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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스토니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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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에스토니아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중세2.2. 근세2.3. 근대2.4. 20세기2.5. 21세기
3. 대사관4. 관련 문서

1. 개요

독일은 1921년 7월 9일,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인정했고 에스토니아가 다시 독립한 1991년 8월 28일 외교 관계를 본격적으로 수립하였다. 한편으로 독일은 에스토니아를 EUNATO에 정회원국으로 가입시키는 것을 지원하였다. 양국 국민들은 반러 감정을 공유하는 상황이다.

2. 역사적 관계

오늘날 기준으로는 독일과 에스토니아의 관계가 매우 좋은 편이지만 과거 기준으로는 절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중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에스토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미명 하에 에스토니아를 침공하여 에스토니아인들을 농노로 만들고 착취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과 우호관계가 다져진 오늘날 기준으로도 당시의 상흔이 남아있는데, 오늘날 에스토니아인들이 유럽 기준으로도 유달리 무신론자 인구가 많은 배경에는 리보니아 십자군과 함께 들어온 독일인 주교들과 지주들이 에스토니아인들을 차별했던 역사가 있었다.[1]

2.1. 중세

1200년 라트비아에 상륙한 독일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1208년부터 1227년까지 에스토니아의 여러 부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레마 섬을 중심으로 한 바이킹 후손들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검우기사단은 덴마크인들과 힘을 합치고 나서야 1261년에야 에스토니아 정복을 완료할 수 있었다. 이후 에스토니아 일대는 북부는 덴마크의 에스토니아 공국이 남부에는 검우 기사단 이렇게 반땅된다. 에스토니아 북부 역시 명목상 덴마크령 에스토니아 공국이었지만 공국은 실질적으로 독일인들의 나라나 다름 없었는데 공국 내 봉신 중 80%는 독일인, 18%만 덴마크인이고 에스토니아계는 2%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나마 이것도 독일 기사단 영토보다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는데 레발의 주교들은 종종 이웃 리보니아에는 현지인들이 봉신이 되는 경우가 없는데 에스토니아 공국에서는 덴마크 왕이 에스토니아인을 봉신으로 임명했다면서 십자군의 권위가 무너졌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았다. 덴마크 왕국은 결국 1346년 영유권을 튜튼 기사단에게 매각하였고, 이후 튜튼 기사단은 독일계 봉신들을 흡수하고 에스토니아인 농민 봉기를 진압한 이후 이 지역을 영토에 편입시켰다.

에스토니아의 이교도 정복이 완료된 후에는 검의 형제 기사단과 에스토니아 공국 사이에 영토 분쟁으로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레반트 지역의 십자군이 투르코폴들을 보조부대로 이용했듯이 리보니아 기사단도 현지 추디-에스티인[2]들을 화살받이 겸 잡역수로 징집하여 굴렸다. 1237년 튜튼기사단에 흡수 합병된 리보니아 기사단은 이후 러시아로 진출하려던 시도도 노브고로드 공국을 침공하지만 1242년 페이푸스 호수 전투에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이끄는 노브고로드 공국 군대에게 패배하였다. 당시 전투에서 독일 기사들의 인명 피해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패주하는 에스토니아인 병사들을 노브고로드 공국 군대가 추격하면서 수많은 에스토니아인 보조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페이푸스 호 전투 이외에도 리보니아 기사단이 벌인 여러 전쟁 과정에서 상당수의 에스토니아인(중세 당시에는 추디-에스티 라고 불렸다.) 징집병들이 화살받이로 끌려나가 목숨을 잃었다.

2.2. 근세

에스토니아를 지배하는 나라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스웨덴 등등 매번 바뀌었지만, "독일인 지주와 주교 - 독일인 상공업자 - 에스토니아인 농노"라는 사회 구조는 쉽게 개혁되지 못했다. 당시 에스토니아의 탈린타르투한자동맹에 소속된 도시로 독일인 상인들의 교역이 활발하였으며, 에스토니아를 지배하는 국가들 입장에서 함부로 독일인들을 탄압하고 에스토니아인 농민들 편을 들었다가는 세입원을 손실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근세 마르틴 루터의 영향으로 발트해의 독일인들도 상당수가 루터교회로 개종하였고, 기독교에 별 관심이 없었던 에스토니아인들도 독일인 성직자들이 가톨릭 사제에서 개신교 사제로 바뀌는 바람에 가톨릭에서 루터교회로 개종되었다.

중세 이래 에스토니아로 온 새로 이주해온 독일인들은 대다수가 남성으로 에스토니아 현지 여성들과 결혼하였고 이 외에도 에스토니아인 농노가 군공을 세우거나 고등교육을 받으면 에스토니아어리보니아어를 잊어버리고 독일어를 사용하면서 독일인들과 동화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반면 에스토니아인 중 족보에 독일인이나 덴마크인이 끼어있는 경우는 드문데[3] 십자군 전쟁이 완료된 이후 근세 에스토니아 사회에서 독일인과 에스토니아인은 민족 구분이라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독일어를 아는 높은 계급, 에스토니아인은 독일어를 모르는 낮은 계급 하층민이라는 식의 계급 구분의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2.3. 근대

