인지도가 높지는 않지만 이 둘과 함께 1980년대 서구 사회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놓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또한, 캐나다 보수정당 역사상 최초의 퀘벡주 출신 모태 바이링구얼 총리[3]라는 타이틀의 보유자이다.

피에르 트뤼도 이후 정권교체를 이루어내며 화려하게 총리생활을 시작했다. 레이거노믹스, 대처리즘에 발맞추는 성장 중심, 작은 정부, 신자유주의 기조를 내세우며 실시한 여러 가지 감세정책들이 큰 호응을 얻어 자유당이 힘도 쓰지 못할 정도로 잘나갔다. 게다가 이렇게 세율을 인하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세로 인한 경기활성화 효과 덕분에 세입은 오히려 증가했고, 덕분에 캐나다의 재정수지는 꾸준히 개선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

그러던 중, 1988년 캐나다 대법원에서 나온 모건탈러 판결(R v. Morgentaler, 1988)이 사회적 분열의 핵폭탄으로 터져나왔다. 이 판결은 낙태에 관한 판결인데, 쉽게 말해 낙태죄가 연방 차원에서 위헌임을 판결한 역사적인 판례였다. 문제는, 이 총리가 보수주의자라는 것. 브라이언 멀로니 총리와 진보보수당은 서부 프레리 유권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완화된 조건으로나마 낙태죄를 재도입하려 했으나, 피에르 트뤼도 시절 '조용한 혁명'으로 세속화한지 오래인 퀘벡주온타리오주 및 대서양주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다. 미국스러운 정치지형이 형성되어있던 서부와 달리 동부에서는 페미니즘 및 프로초이스 운동권과 연대하는 세속적 진보주의자들이 강경한 태도로 멀로니 총리를 규탄했다. 1990년에 결국 법안을 하원에서 통과시키긴 했지만, 상원에서 퇴짜를 맞으며 결국 낙태죄는 지금까지도 재도입되지 않고 있다.[4]

멀로니 총리는 역사상 보기 드문 퀘벡 출신 모태 바이링구얼 보수당 총리라는 타이틀의 소유자인데, 과연 출신이 출신이니만큼 퀘벡주의 자치권 확대 정책에도 의욕을 보였지만 이것이 또다른 큰 악수로 작용했다. 멀로니 총리는 1987년 10개주의 주총리들과 만나 도출한 미치 호 협정(Meech Lake Accord; Accord du lac Meech)를 통해 퀘벡주에게 "특별한 사회(distinct society)"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독자적인 이민정책을 보장[5]하며 연방 상원에 대한 개혁안까지, 하나하나가 폭탄 같은 아이디어를 집어넣어 개헌을 추진했다. 그러나 매니토바와 뉴펀들랜드의 비준 거부로 인해 개헌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이 실패를 교훈삼아 퀘벡주는 물론 대서양 연해주들과 원주민 커뮤니티, 상원 개혁안 등에 대해서까지 더 온건(?)하게 포괄하는 샬럿타운 협정(Charlottetown Accord; Accord de Charlottetown)을 추진했으나, 이번에는 1992년 국민투표에서 완패했다. 퀘벡에서는 충분치 않다(...)고 반대, 서부에서는 멀로니가 나라를 말아먹을 것 같다(...)고 반대하는 통에 브라이언 멀로니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이미 집권여당 진보보수당은 서부 본진에서는 서부의 보수주의자들이 새로 뭉친 캐나다 개혁당에게, 퀘벡에서는 분리주의 정당 블록 케베쿠아에게 기반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상황.

