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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성(건축)

양산 증산리 왜성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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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포왜성 주곽부

1. 개요2. 역사3. 특징4. 가치5. 현황6. 목록7. 창작물에서8.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왜성()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일본군한반도 남부에 일본식으로 축조한 들을 말한다.

2. 역사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센고쿠 시대 일본 성곽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략하기 쉬운 조선 성곽을 빠르게 점령하면서 북진했지만 각지에서 의병이 들끓게 되고 전란으로 백성들이 산성으로 숨어 버리면서 현지 보급은 물 건너가 버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상진격 마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막히면서 공세종말점에 다다른다. 거기에다가 조선의 풍토병까지 덮쳤고 결국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면서 일본군은 수세로 전환하면서 퇴각과 수성전을 치르게 된다.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의 읍성과 산성들을 주 거점으로 삼기도 했는데 조선과 일본의 축성 방식이 너무나 달라 거점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16세기경 중세 일본의 성곽은 도시가 크게 발달하지 않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거대한 석축을 갖춘 근세 성곽이 출현하기 이전이라 구조적으로도[1] 기능적으로도 말 그대로 '거점'의 역할만을 했다. 따라서 성에 들어가 농성하는 인원은 병력 뿐이었으며, 일반 주민들을 보호하는 것은 성의 기능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의 평민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거나 농성하는 방식으로 연명해야 했다고 한다.[2] 이런 잔당들을 소탕하는 작업을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수도 없이 한 일본군이 동굴에 숨은 조선 주민들을 쉽게 색출해 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의 성곽은 어폭보민(禦暴保民)[3]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주민 보호 역시 성곽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고 이러한 차이로 인해 일본군이 조선의 성곽을 활용하여 농성전을 벌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당장은 조선군과 명군의 공세를 버티되 언제든지 공세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한반도 주요 거점에다가 자기네들 축성법으로 성을 축조하여 농성했는데 이것이 왜성이다.

3. 특징

왜성은 배를 접선하기 좋은 해안가와 강안에 위치하면서도 여차하면 서로를 돕기 쉽게 서로를 조망하기 좋게 밀도 있게 배치되었다. 또한 근처의 조선식 성곽에서 성돌을 빼 와 재활용하여 왜성을 쌓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고성왜성, 죽성리 왜성, 선진리왜성, 영등포왜성, 성북왜성 등과 같은 경우는 아예 기존의 조선식 성곽에 이어붙이거나 개축하여 왜성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포로로 잡힌 조선인 중 상당수가 왜성 축성에 동원되었다.

성벽은 구루와(曲輪), 고구치(虎口), 이시가키(石垣), 노보리 이시가키(登り石垣), 우마다시(馬出)]) 등 요소로 한국의 산성들과는 달리 다양한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타지에서 조달한 자재를 썼지만 센고쿠 시대의 오랜 전란에서 얻은 축성기술과 건축기술을 동원해 빠르게 올렸다. 기장의 죽성리왜성의 건축엔 일본의 축성기술사가 직접 파견되기도 했으며 이러한 왜성들은 적을 지연시키고 고립시키기 위한 특유의 구조 등으로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주었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조명연합군의 대군을 막았다. 규모가 있는 왜성은 고텐이나 천수각 등도 있었으나 목건물은 현재는 모두 부서지고 없다.

방어력을 상당한 것 치고는 현재 대부분 보존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 임진왜란 뒤에는 조선군이 얻어 돌을 쌓아 만든 석축을 기초해 조선식 읍성으로 고쳐 쓰기도 하였으며 근현대에 도시화가 진행되며 자연스럽게 소멸되었기 때문도 있지만 왜성이 다른 성들보다 비교적 일찍 허물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일본에서 왜란 당시에 석벽 틈새에 회반죽이나 흙을 집어넣지 않고 오로지 돌만으로 쌓아올리는 메쌓기(Dry stone/空積み, 野面積み)[4]가 주류였는데 전시에 급히 쌓아올리느라 몇 달 만에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생긴 현상이다.[5]

