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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6 16:59:13

쇼와공황

국내외 주요 경제 · 금융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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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영향

1. 개요



1927년 쇼와 공황, 쇼와 금융 공황은 일본 쇼와 시대 초기인 1927년의 금융 공황으로 시작해 1929년의 대공황금 해금을 거쳐 1930~1931년에 쇼와 대공황으로 이어진 일련의 경제 공황을 가리킨다. #
쌀 소동(1918년) → 반동공황(1920년) → 관동대지진-진재공황(1923년) → 쇼와금융공황(1927년) → 대공황(1929년) → 농업공황(1930년)
1918년 ~ 1930년까지 일어난 일본 제국의 경제공황 사건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누렸던 대전경기가 잦아들자 전시 버블(= 일본의 대전경기)이 붕괴되었고 은행이 끌어안은 불량채권이 금융 시스템의 악화를 초래해, 금본위제를 목적으로 한 긴축적인 금융정책에 따라 일본경제는 심각한 디플레이션 불황에 빠졌다. 전후공황(전쟁종결 후에 일어나는 공황)으로 분류되며, 전시중의 호경기와 대비하여 반동공황이라고도 한다.

1920년대 일본의 고통은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을 훌쩍 뛰어 넘는다. '공든 탑 파괴의 10년'이라 부를 만했다.

일본에게 1920년대는 무척이나 힘들고 괴로운 시절이었다. 같은 시기 전후 대호황을 겪었던 미국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1920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전후(戰後)공황, 1923년 대지진에 의한 진재(震災)공황, 1927년 정경유착이 불러온 쇼와(昭和)금융공황. 전쟁 종식 후 2~4년 터울로 찾아온 대규모의 연속적 공황 쓰나미는 물이 채 빠질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수해복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대규모 수해가 찾아오는 꼴이었다.

1920년대가 1927년의 쇼와금융공황으로 마무리됐다면 그나마 1930년대는 희망을 갖고 기대해 볼만했다. 하지만 일본에게는 더 크고 결정적인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1929년 월가 대폭락으로 발생한 미국발 대공황이다.

당시 일본의 무역의존도는 30%에 달했고, 생사(90%가 미국시장), 면제품, 기타 경공업 제품이 주요수출품이였다. 생사가격 폭락 이후 상품 주식시장의 폭락으로 이어지고, 노동자 해고와 임금인하가 가속화되며, 300만의 실업자가 발생하게 된다.

2. 배경

쇼와 공황의 발단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의한 전시 버블(=다이쇼 버블)의 붕괴와 경기과열 그리고 관동 대지진이 있다.

일본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호황기였다. 전장(戰場)인 유럽에 물건을 대줄 나라가 많지 않았다. 무기도 팔았고 농산물도 팔았다. 이 무렵 일본은 미국에 이어 무기수출 2위국이 됐다. 면(綿)시장에서도 일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다른 나라들은 면사(綿絲)나 면직(綿織)을 만들 겨를이 없었다. 배를 만들고 나르고 하는 일들도 일본이 맡았다. 조선과 해운업이 급속도로 성장했던 배경이다. 워낙 돈을 많이 벌다보니 이때를 가리켜 일본은 '벼락부자'라는 일본어 '나리킨(成金)'을 써 '나리킨의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였다. 1918년 전쟁이 끝났다. 그럼 호황도 끝난다. 하지만 돈에 취한 일본이었다. 호황이 더 오래 갈 것이라 판단했다. 유럽이 산업적으로 회생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봤고 중국시장은 여전히 확장일로에 있을 것으로 여겼다. 일본 기업들은 '호황'에 베팅했다. 생산에 더 많이 투자했고 주가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추후 밝혀졌지만, '거품'이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2년 가까운 이 호황기를 일본경제학자들은 당시 천황의 이름을 따 '다이쇼(大正) 버블'이라 이름 붙였다.

