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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4:34:52

안영명/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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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마추어 선수 경력3. 한화 이글스 1기
3.1. 2003~2006 시즌3.2. 2007~2008 시즌3.3. 2009 시즌3.4. 2010 시즌
4. 짧았던 KIA 타이거즈 시절5. 한화 이글스 2기
5.1. 2011 시즌5.2. 2014 시즌5.3. 2015 시즌5.4. 2016 시즌5.5. 2017 시즌
5.5.1. FA
5.6. 2018 시즌5.7. 2019 시즌5.8. 2020 시즌
6. kt wiz 시절
6.1. 2021 시즌6.2. 2022 시즌
7. 은퇴

1. 개요

안영명의 선수 경력에 대해 다루는 문서다.

2. 아마추어 선수 경력

2001년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았으나 2002년에 이르러 두각을 나타내 한 학년 아래인 김창훈북일고 마운드를 책임졌고, 양승학, 나주환과 함께 북일고의 전성기를 이끌어나갔다.[1] 충청도 출신으로 북일고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연고팀 한화의 지명이 당연시되었던 한화의 성골이다.[2]

3. 한화 이글스 1기

3.1. 2003~2006 시즌

2003년 1차 지명으로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다.

프로 데뷔 첫 승은 2003년 6월 4일 대전 SK전에서 거두었다. 당시 영상 보기 데뷔 시즌에는 강속구를 지닌 투수로 이름나며 그런대로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이후 어깨 부상 등으로 1군에 진입하지 못하다가 2005시즌 말미부터 1군에 재진입했다. 2006 시즌에는 부상으로 빠진 최영필의 공백을 메우며 전천후로 뛰었고, 이 때 평균 자책점 3점대를 찍으면 처음으로 그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일 중 하나가, 2006년 7월 2일 대전 현대전에서 현대 타자 김동수에게 참교육을 당한 일이다. 그렇긴 한데, 정작 송진우2호기에게 드롭킥을 날린 일이 더 이슈가 되었다.[3]

1년 뒤인 2007년에는 두산 베어스와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르던 도중 이종욱에게 빈볼을 던진 뒤 전설의 커먼요를 했다.

3.2. 2007~2008 시즌

2007년에는 구대성 앞에서 던지는 셋업맨 보직을 받아 140 중후반대의 묵직한 직구를 선보이며 활약했다.

2007시즌 내내 61경기에 등판해서 94이닝, 특히 6월에는 26⅓이닝을 던졌는데, 이는 한화 투수 전체 이닝수에서 3위였다. 중간계투류현진세드릭을 제외한 팀내 선발투수보다 많이 던진 것. 이는 김인식 감독 특유의 한 놈만 패는 불펜 기용의 병폐 탓으로, 6월 이후 구위가 하락하면서 시즌을 ERA 3.06 1승 1패 5세이브 15홀드로 마감지었다. 이 때 고군분투하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당시를 애도하는 뜻으로 '멍멍이'(개처럼 굴렸다는 뜻)라고 부른다.

이듬해인 2008년에도 중간계투로 활약했으나, 혹사의 여파로 직구 스터프를 잃어버리면서 2008년에 ERA 5.31로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여담으로 9월 3일 한화와 두산 베어스가 잠실구장에서 벌인 연장 18회 1박 2일 끝장승부 당시의 패전투수였다. 4⅓이닝을 무실점으로 잘 막아 놓고 18회말 투아웃 이후에 네 타자에게 연속 볼넷을 허용했고, 이 밀어내기 한 점이 이 날 양팀 통틀어 유일한 점수였다.

3.3. 2009 시즌

처음으로 선발로 전업해 풀타임 선발을 소화하며 11승을 기록, 2000년대 한화 1차 지명 투수 중 조규수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시즌 두 자리 승수를 거둔다.[4]

다만 떨어진 스터프는 어찌할 수 없는지 피홈런 개수는 무려 34개로 김상현과 홈런 경쟁을 하고 있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 단일시즌 34피홈런은 역대 최고로, 이전 기록은 1999년 해태 곽현희의 31개.[5] 나중에는 어차피 나쁜 기록도 기록이다라는 생각으로 그냥 가운데에 치라고 던졌다고 한다. 정말 깡하는 대단한 투수.

그래도 어쨌든 유원상김혁민이 제 역할을 못하던 한화의 2선발로 성장했다. 문제는 국방부 퀘스트.

3.4. 2010 시즌

첫 경기는 등판해서 무난하게 던지고 승리 투수가 되었다.

두 번째 등판에서는 롯데 장원준과의 매치에서 1회부터 두들겨 맞고 2회에 강습타구까지 맞으면서 강판. 그리고 이날의 경기는...

경기 이후 자신감을 잃은 건지 페이스가 급격히 다운된 건지 다음 등판인 SK전에서도 털린 다음에 결국 2군으로 강판되어 팬들에게 좌절을 줬다.

안영명의 부진은 2010년 한화 마운드의 상태를 잘 보여주었다. 유원상이 정신차리나 싶더니 안영명이 부진하다. 이게 다 2007, 2008년 혹사로 인한 구위하락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란 걸 생각하면 전임 김인식 감독의 책임이 너무나 크다.

이후로는 중간계투로 돌아와서 필승계투 역할을 하였다.

