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난 전쟁 西南戦争 | |
시기 | |
1877년 1월 29일 ~ 9월 24일 (메이지 10년 1월 29일 ~ 9월 24일) | |
장소 | |
일본 제국 구마모토현, 미야자키현, 가고시마현 | |
원인 | |
메이지 6년 정변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사족 반란 | |
교전 세력 | |
메이지 정부 | 사쓰마군 |
일본 제국 육군 일본 제국 해군 경시청[1] | 사쓰마 사족 구마모토 사족 후쿠오카 사족 나카츠 사족 |
지휘관[2] | |
메이지 천황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이고 주도 쿠로다 키요타카 오야마 이와오 미요시 시게오미 미우라 고로 다니 다데키 도리오 고야타 노기 마레스케 야마다 아키요시 노즈 시즈오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가와무라 스미요시 이토 스케마로 카와지 토시요시 | 사이고 다카모리† 나카무라 한지로† 시노하라 구니모토† 무라타 신파치† 가쓰라 히사타케† 이케노우에 시로† 사이고 고헤에[3]† 나가야마 야이치로† 벳푸 신스케† 헨미 주로타† 고노 슈이치로 |
전력 | |
약 70,000명 | 약 30,000명 |
피해 | |
약 6,400명 전사 | 약 6,800명 전사 |
결과 | |
정부군 승리, 사이고 다카모리 휘하 간부 대부분 사망 | |
영향 | |
사족 반란의 종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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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은 메이지 유신에서 9년 후인 1877년에 일본 제국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일본 역사상 본토에서 일어난 최후의 내전이다. 일본에서 세이난의 역(西南の役)이라고도 부르며, 한국에는 한자를 한국식으로 음역한 서남전쟁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이름 그대로 일본 4대 섬의 서남부에 해당하는 규슈에서 벌어졌다.[4] 한때 메이지 유신을 찬동하였지만 이후 성립된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에는 동조하지 않던 사무라이들이 규슈의 사쓰마 번에 모여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메이지 정부는 이를 8개월에 걸쳐 어렵게 진압하였다. 반란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있던 사무라이 계급이 사라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신생 일본 제국에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안겼다.
2. 발단
2.1. 메이지 유신에서 메이지 6년 정변까지
1853년 미국이 군함을 끌고와서 일본의 개항을 요구한 소위 쿠로후네 사건으로 인해 일본 대내외에 혼란이 벌어졌다. 이미 10년쯤 전의 아편 전쟁에서 영국이 어떻게 청나라를 묵사발로 만들었는지 알고 있던 막부는 막부의 힘만으로 서양 열강에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막부는 서양 국가들과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는 동시에 각 다이묘가 스스로 개혁을 수행하고 서양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게 하였다. 이 시기에 개혁(이라고 쓰고 밀무역이라고 읽는다)에 성공하여 막부 못지않는 힘을 키운 것이 사쓰마 번과 죠슈 번이었다. 당시 쇠퇴하고 있던 막부는 이 정책을 통해 다이묘들의 환심을 사고 다이묘들과 힘을 합쳐 서양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세력을 키운 지역들이 오히려 막부에게 칼을 돌렸다.많은 사족들은 개항 후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는 무능한 막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성립하기를 원했다. 부강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을 중심으로 뭉친 사족들은 천황이 있는 교토를 장악하려 시도했고 막부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조슈 정벌에 나서지만 오히려 패퇴하고 대세는 반막부 세력(도막파)에게 기울게 된다. 1867년 대정봉환으로 정권을 막부로부터 천황으로 이양시키고, 이어 1868년 왕정복고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모든 관직과 토지를 박탈한다. 그리고 벌어진 보신 전쟁에서 친막부 세력들(좌막파)을 격파하면서, 마침내 1868년 메이지 정부를 성립하기에 이르렀다(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에 참여한 사족들(유신지사)은 본래 쿠로후네 사건 때는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이 그랬듯이 존황양이의 기치아래 외세를 물리칠 것을 원했지만, 이후 서양 열강의 압도적 무력을 경험하게 되자 생각을 바꾸어 서양의 앞선 제도와 기술을 받아들여 국력을 신장해야 한다고 믿게 된 사람들이었다.
막부에 대한 반란이 성공한 이후 사쓰마와 조슈 출신의 유신지사들이 정부 요직을 장악하여, 이를 '번벌(藩閥) 정치' 혹은 '메이지 과두제'라고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신정부의 방향을 두고 사쓰마 출신 사족의 견해와 조슈 출신 사족의 견해가 항상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로 대표되는 사쓰마 사족들은 대체로 보수적이었고 사족이 중심이 되어 개혁을 이끄는 세상을 원하고 있었다. 반면에 조슈 출신 중에는 서양의 압도적 국력이 국민들에게서 나온다고 보고, 일부 고위 계급(황족과 과거 다이묘였던 귀족들)을 제외한 모든 계급제를 철폐하여 일본인을 하나의 국민으로 합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쓰마 출신의 유력한 유신지사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본래 동향 출신의 죽마고우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같은 보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후 사이고의 반대편에 섰다.
