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000>오툼바 전투 Batalla de Otumba Battle of Otumba | ||
시기 | 서기 1520년 7월 7일 | |
장소 | 아즈텍 제국 오툼바 평원 | |
교전국 | 아즈텍 제국 | 에스파냐 왕국 |
지휘관 | 시우아코아틀† | 에르난 코르테스 |
병력 | 1만명~2만명 | 500명 |
피해 | 불명 | 사상자 75명 |
결과 | 에스파냐의 대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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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툼바 전투는 슬픔의 밤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에르난 코르테스의 소수 원정군이 원주민 동맹국인 틀락스칼라로 후퇴하던 도중, 1520년 7월 7일, 테노치티틀란과 틀락스칼라의 중간지대인 오툼바 평원에서 수십배가 넘는 아즈텍 대군을 맞아 기적적으로 승리한 사건이다.2. 틀락스칼라로의 후퇴를 계획하다
테노치티틀란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소수의 스페인군 생존자들은 후퇴하기 가장 용이한 도시인 타쿠바[1]로 모였다. 하지만 호수 위의 대도시 테노치티틀란은 다수의 운하와 다리로 타쿠바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인들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에 가득찬 아즈텍 전사들은 연결된 다리를 건너 에르난 코르테스의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이때 코르테스는 어느 정도 사령관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무사히 후퇴한 나머지 부대를 서둘러 타쿠바 시의 육지 쪽으로 옮겼고, 자신은 서너 명의 기병과 20여 명의 스페인 보병과 함께, 다리에서 건너오고 있는 수많은 아즈텍 전사들을 좁은 다리폭을 이용해 방어했다(타쿠바 전투). 코르테스와 소수의 부하들이 테노치티틀란과 타쿠바를 연결하는 다리를 총력을 다해 방어하는 사이, 나머지 원정군의 생존자들은 대부분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데 성공했고, 코르테스 자신은 아즈텍 전사들의 맹렬한 공격을 저지하면서 수많은 타박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부지한 채 타쿠바의 육지 쪽으로 무사히 건너갈 수 있었다.
당시 코르테스의 기록에 의하면 자신의 방어로 인해 원정군 생존자들 중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타쿠바 쪽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고, 말 한 필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의 영웅적인 방어로 목숨을 부지한 원정군의 생존자들은 타쿠바 시의 광장에 모여들었지만, 테노치티틀란을 빠져나오면서 생긴 급박함과 두려움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었다. 이에 코르테스는 원정군을 재정비하고, 혹시라도 다시 건너올 아즈텍 전사들의 재공격이 있을 것을 대비해 타쿠바를 빠져나가기로 계획했다.
코르테스는 먼저 선봉대를 보내 혹시라도 있을 적들의 매복에 대비하고자 했으나, 그들마저 공황상태에 빠져서 길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코르테스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갈팡질팡하는 선봉대를 후방부대로 빼낸 뒤, 자기가 직접 선두지휘하여 길을 나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되게 원정군의 일원으로서 아즈텍 정복에 참여한 역사가 베르날 디아스 델카스티요(Bernal Diaz del Castillo)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코르테스를 포함한 스페인군 전체가 허둥댔고, 틀락스칼라 출신 원주민들이 일단은 자기네 국가로 돌아가서 재정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하자 코르테스가 이에 따랐다고 한다. 정황상 후자의 기록이 맞을 것이다.
3. 고난의 후퇴 시작, 그리고 부대 정비
살아남은 원정군의 생존자들은 고난과도 같은 행군을 시작했다.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과 틀락스칼라와의 거리는 150마일(약 240km)이나 떨어져 있었으며, 곳곳에는 아즈텍 제국의 동맹 도시와 원주민 국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곳을 갖은 전투와 부상으로 지친 코르테스의 원정군이 무사히 뚫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코르테스는 최대한 아즈텍 군대에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이 야영했던 요새에 일부러 불을 활짝 피운 뒤 어둠 속에서 퇴각하는 방식을 썼다. 하지만 이 방식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보초를 섰던 아즈텍 군대에 의해 발각됐고, 다시 일련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코르테스의 원정군은 일단 쫓아오는 소수의 아즈텍 군대를 처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즈텍인들은 더 병력을 모으기 위해 전사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코르테스는 재빨리 부대를 한 곳에 모이게 한 다음, 부상을 당했지만 거동이 가능한 자들을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했고, 거동마저 불편한 부상자들은 전방, 후방, 측면의 보호를 받도록 안전한 중앙에 세워두었다.
