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세 한자동맹의 무역거래소
영어 : Steelyard독일어 : Stahlhof[슈탈호프]
네덜란드어 : Staalhof
13세기 말, 잉글랜드의 런던에 설치되었던 한자동맹의 무역거래소이자 독일인 거주구역. 현재 캐논가 역의 위치에 존재했으며 그래서 2005년 해당 역사에 이를 기념하는 동판을 설치하기도 했다.
중세 브리튼섬에서 가장 거대한 무역단지였던 스틸야드는 거대한 창고를 비롯한 회의실, 강당이 존재했으며 400여명의 독일 상인이 거주한 주택도 존재했으며 잉글랜드와 협력관계를 유지해주는 독일 대사관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독일이 하나의 독립체가 아니라 수많은 독립국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곳은 거의 공식적인 대표기관에 가까웠습니다. 무역과 외교가 아직 구분되지 않던 때여서 이곳은 잉글랜드에 있는 독일의 얼굴이었습니다. 스틸야드를 통해 들어오는 상품은 효용성과 품질 모두 뛰어났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강력한 힘을 행사했습니다.
힐러리 맨틀(Hilary Matel)
힐러리 맨틀(Hilary Matel)
1.1. 탄생
1282년, 잉글랜드에서는 안정적인 청어 공급을 위해 한자 동맹에게 먼저 손을 내밀게 된다. 1303년엔 스틸야드에 세금을 면제해주는 파격적인 대우도 해주었고, 잉글랜드의 양모수출액의 50%를 기록할 정도로 정치권의 특혜에 힘입어 급격한 성장을 기록하게 된다. 다만 잉글랜드에서 아무생각없이 퍼준건 아니었다. 헨리 8세의 최측근이었던 토머스 크롬웰의 경우엔 당대에 스틸야드와 커넥션이 있다는 카더라가 돌았을 정도[출처]로 정치권과 밀접했던 데다가, 혜택을 받는 대신 잉글랜드 왕실의 비자금을 담당했기 때문이다.양모수출문제로 무력 충돌이 벌어지며 1469년에 파괴되기도 했으나, 잉글랜드의 정치적 이유와 한자동맹의 경제적 이유가 맞물려서 1475년에 재개장했고, 1588년 칼레 해전 이후 잉글랜드가 해상 패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기 전까지 100년 넘게 잉글랜드와 한자동맹의 이득을 전달해주는 기구로 활약했다.
1.2. 폐쇄
그러나 잉글랜드가 칼레 해전 이후, 무적함대의 해상봉쇄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게 되자 스틸야드에 대한 혜택이 줄어들게 되었고, 이에 반발한 한자동맹이 자신의 상업지구 내의 영국인들을 모두 쫒아내자 1598년 7월 25일, 엘리자베스 1세는 스틸야드 폐쇄를 지시했다. 제임스 1세가 다시 스틸야드를 재개장했으나 이전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1666년 런던 대화재때 파괴되었다. 거기에 쇠퇴중이던 한자동맹이 운영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면서 역사의 뒤로 사라지게 되었다.2. 계량장치
이렇게 생겼다.steelyard balance, stilyard라고도 불린다. 한쪽에 평형추를 매달고 무게를 재는 고전적인 장치로, 1번 항목의 지역에서 사용된 물건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국에서도 90년대까지는 쌀가게같은 곳에서 자주 쓰이던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