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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20:25:54

왕좌지재

1. 개요2. 유래3. 기타

1. 개요

고사성어
임금 왕 도울 좌 어조사 지 재주 재

을 도울 만한 재능이라는 뜻으로, 임금을 보좌하여 큰 을 세울 능력이나 한 사람을 왕으로 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재를 가리키는 고사성어이다.

2. 유래

劉向稱董仲舒有王佐之材, 伊尹, 呂亡以加, 管晏之属, 伯者之佐, 殆不及也.
유향은 동중서를 칭찬하며 왕좌의 재주가 있으니, 비록 이윤과 여상이라도 그보다 더할 수가 없다. 관중과 안영의 무리는 패자의 보좌이니, 자못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한서》 〈동중서 열전〉

유향동중서에 대해 칭찬한 구절로 처음 발견되고, 동중서 이후 여러 사람들이 왕좌지재라 평가되었으며, 왕좌지재의 才는 材로도 쓰며, 줄여서 왕재(王才)라고도 한다.

보통은 조조를 도와 삼국 중 가장 강한 국가로서 위의 초석을 놓는데 큰 공을 세운 순욱이 알려져 있다.
南陽何顒名知人, 見彧而異之, 曰:「王佐才也.」
남양의 하옹(何顒)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으로 이름났는데 순욱을 기이하게 여기며 이렇게 말했다. "왕을 보좌할 재능을 가지고 있구나!"
후한서》 〈순욱 열전〉

순욱은 자가 문약(文若)으로 영천 사람이며, 어려서부터 고을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났는데, 남양의 명사 하옹이 어린 순욱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칭찬한 것이며, 순욱은 자신의 고향이 병란에 휩싸일 것을 알고 가족들을 이끌고 기주로 갔다. 기주를 장악한 원소는 순욱을 예우하였으나, 순욱은 원소가 큰 일을 이룰 인물이 못됨을 알아보고 조조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순욱을 수하에 두게 된 조조는 "자방을 얻었다." 하며 기뻐하였다.

순욱은 하옹이 예견한 대로,이후 20여 년 동안 정확한 정세 판단과 치우침이 없는 공정한 자세로 조조를 보좌하여 조씨 정권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막대한 공을 세웠다.

순욱 이전에는 한나라 때 왕윤곽태로부터 하루에 천 리를 갈 왕좌지재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후 시기에 전연에서는 한항이 장재에게서 왕좌지재라는 평가를 받았고, 북주에서는 우근이 원목에게서 왕좌지재라 평가를 받았다. 당나라에서는 두여회가 방교로부터 왕좌지재라 평가받았으며, 북송에서는 부필이 범중엄으로부터 왕좌지재라고 평가받았다.

그 밖에는 제갈량이 당대 인물에게 평가받은 것은 아니지만 후세 문헌에서 왕좌지재라 했다.

어찌되었든 이와 같은 이야기에서 유래하여 왕좌지재는 임금을 보좌할 만한 재능 또는 그러한 재능을 지닌 인재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며 인재와 그 재능을 평가하는데 있어 최상급 찬사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몽주가 사람들로부터 왕좌지재라 불렸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우연히도 말년의 정치적 행보가 순욱과 비슷하다. 어느 신흥세력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고, 그 세력의 지도자와 중요한 관계이나, 기존 왕조 수호 의지가 굳건해 그들과 대립하여 버림받는다는 점이 같다.

3. 기타


파일:attachment/왕좌지재/Example.jpg[2]

[1] 코에이의 미형 삽화 덕에 전부 잘생겼는데, 실제로도 순욱, 제갈량, 주유라고 하는 위촉오 창립자의 오른팔인 이 셋은 모두 외모가 좋았다는 기록이 있다.[2] 일본어를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왕좌의 재. 제왕을 보좌하는 전략가·군사로서의 재능을 칭찬하는 호칭, 역사상에서는 무왕을 도와 주의 창건에 진력한 여상(태공망)이나,한의 고조·유방을 보좌한 군사·장량 등, 강대한 왕조를 건국한 시조를 보좌한 명군사가 왕좌의 재의 이상이라고 불리고 있다. 삼국지의 인물에서는, 조조의 군사로 활약했던 순욱이 젊을 적 에 '왕좌의 재'라는 평을 들었음이 정사에 기록되었고, 또한 연의에서는 손권이 주유에 대해 평가한 장면이나, 제갈근의 동생인 제갈량의 재능을 이야기할 때 '왕좌의 재'라는 칭호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