4. 끈질긴 아즈텍 전사들의 추격
코르테스는 자신이 편성한 대열을 정비하고, 최대한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원정군은 최대한 대열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써야 했기에 후퇴하는 속도가 느렸다. 그래서 밤낮으로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이동한 거리가 3레구아(1레구아: 약 5,572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이때 아즈텍 전사들의 추격은 없었으며, 해질 무렵 원정군은 피라미드와 요새가 있는 언덕에 자리잡은 도시 테오칼우에야칸(Teocalhueyacan)에 이를 수 있었다. 코르테스는 방어가 용이한 이 곳에서 바리케이드를 친 채 혹시라도 모를 아즈텍 전사들의 공격에 대비했다.테노치티틀란에서 빠져나온 지 이튿날이 되던 때, 원정군은 추격해오는 아즈텍 전사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일련의 정보망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은 원정대 곳곳에 퍼져갔고, 모두가 공포감에 휩싸여 잠시 동요가 일기도 했다. 날이 밝고 한 시간쯤 지났는데도 아즈텍인들의 공격이 없자, 코르테스는 테오칼우에야칸을 빠져나가 서둘러 다른 곳으로 후퇴하고자 했다. 이때 갑자기 후퇴하는 원정군을 향해 아즈텍 전사들이 기습공격을 감행했지만, 스페인 기병들이 아즈텍 전사들을 제압하고자 돌격했다. 아즈텍 군대는 소수 기병의 돌진에 타격을 받았지만, 기병이 움직이기 어려운 험한 지형으로 후퇴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테오칼우에야칸 전투).
원정군은 이런 식으로 아즈텍 전사들의 치고 빠지는 공격을 방어하면서 힘겹게 후퇴했고, 곧이어 솜팡코(Tzompanco) 호수가 자리잡은 테풋소틀란(Teputzotlan)이라는 상당히 큰 마을에 이를 수 있었다. 코르테스는 테풋소틀란의 주민들에게 후퇴에 지친 원정군을 위한 식량과 음료를 원했지만, 정작 주민들은 전부 도시를 비운 채 도망쳐 버렸다. 테풋소틀란에 도착한 원정군은 이전 아즈텍 전사들의 끈질긴 추격과 전투, 고난의 후퇴로 인해 상당히 녹초가 되어 있었으므로 코르테스는 원정군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면서, 텅 빈 도시에서 약간의 옥수수를 채취해 삶거나 구워먹으며 배를 채웠다. 다음날 테풋소틀란에서 빠져나온 원정군은 다시 추격해온 아즈텍 전사들과 맞붙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코르테스의 기록에 따르면 전적으로 틀락스칼라 원주민들의 길 안내에 의지했기에 과연 길을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었으며, 원정군을 추격하는 아즈텍 전사들은 틈만 나면 소리를 지르면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던지라 불안감은 더욱 커져갔다고 한다.
원정군은 아즈텍 전사들을 저지하면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 이윽고 사카몰코(Zacamolco)라는 상당히 큰 밀집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카몰코의 원주민들은 아즈텍 제국에게 충성하는 도시였기에, 그들은 코르테스의 원정군을 보자마자 공격을 감행했다(사카몰코 전투). 이때의 전투는 상당히 치열했으며, 사카몰코의 전사들이 원정군을 포위하려고 하자 코르테스는 방어하기 용이한 인근 마을로 퇴각하도록 명령을 내려 진영을 갖추도록 했다. 사카몰코에서의 격렬한 전투에서 코르테스는 원주민 전사들의 투석구에 머리를 맞아 심한 부상[2]을 당했으며, 원정군 또한 부상이 없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마을로 후퇴한 원정군을 향해 수많은 사카몰코 전사들이 포위 공격을 감행했고, 원정군은 겨우겨우 막아내는 수준에 그쳤다. 그나마 남아있던 군마들도 전부 부상당하고, 이윽고 군마 한 필이 이 전투에서 죽고 말았다. 코르테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 말이 죽자 매우 애석하게 느꼈는데, 원정군이 너무 허기진 터라 어쩔 수 없이 말을 껍질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어치웠다고 한다. 실제 원정군은 후퇴 도중 먹을 것이 너무나도 부족했기에, 들판의 야생 옥수수나 풀을 뜯어먹어 연명해야 했으며, 몇몇은 이마저도 얻지 못해 허기에 지쳐 쓰러질 정도였다. 원정군은 허기에 굶주려 지친 반면, 사카몰코의 전사들은 추격해온 아즈텍 전사들과 연합하여 더욱 더 대담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윽고 원정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테노치티틀란과 틀락스칼라의 중간지대인 오툼바(Otumba) 평원의 언덕까지 내몰리게 되었다.
1520년 7월 7일, 그 언덕 아래선 남은 스페인인들을 처리하기 위해 약 40,000명에 가까운 아즈텍 대군이 밀집해 있었고, 동맹국 틀락스칼라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그곳밖에 없음을 코르테스는 직감하게 되었다.
