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쇼와 유신(昭和維新)은 쇼와 시대 전전(戰前)인 1930년대에 일어난 혁명 사상 및 그 표어이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전반에 걸쳐서 쇼와공황이나 대공황에 의한 경제악화, 1924년 이민법(존슨-리드 법)이나 황고둔 사건 등등 국제, 국내 사회의 불안정화로부터, 군부 급진파나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 정신의 부흥, 천황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급속히 높아졌다. 이들은 정치인과 재벌 총수에 대한 암살과 테러를 시도하고, 일왕을 통치 기관이 아니라 절대권력의 주체로 인식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특히 정쟁을 반복하는 정당정치에 대한 적개심이 심화되고, 천황을 외부와 차단하고 나라를 등지는(그들에겐 그렇게 보였다)원로·중신들에 대한 증오도 커졌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5.15 사건 , 2.26 사건을 들 수 있다.『쇼와 유신 실현』을 외치고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모두가 『쇼와 유신 실현』을 위한 『토벌』이거나 『천벌』을 일컫을 뿐, 『그들을 암살하고 나서 어떻게 하는지, 그 후 누가 무엇을 하는지」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심각한 구체성이 부족했던 것이 특징이다. 「천황친정」을 주창한 것으로, 「지금의 지도자를 배제한 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천황의 통치 대권을 침범하는 「대권 사의」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쇼와 유신 실현을 위해 아라키 사다오를 수상으로」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천황에게 강요해 아라키에 대명 강하시킨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반이 된다. 일본의 정치 시스템을 4일간에 걸쳐 공백에 빠뜨린 2·26사건조차도 실행자들은 황거를 점령하고 천황에게 친정을 강요한 후의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황궁 그 자체를 점령하는 것까지는 실행되지 않았다. 신국가의 지도자로서, 사건의 배후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마사키 진자부로에게 기대하고 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다리가 치워진 격[1]이 되었다.
카타야마 두슈는 쇼와유신적인 사상을 가지면서 끝내 직접 행동에 나서는 일은 없었던 야스오카 마사아츠에 대해 「야스오카의 「금기혁명론」은 그 논리에 있어서 좀처럼 과격하고, 그는 끝까지 「금기혁명론」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혁명론은, 현실에 대해 엄격하게 적용되면, 일본에서는 천황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혁명을 일으킬 수 없게 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며, 그 이외의 하수인이 마음대로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는 등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쇼와 유신은 결국 1936년 2월 26일 도쿄에서 일어난 쿠데타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주동자가 사형을 당하면서 마무리된다. 하지만 유신론자들이 강조한 사상은 일본사회에 이식돼 군국주의와 국수주의가 더욱 강화됐다.
격동의 시대에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정치 무능과 부패, 정치인의 무소신을 쇼와 유신이 시작된 이유로 꼽힌다. 정치인들이 사익을 위해 의회주의를 포기하고 군부에 영합한 결과였다.
전후에 있어서는 「오른쪽으로부터의 변혁」을 주장하는 우익 내셔널리즘의 기본 노선이며 슬로건이 되었다.
2. 사상성·국가상
쇼와유신의 사상으로는 예를들어 2·26사건에 있어서 정신적 지도자인 기타 잇키가 저술한 『일본개조법안 대강』의 남녀평등·남녀정치참여·화족제도 폐지(당연히 귀족원도 폐지)·소득누진과세의 강조 혹은 사유재산 제한·대자본 국유화(재벌해체)·황실재산 삭감 등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정책이 나열된다.[2] 또 이 사건의 주범인 이소베 아사이치에 따르면 일본의 국체를 천황의 독재국가가 아니라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민주국가로 정의한 뒤 현재는 천황의 추종자들에 의한 독재상태에 있다고 한다. 러일전쟁이나 대역사건[3] 이전의 일본을 사회의 폐색감·국가와 국민과의 격차를 느끼지 않게 하는 이상국가로서 파악하고 있다.기타 잇키나 이소베 아사이치가 실제로 구상하고 있던 「천황친정」이란, 천황을 바탕으로 권력이 일원화시키는, 즉 '천황을 바탕에 두고 의회가 있어, 의회로부터 내각이 시작된다'였다. 이소베는 「천황의 추종자인 중신이나 군벌, 정당이나 재벌 등이 독재를 행하고 있다」고 보고, 그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국민의 손에 권력을 되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사상은 국가사회주의로 분류·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치안유지법 폐지까지 거론됨에 따라 오히려 군부 단독에 의한 계급투쟁·폭력혁명·비합법수단·강권행사에 의존한 일본식 사회민주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심지어는 반특권 계급·반재벌·끝은 사회주의나 일련종의 사상까지도 혼연했다고 여겨진다.
2.26사건의 진압 후에 사상범 보호관찰법이 제정되어 쇼와유신을 내세우는 정치단체나 황도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종교단체(오모토 등)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다. 다만,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통제파와 긴밀한 관계를 쌓아 만주국에서 실무의 최일선에 있던 혁신관료·기시 노부스케가 기타 잇키를 평가하고 있던 것도 있어, 외지에서 몇 가지가 참고되었다.
이런 사상을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청년일본의 노래이다. 일본 극우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곡이였으나, 막상 쇼와 덴노 본인은 폭력을 부추긴다 하여 매우 싫어했다고...
[1] 도움을 받을 줄 알았더니 배신당해 곤경에 빠짐을 의미하는 일본 관용구.[2] 이들 대부분은 GHQ 또는 그 의향을 선점한 일본 정부에 의해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실행에 옮겨진다.[3] 치안유지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