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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Colonial Era | |
메이플라워 호와 청교도들 | |
<colbgcolor=#bb133e><colcolor=#fff> 시기 | 1492년 ~ 1783년[1]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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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사의 시대 구분. 혁명 시대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다른 열강들에게 식민 통치를 당하던 시기이다.기간은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바하마 제도에 도착한 1492년부터 미국 독립 전쟁의 결과로 영국과 파리조약을 맺은 1783년까지이다. 식민지 시기 말기는 혁명 시대와 연도가 거의 겹친다.
2. 명칭
한국에서 보통 식민지 시대라고 지칭한다. 영어로는 Colonial Era보다는 Colonial period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기 때문에 '식민지 시기'가 더 정확한 번역이나, 한국에서 자주 사용하는 명칭을 사용한다.3. 역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동해안에 식민지가 건설되었으나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사망했다.[2] 영국 최초의 식민지는 1587년 로어노크 식민지나, 이 식민지는 1590년에 거주민 전원이 실종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 이후 최초로 성공한 식민지는 현재의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3]에 건설한 식민지이다. 그 이후 1620년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청교도[4]들이 지금의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달한후 식민지를 세웠다. 제임스 타운보다 폴리머스가 나중에 세워졌는데도 미국의 시초로 널리 알려진 데는 정치적 영향이 큰데, 제임스 타운과 플리머스를 시작으로 각각 남부/북부 식민지들이 생성되었고, 이는 미국 남북 전쟁시절까지 이어진다. 이때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함에 따라 플리머스가 더 부각된 것.이들이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운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소상공인들이라서 낚시대 하나 챙겨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황무지 개척에는 능력이 없었다. 그 결과 제임스타운의 전례를 밟기라도 하듯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12월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가 다시 영국으로 떠난 이듬해 4월에는 거의 절반인 54명만 살아남아 있었고, 그나마도 절반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이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순전히 인근에 거주하던 원주민 왐파노아그(Wampanoag)족 사람들의 호의에 기반한 것이었고,[5] 그나마도 두 번이나 유럽인에게 납치당하고 노예로 팔리는 등의 고생을 하다가 겨우 메이플라워호 도착 1년 전에 돌아왔다가 2년 뒤에 역병으로 사망한 티스콴툼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이 사람만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표류인들은 티스콴툼이라는 발음도 못 해서 '스콴토'라고 불렀다.
필그림들은 자신들을 도와준 왐파노아그인들의 호의에 감사는커녕 원주민들을 사탄의 종자라고 불렀다. 반면 '영어를 할 줄 아는 스콴토'는 자신들의 정착을 돕는 하느님의 사자였다. 정착민들의 계속되는 확장과 더불어 왐파노와그 부족의 영역에 침범하게되고 결국 필립왕 전쟁 때, 왐파노와그들은 정착민들을 공격해서 양측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정착민들에 의해 왕파노와그 족은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된 평화협정이 맺어진 지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거의 절멸했고, 2010년 기준으로 2,756명 정도의 후손이 남아있다. 현대의 왐파노아그인들은 추수감사절을 '국가 애도의 날(National day of mourning)'로 부르며 과거 백인들의 침략적 역사에 대해 교육하고 항의하고 있다. 이 시기를 다룬 글.#
이후 계속된 식민 사업으로 미국 동부 13개 주의 기초가 되는 식민지들이 세워진 상황(1732년)에서 여러 요인들로 인한 본국과의 불화가 생겨난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 재정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영국이 치안 유지비를 식민지들에게 부담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사실 미국에 주재하던 밀수업자들(아직은 미국인 아님)이 영국의 무역 재정 적자를 악화시킨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처음엔 관계 개선을 원하였을 뿐 독립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식민지 출신 온건파들의 주된 입장은 "저기요, 그렇게 세금 의무 주시면 권리도 줘야죠." 정도로. 프랭클린의 "대표 없는 곳에 세금도 없다."라는 유명한 발언이 이런 의견의 연장선이었다. 다만 실제로는 세금 못 내겠다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식민지 대표들이 영국에 가서 대서양 건너 식민지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은 개소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실제로 당시 기록을 봐도 정치적 권리를 달라는 것보다 세금 내기 싫다가 훨씬 많다.
여튼 영국 본토는 식민지의 반발을 무시하고 인지세를 걷어서 식민지의 공업성장을 억제하여 식민지를 영국의 시장 정도로 유지하려 들었다. 이에 대해서 영국인들이 식민지인들에게 참정권을 주면 어느 순간엔가 그 세력이 대책없이 커져 버린 식민지가 본토를 누르고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될 것을 우려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 미국과 영국의 내수경제 규모를 생각해보면 일리있는 판단이다. 소규모 권리를 인정해주더라도 실제 정치-경제적 영향력과 행사 가능한 권한의 괴리로 인한 불만은 터져나올 것이며, 결국 독립을 하든지 아니면 본인들의 힘에 걸맞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든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후자가 된다면 본토가 식민지에 먹히게 되는 셈.
4. 둘러보기
[1] 1765년 ~ 1783년의 기간은 식민지 시대이면서 혁명 시대와 겹친다.[2] 미국의 스페인령은 남부 플로리다와 텍사스, 루이지애나, 오클라호마 그리고 서부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뉴멕시코였다. 남부는 쿠바 부왕령의 일부였다.[3] 당시 영국의 왕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본떠 지어졌다.[4] Puritan인데, 이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많다. 영국역사에서 청교도는 국교회에 대항해서 개혁운동을 벌인 이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들처럼 영국국교회를 버리고 이탈한 이들에 대해서는 분리주의자Separatist라고 부른다.[5] 이 때 왐파노아그인들도 스페인 탐험가들을 통해 퍼진 전염병과 이웃 부족의 침입으로 큰 고생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