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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尊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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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 |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 |
출생 | 1305년 8월 18일 |
사망 | 1358년 6월 7일 (향년 52세) |
재임기간 | 초대 정이대장군 |
1338년 9월 24일 ~ 1358년 6월 7일 | |
형제 | 아시카가 다다요시(동생) |
서명 |
1. 개요
일본 가마쿠라 시대 말기, 남북조 시대의 무장이자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아명은 '마타타로'(又太郞)였고, 본명은 '다카우지'(高氏)였다. '다카우지'(尊氏)는 개명한 것으로 그의 두 이름 모두 편휘[1]를 받아 지어진 이름이었다.
첫 이름인 '高氏'는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싯켄) 호조 다카토키(北條高時)로부터 편휘를 받아 지은 이름이었고, 바꾼 이름인 '尊氏'는 협력 관계였으나 나중에 적대 관계로 돌변한 고다이고 덴노의 휘인 '다카하루'(尊治)에서 편휘를 받았다.
2. 세계(世系)
시조는 세이와 덴노의 손자이고, 사다즈미노미코([ruby(貞,ruby=さだ)][ruby(純,ruby=ずみ)][ruby(親王,ruby=ノみこ)])의 아들이었던 진수부장군 미나모토노 쓰네모토([ruby(源,ruby=みなもとノ)][ruby(經,ruby=つね)][ruby(基,ruby=もと)])로, 그의 14세손이었으며, 닛타 요시사다의 7종제(16촌)였다.미나모토노 쓰네모토 → 미쓰나카(滿仲) → 요리노부(賴信) → 요리요시(賴義) → 요시이에(義家) → 요시쿠니(義國) → 요시야스(義康) → 아시카가(足利) 요시카네(義兼)[2] → 요시우지(義氏) → 야스우지(泰氏) → 요리우지(賴氏) → 이에토키(家時) → 사다우지(貞氏) → 다카우지(尊氏)
3. 생애
3.1. 성장과 거병
출생지는 가마쿠라시, 아시카가시 등 설이 분분하다. 다카우지의 집안은 제56대 세이와 덴노의 후손인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중에서도 카와치 겐지(河内源氏) 계열의 명문 무가였다. 특히 하치만타로(八幡太郞)로 불린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넷째 아들 요시쿠니(義國)는 시모츠케국[3] 아시카가(足利)에 자리를 잡았고, 그의 차남 요시야스(義康)가 아시카가씨(足利氏)를 칭하면서 이 가문이 시작되었다.한편, 요시쿠니의 장남 요시시게(義重)는 코즈케국[4] 닛타군에 정착하여 닛타씨(新田氏)를 세웠기 때문에, 아시카가씨와 닛타씨는 카와치 겐지라는 같은 혈통에서 갈라져 나온 형제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아시카가씨는 시모츠케국 아시카가 장원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 유력 무가로 자리 잡았으며, 막부의 핵심 세력 중 하나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막부를 창건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직계 쇼군 혈통은 불과 3대 만에 단절되었고, 그 뒤 실권은 타이라 가문 출신으로 간무 헤이시(桓武平氏)에 속한 호조씨 일가에게 넘어갔다. 호조씨는 싯켄이라는 직위를 통해 막부의 정권을 독점하며, 형식적인 쇼군을 앞세운 채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왜곡된 정치 구조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천황 중심의 정치 회복을 도모하던 고다이고 덴노는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목표로 거병하였다. 이에 가마쿠라의 호조 정권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진압을 명령했으나 당시 부친 사다우지(貞氏)의 장례를 막 치른 직후였기에 이를 이유로 출병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막부는 그의 정실과 자식을 인질로 삼아 출병을 강요했고, 다카우지는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군을 일으켰다. 《고전태평기》에 따르면, 이 무렵 다카우지는 막부 정권에 대한 깊은 반감을 품게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카우지의 출병과는 별개로, 고다이고 덴노의 첫 번째 거병은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고, 막부에 의해 오키 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고다이고 덴노의 거병이 각지의 반막부 세력을 자극한건 사실이고[5] 다카우지를 비롯해 막부 내 카와치 겐지 출신 무사들은 호조 정권에 대한 불만을 키우며 전세 변화의 가능성을 엿보고 있었다.