한편 메이지 정부는 다이묘 제도를 철폐하고(판적봉환) 번의 통치권과 조세권을 넘겨 받았지만(폐번치현), 동시에 영지의 통치 비용까지 떠안게 되었다. 특히 과거 다이묘들이 대량으로 고용하고 있던 사족들의 봉급으로 나가는 세출이 일본 정부 예산의 절반이나 될 정도였다. 사족들 중에 일부는 정부에 관료로 참여하거나 경찰 또는 황군으로 복무했지만, 많은 사족들은 특별히 사회에 기여하는 바 없이 그냥 봉록을 받으며 예전대로 무술과 학문을 수양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안그래도 돈이 들어갈 곳이 많던 신생 정부는 예산 문제 때문에라도 사족들의 권한을 축소하거나 철폐해야만 했다.
이 시기 대두된 것이 정한론이었는데, 이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은 이후 세이난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본래 조선과 통상하기를 원하던 일본의 무역상에게서 비롯된 이 생각은 '마치 1853년에 서양 열강들이 일본에게 했던 것처럼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켜 무역 소득을 얻고, 필요하다면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명예로운 전쟁'을 원하던 많은 사족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가 대표하는 사족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반면에 오쿠보 도시미치는 일본의 조선 출병은 열강들의 주목을 끌게 되어 실패할 것이라고 보았고, 대신에 먼저 내부 개혁을 수행하여 국력을 신장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일본은 조선에 통상 요구를 담은 국서를 여러 차례 보냈지만, 당시 통상 거부 정책을 펼치던 조선은 이를 거부하였다.[5] 특히 조선은 국서의 일본 천황이라는 표현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자 문제삼았는데 이는 천황을 받들어 메이지 정부를 수립한 사족들에게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선의 국서거부 사건으로 정한론이 거세지자 조선에 외무성 하급관리가 아니라 거물급 인사를 보내서 강경하게 요구해야 하며, 만약 조선이 일본의 고급 관리를 처형한다면 이를 명분으로 조선을 정벌하자고 주장하면서, 그 사신으로 다름 아닌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나섰다.
사이고가 급발진하면서 일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당시 서방 열강들을 방문하여 유유자적하게 견학하고 있던 오쿠보 도시미치가 급히 귀국하여 정한파에게 맞섰다. 결국 이른바 메이지 6년 정변이라고 불리는 두 세력의 대립이 벌어진 끝에 천황이 오쿠보 도시미치의 손을 들어주면서 정한론이 기각되자 정권 다툼에서 패한 사이고는 정한파들과 함께 관직을 사퇴하고 가고시마로 낙향했다. 이때 사쓰마 번 출신 3천여 명이 사이고와 행동을 같이했는데, 이들은 이전의 무진전쟁에서 사이고와 함께 좌막파에 대항하여 싸운 사이였다.
2.2. 사학교당의 성립과 신정부의 대응
폐번치현 이전에 사쓰마번의 영지였던 가고시마현은 다른 현에 비해 사족들의 비율이 높았다. (인구에 비례해 다른 현은 5%, 가고시마 현은 25%) 이는 조슈 번 등 다른 도자마 웅번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새로 영지를 하사받고 다이묘가 된 신판, 후다이 다이묘들에 비해 전국시대부터 꾸려온 가신단을 가진지라 가신단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사이고는 사족들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사학교를 설립 했으며 가고시마 현의 허가를 받고 가고시마 전역에 사학교의 분교(총 135교)를 세우기도 했다. 또 농업에도 눈을 돌려 30만 에이커의 농경지를 개간하여 감자, 고구마, 무 등의 채소들을 심고 재배해서 실업한 사무라이들의 자급자족을 꾀했다.이들은 사학교당(私學敎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3만 여명에 달했고 군사훈련도 겸했던, 가고시마 현의 큰 파벌이자 정부 측에서 보면 사병조직인 위협적인 존재였다.
역사적으로 사쓰마 번은 대대로 쇄국정책을 해서, 다른 번의 사람들을 받아들이지도 번의 사람이 다른 곳으로 옮기지도 못하게 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선 사쓰마 번이 메이지 신정부와 반발한 후로는 사쓰마 번만의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했다는 견해가 있다. 폐도령이 발령됐는데도 사무라이(사족)들은 칼을 차고 돌아다녔고, 태양력 사용을 반포했음에도 여전히 태음력을 사용했다. 가고시마 현내의 공직은 사학교당 인사들이 장악했고, 당시 현령이자 다카모리의 불알 친구인 오야마 츠나요시는 정부에 바쳐야하는 세금도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메이지 정부 따위는 무시하는 태도였다.
