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LG 코치 시절
1991년에 팀의 세대교체 와중에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시즌 성적이 준수했음에도 1차 지명자인 송구홍에게 주전 3루수를 이듬해부터 넘겨주게 된다.[1]이광환은 이 때 은퇴한 이후, 1990년대 내내 팀의 코치로서 계속 남게 된다. 그리고 이광환, 천보성 감독 체제 하에서 1-2군 타격코치와 2군 감독을 거쳤다.
2. LG 감독 시절
감독 시절
천보성 감독이 1999년 10월 8일에 포스트시즌 탈락을 이유로 사의를 표명하자[2][3], 구단은 새 감독으로 2군 감독이던 이광은을 1999년 12월 6일부로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선임한다. 3년 계약[4]에 총 4억원이었다.[5] 참고로 MBC 청룡-LG 트윈스 구단 역사상 최초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이고, MBC-LG 한 팀에서 선수, 코치, 감독으로 영전한 최초의 사례다.[6]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나이가 만 44세로 비교적 젊은 편이었는데, 단장인 최종준이 많이 밀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7] 뿐만 아니라 MBC-LG의 창단 멤버 겸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었다 보니 구본무 구단주를 비롯한 구단 수뇌부, LG그룹 최고위층도 그를 많이 신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행보를 요약하자면 2000년대 이후 LG 감독 흑역사의 스타트를 끊은 인물. 시즌 내내 선수 기용에서 미숙함을 보였고 그나마 1990년대 강팀의 흔적이 남아있던 LG 트윈스를 이끌고 2000년에는 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이는 당시에 시행되던 양대리그의 덕을 많이 봤다. 순위만 보면 매직리그 1위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승률은 겨우 0.515에 불과해 당시 드림리그 3위였던 삼성 라이온즈(승률 0.539)보다 승률이 한참 낮았고, 단일리그였다면 4위 정도의 성적이었다.[8][9] 더군다나 이미지와 달리 김동엽식의 스파르타식 지도로 일관하여, 팀 장악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편이라서 김용수와 최향남이 항명하기도 했고[10][11][12] 서용빈은 팀을 이탈한 적도 있었을 정도로[13][14] 팀이 파행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자율야구에 길들여진 선수들의 반발을 불렀다. 오히려 자신의 후임 감독인 김성근과 스타일이 매우 비슷했다. 당시 LG는 이광환-천보성 라인의 자율야구 체제였다가 이광은 감독때부터 급격하게 선수들을 통제하는 야구로 전환되자 당시 프런트와 럭키회 등에서 이광은과 김성근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같은 이광은-김성근식 야구에 대한 반감이 적절했던 분위기.[15]
자신이 직접 뽑은 용병들도 시원찮았다. 그나마 2000년의 데니 해리거는 17승을 거두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의 공신 역할을 했으나, 무지막지한 이닝을 소화한 탓에 다음 해에 귀신같이 부상으로 8승에 그쳐 부진하고 만다. 그리고 외국인 타자들도 찰스 스미스[16]를 데려오기 전의 선수들인 짐 테이텀과 브렌트 쿡슨은 부상과 부진으로 퇴출되었다.[17] 투수 운용도 엉망진창이라서 마무리 투수들이 김용수-최향남-장문석-경헌호-이승호-장문석으로 무려 다섯 차례나 바뀌었고, 중간계투진의 믿을 구석이었던 송유석과 김기범은 선수협 결성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쫓겨났고[18] 차명석의 과부하를 부채질했다.[19] 그 외에도 전임 천보성 감독이 추진한 심재학의 투수 전향이 실패로 돌아가자 1999년 말 현대 유니콘스에 최원호를 상대로 트레이드했다.[20] 또한 양준혁과의 트레이드 과정에서 손혁을 내준 것도 실책으로 꼽힌다.