1333년, 고다이고 덴노가 측근들의 도움을 받아 유배지를 탈출해 다시 거병하자, 막부는 또다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과 달리 고다이고 덴노의 밀지를 받고 막부를 배신하여 황실 측에 가담하였다. 이후 자신의 영향권에 있던 각지의 무사들에게 거병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내는 한편, 교토 일대를 공격하여 막부 세력을 소탕하는 데 성공하였다.
3.2.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과 겐무 신정
당시 간토 지역의 유력 무사였던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하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자신의 아들 센주오(千寿王)를 파견해 무사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파견이란 용어 때문에, 이미 장성한 후였을것 같지만 당시 센주오는 3세였다. 다카우지를 대신해서 어린 적자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며 막부 타도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동맹 세력에게 신뢰를 주기 위한 일종의 상징적 인질로 보낸 셈. 이후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 등과 함께 가마쿠라를 공격해, 끝내 호조씨가 이끄는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렸다.막부가 무너지자 고다이고 덴노는 이른바 겐무 신정을 선포하고, 덴노를 중심으로 하는 옛 율령제 체제로의 복귀를 꾀했다. 다카우지는 겐무 정권 수립에 기여한 공으로 높은 관직과 넓은 영지를 하사받았고, 이 시기 덴노의 휘인 다카하루(尊治)에서 한 글자를 받아, 다카우지(尊氏)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다카우지는 애초부터 헤이시 계열인 호조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속한 세이와 겐지의 적통 가문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지향은 고다이고 덴노의 왕정복고 이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양측은 겐무 신정 내에서 본격적으로 반목하게 되었다.
다카우지는 겐무 정권에서 실질적인 권력에서 소외되자, 무사 계층의 지지를 끌어모으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고다이고 덴노의 아들인 모리요시 친왕과 격렬히 대립하게 되었다. 모리요시 친왕은 다카우지를 정권 전복의 위험 인물로 간주하고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다카우지는 곧 황위 찬탈을 기도했다는 혐의를 친왕에게 씌웠다.
고다이고 덴노의 후궁으로, 훗날 고무라카미 덴노가 쓰네요시 친왕(恒良親王)의 생모인 아노 야스코와 결탁하여, 모리요시 친왕에게 덴노 자리에 올리려 한다는 혐의를 덧씌운 것인데, 결국 모리요시 친왕은 다카우지에게 체포되어 유폐되었고, 다카우지는 혹시 모를 호조씨 잔당과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 부하를 보내 친왕을 암살하게 했다.
그러던 중 1335년, 가마쿠라에 잔존해 있던 호조 정권의 세력들이 호조 도키유키를 중심으로 이른바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다카우지는 덴노의 칙명 없이 독단적으로 출병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비록 이 시점에는 아직 막부가 성립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고다이고 덴노는 이미 전장에 나가 있는 다카우지를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이대장군의 직함을 내리는 것으로 사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서는 장군의 명령이 무엇보다 우선하고, 조정의 조칙은 그 다음이라는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반란을 평정한 뒤, 다카우지는 그대로 가마쿠라에 머무르며 직권으로 수하 무사들에게 은상(恩賞)을 나누어 주었고, 고다이고 덴노는 즉각 귀환을 명령했지만, 다카우지는 이를 묵살하고 자신만의 정권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3.3. 거병, 도주, 그리고 재기
1335년 음력 11월,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덴노에게 닛타 요시사다를 간신이라 지목하며 토벌 명령을 내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명령을 여러차례 무시한 다카우지에 대한 불신이 깊었던 고다이고 덴노는 오히려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를 토벌하라는 칙령을 내렸다.이에 따라 요시사다는 고다이고 덴노의 명을 받들어 다카요시 친왕을 앞세운 군을 이끌고 도카이도를 따라 다카우지가 머물고 있는 가마쿠라로 진군하였다.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야하기 강 전투(현 아이치현 오카자키시)와 데고시가와라 전투(현 시즈오카시 스루가구)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고노 모로야스가 이끄는 다카우지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다급해진 다카우지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하며 고다이고 덴노에게 사면을 요청하였으나, 기세를 잡았다 판단한 덴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다카우지는 덴노 정권에 대항해 공식적으로 궐기를 선언하였고, 같은 해 12월, 요시사다군을 하코네 및 다케노시타 전투에서 연파했다. 결국 1336년 1월, 다카우지는 마침내 교토에 입성하였고, 고다이고 덴노는 히에이산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교토 입성의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다. 겐무 3년(1336년) 음력 1월, 무츠국(오슈)에 파견되어 있던 공가 출신 무장 키타바타케 아키이에가, 가마쿠라 토벌전에서 이름을 떨친 명장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교토로 진군해오자, 다카우지는 이들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결국 교토를 버리고 규슈로 도피하게 된다. 키타바타케 아키이에는 특히 다카우지에게 암살당한 모리요시 친왕의 처남이기도 했기에,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 충돌을 넘어 복수와 정통성 회복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다카우지는 규슈에 도착한 뒤, 아카마쓰 엔신을 비롯한 지역 무사들의 지원을 받아 군세를 재정비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지묘인통(持明院統)의 황족인 고곤 상황으로부터 교지를 받아 정치적 명분까지 확보하였다.