버블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럽의 재기(再起)가 일본의 예측보다 빨랐다. 게다가 중국에서 일본 제품을 파는 것도 어려웠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태로 중국 내 반일(反日) 감정이 급속도로 커진 탓이었다. 생산과 수출이 줄고 재고와 적자가 늘고 있었다. 이 같은 경영환경 변화에 가장 예민한 것이 주식시장이다. 1920년 들어 주춤거리던 주가가 3월 들어 폭락을 시작했다. 폭락이 본격화된 4월부터 3개월 동안 주가는 반 토막에서 1/3토막까지 떨어졌다. 150개 이상의 전국 각지 은행에서는 뱅크런(Bank Run) 현상까지 일어났다.

1927년 일본 쇼와(昭和) 금융공황의 결과로 예금인출 소동이 발생하고 77개 보통은행이 도산했다. 전체 보통은행(시중은행)의 10%가 문을 닫았다는 쇼와금융공황이 속으로 남긴 상처는 훨씬 컸다. 파산한 은행의 대부분이 중소 규모여서 피해는 주로 중소기업에 집중됐다. 재벌 산하의 대형 과점 은행이 관료의 지위를 받는 일본 특유의 선단식 경영 형태가 이 때부터 나타났다. 일반인 사이에서는 시장 경제와 금융은 불안정하고 불공평한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결국 1930년대 일본은 급속하게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조선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1929년, 입헌민정당의 하마구치 오사치(濱口 雄幸)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입헌민정당은 기성 정당 중에서도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당에 속하는 정당으로서, 하마구치 내각은 중지되어 있던 금 수출을 재개하는 금 해금(金解禁), 경쟁력 확보를 위한 산업 합리화와 긴축 재정 등의 개혁 정책을 천명하며 불황 타개에 나섰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일본에 대공황이 들이닥친다. 금 해금 조치로 인해 유동화된 환율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주가와 물가는 폭락하면서 공장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속출한다. 국가 경제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정당 내각의 연이은 정책 실패로 인해 국민들은 점점 정계와 정당 정치에 회의감을 느꼈다.

정당 내각의 연이은 실패는 국가주의자들과 군부를 불러냈다. 기성 정당들의 정책 실패가 반복되고, 비전 제시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국가주의자들은 개인주의, 자유주의와 같은 과도한 서양 사상의 유입 때문에 현 시국에 이르게 된 것이라며 일본의 국체를 바로 세워야 함을 주장했다. 덴노를 중심으로 정치 질서를 재편하고, 관료와 재벌, 정당 등의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당시 상황에 염증을 느끼던 일본인들에게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심지어는 정당 정치가들도 정권 획득을 위해 이들의 주장에 편승하면서 정당 정치는 외부의 공격과 내부의 자멸로 1930년대 들어 아예 무너져 버린다.
여러분은 5반보(약 300평)의 토지를 가지고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겠는가, 딸을 여학교에 다니게 할 것인가. 불가능할 것이다. (…) 일본은 토지가 좁고 인구는 과잉이다. 이것을 좌인은 잊고 있다. 따라서 국내의 토지 소유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으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국내에서 외부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만몽의 옥토를 보라. (…) 여러분은 5반보가 아니라 일약 10정보(약 3만 평)의 지주가 될 수 있다. 즉 부자가 될 수 있다.
- 1930년, 육군의 '시국대강연회' 중 일부 내용. 당시 육군의 프로파간다를 잘 보여 준다.[1]

일본 국회는 규모가 급증한 ‘재난 극복용 특별어음’을 정리하기 위한 국채를 발행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합의 단계에서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주로 대만은행을 통해 지원한 대규모 자금이 지진 피해 기업보다 여당과 친한 독과점 대기업 ‘스스키 상회’에 집중적으로 흘러 들어간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야당은 국채 발행 계획이 ‘정상모리배(政商謀利輩)와 불량 은행 구제를 위한 것’이라며 반대로 돌아섰다. 국채 발행에 동의하되 ‘정부와 일본은행 지원금의 정확한 규모 및 지원 기업 명단을 제출하라’는 조건도 달았다. 여당과 대장성은 이를 거부하자 의사당에서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뒤늦게 특별 자금 지원책을 발표하고 돈을 마구잡이로 찍어 풀었다. 얼마나 사정이 다급했는지 뒷면이 백지 상태인 지폐까지 발행했다. 뒷면 도안이 없어 ‘우라지로(裏白·이백:속이 하얗다는 뜻)’라고 불린 화폐가 일으킨 돈이 홍수는 인출 사태를 가까스로 막았다. 일본은행은 ‘우라지로’ 200엔권을 500만장(10억엔) 인쇄했으나 1억6,000만엔이 풀린 시점에서 시장이 안정돼 발행을 멈췄다. 긴급 발행된 200엔권은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일본은행이 열심히 거둬들였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화폐사를 통틀어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반쪽짜리 지폐인데다 빨리 회수한 통에 이 화폐는 수집가 사이에서 166만엔 이상에 거래된다고 한다. 상태가 좋은 것은 400만엔도 호가한다.