대북방전쟁 이후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제국 영토가 되었으나, 러시아 제국 역시 스웨덴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등과 마찬가지로 에스토니아 내 독일인 지주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다만 19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에서 농노가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러시아에 앞서 에스토니아 지역의 농노들을 해방시켰고, 과거 2등시민으로 차별받았던 에스토니아인들의 교육 기회가 확충되었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독일인들의 기득권을 점차 제한하기 시작하였고 1885년부로 에스토니아 지방의 관료들은 독일계 러시아인 대신에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 귀족들로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한편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에스토니아인들은 에스토니아 내 발트 독일인들과 경쟁하면서 이웃나라 핀란드의 도움을 받아 에스토니아 민족주의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발트 독일인들은 러시아 상류사회에 입지를 다져서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등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독일이나 덴마크와의 교류도 지속하였다. 발트 독일인들을 통해 근대 프로이센과 덴마크의 근대 문물들이 바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일대로 직수입되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와 함께 러시아 제국 내에서 가장 서구화된 지역이 되었다. 근대 당시 에스토니아의 독일인들은 프로이센을 모방하여 에스토니아에 여러가지 공장들을 세웠다.[4]

2.4. 20세기

1차대전 이후 독립을 쟁취한 에스토니아는 이후 1940년 소련에 강점당해 독립을 상실했던 역사가 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1차대전 당시 물자부족으로 고통받던 러시아 제국에서 1917년 2월부로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2월 혁명으로 집권한 케렌스키 내각이 종전을 하지 않고 전쟁을 끌자 같은 해 10월 볼셰비키가 재차 혁명을 일으키고 독일 제국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발트해 지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 독일은 에스토니아까지 점령하고 괴뢰국 발트 연합 공국을 세웠으나, 프랑스와의 서부전선에서 밀린 것을 계기로 결국 1차대전에서 패배하였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에스토니아는 전간기 독립국이 되었었다. 그러나 1940년 소련이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을 반강제로 병합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현대에는 심한 반러 감정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다. 2차대전 종전 과정에서 에스토니아에 거주하던 독일인 인구가 모조리 추방당하거나 학살당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원래 에스토니아인들과 사이가 나빴던[5] 독일인 인구가 전멸하였다. 독일인들이 빠져나가고 빈 자리는 소련 각지에서 이주해온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등등이 메꿨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에스토니아인들은 과거 독일인 관련한 악감정을 잊어버리고 러시아인들에 대한 악감정이 커졌다.

여담으로 에스토니아는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와 다르게 유대인 인구가 적은 지역이었고,[6] 나치 독일홀로코스트로 인한 피해도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7] 하지만 그렇다고 "에스토니아인들이 나치에 우호적이다."라는 식으로 일반화는 곤란한데, 에스토니아에서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 끼인 동족 상잔을 다룬 1944라는 영화가 크게 흥행한 사례도 있다. 외교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것인데, 에스토니아와 독일 사이의 오랜 역사를 모르고서 현대 피상적으로 단순하게 "오늘날 일부 에스토니아인 노인들이 나치 독일군 편에서 소련과 싸운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같은 단편적인 사실만 알고 있으면 독일-에스토니아 관계나 아니면 러시아-에스토니아 관계에 대해, 에스토니아인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실소할만한 오해나 헛소리를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1991년 두 번째 독립 이후 러시아와의 갈등에서 독일이 지속적으로 자국의 편을 들어주기에 관계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다.

2.5. 21세기

신냉전이 격화하는 가운데 양국간 우호 관계가 급속히 증진되고 있다. 독립 이후 에스토니아에서 영어, 독일어 교육 비중을 늘리면서 상당수의 에스토니아인들이 독일인들과 영어 혹은 독일어로 의사 소통이 가능한 상황이다.

에스토니아가 독일의 도움에 힘입어 2004년부로 유럽연합에 가입한 이래 2차대전 이후 에스토니아에서 독일로 추방당했던 독일인들이나 그 후손들이 오늘날 종종 에스토니아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영지나 도시를 방문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3. 대사관

에스토니아는 베를린에 대사관을 두고 있고 또 뮌헨, 함부르크, 뒤셀도르프 등 5곳에 명예 영사관이 마련되어 있다. 독일은 탈린에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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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덴마크 영토나 독일 영토 할 것 없이 독일계들이 에스토니아 공국 사회의 중상류층 자리를 독점했으며 에스토니아인들은 독일어를 배워서 독일화하지 않는 이상 사회 하류층 대우를 받으며 심각한 차별을 받았다.[2] 발트 핀어를 쓰는 에스토니아인들과 이조라인[3] 물론 중세에는 지주와 농노 여성 사이의 혼외 성관계가 흔하긴 했으므로 독일이나 덴마크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이 없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고...[4] 당시의 영향은 소련 시절로도 이어졌는데 소련의 구성공화국 중 1인당 GNI가 가장 높았던 지역이 바로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리투아니아였다. 특히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경우 독일인들이 쫓겨난 이후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들이 독일인들이 세운 산업시설들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5] 1918년 에스토니아가 독립했을 당시 에스토니아의 농지 58%가 전체 인구의 10%도 되지 않는 독일인들의 소유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스토니아인과 독일인 사이가 좋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6] 1934년 기준 에스토니아에는 4,381명의 유대인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비교하자면 1939년 기준 리투아니아에는 263,000여 명의 유대인 인구가 거주하던 상황이었다.[7] 유대인 인구 90~91%가 사망한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와 다르게 에스토니아의 유대인들의 경우 다행히도 나치 독일의 침공 전 대다수가 소련으로 피신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