당시 일본 황실은 지묘인통과 다이카쿠지통(大覚寺統)이라는 두 계통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가마쿠라 시대 이후로는 막부의 중재에 따라 두 황통이 10년 주기로 교대로 천황에 즉위하는 관행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다이고 덴노는 다이카쿠지통 출신이었고, 반면 다카우지가 명분을 얻기 위해 의지한 고곤 상황은 지묘인통에 속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고곤 상황으로부터 교지를 받은 것은, 훗날 다카우지가 북조(北朝)를 수립하는 데 있어 정통성의 근거로 작용하게 되었다.
서국 지역 무사들의 지원을 받아 군세를 재정비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역공을 펼치며 덴노 측 무사 세력을 격파해 나갔다. 음력 1336년 4월, 그는 닛타 요시사다와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이끄는 연합군을 상대로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요시사다는 간신히 목숨을 구해 탈출했으나, 마사시게는 패배를 인정하고 일족과 함께 자결하였다.
같은 해 음력 6월, 다카우지는 교토에 재입성하였고, 고다이고 덴노는 또다시 히에이산으로 거처를 옮기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세를 뒤집은 다카우지는 히에이산에 머물던 고다이고 덴노에게 화의를 제안했고, 덴노 역시 이에 응해 삼종신기를 고곤 상황의 아들인 고묘 덴노에게 양도하였다. 이렇게 승자가 된 다카우지는 새로운 무가 정권 수립을 공식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고다이고 덴노는 양도한 삼종신기가 가짜라고 주장하며 교토를 탈출해, 현재의 나라현에 있는 요시노에 정착하고 자신이야말로 황실의 정통성이 있다고 선언하고, 별도의 조정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남조’(요시노 조정)와 ‘북조’(교토 조정)가 병존하는 남북조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3.4. 팡파레는 울렸으나
1338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묘 덴노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며 정식으로 막부를 열었다. 이 막부는 훗날,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에 교토의 무로마치(室町) 지역에 쇼군의 거처가 설치되면서, 일반적으로 무로마치 막부로 불리게 된다. 이듬해인 1339년, 다카우지와의 항쟁을 끝까지 이어갔던 고다이고 덴노가 서거하자, 다카우지는 그의 명복을 기원하며 덴류지(天龍寺)를 창건하였다.막부 수립을 전후하여, 닛타 요시사다와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등 주요 정적들이 차례로 사망하면서 정권은 일견 안정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남북조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으며, 전국의 혼란은 좀처럼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출범한 막부 내부에서도 불안정한 요소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카우지는 정권 수립 후 정무 전반을 친동생인 아시카가 다다요시에게 위임하고, 본인은 무사층의 구심점 역할에 집중하는 이원적 통치 구조를 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의 분산은 곧 막부 내 분열과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다다요시는 절차와 법도를 중시하는 온건하고 신중한 정치 노선을 지향한 반면, 고노 모로나오(高師直)는 다카우지와 일선 무사들의 개인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인사와 행정에 광범위하게 개입하며 정치적 실권을 빠르게 장악해 나갔는데 월권에 가까울 정도로 폭주하면서 다다요시와 마찰이 점점 더 커진 것.
결국, 다다요시파와 모로나오파 사이의 대립은 1350년을 전후해 무력 충돌로 비화되었고, 간노의 요란(観応の擾乱)으로 확대되면서 무로마치 막부 초기에 벌어진 최대의 권력 투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다카우지는 처음에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자신을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고노 모로나오의 존재를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모로나오는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執事) 역할을 대대로 맡아온 고(高) 가문의 출신으로, 정무와 군사 양면에서 뛰어난 실무 능력을 발휘해 무로마치 막부의 제도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태평기》 등의 영향으로는 횡포한 권신, 혹은 신불이나 천황의 권위조차 무시하는 악인으로 묘사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개혁적 정치가이자 능력 있는 행정가로 재평가되고 있다.