5. 코르테스 군대의 상황
5.1. 불리한 점
코르테스가 처한 상황은 가히 절망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테노치티틀란에서 빠져나와 오툼바 평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즈텍 군대와의 혈전을 치렀고, '슬픔의 밤' 당시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원정군은 더욱이 수세에 몰렸다고 할 수 있다.테노치티틀란을 빠져나와 타쿠바로 퇴각한 당시 살아남은 스페인군 병력은 약 500여 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이 병력 중 약 100명에 가까운 이들이 굶주림과 부상에 죽어나갔고, 나머지 400명도 부상이란 부상을 다 겪은 채 겨우 목숨만 연명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슬픔의 밤' 당시의 경황상 강력한 무기인 대포와 화승총, 쇠뇌는 전부 잃어버렸으며, 가장 막강한 무기인 군마조차 부상당한 23기가 전부였다. 또한 가장 중요한 군사들의 사기는 매우 떨어져 있었다. 아즈텍 제국이 대군을 보내 후퇴하는 원정군을 추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매우 동요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친 머리를 치료받는 코르테스
더군다나 사령관인 코르테스마저 머리를 크게 다치고 그나마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수많은 스페인인들이 아즈텍인들의 거듭되는 기습공격을 두려워했으며, 일부는 아예 탈영을 시도하기도 했다.
5.2. 유리한 점
코르테스가 가졌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군마도, 검이나 갑옷도 아니었다. 테노치티틀란에서 무사히 탈출한 다수의 '부관들'이었다.
슬픔의 밤 사건에서 약 600명에서 최대 1,000여 명에 이르는 스페인인이 떼죽음을 당했지만, 정작 전투를 진두지휘했던 코르테스의 부관들은 달랐다. 후안 벨라스케스 데레온(Juan Velazquez de Leon)과 함장 알론소 데에스코바르(Alonso de Escobar) 같은 몇몇 중요직의 부관들이 전사했지만, 대부분의 유능한 부관들이 생존함으로써 이는 훗날 아즈텍 제국과의 전투 판도를 크게 바꾸게 되었다.
페드로 데알바라도(Pedro de Alvarado)[3], 곤살로 데산도발(Gonzalo de Sandoval), 안드레스 데타피아(Andres de Tapia), 크리스토발 올릿(Cristobal Olid), 후안 데살라망카(Juan de Salamanca), 디에고 데오르다스(Diego de Ordaz), 프란시스코 데바르코(Francisco de Barco), 프란시스코 데몬테호(Fransico de Montejo), 알론소 데아빌라(Alonso de Avila), 후안 데하라미요 살바티에라(Juan de Jaramillo Salbatierra), 마리아 데에스트라다(Maria de Estrada)[4] 등의 처음 쿠바를 떠날 때의 최초 원정대 부관들이 전부 생존했던 것은 물론, 나르바에스 휘하에 있었던 고급 인력의 일부도 생존 상태였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오기 이전 780여 년에 걸친 레콩키스타 및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둘러싼 이탈리아 전쟁에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인재들이 다수 포함되었으며, 따라서 강력한 유럽식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풍부했다. 또한 처음 쿠바에서부터 시작했기에, 아나우악 땅(멕시코 중부)의 수많은 원주민 전사들과 싸워오면서 원주민들의 전술을 간파했고, 거기에 따른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코르테스와 같은 신분인 '이달고'(Hidalgo, 스페인의 하급귀족)가 대부분이었다. 코르테스는 비록 이들의 사령관이었지만, 부관들은 코르테스에게 이것저것 다양한 건의를 펼칠 수 있었고, 거기서 나온 몇몇 '색다른 전략'은 훗날 테노치티틀란 공방전 당시 엄청난 활약을 펼치게 된다.
오툼바 전투 당시 이 부관들은 보병대의 지휘를 맡았던 디에고 데오르다스(Diego de Ordaz)를 제외한 대부분이 기병대였다. 코르테스의 군대중 군마는 겨우 23기뿐이었기에 23기의 기병은 코르테스와 부관들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6. 아즈텍 군대의 상황
6.1. 유리한 점
슬픔의 밤에서 대승을 거둔 아즈텍 제국군은 무서운 기세로 코르테스의 원정군을 궁지로 몰아갔다. 코르테스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면서 새로이 우에이 틀라토아니(Huey Tlatoani, 황제)에 오른 쿠이틀라우아크(Cuitlahuac)는 전사들을 대규모로 소집하여, 틀락스칼라로 후퇴 중인 코르테스를 지구 끝까지 쫓아갈 기세로 맹공격을 감행했다.또한 제국의 각지에 파발을 보내, 테노치티틀란에서 코르테스의 원정군을 완전히 몰아냈으며, 이들은 신 같은 것도 아닌 그저 도망자 신세라며, 동맹도시들에게 호소하여 후퇴하는 스페인인들을 공격하도록 격려했다. 이 때문에 6월 30일, 슬픔의 밤 전투가 일어난 이후 오툼바 전투가 벌어지는 7월 7일까지 틀락스칼라로 후퇴하던 코르테스는 추격하는 아즈텍군과 아즈텍 동맹도시의 군대에게 맹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하루도 쉴 틈 없이 공격을 퍼부어 100명에 가까운 스페인인들이 죽었으며, 사령관 코르테스를 포함한 스페인인들은 부상당하지 않은 자가 없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슬픔의 밤 당시 노획한 스페인인들의 무기(강철검과 창)는 아즈텍 전사들의 힘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스페인인들의 강철검은 아즈텍인들을 상대로 엄청난 위력을 보였으며, 아즈텍 전사들은 처음에는 검의 위력이 신이 깃든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인들과의 잦은 접촉 이후 그들의 무기에 대한 것들을 검증을 통해 파악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노획한 무기를 상당히 좋아하는 아즈텍 전사들의 특성상, 오툼바 전투 당시 일부는 검증된 스페인제 백병전 무기로 무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아즈텍인들은 대규모 공세가 특기였는데, 이는 코르테스나 베르날 디아스 같은 직접 전쟁을 뛰어본 사람들이나 후대 역사가들조차 강력하게 인정하는 대목이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의 악사야카틀 궁전에서 아스텍 군대에게 포위될 당시 그들의 규모에 경악하면서,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금세 전사들이 메꾸어지는 게 마치 불사신으로 보이는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슬픔의 밤 당시 아즈텍인들은 코르테스와 면담 도중, 스페인 병사 1명을 죽이는 데 아즈텍 전사 25,000명이 죽더라도, 결국엔 자신들이 이길 거라면서 아즈텍 인해전술의 힘을 직접 말해주기도 했다.
