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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FC/신태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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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감독
신태용
<colbgcolor=#ffe462><colcolor=#ed145a> 감독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태용 / 제6대
주장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김정우 / 제10대 (2009)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장학영 / 제11대 (2010)

[[호주|]][[틀:국기|]][[틀:국기|]] 샤샤 / 제12대 (2011~2012)
성적 AFC 챔피언스 리그 2010 (우승)
2011 하나은행 FA CUP (우승)
2012 니콘 아시안 챌린지컵 (우승)

1. 개요2. 선임 과정3. 활동4. 총평

[clearfix]

1. 개요

성남 일화 천마[1]의 6대 감독 신태용 체제를 정리한 문서.

2. 선임 과정

본래 김학범 감독 아래서 코치로 활동할 예정이었으나 김학범 감독이 갑작스레 경질됐고, 박규남 당시 성남 사장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감독은 물론 지도자 경험도 일천했기 때문에, 우선 감독 대행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3. 활동

3.1. 2009년

2009 시즌부터 친정 팀 성남 일화 천마를 맡아 리그와 FA컵에서 준우승을 해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성남은 K리그에서도 알아주는 부자 구단이었으나, 신태용 감독이 부임한 무렵에는 있는 선수도 털려 나가는 가난한 구단으로 전락했다.

감독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이 이동국, 김상식전북 현대 모터스트레이드하고 손대호라돈치치와 트레이드했으며 김영철, 박진섭을 방출한 것이었다. 한편 이동국은 당시 먹튀였으니 그렇다고 쳐도 김상식의 숙청에 대해서는 성남 팬 사이에도 논란이 많았다. 훗날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신태용 감독 본인의 결정이 아니었다고. 구단에서 리빌딩에 착수하면서 이동국은 남기고 김상식과 김영철을 내치려고 했다. 이동국과 김상식을 남기고 싶어했던 신태용이 '전부 아니면 전무'라고 반발하자 구단은 전무를 택한 것이다.[2]

초기에는 이러한 팀 상황과 맞물려, K리그에서 명장으로 꼽히는 김학범 감독의 후광을 벗어날 수 있는가 팬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였다. 실제로 2009년 시즌 초반에는 성적이 좋지 못해 성남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기도 했으나 그 해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한 포항 스틸러스를 원정에서 플레이오프 준결승에서 1-0으로 이기고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비록 전북 현대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고 FA컵도 준우승했지만 부임한 첫 해, 그것도 감독 대행 신분으로, 선수층마저 예전같지 않은 팀에서 일궈낸 성과치고는 엄청난 성적을 보여주었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2+1년 계약을 맺어 정식 감독으로 승격했다. 당시 신태용 자신도 이런 급작스러운 발탁을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에 지도자 자격증조차 없었다.

그가 은퇴할 시기와 감독 대행으로 부임할 때는 성남 일화에서 변변치 않은 지원으로 레전드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라는 비난이 구단을 향해 빗발쳤는데, 이 이후로는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현역으로 활약하던 시절에는 우승 청부사라고 불렸던 세르비아 출신 레전드 스트라이커 샤샤 드라쿨리치가 뺨을 맞고 설설 기었을 정도로 엄격한 군기반장이었으나,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형님같은 자상한 리더십과 자율 중시[3]를 내세워 군대식 기강잡기로 유명하던 성남을 일시에 바꿔 버렸다. 나중에 국가대표 감독이 됐을 때는 비효율적이라고 여겼던 대한민국 축구의 의례적인 문화인 합숙을 폐지하기도 했다.

감독이 되면서부터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팀을 꾸렸지만 선수들이 해이한 모습을 보일 때, "나랑 김도훈 코치가 합작해서 넣은 골만 200개가 넘는다. 근데, 너흰 뭔데 빈둥거리나?"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4]

훗날 신태용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성남에서 쫓겨나듯 은퇴하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선수와 코치로 있던 시절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목격한 코칭 스텝과 선수간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컬쳐 쇼크였다고 한다.

2009년 7월 스페인에서 개최한 2009 피스컵 안달루시아에 출전해서 유벤투스에게 0:3 패하여 아쉽게 탈락했으나, 스페인의 세비야FC와 0:0 무승부 승점 1점을 기록하는 이변을 일으키며, 신인 감독으로서 가능성을 보여줬다.