1349년, 모로나오 일파의 공격을 받은 다다요시는 형인 다카우지의 저택으로 피신하자 모로나오 측은 저택을 포위하며 다다요시의 은퇴를 요구했고, 다다요시는 결국 출가 형식으로 정계를 떠났다. 이 사건을 두고 다카우지와 모로나오가 다다요시를 축출하기 위해 사전에 공모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다카우지는 이후 가마쿠라에 있던 적남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다다요시의 자리에 앉히고, 차남 모토우지를 간토 지방 통치 책임자로 파견했다. 하지만 1350년, 다카우지의 서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규슈에서 다다요시 세력의 부활을 꾀하면서, 다카우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서쪽으로 출병하게 된다.
그런데 그 와중에 다다요시가 교토를 벗어나 남조 조정에 합류하는 중대한 이탈 사건이 발생했다. 본래 다카우지와 다다요시는 나이 차가 거의 없는 연년생 형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다카우지가 절에 바친 공양문에는 “내가 받을 행운을 모두 다다요시에게 돌려달라”는 문구가 남아 있어, 형제 간의 신뢰가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남조에 합류한 이후에도 다다요시는 북조와 막부의 정통성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발급한 공식 문서에는 여전히 북조의 연호인 ‘간노’(觀應)를 사용하였다. 또한 그는 남조가 교토로 돌아가 북조와 통합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형 다카우지가 수립한 북조 정권의 정통성 역시 긍정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로나오와 다다요시 간의 권력 갈등으로 시작된 이 충돌은 이제 단순한 당파 싸움을 넘어,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사이의 형제 간 내전으로 번지게 되었다.
한편 다다요시의 합류로 여러 무장들이 남조 편으로 돌아섰고, 다카우지와 요시아키라 모두 다다요시군에게 패배를 겪게 된다. 결국 1351년, 다카우지는 모로나오 형제를 출가시키는 조건으로 다다요시와 화해에 나섰다. 모로나오 형제는 불가에 들어가는 도중 우에스기 요시노리에게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화의의 결과로 다다요시는 조카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보좌하는 형식으로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실제로는 다카우지의 화해 제안이 일시적인 위기 타개용에 불과했음이 곧 드러났다. 다카우지는 다다요시를 견제하기 위해 오히려 남조 조정과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고, 이후 다다요시의 군을 격파한 뒤 그를 체포하여 유폐시켰다.
다다요시는 이듬해인 1352년, 유폐 중 급사하였으며, 이와 관련해 다카우지에 의한 독살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정권 내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결국 형제를 제거하는 이 사건은, 고려의 무신정권기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 간의 갈등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다만, 최충헌은 분열의 싹이 보이자 즉각 제거에 나섰던 반면, 다카우지는 오랜 갈등과 혼란 끝에야 결단을 내렸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한편, 일부 기록에서는 다카우지의 심리 상태에 대한 해석도 존재한다.후세의 정신의학적 시각에서 볼 때, 그의 감정 기복과 언행은 조울증적 경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이는 때때로 극단적 비관과 결단 사이를 오가는 언행으로 표출되었다. 예컨대, 고다이고 덴노에게 역적으로 몰렸을 당시에는 “출가하겠다”는 말을 반복했고, 전쟁에서 조금만 불리한 전황이 나타나면 “할복하겠다”는 발언을 자주 내뱉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는 《원위집(源威集)》의 기록에 따르면, 1355년 분나(文和) 4년의 도지(東寺)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다카우지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로 “전투에서 지면 그걸로 끝이니, 적이 가까워지면 자해할 시점만 알려달라”고 말했으며, 이에 대해 당시 저자는 “오니(鬼)가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라며 그의 담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으나, 오늘날 일부에서는 담력이라기보다 내면의 불안정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공신들뿐만 아니라 아끼던 동생까지 직접 제거하면서 막부 내부의 안정과 권력 집중을 도모했으나, 정국은 끝내 안정을 찾지 못했다. 생애 말기까지 남조와의 일진일퇴 공방을 계속 이어갔음에도 내전의 불씨는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특히 서자이자 다다요시의 양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의 토벌을 시도했으나, 이 과정에서 오히려 규슈 지역에서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태평기》에 따르면 다다후유는 에치젠노 쓰보네라는 여인의 소생으로, 다카우지의 정실이나 정통 후계자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했던 인물이었다. 친부에게서도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하던 신세였던 다다후유를, 안타까운 처지를 여긴 숙부 다다요시가 양자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 무렵 막부 내분과 다다후유의 규슈 봉기는 왜구 문제와도 연결된다. 한국 학계 일부에서는, 간노의 요란으로 인해 규슈 일대 무사들 사이에서 지휘 체계에 혼선이 발생하였고, 막부를 따를 것인지 다다후유를 지지할 것인지에 대한 분열 속에 일부 무장들이 규율을 이탈하여 중국 강남과 고려 해안으로 약탈을 개시한 것이 전기 왜구의 시작이었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결국 다카우지는 다다후유에 대한 토벌을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채, 1358년 4월, 교토의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54세였다. 다카우지가 직접 해결하지 못한 남북조의 내전은, 손자이자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집권기인 1392년에 이르러서야 종식되었다. 이는 우연히도 한국에서 조선이 개국된 해와 시기를 같이한다.