아즈텍의 황제 쿠이틀라우아크는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일격에 스페인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대규모로 전사들을 소집했다. 이들은 이윽고 오툼바 평원에 진을 쳤고, 갖가지 부상으로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코르테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6.2. 불리한 점
아즈텍의 '쿠아치퀘'(Cuachique)[5] 전사의 모습. 이들은 오토미식 스타일의 전사로서 아즈텍군 사령관인 '틀라코치칼카틀'(Tlacochcalcatl)을 호위하는 임무도 떠맡은 상당한 고위급 전사들이었다.
막대한 물량, 어느 정도 갖춘 스페인제 무기, 다수의 동맹군, 슬픔의 밤 승리 이후 사기가 잔뜩 오른 아즈텍 제국군에게 불리한 점이 단 하나 있었다. 이는 오툼바 전투 당시 코르테스는 가졌지만 아즈텍 제국은 갖지 못했으며 앞으로 펼칠 전투에서도 갖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유능한 참모진'이었다. 코르테스의 원정군은 슬픔의 밤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동행한 유능한 부관들은 전부 살아있었다. 하지만 아즈텍 제국군은 그와 완전 반대 상황이었다. '톡스카틀 축제의 대학살'에서 약 600여 명의 아즈텍 제국 최고위급 황족과 귀족들이 코르테스의 동갑 친구이자 부관이었던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상태였다. 이 일로 아즈텍인들의 反스페인 의식이 고착되었고, 알바라도의 생각없는 학살은 결국 코르테스에게 슬픔의 밤 때 쓰디쓴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정복전에서 빛을 발했다. 학살당한 아즈텍 제국 최고위 귀족들은 대부분 군사전략전술과 군사행정에 능한 인재들이었다. 이런 고위 인재들이 알바라도의 학살 때문에 전부 죽음으로써, 마치 소가 뒷걸음질치다가 쥐잡은 것처럼 아즈텍 제국의 참모진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이었다. 수많은 연대기 사가들의 기록에 의해 오툼바 전투 당시, 아즈텍군의 총사령관은 '시우아코아틀'(Ciuacoatl, '뱀 여자'라는 뜻.)이 맡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시우아코아틀은 아즈텍 제국내에서 오늘날의 행정장관과 비슷한 위치의 직위였다.
아즈텍 군대가 대외 원정을 나갈 당시 지휘권은 보통 아즈텍군의 사령관직인 '틀라코치칼카틀'(Tlacochcalcatl)이 지휘를 도맡아 전략과 전술을 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알바라도가 톡스카틀 축제 때 아즈텍 귀족들을 죽이면서 틀라코치칼카틀의 직위를 맡을 장성급들이 죄다 죽어버렸기에 아즈텍 제국은 어쩔 수 없이 행정가인 시우아코아틀에게 공석인 틀라코치칼카틀 직위를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즉 현대식으로 비유하자면 군대의 총사령관직이 공석인데 장성들이 다 죽어버려서 대신 행정장관을 앉힌 것이었다.