[21] 젊은 투수들을 보직 고정 없이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보직을 마구잡이로 변경하는 운용으로 인해 부임 기간에 레귤러로 자리잡은 국내 투수가 없다시피했고, 후임인 김성근의 혹사와 2000년대 LG 프런트의 병크, 지명삽질, 유망주 육성 실패 등이 이어지며 2000년대 LG 투수진의 뎁스는 방화신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깃털 수준으로 전락해 긴 암흑기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도 양준혁의 트레이드 영입으로 타선은 매우 괜찮은 편이었다. 2001년 시즌 시작 기준 FA로 홍현우를 영입하고 테이블 세터에 유지현, 이병규, 중심타선에 김재현, 양준혁, 댄 로마이어가 버티고 있었고, 하위타선에도 서용빈이 쏠쏠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타력만 보면 충분히 우승권을 갈 수 있었으나, 투수운용 실패와 선수단 장악 실패로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2000년 PO 6차전에서는 김용수가 9회 2사까지 잡아놓은 상황에서 특별히 문제가 없었는데도 원아웃을 남겨놓고 장문석으로 교체했고,[22] 다음 타자 안경현에게 동점 홈런과 연장전에서 심정수에게 역전 홈런을 허용하여 두산에게 한국시리즈 진출을 허용하고 말았다.[23][24] 당시 패배는 이는 구단에서 그에 대한 신임의 악화로 이어졌고, 2000 시즌 후 2군 감독으로 김성근 당시 삼성 2군 감독을 영입하면서 그에 대한 의구심을 표출한다. 그리고 2001년 1승 9패라는 부진에 빠지자 김성근이 1군에 올라와 처음에는 수석코치 겸 투수 전권 위임으로[25], 그리고 결국 9승 1무 25패라는 기록을 남기고 중도 해임으로 귀결되었다.
2.1. 평가
너무 빨리 실패한 까닭에 프로 팀에서 기회를 다시 얻지 못했다.[26] 야수와 투수 운용 모두 주먹구구식으로 선수단을 운영했다. 야수 쪽에서는 1990년대의 유산에 더해 양준혁 영입으로 폭넓어진 선수층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으며 투수 쪽에서는 선발과 구원의 보직이동을 남발했다. 한 시즌에만 마무리 투수를 5번 이상 바꿨다.팀 운영에 있어서 낡은 방식을 고수하여 고참 선수들과 자주 충돌하면서 팀 장악에 한계를 보였고, 학연(배재고-연세대)을 중시한다는 이미지가 박힌 것도 문제였다.[27][28] 항간에는 구본무 구단주가 그에게 직접 연을 끊으라는 충고를 했다는 소문도 있으니.[29] 원체 성적도 시원찮았고, 후술할 비리로 크게 터트려 같은 입시비리 범죄자이지만 하다못해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호성적이라도 있는 천보성만 못하다.
3. 연세대학교 야구부 감독,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시절
그 후 야인으로 있다가[30] 2004년부터 연세대 야구부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일하다가 2005년에 김충남 감독이 퇴임하자 감독으로 승진해 5년 간 지휘했다. 퇴임 후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다가 배재고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3.1. 비리
연세대 감독을 지내던 2009년 당시 서울의 한 고교의 학부모로 부터 3,000만원을 받고 그의 아들을 야구특기생으로 입학시킨 혐의, 또 배재고 감독으로 재직하며 천보성 당시 한양대 감독에게 제자를 입학시켜달라는 청탁과 함께 수천만원을 건낸 혐의로 2012년 12월 18일에 공개수배되었다. 양승호 전 고려대 감독과 정진호 연세대 감독 등의 입시비리를 조사하던 중 첩보를 입수해 신병을 확보하려 했으나 잠적해 버렸다고 한다. 기사.그러던 중 2013년 12월 3일에 자수했다는 기사가 떴다. 기사. 햇수로 따지면 지난 2월달에 집안을 압수수색했을 때부터 잠적했으니 약 9개월 동안 도피 생활을 한 것이다. 도주 생활에 지쳐서 자수한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2월 6일에 구속되었다. 기사.
2014년 1월 16일, 징역 1년 6월에 추징금 3천만원이 구형되었다. 양승호보다 적게 해먹은 탓이었는지 추징금은 적었지만, 도주경력 탓인지 양승호보다 더 긴 구형을 받았다. 기사.