1877년은 옛 무사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으로, 메이지 5년(1873년) 징병제인 국민개병제가 실시되어 무사들로 구성되었던 구 신정부군에서 무사들이 제대당하고 농민 등 평민 위주로 군대를 편성했다. 3년 후인 메이지 8년(1876년)에는 무사들에게 주어지던 녹읍이 폐지되고 폐도령이 발호되어 군인과 경찰 외에는 칼을 차는 것을 금지당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공헌을 했고 당연히 그 대가로 신정부 군대에서 복무할 것으로 여겼던 무사들은 커다란 배신감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지에서 구 무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에도 신페이가 일으킨 사가의 난[6], 오타쿠로 한도가 일으킨 신풍련(神風連, 신부렌)의 난[7], 마에바라 잇세이가 일으킨 하기의 난[8]과 미야자키 쿠루마노스케가 일으킨 아키츠키의 난[9]을 비롯한 조직적인 반란까지 발생하여 군 주둔지가 습격당하고 사령관이 살해당하는 등 무사들의 불만이 무력반란의 형태로 터져나오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낙향하여 사학당을 열고 이것을 중심으로 가고시마의 무사들이 결집하는 양상을 보이자, 신정부는 이를 크게 경계하면서 사학당과 사이고에 대한 감시 체제에 들어갔다. 만일 사이고 다카모리가 거병을 할 경우 전국 40개현의 무사들이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사이고와 사쓰마 무사군의 반란 결행에는 이런 예상이 깔려있었다. 일차적으로 사이고 군대가 내세운 목표는 조정의 간신을 물리치고 사이고의 충의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그를 데리고 상경하는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신정부군의 평민 위주의 군대의 무력함을 증명하여 사무라이들의 입지를 재정립하고, 군사력을 내세워 정치적 입지를 유리한 방향으로 확대해나가고자 하는 데에 있었다. 즉 군사력을 통한 기득권과 정국주도권의 획득에 그 목적이 있었다.
1877년 1월 30일, 정부의 지시로 가고시마 현내의 육군시설 무기제조공장에서 무기제조 시설과 탄약을 오사카로 운반하는 것이 사쓰마 측에 발각됐다. 정부가 반란의 우려가 있는 가고시마 현으로부터 무기를 빼돌린 것이다. 사쓰마의 사무라이들은 이것이 메이지 신정부가 사쓰마를 쳐들어올 징조라고 여겼으며, 이 무기제조설비는 중앙정부가 아니라 사쓰마의 자금으로 조달한 장비이기도 했으므로 이들로서는 자기들의 재산을 빼앗기는 셈이기도 했다. 이에 사쓰마 사족 30명이 정부의 화약고를 습격, 탄약 50만 발을 탈취한다. 이후 사족들이 정부의 시설을 습격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사건도 발생한다. 2월 3일 사족들이 수상한 자들을 붙잡아서 심문했는데, 이들이 정부가 보낸 밀정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사쓰마 번 출신의 도쿄 경시국 소속 경찰들 23명으로 명목은 정월 휴가를 위한 귀향이었지만 실제로는 가고시마 현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조사가 목적이었다. 고문을 당한 뒤 실토한 이들의 자백에 의하면 사이고가 반란을 일으킬 낌새가 있으면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리더 격인 나카하라는 훗날 이 자백은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이 자백이 정말로 정부에 의한 지시인지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인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신정부는 암호를 사용하여 전보를 전달하여 사학교당의 동태를 감시했는데 사이고를 보즈(坊主)라고 불렀다. 사학교당은 전보의 내용을 입수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ボウズヲシサツセヨ(보즈오시사쓰세요)"라는 내용이 있었다. 원래 뜻은 보즈(사이고)를 시찰(視察:시사쓰)하라는 의미였다고 하나, 사학교당에서 보즈(사이고)를 자살(刺殺:시사쓰, 찔러 죽임)하라는 뜻으로 잘못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는 발음이 똑같다 보니 생긴 오해로 볼 수 있다.
가고시마 각지에서 무사들이 소장했거나 전술한 무기고를 약탈해서 얻은 총이나 칼 한자루만이라도 들고 집결했고, 사이고를 따라 낙향했던 간부들이 사이고에게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리자 "그대들이 그런 마음이라면 나의 몸을 내어줄 따름"이라고 말하며 1877년 2월 5일 이들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이 시점에는 사이고는 사족들의 반란은 대의명분이 없다고 여겼기에 오쿠보와 직접 만나서 사족들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무라이 계급에게 처해지고 있는 일련의 처사를 해결해 보려고 했으며, 무력에 의한 전면 전쟁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세이난 전쟁 중에도 직접 군사를 지휘하지 않고 소극적인 방관으로 일관했다. 한편, 오쿠보도 가고시마로 직접 가서 사이고와 만나려고 했지만, 그러면 반드시 암살당할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로 이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수뇌부의 의견은 갈렸다. 우선 타협파는 소수의 인원으로 도쿄에 가서 타협을 하자는 의견을 내놓으나, 대다수의 강경파가 반대해서 결국 무력행사를 하자는 것으로 귀결되어 나가사키로 가서 군함을 탈취해 도쿄로 가자는 무라타 신파치의 의견과 전군을 이끌고 육로로 구마모토쪽으로 북진하면서 도쿄를 목표로 전국의 사족들을 규합하자는 나카무라 한지로의 의견이 나왔다. 절충안도 나왔지만 결국 구마모토 진군으로 결정됐다.
메이지 정부는 사쓰마의 거병은 정부에 대한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2월 19일 역도정토령을 발포해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총사령관격인 '참군(參軍)'으로 임명된다.
2월 21일, 구마모토 성의 남쪽 7km까지 접근한 사쓰마 군은 정부군 정찰대와 조우한다. 정부군이 먼저 공격을 했왔고 사쓰마의 사무라이 반란군들이 응전하면서 세이난 전쟁이 시작되었다.
3. 전쟁의 전개
3.1. 구마모토 성 전투 (2월 22일 ~ 4월 14일)
"우린 관군한테 진 게 아니라, 세이쇼(淸正) 공[10]한테 진 것이야(おいどんは官軍に負けたとじゃなか. 淸正公に負けたとでごわす)"
사이고 다카모리, 구마모토 성을 뚫지 못하고 사쓰마로 물러나면서.