4. 짧았던 KIA 타이거즈 시절

그리고 6월 8일, 김경언박성호의 트레이드 때 김다원과 함께 쩌리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이때 김경언의 쩌리로 한화로 간 장성호와 배번을 서로 맞바꾸었다.

이적 후 첫 경기인 광주 두산전에서 유재웅만 상대하여 삼진을 잡고 내려온 후 9회말 이용규의 끝내기 안타 덕분에 승리투수(!)가 되었다.

6월 16일 장성호와 이적매치를 벌였다. KIA팬들은 홈런 맞으라고 하고 한화팬들은 삼진 잡으라고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 결과는 삼진. 이 때 안영명은 김태완, 최진행, 장성호 3타자 연속 삼진을 잡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당연히 한화팬들은 분노했고 KIA팬들의 반응도 별로... 별로 안좋아요.

이강철 코치가 투구폼을 수정한 이후 삼진덕후로 변화한 모습을 보였다. 팀 동료인 손영민, 곽정철의 과부하로 인한 구위 저하 여파를 어느 정도 메웠다. 특히 볼질을 잘 하지 않고 스트라이크 존으로 공을 잘 꽂아 넣는 모습 때문에 KIA에서도 팬이 꽤나 많이 늘었다. 하지만 잘 던지고 있었음에도 하필이면 팀이 연패에 빠져서 빛을 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자 맞아나가기 시작해 7월 15일 잠실 LG전에서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잉금님에게 쓰리런을 맞으며 뼈아픈 역전패를 당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용규가 홈스틸까지 해줬던 경기다. 7월 22일 무등 삼성전에서는 5자책으로 무너졌다. 3년 전만해도 임태훈과 동급이었던 투수였는데 혹사 후유증이 실로 무섭다. 그저 킬인식을 원망할 수 밖에.

방화범이 돼버린 유동훈을 대신해 KIA의 마무리를 맡았지만 성적은 도찐개찐. 8월 4일에는 1사 만루에서 올라와 5점을 내주며 패전투수가 되었다.[6] 8월 6일 130개 던지며 호투한 로페즈 승리를 날려버렸다. 8월 8일 5:1로 지고있는 걸 9회말 타자들이 극적으로 동점으로 만들어 놓으니 11회에 역전시켜 버리며 패전투수가 된다. 그것도 하필 장성호가 홈런친 날에. 분명 포지션은 마무리인데 제대로 마무리한 경기가 없다. 마무리 전업 후 8월 6일까지 방어율이 27.00이다. 결코 2.70이 아니다. 그리고 2세이브할 동안 블론은 3개로 KBO 리그 전체 6위.

결정적으로 8월 21일 삼성전에서 타자들이 힘들게 4:4 동점 만들어 놓으니 바로 홈런을 얻어맞으며 팀의 4강에 호흡기를 떼고 만다.

8월 27일 SK와의 경기에서는 ⅓이닝 던져놓고 승리를 챙겼다.

9월 5일 두산과의 경기에서 끝내기 투런을 맞으며 로페즈의 승리를 날렸다. 9월 17일 역시 또 블론으로 패전.

참고로 이 시기에 상완신경총이라는 부상이 생겼기때문에 기복이 생겼다.

5. 한화 이글스 2기

5.1. 2011 시즌

2011년 2월 12일 FA 이범호의 보상선수로 다시 친정팀 한화로 건너갔다. 팬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돌아와서 좋긴 한데... 유망주나 3루수를 데려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무엇보다 제일 큰 문제는... 바로 군대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었다.

한화의 승리인지, KIA의 승리인지는 두고봐야 될 부분이긴 하나 한화가 선플로 내야수를 뽑을 것이라 밑밥을 투척했으니, KIA가 보호선수 선정에 있어 내야에 중점을 뒀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다. 김주형이나 박기남을 언급하는 한화팬이 있었는데, 김주형은 군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말 그대로 어찌될지 모르는 로또형 유망주였고, 박기남은 30대에 접어들었던 데다가 만년 백업 경험만 있었기에 주전감을 원하는 한화의 구미에 안 맞는 부분이기는 했다.[7]

투수에 있어서 김희걸 또한 많이 언급되었는데, 안영명과는 다르게 군필이란 메리트가 있긴 하나, 그걸 제외하면 딱히 비교우위라고 보기도 어렵고,[8] 그 놈이 그 놈이라면 천안 북일고라는 성골 출신에 한화에 팬도 많고 형도 선수로 있는 안영명이 더 낫지 않았을까? 라는 판단도 선다. 어차피 나이가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군필 김희걸이나 미필 안영명이나 그게 그거.[9]

안영명이 2012년 시즌 군입대라고 하나, 어차피 한대화도 1년밖에 임기가 안 남았기에... 반대할 명분은 없었으리라 본다.

팬들은 선인 이강철을 만나고 온 KIA유학, KIA체험이래나 뭐래나. 이런 식의 짤방도 등장했다.[10] 조범현 KIA 감독도 부상경력에 군미필인 선수를 설마 뽑겠냐며, 보호선수 명단에 제외했다고 하는데 예상을 깨고 한화가 데려갔으니...

