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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6 22:18:55

카를루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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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arles I of Anjou.jpg
왕호 <colbgcolor=#ffffff,#2d2f34>카를루 1세(Carlu I), 카를로 1세(Carlo I)
출생 1226년 / 1227년
사망 1285년 1월 7일 (향년 57~59세)
재위 시칠리아 왕국의 왕
1266년 1월 6일 ~ 1282년
나폴리 왕국의 왕
1282년 ~ 1285년 1월 7일
아카이아 공국의 공
1278년 ~ 1285년 1월 7일
배우자 프로방스의 베아트리스 (1246년 결혼 / 1267년 사망)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 (1268년 결혼)
자녀 비앙카, 베아트리체, 카롤로 2세, 필리포, 엘리사베타
아버지 루이 8세
어머니 카스티야의 블랑카
형제 필리프, 알퐁스, 장, 루이 9세, 로베르 1세[1], 장 트리스탄, 알퐁스[2], 필리프 다고베르, 이자벨[3], 에티엔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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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의 초대 왕.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의 분가인 앙주카페 가문의 시조. 프랑스 국왕 루이 8세카스티야의 블랑카의 막내 아들로 루이 9세의 동생이다. 일찍부터 형 루이 9세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여러 차례 나섰고, 만프레디를 꺾고 시칠리아 국왕을 겸임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고 지중해를 지배하는 앙주 제국을 세우려는 야망에 불탔다. 그러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시칠리아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발발한 시칠리아의 만종으로 인해 아라곤 왕국시칠리아를 상실했다.

시칠리아어로는 카를루 1세(Carlu I di Sicilia), 이탈리아어로는 카를로 1세(Carlo I d'Angiò), 프랑스어로 앙주의 샤를(Charles d'Anjou)이라고 부른다.

2. 생애

1226년 또는 1227년 프랑스 국왕 루이 8세와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의 딸 블랑슈 사이의 막내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226년 11월에 사망했고, 형 루이 9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블랑슈는 어린 아들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느라 바빠서 막내아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기에, 그는 유모와 가정교사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1237년부터는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의 궁정에서 자랐으며, 4년 후에는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의 보살핌을 받았다.

샤를은 성장하면서 체격이 건장해졌고 피부는 짙은 올리브색을 띄었으며 성격은 다부졌다. 또한 형 루이 9세처럼 가톨릭 교리를 터득했고 경건한 신앙심을 가졌으며, 라틴어 문헌의 오류를 식별할 수 있었고, 시, 의학, 법학 등에 상당한 열의가 있었다. 뛰어난 무예와 지도력을 갖췄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맞서 싸울 자세를 갖췄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의 마음 속에는 더 많은 명예와 권력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심이 꿈틀거렸다.

1232년 형 장과 필리프가 사망한 후, 샤를은 앙주와 마른의 백작에 선임되었다. 1246년 믈룅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뚜헨느를 추가로 받았다. 여기에 어머니의 주선으로 프로방스 백작 레몽 베렝가르 4세의 넷째 딸 베아트리스와 결혼했다. 베아트리스에게는 언니 3명이 있었다. 마르그리트는 1234년 루이 9세와 결혼했고, 엘레오노르는 1236년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와 결혼했으며, 산키아는 1243년 헨리 3세의 남동생 리처드와 결혼했다. 봉건 관습에 따르면, 아들이 없는 레몽 베렝가르 4세는 모든 딸에게 소유물을 나눠줘야 했다. 그러나 그는 딸들이 풍부한 지참금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여기고 남은 모든 땅을 베아트리스에게 물려줬다. 이에 다른 딸들은 불만을 품었고, 레몽 베렝가르 4세의 미망인인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스 역시 자신 몫이 없다는 것에 분개했다. 샤를은 아내를 통해 접수받은 프로방스 일대를 지키기 위해 이들과 맞서야 했다.

프로방스 백작령은 부르고뉴 왕국의 일부로서 신성 로마 제국에 명목상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샤를은 다른 일로 바빠서 프로방스 일대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하는 황제에게 충성 맹세를 하기를 거부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전임 백작들이 프로방스 도시와 귀족들에게 완전한 자치권을 인정하는 관행을 거부하고, 귀족들의 권리와 수입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 그러면서도 앙주와 마인에 거의 방문하지 않고 그들을 관리할 대리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다스렸다.