메쌓기는 폭우가 내려도 따로 배수구를 개공할 필요 없이 돌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고, 재해나 공세에 의해 무너져도 어차피 돌만으로 쌓은 벽이기에 흩어진 자재를 다시 쌓아올리면 되는 장점이 있다. 허나 돌 틈새로 해충이나 잡식성 동물(야생동물) 등이 침범하기 쉽고, 식물들이 자라면서 이음새를 침범하거나 기반을 무너뜨리며[6], 토압이 증가해서 석축의 모양이 변형되다가 한번에 붕괴할 수 있는 단점 또한 존재하므로[7] 사람이 꾸준히 유지보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 본토의 성들만큼 공을 들여 지은 성도 아닌 데다 왜란 이후 몇몇 성을 제외하고는 방치되다시피 했으니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임진왜란 전후에 증축된 조선시대 성에서도 이러한 축성 경향이 나타난다. 비교적 정연하게 축조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성벽 기초 위에 크기가 다양한 석재를 부정연하게 쌓아올린 성벽이 임진왜란 전후로 나타났다. 이는 조선군이 다급하게 기존 성벽을 증축했기 때문이다.

왜성을 쌓은 위치도 침략군인 일본군에게 적합한 위치였기 때문에 역으로 조선군이 방어용으로 재활용하려 해도 입지가 애매한 경우가 많아 이런 경우에는 방치하거나 아예 돌을 빼서 다른 데 쓰면서 형체를 잃어버렸다. 다만 서생포왜성, 부산진성처럼 일부 적당한 성은 많이 개조하지도 않고 그대로 조선군 주둔용으로 재활용하기도 했다.[8]

왜성의 방어를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몸소 경험한 조선 정부는 왜성의 장점을 읍성에 도입하기도 했다. 남한산성경성읍성(鏡城邑城) 등 성벽에 왜성의 기울기[9]를 적용하기도 했고 기존 성곽 바깥에 2중 3중으로 성곽을 추가로 두르거나 내부에 중성(中城)을 쌓는 등 다중방어 체계를 갖추기도 하였다.[10]

재미있는 것은 수원화성과 강화성(江華城) 축성 논의에서도 왜성 성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거론되었다는 점이다. 수원화성정약용의 설계에서 동쪽으로 길게 돌출된 부분을 외성으로 구분해 동곽(東郭)이라 칭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고[11], 실제로 왜성의 기울기가 적용되었는지 불명이라고는 하나 남포루(南砲樓) 등지에 남한산성과 유사한 모습이 남아 있고, 수원화성의 형태와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추정하는 함흥읍성에도 왜성의 기울기는 물론 요코야와 같은 굴절이 있다.

4. 가치

왜성은 성곽 편년에 있어서 그 축성 연대가 확실하고 후대에 개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축성 당시 일본의 축성법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점, 일본의 중세 성곽이 근세 성곽으로 발전하는 중간기에 쌓은 성으로서 과도기적 특징[12]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 같은 시기 일본 국내에서 축조되었던 성곽이 후대에 계속 사용됨으로서 계속된 개·보수로 인해 당시의 축성법을 명확히 보존하고 있는 장소가 거의 없는 점 등에서 보존 가치가 크다.

5. 현황

일본 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자주 찾는다. 그 이유는 현재 일본에는 센고쿠 및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특징을 보존한 이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는데 우선 오랜 전란으로 사라진 경우도 많고 에도 막부(江戸幕府) 수립 후 평화가 지속되다 보니 군사 기지로서의 필요성이 떨어지자 다이묘들이 자신들이 거할 대저택으로 개조하여 원형을 잃은 경우도 많았으며 막부의 '일국일성령',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폐성령'을 통해 허물어지거나 규모가 대폭 축소된 성들도 있고 태평양 전쟁(太平洋戦争)으로 인한 공습으로 무너지거나 경제발전기에 도시개발을 위해 스스로 허물어 버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상당수가 소실되거나 변형되어 제대로 연구할 일본식 성이 극히 적어진 반면 오히려 한반도의 왜성들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군이 잠시 주둔한 것 외엔 중요하게 쓰인 적이 별로 없어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 결과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성의 건축 양식이 잘 남아 있어 일본 학자들에겐 귀한 연구 자료가 되었다.

