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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3:38

성영훈/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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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교시절2. 프로 입단 후
2.1. 2009년2.2. 2010년2.3. 2011~2012 시즌2.4. 2013 시즌2.5. 2014 시즌2.6. 2015 시즌2.7. 2016 시즌2.8. 2017 시즌2.9. 2018 시즌

1. 고교시절

파일:덕수고 성영훈22.jpg
덕수고등학교 시절.
프로 입단 이전
파일:external/cafefiles.naver.net/20080328_xosux.gif
고등학교 시절 모습
2000년대 서울이 배출한 최고의 투수라고 불리던 성영훈은 이미 덕수중학교 시절부터 묵직한 직구로 스포츠신문에 단독기사가 실릴 정도로 촉망받는 선수였다. 일반적으로 최고구속이 140km/h 초반만 나와도 파이어볼러 소리를 듣는 고교야구무대에서 152km/h의 공을 뿌리던 성영훈은 당연 주목받는 대상이었다.

당시 고교 최대어로 150km/h 중반에 달하는 빠르고 묵직한 직구와 날카롭게 휘어지는 슬라이더는 초고교급으로 평가받았다. 텍사스 등 몇몇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구단은 지난해 말부터 성영훈 영입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으나, 성영훈은 연고 팀인 두산 베어스의 구애 끝에 총액 5억 5,000만 원[1]에 입단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는 현재까지도 역대 고졸신인 계약금 중 다섯 번째로[2] 높은 금액이다.

1차 지명을 나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은 성영훈의 마지막 고교시절은 화려했다. 제42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서울고와의 준결승 전에서 8.1이닝을 노히트로 막으며 승리 투수가 됐고. 이튿날 열린 오지환이 이끄는 경기고와의 결승전에서도 7이닝 무실점의 역투로 1-0 승리를 거두고[3] 덕수고의 사상 첫 대통령배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황금사자기 결승에도 등판했다. 황금사자기 성영훈

제23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로 선발되어 당시 대표팀의 에이스로서 3승(대회 1위), 1.32방어율, 36탈삼진(대회 1위)을 기록하며 대회 MVP로 선정되었다. 결승전에서 감기몸살에 걸린 상태에도 완봉승을 찍을 정도로[4] 국내뿐 아니라 세계무대에서도 동년배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실력을 보여주었다.

입단 기념으로 두산 홈경기에서 시구를 하기도 했다. 기사 당시 시구를 원바운드로 했는데 그 뒤 싸이월드에 남긴 말이 선예도 스트라이크 던지는데... 였다. 참고로 선예는 2007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시구를 했다. 관련 포스팅

2. 프로 입단 후

파일:no.22 성영훈.jpg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svg 두산 베어스 선수시절
고교때까지 2000년대 서울이 배출한 최고의 투수라고 불렸지만 프로에 와서 고교시절 엄청난 혹사로 7년동안 부상에 시달리다가 결국 은퇴한 비운의 선수.

2.1. 2009년

파일:09성영훈.jpg

2009년 4월 8일 한화전 2:2 동점, 7회 2사 만루상황에서 프로 데뷔 첫 등판을 하게 된다. 첫 상대한 타자 윤재국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주어 팀의 결정적 패배로 이어졌지만 이 후 디아즈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1.1이닝 2탈삼진 1볼넷으로 데뷔전을 치렀다.데뷔전 기사 이후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며 결국 프로 데뷔 첫 해를 별다른 활약상 없이 마감지었다. 한편, 성영훈은 12월 국제야구연맹(IBAF)에 올해의 주니어 선수로 선정되었다.관련기사

2.2. 2010년

파일:10성영훈.jpg

프로 첫 해를 재활로 보낸 성영훈의 구속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중간계투로서 조금씩 제 역할을 해 주면서 그의 프로 생활은 탄탄대로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야구 인생에 시련이 닥쳤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0년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들지 못했고, 팀은 2연패 뒤 3연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두환을 대신하여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합류했다. 원래는 김승회, 이두환 대신 김성배, 이용찬이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들었으나 이용찬이 음주운전 파문으로 여론이 좋지 않자 이용찬 대신 성영훈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팀이 시리즈 전적 2승 1패로 이기던 2010년 10월 1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 4차전에 등판했는데, 이날은 성영훈 본인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팀이 스코어 7:2로 끌려가던 5회초 2사 만루상황에서 5번째 투수로 등판한 그는 첫 타자 김상수를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냈다. 그리고 여전히 스코어 7:2인 6회초 1사에서 2010년 플레이오프 시리즈 내내 미쳐있던 박한이를 삼구삼진으로 잡으며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삼구삼진 영상

