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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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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포르투갈 국장.svg 포르투갈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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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 ~ 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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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쟁
,1688 ~ 1697,
파일:프랑스 왕국 어기.svg 프랑스 왕국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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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 ~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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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1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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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독립 전쟁
,1822 ~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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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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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2003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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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리비아 내전
,2011,
파일: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기.svg 리비아 }}}}}}}}}
앙골라 독립전쟁
Guerra de Independência de Angola
Angolan War of Independence
파일:1975 Luanda.png
독립 선언 직후 환호하는 루안다의 시민들
기간
1961년 2월 4일 ~ 1974년 4월 25일
장소
포르투갈령 앙골라
원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주의의 등장
교전 국가 및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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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시스쿠 다 코스타 고메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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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명
]] 루시우 라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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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앙골라 민족해방전선 당기.svg
문서명
]] 올뎅 호베르투[7]
병력
65,000명 추정 32,000명 추정
피해
6,000여명 전사
4,684명 부상
10,000여명 사망
결과
포르투갈 제2공화국 체제 붕괴의 시작
앙골라의 독립
앙골라 내전 발발
영향
포르투갈 식민제국의 영토 축소
1. 개요2. 상세
2.1. 포르투갈의 우세2.2. 포르투갈 역내의 정치불안2.3. 결말
3. 전후4. 여담

[clearfix]

1. 개요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기간의 포르투갈령 앙골라 지역에서 벌어진 앙골라 독립운동 세력과 포르투갈 식민제국 간의 전쟁이다. 앙골라 독립세력의 부진과는 별개로 포르투갈 식민제국의 해외 식민지 중 가장 경제적으로 중요했던 지역이었다.

2. 상세

2.1. 포르투갈의 우세

파일:5721f2811ca4b0a64ed5a007fd307dd2a0c5243b.jpg
DShK 중기관총 사격 훈련을 하는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 독립군.

포르투갈군은 초기에 '특수 경보병대'(Caçadores Especiais)라 불리는 대 게릴라전에 특화된 특전부대를 투입했다. 페르난두 호블르스(Fernando Robles) 중위가 이끄는 특수 경보병 제6중대는 '효과적인' 식민지 게릴라 토벌로 명성이 자자했다. 포르투갈군은 공세를 펼쳐 UPA의 앙골라 내 주요 거점인 페드라베르드(Pedra Verde)을 탈환하고 콩고-킨샤사 지역으로 UPA 게릴라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포르투갈 군은 수개월 이내에 교통의 요지인 항구 도시 루안다(Luanda)[8] 동북쪽의 뎀부스(Dembos) 지역을 점령한 MPLA를 내쫓고 뎀부스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61년 6월 안보리 결의 163호를 통과시켰는데, 이 결의는 앙골라를 비자치 지역(Non-Self-Governing Territory)으로 규정했으며 포르투갈군에 앙골라인에 대한 핍박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미국, 소련, 중국(당시는 중화민국)을 포함한 9개국이 찬성했으며, 같은 유럽 식민제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기권했다.

1962년 3월, UPA의 올뎅 호베르투는 앙골라 민주당(Partido Democrático Angolano)과 세력을 합쳐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를 결성했다. 몇 주 뒤 앙골라 망명 혁명정부(Govêrno revolucionário de Angola no exílio)가 구성되었고, 혁명정부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실권자였던 모부투 세세 세코와 이스라엘 정부[9] 그리고 이스라엘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었던 알제리튀니지[10] 등 일부 아랍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다.

같은 해,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은 자이르의 레오폴드빌(Leopoldville)에서 당 대회를 열고 투쟁에 소극적이었던 지도부를 아고스티뉴 네투(Agostinho Neto)가 이끄는 급진파로 교체했다. MPLA는 해방된 앙골라의 가치를 사기업의 국영화, 비동맹주의(Não Alinhado), 모든 식민지의 민족 해방 지원 등이라고 천명했다. 1965년 쿠바의 체 게바라를 만난 네투는 소련, 독일 민주 공화국, 그리고 쿠바의 지원을 약속받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자금과 무기 지원을 받았다.