사이고 다카모리, 구마모토 성을 뚫지 못하고 사쓰마로 물러나면서.
熊本城の戦い
규슈의 중심부 구마모토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중 울산성 전투에서의 성공적이었던 전훈을 바탕으로 축조한 난공불락의 요새 구마모토 성이 버티고 있었다. 정부군은 만들어진 지 200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요새로 건재한 이 성을 거점으로 사이고의 반군을 가로막고 농성전에 돌입한다.
사쓰마 반군도, 재래식 방어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이 성을 두고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사이고 군은 숫적인 우위와 함께 총, 화포 및 근대적 전술과 사무라이 정신까지 겸비하고 있었으나 정부군보다 장비상황이 좋다고 하긴 어려웠다. 서양제 최신식 장비는 메이지 정부가 반란을 우려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빼돌렸고, 반란군이 탈취한 무기는 구식 전장식 소총이기 때문이었다. 봉기가 우발적인 면도 겹쳐서 최근 연구에서는 메이지 유신 때보다 평균적 무장상태가 나빠졌다는 견해가 많다.
사이고 반군 1만 3천 명은 성을 포위하고 수 차례 포화를 퍼부으며 맹공했다. 처음에는 평민들로 구성된 데다 수도 3천 명밖에 되지 않는 신정부군을 깔보고 쉽게 성을 함락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사쓰마 반군은 구마모토 방어군 사령관 다니 다데키(도사 번 출신 유신지사, 후일 농상무대신, 귀족원 의원 겸 예산위원장 역임)의 무훈과 구마모토 성의 철벽 방어에 당황하여 성의 보급을 끊어서 지쳐 쓰러지게 만든다는 공성전의 오랜 근본 메타를 발동하며 장기전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쓰마 번의 거병 소식을 들은 규슈의 사족들이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구마모토 성으로 모여들어 사이고 반군은 약 3만 명의 대군이 되었다. 이로 인해 반란 초기 정부군의 구원 시도는 모조리 실패했으며[11]포위 공성전은 57일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본토에서 편성된 정부측 충배군[12]이 구마모토성에서 농성중인 정부군을 구원하려 내려왔고 치열한 교전 끝에 충배군이 구마모토성 입성에 성공하며 더욱 강력하게 사쓰마 반군을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다.
끝끝내 난공불락인 구마모토 성 함락에 실패한 사쓰마 반군은 정부군의 반격으로 근거지로 패주해 밀려나기 시작했다. 위의 인용문도 이 때 사이고가 후퇴하면서 씁쓸하게 남긴 말이며, 공성 당시 사이고 반군은 메이지 덴노에게 사무라이의 어려움을 알리러가니 성문을 열라 하였고 이에 방어군 사령관 다니 다데키는 이제서야 일반 백성이 무사 밑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이 싸움에서 지게되면 다시 사무라이 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일축한 말도 유명하다.
이 전투가 일어나기 3일 전에 성 내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해 천수각이 소실됐다. 전투 도중에 일어났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전투 전에 일어났다.[13]
3.2. 타바루자카 전투 (3월 1일 ~ 3월 30일)
田原坂の戦い세이난 전쟁 최대 격전지. 구마모토 성에서 농성전을 벌이고 있는 정부군을 구원하기 위해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1만 5천명의 군대를 보내게 되고 이에 맞서기 위해 사이고는 공성중이던 군대의 절반을 보냈다. 양군이 대치한 곳이 타바루자카(田原坂)였다. 타바루자카는 지형적으로 정부군 입장에서는 구마모토 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거운 대포를 끌고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있는 유일한 언덕길이었고, 사쓰마 반군에게는 가토 기요마사가 그 시절부터 방어용으로 개발한 곳으로 숨어서 매복할 수 있는 전술적 요충지였기에 이곳에서 충돌이 벌어지는 건 당연했다.
사이고가 보낸 사쓰마 반군 전위대는 정부의 구원군을 차단하기 위해 북진했고 이 과정에서 노기 마레스케가 지휘하는 코쿠라 제 14연대를 3번에 걸쳐 연파하였으나 연락수단의 부재로 추격섬멸에 실패했다. 그러던 와중 정부군이 타카세 방면에 집결중이라는 정보를 얻은 사쓰마 반군 주력이 타카세로 진격하여 세이난 전쟁 최대의 결전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은 패배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전력을 회복하여 사쓰마 반군이 물러선다. 사쓰마 반군은 구마모토성 북방의 키치지 고개, 타바루자카, 야마가, 미노타케,카와치 해안에 이르는 약 40km의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특히 타바루자카와 키치지 고개 사이에는 참호와 화력거점을 설치한 참호선을 구축했다.
신정부군은 하루라도 빨리 구마모토성을 구원해야 했기 때문에 타바루자카 정면에 대한 총공격을 결의하고 1877년 3월 3일 타바루자카를 주공, 키치지 고개를 조공으로 삼아 돌격을 개시하지만 사쓰마 반군의 십자포화, 참호에 육박하면 발도 돌격이라는 사태에 직면하여 공세는 돈좌된다. 그러나 사쓰마 반군도 키치지 고개를 방어하던 1번 대대장 시노하라 쿠니모토(篠原国幹)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는다.