왜성이 대한민국의 '문화재'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기존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던 왜성 문화재들은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등 일본 잔재 청산에 열심이던 문민정부(文民政府) 시대에 지방기념물로 일제히 격하시켰을 정도로 왜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은 편이다. 이 때 사적 지정을 해지한 왜성들은 다음과 같다. 울산왜성(사적 제9호), 부산일본성(사적 제35호), 마산일본성(사적 제36호), 순천왜성(사적 제49호), 사천선진리성(사적 제50호), 김해 죽도왜성(사적 제51호), 기장 죽성리왜성(사적 제52호), 창원 진해 안골왜성(사적 제53호, 웅천 안골왜성), 서생포왜성(사적 제54호), 양산 증산리 왜성(사적 제63호, 물금 증산리 왜성).

가끔 복원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국민정서를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크다.
그 때문에 전반적으로 왜성의 보존 상태는 대부분 방치에 그칠 정도로 열악했지만 21세기 들어서는 문민정부 시절처럼 전부 지워 버리자는 분위기에서는 벗어나서 기본적인 정비는 해 두는 편이다. 그러나 이것도 울산왜성, 서생포왜성, 순천왜성 등 인지도가 있는 왜성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산속에 방치되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왜성이 적지 않다. 실제로 견내량왜성의 경우는 처음부터 석성이 아닌 토성이었기 때문에 해변가에 돌덩이 몇 개가 일렬로 늘어선 수준의 처참한 상태로 방치되어 오다가 한 농부가 개인 사정상 어쩔 수 없는 사유로 2019년 2월경 해당 지역을 개간해 버리면서 멸실되어 버렸다. 남해왜성의 경우 2021년 9월경 남해군이 기본적인 조사도 없이 야영장 건설을 허가해 주면서 데지로(出城) 부분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그나마 복원을 할 경우 성곽 복원에 있어 전문가의 자문과 고증보다는 그저 관광지 개발의 목적으로 일단 복원부터 해 버리는 풍조가 여러 지자체에 퍼져 있어서 엉터리로 '개건'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도 감안해야 한다. 깔끔하게 정비된 서생포왜성의 경우 일본의 한 성곽 답사가가 정비기에 방문했다가 성돌의 열도 맞추지 않고 중장비로 성곽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자신의 블로그에 강한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반대로 위와 같이 복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실로 오묘한 시설이다.

2019년<조선일본도설(朝鮮日本圖說)>이라는 왜성 현황 지도가 발견돼 화제가 되었다. 동시에 순천왜성 전투에 나오는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이 화제가 됐다.[13]

6. 목록

목록에서 왜성 사진, 왜성 수비장은 제외했다.

자세한 내용은 왜성 (건축)을 참고하기 바란다.

진주 망진왜성과 영춘왜성, 사천 곤양왜성은 1598년 당시 불타서 없어졌고, 구례 ・ 한산 ・ 광양 ・ 목창 ・ 율포 ・ 탑포성은 일부 기록과 회화에서 확인될 뿐 실체가 확인된 적이 없기 때문에 정보가 누락되어 있으므로 왜성의 목록에서 제외했다.
목록은 나무위키에 맞게 제작되었다. 왜성은 총 31개로 나열되어 있다.[14] 나열된 목록은 대부분 정식 문화재 등록된 명칭이며[15], 민간에서 부르는 이칭은 주석으로 따로 달았다.
목록
나무위키 기준으로 나열. 이칭은 주석 처리. 멸실된 왜성은 빗금 처리
번호 명칭 시기 축성 소재지 관리자 병력 비고
1 울산왜성[16]
蔚山倭城
Ulsan
1597년
(정유재란)
입지 선정 및 설계
가토 기요마사
공사
아사노 요시나가
모리 히데모토
감찰관 및 감독 (무사)
오타 가즈요시
부장
시시도 모토쓰구
(요시나가와 히데모토의 부장)
가토 기요베에
(기요마사의 부장)
가토 야스마사
오코치 히데모토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73, 100 일원
울산광역시
중구
16000명 7호
2 서생포왜성[17]
西生浦倭城
Seosaeng
1593년
(임진왜란)
가토 기요마사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229, 273, 504,
505, 508-2, 560-2, 616-1,
631, 711, 714-1 ~ 718, 산51
울주군 100000명 8호
3 기장 죽성리왜성[18]
機張竹城里倭城
Jukseong
1593년
(임진왜란)
구로다 나가마사