하지만 현실적으로 리빌딩하겠다는 팀이 뽑은 게 28살에 내년이면 공익가는 선수를, 그것도 현재 부상으로 스프링캠프 참가조차 못하고 있는 선수를 뽑았으니 한화 프런트가 정말 리빌딩 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었다.

선수 본인은 새출발의 각오로 한화시절 유니폼, 글러브 등 장비들을 지인들에게 줬는지 야구관련 중고장터에 한화시절 쓴 글러브 등 매물들이 꽤 올라왔는데 선수 본인도 다시 올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11]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복귀는 한화에게 옳은 결정이었음이 그가 전역한 이후에 증명되었다.

5월 22일 KIA전에 등판하였다. 그동안 미친듯이 구른 부상으로 인해 생긴 문제점들을 고치려는 듯 기존에 스트라이드 폭을 넓게 잡는 투구 폼에서 스트라이드 폭을 극단적으로 적게 잡는 폼으로 변경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투구 폼을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새털직구는 여전했다.

몸 상태도 성치 않았던 모양인지 이 경기만을 등판한 뒤 다시 2군으로 퇴갤했으며 이후 2군에서도 소식이 없다.

결국 시즌이 끝난 후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가 공익근무요원으로 2년간 군복무를 수행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윤규진과 같은 곳에서 공익근무를 했다고 한다.

5.2. 2014 시즌

소집해제 후 복귀해 스프링캠프에 참가했다. 팀 내에선 확실한 선발 한 자리를 맡아주길 바랐다.

2월 24일, KIA와의 연습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 2회에 만루를 채우고 폭투로 1점을 내준 후, 김주형에게 만루홈런을 맞으며 4실점. 2이닝 5실점으로 무너졌다.

4월 18일, LG와의 홈 경기에 1군으로 콜업. 패색이 짙은 9회에 실전 감각차 전역 후 첫 등판하였다. 1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예전과는 달리 볼질이 조금 나오긴 했지만 잘 마무리.

4월 23일, 투구 도중 김재호의 타구에 가슴을 맞아 교체되었다. 정밀 진단 결과 명치뼈가 미세하지만 골절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심장쪽 뼈라 심장에 무리가 갈수있어 곧바로 입원했다. 엔트리에서는 당연히 말소되었고 대신 임기영이 올라왔다.

5월 13일, 팔꿈치 통증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된 유창식을 대신해서 복귀 후 처음으로 삼성전에 선발로 등판했으나, 4⅓이닝 4실점을 기록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5월 18일 SK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해 5이닝 2실점으로 제 몫을 해 줬다. 그리고 팀이 승리했지만 동점 상황에서 내려가 승리를 수확하지 못했다.

5월 24일 두산전에서 1회 3실점, 2회 4실점했으나 3~5회는 모두 삼자범퇴로 어찌어찌 막아내면서 팀의 7회 대역전극의 단초를 제공했다. 5이닝 7실점(6자책점) ND. 승리는 임기영이 가져갔다.

6월 6일 대전 삼성전에서 1회초 최형우의 타구에 팔을 맞아 조기 강판당한 선발 유창식을 구원하여 2번째 투수로 등판, 6이닝 동안 5피안타 4볼넷 2K 3실점(1자책)을 기록했고, 팀이 역전승하여 소집 해제 후 첫 승을 거두었다. 김태균이 연타석 홈런을 쳐서 MVP는 되지 못했지만, 갑작스러운 등판에도 불구하고 호투를 펼쳐 김응용 감독의 칭찬을 받았다.

6월 10일 경기에서 9회말 마무리 투수로 홀연히 등판하여 아웃카운트 2개를 잡으며 길었던 경기를 끝냈다. 이틀 후 선발등판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펜피칭 중이었는데 경기가 투수전으로 흘러가다 보니 등판하게 된 것. 상대팀 KIA의 이틀 후 선발예정이었던 김진우도 9회초에 등판했듯이 예상치 못하게 불펜소모가 많은 경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변칙운영이다. 그러나 정작 이틀 후 경기에서는 5회에 무너지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7월쯤부터는 중간계투로 전향하여 붕괴한 한화 불펜진을 메꿔 주었다. 선발로 등판할 때보다 구위도 좋아 보인다는 평. 그러나 문제는 어김없이 감독에 의해서 혹사당하고 있다는 것. 올라왔다 하면 2이닝은 기본적으로 던지는데 연투를 밥먹듯이 하니... 다행히 올스타 브레이크가 끼어 있어 휴식을 취했다지만 혹사의 여파는 피할 수가 없었고, 이는 24일 NC전에서 1이닝만에 4실점을 내주며 곧바로 드러났다. 그러나 윤규진, 박정진과 함께 필승조를 담당하며 한화에서 믿을 수 있는 불펜이 되고 있다.

8월에도 변함없이 필승조로 노예처럼 등판했다. 윤규진이 어깨 담 증세로 잠시 이탈했고 박정진이 8월 하순부터 혹사의 여파로 부진한 와중에도 6연속 등판을 포함해 13경기에서 18⅓이닝을 소화하며 ERA 3.44로 잘 버텨 주었다. 안영명의 호투에 힘입어 팀은 8월 한 달간 12승을 거두며 안영명의 투혼을 더욱 값지게 하였다.

