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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roces se Slánským/Slánský trial슬란스키 재판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총서기이자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2인자였던 루돌프 슬란스키(Rudolf Slánský, 1901–1952)를 위시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고위층 11명이 반역죄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당한 사법살인 사건이며 정적들에 대한 대규모 사법살인이라는 점에서 '공산권판 인민혁명당 사건'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는 사건이다.
당시 체포된 14명 중 11명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 재판은 '반유대주의 재판'으로도 평가받는다. 슬란스키는 유대인 상인의 아들이었으며 어머니, 남동생, 삼촌, 이모가 홀로코스트로 살해당했다.
2. 진행 과정
루돌프 슬란스키 | 클레멘트 고트발트 |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서열 1위이자 스탈린주의자였던 클레멘트 고트발트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초대 대통령 겸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초대 의장은 자기도 숙청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지도부의 지시를 받은 소련 고문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오랜 동지이자 권력의 2인자였던 슬란스키를 숙청하고자 결심했고 이에 따라 고트발트는 1951년 가을에 슬란스키를 위시한 공산당의 고위 관료들 13명을 트로츠키주의, 티토주의자와 시온주의자라는 명목과 '대반역죄, 군사기밀 발부, 전복활동, 경제적 사보타주와 사보타주, 당과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 시도 준비'에 대한 혐의로 체포했다. 이와 함께 슬란스키의 아내였던 요제파 슬란스카(Josefa Slánská, 1913–1995)도 24년간 몸담아 온 공산당에서 쫓겨났고 슬란스키의 동생이자 외무부 언론국장을 역임했던 리하르트 슬란스키(Richard Slánský, 1904–1973)도 함께 투옥되어 6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정작 트로츠키주의와 티토주의는 반시온주의로 유명했으며 심지어 피고인들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열렬한 반시온주의자였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처형된 오토 피슐 재무부 차관은 유대인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자로 유대인들의 불법 은닉 재산 몰수를 '숨은 물건 찾기'처럼 여길 정도로 즐긴 사람이었고 안드레 시모네는 한술 더 떠 마셜 플랜을 거부하고 굴라크를 '트로츠키주의 또는 제국주의 선전의 순수한 발명품'이라고 주장하던 골수 스탈린주의자에 체코로 귀국하기 전에는 무려 NKVD의 스파이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이는 쉽게 말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에 실제로는 6.25 전쟁 참전용사에 골수 반공주의자였던 것을 넘어 CIA 출신이었던 사람까지 있었던 꼴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데 실제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사람 중 2명이 6.25 전쟁 참전용사였다.
검찰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피고인들은 1947년 4월부터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대가로 미국을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스파이 행위와 파괴 행위를 저지르기 위한 이른바 '모겐소 계획'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는 팔레스타인 전쟁 당시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지원으로 인해 친시온주의 국가로 여겨졌다.
체포된 사람들은 고문과 약물로 억지 자백을 해야 했고 슬란스키는 혹독한 심문을 버티다 못해 옥중에서 자살을 2번이나 시도했다. 당국이 공개한 정보만 알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은 대부분 이들에 대한 처벌을 찬성했고 이들 중 8,500명 이상은 모든 피고인에 대한 사형을 요구하는 청원에 서명했다.
1952년 11월 20일부터 7일간의 재판 과정에서 모든 피고들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죽음을 요구했다고 한다.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은 이에 대해 '압도적인 증거와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범죄를 자백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11월 27일에 법원은 슬란스키를 포함한 11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나머지 3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슬란스키는 사면 요청을 했으나 고트발트는 이를 거절했다.
재판 과정도 불공정하기 짝이 없었는데 피고인들의 변호사들은 피고들에게 항소하지 말 것을 권유했고 재판에 주 검사로 출석한 요제프 우르발레크(Josef Urválek, 1910–1979)은 피고인들을 반대 심문할 때 자주 끼어들면서 피고들을 대놓고 벌레와 배설물에 비유했으며 마지막 재판에서는 "나는 모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을 요구합니다. 정의가 조금도 동정하지 않고 철의 주먹처럼 부수게 하십시오. 이 적의 둥지를 불태울 불이 되게 하십시오."라는 막말을 남겼다. 거기다가 상술한 것처럼 오토 피슐이 유대인들의 은닉 재산을 몰수한 것에 대해서는 '부유한 유대인 이민자들과의 사보타주 활동을 은폐하기 위한 속임수'라는 억지 논리까지 동원했다. 덤으로 이 재판에서 피슐은 '민족주의 유대인'으로 포장되었다. 심지어 이 재판에 회부된 모든 피고인들은 준비된 진술을 외웠고 재판에서 외운 진술을 낭독해야 했다.
