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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39:58

삼한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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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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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저자3. 관련 기록4.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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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한고기(三韓古記)'는 한국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삼국사기에서 사료로 사용되었다. 저자나 작성시기는 알 수 없지만 책의 이름이나 남은 내용을 봤을 때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인 고려초기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군신화의 원형이 담겨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2. 저자

《해동이적(海東異蹟)》 등의 조선 시대 서적에 삼한고기를 신라의 안홍법사가 저술했다는 일설이 적혀있는데 당장 그 책에서도 그런 내용을 소개함과 동시에 그럴리는 없다며 부정하고, 책의 저술 시기도 고려 시대 초기로 추정되므로 그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참고로, 안홍이라는 승려가 신라의 안함과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 역시 둘의 활동시기가 50년 정도 차이나고 '해동고승전'에서 그럴 가능성만을 제기한 것이므로 사실일 확률은 역시 낮다.

3. 관련 기록

3.1. 상고 시대 기록

단군의 휘는 왕검이니, 《구사(舊史)》 단군기(檀君記)에 이르기를, “신인(神人)이 태백산[1]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시니,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때는 당요(唐堯) 무진년이었다. (商)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2] 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 삼한고기(三韓古記) -
아들 부루를 낳았으니, 이가 동부여이 되었다. (禹) 임금이 제후를 도산(塗山)에 모을 때에 이르러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 삼한고기(三韓古記) - [3]
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역대전고 단군조선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살펴보면 《삼한고기》의 내용을 기재하기를 “옛날 환국(桓國) 제석(帝釋)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서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오니, 이곳을 일러 신시(神市)라 하였는바 이를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는데, 이때 곰 한 마리가 항상 신웅(神雄)에게 빌어 사람으로 변화하기를 원하므로 환웅이 영험한 쑥 한 묶음과 마늘 20개를 주자, 곰이 이것을 먹은 지 삼칠일 만에 여자의 몸으로 변하였다. 그녀가 매양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잉태하기를 축원하므로 신웅이 마침내 잠시 사람으로 화하여 그녀와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단군(壇君)이라 하였다. 당요(唐堯) 경인년에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만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니, 단군이 마침내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수(壽)가 1908세였다.” 하였다.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삼한고기》의 내용을 인용하고 이르기를 “단군이 요 임금과 같은 날 즉위하였는데, 상나라 무정(武丁) 을미년에 이르러서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향년이 1048세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부루(扶婁)를 낳으니, 이가 동부여왕(東扶餘王)이다. 우(禹) 임금 때에 제후들을 도산(塗山)에 모이게 했을 때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했다.” 하였다.
《약천집》 제29권 잡저(雜著) 동사변증(東史辨證)
단군과 관련된 기록이 자세하게 나와있는데 삼국유사의 단군 기록과 유사한 점이 많아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일연이 단군신화를 기록하며 인용한 '고기(古記)'가 바로 삼한고기일 것이라 추정된다.[4]

실제로 약천집에선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고기(古記)가 삼한고기라고 밝히며 그 내용을 인용하여 적고 있는데, 원문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정도가 미미하고 삼국유사의 오탈자인 '석유환국(昔有桓國)'을 그대로 적고 있어 자신이 본 삼국유사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은 맞아 보인다.[5]

또한 약천집에서는 연려실기술에서 빠진 몇몇 부분이 더 보충되어 있는데, 필원잡기에 있는 단군의 기록이 삼한고기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필원잡기에서는 단순히 '고기(古記)'에 기록되어 있다고만 표현한다.

이 외에도 《동전고(東典考)》,《문헌고략(文獻攷略)》,《명수지문(名數咫聞)》등의 책에 삼한고기에서 인용한 단군신화가 적혀있으나 앞서 나온 기록들과 내용면에서 차이는 없다.

3.2. 삼국시대 기록

而三韓古記, 無牟都爲王之事.
그런데 《삼한고기(三韓古記)》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동성왕조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에서는 앞서서 인용된 중국 북송시대의 백과사전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 백제왕 모도(牟都)가 480년과 490년에 남제와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것과 이에 관련해서 받은 조서(詔書)를 부정한다. 그 근거로 삼한고기는 모도가 왕이 된 사실이 없다고 했음을 제시하고 있다.
亦曰三韓古記 太祖大王 一云國祖王
또한 《삼한고기》에서 이르기를 태조대왕 또는 국조왕이라고 불렀다.
이재난고》제14권 二十四日壬寅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에 김부식이 달아놓은 주석을 보면 똑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김부식이 삼한고기의 이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4. 소실

조선 시대 후기까지도 여러 책에서 언급되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책이 전해졌다고 보여진다. 그게 맞다면 세조삼국사절요 편찬을 지시하며 사료로 이용하라고한 '고기류(古記類)'에 삼한고기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조선시대 후기에 나타나는 삼한고기의 기록들은 과거의 서적[6]이 인용한 '고기(古記)'가 삼한고기와 동일서적이라는 저술자의 추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학설이 있다.[7]

[1] 지금의 영변(寧邊) 묘향산 <연려실기술의 주석>[2] 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 본 이름은 궐산(闕山)이니, 궁궐 터가 있기 때문이다. 뒤에 발음이 늦추어져 구월산으로 잘못 불려졌다. 일설에는, ‘아사(阿斯)’란 방언(方言)으로 구(九)이고, 달(達)은 방언으로 월(月)이니 ‘아사달’이란 9월의 방언이라고도 한다. <연려실기술의 주석>[3] (夏) 우 임금 18년 갑술의 일이다. <연려실기술의 주석>[4] 李康來,<三國遺事 引用 古記의 性格>(≪三國史記 典據論≫, 民族社, 1996)[5] 다만, 삼국유사의 고기(古記)가 삼한고기라는 것은 책의 저자 '남구만'의 개인적인 견해일 수도 있다.[6] 삼국사기, 삼국유사[7] 전남대 사학과 이강래 교수의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