노예로 구른 여파로 다음 시즌에 그의 얼굴을 1군에서 볼 수 있을가 걱정하는 팬들이 많은데, 9월 1일 현재까지는 괜찮다. 현재까지는. 그 이유는 우천취소, 휴식일, 올스타 브레이크가 절묘하게 맞물리며 연투를 막아줬기 때문. 그렇지만 아시안 게임 브레이크를 앞두고 마지막 4일 경기 중 3경기에서 등판해서 5⅔이닝 113구를 던졌다. 선발투수도 이 정도 던지면 휴식일을 확실히 지켜줘야 한다는 걸 감안하면 불펜투수로서는 혹사의 극단을 보여준 셈. 더 큰 문제는, 불펜에 사람이 없어 이렇게 던진 게 아니라는 것. 불펜에서 박정진이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식적인 경우라면 박정진에게 1~2이닝을 맡겼어야 했다. 남은 정규시즌 12경기 동안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

아시안 게임 이후로 한화의 12경기 중 5경기에 출장했는데, 최저이닝 투구가 1⅔이닝이었을 정도로 끝까지 혹사당했다. 특히 팀의 최종전에는 올라오자마자 선발 투수 앤드류 앨버스의 승계주자를 모두 불러들였음에도 마운드에 남아 3이닝 동안 53구를 던졌다.

결국 97⅔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점 4.52로 시즌을 마감했다. 기록이 일견 인상적이지 않을 수 있으나, 불펜 등판시 성적은 42경기 66⅔이닝 평균자책점 2.98로 리그 수위권의 성적이다. 평균자책점 기록을 경신한 한화 마운드에서 고군분투한 어려운 시즌을 마쳤다. 불펜으로 4달간 무려 66⅔이닝을 던졌고[12], 여기에 2군에서 선발로 등판한 경기까지 포함 시 무려 120이닝에 육박한다. 2013년 송창식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언급이 안 되는데 사실은 작년 송창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혹사였다. 다음 해에 풀타임 선발을 뛰면서 로테이션도 제대로 지켜지는 등[13] 김성근 체제에서 몇 안 되게 정상적으로 등판한 투수였는데도 16년 수술대에 오른 것은 이 해의 혹사가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즉 은근히 언급되지 않지만 김응용 감독의 한화 재임 시절 가장 혹사당한 투수였다.[14]

시즌 종료 후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등번호를 내주었다.[15] 마무리 캠프에서 일단 임시로 37번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16] 공교롭게도 37번은 그의 형인 안영진이 한화에서 활동했을 때 달았던 번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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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로 달았던 이 배번은 이후 45번으로 변경되었고, 37번은 FA로 입단한 배영수가 달게 되었다. 더불어 2015년에는 투수조 조장으로 임명되어, FA 영입 투수들과 힘을 합쳐 이글스의 마운드 퀄리티를 높여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5.3.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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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016 시즌

한마디로 말해 개점휴업.

원래 올 시즌 이후 FA가 되는 선수이나... 현재 1군 2경기등판 1패 20.25의 처참한 성적 및 부상으로 인해 퓨처스리그에 머무는중. 7월 2일 퓨처스리그에서 4이닝 무실점 했으나, 김성근 감독이 본인 공을 못던지면 올리지 않겠다 했으니 언제 올라올지는 정말 미지수다. 후반기엔 올라올 것 같으니 기대해보는게?

7월 19일, 지속적인 어깨 통증의 원인인 오른 어깨에 웃자란 뼈를 정리하는 수술(우측 어깨 관절 클리닉)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사실상 시즌 아웃을 알렸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작년에 똑같은 수술을 받고 올해 복귀한 절친 윤규진의 사례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마무리캠프 명단에 포함되어 미야자키로 출국했다.

5.5.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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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 FA

시즌 후 박정진, 정근우와 함께 FA 신청을 했다. 그러나 12월 중반이 다 되도록 별 소식이 없는 상태.[17] 박종훈 단장은 크게 서두르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금액 면에는 큰 이견이 없으나 계약 기간을 놓고 의견 차가 있는 듯 하다.

선수 개인의 권리인 FA 행사의 경우 안영명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만 혹사든 뭐든 결국 보여준 것이 없었고 게다가 내부 FA 예정자였던 이용규 선수가 보여준 것이 없다며 9억 연봉에서 5억을 삭감한 4억에 계약하고 FA 재수의 모습을 보인 것도 안영명에 대한 비난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야구 팬들은 안영명이 양심이 있다면 올해 안에 구단에서 제시한 금액을 받고 도장찍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니 주제에 감히 FA를 요청하냐라는 의견을 보이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박정진이 구단과 함께 이것저것 양보하면서 2년 재계약에 성사하고 2018년까지 협상을 이어갈 상황이 될 때까지 계약 년수에 이견차이를 보이면서 재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하자 더더욱 야구 커뮤니티 사이에서 정도껏 하고 재계약 도장이나 찍으라는 의견이 많다.