그렇게 호투를 하다 여전히 스코어 7:2인 7회초 1사 후 6번타자 조영훈과의 대결에서 2구째 공을 던지고서 오른쪽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그는 한 이닝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구에 이어 4구째를 던지는 순간, 또다시 팔꿈치에서 '뚝'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기나긴 시련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성영훈은 바로 김창훈으로 교체되었고, 김창훈조영훈에게 볼넷을 내줬지만 7번타자 진갑용을 우익수 플라이, 8번타자 신명철을 포수 파울플라이로 아웃시켜 성영훈의 실점은 없었다.[5]

성영훈은 이날 1⅔이닝 21투구수 1몸에 맞는 공 1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8:7로 패했다.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2이닝 1볼넷 1몸에 맞는 공 1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4.5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데뷔 때부터 지속적인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였지만 당시 지정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 '정신적인 부분이다'라고 진단 결과를 내렸다. 그의 부상은 덕수고 시절의 혹사와 구단의 부주의함으로 일어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각광받던 고졸 유망주는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미국에서 수술대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2011년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를 하였다.

2.3. 2011~2012 시즌

미국에서 토미존 수술을 받고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악구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하였고, 복무 2년차부터 다시금 공을 잡기 시작했다. 복무 중에도 2군에서 재활을 하며 복귀를 위한 준비를 했다.

2.4. 2013 시즌

2013년 1월 2일 소집 해제되었다. 2013 스프링캠프에 합류했지만, 어깨 부상으로 재활군에 머물렀다.

2.5. 2014 시즌

시즌 후 마무리 훈련 명단에서도 제외되고, 오랫동안 마운드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보니 두산 팬들도 성영훈을 포기하는 듯. 그래도 후에 노경은처럼 터져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후 등번호를 김동주가 방출되면서 공석이 된 18번을 달게 되었다.

2.6. 2015 시즌

2015년에도 시즌의 절반이 지날 동안 출전하지 않으며 민간신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0년을 마지막으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4년 반 동안 2군에서 공 하나라도 던지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

일본에서 검진 결과, 수술받았던 부위가 잘못되어 재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재활 중이라고.

2015년 6월에는 어깨 인대 손상도 발견되어 어깨에도 칼을 댔다고 한다.

2.7. 2016 시즌

호주 스프링캠프 명단에 포함되었다만 부상 부위가 완전히 회복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도 안 보였기 때문에 살아있는지라도 보고 싶다며 팬들은 선수단 출국 당시 공항 기사사진을 기대했으나 김강률과 함께 일찍 따뜻한 곳에 가서 재활하고 있으라는 뜻으로 호주에 먼저 가 있다고 한다.

지난 6월에 어깨 수술을 받아서 '16시즌 후반기에나 복귀 가능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팬들은 후반기라도 복귀할 수 있다는 게 어디냐며 제발 터지기를 기원하는 중이다. 두산의 2009년 드래프트 동기이 '15시즌 단체로 대활약하며 페넌트레이스 3위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는데[6], 정작 그 해의 드래프트 대상자 중 일언반구의 이견도 없었고 "안 터지면 이상하다", "21세기 서울이 배출한 최고의 투수다" 등의 소리까지 들은 최대어였던 1차 지명자가 고교 시절 혹사로 인한 부상 때문에 몇 년간 경기에서 공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었으니.[7]
파일:NoFxOxw.jpg
게다가 2015년 시즌을 이끌었던 동기들 중 드래프트 당시 대졸신인이었던 분을 제외하면 전부 2008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우승멤버다. 농담이 아니라 두산 2009년 드래프트의 마지막 퍼즐이 1차지명 성영훈인 셈. 기나긴 재활에도 불구, 구단이 육성선수 전환도 시키지 않고 쭉 데리고 있었던 걸 보면 확실히 포텐 하나는 역대급이 맞긴 하다. 이번 시즌엔 제발 1군에서 볼 수 있길 바랄 뿐... 두산의 미래 '에드먼턴 키즈', 그들의 특별한 우정