유능한 참모진이 전부 생존한 코르테스의 군대와 비교하자면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다. 지금껏 콩키스타도르에 대해서 효율적으로 방어전을 펼친 기존의 지휘부가 사라진 결과, 이를 대체한 시우아코아틀 지휘부는 기존 아즈텍의 전쟁 관습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콩키스타도르에 대해) 비효율적인 전략&전술만 구사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특히 사령관이 사망&치명상을 입었을 때 신의 뜻이라 여겨 퇴각하는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관례는 인해전술을 채용한 아즈텍에게 있어 치명적인 변수가 될 수 있었지만 이런 문제를 조언해 줄 사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우직하게 험지에서의 보병전과 개인의 무용이 주축이 되는 기존 메소아메리카 전장에선 이런 관습이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코르테스 측에겐 기병이라는 종심타격 수단이 있었으며 전장도 마침 기병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개활지였기에 이 관습은 매우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슬픔의 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들인 후 아즈텍 전사들은 콩키스타도르의 다양한 무기들을 노획했지만 끝내 총기의 사용법만은 익히지 못했다. 그래서 아즈텍 전사들은 화승총을 아주 웃기게 사용했는데, 장대 끝에 총을 연결해서 몽둥이처럼 휘두르는 것이었다.[6] 애초에 아즈텍인들은 화약부터가 뭔지 몰랐으니 화약을 이용해서 탄환을 발사하는 화승총이 무슨 원리로 작동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틀라코치칼카틀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사용법을 안 뒤 전술적 활용법을 찾아내거나[7] 그냥 포기하고 좀 더 효율적인 부분에 전력을 집중했을 수도 있겠지만, 오툼바 전투 직전의 아즈텍군 지휘부는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스페인군의 강력한 무기를 우스꽝스럽게 사용하며 전력을 소모하고 말았다.[8]
7. 전투
1520년 7월 7일, 언덕 위의 코르테스 원정군은 오툼바 평원 위의 대규모 아즈텍군 병력을 보고 기겁했다. 오툼바 전투 당시 아즈텍 병력은 최소 10,000명에서 20,000명 혹은 그 이상이었을 거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에 비해 코르테스의 군대는 부상당하고 지친 스페인군 병력 400명과 부관들로 이루어진 23기의 기병, 1,000~2,000명 남짓의 틀락스칼라인들을 포함한 원주민 동맹군이 전부였다. 단, 이 원주민 동맹군은 생략해야 된다는 견해도 있다. 우선 원주민 동맹군은 틀락스칼라인들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테노치티틀란까지 동행한 틀락스칼라인들의 숫자와 '슬픔의 밤' 당시 죽거나 포로로 잡힌 틀락스칼라인의 숫자가 각각 4,000여 명으로 동일하다. 스페인군은 600여 명 정도를 잃었다. 그리고 슬픔의 밤 이후 도주하던 중 원주민들이 코르테스와 동행한 건 확실하지만 오툼바 전투에 대한 기록에서는 원주민 동맹군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며, 무엇보다 오툼바 전투 이후의 사상자에 대한 숫자는 스페인인 72명, 그 중 여자는 5명이라고 할 정도로 세세하게 기록했으면서 원주민 동맹군의 사상자는 전혀 언급이 없다. 슬픔의 밤 당시는 원주민 사상자도 기록했던 것을 볼 때 굳이 생략한 건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사상자가 없는 이유는 이들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코르테스는 틀락스칼라로 가기 위한 길은 어쩔 수 없이 오툼바를 거쳐야 함을 파악했으며, 이윽고 언덕을 등진 채, 엄청난 물량의 아즈텍 대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즈텍 전사들은 코르테스의 원정군을 양 갈래로 포위했고, 스페인인들과 틀락스칼라 및 동맹군으로 이루어진 코르테스의 군대는 이에 맞서게 된다.
코르테스는 부관 디에고 데오르다스(Diego de Ordaz)에게 보병대 지휘권을 맡겼으며, 자신은 부관들로 이루어진 23기의 기병 중 한 명으로서 기병대를 지휘했다.
당시 아즈텍 군대의 위용과 코르테스 군대의 열약한 전력은 코르테스가 자신의 군주였던 카를로스 1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보면 알 수 있다.
'들판 전체를 뒤덮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디오들이 우리(코르테스의 원정군) 앞에 운집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적의 공격은 너무나 거셌고 우리의 저항은 너무나 힘에 부쳤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지쳐 있었고, 우리 일행은 전부가 부상당한 상태였으며 너무나 허기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그날이 우리가 죽을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르다스가 지휘하는 보병대가 아스텍 전사들의 공세를 막는 동안, 코르테스를 포함한 23기의 기병은 수만 명의 밀집된 전사들을 향해 맹렬히 돌격했다. 아즈텍 전사들은 기병대의 갑작스러운 돌격에 대처하지 못했고, 코르테스와 23기의 기병들은 아즈텍 전사들의 대규모 인파 속에서 화려한 장신구와 깃털로 치장된 고위 전사들을 노리기 시작했다.[9] 이윽고 코르테스를 포함한 23기의 기병들은 수만 명의 인파를 해집고 들어가면서 그중 가장 화려한 깃장식과 가마를 타고 있었던 아스텍군 사령관 시우아코아틀(Ciuacoatl)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종군신부였던 프란시스코 데아길라르(Frnacisco de Aguilar)는 이후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시우아코아틀의 깃발(인물이 들고 있는 것)
'코르테스는 인디언들과 전투를 치르면서 길을 헤쳐나갈 때 황금방패로 치장한 적의 지휘관을 잡아 죽이는 놀라운 솜씨를 선보였다. 전사들은 눈여겨보지도 않고, 인디오들의 총사령관(시우아코아틀)에게 창을 한번 휘둘러 살해했다. 그 무렵 디에고 데오르다스가 지휘하는 우리의 보병대는 인디오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그때 코르테스 사령관이 적의 사령관을 죽이자 적들은 퇴각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길을 터주었다. 우리를 추격하는 적도 거의 없었다.'