그리고 사형을 선고받은 11명은 모두 사형 확정으로부터 겨우 6일밖에 지나지 않은 1952년 12월 3일에 교수형에 처해진 후 시신이 화장되었는데 이때 이렇게 화장된 11명의 재를 담은 감자 자루를 실은 밴이 지나가던 프라하의 도로가 눈으로 막혀서 탑승자들이 밴을 가볍게 하기 위해 도로 가장자리에 재를 뿌렸다고 한다.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들의 아내와 자녀는 연좌제가 적용되어 고향에서 강제로 추방된 것은 물론 좋은 직업과 고등 교육을 향유하는 것이 금지당하는 등 경제적, 사회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3명은 1955년에 모두 석방되었고 사형당한 11명은 1963년에 당과 법원에 의해 복권되었으며 프라하의 봄 무렵인 1968년에야 이 사실이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에게 공개되었고 같은 해에 처형된 사람 중 9명은 훈장을 추서받았다.
한편 고트발트는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여한지 고작 5일밖에 지나지 않은 1953년 3월 14일에 매독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동맥 파열로 사망했는데 이는 슬란스키의 처형으로부터 고작 3개월 후였다. 반면 우르발레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에 대법원장에 올랐고 이후에도 수십 건의 사법살인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다가 1963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1968년에는 한 인터뷰에서 국가안보부와 고트발트를 비난하면서 불법 행위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1979년 11월 29일에 자살했다고 한다.
3.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의 명단
이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사형 선고
- 루돌프 슬란스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
- 블라디미르 클레멘티스(Vladimír Clementis, 1902년생) 외무부 장관
- 오토 피슐(Otto Fischl, 1902년생) 재무부 차관
- 요제프 프랑크(Josef Frank, 1909년생) 체코공산당 부총서기
- 루드비크 프레이카(Ludvík Frejka, 1904년생) 대통령비서실 국민경제과장
- 베드르지흐 게민데르(Bedřich Geminder, 1901년생)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
- 루돌프 마르골리우스(Rudolf Margolius, 1913년생) 무역부 차관
- 베드르지흐 레이친(Bedřich Reicin, 1911년생) 국방부 차관
- 안드레 시모네(André Simone, 1895년생) 루데 프라보(Rudé právo)[2] 편집장
- 오토 슐링(Otto Šling, 1912년생)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브르노 지역 위원회 수석 비서
- 카렐 슈바프(Karel Šváb, 1904년생) 국가안보부 차관
- 무기징역 선고
- 바우로 하이두(Vavro Hajdů, 1913~1977) 외교부 차관 - 1956년 석방
- 에우겐 뢰블(Eugen Löbl, 1907~1987) 무역부 차관 - 1960년 석방
- 아르투르 론돈(Artur London, 1915~1986) 외교부 차관 - 1956년 석방
4. 기타
-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는 달리 사형당한 사람 중 완전히 독재 체제의 희생양이었다고 볼 수는 없는 사람도 완전히 무고했던 사람만큼 많았다. 일단 슬란스키 본인부터 체코슬로바키아에 '스탈린주의적인' 심문 방법을 도입하고 반대파 탄압의 주요 조직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레이친과 슈바브도 정권 초창기의 무자비한 반대파 숙청에 가담한 바가 있고, 특히 슈바브는 학생 행렬에 기관총 발포를 명령할 뻔했으나 상부의 반대로 한 발 물러난 적도 있었고 심지어 후술할 밀라다 호라코바 처형 사건에까지 가담하기도 했다. 안드레 시모네는 NKVD의 스파이로 일하며 스페인 내전에서 좌익의 민간인 학살을 조장했고 레프 트로츠키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혹도 있다.
- 이 사건처럼 이전에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후에 저지르지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례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소련에서도 대숙청의 가해자가 내일의 피해자가 되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며 스탈린주의자에게 탄압받은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그 자신이 폴란드의 민족주의자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고, 라코시 마차시 정권에 처형당해 1956년 헝가리 혁명의 도화선이 된 러이크 라슬로(Rajk László, 1909–1949)도 슬란스키, 고무우카와 비슷한 예였다. 그리고 가까운 북한에서도 장성택이 조카 김정은에 의해 처형되긴 했으나 장성택도 실제로는 김정일 시기의 대규모 숙청인 심화조 사건의 총책임자였다.
- 여기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적용되었는데 사형을 선고받은 11명이 중산층과 노동계급 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살아남은 3명은 상류층 출신이었다.
