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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00:03:33

쌀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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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으로 불타 버린 스즈키 상점 고베시 본사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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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의 발단이 된 곳. 우오즈의 쌀 소동(魚津の米騒動)이라고 적혀 있다.

米騷動 / 米騒動 (こめそうどう)

1. 개요2. 배경3. 경과4. 결과 및 영향5. 여담

1. 개요

일본사에서 유통량이 감소하고 가격이 폭등해 혼란이 발생했던 사건들을 말한다.

일본한국과 마찬가지로 쌀이 주식이고 생활필수품이므로 쌀 소동은 필연적으로 민중의 폭동을 초래한다. 원인은 흉년, 사재기 등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 자체는 언제나 있어 왔다. 쌀 소동이라는 말 자체는 에도 시대부터 쓰였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1890년, 1897년, 1918년, 1993년에 '쌀 소동'이라고 지칭되는 사건이 4번 발생했다. 다만 1993년의 일은 일본에 흉년이 들어 쌀 가격이 폭등했지만 일본이 선진국으로 진입한 현대의 일이므로 일단 다른 먹거리가 많아져 쌀 소비량 자체가 많이 줄어들었고 식량 사정 자체도 과거 대비 매우 나아졌기 때문에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한 식량 부족이나 그로 인한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는 1918년의 쌀 소동이 가장 유명해서 그냥 '쌀 소동'이라고 하면 1918년의 쌀 소동을 의미하는 경우도 많다. 1918년 쌀 소동은 도매상이 가격을 담합해서 쌀 가격이 폭등하자 일본 농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대규모 유혈시위를 일으키며 발생했다. 이하의 내용은 1918년의 쌀 소동에 대해 다룬다.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일본은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공업화가 진행될수록 농촌의 생산 인구는 도시로 유출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의 생산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또 러시아 제국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한 시베리아 출병이 확실해지자 값의 폭등을 예상한 쌀 도매업자들이 가격 담합 등의 짓거리를 하면서 쌀값이 폭등했다. 당시 일본의 식단은 철저히 곡류 중심이었고 육류어류의 비중은 높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이 가증될 수밖에 없었다.

3. 경과

결국 1918년 7월 22일 도야마현우오즈(魚津)에서 처음으로 불만이 폭발했다. 당시 쌀 1석에 대한 가격 그래프. 소동이 일어난 1918년에는 0원이 되었다. 홋카이도로 가져갈 을 실은 배를 주부 3백여 명이 에워싸고 쌀을 팔라고 시위를 벌였다. 도야마현은 일본에서 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건만, 이곳에서마저 당장 오늘 먹을 쌀을 걱정해야 될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후 8월 3일 역시 도야마에서 시민 2백여 명이 쌀 도매업자들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이 소요를 시작으로 폭동이 교토·나고야대도시를 비롯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성난 군중들은 쌀 가게와 유통 회사를 불태우는 등 매우 공격적이라 고베에서는 유통업계 재벌스즈키의 본사가 불타는 일도 발생했다.

도시와 농촌을 뒤흔든 이 폭동은 탄광촌에까지 퍼졌고 사회는 9월 12일까지 혼란에 빠졌다.

4. 결과 및 영향

당시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던 초대 조선 총독 출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언론들이 쌀 소동 관련 보도를 하지 못하게 금지했고, 일본 육군을 출동시켜 폭동을 억눌러 수습하고자 했다. 50일간 소요가 369회나 발발해 군 병력 10만 명이 소요 진압에 투입되었다. 7786명을 기소하여 그중 2명은 사형, 12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등 잔혹하게 진압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자 결국 내각이 사퇴했다.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다이쇼 덴노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로 평민 출신인 하라 다카시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했다. 하라 총리는 쌀 등 생필품의 물가를 잡겠답시고 면사품의 수출을 금지하는 등 초강력 물가억제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경제는 군수품이 주도했던 전시 붐이 민수품으로 이어지면서 전후 붐이 발생하여 후일 '삼백산업'이라고 불리는 제분, 제당, 방직버블이 끼었는데, 하라 내각의 경제 정책이 오히려 여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미국의 전후 불황과 수출 부진까지 맞물리면서 버블이 터져 부실 사업체와 은행들이 무수히 양산되는 등 이른바 반동 불황을 일으켰다. 이 반동 불황은 일본의 1920년대 전반부를 통째로 말아먹었고 여기에 간토 대지진까지 겹치면서 결국 일본 경제는 1920년대를 침체 상태에서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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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소동의 영향은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도 피할 수 없었다. 쌀 소동에 놀란 일본은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세워 쌀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이후 쌀 생산량이 늘고 일본으로 이출량도 증가하였지만 생산량보다 이출량의 증가가 훨씬 급격했고 조선 내 쌀값은 지속적인 상승세였기 때문에 를 자가 소비하는 것보다 판매하는 것이 금전적으로는 이득이었으므로 조선인의 1인당 미곡 섭취량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그 결과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조선의 대일 무역 중 절반이 쌀로 채워질 정도였다.

산미증식계획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다 보니 부작용도 생겼다. 일본 안에서는 쌀값이 계속 하락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1929년 5월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은 "외지미 이입통제(外地米移入統制)" 방침을 세웠다. 식민지 쌀 수입을 허가제로 바꾸고, 다른 식량의 수입관세율을 높이는 것이 골자였다.

하지만 조선을 포함한 식민지들이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완전히 개조된 상태에서 갑자기 수출길이 막히면, 경제가 타격을 받는다. 식민지 하층민의 주식인 만주산 조(粟)의 수입관세율이 인상되면, 생계가 어려워진다. 어쩌면 10년 전 일본이 겪었던 '쌀 소동'이 식민지 전역에서 재현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것이 식민지 현실에 정통한 마쓰다 겐지(松田源治) 척무상과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허가제는 내지본위주의(內地本位主義)"라며, 총리의 계획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결국 허가제와 관세율 인상 계획은 유보되었다. 본토를 향한 식민지의 승리였다.

당시 재조(在朝) 일본인들은 고국의 방침을 거스르고 조선인 편에 섰다. 조선의 지주들도 쌀을 수탈당한다고 여기던 생각을 수출한다는 것으로 바꾸었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인 지주계급 사이에 형성된, 이런 애매한 유대감은 "무항산이면 무항심(無恒産 無恒心; 빈 곳간에서 인심 나랴)"이라던 맹자의 말 그대로였다.

쌀 수입 허가제 문제는 대공황 기간 중 일본에서 여러 차례 논란이 되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일본은 1930년대 들어 결국 조선의 공업화정책으로 선회했다. 조선은행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이 은행이 일본 콜시장에 의존하는 것을 막고자 만주 재진출을 통해 자립토록 했다. 결국 군부에 기대야 했다. 그것은 쌀 수입 허가제를 두고 다나카 총리가 조선총독부(군부)를 의식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5.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