아즈텍 제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시우아코아틀이 어이없게 비명횡사하자, 이에 주변의 아즈텍 전사들은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메소아메리카 전투는 사령관이 죽거나 큰 부상을 입으면 '신의 뜻'이라 여겨 퇴각하는 것이 관례였다. 아즈텍인들이 스페인인들에게 맞서 여러가지 전술을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도 틀에 박힌 자신들의 관례를 버리지 못한 것이었다.한편, 오르다스가 이끄는 보병대는 아즈텍 군대의 물량에 완전 포위됐지만, 에르난 코르테스가 죽은 시우아코아틀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말을 타면서 돌격하자, 총사령관이 죽었음을 깨달은 나머지 아즈텍 전사들 역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한순간에 물러나듯이 아즈텍 전사들은 후퇴했고, 지칠 대로 지친 코르테스의 원정대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8. 후일담
오툼바 전투에서 기적적인 대승을 거둔 코르테스는 이틀 후인 1520년 7월 9일에서야 원주민 동맹국인 틀락스칼라로 무사 귀환할 수 있었다. 당시 틀락스칼라는 4개 지방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였는데, 그 중 가장 강력한 티사틀란(Tizatlan)의 수령인 90세의 늙은 치코텐카틀(Elder Xicotencatl)과 그의 친척 중 한 명인 20세의 젊은 치코텐카틀(Young Xicotencatl)이 통수권을 지니고 있었다.젊은 치코텐카틀[10]은 코르테스와 스페인인들을 끝까지 반대했던 인물이었는데, 그는 테노치티틀란에서의 궤멸적인 스페인군 패배 이후 코르테스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코르테스가 살아서 돌아오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코르테스는 늙은 치코텐카틀에게 틀락스칼텍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은 아즈텍 사령관의 깃발(오툼바 전투에서 탈취한 시우아코아틀의 깃발)을 선물로 건네주고선 틀락스칼텍과의 영원한 동맹을 약속했다.[11] 틀락스칼텍은 코르테스가 가장 위급한 시기일 때 끝까지 동맹으로 남아주었기 때문에 아즈텍 정복 이후 코르테스로부터 상당한 우대를 받았으며,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가 완전히 자리잡을 시기에도 자치국가로서 상당한 혜택을 누리게 된다.
9. 코르테스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나
오툼바 전투에서의 전력차는 코르테스의 원정군이 절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막말로 아무런 전략없이 그저 아즈텍군이 돌격만 했어도 뭘 어쩌지도 못한 채 전부 끔살당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의 전력차였다. 하지만, 코르테스에게는 그동안 생사고락을 나눈 유능한 부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레콩키스타에서 무어인들과 전투를 벌이며 베테랑이된 자들이었기에 새로운 전장이자 적들인 메소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전투방식과 전술을 빠르고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오툼바 전투에서 보듯이 코르테스와 부관들은 아즈텍 고위간부들의 경우, 화려한 장식을 치장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에 일반 병사들은 그냥 지나친 채 고작 23기의 기병으로 수만 명의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 군지휘관들을 살해했으며, 이윽고 총사령관인 시우아코아틀마저 전사시켰다.[12] 아즈텍인들은 일련의 전투와 슬픔의 밤의 승리를 통해 스페인식 기병 전술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직접 확 트인 평원에서 기병대를 상대한 것은 오툼바 전투가 처음이었다. 오툼바 평원에서 비록 군마들은 전부 부상당했지만, 코르테스와 부관들로 이루어진 23기의 기병들은 불사신과 같은 전투력으로 《삼국지》에서나 볼 수 있는 무쌍을 펼쳤다.[13]
아즈텍인들은 일명 '꽃 전쟁'이라는 메소아메리카식 관습을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고, 이를 극복할 수 있었을 유능한 군사 지휘관들을 '톡스카틀 축제 학살'로 망실한 상태였다. 이렇게 되자 오툼바 전투에서 아즈텍 지휘부는 과거 관습에 얽매인 비전문가로 구성되었고, 압도적인 머릿수에 따른 전략적 이점을 살릴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이들은 코르테스와 그의 기병들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으려고 했기 때문에 매우 소극적인 공격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총사령관이 전사했다고 관습대로 그냥 후퇴해버리는 것을 막을 방법도, 의지도 없어서 코르테스를 잡을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는 아즈텍 군대 스스로의 자멸로 나아갔다.