- 슬란스키의 아들 소 루돌프 슬란스키(Rudolf Slánský mladší, 1935–2006)는 체코 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1969년에 제명된 후 반정부 활동을 이어나갔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후인 바츨라프 하벨 시기에 러시아, 슬로바키아 대사로 일하며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해체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슬란스키의 딸 마르타 슬란스카(Marta Slánská, 1949–)는 대부가 클레멘트 고트발트였고, 그녀의 이름도 클레멘트 고트발트의 부인인 마르타 고트발토바(Marta Gottwaldová, 1899–1953)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참고로 마르타 고트발토바는 슬란스키의 처형 후 미안한 마음이었는지 슬란스키의 미망인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녀도 남편의 사망으로부터 얼마 안 지난 1953년 10월 28일에 암으로 사망했다. 마르타 슬란스카는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아버지가 '반역자'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녀는 1997년부터 2014년까지 부동산 회사를 경영하며 프라하 최대의 부동산 중개업체 중 하나로 만들었다.
-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집권한 단 5년 동안 유죄 판결을 받은 정치범은 무려 8만 3천여 명에 처형된 정치범만 무려 190명[3]이었다. 당시 수감된 청소년도 200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이것도 모자라 고트발트는 1950년 8월 1일부터 신형법을 적용해 20세 미만인 사람에게도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1953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구는 1,286만 명(체코 920만 명, 슬로바키아 366만 명) 정도였다. 즉, 단 5년 만에 체코슬로바키아 인구의 무려 0.65%가 정치범으로 수감된 셈이다. 이 5년 동안 체코슬로바키아에서 237명이 처형되었으며 고트발트의 사후 36년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처형된 사람 수의 총합이 233명,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에서 처형당한 정치범의 총합이 248명[4]이란 것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수의 정치범이 처형당한 셈이다. 그리고 고트발트 시기에 다른 정치범들 수백 명은 우라늄 광산에서 강제노동 및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에서 수감된 사람의 총합은 20만 5천여 명, 옥사한 사람은 8천 명, 국경을 도피하다가 총살당한 사람은 450명, 해외로 도피한 사람은 정확히 170,938명에 달한다고 한다.
-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마지막으로 사형 당한 사람은 1987년에 임신한 아내와 6살과 4살에 불과했던 두 딸을 잔혹하게 살해하여 1989년 6월 8일에 처형된 슈테판 스비테크(Štefan Svitek, 1960–1989)이다. 현 슬로바키아의 브레즈노(Brezno)에서 범죄를 일으켰기에 이 지역을 망라해 부르던 호레흐로니에의 토막살인범(Horehronský Rozparovač, 잭 더 리퍼의 슬로바키아어 명칭이 Jack Rozparovač이다.)라고 불리며 저지능자인 탓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자연스레 사회에서 소외되었고 집에선 알콜 중독이었던 아버지에게 시달려서인지 어릴 때부터 알콜 중독에 빠져 있었고 (주로 성적인 범죄와 동물 학대로, 동물에게 못할 짓을 하다가 안락사시켜야 했을 만큼 부상을 입힌 적도 있다.) 많은 범죄를 저질러서 해당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에도 8년간 투옥되었고 11개월 정도의 정신과 치료 처분을 받은 경력이 있었는데 1987년에 술에 취한 채로 집에 들어간 뒤 침실로 가려다가 문을 잠근 아내에게 거절당하자 도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도끼로 죽인 후 아내의 시체와 뱃속의 태아, 두 어린 딸의 시체에도 각종 비상식적인 행위를 했다. 체포당하기 전에도 가관이었던 게 자살하겠다며 폐가에서 술을 마신 채로 목을 매고 자신의 성기를 자르다가 밧줄이 끊어져 땅에 쓰러져서는 기절한 뒤 깨어나자 자신을 쫓던 경찰에 겁을 먹고 도망치려다 붙잡혔다.
-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인 1990년 5월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사형이 폐지되면서 최고 형량은 종신형으로 대체되었고 이후에도 체코에는 사형제가 없다.
-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이브 몽땅 주연의 영화 생사의 고백(1970)이 바로 이 재판을 소재로 했다.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스탈린이 사망한 후 복권되어 프랑스로 망명한 아르투르 론돈(Artur London)이 1968년에 출간한 동명 회고록 <고백(L'Aveu)>을 원작으로 했다. 한국에서도 프랑스 개봉 다음 해인 1971년에 수입되어 반공영화로 개봉했다.