1964년, 혁명정부의 외교부 장관이자 FNLA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조나스 사빔비가 FNLA를 탈퇴하고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UNITA)을 결성했다. 사빔비는 호베르투가 FNLA 활동을 구 콩고 왕국의 영역 바깥으로 확장하려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초기에 마오주의의 영향을 받은 UNITA는 농촌 해방과 모든 인종의 자주권을 주장했다.

포르투갈군은 앙골라 전선에서 승기를 잡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앙골라의 중심부와 이웃 국가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외부 세력이 게릴라를 지원하기 어려웠던 점이 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저항 세력 내부의 갈등이 있다. 저항군의 세 기둥인 MPLA, FNLA, 그리고 UNITA는 이념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고, 서로 다른 부족과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과 인종적 갈등도 심각했다. 세 세력은 포르투갈에 저항하는 것만큼이나 서로 싸우고 견제하는 데 열중했다.

포르투갈군의 전술도 포르투갈이 앙골라에서 우세를 점하는 데에 일조했다. 앙골라 주둔군 사령관 고메스 장군은 현지인의 민심을 얻는 것이 전쟁 승리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 판단하고 대민작전을 펼쳐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열세에 놓인 게릴라 세력이 사회기반시설 파괴와 학살을 일삼을수록 주민들의 포르투갈에 대한 지지는 더욱 견고해져 갔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원도 포르투갈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남아공 군대의 지원은 포르투갈군이 게릴라 세력을 소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공수여단(Batalhões de Caçadores Pára-quedistas), 특수 경보병대 등의 포르투갈 정규군 부대와 식민지 현지인으로 구성된 수많은 친포르투갈 민병대가 게릴라를 상대했고 현지인들은 대체적으로 포르투갈 식민 정부를 지지했다.

1972년에는 1966년에 개막한 앙골라 동부 전선(Frente Leste) 전역이 포르투갈의 승리로 끝났다. 네투를 위시한 MPLA 수뇌부는 해외로 도주했으며 남아 있던 MPLA 잔당은 분열되었다. 소련은 MPLA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중단했고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게 MPLA 대신 FNLA를 지원하라고 종용했다. 1973년 중공을 방문한 올뎅 호베르투는 중공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심지어 일부 MPLA 세력은 FNLA를 처리하기 위해 포르투갈군과 협력하기도 했다.[11]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 내부 게릴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과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경제는 매년 성장하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그동안 극도로 낙후되어 있었던 앙골라에선 유례가 없는 경제성장이 계속되었고 포르투갈 정부는 도시화되고 잘 개발된 해안지방과 낙후된 내륙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건설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식민지 정착자들을 지원했고, 메트로폴르(metrópole)라 불리는 유럽계 포르투갈인 이민자들이 아프리카 식민지로 몰려들어 가령 앙골라의 유럽인 인구는 1944년 4만 명에서 1974년엔 40만 명까지 늘어났다.

2.2. 포르투갈 역내의 정치불안

그러나 장기간 지속된 식민지 전쟁으로 국가경제는 거의 파산 직전이었고, 국민들 사이에선 반전 사상이 퍼져나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게릴라 활동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이 감행되었고, 국가 예산의 44%가 군비로 지출되었다. 모든 남성은 군대에서 3년 이상 의무 복무를 해야 됐고, 최소 2년 이상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복무해야 했다. 징병에 반대한 많은 포르투갈 젊은이들이 해외로 탈출했고 포르투갈군은 식민지의 현지인들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한 1961년 식민지 흑인들이 포르투갈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74년 4월에는 50%를 넘어섰다. 포르투갈의 교육 정책으로 인해 흑인들의 문맹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장교 과정을 밟을 수 있는 흑인은 거의 없었으나, 전쟁 말기에는 초급 장교로 진급한 흑인도 많아졌다.

포르투갈의 카에타누 총리는 기니비사우의 PAIGC 게릴라와 협상을 개시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스피놀라 장군을 경질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피놀라 장군을 전쟁 영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카에타누 총리의 이 결정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포르투갈군이 기니비사우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포르투갈의 승리가 확정적이라고 믿었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와 영국, 서독, 프랑스 등 서방 주요 강대국들은 포르투갈 식민제국이 마지막까지 게릴라들을 진압하며 살아남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승리가 포르투갈 국내의 여론 분열을 해소할 것이라고 믿었다.