프로방스 일대의 자유시들과 귀족들은 샤를에게 불만을 품은 끝에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스와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의 선동에 따라 샤를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마르세유, 아를, 아비뇽은 동맹을 맺고 프로방스의 귀족이자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의 남편인 보의 바랄을 연합군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샤를은 형 루이 9세의 십자군에 따라가기로 했기에 반란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는 장모인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스를 달래기 위해 포르칼퀴에를 넘겨주고 프로방스로부터 얻은 수입의 3분의 1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1248년, 샤를은 아내 베아트리스와 함께 루이 9세의 제7차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 1249년 6월 5일 이집트에 도착한 샤를은 형의 지휘하에 다미에타를 공략하고 사라센들을 상대로 용맹을 떨쳤다. 루이 9세의 전기 작가 장 드 조인빌(Jean de Joinville)은 샤를이 적에게 둘러싸인 수십 명의 십자군을 홀로 구해냈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프로방스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루이 9세는 1250년에 샤를을 다른 형제인 알퐁스 드 푸아티에와 함께 조국으로 돌려보내고 본인은 이집트에서 계속 십자군을 이끌었다. 10월에 프랑스에 도착한 샤를은 진압에 착수해 1252년 8월 반항적인 도시들을 제압했다. 하지만 봉기 지도자들을 관대하게 용서했고, 보의 바랄은 이후부터 샤를의 충실한 동반자가 되었다. 아를, 마르세유, 아비뇽 역시 샤를을 공작으로 받들겠다고 맹세했다.

1252년 11월, 루이 9세가 없는 동안 프랑스를 대리 통치하던 카스티야의 블랑슈가 사망했다. 샤를은 파리로 가서 형제 알퐁스 드 푸아티에와 함께 왕국을 대리 통치했다. 이때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되어달라고 제안했다. 알퐁스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샤를은 내심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루이 9세가 이집트에서 서신을 보내 "기독교도끼리 쓸데없이 싸워서는 안 된다"며 교황의 제의를 거부하라고 하는 바람에 마음을 접어야 했다.

얼마 후, 플랑드르와 에노를 다스리던 바르그리트 백작부인과 아들 장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마르그리트는 샤를에게 자신을 도와준다면 플랑드르와 에노의 섭정이 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샤를은 이에 혹해 자신의 군대를 두 지역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1254년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프랑스에 돌아온 루이 9세는 동생의 행위에 분노해 샤를을 파리로 불러 플랑드르와 에노의 섭정 직을 포기하라고 엄명했다. 샤를은 이번에도 형의 말에 따라 포기했고, 에노 백작령은 장에게 넘어갔다.

그 사이, 프로방스 귀족들은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스의 사주를 받고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샤를은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스와 협상한 끝에 1256년 11월 포르칼퀴에 통치를 완전히 포기하는 대가로 거액의 연금을 받기로 했으며, 마르세유, 아비뇽, 아를 등의 도시들에 백작을 설치해 자신 대신 통치를 행사하게 했다. 이리하여 프로방스의 지배력을 강화한 샤를은 영토 확장에 나섰다. 1257년 빈 공작 위그 7세로부터 알프스의 여러 영주권을 획득했고, 오라녜 공 레몽 드 보로부터 옛 아를 왕국의 영지에 대한 섭정권을 받아냈다. 1258년 벤티미글리아(Ventimiglia) 시를 봉신으로 삼았으며, 1259년에 살루초, 몰도바, 케라스코를 복속시켰고, 1260년에 피에몬테 남부의 몬도비, 체바, 비안드라테 시를 복종시켰다.

1262년 초, 샤를이 부재한 동안 카스텔라노의 보니파시오 2세가 프로방스로 잠입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마르세유의 시민들은 샤를의 관리들을 추방했지만, 보의 바랄은 샤를이 돌아오기 전에 반란의 확산을 막았다. 이후 프로방스로 귀환한 샤를은 반란군을 물리치고 반란군 지도자 카스텔라네의 보니파시오 2세와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스를 추방했다. 뒤이어 마르세유를 포위 공격하다가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마르세유 요새를 해체하는 대신 자치권을 인정했다. 이후 프로방스는 다시는 그를 거역하지 않고 샤를의 모든 원정에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다.