5월 들어 두산의 2008 에드먼턴 키즈에 투수 홍영현까지 추가되면서 성영훈을 찾는 팬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홍영현이 1군 1승을 거두고 나서 인터뷰에서 성영훈이 빨리 복귀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이후로 현역 데뷔가 슬슬 현실화되고 있다. 상기한 홍영현을 비롯하여 친구들이 본격적으로 공석에서 성영훈을 언급하기 시작했고, 구단에서도 거의 생중계하다시피 재활 근황을 알리며 시즌 후반기에 불펜으로 등판을 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기나긴 재활을 끝내고 5월 28일 kt와의 퓨쳐스리그에서 6회 주자 없는 상황에 등판해서 직구로만 10개의 공을 던지고 내려갔다. 결과는 1K 1BB 인데, 놀라운 점은 어깨에까지 칼을 댔고 재활만 6년 가까이 했음에도 최고 구속이 148km/h을 찍었다는 것.

6월 4일자 화성 히어로즈 전에서는 삼진 1개와 뜬공 2개, 3자 범퇴로 이닝을 메조지었다. 최고 구속은 143km를 마크했다. 직구 제구는 좋았지만 변화구는 조금 지켜봐야 한다는 평이 다수.

너무 오랜 재활 끝에 마운드에서 공을 던져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부위 근육에 통증이 있다고 한다. 애초에 17시즌을 복귀시점으로 잡고 재활하던 상황이었고, 긴 재활과 잦은 수술에도 구속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던 만큼 차기 시즌에는 좀 더 많은 경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2.8. 2017 시즌

두산의 2017년 성적이 예상했던 바와 달리 바닥을 치게 되고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던 투수가 2군으로 내려온 홍상삼을 대신해 1군으로 콜업되자 베어스포티비, SNS, 뉴스에서 직•간접적으로 언급이 되고 있다.[8] 이에 이제 남은 건 성영훈이라고 팬들은 반색하고 있다. 최소한 두산의 고질적인 불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거라고 평가되는 두 명의 투수 중에 성영훈이 아닌 이영하를 콜업시킨 것을 보니, 아직은 몸이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올해 들어서 두 선수는 2군에서 1이닝씩 소화하고 있었다고 한다. 성영훈의 경기내용을 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1군에 등록되려면, 아직 기다려야 한다. 직구는 구위와 제구가 어느 정도 된 듯 싶지만, 고등학교 때 보여주었던 환상적인 슬라이더(변화구)는 아직 멀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애당초, 선수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근 몇 년 만에 공을 던진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아직은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점차 몸을 제대로 만들어 기다리고 있는 팬들에게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는 팬들과 달리 비관적인 시선을 보내는 팬들도 적지 않다. 그럴 만도 한 게 성영훈 나이도 올해로 벌써 27살이다. 두산 갤러리에서도 이제 포기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다. 따지고 보면 고교 시절 활약과 잠재력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거지 누가 봐도 인정할만한 성적을 보여준 게 없으니 일부 팬들의 이러는 반응이 어떻게 보면 현실적이다.

2017년 5월 19일, 정진호가 말소되며 드디어 1군에 등록되었다. 이날 베어스포티비에서 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그 것은 2008년 부터 최근에 인터뷰한 모습까지 성영훈의 모습이었다. 팬들은 정말로 기뻐했다.베어스포티비 성영훈 영상 그리고 당일 기아전에서 5회 4점차로 뒤진 무사 상황에 등판해 볼넷 후 도루자, 우익수 뜬공, 2루수 실책후 우익수 뜬공으로 21구를 던지고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이후 김강률과 교체. 제구는 완벽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괜찮은 구위를 보여주었다. 이에 팬들은 무리하지 말고 이영하와 같이 투구수 조절하면서 던지라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17년 5월 25일 러닝을 하다가 허리를 삐끗해서 허리 통증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 살을 좀 더 빼서 밸런스를 잡고 오면 금상첨화일 듯.