게다가 90년대 초 불황이 닥치면서 세수부족이 일어날 위기에 직면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부가세가 도입했는데, 이 정책은 멀로니의 정치적 숨통을 끊어놓는 결정타가 되었다. 소득세/법인세는 줄이고 부가세를 올린다는 말은 기업들의 밥그릇을 안 털고 국민 개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겠다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대다수 국민들 입장에선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결국, 멀로니는 1993년 당수직 및 총리직에서의 사퇴를 선언했다. 성난 서부 지지자들의 민심을 다독이려는 목적인지 BC 출신인 킴 캠벨이 당수로 당선되며 6월 25일부로 총리직에 올랐으나, 이미 캐나다는 총선으로 사생결단을 내길 원하던 상황. 결국 10월 총선이 열렸고, 진보보수당은 156석에서 2석으로 몰락하는 최악의 참패를 맞았다. 장 크레티앵에 대한 안면장애 조롱(...) 광고로 인한 역풍, 그리고 지지기반이 캐나다 개혁당과 블록 케베쿠아에게 찢겨나가는등의 악재로 진보보수당은 물론 캐나다의 보수주의 정치세력 자체가 몰락해버렸다. 캐나다의 보수정치세력은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개혁당의 후신인 캐나다 동맹을 중심으로 뭉쳐 캐나다 보수당으로 거듭나게 된다.

2. 평가

오늘날의 캐나다가 완성된 후 보수정당이 배출한 최초의 모태 바이링구얼 총리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 인물이다. 캐나다 정치사는 자치령 성립 이래 영국계 보수주의자들과 이에 맞서는 프랑스계 진보좌파 세력이 보수정당과 자유당 중심으로 결집하는 흐름의 반복이었는데, 보수정당에서 이전까지 배출된 총리는 대부분이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하는 앙글로폰들이었고, 이들이 이끄는 보수당은 퀘벡에서 영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 보수정당의 '퀘벡굴기'를 처음으로 성공해낸 인물이 바로 멀로니였다. 정치적으로 이질감이 큰 캐나다의 동서를 보수정당이 이렇게까지 성공적으로 장악해낸 사례는 멀로니 체제의 진보보수당 뿐이었다.

멀로니는 또한 로널드 레이건, 마거릿 대처가 주도하던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캐나다에도 도입하여 경제호황을 이끈 캐나다 보수정치의 새로운 아이콘이기도 했다. NAFTA가 체결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면서도 환경 문제에 대해 일찍부터 경각심을 갖고 오존층 파괴 오염물질 배출을 규제하는 몬트리올 의정서 제정을 주도하는등 환경보호 정책과 규제를 마련하며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강한 비판 또한 높이 평가받는 부분이다.

그러나 피에르 트뤼도라는 퀘벡 출신 거물을 계승하여 퀘벡의 자치권을 확대하려는 멀로니의 태도는 진보보수당의 본진이자 총본산인 프레리 및 태평양 연안 지역으로부터 분노를 샀다. 서부의 보수정당 지지자들은 피에르 트뤼도 시절 연방정부가 퀘벡 좋은 일만 오랫동안 해줬다면서 오랫동안 박탈감에 시달리며 이를 갈아왔는데, 자신들의 영도자인 멀로니 총리가 트뤼도 이상으로 선 넘는 짓(?)을 꾀하자 아예 진보보수당을 떠나 캐나다 개혁당으로 갈아탔다. 그리고 멀로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퀘벡 분리주의자들은 다른 주들의 거센 반발에 좌절된 멀로니의 퀘벡굴기를 기다려주지 않고 블록 케베쿠아를 차려 독립을 선언했다. 그 결과 멀로니 사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킴 캠벨 총리 체제로 열린 1993년 연방 총선은 보수정당에게 역사상 다시 없을 최악의 참패를 안겨줬다. 그렇게 캐나다의 보수정당은 다시 10년 가까운 야당생활을 거쳐야 했고, 캐나다 개혁당의 후신인 캐나다 동맹을 중심으로 진보보수당까지 통합한 캐나다 보수당으로 거듭나서야 스티븐 하퍼를 총리로 올리게 된다.

