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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1:50

서태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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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입궁 전 생애2.2. 후궁에서 황태후로2.3. 권력 독점2.4. 무술정변변법자강운동2.5. 의화단 운동2.6. 죽음과 사후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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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태후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생애

2.1. 입궁 전 생애

부친은 만주 양람기인(鑲藍旗人) 예허나라 후이정(叶赫那拉惠徵, 엽혁나랍 혜징), 모친은 푸차씨(富察氏, 부찰씨)이다.[1] 서태후는 장녀로 태어났고 아래로 남동생, 여동생이 있었다.

펄 벅의 소설《서태후》에 따르면 부친은 어릴적 세상을 떠났고 숙부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학문을 익히긴 했으나 여느 만주족 귀족 아가씨들처럼 풍요롭게 지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아마 이후 서태후가 후술할 사치 행각을 벌인 것도 이런 가난한 시절에 의한 보상 심리로 추측된다.

본명은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라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심지어는 출신지도 확실하지 않아서 안후이성 우후설, 내몽골 자치구 후허하오터설, 산시성 창치설의 3가지 출신설이 나올 정도였다. 다만 최근 서태후의 부친인 예허나라 후이정이 당시 베이징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베이징의 피차이 후통(劈柴胡同)이 출생지라는 주장도 있다.

2.2. 후궁에서 황태후로

함풍 2년, 수녀선발제도로 입궁해 귀인에 봉해졌고, 함풍제의 총애를 받아 빈으로 품계가 올랐다. 그후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 훗날 동치제가 될 재순을 낳으면서 비에 봉해진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귀비가 됐다. 그러다 2차 아편전쟁 이후 함풍제가 붕어하고 자신의 아들인 동치제가 6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함풍제의 정실 황후인 동태후와 더불어 황태후 자리에 오른다.[2][3]

당시 함풍제는 죽기 전 아들 동치제의 섭정을 두 태후가 아닌 8명의 보정대신들에게 맡기고 대신 아들과 동태후에게 대신들의 명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도장을 주는 식으로 권력안배를 해놓았다. 그러나 권력욕이 컸던 서태후는 이에 불만을 품고 동태후와 함풍제의 동생 공친왕과 연합하여 보정대신들을 몰아내고 자신과 동태후, 공친왕 섭정 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상 정변이다.

공식적으로는 2명의 태후가 섭정하는 것이었지만 동태후는 글도 몰랐고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사실상 서태후의 단독 섭정 체제였으며 이후 자신에게 방해가 될 공친왕도 권력을 약화시키면서 서태후는 청나라의 1인자가 되었다.

2.3. 권력 독점

그러나 거리낌 없던 서태후의 섭정도 아들 동치제가 친정을 할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동치제는 엄격한 어머니였던 서태후보다 다정한 양어머니 동태후를 더 좋아했는데, 그러다보니 서태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둘의 갈등은 동치제가 동태후가 추천한 후보를 황후로 간택하면서 더욱 커져간다.[4]

아들에 대한 애정보다 권력욕이 컸던 서태후는 아들과 며느리 사이를 이간질하였으며, 아들이 환관들의 꼬임에 넘어가 여색에 빠져 기생집을 돌아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묵인하였다. 결국 이런 방탕한 생활로 인해 동치제는 성병에 걸려 19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며 아내 효철의황후는 서태후와 동태후[5]의 강압에 못 이겨 자살을 선택한다.

서태후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재빨리 자신의 여동생과 순친왕 혁현[6][7]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즉 동치제의 이종사촌동생이자 자신의 조카인 4살 재첨을 양자로 맞아 즉위시키는데 이가 바로 광서제다.

그뒤 1881년에 눈엣가시였던 동태후가 급사하면서 사실상 서태후는 청나라 황실에서 유일한 황실 큰어른이자 실권자로서 4살짜리 황제를 방패로 청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이후 광서제가 16세가 되면서 명목상 친정을 시작했지만 햇병아리에 불과한 아들에게 해코지를 할까봐 혁현이 앞장서 서태후의 섭정을 연장하자고 청하고 광서제의 황후를 아예 서태후의 조카로 정하는 등 서태후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2.4. 무술정변변법자강운동

사실 2차 아편전쟁 이후 서태후는 공친왕이홍장 등 여러 대신들을 통해 양무운동을 벌여 군사, 무기 정비는 물론 해외 유학생 지원과 서양식 교육 제도 정비 등 제국 내 대대적인 개혁을 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 대패하게 되면서 양무운동은 한계가 있음을 지적당했고 청나라는 아시아의 종이 호랑이라는 것만 증명하고 말았다.