10. 양측의 피해
베르날 디아스 델카스티요에 따르면 코르테스 군대의 사상자는 60~75명이다. 아즈텍 군대의 사상자는 정확히 알 수 없다.11. 역사가들의 평가
오툼바 전투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사에서 가장 경이로우면서 불가사의한 전투였다. 슬픔의 밤 이후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코르테스의 군대가 고작 1주일 뒤 모든 게 불리했던 오툼바에서 대승을 거뒀으니 말이다.코르테스를 직접적으로 까거나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역사학자들도 오툼바 전투만큼은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모습을 보인다. 코르테스 역시 자신의 군주인 카를로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툼바 전투를 묘사했다. 코르테스는 황제에게 자신의 공로를 어느 정도 잘 보이기 위해 과장과 축소를 남발하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오툼바 전투에서의 묘사에선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극적으로 이룬 승리여서인지 그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선 흔히 보이는 미사여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학자들은 코르테스가 오툼바 전투에 관해 썼던 내용을 코르테스의 글 중 '가장 겸손한 글'이라고 평가한다.
12. 여담
종군신부였던 프란시스코 데아길라르(Frnacisco de Aguilar)와 사령관인 에르난 코르테스 자신의 기록에서 시우아코아틀은 분명 '코르테스가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졸병이었고 은근히 코르테스를 디스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iaz del Castillo)는 부관이자 기병이었던 후안 데살라망카(Juan de Salamanca)가 시우아코아틀을 먼저 발견해 그를 죽였고, 이윽고 같이 돌격한 코르테스에게 시우아코아틀의 상징기를 전달해 주었다고 전한다.흔히들 오툼바 전투를 아즈텍 제국의 운명을 가른 전투로 평가한 사람들이 있는데, 실상은 슬픔의 밤 이후 아즈텍 쪽으로 급격하게 쏠린 전력차가 오툼바 전투 이후 그나마 비등해진 것이었다. 아즈텍 제국은 비록 오툼바에서 패전했지만, 물량은 계속해서 뽑아낼 수 있었으며, 실제로 오툼바 전투 이후로도 코르테스의 원정군은 수만 명의 아즈텍 전사들 및 그 동맹도시들과 싸워나가야 했다. 물론 대국적으로 보자면 이 오툼바 전투만큼 코르테스가 핀치에 몰렸던 전투가 없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아즈텍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맞다. 이후로도 아즈텍은 지속적으로 물량을 뽑아내지만, 코르테스도 그런 아즈텍에 맞서 충분히 준비한 상태로 전투에 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3. 오툼바 전투 당시 아즈텍 병력 수에 관해서
오툼바 전투의 아즈텍군 병력 숫자는 40,000명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학설에선 아즈텍이 그 정도 인원을 동원했던 것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단 아즈텍은 6월 30일 슬픔의 밤에서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큰 피해를 입었으며, 때마침 치남파 수확시기였기 때문에 테노치티틀란에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만한 여력이 충분치는 않았음을 고려해야 한다. 때문에 휴 토머스의 《멕시코 정복사》에선 오툼바 전투 당시 아즈텍군 병력을 12,000~15,000명으로 잡는다.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으론, 아즈텍 측에서 최고위 관료인 시우아코아틀이 이끌고 온 군대였으므로 아무리 못해도 10,000명 이상은 된다는 것과, 코르테스가 명시했듯이 테노치티틀란 외 동맹도시들의 병력도 아즈텍 군대에 합류했으므로 그 수는 배로 늘어났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오툼바 전투 당시 아즈텍 병력은 아무리 못해도 10,000명 이상, 많게는 20,000명 정도로 추측된다.
물론 아즈텍 병력이 40,000명이었든 10,000명이었든, 대다수가 후퇴 중에 부상당했고, 무기도 변변치 못한 코르테스에겐 매우 불리한 상황의 전투였음은 변함이 없다.
14. 각종 매체에서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의 게임 <미디블2: 토탈 워>의 역사적 전투에서 에르난 코르테스의 오툼바 전투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비록 게임상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고증은 약간 아니지만(예를 들어 당시 코르테스 군대에게 없었던 머스킷 총병과 다수의 기병대 존재), 그래도 숫적 불리함을 모랄빵으로 승리한 오툼바 전투의 대략적인 상황을 게임에서 체감해 볼 수 있다.게임에서 아즈텍 군대는 총 4명의 장군이 존재하며, 코르테스 군대보다 더 많은 수의 군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엄청난 경험치의 다수의 콩키스타도르 기병대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정도 경험치의 로델레로, 콩키스타도르 보병대를 지니고 있기에 전략차는 크게 불리한 것도 아니다. 일단 코르테스와 콩키스타도르 기병대를 지정하고 망치로서, 나머지 보병대를 모루로서 지휘하면 어느 정도 전략의 틀을 잡을수 있다. 이 게임에서 핵심은 4명의 아즈텍 장군들은 죽여 모랄빵을 나게끔 하여 승리하도록 하는 것으로써, 실제로 이를 일부러 알려주기 위해서인지 초반 동영상에서 아즈텍 장군들의 모습을 여러 번 비춰준다.