3. 영향

일본은 안도했으나 무작정 풀린 돈은 후유증을 낳아 고물가가 찾아왔다. 식민지 조선도 고통받았다. 소작료를 현물(쌀)이 아니라 돈으로 받은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다. ‘窮民(궁민)’으로 불리던 도시 빈민도 이 시기에 급격히 늘어났다. 쇼와금융공황 2년 뒤에는 더 큰 파장이 밀려왔다. 뉴욕 발 세계대공황이 겹쳐 일본은 극심한 불경기에 시달렸다. 쇼와금융공황과 1930년대 초 세계대공황에 따른 일본 공황을 합쳐 ‘쇼와공황’으로도 부른다.

1929년 일제는 금본위제 도입을 위해 실시한 '금 해금(金解禁)' 즉, '금 수출에 대한 규제 폐지'를 실제로 시행된 때는 1930년 1월 11일인데, 대공황이 시작되고 넉 달이 채 되지 않는 시점이었다.

금 수출 규제 해제 직전 환율은 100엔 당 44달러 수준에 불과했다. 결국 환투기꾼들은 엔화를 팔고 달러를 매입하는 형식으로 일본의 금을 빼내갔다. 결과는 혹독했다. 수출 규제를 풀었던 1930년 1월부터 6개월 사이 일본에서는 2억3000만 엔의 금이 유출되고 만다. 이는 그해 예산의 10%에 이른 막대한 양이었다.

기업으로서는 2중, 3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금본위제는 긴축재정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정부 스스로 국채 발행과 예산을 줄였다. 자국 통화의 높은 가치를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여러 차례 얘기했듯 1920년대 일본은 만성적인 불황에 시달리던 때였다. 게다가 미국에서 터진 대공황의 여파로 수출이 어려웠다. 일본도 이른바 '대공황' 국면에 진입했던 것이다. 기업의 파산과 실업의 증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무엇보다 수출이 문제였다. 생사(生絲)나 면사(綿絲), 쌀 등 주요 농산물과 철강재나 시멘트 등 주요 수출산업이 초토화됐다. 1929년 20억 엔이었던 수출액은 1931년 11억 엔으로 반 토막이 났다. 당연히 주가도 떨어졌다. 1930년 도쿄주가는 1929년에 비해 40% 가까이 빠졌다. 주요 수출 관련 산업의 주가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무려 40% 이상 빠졌다.

당연히 성장도 문제가 됐다. 전쟁특수로 고성장을 달성했던 1914~19년.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달성했던 성장률은 6.2%였다. 경이로운 성장세였다.

하지만 1920년대는 달랐다. 1920~29년 성장률은 겨우 1.8%에 멈췄던 것이다. 하지만 대공황 직후인 1930~31년 다시 성장률은 0.7%로 가라앉았다.

공황의 강도를 가늠하는 핵심 지표는 주가와 물가의 폭락이다. 도쿄·오사카 주식 거래소의 유력주 140사·246 종목에 대해서, 금해금전의 1929년 6월말과 최저의 31년 11월을 비교하면 평균 하락률은 50.4%, 시가 총액으로 25억 3500여 만엔의 거액이 손실로 돌아갔다.