구로다 요시타카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589 ~ 611,
631 ~ 632, 643 ~ 644-2,
655-1, 671, 산31
기장군 33000명 48호
4 임랑포왜성[19]
林浪浦倭城
Imnang
1593년
(임진왜란)
모리 가쓰노부
시마즈 도요히사
이토 스케타카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키즈키 다네나가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산48
[20],
임랑리 효암마을[21]
기장군 발굴조사 : 2001년(중앙문화재연구원)
5 동래읍성지[22]
東萊邑城址
Dongnae
1593년
(임진왜란)
깃카와 히로이에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30
안락동 380, 962
동래구 5호
*멸실위기
6 부산포왜성[23]
釜山日本城
Busan
1598년
(정유재란)
모리 데루모토
고니시 유키나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산 81-28
좌천동 737-1, 745-1, 749-1,
산9-25 ~ 9-28
부산광역시
동구
사적 35호 (해지)
7 부산진성[24]
釜山鎭城
Busanjin
1593년
(임진왜란)
모리 데루모토
모리 히데모토
아사노 나가마사
(정유재란 때
수축 및 증축)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590-4 ~ 590-5
부산광역시
동구
18700명 7호
8 박문구왜성[]중앙동왜성(中央洞倭城), 출기단성(出崎端城)]
迫門口倭城
Jungang
1593년 7월
(임진왜란)
모리 데루모토
고니시 유키나가
부하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일대 추정
Sengoku Forum
9 동삼동왜성[]영도왜성(影島倭城), 추목도왜성(椎木島倭城), 추목도단성(椎木島丹城)]
東三洞倭城
Dongsam
1593년
(임진왜란)
모리 데루모토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188 ・ 1-18 일대 추정
10 구포왜성[27]
龜浦倭城
Gupo
1593년
(임진왜란)
1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책임)
쓰쿠시 히로카도
다치바나 무네시게
다치바나 나오쓰구
모리 히데카네
2차
모리 히데모토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1동 산89-1,
산92 ~ 93, 산 97-1
부산광역시
북구
5000명 6호
11 양산 가산리 호포왜성지[]호포왜성(狐浦倭城), 호포성지(狐浦城址)]
梁山架山里弧浦倭城址
[29]
Hopo
1593년
(임진왜란)
일본군 경남 양산시
동면 가산리 1118-1, 1120-6