2009년 11월 인천과의 플레이오프에서는 레드 카드를 받아 퇴장을 당하자[5] 관중석 한 켠으로 가서 무전기로 지휘를 하고, 이후 포항과의 4강 플레이오프에서도 계속 무전기로 지휘했는데, 무전기로 지휘했던 경기를 모두 이겼다. 게다가 인천과의 경기에서는 골키퍼로 뛰고 있던 정성룡필드 플레이어로 바꾸는 과감한 전술을 시도하고 심지어 출전 정지가 끝난 뒤에도 더 높은 곳에서 보겠다며 또 관중석에서 무전기로 지휘를 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무전기 매직"이라 불렀다.

3.2. 2010년

2010년에는 또 선수가 털렸을 때[6] 비록 리그는 4위[7]로 마치긴 했으나 정식감독 데뷔 시즌에서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거두며 K리그를 대표하는 명장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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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감독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함으로써 현재까지도 선수,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8] 이는 그의 별명인 과르디태용/태용디올라라는 별명이 더욱 굳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에서도 국가간 최상위 클럽대항전 우승을 선수, 감독으로 모두 경험한 인물들은 10명도 채 안 되며, 아시아에서는 신태용 감독이 최초이자 유일하다.

그리고 2010 UAE클럽월드컵에 아챔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하였고 비록 챔스 우승팀 인테르나치오날레에게 0:3, 남미 챔피언 브라질 인테르나시오나우에게 4:2로 졌지만, 개최국이자 아라비안 걸프 리그 우승팀 UAE 알 와흐다를 4:1으로 격파하며, 클럽 월드컵 4위를 기록하였다.

구단에서는 언제나 신태용 감독에게 지원을 많이 못해 줘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이에 신태용은 "이런 상황에서 팀을 승리로 이끌어나가는 게 감독의 몫입니다."라고 대답했다.

3.3. 2011년

2010년 시즌이 끝나고 최성국, 정성룡, 마우리시오 몰리나 같은 성남의 주축 선수들이 죄다 팔려나갔다. 대인배의 모습을 보이던 신태용 감독도 "구단이 돈이 없다는데 어쩌나..."라고 말하면서 수원이나 전북 같이 돈을 푸는 구단이 부럽다는 말 또한 할 정도로 답답함을 호소하였다.

예상대로 얇은 선수층으로 많은 고생을 하고 있다. 그나마 남아있던 라돈치치는 부상으로 전반기에 거의 못 뛰고 있고, 있는 선수는 부상, 없는 선수는 없기에 오죽했으면 팀 성적이 안 나와도 팬들이 감독을 까기 보다 구단을 먼저 까고 감독을 위로할 정도. 본인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못 해 먹겠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결국 2011 시즌 리그에서 10위의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6강 진출은 실패했지만, 이렇게 스쿼드가 토막났는데도 2011 하나은행 FA컵 결승에서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1-0으로 꺾고 FA컵 우승하여, 극적으로 2012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따냈다. 이로써 선수, 감독으로 리그, 컵대회, 챔피언스리그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한 첫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김정우, 라돈치치, 사샤 모두 이적설이 나오는 등 선수진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실제로 지금까지 신태용 감독은 구단의 부족한 지원에도 "있는 전력으로 성적을 내는 것이 감독"이라는 태도를 견지했지만 FA컵 우승 이후 아챔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구단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성남 팬들은 우스갯소리로 신태용 감독이 성남 일화 천마 선수단 가운데 가장 몸값이 높을 것이라고 말한다.

3.4. 2012년

2011 시즌 종료 후, 다행히도 성남이 다시 돈을 풀기 시작하면서 과거 K리그의 큰손으로 불리던 시절로 돌아갈 낌새를 보였다. 그리고 2011년 12월 23일, 성남과 3년 재계약에 성공했다.