2.9. 2018 시즌

작년 5월 19일의 마지막 등판 이후 소식이 뜸해졌는데 2군에서 또다시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는다는 불행한 소식이 들려왔다. 이로 인해 올해 등판은 불가능해졌다. 수술 - 재활 - 복귀 준비시기까지 합치면 최소 1년 반은 쉬게 되니 복귀를 기대했던 팬들은 아쉬울 나름이다. 관련기사 이제는 모든 야구팬들이 그저 딱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9][10] 현재 구단 공식 사이트와 김정후 선수 인스타그램 확인결과, 등번호가 100번으로 변경되었다.[11] 22번은 김정후 선수가 가져간다.

결국 11월 27일에 장민익, 이원재와 함께 방출이 발표되었다. 결국 두산도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었던 모양.

방출이 결정된 후, MLB파크의 한 유저가 성영훈에게 보낸 DM이라고 글이 올라왔다. 가장 좋아했던 두산 베어스 성영훈 선수를 떠나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

그리고 그 DM을 보낸 유저가 성영훈 선수 관련 지인과 나눈 카톡 내용을 공개했다.관련 내용

그에게 10년이란 세월이 잃어버린 시간이 아닌 팬들과 함께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하니 정말 다행인듯.[12]

결국 그 당시 서울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 유망주는 부상으로 끝내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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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산 구단 역사상 신인선수 계약금 최고금액은 2005년 김명제가 받은 6억 원.[2] 1위 한기주(10억), 2위 장재영(9억), 3위 김진우, 유창식(7억), 4위 김명제, 윤호솔, 안우진(6억), 5위 성영훈, 유원상(5억 5000만).[3] 경기고는 게임 내내 동점 찬스가 많았으나 단 한번도 살리지 못했다.[4] 문제는 이게 결코 미담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이종운/평가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5] 김창훈이 볼카운트 1스트라이크 3볼 상황에서 올라와 조영훈에게 볼넷을 내줬기 때문에 조영훈은 성영훈의 책임 주자였다. 따라서 김창훈조영훈을 홈에 불러들였다면 이는 성영훈의 실점이 되는 상황이었다.[6] 두산 2차지명 1라운드 허경민은 3루 주전을 차지하고 커리어하이를 찍은 동시에 단일 포스트시즌 최다안타 기록 수립, 2라운드 박건우는 정규시즌 대타, 백업으로 쏠쏠했고 포스트시즌에서 대폭발, 5라운드 정수빈은 한국시리즈 MVP, 6라운드 유희관은 정규시즌 다승 2위(18승), 롯데 2차지명 3라운드였던 허준혁은 땜빵 선발로 시작해서 실질적 5선발로 뛰었다. 이 중 한 명이라도 없었으면 정규시즌 3위와 한국시리즈 우승은 불가능했다.[7] 성영훈 뿐 아니라 2016년 드래프트 1차지명으로 두산에 입단한 선린인터넷고 이영하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에서의 혹사 영향으로 토미 존 서저리와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8] 두 선수는 고교 때의 혹사로 인해 프로에 와서 아직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제대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1군 투수진의 믿을맨으로 자리잡을수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9] 위에 언급한 대로 워낙 역대급 야잘잘이기도 했고 프로선수가 돼서 엄청난 활약을 펼쳐줄 것이라고 믿은 선수가 아직까지도 부상 때문에 보여준 게 없으니 그럴 수 밖에...[10] 오죽하면 이제 복귀하면 어깨, 팔꿈치 상태도 말이 아닐 테니 차라리 이형종 처럼 타자로 전향하는게 어떠냐는 반응이 나올 정도.[11] 대부분 등번호 90번부터는 재활선수나 육성선수가 가져간다. 당연하지만 예외도 있다: 류현진이 대표적이다. 두산에서는 오재원이 97번을 달았던 적이 있다.[12] 정말 유망주 시절부터 엄청난 기대를 받고 입단했으나, 정작 현재 동기인 90이 두산의 주전을 차지하고 있는걸 보면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