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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3:03:05

어보

1. 개요2. 한국사
2.1. 고려2.2. 조선 ~ 대한제국2.3. 대한민국
3. 관련 항목

1. 개요

御寶

어보(御寶)는 대보(大寶)라고도 하는데 군주 일가의 의례용 도장으로 사용하진 않았고 단지 근처에 가지고만 있었다. 즉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이다. 옥새와 외형은 같지만, 국새가 실제 군주의 결재용으로 사용된 반면 어보는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어보에는 보통 존호나 시호를 새겼고, 후대 왕들이 존호와 시호 바꾸거나 더할 때마다 어보를 새로 제작하였다. 왕실이 사용하는 물건이기에 금이나 은으로 만들었는데 금으로 만들었으면 금보(金寶)라고 한다.

원 조선시대엔 종묘의 위패 곁에 모셔 보관했지만, 현 한국은 어보 대부분을 경복궁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 관리한다.

가례나 길례 등 중요한 궁중 의식에서 사용되는 도장인 만큼 보관하는 방법이 정말 복잡하다. 어보 세트는 내함(보통), 외함(보록), 이것들을 싸는 보자기와 그걸 묶는 끈으로 구성되어 6개 이상이 한 세트를 이룬다.

2. 한국사

2.1. 고려

고려사 여복지에 따르면 고려는 타국이 보내준 국인 외에도 '서조보(書詔寶)'라는 어보가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조보는 조령(詔)[1]을 내릴 때(書) 쓰는 보(寶)로 보인다.

12세기 초 고려 예종은 어머니 명의태후를 태후로 올릴 때 금보(金寶)를 바쳤다. 공민왕은 어머니 명덕태후에게 금보(金寶)를 올렸다.

조선왕조실록엔 감록국사 이성계수창궁에서 즉위할 때 신하들이 국보(國寶)를 바쳤다고 한다.

2.2. 조선 ~ 대한제국

파일:external/www.namdonews.com/05g86168.jpg

헷갈리기 쉬운데 국새(國璽)와 어보(御寶)는 다르다. 국새는 국정 행위를 할 때 있어서 국왕의 권능을 보여주는 도장으로 조선시대에는 명이나 청에서 하사받은 조선왕보(朝鮮王寶)를 비롯하여 다양한 국새를 제작했다. 일본과의 외교 실무에는 위정이덕(爲政以德)을 사용했고, 어명 반포나 왕세자 책봉 등 실무에는 유서지보(諭書之寶)ㆍ시명지보(施命之寶) 등을, 일상적인 결제에는 계자인(啓字印) 등 사용하는 등 다양한 국새를 사용했다.
조선왕보
파일:조선왕보.svg
조선의 왕보.

고종 13년(1876) 11월 4일에 교태전에 화재가 일어나 보인(寶印)들을 분실한 사건이 발생하여 새로이 만들게 했는데, 이때 제작과정을 설명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라는 책을 남겼다. 당시 제작한 보인은 총 11과로 목록은 다음과 같다.

반면 어보는 세자, 왕비 등을 책봉하거나, 국왕ㆍ왕후ㆍ대비 등에게 묘호, 시호, 존호를 올리면서 제작하는 도장이다. 평소에는 도장의 주인이 보관하다가 주인인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종묘, 그 외에는 해당 인물의 사당에서 보관함이 원칙이다. 왕비가 폐비가 되면 책봉 당시의 교명(敎命)과 어보를 함께 파괴한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국새가 아니라 이 어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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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의 어보. 6.25 전쟁미군이 훔쳐갔다가 2017년 7월 한미 공조수사로 반환받았다.
조선왕조의 어보들은 이왕가의 보호를 받아 광복 이후에도 전해졌지만 6.25 전쟁 당시 종묘에 진주했던 미군이 가져가는 등 사건으로 일부 행방이 묘연하여 현재 총 37과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예컨대 세조의 어보 등은 우리나라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

2.3. 대한민국

1555년, 1698년, 1705년, 1909년 각각 작성된 ‘종묘등록’을 종합하면 어보의 과수는 총 375(顆[3])이지만,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어보는 총 332과이다.

나머지 43과는 소재불명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종묘에 침입해 훔쳐갔을 가능성이 높다. 국내에 있는 어보 중 몇 과는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를 함께하며 해외로 반출되기도, 반환되기도 하였다.[4][5]

남아있는 어보 332과 중에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중인 어보는 323과이고, 나머지는 국립중앙박물관(5과), 국립춘천박물관(2과), 고려대학교 박물관(2과)에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해 막바지에 이르렀으나 덕종어보와 예종어보가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6][7]가 분실 뒤 재제작한 모조로 밝혀져 원점 재검토와 전수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8] 조선일보는 "일제 때에 만든 어보를 세계유산으로 신청하겠다는 문화재청"이라고 기사를 실어서 비난했지만# 한겨레는 "덕종어보는 짝퉁이 아닌 비운의 왕실유산"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발언을 빌어 "덕종 어보는 종묘 어보의 수난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도난당했고, 해방 뒤 전쟁으로 문화재관리가 안 될 때 재제작품마저도 유출된 것이니 찾은 건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고 반박하였다. #

2017년 10월 31일,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목록은 조선왕실의 어보 참조.

3. 관련 항목




[1] 천자의 명령은 조(詔), 칙(勅), 선(宣)이라고 한다.[2] 위정이덕(爲政以德)[3] 도장을 세는 단위로, 둥글고 작을 물건을 셀 때 쓰인다. 사리를 셀 때 또한 이 단위를 쓴다.[4] 해외로 반출되었다가 반환된 어보로는 고종의 '수강태황제보', 현종의 '왕세자직인', 덕종의 '온문의경왕지보'등이 있다.[5] 특히 1408년에 제작된 태조 금보가 없어진 것이 큰 손실이다. 태조 금보는 조선 초기에 제작된 데다 용 모양으로 만들어져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용 어보는 황제의 어보이다. 조선에서는 태조,정종,태종의 어보까지 용으로 만들었지만 이 중 최근까지 남아있던 것은 태조 어보로 일제강점기까지 종묘에 잘 보관되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6] 1881~1945. 이 자는 덕종어보와 예종어보가 분실되기 2개월 전인 2월 11일 일본의 기원절을 맞아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는데, 어보가 도난당한 4월 11일 당일에는 날이 저물도록 이왕직 차관 시노다 지사쿠(條田治策 · 1872~1946)와 골프를 즐긴 사실이 알려져 언론의 집중포화를 당했다. 웃긴 건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를 지적하자 "종묘의 어보는 당장 쓰는 것도 아니고 승하하신 뒤에 만들어놓은, 돈으로 쳐도 몇 푼 안되는 것인데 그만한 것을 잃었다고 좋아하는 꼴푸(골프) 놀이를 못한단 말이요? 아니 그럼 집에서 술을 먹거나 기집(계집)을 데리고 노는 것도 못하겠구려!”라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15일자 2면 - 李恒九氏(이항구씨)의暴言(폭언) 이무슨무엄한말이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인간.[7] 정작 순종(당시는 창덕궁 이왕)은 어보를 도둑맞았다는 소식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사람들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어보를 찾았느냐?"부터 물었다고 한다.[8] 이는 잘못된 정보로 1920년대에 어보가 도난 당하자 이왕직에서 조선미술품제작소에 명하여 새로 재제작하고 위안제를 지낸 뒤에 종묘에 안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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