2012년 4월 28일 수원전이 끝나고 기자 회견장에서 격렬하게 판정에 불만을 토로하다 벌금 500만원 징계를 받았는데, 성남 팬들이 자발적으로 자체 성금 모집에 나섰다. 한 중년 팬이 500만원을 보내기도 한 끝에 약 700 만원이 모였고, 연맹은 벌금을 유소년 심판 교육에 사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2012년 7월 피스컵에서 잉글랜드의 선덜랜드AFC를 격파하며 준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깜짝 성과를 보였던 지난 2년과 달리, 2012년에는 구단이 억지로 만들어낸, 한요윤 덕분에 팀 자체가 파탄나면서 K리그 상위 스플릿은 물론 FA컵, 아챔 모두 일찍이 탈락하면서 그렇잖아도 어두웠던 구단에서 전격적으로 다른 팀성남 출신 감독을 데려오면서 신태용은 또 한번 성남에서 쓸쓸히 물러났다.

4. 총평

2010년을 전후해서 1960년대 생 40대 젊은 감독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면서 K리그 감독층의 세대교체가 진행 중인데, 나이에 걸맞지 않은 노련미와 배짱을 보이면서 가장 앞날이 기대되는 인물이다.

비록 국가대표로 활약한 경험은 적지만, 차근차근 감독으로서 지도력이나 차근차근 쌓아올리는 커리어를 봤을 때 유력한 차기 국가대표 감독 후보. 앞으로 몇 년 내에 대표팀 감독, 코치진 역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다면 가능성이 있다.

감독이 되어 얻은 별명은 과르디태용대한민국의 모예스가 있다. 전자는 선수 출신 감독이자 젊고 능력있다는 점에서 전 FC 바르셀로나와 전 FC 바이에른 뮌헨, 현 맨체스터 시티 감독 펩 과르디올라를, 후자는 없는 살림에도 팀을 참 잘 꾸려 나간다는 점에서 에버튼 FC을 맡았던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을 빗댄 별명이다.

특히 2011 시즌 종잇장처럼 얇은 스쿼드를 가지고 승점을 관리하는 대신 공격하는 축구를 밀어붙였다.[9] 때문에 일각에선 전술적 아집이 심한 감독이란 비난이 일었다. 물론 2009 플레이오프, 2010년 아챔 우승이나 2011년 FA컵 우승처럼, 작심하고 노린 토너먼트 경기들을 복기해 보면 그라운드의 여우답게 상대에 맞춰 용의주도하게 전술을 바꾸는 감독이다. 하지만 리그에서는 전술적 고집이 심한 편이 맞으며, 외국인한테 공격을 다 맡기며 경기를 풀어 나가려는 성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승점관리를 잘 못하며, 실제로 리그에서는 큰 두각을 보여주질 못했다.[10] 이런 성향은 특히 2012년에 완전히 발목을 잡고 있다.

2011년 신태용 감독이 공격적인 축구를 밀어붙인 이유는 '신인들의 경험을 쌓아 주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그러한 팀 운영은 전성찬, 박진포라는 걸출한 신인을 만든데도 한몫을 했다. 이런 성향은 그 전후 시즌에도 드러나는 편인데, 베스트 스쿼드에서 경기 초반이나 후반에 자신이 키우려는 선수를 집어넣는 성향이 있다. 이것은 베스트 11을 고집하던 김학범 감독과 대비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2010 시즌 홍철을 윙 포워드로 장학영과 함께 출전시키며 경기감각을 키웠고, 조재철, 전성찬도 그런 식으로 키워 냈다. 박진포김성환은 팀 내에 동일한 포지션의 주전이 없어 기회를 잡은 다른 케이스이다.

그리고 선수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면서 풀고 조이고 하며 선수들이 최상의 경기력을 발휘하게 하는 데는 최고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성찬, 조재철, 홍철, 조동건 등 신인들의 능력을 발견하고 살리는 등 준수한 결과를 남겨 왔으며, 선수들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해 그들에게 맞는 포지션을 새로 찾아주는 등 눈썰미도 예리하다.[11]

그러나 2012년 중반부터는 비판이 늘었다. 원하는 선수들을 모두 영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의 성적은커녕 땅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야심차게 사왔던 선수들 중에 임종은, 김성준을 빼면 성공한 영입이 없었다.