정부군은 이에 대해 타바루자카를 공세중점으로 삼아 물량을 동원한 화력전으로 맞섰으며, 이때의 탄약소비량은 일일평균 32만 발에 달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대다수는 징집된 평민병사들로서 화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어 효과도 부족하고 특히 발도 돌격만 시작되면 어찌할 도리를 모르고 참살당하거나 도주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에 경찰 발도대를 편성하고[14] 사족 출신이 많은 포/공병에서 저격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타바루자카 측면 요충지인 요코히로야마 점령에 나섰다. 사쓰마 반군도 요코히로야마 방어를 위해 7연발 스펜서 연발총 30정을 동원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발도대의 발도 돌격과 저격대의 정확한 사격 속에 마침내 요코히로야마를 점령하여 타바루자카 방어선 돌파를 실행하게 된다.
3월 20일, 타바루자카를 남쪽에서 우회하여 사쓰마 반군의 7번 포대를 기습한 정부군은 폭우로 방어선이 약화되고 사쓰마 반군이 쓰던 전장식 소총의 불량률이 높아진 점을 이용하여 전선 돌파에 성공한다. 이로써 타바루자카 방어선은 함락되지만, 사쓰마 반군이 재역습을 감행하여 사쓰마 반군 전선은 다시 고착화된다. 이런 교착 상태를 타개한 것은 야시로 만에 상륙한 정부 충배군으로써 사쓰마 반군은 결국 방어선을 포기하고 퇴각하여, 4월 15일에 구마모토성은 해방된다.
3.3. 와다고에 전투
和田越の戦い야시로 만에 상륙한 정부 충배군을 의식하여 타바루자카를 포기한 사쓰마 반군은 부대 재편성을 수행하고 히토요시(人吉)방면에서 방어를 꾀하지만 정부군은 1877년 5월 하순부터 히토요시 방면에 대한 공격을 개시, 6월 1일 히토요시가 함락되면서 방어선이 무너진다. 사이고는 히토요시 함락 전에 이미 가고시마현 청사가 있던 미야자키로 이동, 독립정부를 선포하고 각 방면의 방어를 지시했다.
예하 사령관들이 지형에 익숙하다는 장점을 살려 게릴라전으로 정부군에게 몇차례 승리를 거둘 때까지는 좋았으나, 결국 후장식 소총을 보유한 정부군에 비해 사쓰마 반군은 대부분 전장식소총을 보유했고[15], 병력 차이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결국 총공격이 이루어진 7월 24일부터 7월 31일까지 사쓰마군의 각 방어선은 함락되었고 대대적인 패주가 이어진다. 미야자키도 8월 14일에 함락되어, 사쓰마 반군 잔존병력은 겨우 3천 명에 불과했던 반면 정부군은 7개 여단 3만 5천명에 달했다. 이대로는 패배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사쓰마 반군은 최후의 발도 돌격을 결의한다.
정부군이 주재하고 있는 논밭 지역과 구마다 분지를 감싸고 있는 에노다케~와다고에 능선은 약 30m의 높이를 가진 곳으로 사쓰마 반군이 방어를 하든, 정부군이 방어를 하든 어차피 와다고에 능선을 넘어야 한다고 판단한 사쓰마 반군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직접 독전을 하는 가운데 8월 15일 오전 8시, 최후의 대규모 공세를 감행한다. 총병력 3천에 대포 3문에 불과한 장비로 감행한 발도 돌격은 예상외로 정부군의 화력의 우세를 제압하고 정부군 제4여단과 별동 제2여단을 붕괴로 몰아넣었지만, 곧 시작된 정부군의 함포 사격을 통해 사쓰마 반군의 포대가 파괴되고, 화력의 우세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한 정부군의 공세에 정오 즈음에는 승패가 결정나고, 사쓰마 반군 잔존병력은 능선을 타고 에노다케 방면으로 도주를 개시하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공세가 실패로 돌아갈 즈음 칼을 빼들고 싸우다 죽겠다고 나섰으나, 간부들이 강제로 팔을 붙들어 에노다케 방면으로 끌고 도주했다고 한다.
3.4. 에노다케 돌파
와다고에에서 승리를 거둔 정부군은 8월 16일 새벽 부대를 정비하면서 제2여단, 제3여단을 동원하여 사쓰마 반군의 도주로인 에노다케 방면으로 진출했고, 제1여단은 에노다케에 출장본영을 설치하여 사쓰마 반군의 퇴각에 대비했다. 북쪽에서는 구마모토 진대병력과 경찰 발도대가 진입하고, 별동 제2여단과 제4여단은 각각 와다고에에 진주하며, 강을 건너 가와시마를 넘어갔으며, 사쓰마 반군은 정부군에게 타와라노 방면에서 완전포위를 당했다.사쓰마 반군은 8월 17일 오후 10시경 전 부대를 전,중,후 3제대로 나누고 정부군 1여단이 출장본영을 설치한 에노다케 방면으로 돌진, 1여단 출장본영을 습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다음 포위망을 돌파해 시로야마(城山)로 도주한다.