이런 현실을 본 광서제는 캉유웨이와 같은 젊은 사상가들을 곁에 두었고, 이들은 변법자강운동을 통해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처럼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비롯한 근대적인 개혁을 꿈꾸었다. 그러나 광서제가 자신의 군대를 가지려고 하고 자신의 권력 위치까지 흔들려 하자 처음에는 그를 지지하던 서태후도 곧 지지를 철회했다. 변법파는 반발하여 서태후를 제거하려고 했고, 위안스카이는 변법파를 배신하여 이를 서태후에게 알렸다. 서태후는 자신을 따르던 청 왕조의 보수파들과 함께 무술정변을 일으켜서 광서제를 유폐하고, 그를 따르던 변법파들을 대거 숙청, 결국 변법자강운동은 100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8]

2.5. 의화단 운동

이후 서태후는 자신을 방해하려는 외세 세력에 반감을 품고 반 외세 운동 단체인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서태후는 이들을 살살 구슬려서 청나라를 부흥시켜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내자는 부청멸양(扶淸滅洋)으로 구호를 바꾸게 했다. 서태후가 의화단을 얼마나 지지하고 지원했는지는 학자들의 견해가 갈리나 의화단을 적극적으로 진압할 의도가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초반에 의화단 활동이 거세지자 1900년 4월 서양 세력들이 2달 안에 의화단을 진압하지 않으면 연합군을 편성하여 진압하겠다고 밝혔는데 서태후는 방관했다.

당시 의화단이 외국 열강들을 배척한다는 사상까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이들은 잘 조직되고 규율이 잡힌 투쟁 단체가 아니라 무질서한 폭동이라 민간인과 외국인들을 마구 강간학살하는 상황이라 결국 진압하지 않으면 외세가 개입할 것은 분명했다. 사실 광서제를 중심으로 청나라 조정에서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여 서양과 강화하자는 의견도 많았고, 이홍장이나 위안스카이는 적극 의화단을 진압하려 했었다. 1900년 6월 연합군 선발대 2,000여 명이 베이징에 들어오자 의화단은 이를 저지하고 이에 고무된 서태후는 사태 파악 못하고 서양 열강들이 자신을 몰아내고 광서제를 복귀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양 연합군에 선전포고를 하는 조서를 내렸다.

결국 의화단은 서태후의 비호를 업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 일에 제대로 화가 난 서양 8개국 연합군이 7월 말에 무려 군함 54척과 병력 50,000여 명이란 대군을 파견했다. 당연히 제대로 된 훈련 조차 안된 의화단은 처절하게 무너지고 개전 2달 만에 베이징이 점령당하는 사태까지 치닫자 서태후는 시안까지 도주했다가 신축조약이란 역대급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했다.[9] 이로 인해 청은 배상금으로 무려 4억 5천만 냥을 물어내야 했고 2년간 무기 제조 및 수입 금지, 베이징에서 해안까지 포대 모조리 철거, 베이징 등 12개 지역에 외국 군대 주둔, 외국인에 피해를 끼친 곳에 5년간 과거 제도 시행 금지, 향후 통상항해조약을 열강에 유리하게 개정 가능 등 기존의 통상조약에 불만이 있으면 열강들이 마음먹은 대로 고칠 수 있는 사실상 열강들의 반식민지나 마찬가지 상태가 되었다.

결국 이런 일련의 사태로 쑨원 등에 의해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는 계기가 된다. 청나라와 청나라의 뒤를 이은 중화민국은 배상금을 열강들에 비교적 성실하게 납부하였는데 이 배상금은 중화민국의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주어 중화민국 정부가 군벌들과 중국공산당을 상대로 고전했던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서태후는 신축조약을 맺어준 것과 자신이 밀어준 의화단을 토사구팽하는 것으로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갔고 그녀가 저지른 모든 책임은 죄없는 청나라 백성들이 다 떠맡아야 했었다.

2.6. 죽음과 사후 재난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 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세월이었다. 말년에 가면 서태후는 각종 질병에 시달렸는데 특히 노쇠해졌어도 여전히 극심한 사치와 향락을 즐겼는데 이것이 독이 되었다. 며칠 간 계속되는 만한전석 형식으로 연 본인 생일잔치에서 과식한 뒤 서태후는 이질에 걸렸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간 유폐되었던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느닷없이 38세 나이로 자녀 없이 요절한다.

이때 서태후는 조카인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듣고도 매우 담담했으며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과 자신의 심복 영록[10]의 딸 적복진 구왈기야 여우란 사이에서 낳은 불과 3살 밖에 안 된 아들[11]을 다음 황제로 지목하는데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였다.

