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0:41:45

소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음이의어에 대한 내용은 소무(동음이의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pic.pimg.tw/d2d9f7ff0b139a20d77a26933d784284.jpg

蘇武
BC 140? ~ BC 60.

1. 개요2. 관리 시절3. 포로가 되다
3.1. 발단3.2. 흉노의 유혹3.3. 바이칼 호에서 19년의 포로 생활3.4. 포로 생활의 끝
4. 끝나지 않은 불운5. 최후6. 충신의 상징7. 기타8. 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전한 시대의 인물. 자는 자경(子卿).

2. 관리 시절

아버지 소건(蘇建)이 벼슬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한창 나이에 소무 형제가 모두 낭관이 되었다.[1] 그 뒤로 소무는 점차 출세하여 이원(樲園)[2]의 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한나라는 쉬지 않고 흉노족을 정벌했기 때문에 흉노와 자주 사신을 왕래하여 상대방의 정세를 살폈다. 흉노는 전후에 걸쳐 한나라가 파견한 곽길(郭吉), 노충국(路忠國)과 같은 사신을 10명이나 억류했다. 흉노의 사자가 오면 한나라도 그들을 억류하여 맞대응했다.스와핑

천한(天漢) 원년(기원전 100년) 저제후(罝堤侯) 선우가 즉위했다. 즉위기의 빈틈을 타서 한나라가 습격할까 두려워하던 그는 "한나라 천자는 나의 어른 항렬이다."라고 선언하고 억류되어 있던 한나라의 사신 노충국 등을 모두 돌려 보냈다. 한무제(武帝)가 그의 의로운 처사를 매우 가상하게 여겨 소무를 중랑장(中郞將)의 직책에 임명하고 황제의 부절을 주어 흉노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아울러 한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흉노의 사신을 호송하게 했다. 또 선우에게 후한 예물을 보내어 친선하려는 그의 뜻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3. 포로가 되다

3.1. 발단

소무는 부중랑장 장승(張勝)과 임시 사신 상혜(常惠)와 더불어 병사와 척후병 100여 명을 모집하여 함께 출발하였다. 사신 일행이 흉노에 이르자 그들은 가지고 간 예물을 선우에게 바쳤다.

흉노가 사신을 파견하여 소무 일행을 한나라로 호송하려고 할 무렵, 마침 흉노의 구왕(緱王)이 장수(長水), 우상(虞賞) 등과 더불어 흉노에게 반기를 들 계획을 꾸몄다. 구왕은 혼야왕(昆邪王)의 누나의 아들로 혼야왕과 함께 한나라에 항복했었다. 그 뒤 착야후(浞野侯) 조파노(趙破奴)를 따르다가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흉노에 항복한 위률(韋律)이 이끌고 왔던 한나라 병사들과 음모를 꾸민 그는 선우의 어머니인 연지(姢扺)를 협박하여 한나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때 마침 소무가 흉노에 사신으로 왔다. 한나라에 있을 때 부중랑장으로 온 장승과 잘 알고 자낸 사이였던 우상은 개인적으로 그를 찾아가 안부를 묻고 말했다.
"한나라 천자가 위률을 매우 원망한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한나라를 위해 활을 숨기고 있다가 화살을 쏘아 위률을 죽이겠습니다. 내 모친과 아우가 한나라에 남아있으니 상을 내려주길 바랍니다."

그 말을 듣고 장승이 허락하고는 가지고 온 물품을 우상에게 주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선우가 밖으로 나가 사냥을 할 때 연지의 자제들만이 뒤에 남았다. 그 틈을 타 우상 등 70여명이 거사를 하려고 했지만 그중 한 사람이 밤중에 밀고했다. 선우의 자제들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과 전투를 벌여 구왕 등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우상은 생포되었다.

선우가 위률에게 이 사건을 다스리게 했다. 장승이 그 사실을 알고서 앞서 우상과 나눈 대화가 발설될까 두려워 그 전말을 소무에게 다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소무가 흉노에게 치욕스런 일을 당하리라 예측하고 자살하려 했지만 장승과 상혜가 겨우 자살을 막았다.

예상대로 우상은 장승을 끌어들였고, 선우는 노하여 여러 귀인들을 소집해 상의하고서 한나라 사신을 죽이려 했다. 그러자 좌이질자(左伊秩呰)[3]가 "누군가가 만약 선우를 죽이려고 할 때에는 무슨 벌을 가하시렵니까? 그들을 모두 항복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말했다.