한화-안영명, 계약기간 합의점…옵션 조율 남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안영명도 4년을 계속해서 요구해오다가 결국 3년으로 줄여 협상 체결을 노려봤지만 구단에서는 여전히 2년 계약방침을 고수하고 있었고, 결국 구단의 단호함을 이기지 못하고 계약기간을 맞추고 옵션을 조정중이라는 기사가 떴다. 정근우보다 먼저 재계약이 완료 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안영명은 자신의 몸은 이제 건강하다는 점과 황폐화된 한화 투수진이다 보니 선발투수로 쓸 수 있다며 어필하면서 아직도 옵션과 관련하여 이견이 있다며 체결 소식이 늦어지다가 결국 정근우가 먼저 계약 체결 소식을 알리게 되었다. 결국 무슨 배짱으로 정근우보다 오래 버티냐며 2년 2억도 아깝다며 야구 팬들의 비난이 잇따르고 있다.

1월 28일, 한화와 2년 총액 12억에 계약을 체결했다.해당기사 4시즌동안 18승 21패를 기록했음에 불구하고 15시즌 10승버프를 받아서 12억 금액에 계약해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진정한 협상황제라며 칭송받고있다. 그 만큼 이대형 FA 논란때 보다 더 큰 충격을 먹었다고 할 수 밖에... 솔직히 따지면 1승만 더 하면 마당쇠 첫 50승이다.물론 냉정하게 보면 구단이 안영명을 12억이라고 인정해 준 게 아니라 오랜 세월 한화에서 마당쇠노릇을 한 것에 대한 보상금액을 준 것에 가깝다.

그런데 FA 계약에 대해 시원섭섭하다는 발언을 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시원섭섭하다는 말 뜻대로라면 2년 계약이나 12억에 대해 섭섭한 감정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4년을 요구했던 점을 볼때 계약 기간에 대해 섭섭한 걸로 추측되지만 김승회의 계약조건이 2년 3억, 권오준도 2년 6억에 잔류했는데 12억이나 받은 안영명의 배부른 소리라며 네티즌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팀 내 최고참 선발인 배영수도 5억도 감사하다고 인터뷰를 한 것이 발굴되면서 더욱 비교되고 있다.

이후 4년이 훨씬 지나 심수창 유튜브 채널에서 전말이 밝혀졌는데, FA 첫협상때 박종훈(1959) 단장이 고급식당으로 안영명을 협상하자고 불러놓고, 안영명이 오자마자 아무말도 안하고 뜬금없이 들고 있던 결재서류판을 밥상에 내리치더니 "야! 우리 계약하지 말자!" 라고 말하며 고함을 쳤다고 한다. 안영명은 당황했지만, 일단 화를 꾹 참고 정중히 인사 후 내려갔지만 상당히 속상해했다고 한다. 종교적인 신념때문에 술을 평생 거의 먹지도 않았던 안영명[18]이 그때 처음으로 못먹던 술을 마셨고 혼자 눈물도 흘렸다고 할 정도. 노골적으로 단장이 선수를 희롱한 것.

문제는 저 채널에서 같이 말한 사람인, 한화에서 선수 생활하던 심수창도 한화에서 떠나기전에 단장 박종훈에게 수모를 당한 것. 2군에 틀어박혔던 심수창이 선수생활을 연장하고 싶으니 트레이드를 좀 해달라고 박종훈에게 말하자, 박종훈이 "그럼 니가 혼자 알아서 다른팀이랑 트레이드 협상을 해와"라고 말해서 수모를 줬다고 한다. 화가 난 심수창이 진짜로 본인이 알던 다른 팀 감독들에게 연락해서 실제로 협상을 진행했고, 협상이 성사될뻔 했는데, 박종훈이 갑자기 또 방해해서 어그러졌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보니 심수창이 협상하고 다니는게 소문이 나자, 이를 알게된 박종훈이 귀찮게 구는거 싫다고 다른 팀 단장들에게 연락해서 심수창과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던 것이었다고 한다. 자기가 시켜놓고 자기가 방해를 했으니 거의 선수를 악질적으로 우롱한 것이었다.

5.6.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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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2019 시즌

파일:안0명.jpg

3월 26일 김재영이 난타당하자 등판해 2.1이닝동안 볼넷 2개만 내준 채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타선의 대폭발로 시즌 1승을 챙겼다. 투아웃 상황에서 내야 팝플라이가 뜨자 수비 결과를 보지 않고 덕아웃으로 직행하는 시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링크

3월 30일 볼넷이 난무하던 경기에서 선발투수 채드 벨을 구원해 두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2이닝 3K 무사사구 무실점 투구를 하였다.

4월 6일 사직 롯데전, 선발 김민우가 내려가자 등판했는데, 파울타구를 맞은 최재훈을 대신해 포수마스크를 쓴 새파란 신인 노시환과의 호흡이 잘 안맞았는지 1이닝을 채우지 못한채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이후 1이닝씩 던지면서 5월 4일 현재 1승 3홀드 17.1이닝을 던지면서 평자 1.04를 기록중이다.

이후 필승조로 나오면서 6월1일 현재 27.1이닝을 던지면서 평자 0.99에 2승 5홀드를 기록중이다.

7월 27일 대구 삼성전에서 8회말에 등판했는데 이원석에게 결승 역전 투런을 허용하고 강판당했다. 그 후 덕아웃에서 글러브를 던지고 발로 차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강한 멘탈로 유명한 안영명이 홈런을 맞고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이전에 없던 일로, 팀의 연패를 끊고자하는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9]

8월 1일 kt전 8회말을 KKK로 막고 홀드를 기록했고, 팀은 2달만의 위닝시리즈를 거뒀다.