서태후의 이상한 태도와 느닷없는 광서제의 죽음으로 황실을 조종하던 서태후가 광서제를 직접 독살했거나 혹은 독살에 동참[12]했다는 설이 퍼져 있었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광서제가 사망하기 전날 이미 푸이를 궁궐로 데려오고 순친왕을 섭정으로 세우라는 유지를 광서제의 이름으로 반포했다고 한다. 당시 광서제가 서태후의 허수아비였음을 생각하면 서태후는 이미 광서제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후계자 선정을 공식화한 셈.

반대로 같은 날 광서제 본인은 치료를 위해 전국에 의사를 구하는 유지를 내렸으므로 광서제의 병세가 적어도 죽음을 준비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실제로 후대에 시신을 조사해본 결과 독극물인 비소가 다량 검출되어서 사인이 독살로 확인되었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의심한 대로 서태후가 광서제 독살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즉, 3살짜리 푸이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병을 털고 일어나 선통제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워 또다시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질을 이기지 못했고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인 1908년 11월 15일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생을 마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의 유언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였다. 사후 장례가 치러졌는데 청나라 조정이 120만 냥의 거금과 수천 명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서태후의 장례식 행렬에는 진시황릉처럼 종이로 만든 신하들 모양의 인형은 물론 신식 군복을 입은 종이 병사들, 종이 시계, 종이 자동차, 종이 유럽식 이륜마차 등이 있었다. 노쇠하였지만 72세[13]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니 당시로는 상당히 오래 산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썩은 기둥인 서태후가 죽으면서 안 그래도 위태로운 청나라의 멸망은 가속화되었고 그녀가 죽은 4년 후인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며 쑨원을 중심으로 한 국민 정부가 세워졌다. 1920년대에 중국 북부에 군벌이 난립하고 이를 통제해야 할 국민정부는 어떤 힘도 쓰지 못해 이들의 만행을 지켜볼수 밖에 없는 등 중국 전체는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어떤 보호를 받지 못한 북경 인근에 있던 순치제[14]를 제외한 청나라의 황릉은 군벌들에 의해 여러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도굴을 당했다.[15] 그리고 이 도굴작전을 주도한 군벌 쑨뎬잉은 군자금을 마련하는 동시 시범 케이스로 서태후의 무덤인 정동릉(定東陵)을 털기로 하면서 온갖 수모를 받는다. 당시 무덤에는 늙은 묘지기 1명만 지키고 있어서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무덤을 파던 도중 입구가 돌로 막혀 있자 폭약으로 폭파해버리고 들어갔다. 쑨뎬잉이 부장품을 챙길 때 서태후의 시신은 옷이 벗겨짐은 물론 도굴하던 군인들이 입에 넣어진 야명주를 꺼내기 위해 시신을 입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세로로 갈라버린 후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고 한다.[16] 어떻게 보면 과거 자신이 해온 만행을 되돌려 받은 응보인 셈.

이때 쑨뎬잉은 약속한 약탈 시간이 다하자 즉시 떠났고, 도굴 도중 죽은 부하들의 시체까지 가지고 갈 정도로 철저하게 숨겼다. 뒤늦게 도굴 사실이 드러났지만 쑨뎬잉은 국민당 간부들에게 동릉 도굴 사건때 얻은 각종 보물들을 뇌물[17]로 바쳐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선통제는 이 사건을 듣고 서태후의 영전을 올리며 추모를 하고 이 사건을 묻어버린 국민당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고 일본에 협조했다.