또한 팬들이 크게 반발했던 사건이 한상운장학영트레이드다. 한상운이 2011년 후반기부터 소위 국대병에 걸려 부진했음에도 팀 레전드[12]이자 소집 해제를 앞두고 있던 장학영 + 15억 원에 부산 아이파크트레이드했다. 그러나 2012년에 부진을 거듭하자 한상운을 J리그주빌로 이와타에 17억 원의 이적료를 받고 팔았다.

한편 장학영을 내줄 정도로 기대를 걸었던 왼쪽 풀백 홍철은 발바닥 수술 이후로 폼이 완전히 떨어지고, 심지어 팬들과 SNS상에서 다투는가 하면, 윙 포워드로 다시 전향했다. 결국 성남의 왼쪽 풀백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남궁웅이 맡았었다.

이러한 영입 실패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선수단 장악 능력이 떨어졌다는 점이다. 4월 중순 터진 전지훈련의 강도에 대한 용병들의 불만[13], 텐진으로 이적한 요반치치의 불만, 그리고 대놓고 태업하던 윤빛가람 등, 폭풍지름의 후유증을 감당하지 못하고 팀 스스로 무너졌다.

또한 승강제를 위한 스플릿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2012년 일정은 살인적이였는데[14] 몇 년새 얇아진 스쿼드와 전성찬, 이창훈 등의 장기부상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동료가 골을 넣어도 나머지 선수들은 축하도 없이 멀거니 바라만 보던 깨강정 팀워크, 에벨톤과 박진포의 콤비플레이로 최전방까지 오더라도 서로 믿지 못해서 패스를 주지 않던 광경까지, 모래알 팀워크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어찌나 심하게 팀 내부에서 곯아버렸으면 신태용 감독이 누구라고 이름만 밝히지 않았을 뿐, 언론에 대놓고 울화를 터뜨렸을 정도.

그래도 특유의 전, 후반에 기대주를 교체해 집어넣는 방식으로 전현철, 김평래, 임종은, 윤영선, 하밀 등을 키워냈던 점은 평가할 만하다. 특히 센터백 임종은-윤영선 라인의 성장은 아직은 아쉬운 부분이 있어도 불안했던 성남 수비에 안정감을 넣어 주었다.[15] 하지만 역으로 그렇게 키웠던 선수들까지 빼면서 쓴 김현우, 박세영, 윤승현 등의 실패, 무엇보다 센터백 자리에 야심차게 영입한 황재원의 폭망이었다.

공격은 죽어라 하는데 막상 한 방도 없고, 골도 없는 소위 지루 축구로 인해 비난을 받고 있다.[16] 가뜩이나 선수단 면면이 크게 바뀌면서 상당 기간 손발이 안 맞아 고생할 텐데, 여기에 팀 케미스트리까지 붕괴해 버렸다.

일단 팀 레전드에, 사실 지원은커녕 무자비하게 뺏기기만 하던 시절 동안 이뤄 낸 그 동안의 업적은 놀라울 정도이며, 거기다 나이까지 젊은 신태용보다 나은 국내파 감독을 크게 찾기 힘드니 두고 보자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특히 문선명 총재의 사망과 겹쳐 팬들이 다시 불안감을 안은 작금의 태세에, 만약 예산이 다시금 시도민구단화가 진행될 경우 대처법이 없기 때문에 팬들은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결국 시즌 후반기에도 성남은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했고, 14승 10무 20패 리그 12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는다.

또한 통일스포츠는 재정난을 이유로 그 해 11월 말 여자축구 충남일화 팀을 해체하면서 팬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그리고 구단에서 신태용 감독 및 코칭스텝 전원의 사표를 요구했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고, 이는 곧 언론에서 확인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11월 28일 강원 FC와 리그 최종전이 끝난 뒤[17] 사표를 요구했고, 신태용 감독이 거취를 고심하는 와중 7일 재차 사표를 종용했고 결국 신태용 감독이 사표를 썼다고 한다.

비록 성적부진으로 여러 말이 많이 나온 한 해였지만, 누가 봐도 높으신 분들의 책임회피 + 희생양 찾기 + 꼬리자르기 콤보를 얻어맞고 사실상 경질당한 셈이라 전반적인 여론은 신태용 감독에게 동정적인 편이다.