선우가 위률을 보내서 소무를 조사하게 했다. 그러자 소무가 상혜 등에게 "사신의 임무를 잘못하여 황제를 욕되게 했으니, 살아난다고 한들 무슨 면목으로 한나라로 돌아가리오?"라고 말한 뒤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위률이 놀라서 직접 소무를 안고 말을 달려 의사를 불렀다. 응급처치를 마치자 소무는 기절한지 반나절이 되어서야 소생했다. 상혜 등이 통곡하고 소무를 수레에 태우고서 진영으로 돌아왔다.

3.2. 흉노의 유혹

선우는 소무의 절개를 장하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는 한편 장승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소무의 상처가 아물어 가자 선우는 그에게 사자를 보내어 회유를 시도했다. 마침 우상의 죄를 논하던 터라 그 기회를 이용하여 위률로 하여금 우상을 베어 죽이게 하고 장승을 협박하도록 하자 바로 항복하였다. 위률은 이번엔 소무에게 부사(副使)가 죄를 지었으니 연좌를 해야 마땅하다며 협박을 가하자 음모에 가담하거나 친척관계도 아닌데 연좌를 왜 시키냐고 반박하자, 위률은 다시 검을 들어 소무에게 들이댔으나 소무는 꼼짝도 안하였다. 위률은 다시 간곡하게 협박 회유하며 말했다.
"소군(蘇君)! 나는 예전에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에 투신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큰 은혜를 입어 의 칭호를 하사받았소.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소유한 말과 가축이 산을 뒤덮을 만큼 부귀를 누리고 있소. 소군이 오늘 항복한다면 내일부터 나와 똑같이 부귀를 누릴 것이오. 부질없이 초야의 퇴비처럼 몸을 버린들 누가 알아주겠소?"

소무가 아무런 대꾸도 않자 위률이 다시 말했다.
"소군이 내 충고를 받아들여 항복한다면 그대와 더불어 형제의 의를 맺으려니와, 만약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뒷날 나를 보려고 애써도 보지 못할 게요!"

소무는 이 말을 듣고 위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너는 은혜와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신하로서 군주를 배반하고 아들로서 아버지를 등진 채 오랑캐에게 항복했다. 그런 너를 무엇 때문에 보겠는가! 또 선우가 너를 신임하여 생사를 결정하도록 맡겼거늘 공평한 마음과 바른 자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두 군주를 싸우도록 하며 재앙과 패망의 난리를 꾸미고 있다. 한나라 사신을 죽인 남월(南越)은 나라가 도륙되어 한나라의 9군으로 변했고, 한나라 사신을 죽인 대완(大宛)의 왕은 그 머리가 북문에 걸렸으며, 한나라 사신을 죽인 조선즉시 멸망했다. 유독 흉노만이 아직 그런 화를 당하지 않았을 뿐이다. 너는 내가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신을 죽여 한나라와 흉노를 전쟁으로 몰아가려 하고 있다. 흉노의 재앙은 너로부터 시작되리라."

위률이 하는 수 없이 선우에게 보고하자 선우는 더더욱 항복을 받아내고 싶어하며 지하창고[4]로 유폐시키고 사람의 출입을 막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소무는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 눈을 씹어서 입고 있던 가죽 옷과 함께 삼켰다. 며칠이 지나도 죽지 않자 흉노 사람들은 소무를 신으로 여겼다.

3.3. 바이칼 호에서 19년의 포로 생활

이번에는 흉노가 소무를 사람이 살지 않는 북해(北海)[5]로 옮겨 숫양을 기르게 하고는 숫양의 이 나면 돌아오도록 허락한다고 했다.[6] 소무의 속관인 상혜 등은 각각 다른 장소에 분산하여 안치시켰다.

북해에 이른 소무는 음식이 오지 않아 땅을 파 들쥐잡고, 풀뿌리를 캐서 먹었다. 그는 한나라 부절을 지팡이 삼아 양을 쳤는데 항상 그것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부절의 털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그로부터 5~6년 뒤, 선우의 동생 오간왕(於靬王)이 북해로 와서 주살을 이용하여 사냥을 했다. 소무는 오간왕의 그물을 엮고 주살을 만들었으며, 줄을 써서 그의 활시위를 바로잡아 주었다. 오간왕은 소무를 총애하여 옷과 음식을 주었다. 3년여가 지나 병이든 오간왕은 말과, 가축, 복닉[7]과 천막을 하사했다. 그러나 이후 왕이 죽고 그 무리들이 흩어졌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해 겨울, 정령(丁令)족이 소무의 가축을 훔쳐가 소무는 다시 곤경에 빠졌다. 다행히 이릉과 만남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을 때, 이릉이 아내로 하여금 수십마리의 소와 양을 주어 어떻게 버틸 수 있었다. 그 뒤, 이릉이 다시 북해에 이르렀을 때 그에게서 황제(한무제)가 붕어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소무는 남쪽을 향해서 피를 토하며 통곡했다.[8]