콜린 팔코너의 소설 《깃털 달린 뱀》에서도 오툼바 전투가 상당한 분량으로 묘사된다. 소설에서의 묘사에서 코르테스는 아즈텍 진영으로 돌진하지만, 심각한 부상과 갑작스런 피곤함에 정신을 거의 잃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비치더니 아즈텍군 총사령관의 위치를 지점해 준다. 이에 부관들이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성모의 뜻으로 여긴 코르테스는 관우와 같은 돌격을 가하고 기어이 아즈텍군 총사령관을 죽이게 된다. 이쯤 보면, 코르테스를 미화하는 소설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코르테스의 비열함과 권모술수를 까발려 주는 것이 이 소설의 묘미이다. 아무리 코르테스에 대한 증오 및 불신에도 불구하고 '오툼바 전투만큼은 작가가 인정한 가장 경이로운 전투였기에' 이런 묘사를 했지 않을까 싶다.
레고를 이용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오툼바 전투를 재현한 사람이 있다.
[1] 현재의 멕시코시티 도시철도 2호선 타쿠바역 인근. 나우칼판 데 후아레스와 접하고 있다.[2] 코르테스는 이후의 전투에서 다시 한번 다친 머리를 또 맞는 부상에 이르렀다. 이때 코르테스의 부상은 두개골이 함몰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다. 하지만 틀락스칼라 의사들의 뛰어난 두개골 절제수술로 코르테스는 간신히 원상회복할 수 있었다.[3] 슬픔의 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실상 오툼바 전투의 발단을 제공한 장본인이다.[4] 이름으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여성 장교였다. 콩기스타도르들 중에는 (당연히) 수는 매우 적었지만 여성들도 있었는데, 대다수가 신대륙으로 간 남편이나 형제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여성은 자신의 남동생과 함께 코르테스의 군대에 합류했으며, 슬픔의 밤 전투에서 앞길을 가로막고 도사리는 수많은 아즈텍 전사들을 베어넘기며 탈출했다. 남자 못지않은 전투에서의 용맹한 활약과 아즈텍 정복 이후의 행보 덕에 콩키스타도르들 중에서는 호평을 받는 편이다.[5] 포로를 6명 이상 생포한 엘리트 전사들이다.[6] 편곤을 생각하면 된다.[7] 야금술이 없는 상황이니 총기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어설프게라도 발사할 수 있었다면 위협용으로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코르테스 측에서는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는 총기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 심적 안정감을 주었을 것이므로,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발사한다 해도 아즈텍에서 총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매우 위협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8] 상대방이 비록 화력은 낮을지언정 화기를 다룰 줄 알고 화약 제조에 익숙하기만 하면 노획한 적국의 총기를 가지고 더 쎈 총기를 제조하거나 빠른 학습 속도로 새 총기를 다뤄 적국의 전력을 소모시키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꽤 많다. 가령 임진왜란 시기 이미 총통으로 화기에 익숙했던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을 습득해 단기간에 많은 조총수를 양성했거나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영국군을 공포에 떨게 한 제자일 소총이 그 예.[9] 코르테스의 부관들이 위력을 발휘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수차례 메소아메리카의 다양한 원주민 전사들과 전투를 치르면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고 자신의 위용과 지위를 자랑하는 것이 아즈텍을 비롯한 원주민 지휘관들의 관례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10] 젊은 치코텐카틀은 늙은 치코텐카틀과 달리 끝까지 스페인인들과 동행하기를 거부했다. 그 때문인지 테노치티틀란 공방전 이전 코르테스는 그를 설득하고자 했으나 젊은 치코텐카틀은 코르테스를 한사코 거부했고, 결국 틀락스칼라 족장들의 동의하에 처형했다.[11] 이 장면은 리엔소 데 틀락스칼라(Lienzo de Tlaxcala) 사본의 그림으로 남아있다.[12] 이러한 기병 돌격 전술은 수백년에 걸친 레콩키스타에서 무어인 경기병들과의 전투때 많이 사용된 전술로, 특히 스페인의 기병들은 랜스 차징이 아닌 투창 기병에 가까웠으므로 기동성과 투창 실력이 매우 뛰어나 화려한 표식으로 잘 보이는 위치에서 지휘하던 아즈텍군 지휘관을 한방에 저격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13] 이는 이후에도 활약할 콩키스타도르의 가공할 전투 경험이 빛을 발했던 순간이었다. 누차 설명하지만 이들은 수백여 년에 걸친 레콩키스타를 끝내 승전으로 이끈 불굴의 전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