실업의 증가도 무시할 수 없다. 1930년 실업자 수는 성인 인구의 10% 수준인 250만 명에 이른다. 민영공장노동자수는 1929년 100을 기준으로 했을 때 1930년에는 90.0, 1931년에는 87.3, 1932년에는 82.0으로 떨어졌다. 미쓰이·미쓰비시·스미토모의 3대 재벌 본사도 일제히 순익을 저하시켜 중소기업에서도 도산·휴업, 공장주의 야반도주, 임금 미지급 등이 속출했다.일자리를 잃은 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데도 여비가 없어 길을 터벅터벅 무리지어 다니며 밤에는 노숙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농촌이 받은 피해만큼 크지는 않았다. 일본 내 만성적인 불황에 미국발 세계 대공황, 그리고 여기에 대해 일본의 금본위제 도입은 농촌에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고 만다. 무엇보다 농산물 가격의 지속적인 하락이 문제였다. 1929년을 100으로 할 때 1931년 쌀은 57.6%, 보리는 57.2%, 누에고치는 42.1%, 과일은 76.8%로 폭락한다. 9개 주요 품목 전체적으로는 100에서 56.7%로 거의 반 토막 난 수준이다.

누에고치 가격의 폭락은 특히 농가경제의 파탄을 가져온 주범이다. 누에고치는, 당시 일본 최대 수출품인 생사(生絲)의 원료다. 주로 미국에 수출되던 생사는 1927~29년 3년 평균 일본 전체 수출액의 36.6%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산 가구 수도 엄청났다. 1929년 당시 전체 농가 호수의 약 40%가 되는 221만호가 양잠업에 종사하고 있었을 정도다. 종사자 수는 무려 1300만 명으로 당시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된다. 미국 대공황의 여파로 가격이 반 토막 남으로써 농가경제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만다. 농촌 지역에서는 딸을 팔아먹는 집이 속출했다. 이 생사 수출이 너무 격감했기 때문에, 무역 수지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국민총생산은 1930년부터 일시에 떨어졌다.1929년을 100이라고 하면, 30년 89.1, 31년 80.6, 32년 82.8로, 이 3년간이 가장 침체가 심하다. 도매·소매 물가도 조금씩 저하를 계속해, 30년 1월부터 2년간에 30% 하락했다.

1929년에 일어난 대공황 1년 뒤에는 미가가 폭락하여 일본 농촌의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조선 쌀이 일본으로 유입되는 것을 반대하기에 1934년에 산미증식계획을 중단한 적이 있었다. 이 공황을 농업공황(1930년)이라고 부르게 된다. 상당 수의 기업들이 무너지거나 수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면서 실업자 수가 증가를 하게 되었고, 양잠농가, 곡물의 가격이 폭락하는 가운데 농업에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20년의 공황 보다도 더 심한 상황이었다.