(양산천 하류 경부선 아래)
1026-1, 1027-26, 1028-11
동면 가산리
산52-4, 산57, 1045-1
국유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양산시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12 양산 증산리 왜성[30]
梁山甑山里倭城
Yangsan
1597년
(정유재란)
구로다 나가마사
다테 마사무네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경남 양산시
물금읍 증산리 672-1,
691 ~ 693, 산15
[31]
양산시 276호
13 김해 죽도왜성[32]
金海竹島倭城
Jukdo
1593년
(임진왜란)
나베시마 나오시게
나베시마 가쓰시게
부자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787 일대
강서구 47호
14 김해 농소왜성지[33]
金海農所倭城址
Nongso
1593년
(임진왜란)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경남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 산22-5 일대
농소마을회관 5000명
15 마사왜성지[34]
馬沙倭城址
Masa
1593년
(임진왜란)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경남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 산61-2 일대
김해시 5000명
16 눌차왜성[35]
訥次倭城
Nulcha
1592년
(임진왜란)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동 635, 산84-5,
산84-7 일대
강서구
17 가덕도 왜성지성[36]
加德島倭城支城
Gadeok
1593년
(임진왜란)
다카하시 모토타네
쓰쿠시 히로카도
다치바나 무네시게
모리 히데카네
다치바나 나오쓰구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 산43
강서구
18 가덕도 성북왜성[37]
加德島城北倭城
Seongbuk
1593년
(임진왜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 산43, 산52 ~ 53 일대
강서구
19 창원 안골왜성[38]
昌原安骨倭城
Angol
1593년
(임진왜란)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129, 152, 154,
289, 814, 산27, 산30,
산30-3, 산32-4
창원시 275호
20 창원 웅천왜성[39]
昌原熊川倭城
Ungcheon
1593년
(임진왜란)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우에스기 가게카쓰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451, 산196, 산211-1
창원시 5000명 79호
21 창원 자마산성[40]
昌原子馬山城
Jama
1593년
(임진왜란)
소 요시토시 경남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산15
창원시
22 창원 명동왜성[41]
昌原明洞倭城
Myeongdong
1593년
(임진왜란)
마쓰라 시게노부
소 요시토시
경남 창원시 진해구
명동 363 ~ 364, 산13, 산103-2
[42]
창원시
23 영등왜성지[43]
永登倭城址
Yeongdeungpo
1592년
(임진왜란)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
경남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136-1,
산29-2, 산30
거제시
24 송진포왜성[44]
松眞浦倭城
Songjinpo
1593년
(임진왜란)
후쿠시마 마사노리
도다 가쓰타카
조소카베 모토치카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산6-3
거제시 경상남도 비지정문화재
25 거제 장문포 왜성[45]
巨濟長門浦倭城
Jangmunpo
1594년 11월
(임진왜란)
후쿠시마 마사노리
하치스카 이에마사
이코마 치카마사
도다 가쓰타카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130-2 ~ 130-3
거제시 273호
26 견내량왜성[]왜성동왜성(倭城洞倭城), 광리왜성(廣里倭城)]
見乃梁倭城
Gyeonnaeryang
1597년
(정유재란)
소 요시토시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라시마 세토구치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269
27 마산일본성[47]
馬山日本城
Masan
1597년
(정유재란)
다테 마사무네
나베시마 나오시게
나베시마 가쓰시게
부자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531-2
창원시 12000명 사적 36호 (해지)
28 고성읍성[48]
固城邑城
Goseong
1597년
(정유재란)
깃카와 히로이에
가쓰라 모토쓰나[49]
경남 고성군
고성읍 수남리 35-11, 62-3,
63-2, 63-4 ~ 63-5,
88, 90-15, 90-22
[50]
고성군 7000명 89호
29 사천선진리성[51]
泗川船津里城
Sacheon Seonjin-ri
1597년
(정유재란)
모리 가쓰노부
시마즈 요시히로
이케다 가게카쓰
나가카와 히데시게
다치바나 나오쓰구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714, 770 ~ 771,
783-1, 852 ~ 854, 871-1,
872-1, 872-3, 868-1, 1082
사천시 10000명 274호
지정사항 : 고적 81호(1936년 5월), 사적 50호(1963년 1월 21일 지정~1997년 1월 1일 해지)
30 남해 선소왜성[52]
南海船所倭城
Namhae
1597년
(정유재란)
와키자카 야스하루
소 요시토시
경남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26-1, 159,
163-1, 164 ~ 166,
169, 240
남해군 1000명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4
(문화유적분포지도-남해군-)
31 순천왜성[53]
順天倭城
Suncheon
1597년
(정유재란)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도도 다카토라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75, 78-1, 159-1,
524, 598, 601,
609-1, 623, 625 ~ 626,
630-4, 630-9, 763,
산1 ~ 2, 산9-3, 산10-3
순천시 13700명 171호

7. 창작물에서

임진왜란을 구현한 문명 5/시나리오 사무라이의 한국 침략에서 일본군사무라이의 특수 시설로 등장한다. 일본어로 'わじょう' (Wajo)이다. 100% 방어 보너스, 주변 적에 2 데미지 효과로, 일반 게임에서 위대한 장군을 소모해서 만드는 성채와 능력이 동일하다.