1262년, 교황 우르바노 4세는 프랑스 궁정에 특사를 보내 만프레디를 축출해달라고 요청했다. 1263년 5월, 루이 9세는 샤를에게 교황과 협상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교황은 만프레디를 몰아내주면 시칠리아 왕이 되는 것을 용인하겠다고 제안했다. 다만 시칠리아 왕은 주교 서임을 임의로 결정할 수 없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없고, 이탈리아 본토와 교황령에서 어떤 직책도 맡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샤를은 교황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만프레디는 로마에 선언서를 보내 자신이 왕국을 통치할 권한이 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권리도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샤를에 맞서기 위해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1265년 5월 10일 마르세유에서 출항한 샤를은 5월 23일 로마에 도착한 뒤 그 사이에 사망한 우르바노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클레멘스 4세의 영접을 받았다. 6월 28일 공식적으로 시칠리아의 왕으로 선포되었고 교황에 의해 왕관을 썼다. 이후 1265년 하반기에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수많은 기벨린 요새들을 공략한 샤를은 1266년 1월 20일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인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그는 처음에는 나폴리를 향해 진군했다가 만프레디가 카푸아 인근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네벤토로 향했다. 1266년 2월 26일, 샤를의 프랑스군과 만프레디의 시칠리아군이 베네벤토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시칠리아군이 완패했고 만프레디는 전사했다. 만프레디의 유해는 수많은 돌무더기에 파묻혔다가 도로 파헤쳐진 후 나폴리와 교황령의 경계인 가리글리아노(Garigliano) 강둑에 안장되었다.

샤를은 여세를 이어가 3월 7일 나폴리에 입성한 뒤 부관인 몽포르의 필리프를 시칠리아로 파견해 단시일에 공략하게 했다. 만프레디의 아내 엘레니와 만페르디의 자녀 베아트리체, 엔리코, 아졸리노, 프리드리히를 제포해 노세라 인페리오레(Nocera Inferiore) 성에 가두었다. 엘레니는 1271년 그곳에서 옥사했고, 자식들은 카스텔 델 몬테(Castel del Monte)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않은 깜깜한 방에 갇혀 있으면서 음식을 겨우 얻어먹는 삶을 이어가야 했다. 샤를은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를 칭했고, 코르푸 섬과 두라초 일대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그의 군대는 1266년 연말에 코르푸를 공략했다.

126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지 세력인 기벨린 파의 준동으로 토스카나를 상실할 위기에 처한 클레멘스 4세는 카를루 1세에게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그해 4월에 피렌체로 진군해 기벨린 파를 몰아냈고, 피렌체와 루카의 포데스타(Podesta, 통치자)로 선출되었다. 이후 시칠리아 원정 동안 소모된 재정을 만회하기 위해 대규모 거래에서 외화 사용을 금지했고 외국 동전을 현지 화폐로 강제로 교환하게 해 이로부터 이익을 챙겼다. 또한 피사 상인들과의 합작을 통해 곡물, 향신료, 설탕 거래를 독점했다.

이같은 행보에 위협을 느낀 클레멘스 4세는 카를루 1세를 비테르모로 불러들인 뒤 "일전에 이탈리아 본토와 교황령에서 직위를 맡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면서 왜 약속을 어기는가?"라며 토스카나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라고 권고했다. 그 대신, 일전에 미하일 8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쫓겨난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2세과 협상해 아카이아 공국의 종주권을 넘겨받고, 아카이아 공작 필리포가 자식 없이 사망하면 샤를이 아카이아 공국을 상속받게 했다. 이에 이탈리아에 영역을 확장하려던 생각을 접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고 보두앵 2세를 복위시킨 뒤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바이에른에서 만프레디가 죽고 카를루 1세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콘라딘은 자신이야말로 시칠리아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프레디의 전 시칠리아 대리인 콘라트 카프체와 함께 시칠리아로 잠입해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튀니스의 하프스 왕조 칼리파 무함마드 1세 알 무스탄시르는 자신의 봉신이자 만프레디의 전 동맹인 카스티야의 페데리코가 북아프리카에서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시칠리아로 가서 카프체와 합류하는 것을 수락했다. 콘라딘 지지자들의 반란은 시칠리아에서 칼라브리아로 확산되었고, 루체라에 집단 거주하던 아랍인들도 동참했다. 이에 카를루 1세는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루체라를 포위했지만, 8월 말 콘라딘의 아브루초 침공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1268년 8월 23일,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카를루 1세와 콘라딘이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콘라딘은 도주했으나 토레 아스투라에서 체포된 뒤 추종자들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29일 나폴리에서 참수되었다.