5. 슬란스키 재판의 예고편: 밀라다 호라코바 처형 사건
밀라다 호라코바(Milada Horáková, 1901–1950) |
고트발트는 1950년 5월 31일~6월 8일에 반독재 인사에 대한 재판을 열어 독립운동가 출신의 전직 정치인이던 여성 밀라다 호라코바를 포함한 4명에게 고문으로 얻은 자백을 바탕으로 '서방의 지시를 받아 간첩 행위를 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세웠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사형시키고 4명에게는 종신형, 5명에게는 15~28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밀라다 호라코바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나치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이다가 게슈타포에 의해 테레진 수용소에 구금되고 사형까지 구형되는 등 다사다난한 활동을 해 왔고, 1945~1948년에는 체코 국민사회당 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나 1948년에 공산주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의원직에서 사임한 반공주의자였다. 고트발트는 소련의 사주를 받고 쿠데타를 일으켜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시킨 매국노였으니, 한마디로 매국노가 독립운동가를 죽인 셈이다.
이 재판도 요제프 우르발레크가 주 검사로 참석했고 소련 고문이 재판장에 참석한 데다가 공개 재판에 피고인이 따르도록 강요된 '대본'이 있었으며 전체 재판 과정은 필름에 녹화되는 동시에 라디오로도 녹음되었다. 당시 저녁 라디오에 송출된 재판 녹음은 당국의 검열을 받은 뒤에 송출되었다고 한다. 공산당은 이들의 사형을 요구하는 공개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조직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체코 법원은 '사악한 놈', '악랄한 범죄자', '배신자', 심지어 '피에 굶주린 개' 등의 원색적인 표현으로 가득 찬 피고들에 대한 사형을 요구하는 6,300통의 편지를 접수했으며 심지어 마을마다 설치된 확성기에도 이들에 대한 증오 섞인 발언이 울려퍼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재판에서 품위 있고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했다.
그녀의 사형 선고는 뱅상 오리올, 윈스턴 처칠, 엘리너 루스벨트, 알베르 카뮈, 시몬 드 보부아르,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버트런드 러셀처럼 오늘날에도 익숙한 이름의 국제적 저명 인사들이 항의할 정도로 국제적 반향이 컸으나 고트발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녀의 사형 선고에 공식적으로 서명했고 결국 그녀는 1950년 6월 27일에 사형 선고를 선고받은 다른 3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녀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정치적 이유로 처형된 234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으며 처형 후 호라코바의 유골은 강제로 불태워져 가족들에게 전달되지도 않은 채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다. 참고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은 반정부 인사에 대한 장례식이 반정부 시위로 번질 것을 염려하여 수백 명의 정권 반대자들의 시신을 의도적으로 숨겼고 일부 반대자들의 유골은 이후 비밀리에 파괴되기도 했다.
이 재판은 공산주의 치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정치적 재판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재판 후에도 전국적으로 35건의 후속 재판이 이어지면서 재판에 회부된 피고인의 수만 무려 639명에 달했고 상술한 호라코바의 재판을 제외해도 사형 10명, 무기징역 48명, 피고들에게 선고된 형량 총합 7,83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형량이 선고되었다.
물론 호라코바의 판결은 '프라하의 봄' 기간에 무효로 선고되었고 1990년에 프라하 성에서 홀레쇼비체 지구까지 이어지는 프라하의 주요 도로 중 하나에는 호라코바의 이름이 붙게 되었으며 1991년에 바츨라프 하벨은 그녀에게 체코 최고 훈장 중 하나를 수여했고 2004년에 그녀가 처형된 6월 27일은 체코에서 '공산 정권 희생자 추모의 날'로 선포되었다. 2008년 9월 11일에는 이 사건의 가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검사 루드밀라 브로조바폴레드노바(Ludmila Brožová-Polednová, 1921–2015)에게 사법살인을 방조한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했다. 구금 당시 그녀는 만 86세의 고령이라 2010년 12월에 사면되었고 2015년 1월 15일에 향년 9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녀는 1950년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이 실시한 정치적 숙청 및 탄압과 관련하여 형을 선고받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2020년 1월에 밀라다 호라코바는 주자나 차푸토바 슬로바키아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훈장인 백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2005년에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호라코바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나라의 그 누구도 신념 때문에 사형을 당하거나 투옥되어서는 안 된다."
[1] 스탈린은 유대인 고위층 인사나 유대인을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의 고위급 인사를 사고로 위장해 암살하였지만 이는 정확히 말해 반유대주의라기보다는 단순히 스탈린 특유의 의심과 독재에 말려든 사례에 더 가깝다.[2]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기관지[3] 178명이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4] 이들 중 1960년까지 처형된 사람의 총합만 234명에 달한다고 하며 이 중 1명은 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