3.5. 시로야마 농성전
城山籠城戦에노다케 돌파 이후 22일간 사쓰마 반군은 행방이 묘연하였으나 실제로는 능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총 230km의 거리를 거쳐 옛 사쓰마의 수도인 가고시마로 향하고 있었다. 9월 1일 가고시마에 도착한 사쓰마 반군은 곧 사학교 건물에 주둔하던 정부군 치중대를 습격, 물자를 탈취하여 가고시마 북쪽의 시로야마에 진을 친다. 정부군은 가고시마를 4월 27일에 이미 점령하였으나 후방으로 보고 설마 사쓰마 반군이 오겠나 싶어 소수의 병력만을 두고 있다가 당한 것이었다. 사이고와 사쓰마 반군의 복귀를 기뻐한 가고시마 시민은 즉시 봉기하여 경찰, 군인, 관리들을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시로야마에 주둔한 사쓰마 반군에 합류했다.
용기를 얻은 사쓰마 반군은 현청 부근에서 농성중인 정부군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정부군의 반격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잔존병력은 부상자들을 포함하여 370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정부군은 속속 가고시마에 도착, 무려 7만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대병력으로 시로야마를 5중으로 포위하여 절대로 돌파할 수 없게 만든 다음 연일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사쓰마 반군은 참호를 파고 버티면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구명을 위해 간부회의를 거쳐 정부군에 사신을 보냈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휘하의 정부군은 사이고에게 자결을 요구하는 서신을 발송하고, 9월 23일까지 항복하지 않을 경우 총공격을 개시하겠다는 경고를 추가했다.
9월 23일 오전 3시, 3발의 신호포격을 시작으로 정부군은 총공격을 개시한다. 공격 3시간만에 시로야마의 방어진지는 모두 함락되고, 시로야마의 미야자키타니에 구축한 동굴에서 13명의 병력이 최후의 발도 돌격을 감행하여 분전하였으나 모두 사망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분전중 허리와 허벅지에 총상을 입자, 정좌하여 덴노가 있는 동쪽으로 절을 한 다음 부하인 벳푸 신스케를 향해 가고시마 사투리로 "신돈, 신돈, 이쯤이면 됐지비(晋どん、晋どん、もう、ここらでよか)"하고 말한 뒤 할복 준비를 하고, 카이샤쿠를 맡은 벳푸는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서해주시라요!(ごめんなったもんし)"하고 외치며 칼을 내리치고 자신도 곧바로 할복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이고 다카모리 휘하 사쓰마 간부들은 전원 사망, 세이난 전쟁은 끝을 맺게 된다.
3.6. 그 이후
사쓰마 반군의 발도 돌격의 위력을 경험한 정부군 사이에서 백병전을 경시하던 방침을 버리고 일본식 검술을 다시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하는 논의가 분분히 일어났으며, 프랑스식 검술의 무력함도 함께 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검술은 제대로 배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기껏해야 3년 근무하던 당시 일본 징병제 하에서는 하나마나라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또 정작 사쓰마-조슈 군도 보신전쟁에서 막부군을 패퇴시킨 비결은 후장식 총과 암스트롱포 등의 화력 우위였다는 점도 있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일본군은 백병전보다는 화력에 집중하는 형태의 군대가 되었다.막부 편을 들었던 아이즈 번에 비해, 사쓰마는 유신웅번이었고 사이고 계열이 아니더라도 군경에 사쓰마 출신자들이 많았던 탓에 달리 차별은 받지 않았다. 사이고를 배척하고 진압군으로 활약한 오야마 이와오는 훗날 일본 육군 원수 직위에, 사이고 다카모리의 친동생 사이고 주도는 일본 해군 원수 직위에 오르는 등 사쓰마 계열의 출세도 여전히 이어졌다.
이때 이후로 규슈에서 기승을 부리던 이른바 사족반란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일본 제일의 사무라이로 기대를 받았던 사쓰마 군대조차 참패했다는 점이 무사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 놓은 것.[16] 그 대신 사족들은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특정 계파들이 장악한 정부를 양당제의 입헌군주국으로 만드는 운동을 전개하는 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이전까지만 해도 총기류나 도검류의 사적 소지에 큰 제한을 두지 않았고, 이는 사족들의 정서와도 관련이 있었다. 또 전장식의 소총은 후장식의 정부군의 드라이제나 샤스포 소총, 스나이더-엔필드의 위력으로 쉽게 제압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쓰마군이 전장식 구형 소총으로도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준 것 때문에[17] 이후는 민간인의 총기 소지에 간섭을 많이 하게 된다.
사이고는 일본육군의 유일한 대장으로 군 총사령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카리스마도 대단했다. 모든 직위를 내던지고 낙향했지만 육군 대장 직급은 그냥 유지했을 정도.[18] 일본은 정부군이 보여준 추태가 정신적 구심점이 없고 정신교육이 없어서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 최고원수를 덴노로 규정[19], 정신교육 면에서는 군인칙유 등의 봉건적 요소가 가득한 표어를 내리는 방식으로 향후 정신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본군의 군 교범을 만들어내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전쟁 이후 정치개편에서 사쓰마 출신은 정치권에서 위축되고 조슈 출신들이 정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옛날 같았다면 사쓰마는 아이즈와 같이 반역향이 되었고 설사 같이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같은 정치 파벌은 세력이 위축되고 반대 세력으로 위세와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갔을 것이다.
전쟁에서는 졌어도 지금까지 가고시마현에서는 세이난 전쟁과 사이고를 옹호하는 지역 여론이 강한 편이다.