콘라딘을 격파한 후 카를루 1세는 1269년 4월 루체라로 돌아와 도시를 포위 공격한 끝에 1269년 8월에 함락시키고 많은 아랍인을 학살했다. 이후 필리프와 기 드 몽포르를 시칠리아로 보내 그곳의 반란군을 제압하게 했지만, 아우구스타 시만 공략되었을 뿐, 다른 도시들은 좀처럼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기욤 레스탄다르트를 시칠리아의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레사탄다르트는 아그리젠토를 점령하고, 카스티야의 페데리코 등을 튀니스로 쫓아냈다. 오직 카프체만이 끝까지 저항했지만 1270년 초에 항복했다.

1270년 루이 9세가 튀니지를 향한 제8차 십자군 원정을 단행했고 카를루 역시 함대를 규합해 형과 합류했다. 그러나 1270년 8월 25일 튀니스에 상륙했을 때, 형 루이 9세는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그 후 하프스 왕조의 칼리파 무함마드 1세 알 무스탄시르와 2차례 맞붙어 승리한 뒤 11월 1일 평화 협정을 맺었다. 무함마드 1세는 루이 9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필리프 3세와 카를루 1세에게 군사 작전 비용을 전액 보상하고 기독교 포로들을 석방하기로 했다. 또한 그는 매년 카를루 1세에게 공물을 바치고 카를루의 반대자들을 튀니지에서 추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카를루 1세와 필리프 3세는 11월 10일 튀니지를 떠났지만, 폭풍으로 인해 트라파니에서 함대가 분산되었고 카를루 1세의 갤리선 대부분이 유실되거나 손상입었다. 이때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제노바 선박들 다수가 시칠리아에 정박했는데, 그들이 동로마 제국과 협력하고 있다는 명목을 들며 제노바 배와 화물을 나포했다.

1272년 2월, 알바니아의 여러 족장들에게 자치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알바니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알바니아의 대리인으로 가초 치나르도(Gazzo Chinardo)를 선임했다. 1272년 11월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 내의 모든 제노바인을 생포하고 그들의 재산을 압류하라고 명령했다. 여기에 시칠리아 함대는 제노바의 영역이었던 코르시카의 중심지인 아작시오를 점령했다. 1272년 또는 1273년에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콘스탄틴 아센 1세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1273년 테살리아의 통치자 요안니스 두카스,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1세와 동맹을 맺었다.

1274년 7월 6일, 미하일 8세의 사절단이 리옹 공의회에 참석해 가톨릭과 교황의 우위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카를루 1세가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는 것을 금지하는 한편, 카를루 1세와 미하일 8세 사이의 휴전을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미하일 8세는 카를루 1세의 봉신들을 포함한 발칸 반도의 소국들을 공격하기로 하고 1270년대 후반에 함대를 파견해 알바니아와 이탈리아 남부 사이의 해상 항로를 장악하면서 이 시도는 물거품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카를루 1세는 제노바와 랑고바르드 연맹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던지라 동로마 제국에 대한 원정을 쉽사리 감행하지 못했다.

1276년 1월 10일 그레고리오 10세가 사망한 뒤 새 교황에 선임된 인노첸시오 5세는 카를루 1세를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토스카나의 황제 대리인으로 임명하면서 카를루와 제노바 사이의 협상을 중재했다. 그 결과 1276년 6월 로마에서 카를루 1세와 제노바 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제노바 상인들의 특권을 회복하고 토스카나 일대에 대한 지배를 포기했고, 제노바인들은 벤티밀리아에서의 카를루 1세의 통치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해 6월 22일에 인노첸시오 5세가 급사하자, 카를루 1세의 군대는 라테라노 궁전을 에워싸서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한 뒤 추기경들을 압박해 7월 11일 카를루 1세의 오랜 친구인 오토보노 피에스키를 교황 하드리아노 5세로 추대하게 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노 5세 역시 오랫동안 앓고 있었던 지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대관식을 거행하기도 전인 1276년 8월 18일에 사망했다.