2014년 3월 23일 인천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대한 집행유예 2년, 추징금 3천만원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1] 이 세대 교체 와중에서 은퇴 대신에 현역 생활 연장을 선택한 선수가 김재박. 김재박은 구본무 구단주(당시 LG그룹 부회장)가 대 선수 김재박의 명예를 고려하여 직접 무상 트레이드를 지시하면서 태평양 돌핀스에서 옷을 벗는다.[2] 천 감독은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하자 2년 재계약을 맺었다.[3] 당시 최종준 단장도 사의를 표명했는데, 정작 구단은 최 단장은 유임시키고 천 감독만 사표를 수리했다.[4]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임기.[5] 연봉 1억 X 3년 + 계약금 1억[6] 2020년까지는 LG 트윈스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였으나, 역시 LG에서만 선수-코치를 거친 류지현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유일한 사례는 아니게 됐다. 마찬가지로 MBC-LG 프랜차이즈 출신인 김재박은 태평양 돌핀스에서 은퇴했고, 현대 유니콘스 감독을 거쳐 LG 감독으로 왔기 때문에 제외.[7] 최종준은 이광은의 배재고 선배다.[8] 야만없이지만, 단일리그였다면 당시 전체 승률 3위였던 삼성과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날 확률이 컸다.그리고 롯데는 비밀번호가 2000년부터 시작해 58888577이었을 거고[9] 이 때 매직리그는 약체팀들의 집합소였기 때문에 LG, 롯데, 한화, SK 네 팀 중 LG와 롯데가 나머지 2개 팀을 따돌리고 일찌감치 치고나간 상황이었다. 반대로 드림리그에는 IMF 여파로 모기업이 부도나버린 해태를 제외한 나머지 현대, 두산, 삼성은 모두 강팀이었다. 시즌이 종료되고 보니 드림리그 3위인 삼성의 승률(0.539)이 매직리그 2위인 롯데의 승률(0.504)보다 높은 현상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와일드카드나 지금의 타이 브레이커 비슷하게 삼성과 롯데 간 준플레이오프를 치르는 게 확정되면서 8구단 체제에서 5개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양대리그 제도의 폐해로 인해 이듬해인 2001년부터는 다시 단일리그로 회귀하게 되었다.[10] 이 때문에 2000년 시즌 후 김용수는 사실상 구단이 등 떠밀다시피 은퇴하게 된다. 김용수는 감독이 선발 - 마무리 - 계투 등으로 계속 보직변경을 단행했고, 시즌이 끝나고 이광은 감독이 은퇴를 종용했음을 밝혔다. 더군다나 당시 이광은 감독과 김용수의 나이 차이는 불과 5살밖에 차이나지 않아 젊은 감독이던 이광은의 입장에서는 자기랑 몇 살 차이나지 않는 노장 선수인 김용수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1] 김용수는 2000년 6월 3일 부산에서 롯데와 경기에 선발투수로 올라왔으나 1승이 급한 이광은 감독이 7-4로 앞선 5회 투아웃을 잡아놓고 투수교체를 하자 공을 포수 조인성에게 던져버리고 덕아웃에 들어와 의자를 차는 등 불편한 심기를 표시했다. 인간성 좋은 사람이란 평이 많던 김용수가 이처럼 코칭스태프에게 대놓고 반발의사를 표시한 것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당시 LG는 시즌 전 마무리로 낙점했던 김용수의 선발전환과 다음 마무리 선정을 놓고 그동안 많은 내홍을 겪었을 정도로 내분이 있던 상황.[12] 최향남은 마무리로 활동하다가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갔는데 감독과 불편한 관계를 빚었고 결국 1군 승격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마무리는 김용수, 최향남을 거쳐 다른 투수가 하고 있으며 2000년 LG는 마무리 투수만 5명인 촌극이 벌어지고 만다. 이에 이광은 감독이 언론에 대놓고 "난 최향남이 싫어요."라고 인터뷰하며 막장의 끝을 보여주고 만다.[13] 이광은 감독이 보내기 번트를 지시하자 거부했고 결국 2군 강등을 지시했으나 코칭스텝들이 말려 무마된 사건. 