새로 성남의 감독으로 부임한 안익수 감독이 팀의 주축인 김성환, 임종은 등을 내보내면서 비판받자 상대적으로 지지도가 올라간 모습을 보여 줬다.
[1]성남 FC의 전신[2] 방출된 이동국과 김상식은 나란히 전북 현대로 이적한 후 최강희 감독 밑에서 화려하게 비상했고 2009년 챔피언 결정전에서 친정팀인 성남 일화에 비수를 꽂는다. 저 둘 대신 들어온 문대성홍진섭은 이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며 포텐이 터지지 않은 채 결국 성남을 떠나고 만다. 김영철은 전남에서 1년 뛰고 은퇴했다.[3] 예를 들면 2010년 화이트데이에 인천과의 경기가 있었을 때 "오늘 이기면 분위기 좋게 여자 친구랑 와인을 마시는 것이고 반대로 지면 성질내면서 소주를 마신다고 생각을 하라고, 그건 너희들이 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면서 선수들을 자극했다. 그리고 성남은 인천에 6-0으로 이겼다.[4] 현역 시절에 거친 박종환-이장수-레네-차경복 감독은 비록 선진 감독은 아니었으나 각자 개성은 달랐고, 이들이 가진 장단점을 취사선택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5] 당시 사샤유병수가 몸싸움을 버리다가 사샤가 유병수의 머리를 밟자 주심은 고의로 판명하고 사샤에게 레드카드를 꺼내 퇴장시켰다. 이를 본 신태용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던지면서까지 거칠게 심판에게 항의를 했다. 결국 신태용도 퇴장 당했고, 2경기 출전 정지를 당했다.[6] 김정우는 2009년 말 상무에 입대, 이호는 2010년 초 UAE로 옮겼다가 여름에 J리그로 옮겼다. 심지어 선수 영입하는 데 6천만원이 없어서 영입 못했다고 한다.[7] 정규시즌 기준 5위, 플레이오프 최종순위 기준 4위[8] 2021시즌에 김기동이 2번째가 될 수 있었으나, 결승에서 알 힐랄에게 2:0으로 패배하는 바람에 실패했다.[9] 이 방식은 변병주 감독이 2008년이근호를 앞세워 대구 FC를 공격 우선으로 이끈 적이 있다.[10] 2009년 K리그 준우승도 4등에서 시작해서 PO 토너먼트로 결승전까지 간 것이다.[11] 예로 홍철은 본래 FW였다가 DF로 전향한 케이스. 그리고 홍철은 지금 국대 승선에 성공했다. 장학영이 공익근무요원 복무를 위해 팀을 떠난 직후 성남의 구멍이라고 불리던 좌측 풀백을 잘 막아주고 있었다. 게다가 신태용 감독의 공격적인 성향과 과거의 FW였던 경험이 시너지를 일으켜서 잘 크고 있는 중. 다만 고재성처럼 실패한 사례도 있다. 측면 공격수였던 선수를 장학영급으로 키울 수 있다고 오른쪽 풀백으로 돌렸으나 욕만 먹었다. 그 후 발전은 하였지만 수비력은 끝내 나아지지 않다가 정작 중국에 가서 측면 공격수로 터졌다. 2012년 경남에서 가서도 윙포워드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풀백 전환은 실패한 사례가 되었다.[12] 장학영은 일화가 성남시에 완전 정착한 이후 선수로서는 사실상 유일한 레전드이자 원클럽맨이었다.[13] 신태용 본인이 스스로 밝혔다.[14] 한 시즌 총 44경기. 폭서기에도 1주 2경기를 벌이고, 작년은 총 30경기였다.[15] 그리고 이때 욕 먹어가며 키운 윤영선은 8년 뒤에 잘했다.[16] 득점 운이 너무 안 좋은 것도 있었다. 들어가야 할 슛이 아쉽게 골대를 맞고 나오거나 골키퍼 손에 막히고 다시 골대를 맞고 나오는 등이 있다.[17] 일정상 마지막 경기는 12월 1일 상주전이지만, 상주가 몰수패를 당해 자동으로 2:0 승리가 된다. 따라서 강원전이 최종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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