일본 서민의 전통적인 생활감각은 궁핍한 생활에 직면했을 때, 지금까지의 생활 중에서 가장 나쁜 생활상태를 떠올려, 그것에 비하면 현재의 편이 얼마든지 좋다고 하여 현상을 납득하는 것이었다. 혹은 더 나쁜 처지의 사람을 보고, 그것보다 자신이 아직 낫다고 해서 자신의 역경을 위로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해왔다. 이 경향은 노동자나 농민에 대해서도 들어맞았다. 그러나 대공황기의 생활 궁핍은, 이러한 자기설득, 현상긍정의 논리만으로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온순하지 않았다. 식생활에도 부족한 생존의 위기에 놓였던 것이다.통계적으로 보면, 노동 쟁의는 1931년에 전쟁 전 최고의 2456건, 소작 쟁의는 35년에 같은 6824건을 기록하고 있다. 1929년부터 31년에 걸쳐 도쿄시 전차, 요코하마 도크, 종방, 동양 모슬린의 쟁의 등 역사적인 대쟁의가 격발함과 동시에 후지와사방, 시바우라 제작소, 지쿠호 탄전, 스미토모 제작소 등의 대자본에 있어서의 노동자의 저항이 일어났다. 게다가 참가 인원 50명 이하의 〈군소쟁의〉가 해마다 증가해, 31년에는 전체의 3분의 2를 넘었다. 이들 쟁의는 불황과 합리화를 반영해 임금삭감 반대, 해고 반대, 해고수당 지급 등 소극적·방위적 성격의 요구가 많았다. 농촌에서는 소작쟁의의 폭풍이 몰아쳤다. 쟁의의 주요한 원인은 중소지주에 의한 토지인도였다. 공황과 소작쟁의의 고양에 직면한 중소지주는 소작인에게 빌려준 토지를 들어 자작화함으로써 이 위기에 대처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주에게 토지를 인도당해 버리면, 소작인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소작 빈농층은 필사적이었다. 소작료 감면, 빚 탕감, 소작지 인양 반대 등의 대지주 투쟁뿐만 아니라 전등료 가격인하, 비료값 가격인하, 세금연납 등 이 시기의 쟁의는 생활 방위 투쟁으로서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불경기는 그 시대에 특유의 사상·문화 상황을 낳는다. 민중은 앞길에 살아갈 희망을 잃고 찰나적·향락적인 생활을 추구했다. 불안, 우울, 회의, 모던, 에로그로 넌센스 등의 말이 유행하였다. 모가나모보(モガやモボ), 〈싫어요〉도 이 시대를 풍미한 말이다. 오사카 센니치마를 중심으로 만담 붐이 일어나, 도쿄의 아사쿠사, 신주쿠등의 성바는 민중적 오락 센터로서의 성격을 추구했다. 재즈, 댄스, 카페 등의 모더니즘 문화가 샐러리맨이나 지식인을 사로잡는 동시에 검극 영화, 만담 등의 대중 문화가 서민을 사로잡았다. 축음기와 레코드가 등장하면서 유행가 전성시대가 찾아왔다.《그대 그리움》(도쿄 행진곡) 등 가요사상에 남는 히트곡이 만들어진 것은 1929년의 일이다. 이어서 불경기가 바닥에 달한 31년에 들어서자, 코가 마사오 작곡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그림자를 사모하여〉등의 애조를 띤 선율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편, 이 불경기의 시대는 지식인·청년 사이에 반체제적 기운을 낳았다.《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의 간행을 비롯하여 마르크스주의 관계의 서적이 독자를 획득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 프롤레타리아 예술 운동이 대두되었다.영화계에서도 사상 문제를 주제로 한 〈경향영화〉가 만들어졌다. 1930년 2월에는, 프롤레타리아 작가 후지모리 세이키치의 《무엇이 그녀를 재촉했는가》가, 아사쿠사에서 5주간 연속 영화의 신기록을 만들었다. 좌절과 도피, 현상 타파의 엇갈리는 지점에, 이 시대의 문화 상황은 성립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 만철이 창업 이래 처음으로 적자를 냈다. 만주 특산 콩을 비롯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운임 수입이 격감했기 때문이었다.30년말부터 〈생명선 만몽의 위기〉가 외치기 시작했다. 다음 31년 9월, 마침내 관동군이 모략적으로 유조호(도랑) 사건을 일으켜 만주 침략이 개시되었다. 같은 해 12월, 제2차 와카츠키 레이지로 민정당 내각은 금해금 정책의 실패와 각내 불화에 의해 총사퇴에 몰렸다. 정권이 바뀌어 정우회의 이누카이 타케시 내각이 성립해, 타카하시 코레키요가 대장대신에 취임했다. 다카하시 재무상은, 내각이 성립하면 당일 금 수출을 금지하고, 관리 통화로의 체제를 굳혔다. 다카하시 재무장관의 임무는 국내적으로는 공황으로부터의 탈출, 국외적으로는 만주 침략을 위한 군비강화, 이 두 가지 과제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있었다. 타카하시 재정은, 이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이노우에 재정과는 완전히 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즉 이노우에가 긴축재정과 고금리에 의해서 물가를 인하해, 국제 수지의 개선을 도모하려고 한 것에 대해, 타카하시는 저금리와 공채 발행에 의한 인플레이션 정책을 채용해, 경제에 자극을 주어, 이것에 의해서 경기의 회복을 도모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공채를 발행하면 악성 인플레이션으로 전환될 위험이 있다. 거기서 다카하시는, 이 공채 정책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몇개의 기초 공작을 실시했다. 정부는 (1)32년의 3, 6, 8월의 3번에 걸쳐 일본은행 금리를 1전 6리에서 1전 2리로 낮추고, 공채 이율을 5%에서 4%로 인하하고, 우편 저금의 이자를 4.2%에서 2%의 저리로 인하했다. (2)32년 6월, 태환 은행권 조례를 개정하여 일본은행권의 보증 발행 한도액을 1억2000만엔에서 일시에 10억엔으로 인상했다. (3)일본은행 인수 공채 발행 제도를 창설하고, 오픈 마켓 오퍼레이션(공개 시장 조작)을 개시했다.이러한 조치는, 모두 일본은행의 발권 능력을 확대시키고, 또 저금리 정책에 의해서, 적자공채가 무리없이 소화되는 조건을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개혁을 기초로 다카하시 재정은 전개되었지만, 2032년도 예산은 전년에 비해 5억엔 증가해, 재정 규모는 일거에 19억5000만엔에 이르렀다. 이후, 세출예산은 해마다 팽창을 계속해, 36년에는 22억8200만엔의 거액에 이르렀다.재정 팽창의 가장 큰 원인은 군사비의 돌출이다. 32-36년도의 세출에서 차지하는 군사비의 비율은 35.2~47.2%로 급상승했다. 군수 인플레에 의해서, 군수 산업, 중화학 공업은 살아나 32년 하반기부터 일본 경제는 회복으로 돌아섰고, 33-35년에는 타국에 앞서 호황 국면을 맞이했다. 군사비 살포를 중심으로 한 경기회복책이 다카하시 재정의 한 축이었다면, 또 다른 한 축은 시국광구사업, 즉 농촌구제를 목표로 하는 공공토목사업이었다. 정부는, 도로건설, 하천개수, 치산치수, 교량건설, 항만개량 등의 사업을 행해, 빈곤농민이나 실업자에게 취업의 기회를 주려고 했던 것이다. 총액으로 8억6487만엔이 지출되었지만, 이것은 군사비 압박 때문에 3개년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 외 중요한 기둥으로서 11억엔에 이르는 대만 투자가 있다. 만주를 중화학 공업 자본을 위한 원료 공급지·상품 수출 시장으로 재편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마지막으로, 다카하시 재정기의 특징으로서 환덤핑이 있다.환율 하락은 금 수출 재금지 직후부터 진행돼 1931년 12월에는 최저 34달러까지 급락했고, 이듬해인 32년 6월에는 마침내 30달러 선이 깨져 11월에는 20달러 선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국내의 물가 특히 실질임금은 반대로 낮아졌기 때문에 일본의 상품은 세계시장에서 강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면직물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상품의 집중호우적인 수출공세는, 각국의 경계를 재촉해 경제블록 형성의 방아쇠가 되었다. 다카하시의 경기회복책은 확실히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다른 면에서 재정의 군사화에 박차를 가해 군부세력의 대두를 허락했다. 35년 다카하시는 더 이상 군사비를 늘려서는 국가재정이 파탄난다며 군비 확장에 제동을 걸려고 했지만, 2.26 사건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마쳤다. 쇼와 공황은 일본이 전쟁과 파시즘의 시대로 향하는 굽이굽이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쇼와 유신을 기치로 여러 사건, 사고들이 벌어졌다.