8. 같이 보기


[1] 일본의 성은 한국처럼 울타리를 두르는 개념이 아니라 '곡륜([ruby(曲輪, ruby=くるわ)])'이라는 공간을 확보하여 아군과 적군을 분리시키는 방식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석축을 갖춘 소수의 예외를 빼면 일본의 성곽은 대개 토루(土壘)를 다져 많으면 수백 개의 "곡륜"을 만들었는데, 곡륜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각 곡륜의 공간이 좁아지게 된다. 이것은 주민 보호가 아니라 병력 주둔을 주 목적으로 한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일어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는 이런 중세 성곽이 근세 성곽으로 발전하는 과도기에 걸쳐 있었다.[2] 「城と隠物の戦国誌」、藤木久志[3] 사나움('폭'력,전쟁)을 방'어'하고 백성('민')을 '보'호한다[4]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특이하게도 근대로 접어들 때까지 메쌓기로 석축을 쌓아올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강화전성 등 극히 일부의 예외를 빼고는 여장을 벽돌로 올리면서 석회를 바르면 발랐지, 성벽 자체에 석회를 채워넣는 경우가 없었다.[5]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도 첫 장면부터 왜성이 들어서 있는 부산포를 보여주는데, 분명 전쟁 초반인 1592년인데도 벌써 천수각까지 거의 다 쌓아올렸다.[6] 식생이 침범함은 메쌓기의 고질적인 문제라 한국의 성곽들도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식 성은 성돌 사이의 틈을 잔돌로 꼼꼼하게 메꾸어 붕괴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반면, 왜성은 대개 틈을 촘촘하게 메꾸지 않아 식생이 침투하기가 매우 쉽다.[7] 이로 인해 석축의 중간 부분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잉(孕) 또는 '배부름 현상'이라고 한다. 석축 붕괴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로, 일본에서도 성곽 전문가들 사이에서 골칫거리로 통한다.[8] 안골포진성처럼 일부만 활용한 경우도 있으며 죽성리왜성과 영등포왜성의 경우는 원래 있던 두모포진과 구영등성을 왜성의 구루와로 만들어 버렸으므로 임진왜란 이후에도 계속 성을 재활용하다가 인조 연간에 두모포진을 현재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으로, 영등포진을 거제시 둔덕면 학산리로 옮기면서 버려지게 되었다. 조선후기 동래읍성의 경우 동래왜성의 지형지물을 차용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확인된 바 없다.[9] 그냥 사선으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으나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경우 규형(圭形)이라고 부르며 특히 위로 갈수록 점점 기울기가 가팔라지는 것을 요곡형(凹曲形), 기울기가 가파르다가 완만해진 뒤 다시 가팔라지는 것을 궁형(弓形)이라고 한다.[10] 진주성, 영변읍성, 안주읍성, 금정산성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11] 동곽문(東郭門)이라는 시설이 등장한다.[12] 노보리이시가키, 조선의 치성(雉城) 차용, 아직 정제되지 않은 산목쌓기(算木積み) 등[13] [전라도의 혼] 순천왜성(順天倭城) 전투와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 (上)[14] Untitled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13년 12월 발행)[15] 가덕도왜성 지성의 경우 확실치 않다. 목록에는 올라가 있는데 정작 해당 주소에 검색되는 문화재가 없기 때문이다.[16] 학성(鶴城), 신학성(神鶴城), 도산성(島山城), 증성(甑城), 요산대(樂山臺)[17] 봉화성(烽火城)[18] 기장왜성(機張倭城), 죽성리왜성(竹城里倭城), 두모포왜성(豆毛浦倭城)[19] 세이구완성(せいぐわん城)[20]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의 발견」에서는 임랑리 산 51로 소개하고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정보이다.