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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9:42:57

아낌없이 주는 나무

1. 동화
1.1. 줄거리1.2. 분석
2. 기타3. 노래

1. 동화

The Giving Tree

미국의 아동 문학가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이 1964년에 쓴 동화다.

1.1. 줄거리

어느 곳에 나무와 친구인 소년이 있었다. 나무와 소년은 언제나 나뭇가지로 그네를 타고 사과도 따먹고 즐겁게 함께 놀았다.

세월이 흐르고 소년이 찾아오는 일이 줄어 나무는 쓸쓸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성장한 소년이 찾아왔다. 나무는 기뻐하며 예전처럼 그네타기를 하며 놀자고 했다. 하지만 소년은 난 이제 그네타기를 하고 놀기엔 너무 컸다고 했다.

소년은 나무에게 일을 하기 위한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자 나무는 자신의 사과를 가져가라고 했다. 소년은 나무의 사과를 가져가 팔아 돈을 얻었다.

더 자라서 어른이 된 소년이 찾아오자 나무는 예전처럼 가지에 매달려 그네타기를 하며 놀자고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난 그네타기를 하며 놀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했다. 소년은 결혼을 하려면 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베어가서 집을 지으라고 했다. 어른이 된 소년은 나무의 가지를 모두 가져가서 집을 지었다.

더 나이가 든 소년이 찾아와 너무나 슬퍼서 어디론가 멀리 가고 싶다고 했다. 나무는 자신의 몸통을 베어가서 를 만들라고 했다. 어른이 된 소년은 나무의 몸통을 베어가서 배를 만들어 멀리 떠났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 소년은 이제는 노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나무에게 피곤해서 쉴 곳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무는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밑둥밖에 없으니 와서 그루터기에 앉으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루터기에 앉았다. 나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했다.

1.2. 분석

이 작품을 고찰할 때 주로 거론 되는 질문 중 하나가 "나무는 진정으로 행복했을까?"인데, 여기서 나무는 의인화되어 인간과 유사한 존재로 취급된다.

나무는 아이가 위에 올라타거나 그네를 타는 등의 행위를 하면서 아이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런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다소 비가역적인 절차다. 타인을 목적으로 대우하여 어떤 감정의 교류를 맺는 순간, 인간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1] 그렇기에 나무는 아이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면서 점차 자신과 놀아주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이후엔 돈을 벌기 위해,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수단'으로 대우하여 벌목한다. 그럼에도 나무는 아이가 자신을 기억하고 찾아와주었기에 행복했다고 서술된다.

그러나 결국 나무에겐 그루터기 밖에 남지 않았고, 몸을 줄여가며 돕는다는 것엔 한계가 있기에 줄 수 있는 것은 남지 않았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말했다. 인간을 쓸모 있는 무언가로 대우한다면 타인은 설령 남을 돕는 것에 행복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만을 위한 도움과 행복은 끝이 존재하는 행복이 된다.[2] 나무가 비록 아이를 사랑했더라도, 더 이상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 아이를 생각하며 행복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나무는 아이를 목적으로 대우하여 관계를 맺었기에 아이를 잊을 수 없는데, 찾아오지 않는 아이를 생각하며 불안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찾아오지 않던 아이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자신을 쓸모있는 재화로 생각했다면, 그럼에도 기쁘니까 계속 찾아오게 하기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었을 것이다. 이는 곧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3] 아이를 만날 수 있었기에 행복했지만[4], 진정으로 행복했던 게 아닐 수 있는 것이다.

2. 기타

지문: 나무는 반가웠습니다.
나무: (핏대를 세우며) "오지마! 꺼져!"
그리고 소년은 나무를 일격으로 썰어서 벌채했고, "마무리."라면서 그루터기를 폭파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마지막 컷의 지문은 원작과 같이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3. 노래


* 이 동화의 이름을 따온 한국의 2인조 밴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있었다. 유명곡으로는 1집의 타이틀곡 '유년시절의 기행'[8]과 2집 타이틀곡인 '나만의 회상'이 있다.



[1] 마치 어린왕자 속 여우가 금빛 보리밭을 보면 어린왕자의 금빛 머리칼이 생각나도록 각인됐듯 말이다.[2] 작품에서는 나무가 아이 그 자체를 위해 헌신한 것처럼 말이다.[3] 인간관계 속에서 과격하게 말하자면 토사구팽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4] 작품에 서술되어 있으므로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수동적인 행복에 불과하다.[5] 이미 이 당시 중세 영어에서는 명사의 성 구분이 매우 희석된 상태였다.[6] 심지어 아군, 적군 안 가린다. 게다가 같은 나뭇잎 출신들이 제일 많이 이용해먹는 실정인데, 아무래도 같은 나뭇잎 사람이다보니 지근거리에서 구하기 쉬워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거의 엠버밍.[7] 사실상 나루토의 세계관에서 이 사람의 세포는 반쯤 줄기세포 취급이다. 하시라마의 세포 자체가 생명력이 넘쳐서 세포를 이식한 자로도 치유력 상승 등의 효과가 있기 때문. 마다라같은 경우 이자나기로 부활하고, 하시라마의 세포 이식해서 오랜 기간 살아왔고, 오비토 또한 반신이 붕괴되었지만, 인조세포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8] 대중가요와 성악이 결합된 곡으로 당시 꽤 인기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