시즌 최종 성적은 67경기 62이닝 4승 7패 13홀드.

5.8. 2020 시즌

어느덧 최고참급 선수가 되었다. 시즌 목표는 60경기-60이닝이라고.

5월 6일 SK전에서 로맥에게 2루타를 하나 허용하였지만 1이닝 무실점으로 막았다.

5월 17일 롯데전에서 통산 5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6월 2일 키움전에서 1이닝 동안 4안타 3실점 하였다.

6월 5일 NC전에서도 1.1이닝 동안 4실점하며 팀의 12연패 일조하였다

6월 8일 1군 엔트리에서 말소 되었다. 내려간 당시의 기록은 1승 1패 10.2 이닝 7.59 ERA. 다만 FIP가 3.90, BABIP가 0.439를 기록중에 있었던 것을 보면 이번시즌은 공의 구위나 제구에 비해 운이 안좋았다고 볼수있는 참작여지가 존재하기는 하다.

6월 25일 오랜만에 1군에 올라와 삼성을 상대로 8대2로 앞선 7회 등판해서 1이닝 무실점.

6월 27일 kt전에서도 2사 만루 상황에서 등판하자마자 오태곤을 3구삼진으로 처리하고 다음 이닝도 일사천리로 마무리해 1.1이닝 1볼넷 2삼진으로 호투했다. 평균자책점은 6.23, FIP는 훨씬 낮은 3.62

6월 28일 kt전 7회초에 올라와 황재균에게 쓰리런 홈런을 맞았다.

6월 30일 장민재와 자리를 맞바꾸며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28일 투구 도중 발목 부상을 당했다고.

7월 28일 1군으로 콜업되었다.

7월 29일 삼성과의 난타전이 펼쳐진 경기에서 1.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8월 1일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8월 19일 SK전에서 0.1이닝 6자책 이라는 부진한 기록을 보여주면서 이 날 팀의 26실점의 원흉이 되었다. 덤으로 방어율도 8.10 으로 크게 올라갔다.

8월 25일 NC전에서 양의지에게 홈런을 맞고 다음 타자 강진성에게 2루타를 맞는등 부진하였다.

그리고 무릎 부상으로 말소되었으나 치료 후 9월 4일 다시 1군으로 올라왔다. 서산에서 터진 코로나 감염 사태로 인해 2군에서 선수를 콜업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올라온 걸로 보아 서산에 내려가지는 않았던 듯 하다.

9월 10일 대전 SK전에서 팀이 1:5로 지고 있는 9회초 등판해 최정을 8구만에 뜬공으로, 로맥을 초구 투수 땅볼로, 김강민을 유격수 뜬공으로 처리하며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9월 16일 대전 LG전에서 7회부터 등판해 3이닝 무실점으로 불펜 소모를 최소화했다.

9월 25일 대전 롯데전에서 6회초 등판. 1이닝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하고 윤대경과 바톤터치하여 내려갔다.

10월 3일 사직 롯데전에서 5회 등판해 1이닝 2자책을 기록했다.

11월 6일 한화에서 웨이버 공시되었다. 기사 안영명은 필승조 추격조 롱릴리프 등 보직을 마다하지 않고 마당쇠 역할을 하며 굴렀다는 점 때문에 팬들도 "그동안 고생했다." 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나이 때문에 현역 연장은 힘들어 보일 듯 하지만, 불펜 투수로서의 가치를 입증했기에 플레잉 코치 겸해서 영입하는 식으로 불펜이 약한 팀에서 데려갈 수도 있다. 본인도 아직 몸 상태가 괜찮다며 현역 연장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후 안영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구단이 여럿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빠르면 플레이오프가 종료된 뒤 영입 기사가 나올 수도 있을 듯.

6. kt wiz 시절

결국 새 시즌을 앞둔 11월 20일에 kt wiz가 안영명을 데려왔다는 기사가 떴다. # 이로서 유원상, 허도환과 다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6.1. 2021 시즌

한화 시절 오랜 기간 달았던 번호인 38번은 주권이 달고있고, 그동안 달아봤던 번호들도 모두 주인이 있어서[20] 원래 번호 주인이 양보하지 않는 한 그동안 달지 않았던 새로운 번호를 배정 받을 것으로 보인다. 최종적으로 48번을 받았다.

개막전부터 1군 엔트리에 들어갔고, 전유수와 함께 추격조로 쏠쏠한 활약을 해주고 있다.

5월 22일 한화전에서 0:5로 지고 있는 7회말 등판해 1이닝 1볼넷 2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5월 23일 한화전에서 7:0으로 이기고 있는 7회말 등판해 1이닝을 막았다.

5월 26일 SSG전에서 8회초 등판해 고종욱에게 안타 하나를 맞은 후 다음 타자 최주환에게 볼을 하나 던지고 내려갔다. 고종욱이 득점해 0이닝 1자책 1피안타를 기록했다.

5월 27일 SSG전에서 4:4상황에서 8회초 등판해 박성한을 볼넷으로 내보내고 이흥련의 번트로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고 주자를 2루로 보낸 후 김성현에게 2루타를 맞아 1실점했지만 후속 타자 최지훈과 오태곤을 각각 땅볼-삼진으로 돌려세우며 1이닝 1자책 1볼넷 1피안타 1탈삼진을 기록했다.