[21] 본래 산록(山麓)의 외성 흔적이 있었으나, 고리원자력발전단지의 확장에 따라 효암리의 주민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효암공원에 이시가키의 끝머리 일부분이 남아 외성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으며, 장안어린이집과 동해남부선 철도 사이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22] 동래왜성(東萊倭城)[23] 부산포왜성(釜山浦倭城), 증산왜성(甑山倭城), 모성(母城), 범천증산성(凡川甑山城), 소조천성(小早川城)[24] 자성대왜성(子城臺倭城), 자성(子城),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 소서성(小西城), 환산성(丸山城), 만공대(萬公臺)[] [] [27] 감동포성(甘同浦城), 구포의성(龜浦義城), 카도카이성(カードカイ城)[] [29] 호포왜성의 한자명칭은 이견이 있다. 일본과 중국은 외로울 고 (孤)를 사용하고 한국과 서양은 활 호 (弧)를 사용한다. 원래는 호포의 호가 여우 호 (狐) 였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이 호수 호 (湖) 로 개칭했다. 하지만 호포이름의 호수 호는 지역에만 적용했고 왜성에는 호수 호 가 아니라 활 호 (弧)를 사용했다. (밑에 참고. 증산리왜성은 인근에 호포왜성(弧浦倭城)과 연계하여 낙동강 방위선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여우 호는 일제강점기 이후로 사용하지 않는다.[30] 물금 증산리왜성(勿禁甑山里倭城), 증산왜성(甑山倭城), 양산왜성(梁山倭城), 물금왜성(勿禁倭城)[31] 1910년대 대한제국이 있을 무렵 일본 제국이 있던 시절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관리했고 조선총독부에서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로 쇼와(昭和) 14년 고적 대장 지정을 했다. 증산리왜성은 인근에 호포왜성과 연계하여 낙동강 방위선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소재지는 양산시 물금읍 증산에 있고 성곽의 흔적은 잘 남아있다. 현재 지속적인 발굴이 필요하다.[32] 김해왜성(金海倭城), 가락성(駕洛城), 죽도왜성(竹島倭城), 죽림왜성(竹林倭城)[33] 신답왜성(神畓倭城), 농소왜성(農所倭城), 죽도성지성(竹島城支城), 덕진교성(德津橋城)[34] 마사왜성(馬沙倭城), 죽도성지성(竹島城支城)[35] 가덕왜성(加德倭城)[36] 성북왜성(城北倭城). 어찌 된 일인지 위키피디아에는 가덕도왜성지성과 가덕도성북왜성이 따로 등재되어 있는데, 위치는 같으나 위키피디아의 표에 기재된 축성 장수의 이름이 다르다. 일단 기재하나, 오류가 발견될 시 수정될 수 있다.[37] 가덕지성(加德支城), 성북왜성(城北倭城), 갈마봉산성(渴馬峰山城)[38] 안골포왜성(安骨浦倭城), 안골왜성(安骨倭城), 웅천안골왜성(熊川安骨倭城), 일본제1수군기지(日本第一水軍基地)[39] 웅천왜성(熊川倭城), 남산왜성(南山倭城), 일본제2수군기지(日本第二水軍基地)[40] 자마왜성(子馬倭城), 자마산성(子馬山城), 웅천성지성(熊川城支城)[41] 명동왜성(明洞倭城), 웅천성지성(熊川城支城)[42] 본성은 명동마을 북측의 산자락에 있고, 선소 터는 명동방파제 뒷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3] 당도성(唐島城), 영등포왜성(永登浦倭城), 영등왜성(永登倭城), 구영등성(舊永登城)[44] 지세포왜성(知世浦倭城), 증성(甑城), 농암산왜성(籠岩山倭城)[45] 장목왜성(長木倭城), 군항포왜성(軍港浦倭城)[] [47] 마산왜성(馬山倭城), 창원왜성(昌原倭城), 합포왜성(合浦倭城), 용마산성(龍馬山城))[48] 고성왜성(固城倭城), 수남리왜성(水南里倭城)[49] 모토쓰나는 고성왜성을 축성하고 울산왜성을 축성했다고 일본어 위키 모리 데루모토 경전 529쪽 이라고 나와있으나 조선시대의 왜성을 축성한 기록에는 울산왜성에서 가쓰라 모토쓰나가 축성을 한것이 정확하지 않다.[50] 고성왜성은 조선전기의 고성읍성에 붙여서 쌓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주소는 조선식 읍성을 제외하고 현재 육안으로 확인가능한 왜성의 흔적만을 기재한다.[51] 사천왜성(泗川倭城), 선진리왜성(船津里倭城), 선진왜성(船津倭城)[52] 남해왜성(南海倭城), 선소왜성(船所倭城)[53] 왜교성(倭橋城), 예교성(曳橋城), 승주신성리성(昇州新城里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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