3.4. 포로 생활의 끝

소제(昭帝)가 즉위하자, 흉노와 한나라가 다시 화친하면서 한나라에서는 흉노가 포로로 붙잡고 있는 소무 일행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흉노는 그들 일행이 죽었다고 구라 거짓말을 했다. 한나라의 사절이 흉노에 도착하자, 상혜(常惠)가 야음을 틈타 한나라 사신을 만나서 지난 일들을 얘기하며 사신에게 다음과 같이 선우한테 말하라고 시켰다.
'천자가 상림원(上林苑)에서 사냥하다 기러기를 잡았는데 다리에 비단편지가 매여 있어 보니 「소무 등은 황택(荒澤) 중에 있다.」라고 적혀 있던데.'[9]

사신이 기뻐하며 선우를 만나 그렇게 말하자, 선우는 좌우를 둘러보며 놀라서 한나라 사신에게 사과하고 소무 등이 살아 있다며 돌려보내게 된다. 소무는 우여곡절 끝에 한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소무와 이릉은 이별을 하고, 항복한 사람과 죽은 사람들을 제외한 8명의 속관들과 함께 소무는 한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소무는 시원(始元) 6년 봄에 한나라 낙양으로 돌아왔다. 황제는 조칙을 내려 소무로 하여금 태뢰(太牢)를 받들어 무제의 묘를 배알하게 하고, 전속국(典屬國)에 임명하여 중이천석(中二千石)의 품계와 돈 200만, 전답 2경(頃), 저택 한 채를 하사했다. 상혜, 서성(徐省), 조종근(趙終根)은 모두 중랑에 임명하고 비단 200필을 각각 하사했다. 나머지 6명은 너무 연로하여 집에 돌려보낸 뒤, 한 사람당 10만의 금전을 하사하고 종신토록 세금과 부역을 면제했다. 소무는 흉노땅에 머문지 19년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돌아왔을때 수염과 머리가 모두 하얗게 변했다.

4. 끝나지 않은 불운

소무가 돌아온 다음 해에 상관걸과 아들 상관안상홍양(桑弘羊), 연왕(燕王), 개주(蓋主)와 함께 모반을 일으켰다가 소무의 아들 소원(蘇元), 소안(蘇安)이 이 모반에 가담하여 처형당했다. 소무는 평소 상관걸과 상홍양과 오랜 친분이 있었고, 자주 연왕의 상소문에 이름이 올랐으며, 아들이 모반자에 끼여 있었기 때문에 정위가 소무의 체포를 요청했다. 그러나 곽광은 그 요청을 물리치고 벼슬만 면직시켰다.

5. 최후

몇년이 지나 소제가 붕어했을 때 소무는 전임 이천석의 자격으로 선제(宣帝)를 옹립하는 데 참여하여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받고 식읍 300호를 받았다. 선제는 장안세(長安世)의 추천을 승인하여 소무를 불러 환자서(宦者署)에서 조칙을 기다리게 하고 자주 인견하고 다시 우조(右曹)의 전속국에 임명했다. 선제는 소무를 우대하고 총애하며 초하루와 보름의 조회 때마다 그를 제주(祭酒)라고 불렀다.

소무는 황제가 내린 상과 하사품을 전부 아우들과 친우들에게 나눠주어 집안에 재물을 남겨두지 않았다. 황후의 부친 평은후(平恩侯) 허광한(許廣漢), 황제의 외숙부 평창후(平昌侯) 왕무고(王無故), 악창후(樂昌侯) 왕무(王武), 거기장군(車騎將軍) 한증(韓增), 승상 위상(魏相), 어사대부(御史大夫) 병길(丙吉)이 모두 소무를 공경하고 존중했다. 소무의 아들이 예전에 모반에 가담하여 죽은 것을 불쌍히 여긴 선제는 흉노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허락했다. 그 뒤에 소무의 아들 소통국(蘇通國)이 사신을 따라 한나라에 이르자 황제가 그를 낭관으로 삼았다. 소무는 여든을 넘겨 살다가 신작(神爵) 2년에 병을 얻고 그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6. 충신의 상징