조선 역시 농산물 가격이 급락하고 농가 부채와 춘궁 농가가 급증하면서 많은 농민들이 몰락했다. 농촌에서는 지주들의 자의적인 소작권 이동과 수탈 강화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소작 쟁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계급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이를 혁명적 시기로 파악한 사회주의 계열의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면서 농촌 사회의 위기도 가중되었다. 이에 대응해 조선 총독부는 농촌 사회를 통제하고 식민지 지배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1932년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대 후반에 조선기업은 자본시장으로부터의 자금조달을 진행하고 있어 이에 따라 식민지 은행들은 이들 기업에 대한 대부금을 회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산미증식계획'의 중심사업이었던 수리조합의 사업에 대한 대출이 증가하고 있었다. 1929년 말에는 식민지 은행의 산업공공금융 중 25% 이상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 수리조합에 대한 대출은 무담보이고 장기였지만, 1920년대 후반에는 수리조합으로 재정의 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쇼와농업공황에 의해 조선의 수리조합은 위기에 빠졌다. 1931년 9월 현재 불량화된 수리조합에 대한 식은의 대출잔고는 2,379만엔에 달했으며, 수리조합에 대한 대출총잔액의 40%, 산업공공금융의 10%에 상당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미곡 증산과 상품화가 추진되고, 식민지지주제가 강화된다. 농촌 내부의 경제적 불평등, 즉 양극화가 가시화된다. 1920년대 농가경제는 토지소유 여부와 경영규모의 크기와 분명한 상관성을 가졌다. 토지의 자본화가 확고해졌고, 그것은 부와 잉여의 원천이 되었다. 고미가 시기인 1920년대 전반기 지주경제 수지는 흑자규모가 커졌다. 반면 1정보 이하의 토지소유자나 무토지 소작농은 거의 적자상태를 면치 못했다. 이러한 계급간의 불평등과 양극화는 지역적으로도 차이를 보였다. 즉 논농사 중심의 남부지역이 북부지역보다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부채를 통한 수리사업정책은 쌀값 하락국면에서 부채불황을 낳았다. 쌀값하락을 통한 이러한 시장의 강제는 '동태적 지주'의 출현과 농민층의 양극분해를 강제하였다. 부채상환을 위한 화폐수요 증대가 생산량 증가 이상으로 쌀의 시장판매량을 증가시켰는데, 이 때 실물화폐로서의 쌀의 역할을 법정화폐가 대체하면서 쌀의 시장가치 하락이 가중되었다. 이렇게 생산과정으로부터 금융교란이 발생해가는 구조가 나타난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제국주의권의 미곡 수급에서 나타난 공급과잉과, 연이은 경제공황으로 미곡 증산은 조선 경제에는 직격탄이였다. 특히 경제적 기반이 허약했던 소토지 내지 무토지 소농민들의 몰락은 더욱 확대, 급속화되었다. 그나마 미곡상품화에 덜 노출되었던 밭농사 지역은 상대적으로 농가경제가 안정적인 양상을 보였다.