4. 평가
일반적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막부 창건자들은 대체로 냉정하고 비정한 정치가형 인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요리토모는 친동생이자 겐페이 합전의 영웅인 요시쓰네를 토벌한 일로,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압박하고 끝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멸문시킨 일로 인한 영향이 큰데 그럼에도 이들은 당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회복한 유능한 정치가였다는 점에서, 마냥 부정적으로만 평가되지는 않는다. 특히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시대의 통치 안정성과 그의 인내와 실용주의적 정치술은 현대에 매우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이러한 인물들 가운데서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가장 낮은 대중적 평가를 받고 있는 막부 창건자다. 특히 에도 시대 이후 유학의 유입,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후 덴노 중심주의 사관이 확립되면서, 다카우지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덴노에 대한 도전과 배반의 이미지 때문인 것이 가장 큰데 유교적 근왕(尊王) 사상 아래에서는 그의 존재 자체가 위계질서를 무너뜨린 역적으로 간주되었고, 메이지 이후의 제국주의 체제에서는 덴노를 서양식 절대군주에 준하는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신격화했기 때문에, 그에 맞선 다카우지는 전근대 일본사에서 가장 위험한 역사적 반역자로 낙인찍힐 수 밖에 없었기 때문.
이런 부정적 인식은 구체적인 행동으로도 이어졌는데, 에도 시대인 1863년에는 교토에서 다카우지, 요시아키라, 요시미쓰 세 쇼군의 목상이 참수당하고 효수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남북조시대를 직접 겪은 다카우지와 요시아키라는 물론이고 요시미쓰도 명나라로부터 일본국왕(日本國王) 칭호를 부여받고, 덴노 앞에서 사실상 외교적으론 군주로 군림한 전력이 있어, 같은 ‘역적’ 범주로 취급된 것. 창립 3대가 역적으로 취급받았으니, 당연히 그 창건자인 다카우지의 취급이 좋았을리가 없다. 보신전쟁 당시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끝까지 저항하지 않고 에도성을 무혈 개성한 결정 역시, 다카우지 같은 역적으로 비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는 다카우지가 후대 일본 정치문화 속에서 얼마나 뿌리 깊은 부정적 상징으로 기능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메이지 유신 후 남북조정윤론에 따른 남조 정통론이 대세가 된 이후인 1934년에도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당시 상공대신[6]이었던 나카지마 구마키치가 어느 잡지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인간적으로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라고 기고했다가 귀족원의 화족들에게 역적 소리까지 들으며, 상공대신을 사직하기도 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한 평가는 일정 부분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전후 민주주의 체제에서 덴노 중심주의 사관이 약화되면서, 다카우지를 단순한 역적으로 규정하는 시각은 점차 힘을 잃었다. 특히 20세기 중반, 역사학계에서는 “어떻게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역적으로 규정되었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제기되었으며, 이후 관련 연구들이 이루어지며 다카우지의 정치적 선택과 정권 운영 방식에 대한 보다 중립적이고 구조적인 평가가 시도되었다.