흔히 소무가 양을 친 이야기는 충절의 상징으로 전하지만, 그보다 동시대 이릉(李陵)과 얽힌 비극으로 훗날 문인들에게 무수한 영감을 선사했다. 이릉은 한무제 때문에[10] 반역자 낙인이 찍혀 일족이 몰살당하고 결국 평생 흉노에서 살다 죽는다.[11] 선우가 소무를 회유하러 이릉을 보냈고 동병상련의 주인공 두 사람이 주고받은 글을 오언고시(五言古詩)의 시작으로 보는 도 있다.[12] 어쨌든 이후 소무는 한자 문화권에서는 타국에 포로로 잡혔어도 절의를 잃지 않는 충신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으며, 문천상정기가에도 이름이 나온다.

임진왜란조선 수군무장김완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자 선조는 김완을 치하하면서 '해동소무'라는 어필을 하사했다고 한다.[13]

7. 기타

그런데, 흉노에서 고생하며 살았다는데, 아들은 어떻게 낳았는지 의문이다. 혹여 현지 여자성관계가 있었다 하여도, 벼슬을 살 정도면 한자중국어 구사에 무리가 없었다는 소리이고 이것은 평민의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역사에 기록이 없다. 한나라에서, 소무의 충성심과 이릉일족에 대한 가혹한 처사를 보상한다는 명목으로 소무가 흉노에서 한 흑역사 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 외에 더 묻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사실 19년간 타국에 유폐상태에 있는 것도 서러운데 현지처와 아들 좀 낳았다고 문제삼았다면 더 억울했을것같다

여담으로 이릉과 소무의 고사 뒤에는 반드시 사마천고자된 이야기가 따라나온다.(...)

8. 매체에서의 등장

양우생무협소설 평종협영록에서 언급되는데 히로인 운뢰의 할아버지인 운정이 오이라트에 사신으로 갔다가 20년을 연금된 것이 마치 소무와 같다고 평가받는다. 단 충심을 인정받아 우대받은 소무와는 달리 운정은 황제에게 사약을 받고 끔살당해 죽었다는게 비극이자 아이러니.

히사마츠 후미오(久松 文雄)가 그린 일본만화 <한무제와 흉노>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나온다. 19년동안 유배같은 생활을 하며 스스로 홀로 사냥하며 살아가는데 쥐고기라도 감지덕지하며 잡아먹고 겨울에는 늑대 무리랑 싸워가며 늑대를 죽여서 그 고기라도 구워먹어가며 버텼다. 이릉과 오랫만에 재회하는데 이릉이 흉노로 귀화한 거랑 달리 그는 마지막까지 한나라를 따르었기에 이릉이 씁쓸해한다. 결국, 역사처럼 한나라로 돌아가자 기뻐서 운다.


[1] 한나라에서는 이천석(二千石 이상 관원 자제는 음직으로 낭관이 될 수 있었다.[2] 궁궐의 이름난 정원이다.[3] 흉노의 관직명이다.[4]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지하창고가 아니라 그냥 땅을 사람 키보다 훨씬 깊이 파놓은 것일 듯하다.[5]러시아바이칼 호를 뜻한다.[6] 당연히 암양이 젖이 나오지, 숫양은 여성 호르몬 이상이 아닌한 젖이 나지 않으므로 아예 돌아오지 말라는 뜻이다.[7] 흉노의 도자기다.[8] 한무제는 살아있었고 그냥 오보였다.[9] '먼 곳에서 소식을 전하는 편지'라는 뜻인 안서(雁書)의 유래.[10] 이릉이 흉노에 투항한 이후 이(李)장군이 흉노를 훈련시킨다는 보고를 받고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이릉으로 판단해서 가족을 몰살시키는데 사실 흉노를 훈련시킨 사람은 이서(李緖)라는 장군이었다(...).[11] 허나 이릉과 마찬가지로 소무도 가족과 헤어진다. 19년 동안 그가 죽은 줄 알았기 때문에 부모는 죽고 아내다른 사람에게 재가해버린 것이다.[12] 애시당초 소무와 이릉이 만났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런 주고받은 글 중에 백미는 이제 한나라로 돌아가게 된 소무에게 보내는 이릉의 마지막 편지. 단 이 마지막 편지를 제외한 다른 작품은 모두 위작인 것 같다고 말이다.[13] 김완의 문집 '해소실기'는 여기서 유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