5월 29일 KIA전에서 3:4로 지고있는 7회말 1사 2,3루에 조현우에 이어 등판해 5번타자 황대인에게 1구에 중견수 희생플라이를 내주고 한승택 타석에 대타 김민식이 나오자 이강준에게 마운드를 넘겨줬다.

6월 2일 LG전에서는 5:5로 팽팽한 상황에 조현우에 이어 7회말 2사 2루상황에 올라와 볼넷을 내줬지만 이형종을 중견수 플라이로 잡았으나, 8회 말 볼넷으로 나간 문보경이 김민성의 번트로 한 베이스 더 가고 대주자 김용의가 3루 도루 후에 유강남의 3루수 땅볼에 홈으로 질주하여 1실점했다. 후속타자 구본혁을 중견수 플라이로 잡고 1.1이닝 무피안타 1실점 패전을 기록했다.

6월 4일 롯데전에서는 4회초 강판당한 데스파이네에 이어 5:0상황에 올라와 후속타자 배성근을 삼진으로 잡았지만 이어진 5회초 선두타자 손아섭에게 1구만에 안타를 맞고 김민수의 2루타에 손아섭이 홈으로 들어와 1실점, 김준태의 땅볼에 권동진의 실책이 겹치며 김민수가 홈으로 들어왔고, 다음 타자 김재유에게 볼넷을 내주고 이강준에게 마운드를 넘겨줬다. 이강준이 추재현에게 안타를 맞으며 김재유가 홈으로 들어와 0.1이닝 2피안타 1볼넷 1삼진 3자책을 기록했다. 이날까지 ERA 3.60을 기록했다.

6월 8일 SSG전에서 3:0으로 리드하고있는 8회말 주권에 이어 올라와 오태곤과 로맥을 두 번의 중견수 플라이로 잡았지만 최주환에게 안타를 맞고 후속타자 최정에게 투런홈런을 맞으며 2실점한 후 김재윤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0.2이닝 2피안타 2실점을 기록했으나 팀은 9회초 심우준의 홈런에 힘입어 승리하며 고영표의 승수를 올렸다.

6월 11일 한화전에서 4:0으로 리드하던 6회초에 등판해 정진호를 좌플로 잡았으나 힐리와 장운호에게 연속 안타를 맞고, 조한민에게 쓰리런을 맞으며 3실점하고 이창재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0.1이닝 3피안타(1홈런) 3실점.

6월 14일 1군에서 말소되었다.

8월 19일 개인사정으로 말소된 쿠에바스대신 1군에 등록되었다. 이미 필승조가 꽉 찬 상태라 패전조를 맡을 듯하다.

8월 26일 1군복귀후 처음으로 등판했다. 수원 SSG전에서 5:10으로 리드하던 중 9회초 1사 1루상황에서 이창재의 뒤를 이어 올라와 김성현을 땅볼로, 이현석을 삼구삼진으로 잡고 경기를 끝냈다. 0.2이닝 무피안타 1K.

9월 4일 잠실 LG전 11대 1로 크게 벌어진 9회말에 등판해 15구만에 세 타자를 처리해 경기를 끝냈다. 1이닝 무피안타 1K.

9월 5일 잠실 LG전 어제처럼 11대 0으로 크게 벌어진 7회말에 조현우에 이어 등판해 채은성-이재원-보어를 3땅-삼진-2땅으로 11구만에 정리했다. 1이닝 무피안타 무실점 1K.

9월 18일 창원 NC전 고영표가 8.1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고 난 뒤 마운드를 이어받아 1사 1,2루 상황에서 알테어를 삼진 처리했으나 후속타자 도태훈에게 몸에 맞는 볼을 허용하고, 강진성을 뜬공 처리하며 경기를 끝냈다. 0.2이닝 무피안타 1사사구 1K 무실점.

9월 29일 수원 두산전 7이닝 8실점을 한 데스파이네의 뒤를 이어 8회에 올라와 1이닝을 13구로 처리했다. 1이닝 무피안타 1K.

9월 30일 사직 롯데전 3이닝만에 강판당한 배제성에게 마운드를 물려받아 3이닝동안 2피안타 1자책으로 호투했다. 기록은 3이닝 44구 2피안타 1자책 2K. 꽤 오랜만에 멀티 이닝을 맡았다.

추격조로 어느 정도 잘 던졌으나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는 합류하지 못했다.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은퇴 후 기사에 따르면 우승 반지는 받았다고 한다.

6.2. 2022 시즌

4월 27일 1군에 등록되었다.

4월 30일 키움전에선 조현우가 3루타를 맞은 이후 8회에 등판. 김주형의 희생 플라이 타점으로 주자를 들여보내긴 했으나 이후 무실점으로 이닝을 끝냈다. 1이닝 1피안타 1K 무실점.

5월 4일 롯데전에선 배제성이 5실점을 내준 이후 7회에 등판. 1루수 실책으로 주자를 내보내긴 했으나 병살타-뜬공으로 단 6구 만에 이닝을 정리했다. 1이닝 무실점.

5월 5일 롯데전에선 심재민이 아웃카운트 하나만을 남겨두고 땅볼-볼넷으로 주자 1,2루 상황을 만들자 등판. 좌익수 뜬공으로 경기를 끝냈다. ⅓이닝 무실점.