정계에서 은퇴할 때에는 캐나다를 동서로 절단내고 말아먹을뻔한 역사상 최악의 총리라고까지 맹비난받곤 했지만[6],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보수세력에서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하여 캐나다 경제의 고성장기를 이끈 공로는 높이 평가하는 편이고, 퀘벡에서도 보수정치의 거물이 퀘벡굴기라는 쉽지 않은 목표를 달성코자 직접 퀘벡에 출마하여 민심을 이끌어내는 성의를 보이고 총리로서 퀘벡의 자치권을 확대하고자 노력한 위인이라고 재평가받기도 한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메이 녹색당(!) 당수에게 몬트리올 의정서 등 환경보호의 공로를 높이 평가받기도 했다.

3. 사망

2024년 2월 29일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에 위치한 자택[7]에서 넘어져 향년 84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3월 8일 오타와 맥도날드 카르티에 국제공항으로 송환되었고 캐나다 의회는 3월 18일 추모식을 열었다. 3월 19일 오타와에 안치되었다가 3월 21일 몬트리올 성 패트릭 대성당으로 옮겨져 3월 22일까지 안치되었다. 3월 23일 몬트리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국장이 열렸고 장례식에는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스티븐 하퍼#, 장 크레티앵, 조 클라크, 킴 캠벨 전 캐나다 총리, 캐나다 보수당 대표 피에르 폴리에브#, 캐나다 신민주당 대표 자그미트 싱, 하키 선수 웨인 그레츠키,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 등이 참석하였다. 멀로니의 유해는 몬트리올 노트르담 묘지에 묻혔다.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 - 2003 입당
정계 입문
정계 은퇴

2003 - 2024 사망

[1] 영화 프로듀서이자 방송인이다.[2] 아버지를 따라 정치인의 길을 갔으며 현재 온타리오 주 교통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다.[3] 이전 보수정당에서 퀘벡 및 뉴브런즈윅주 출신이 없진 않았지만 다들 앙글로폰이었다. 반면 멀로니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두 언어를 모두 사용하며 자란 인물이었다.[4] 낙태죄는 없어졌지만, 캐나다가 하도 땅이 넓고 지역마다의 의료여건도 천차만별이다보니 의료접근권의 차이로 인한 실질적인 어려움은 남아있으며, 이것이 암묵적인 낙태 규제의 수단처럼 쓰이고 있다. "저희 클리닉에서는 초기 낙태시술만 가능합니다~ 24주 넘으신 분들은 죄송합니다만 다른 병원 알아보세요~" 하는데 다른 병원이 비행기 타고 다른 동네로 가서도 열심히 수소문해야 겨우 찾아지는 식.[5] 그래도 1991년 이래로 독자적 이민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되긴 했다. 오늘날에는 연방 차원의 이민 유치와 별개로 퀘벡뿐만 아닌 모든 주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재의 이민을 유치할 수 있는 Provincial Nominee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물론 여기서도 퀘벡은 남들이 중시하는 직무 및 전문기술에다 프랑스어 구사능력까지 매우 중시하다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이민자 유입이 극도로 적은 편이다.[6] 어느 나라가 되었건 의원내각제 국가의 총리들은 다들 퇴임 직전에 가장 낮은 지지도를 기록하곤 한다. 그래도 대체로 20~30% 정도는 찍어주는 편으로, 이는 2024년 말 기준의 사면초가 신세 쥐스탱 트뤼도와 과거 정권교체 직전의 스티븐 하퍼 등 다른 장기집권 캐나다 총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멀로니는 1992년 11월 기준으로 12%의 지지율을 기록하였다. 이쯤되면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의 Gone Gone Gone 시절(...) 수준이다.[7] 캐나다의 부유층 노인들은 고향이 너무 춥다보니 미국 플로리다나 캘리포니아 남부에 별장 하나 사놓고 겨울마다 따뜻한 남쪽나라로 옮겨가 지내는 경우가 많다. 노후를 보내는 플로리다 별장, 캘리포니아 별장 같은 로망은 중산층 캐나다인들의 캐나다식 아메리칸 드림(...)으로 흔히 꼽힐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