전투 도중 소실된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은 1960년에 가서야 복원되었다.
기도 다카요시는 전쟁 중인 1877년 5월에 병사했고,[20] 사이고는 상술했듯 패전 직전에 할복했으며, 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오쿠보는 전쟁 1년 뒤 카가 번 출신의 사족들에게 암살당했다(기오이자카의 변). 즉, 이 전쟁 종전을 전후해 유신 삼걸은 모두 사망한다. 또한 그렇게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로 비어버린 내무경 직책을 차지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이다.
4. 여담
- 만화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의 시작 부분이 보신전쟁이 끝난 직후이며 카미야 카오루의 아버지가 경찰관으로 징집되어 이 전쟁에 종군했다가 전사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당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적절한 설정이다. 실제로 이 당시에는 정부에서 '경시대(警視隊)'[21]라는 경찰 부대를 조직해 세이난 전쟁에서 활용했다. 이렇게 "반란 진압을 위해 징집"된 자들이 군인이 아니라 경찰이 된 것은 당시 메이지 정부가 이제 막 수립, 시행한 국민개병제의 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짓을 했던 탓이다.
메이지 정부는 이전까지의 무사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폐지하고 3년간 복무하는 일반 평민으로 구성된 새 군대를 창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세이난 전쟁 시점에서는 이 플랜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 이제 겨우 2년차에 접어든 참이었기 때문에 병역 경험이 있는 평민이 거의 없었다. 즉 비상시에 소집할 예비군이 없다는 말이다. 거기다 당시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정규군은 3만에 불과했다. 하지만 반란군은 당시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군대만으로 진압하기에는 너무 강성했고, 추가적인 병력이 필요했다. 동원할 수 있는 예비역도 없었기에 1877년에 동원될 징병 예정인력을 서둘러 징병하기는 했으나,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두려워한 평민층의 기피현상이 심각해서 충분한 숫자의 병력을 뽑는 것이 곤란했다. 여기서 대안으로 대두된 것이 무기를 다룬 경험도 있고 지금은 실업자로 놀고 있는 수십만의 사무라이들이었으나 여기에는 명분상의 문제가 있었으니, 기껏 군대를 일반 평민으로 조직하려고 새 제도를 만들었고 정착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제 와서 사무라이들을 다시 군대에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온 타협점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징집한 사족을 군대가 아닌 경찰로 편성한다는 것이었다.전투경찰?또한 이제 갓 메이지 유신을 마무리짓는 시점에 내전에 군대를 동원했다가는 말 그대로 내정이 불안하다고 전 세계에 광고하는 꼴밖에 되지 않기에 어찌되었건 군대를 동원할 형편은 아니었다. 이 조치로 인하여 총 1만 여 명의 사족들이 군복이 아닌 경찰복을 입고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으며, 이들은 막대한 전공을 세웠으나 메이지 신정부는 사족 군대가 아닌 평민 군대를 키워나간다는 방침을 계속 고수했다. - 경찰복을 입은 구 사족들 일명 '경시대(징모순사대)'가 용감하게 싸운 이유 중 하나는 이들 중 사이고가 이끄는 사쓰마 군대에 패한 아이즈 번이나 신선조 등 막부측의 조직에 속해 있던 자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쓰러진 후 일자리를 잃은 이들 실직 사족들은 사이고와 사쓰마에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이 반란 진압에서 그 분노를 풀었다.
이런 사람의 사례로는 사이토 하지메나 사가와 칸베에가 대표적.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두명 모두 발도대 소속이 아닌, 경시대 소속이었다. 사이토는 별동3여단 붕고구치방면 경시대 2번 소대, 사가와는 동 부대 1번 소대 소속. - 사쓰마 군 역시 사쓰마 출신 뿐 아니라 규슈 각지의 사족들, 그리고 요네자와 번(야마가타 현) 출신들도 있었다고 한다. 요네자와의 경우에는 보신전쟁 당시 사이고가 직접 관대한 처분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 톰 크루즈가 출연한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정부군과의 전투는 이 전투를 각색하였다. 단 실제와 다르게 영화의 내용은 각색된 부분이 많다.
- 세이난 전쟁에서 일본군이 빵을 식사로 활용했다. 막부 말의 에가와 타로자에몬이라는 유럽 군사학을 연구하는 관리가 유럽군대의 식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연구를 시작하였고 1842년에 일본 최초로 유럽 군대식 보존용 빵인 '병량빵'이 만들어진다. 참고로 저런 병량빵을 구운 곳이 그 단팥빵을 최초로 만든 기무라야였다. 세이난 전쟁이 터지고 나서 메이지 정부의 다급한 요청 아래 정부에 팔아넘겼다고. 그리고 해당 빵은 유럽식 군대 빵을 고대로 재현한거라 딱딱하고 밍숭맹숭한 그야말로 주식으로서의 빵에 충실한 물건이었댄다. 물론 단팥빵 그 자체였다는 얘기도 있다. 자세한 얘기는 단팥빵 문서 참고. 세이난 전쟁 당시 사족들과 사쓰마 무사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들어간 일본군들은 이런 병량빵과 비스킷, 가다랭이포를 전투식량으로 지급받았는데 빵을 끈에 꿰어 탄띠처럼 허리에 둘러서 다녔다고 한다. 청일전쟁에 이르면 저기서 가다랭이포가 빠지고 고기통조림이 추가된다.