그 후 새 교황에 선출된 요한 21세는 카를루 1세의 정적들을 파문하고 카를루 1세가 예루살렘 왕국의 상속권을 갖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후 산세베리노의 로저를 예루살렘 왕국의 대리인으로 선임했고, 로저는 1277년 6월 7일 아크레에 상륙한 뒤 그곳의 구호 기사단과 베네치아 상인들의 지지를 토대로 아크레 일대를 다스렸다. 1277년 5월 20일 요한 21세가 사망하자, 카를루 1세를 개인적으로 불신하던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이 교황 니콜라오 3세로 선출되었다. 니콜라오 3세는 어떤 외국 공작도 로마를 통치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카를루 1세에게 원로원 의원을 10년이나 맡았으니 이젠 물러나라고 통보했다. 그는 니콜라오 3세와 오랜 협상을 벌인 끝에 자신의 적들을 파문하는 것을 재확인하는 대가로 로마의 원로원과 토스카나의 대리인 직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서약했다.

1278년 5월 1일 기욤 2세가 사망하자, 카를루는 아카이아 공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시칠리아의 총독인 이브리의 갈레란을 아카이아의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여기에 1279년 3월 14일 이피로스 전제군주국데스포티스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로부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이피로스를 지켜주는 대가로 봉신 서약을 받아냈다. 1280년 8월 22일 니콜라오 3세가 사망하자, 교황의 친척들과 다른 이탈리아 추기경들 사이의 불화를 틈타 비테르보에 그의 지지자들 중 한 명을 선출하기 위해 대리인들을 보냈다. 비테르보에서 폭동이 일어나면서 교황 선출이 몇 달간 이뤄지지 않자, 카를루 1세의 군대는 비테르보에 진군한 뒤 폭동을 일으킨 주민들을 학살했다.

1281년 2월 22일, 카를루 1세의 열렬한 지지자인 브리의 시몬이 교황 마르티노 4세로 즉위했다. 마르티노 4세는 전임 교황의 친척들을 모조리 해임하고 카를루 1세를 로마의 원로원 의원으로 선임했다. 몬테펠로의 구이도 1세가 교황에 맞서 봉기했지만, 즉각 토벌대를 보내 이들을 제압했다. 이후 피에몬테에도 군대를 보냈지만, 살루초 후작 토마스 1세는 5월에 보르고 산 달마초에서 시칠리아군을 격파했다. 1281년 4월 10일, 마르티노 4세는 미하일 8세를 파문하고 카를루 1세에게 동로마 제국을 침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전부터 발칸 반도에 수시로 원정을 떠나 약탈을 자행했던 카를루 1세는 즉각 '콘스탄티노폴리스 십자군'을 선포하고 대규모 함대를 마르세유와 시칠리아의 마세나에 집결시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출항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을 공략해 앙주 제국을 세우려는 그의 야망은 곧 한계에 부딪쳤다. 그는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을 벌이면서, 이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이전보다 30배에 달하는 세금을 부과하는 등 가혹한 수탈을 일삼았다. 이에 시칠리아 민중의 분노는 갈수록 불거졌고, 프랑스인들이 요직을 장악하는 바람에 정치에 참여할 길이 막혀버린 귀족들 역시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일전에 만프레디의 딸 쿠스탄차와 결혼했던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에서 앙주 왕조에 대한 반감이 극렬해지는 상황을 예의주시했고, 아내의 설득을 받아들여 시칠리아에서 망명 온 호엔슈타우펜 가문 구성원 및 추종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며 장차 카를루 1세를 시칠리아에서 타도하고 왕위를 가로챌 기회를 노렸다. 여기에 카를루 1세가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도모하려 드는 것에 위협을 느낀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도 아라곤 왕국에 군자금을 지원해 함대를 조직하게 하고, 시칠리아에 공작원들을 잠입시켜 귀족과 민중을 선동했다.

1282년 3월 말, 팔레르모에서 민중이 봉기를 일으켜 프랑스 병사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팔레르모 시민들은 4명의 "사람들의 대장(capitaines du peuple)"과 5명의 "고문(conseillers)"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임시 의회를 열었다. 이후 팔레르모에서 일어난 소식을 접한 코를레오네(Corleone)에서도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인들을 처단한 후 자체적으로 의회를 세웠고, 팔레르모에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가 힘을 합쳐 결성한 롬바르디아 연맹을 따라서 시칠리아 도시 연합인 시칠리아 연합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뒤이어 바 디 노토(Val di Noto: 시칠리아 남동부), 바 데모네(Val Demone: 시칠리아 북동부) 등지에서도 봉기가 잇따라 일어났고, 4월 중순에는 메시나를 제외한 시칠리아 전역의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4월 28일, 봉기군은 메시나를 공략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던 함대를 파괴했고, 카를루 1세의 대리인으로서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오를레앙의 에르베르트를 칼라브리아로 축출했다.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카를루는 즉각 시칠리아로 진군해 메시나를 포위했다. 그러나 사전에 튀니지에 가서 대기하고 있던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인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시칠리아로 진군해 1282년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이후 팔레르모에 입성해 9월 4일 시칠리아 왕으로 선포되었다. 카를루 1세는 일단 나폴리로 퇴각한 뒤 교황청에 "이단인 정교회를 토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십자군을 저지한 아라곤 왕을 정죄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르티노 4세는 이를 받아들여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 십자군을 선포했다. 카를루 1세의 조카이자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3세도 이에 호응해 아라곤 왕국에 선전포고했다.