일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세계시장으로의 비약적 진출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도시화·공업화가 진전되면서 독점자본주의체제가 확립되었고, 그 결과 지주적 토지소유는 동요기에 들어갔다. 대토지소유의 해체 경향은 1920년대 중반부터 가속화되어 대공황 이후 심화되었다. 반면에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으로 곡물을 이출하기 위한 일본인 지주와 식민농정의 농업생산력 향상 방침하에 식민지지주제의 지주소작관계가 고도로 발달한다. 식민지 조선의 지주들은 대공황기에도 토지소유 규모를 증대·유지했고, 1940년대 중반까지 지주제가 확대·유지되었다.

소작문제를 보면, 식민지 조선의 지주제는 일본 본국의 지주제보다 열악하고 불안정했다. 보통 소작기간이 일본은 3~5년, 식민지 조선은 1년 정도로 더 짧았다. 소작료는 일본보다 식민지 조선에서 훨씬 고율이었다. 중간착취자로서 소작지관리자의 폐해도 일본보다 식민지 조선에서 심각해졌다.

경제가 나빠지면 세상이 극단적으로 흐르듯이 공황에 빠진 일본에서는 민주주의의 퇴행이 일어났다. 하종문 한신대 교수(일본학)의 연구논문 ‘일본의 쇼와공황과 민주주의 엇박자’에 따르면 일본의 경제 위기는 민주주의의 파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황과 금본위제도 복귀·이탈을 거듭하는 혼란 속에 사람들은 군부가 고의로 일으킨 만주침략에 열광하고 나라는 파시즘으로 내달렸다. 청년 장교들이 백주대로에서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살해하는 가운데 일본의 정당제도 역시 무너졌다. 다이쇼 시대 잠시 반짝했던 ‘다이쇼 데모크라시’ 속에서 탄생한 정당정치가 8년 만에 막을 내리고 군부가 권력을 잡았다. 그 끝은 광적인 전쟁패망이었다.