5월 13일 키움전에서 8회 등판해 2피안타 1실점으로 1이닝을 책임졌다. 8회말 사구로 출루한 박경수 대신 대주자로 1루 베이스에 올라갔으나 대주자 룰 위반(투수로 등록이 되어있어 지명타자의 대주자만 가능하다)으로 다시 내려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5월 15일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이후 퓨처스에서도 등판 기록이 전혀 없다.

7. 은퇴

6월 9일 자신의 개인 SNS에 선수로서 은퇴를 암시하는 글을 올렸다.인스타그램 원문 디시인사이드 kt wiz 갤러리 캡쳐글

그리고 6월 15일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된 날 이미 은퇴 결심을 하고 감독실을 찾아갔었다고. 그리고 이 기사를 통해 상완신경총 손상이라는 병을 앓고 있었고, 이로 인해 호투와 부진이 반복되었던 것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프로생활을 이어갔으며, 가는 팀마다 헌신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한화와 kt 팬들 모두 은퇴를 아쉬워하며 제 2의 인생을 응원했다. KT 구단에서는 일정을 조율해 팬들과 함께하는 은퇴식을 마련할 계획이다.#

은퇴 후에는 kt에서 심리상담코치를 맡아 선수들을 뒤에서 돕고 있다. 그리고 8월 5일 현역 대부분을 보냈던 한화와의 경기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1] 전국대회 4관왕(황금사자기, 화랑대기, 봉황대기, 전국체전) 및 준우승 1회(대통령배)를 달성했다.[2] 천안북일고한화그룹 소유의 학교다. 이 천안북일고 출신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은 높은 순위로 한화에 입단하며, 성골이라고 불리며 구단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좋은 대우를 해 준다. 그래서 천안북일고는 농담삼아 한화 3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일고 출신으로 한화의 프랜차이즈로 자리잡은 선수로는 안영명 외에도 이상군, 한용덕, 김태균 등이 있다.[3] 물론 타깃은 김동수였다. 그런데 김동수가 피해서 심광호와 송지만이 얼떨결에 맞게 되었다. 참고로 저 사구는 구대성이 지시했다고 한다.[4] 인천광역시 출신의 류현진은 2차 1순위 지명.[5] 참고로 선동열의 한국프로야구 11시즌 통산 피홈런이 28개이다.[6] 볼넷 허용하고 폭투 기록한 것 까지는 그렇다 치지만 다음 타구는 3루수 김상현이 충분히 잡을수 있는 공인데 놓쳤다. 어쨌든 장작은 지폈으니.[7] 게다가 김주형의 경우 스포츠신문 기자들의 말에 의하면 보호선수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대화 감독이 키워보고 싶은 타자가 있었는데 보호선수로 묶여 있더라는 발언을 해서 그 대상이 김주형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8] 그런데 군필이라는 점은 확실히 안영명보다 비교우위에 선다. 거기다 안영명의 깃털공은 한시즌 34개 피홈런으로 이미 증명된 바 있으며, 김희걸은 SKKIA에 있는 동안 크게 혹사당하지도 않은 편이다.[9] 결과론적이기는 하나 2011년 불펜이 좆망 상태인 KIA에서도 김희걸은 거의 중용되지 않았기에, 김희걸을 뽑지 않았다는 걸 아쉬워할 필요는 없는 셈이다. 물론 안영명을 뽑은 게 잘한 일이라는 건 아니지만...[10] 그리고 11년 후 kt에서 이강철과 재회했다.[11] 트레이드 될 때 구단 측에서 다시 보자고 이야기를 들었다지만 그냥 인사치레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12] 체감이 안 간다면, 후임 김성근이 촌놈 마라톤을 하면서 5강싸움 중이던 상황에 미친듯이 갈아넣은 권혁/박정진이 각각 첫 4달간 76이닝, 72이닝을 던졌다. 그런데 압도적 꼴찌팀에서 이 정도로 출장했으니 얼마나 심한 혹사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13] 1주일 3선발이라는 기행 이외에는 정상적으로 로테이션을 돌았다.[14] 당장 시즌 내내 71이닝을 먹은 13년 송창식과 비교해, 이 해 안영명은 불펜 전환 이후 단 4달만에 66⅔이닝을 소화했다.[15] 김성근 항목을 참고해보면 알 수 있지만, 본인이 38에 대한 여러가지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한다.[16] 보통 배번은 스프링캠프 전후로 공식 배정되기 때문에 임시로 달게 되었다.[17] 올해 스토브리그에서 유일한 선발자원이다 보니 그래도 노리는 팀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분석도 있었으나, 리그 전반에 확실한 S급 자원에 통 크게 지르지 않을 거라면 아예 FA 선수 영입을 포기하는 분위기가 퍼져 있는 상태다.[18] 실제로 주량의 체질 자체가 선천적으로 술에 많이 약한 것도 있다고 한다. 조금 먹어도 힘든편이라고.[19] 팬들은 부적절한 행동이었다는 반응과 오히려 무기력한 것 보다는 낫다는 반응 모두 보이고있다.[20] 고영표 1번, 이대은 11번, 전유수 31번, 김태훈 4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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