[1] 훗날 친정은 만주 양람기에서 만주 양황기(鑲黃旗)로 편입되었다(황후와 황태후의 친족은 원칙적으로 정황기나 양황기 둘 중 하나여야만 했다).[2] 청나라에서는 후궁의 소생이 황제가 될 경우 생모인 후궁도 황후로 올리며 이때 정실 황후는 '모후 황태후'가 되고 황제의 생모인 후궁은 '성모황태후'가 된다. 물론 같은 태후라 할지라도 선황의 정실황후였던 모후황태후가 보다 높은 쪽으로 여겨진다.[3] 실제로 서태후와 그녀의 측근인 유덕령[18]을 포함한 궁녀들이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위의 액자에 "대청국 당금 성모황태후 만세만세만만세"라고 쓰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4] 서태후가 동치제가 어린 시절 동태후에게 양육을 떠맡긴 것도 있었던 것도 있다지만 서태후는 자식 농사는 완전 수준 미달이었다. 특히 광서제를 대한 것을 보면 학대라 할 수준이었다.[5] 어이없고도 아이러니하게도 효철의황후를 간택한게 바로 동태후였다. 즉, 동태후는 동치제에게는 나쁜 의미라도 겉으로나마 자애로운 (양)어머니였을지 몰라도 좋은 시어머니는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동태후도 동일항렬인 광서제의 즉위에 일조를 크게한 입장인지라 선황제의 정실황후라서 예법상 태후가 될 수 밖에 없는 효철의황후가 눈엣가시라서 그렇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해도 자식이 아예 없고 태후로써의 권력도 후궁출신 서태후면 몰라도 똑같은 간택 정실황후인 동태후에게는 무조건 밀리는 효철의황후 입장에서는 동태후도 서태후와 동급 내지 어쩌면 그 이상의 원수가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서태후보다 높은 지위의 모후황태후가 되거나 정실 황후라는 막강한 정통성으로 최소한 더 높은 급의 태후가 될 수 있는 효철의황후가 자살로 죽는 바람에 이후 서태후가 동태후의 죽음과 동시에 더욱 쉽고 빠르게 권력을 독점해버렸으니 결과적으로 서태후만 좋은 일 시킨셈.[6] 사후에 '賢'(현)의 시호를 받아 '순현친왕'(醇賢親王)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냥 순친왕이라고 불리기보다는 이렇게 시호를 붙인 작위명이나 본명 혁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아들 재풍, 그리고 재풍의 아들 부의가 역사적으로 워낙 유명한지라 구분이 필요해서 그렇다.[7] 혁현은 함풍제와 공친왕의 동생이라 서태후는 형수이자 처형인 셈이다. 그러나 유일한 아들 재첨이 부모조차 영문도 모른 채로 입양되었다는 소식에 혁현 부부는 서태후의 권력욕에 몸서리를 쳤다. 특히 혁현은 통곡하다 실신까지 했고 아들의 안위를 위해 서태후의 예스맨이 되어 설설 기어야 했다.[8] 위안 스카이의 배신이 결정적이었다 하나 당시 청나라는 18 ~ 19세기에 인구가 폭증했지만 행정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상당한 행정 공백이 있었기에 이런 상태에서 광서제와 지지 세력이 생각하는 만큼 개혁에 성공하기란 불가능했다.[9] 이때 서태후를 보좌하여 신임을 얻어 양광총독까지 승진한 사람이 훗날 중화민국의 정학회 정객의 거두 천춘쉬안이다.[10] 만주팔대성인 구왈기야씨와 팔기군 정백기 기인 출신이며 서태후를 도와 무술정변을 일으키고 위안스카이를 발탁했다. 이 둘의 관계는 보통 돈독한게 아니었다보니 여러 루머가 돌았으며 펄벅의 소설 《서태후》에서는 서태후의 숨겨진 연인으로 묘사되었다.[11] 다만 청나라의 황위 계승 원칙은 황제가 후계자 없이 붕어할 경우 아랫 항렬에 해당하는 황족이 황위를 계승해야 했기에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이 아니라 조카인 푸이를 즉위시키는 것이 오히려 법도에 맞았다. 계승 자격이 있는 황족 중에서는 푸이가 가장 가까운 황족이었고 광서제의 다른 조카들도 푸이보다 1~2살 많은 정도였다.(제일 나이가 많은 조카인 푸궁은 1904년생이었다.)[12] 독살은 위안스카이가 주도했다는 설도 있다. 위안스카이는 광서제를 배신한 터라 광서제의 증오를 받았고 위안스카이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서태후도 위안스카이에게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13] 다만 매체 등에서 음력 생년월일을 반영해 73세라 하는 경우도 있다.[14] 왜 순치제만 안 털렸냐면, 애초에 부장품이라곤 부채와 신발밖에 없다고 전해져서 그렇다.[15] 서쪽에 청서릉, 동쪽에 청동릉이 있었는데 심양에 있던 천명제숭덕제의 무덤을 제외하면 역대 황제와 황족의 무덤은 모두 여기 있었다.[16] 항간에는 야명주가 입 안에 있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시체가 빼자마자 순식간에 썩어버렸다는 말도 전한다. 쑨뎬잉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야명주가 시신의 부패를 막아준다고 하는데 내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썩어있었다."고 한다.[17] 심지어 서태후의 보관에 박혀있던 진주가 장제스의 아내인 쑹메이링의 신발 장식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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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한족 주불대사인 유경과 프랑스인 어머니의 딸로 어렸을 적 프랑스에서 자라 서양에 정통했기 때문에 말년의 서태후가 불러 궁녀로 일하면서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서태후가 자신과 동생인 유용령(나중에 중국 최초의 현대 무용가가 된다.)을 친왕의 딸급인 군주라고 봉하여 궁내에서만 통용하게 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보통 덕령공주, 덕령군주 등으로 불리지만 황족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공주는 아니다. 이후 궁을 나와서 미국으로 이주한 뒤 회고록을 썼는데 소설식의 회고록이라 픽션이 섞여있긴 하지만 말년의 서태후와 청나라 황실이 잘 기록되어 있어 그간 서양열강의 여러 자료에 악녀로 왜곡된 서태후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