- 스웨덴 의 헤비메탈 밴드 Sabaton 에서 시로야마 전투를 Shiroyama 라는 곡으로 다루었다.
- 일본인 중에는 전쟁의 결과로 사무라이의 중세적 특권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점을 들어서 세이난 전쟁은 넓은 의미에서 메이지 유신의 마지막 단계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 구마모토 성의 내부에 있는 박물관에 세이난 전쟁 당시에 쓰였던 무기들을 비롯한 각종 장비들과 문서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 세이난 전쟁의 부상자들을 구호하기 위해 하쿠아이샤(博愛社)라는 구호단체가 생겼다. 오늘날 일본 적십자의 전신이다. 이 단체에는 쇼켄 황후가 기부금을 내고, 여러 황족들과 화족들도 많이 참여했다.
- 타바루자카 전투 장시 징집된 경찰 발도대를 보고 1885년 발도대라는 군가가 작곡 되었다.
[1] 사이토 하지메, 사가와 간베에 등 구 막부군 출신으로 구성한 경시대(징모순사대)를 증원하였다.[2] †표는 전사, ‡표는 처형, +표는 병사.[3]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4] 규슈 안에서도 사가 현(佐賀県), 구마모토 현(熊本県), 후쿠오카 현(福岡県), 가고시마 현(鹿児島県). 일본 역사에서 규슈 지역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앙 정권에 자주 뻗팅기며 분리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던, 좋게 말하면 독립성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반정부적 성격이 강한 반골 지역이었다.[5] 외세의 군함이 자꾸 공격해오자 보다 굳건히 걸어잠그는 건 국서가 흥선대원군 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 이전에는 종종 해류에 밀려 온 서양의 함선들은 통상 요구조차 할 수 없었다. 이에 프랑스와 미국이 군대를 보내서 조선을 강제 개항코자 했으나 둘 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6] 정한당(征韓党)과 우국당(憂國党) 소속의 에토 신페이 등 사가 사족들이 일으킴.[7] 경신당(敬信党) 소속의 사족이 일으켜서 경신당의 난이라고도 한다. 신풍련의 난을 시작으로 일본 서부의 사족들이 차레차레 봉기한다. 경신당은 평소에 반대파벌에게 신풍련이라고 놀림을 당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신풍련의 난이라고 부른다.[8] 잇세이는 각지의 불만이 많은 무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신풍련의 난이 있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순국군을 자칭하며 궐기. 하기 출신 사무라이였던 26대 총리 다나카 기이치가 순국군 소속이었는데, 당시 13세였다.[9] 아카츠키당(月風党) 소속의 사족이 일으킴.[10] 구마모토 성을 지은 가토 기요마사의 별명[11] 지원군을 이끌고 왔다가 사쓰마의 발도 돌격에 큰 참패를 당한 지휘관 중에는 훗날 203고지 공략을 지휘하는 노기 마레스케도 있었는데, 그는 이때의 참패를 평생의 치욕으로 결코 잊지 못했다고 하며, 훗날 자결할 때 유서에 쓴 3가지 창피 중 하나로 쓸 정도였다.[12] 衝背軍 : 후방을 치는 군대라는 뜻이다.[13] 정부군이 일부러 포격 목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질렀다는 설이 있다. 이때 마을 주민들은 불타는 천수각을 보면서 세이쇼 공의 성이 불타고 있다고 한탄했다.[14] 이들은 주로 구 좌막파 출신들로 구성되었으며 신센구미 출신들도 많이 보였다.[15] 전장식은 우리가 흔히 아는 머스킷이며 후장식은 초기의 볼트액션식 소총이다. 전장식은 탄환을 비롯한 발사에 필요한 장약 등을 안에 쑤셔넣은 뒤에 발사해야 하는 등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림에 비해 후장식은 탄피를 사용하기 때문에 탄환을 넣은 뒤에는 쏘고 볼트를 당기고 다시 쏘면 되어 동작이 단순하고 시간도 절약될수 있다. 게다가 전장식은 이 특유의 발사 순서로 인해 엎드리거나 누워서는 장전이 안되는데다 한번 쏜 뒤에 다시 조준을 해야 하지만 후장식은 한번 쏘고선 거의 자세를 바꾸지 않고도 장전과 발사를 할 수 있다. 즉, 연사력과 명중률에서 후장식이 전장식에 비해 우월했다.[16] 칼만 믿고 들고 일어나다가 망한 것도 아니고 엄연히 총과 대포까지 가지고 접근전에 약한 상대방의 약점을 발도 돌격으로 뚫을 만큼 강력한 전술까지 쓰는 최강의 부대가 졌으니 그 충격이 클 수 밖에 없었다.[17] 사족이 주축이었고 어차피 폐도령으로 칼을 소지하기 힘들어 대안으로 총기 훈련을 장기간 받아 총 사용에 있어 거의 전문가급에 이른 사람들이 많았다.[18]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사이고 휘하 사쓰마군 간부들의 육군 직함이 박탈되었다.[19] 메이지 덴노는 군복을 입은 초상화를 내세웠다.[20]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이 "이제 그만 좀 하지, 사이고..."였다고.[21] 징모순사대(徴募巡査隊) 또는 징모경시대(徴募警視隊)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