페드로 3세는 임박한 전쟁에 대비해 길렘 갈세란 데 카르텔라(Guillem Galceran de Cartellà)를 알모가바르 보병, 석궁병, 창병으로 구성된 육군 사령관으로 선임하고, 해군 사령관으로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를 선임했다. 두 장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세를 개시해 1283년 2월 칼라브리아 해안 지대의 대다수 도시를 장악했다. 이에 페드로에게 "결투로 분쟁을 해결하자"고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페드로는 이를 받아들이고, 양자는 6월 1일 보르도에서 100명의 기사를 대동한 채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또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결투를 중재하기로 했다. 페드로는 아라곤 왕비이자 시칠리아 공동 여왕인 쿠스탄차 2세에게 시칠리아를 맡긴 뒤 아라곤으로 돌아간 후 변장한 채 보르도로 잠입했다. 그러나 결투는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고, 페드로는 아라곤으로 귀환했다.

한편,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칼라브리아 해안지대를 공략한 뒤 몰타를 공략하고 몰타 인근의 앙주-프랑스 연합 함대를 섬멸했다. 이후 카를루 1세가 칼라브리아 등지의 반란 진압에 애를 먹느라 시칠리아 원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1284년 6월 5일, 아라곤-시칠리아 함대 사령관인 라우리아의 루지에로가 나폴리 항구로 침입했다. 이때 카를루는 자기가 돌아오기 전까지 나폴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샤를은 이를 어기고 함대를 이끌고 적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여러 나폴리 귀족들과 함께 생포되었다. 구원군을 이끌고 나폴리 근교 가에타에 도착한 그는 아들이 크게 패하고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이 일을 망쳤다며 저주를 퍼부었다.

호엔슈타우펜 추종자들은 콘라딘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샤를을 죽이자고 주장했지만, 아라곤 왕국에서 프랑스의 침공을 저지하는 페드로 3세를 대신해 시칠리아를 통치하던 아라곤 왕비이자 시칠리아 여왕 쿠스탄차 2세는 거부했다. 그 대신, 그녀는 카를루 1세에게 "아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나의 이복 누이인 베아트리체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곧 받아들였다.

이후 브린디시로 가서 1285년 새해에 시칠리아를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12월 30일 포자에서 심각한 병에 걸리자 아직까지 시칠리아에 억류되어 있는 샤를 왕자를 차기 국왕으로 지명하고 조카인 아르투아의 로베르 2세에게 샤를이 돌아올 때까지 나폴리 왕국을 대리 통치하게 했다. 카를루는 후계자 선정을 마친 뒤 1285년 1월 7일 아침에 사망했고, 나폴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샤를 왕자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 억류되었다가 1287년 막대한 몸값, 아들 3명을 포함한 인질을 제공하고 시칠리아 왕의 칭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나폴리로 돌아와서 카를로 2세로 등극했다.

3. 가족 관계

4. 기타

비잔티움 쇠망사에서 라틴 플레이어의 주력 유닛으로 등장한다.

동로마의 황제로 회귀하다에선 예루살렘 왕위를 받게되어 시칠리아 왕위를 포기하고 십자군을 지휘하게 된다.[4]

고야드 앙주 백의 명칭이 이 인물에서 따왔다.

[1] 아르투아 백작이자 아르투아 가문의 중시조.[2] 푸아티에와 툴루즈 백작. 1271년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3] 프랑스의 성 이자벨이 바로 이 사람이다.[4] 흥미롭게도 예루살렘 왕국의 역대 왕조 중에는 실제로 앙주 왕조가 있다. 다만, 카를루 1세의 앙주 왕조는 정확하게는 앙주-카페 왕조로 별개의 왕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