또한 대중문화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는데,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역사소설 《태평기》를 통해 다카우지의 이미지가 일정 부분 개선되었고, 보다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인물로 재구성되었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1991년에는 동명의 제목으로 보다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인물로 재해석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주인공이 된 NHK 대하드라마까지 나오기도 했으니 상전벽해가 된 셈.
그러나 그 일대기를 살펴보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다른 막부 창건자들에 비해, 다카우지는 정치적 기량이나 부하 관리 능력 면에서 한계를 드러낸 인물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그는 군사적 재능도 일정 수준 갖추고 있었고, 덴노군의 반격을 받아 규슈로 퇴각하던 중에도 지방 무사들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외교력과 수완을 발휘했다. 또한 자신이 불리한 처지에 놓였을 때에도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는 아낌없는 포상을 내렸으며, 필요할 경우에는 은밀한 정치 공작도 주저하지 않는 등, 리더로서의 기민함과 자질은 평균 이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질이 전국적 혼란을 수습하고 완전한 체제를 구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생전에는 남북조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그 뒤를 이은 손자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까지도 남북조 통일이 지연되며 내전이 장기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처럼 정치적 완결성이 결여된 역사적 결말, 그리고 이에야스나 요리토모처럼 권력 구조를 정비하고 장기 체제를 마련한 인물들과의 대비는, 다카우지가 막부 창건자 가운데서도 여전히 상대적으로 낮은 인기를 얻는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다만 요리토모나 이에야스보다 개성적인 점을 들면 풍류인 및 예술가로서의 기질이 이 둘보다 뛰어났다. 무사임에도 시짓기나 그림 그리기 등의 예술활동을 좋아했다고 하며,《쓰구바슈》(菟玖波集)라는 남북조시대의 렌가(連歌)집에 60여수의 렌가를 남겼고,《신센자이와카슈》(新千載和歌集)라는 와카집을 만들도록 명령했다. 또한 그림 분야에서는 지장보살을 직접 그리는 등 그가 그린 그림도 전해지고 있다.
5. 대중 문화
주인공으로 등장한 대표적인 작품은 1991년 NHK 대하드라마였던 <태평기>[7]였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소설《사본태평기》가 원작으로, 주연은 사나다 히로유키였다. 이 작품은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까지도 남북조시대 말기~무로마치 막부 초기를 다룬 유일한 작품이다. 보통 남북조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다카우지는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만, 다카우지보다는 구스노키 마사시게나 닛타 요시사다의 인기가 많은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악역으로 그려진다.코에이의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에서 등장한다. 마사시게 및 요시사다와 함께 등장하는데 라이벌들에 비해 능력치도 균형이 잡혀 있다. 정치 82, 전투 76, 지모 85에 특기도 농업, 외교, 등용, 기동, 공성 특기를 가지고 있다. 전투치는 요시사다를 능가할 정도지만 등장시기가 늦어서 보기가 어려운 편이다. 2시나리오가 1271년 시작인데 다카우지는 1320년에야 등장한다. 예술가로서 제법 소질이 있었던 인물 치고는 문화 특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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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열풍전> 플레이스테이션판에서는 '제왕(諸王)의 싸움'이라는 일종의 영웅 집결 시나리오[8] 플레이 가능한 다이묘로 등장하는데, 얼굴은 <징기스칸 4>의 얼굴이다. 여기서 오프닝 이벤트가 제법 개그인데, 손자인 요시미쓰와 함께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거성으로 쳐들어가서 "내가 세운 아시카가 막부가 요 모양 요 꼴로 돌아가는 걸 못 보겠다! 내가 대신 막부를 다스린다!"며 요시아키의 거성을 탈취해 버린다. 요시아키는 조상님 얼굴을 보더니 그냥 넘겨준다.[9] 맨 위의 개성 넘치는 초상화를 모티브로 한 <징기스칸 4>의 얼굴과는 달리 <람세기>에서는 아래쪽의 초상화를 모티브로 한 듯한 비교적 평범한 얼굴로 등장한다.
이후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인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도 일종의 고대 무장 개념의 추가 장수로 등장한다. <징기스칸>이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의 얼굴은 모두 저 맨 위 초상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차나왕 요시츠네》의 작가였던 사와다 요시후미의 작품인《산적왕》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어쩐지 채치수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리고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할 중요한 5명의 인물이 각각 몸에 별 모양의 점을 가지고 있는데, 막부 타도 후에는 이 별이 몸에서 사라진다. 그런데 다카우지의 별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이를 본 다카우지는 "내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인가?"라며 홀로 생각한다. 호조씨 정권 타도의 시점에서 작품이 끝나 다카우지의 이후 행보는 나오지 않는다.