식민지 무장 게릴라 지원으로는 전쟁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소련과 공산진영은 국제무대에서 포르투갈을 고립시키는 데 집중했다. 당시 포르투갈 내에서 불법으로 규정된 포르투갈 공산당은 1950년대부터 모든 식민지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1964년 4월, 포르투갈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민주사회 행동위원회(Acção Democrato-Social)는 식민지 문제가 전쟁보다는 정치적 협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6년, 사회주의자 정치인 마리우 소아르스(Mário Soares)[12]는 범국민적 합의를 거친 국민투표를 통해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상황수첩(Cadernos Circunstância), 시간과 방법(Tempo e Modo), 논란(Polémica) 같은 유인물들이 대학가에서 돌기 시작했다. 반전운동이 대학가에서 확산되었고 이스타두 노부 체제를 비방하는 선전물이 곳곳에 붙여졌다. 무장혁명행동(Acção Revolucionária Armada)이나 혁명여단(Brigadas Revolucionárias) 같은 좌파 무장테러단체가 조직되어 군 시설에 대한 테러와 사보타주를 감행했다. 오에이라스에 있는 NATO 사령부가 이들에 의해 공격당했고 탕쿠스(Tancos) 공군기지가 공격받아 군용 헬리콥터 수 대가 파괴되기도 했다.

카에타누 정부는 여론을 돌리기 위해 재정 정상화를 위한 군 예산의 삭감과 함께 여러 개혁 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많은 장교들에게 불만을 샀는데, 특히 출신환경이 좋지 않았던 젊은 장교단이 크게 반발했다. 동시기에 소련의 영향을 받은 포르투갈 국내 좌익세력이 군부 내부까지 침투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이스타두 노부 체제에 불만이 많은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군부 쿠데타를 통한 카에타누 정부 전복과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신체제 건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2.3.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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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달아 준 카네이션을 달고 있는 쿠데타군

1974년 4월 25일 새벽, 좌익계열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된 '국군 운동'(Movimento das Forças Armadas, MFA)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리스본과 포르투갈 전국의 전략 요충지를 점령했다. 소위 말하는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초기에는 일부 병력만이 쿠데타 세력에 동조했으나 점차 그 세가 불어났으며 정부에 충성하는 부대는 병력을 출동시키길 꺼렸다. 카에타누 총리는 곧 투항하고 쿠데타 세력에게 추대된 스피놀라 장군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전쟁과 전시 체제에 지친 리스본 시민들은 군인들의 궐기에 환호했다.

좌파 장교들이 중심이 된 임시정부[13]는 앙골라를 포함한 해외 식민지를 모두 포기하기로 결의했다. 포르투갈 군대와 관료들이 제일 먼저 앙골라에서 떠났으며 루안다를 비롯한 앙골라의 도시들에 거주중이던 수십만의 포르투갈 노동자들, 소상공인들, 그리고 농부들도 귀국했는데 포르투갈 본토 사람들은 이들을 '귀환자(Retornados)'라고 불렀다.

앙골라는 이후 독립국가로 독립하였고, 포르투갈의 신정부는 포르투갈령 인도의 인도 병합을 승인하였다.

포르투갈이 해외 식민지들을 모두 포기했으므로 이후 남은 것은 마카오밖에 없었다. 그 마카오도 카네이션 혁명 이후 지속적으로 중국에 반환하겠다고 했지만 중국이 홍콩 반환 문제로 인해 거부해서 포기하지 못했을 뿐이며 양국은 마카오에 대해 '중국 땅이지만 포르투갈 정부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곳'으로 해석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그 마카오도 1999년에 반환이 이뤄졌다. 또한 2002년 인도네시아에 병합되었다 독립한 동티모르의 독립을 승인함으로서 지구상의 최초의 식민제국이자 마지막 식민제국은 이렇게 무너졌다.