파시즘과 결합한 일본 경제는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중공업 우선 정책 아래 선택과 집중, 규모의 경제가 강조되며 재벌들의 힘이 더욱 커졌다. 조선에는 더욱 큰 영향을 미쳤다. 대형화·건실화를 명분 삼아 조선에서는 일본보다 엄격한 은행법을 적용, 민족 자본의 형성을 억눌렀다. 세계적인 공황을 맞은 일제가 타개책의 일환으로 밀어 부친 만주 개발과 중일전쟁을 타고 조선의 청년들은 만주로 떠났다. 독립운동이 아니라 일본 군인, 공무원이 되기 위해 만주행을 택했던 조선 청년들의 만주 인맥은 해방 후 한국 현대사에 깊숙히 자리 잡았다.

다카하시 재정에 의해 일본은 엔저를 이용해 수출을 급증시켰지만 미영 등에서는 '소셜 덤핑'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미영불 등 많은 식민지를 가진 나라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식민지권에서 배타적인 블록경제를 구축했다.(영국의 스털링 파운드 블록, 미국의 달러 블록, 프랑스의 프랑 블록) 본인들의 실책으로 해외 열강들이 블록경제화를 진행하자 궁지에 몰린 일본도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일만지(일본-만주-중국) 엔블록의 구축을 목표로 아시아 침략을 가속하게 된다. 일본과 같은 후발자본주의국가이며 식민지가 부족한 독일·이탈리아도 자국의 세력 확대를 목표로 팽창정책으로 돌아섰다. 이런 ‘가지고 있는 나라’와 ‘갖지 않는 나라’의 양극화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1929년 10월 미국의 주가 대폭락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일파만파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대부분 나라에서는 경제위기 타파가 제1의 과제였을 정도다. 하지만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이 대공황에서 가장 먼저 벗어났다. 군국주의, 파시스트, 전체주의 때문이였다. 독일과 일본은 이웃 나라를 침탈하는 전시경제로, 이탈리아는 강력한 보호무역과 국책사업 투자 등 자급자족경제로 위기를 극복했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는
"만약 1931년 대외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공황은 농업과 공업 사이에 상승적으로 작용해 한층 심각해졌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다름 아닌 대공황기에 '만주국' 수립이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공황에서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전쟁에 의한 공황 극복 효과가 기대됐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태는 대외전쟁을 즉시 필요로 할 만큼 심각했었다."

만주 침략과 중일전쟁, 진주만 공격으로 전개되는 일제의 군사행동 배후에는 일본 국민들이 있었다. 공황이 닥쳐오자 일본인들은 전쟁으로 이를 돌파하고자 하는 군부를 지지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성공’이 그들 뇌리에 박혀 있었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이를 재확인한 런던 해군 군축조약 등을 통해 일본 군비 확장을 막고 있는 미국을 향한 반미감정은 극점으로 치달아갔다. 일본 제국 국민들은 총리와 내각에 ‘굴욕외교’ 책임을 묻고 있었다.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빠르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이로 인해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다음해인 1932년 괴뢰국인 만주국이 세워진다. 그러나 구미 열강이 이를 제지하고 나선다. 국제연맹을 앞세워 일본의 만주점령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총리는 적정선에서 열강과 타협하려 했으나, 군부는 반대했다. 결국 1932년 5월 15일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누카이 총리는 피격으로 숨진다. 뒤를 이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리는 국제연맹을 탈퇴, 군부의 손을 들어준다.

만주사변 이전부터 계획된 일본인들의 만주이주사업을 추진하여 1936년 히로다 내각의 계획에선 500만명을 보내기로 하여, 실제로 32만 명 이상의 일본개척민들을 만주로 보냈다. 쇼와공황에 의한 지방 농촌의 피폐와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농민들의 강한 이주의사도 그 배경이었다.


[1] 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어문학사, 2012, 22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