《마인탐정 네우로》와《암살교실》의 작가였던 마츠이 유세이의 신작인《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에서는 어마어마한 포스의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주인공이 다카우지에게 멸망당한 가마쿠라 막부의 마지막 후예였던 호조 도키유키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다카우지의 다면적이고 기이한 매력이 잘 드러난다. 원작의 작가 코멘트에는 "역사를 좋아하는 분들 사이에서는, 앞으로의 행동까지 포함하여 '창작물 속 다카우지 중에서 제일 역사대로의 모습'이라는 의견도 있는 모양입니다."라고 되어 있으며, "그건 그것대로 실제 역사가 이상한데"라는 말이 이어져 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 문서 참고.
6. 여담
흔히 곱슬머리에 장발 헤어 스타일인 오른쪽 초상화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것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현재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것이 다카우지의 최측근 심복이었던 고노 모로나오(高師直, ?~1351)의 초상화거나 아니면 확인할 수 없는 무사의 초상화로 간주하고 있다. 다카우지의 초상으로 공인받은 상단의 초상화는 히로시마현 오노미치 시에 있는 절인 죠도지(浄土寺)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다.
교토의 진고지(神護寺)라는 사찰에 소장되어 있는 일명 '진고지 3상(象)' 가운데 타이라노 시게모리의 것으로 전해지는 이 초상화 역시 사실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고, 이 설은 현재 일본 학계에서 차츰 힘을 얻고 있다. 그러고 보면 죠도지 소장 초상화와 미묘하게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메이지 유신 이후 패전까지 지속되며 강화된 '황국사관'에서 역적의 대명사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아시카가씨의 후손들은 유신 이후에 상당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10]
[1] 본래 휘가 여러 글씨면, 모든 글씨를 다 안 쓰는 피휘지만 휘에서 한 글씨를 이름으로 쓰는 꼼수로, 일본에서 뜻이 바뀌었다.[2] 종형제인 닛타 요시카네와 이름이 같다.[3] 오늘날의 도치기현으로 영화 <초속 5센티미터>의 첫 에피소드에서 이와부네역의 대합실에 아시카가 테마 여행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4] 오늘날의 군마현이다.[5] 특히 모리요시 친왕이 구마노국과 기이국 등을 누비며 배후에서 큰일을 했다.[6] 현 경제산업대신[7] 메가드라이브, PC엔진으로만의 호화 게임으로도 등장했다.[8] 단순한 군웅 집결과는 스케일이 다르다. 센고쿠시대 다이묘들뿐만 아니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삼국지연의》의 군주들과 칭기즈 칸, 남송의 마지막 황제, 후한의 광무제에다가 심지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까지 일본 통일을 노린다는 설정의 막 나가는 시나리오다. 거기다가 이 시나리오에서는 잔 다르크까지 나온다. 그냥 코에이 영웅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참고로 이 시나리오는 플레이스테이션, PSP 파워업키트, NDS판에서만 플레이가 가능하다.[9] 이 시나리오는 <노부나가의 야망 람세기>의 PS판에서도 나오는데 손자 요시미쓰와 잇큐를 만나는 것과 다짜고짜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거성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똑같지만 조상님들 얼굴을 보더니 데꿀멍했던 전작과는 달리 여기서는 요시아키가 미친놈들 취급을 하면서 부하들을 시켜 조상들을 두들겨 패서 쫓아버린다.보통은 이게 정상적인 반응 아닌가 결국 아시카가 다카우지 세력은 다른 거성에서 시나리오를 진행하게 된다.[10] 다카우지의 차남인 모토우지에게서 뻗어 나온 간토 아시카가씨(키츠레카와로 성을 바꾸었다가 유신 이후 아시카가씨로 복귀했다.)는 다이묘 가문이어서 자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당시의 당주는 가쿠슈인 같은 상류층의 학교에서도 역사 수업 시간만 되면 괴롭힘을 받았다는 웃지 못할 증언을 남겼다.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히데의 출신 지류인 히라시마 가문은 아시카가 쇼군가의 직계 단절 이후 혈통상으로는 가장 적통에 가까웠지만 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화족은 커녕 아예 사족 취급조차 받지 못하고, 평민으로 취급당하는 굴욕을 맛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