3. 전후

카네이션 혁명에 의한 혼란은 식민지 주민과 군 관계자의 대규모 탈출을 초래하였다. 최대의 식민지인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백인과 흑인을 불문하고 총 1백만명 이상의 주민이 떠났는데, 이 일련의 대탈주는 역사상 평시에 행해진 집단 이주 가운데서도 최대 규모였다.

1974년 4월 25일의 쿠데타 이후 이스타두 노부 체제를 무너트리고 등장한 '구국 군사 정부'(Junta de Salvação Nacional)가 포르투갈의 정국을 이끌게 된다. 뒤이어 혁명 진행 과정(Processo Revolucionário Em Curso)이라는 여러 사회정치적 세력간 매우 열띤 정치적 대립기가 나타났다. 군사정권 내부에서도 스피놀라 장군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와 좌익 MFA가 대립했으며, MFA 내부에서도 공산당을 지지하는 급진파와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대립했다. 이러한 대립은 1975년 11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군부 내 급진 좌익 세력의 포르투갈 공산화를 위한 쿠데타로 극에 달했다. 혼란은 1976년 4월 25일에 치러진 보통선거 전후로 서서히 진정되어 갔다.

포르투갈 제국이 무너지자 정치적으로 분열된 앙골라에서는 소련쿠바의 지원을 받은 앙골라 인민공화국미국남아공의 지원을 받은 앙골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14]이 1975년부터 앙골라 내전을 벌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 문서를 참조.

독립을 달성한 앙골라는 초반의 희망과는 달리 내전으로 생긴 전란으로 인한 경제악화・공산독재・부패・빈곤・불평등・정책의 실패 등 여러 문제점들을 노출했고, 사회질서와 경제수준을 회복시키는 것이 독립 이후의 과제로 부상했다.

4. 여담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하고 있던 백인 정부는 포르투갈 식민지가 무너지고 앙골라에 좌익 계열 흑인 정권이 들어서자 위기감을 느껴서 핵개발을 강행했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2의 캠페인 첫 미션이 식민지 전쟁 이후에 앙골라에서 발생한 앙골라 내전을 다루고 있다. MPLA와 UNITA, UNITA의 지도자 조나스 사빔비, 그리고 MPLA을 지원한 쿠바군이 미션에 등장한다.

이 시기에 '앙골라는 우리 것이다'라는 포르투갈의 선전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 앙골라 민족해방전선[2] 카빈다 월경지 해방전선. 콩고민주공화국콩고 공화국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1975년 1월 알보르조약으로 앙골라에 병합됐다. 앙골라 산유량의 60%를 담당한다.[3] 살라자르 총리의 후임[4] 포르투갈 제 13대 대통령[5] 앙골라 주둔군 사령관[6] MPLA 서기장[7] FNLA 의장[8] 현재 앙골라의 수도. 포르투갈 식민지 시기에도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중심지였다.[9] 일반적인 사회 통념과 달리 이스라엘은 건국 직후부터 약 30년간 사회주의 세력이 집권했다. 또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국제적으로 최초로 승인한 나라도 당시 사회주의 세력이 집권했던 이스라엘이였다.[10]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의 주도로 세속주의, 탈종교화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터키와 달리 이스라엘을 승인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을 지지하였다.[11] 이때 외부 지원이 끊기고 집중적으로 포르투갈의 공격을 받은 MPLA는 궤멸 직전에 놓였다. 네투가 돌아와 혼란을 수습하지 않았다면 MPLA는 와해됐을 것이다.[12] 포르투갈의 정치가(1924.12.7 - 2017.1.7). 대학 시절부터 이스타두 노부 체제에 맞서 싸워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 공헌하여 '포르투갈 민주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1973년 독일에서 포르투갈 사회당을 창당하였으며, 총리와 대통령직을 각각 두 차례 역임하였다.[13] 스피놀라 장군 등 보수-우파 계열의 장교들이 요직에 있었지만 실권은 MFA가 쥐고 있었다.[14] 앙골라 민주주의 공화국의 집권정당인 UNITA는 원래 중국의 지원을 받은 마오주의 성향이었으나 이후 미국과 남아공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반공주의 성향으로 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