이 사건이 있은 후 이광은 감독은 "내 앞에서 서용빈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라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14] 이후 서용빈은 2군으로 내려갔고 트레이드카드로 쓰려다가 스포츠 서울의 보도가 나가자 다시 1군으로 승격된다. 그러나 서용빈은 대타로만 출전시켜서 끝까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15] 김성근이 2002년에 LG의 마지막 한국시리즈를 이끌고 나서 경질된 후 팀이 암흑기에 빠지고 김재박 - 박종훈 시절에 LG가 58766을 찍고 김성근은 SK에서 11212를 찍으면서 만개하자 후대에 가서 안좋게 평가받았지만 당시로서는 반감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김성근은 이후 한화 이글스를 말아먹으며 다시 평가가 안좋아 졌지만[16] 스미스는 홈런과 타점 능력은 좋았지만 서용빈과 양준혁과의 1루수 중복 포지션 문제가 있었다. 결국 셋 다 쓰기 위해 좌익수 김재현을 우익수로 바꾸고 스미스를 좌익수로 집어넣었다. 둘 다 공격력만 우수했지 수비가 영 시원찮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 좋기만 한 선택은 아니었다.[17] 테이텀 퇴출과정에서 이광은 감독은 구단의 만류에도 독단적으로 퇴출을 발표한다.[18] 송유석은 시범경기 기간에 한화 이글스의 최익성과 트레이드했고, 김기범은 2군에서 썩다가 미국 이민을 선언하며 자진 은퇴했다.[19] 그리고 차명석은 이듬 해 부상으로 은퇴했다.[20] 그 후 2000-2001 시즌에 심재학이 대폭발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아깝다. 거기에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해 삼성을 우승시킨 선수가 최원호인지라 여러 모로 LG가 손해를 보게되었다.[21] 손혁은 1996-1999시즌에 기존 김태원, 정삼흠의 은퇴한 자리를 완벽하게 메운 좋은 선발 투수였다. 그런데 이 선수는 해태로 트레이드 되고서 영 좋지 못한 분위기에 반발해 1년간 야구계를 떠났고, 이로 인한 부진끝에 결국 일찍 두산에서 은퇴하게 된다. 어찌보면 트레이드가 한 선수의 선수생명을 망친 셈.[22] 게다가 이 장면은 김용수가 선수로서 마운드에 오른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김용수 본인을 포함해서 아무도 몰랐겠지만.[23] 이에 대해서는 1) 플레이오프 내내 부진했던 장문석에게 자신감을 회복할 기회를 주려 했다는 설, 2) 시즌 중(6월) 김용수의 항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 등이 제기된다.[24] 만약 김용수를 마운드에서 내리지 않았다면 김용수의 선수생활 연장과 LG의 플레이오프 7차전까지 가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시리즈 진출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25] 이 시기에 김성근이 투수 운용을 한 경기는 총 18경기로, 당시 기록은 7승 1무 10패였다. 다만 초창기에는 김성근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4연승을 달렸으나, 파워 게임이 본격화되면서 팀이 점차 나락에 간 것을 감안해야 한다. 심지어 18경기 이후 김성근의 투수 권한을 다시 뺏어온 다음에는 6연패에 빠지고 경질. 이처럼 당시 LG는 계속해서 체제를 바꿔대는 행보를 보여주면서, 이광은, 김성근이라는 개인의 능력과는 별개로 프런트가 무능하면 팀을 어디까지 망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26] 또한 MBC - LG를 제외하면 타 팀을 간 적이 없는 인물이었던 만큼 타 팀에서 자리를 얻기도 어려웠다.[27] 그가 임명한 오영일, 노찬엽, 박철영, 이순철 코치 등은 모두 그와 학연(배재고 or 연세대)이 있다. 그와 학연이 없고, 타격코치로 라이벌 구도였던 김용달은 팀을 떠나 현대 유니콘스로 간다. 이 중에서 이순철을 제외한 나머지는 MBC - LG 출신.[28] LG 팬들이 이를 가는 금지어 이순철을 대학 후배라고 엘지로 데려온 사람 역시 이광은이었다. 물론 이순철은 감독 자질이 없었을 뿐, 코치로서는 적당한 수준이었다.[29] 친구이자 현대 감독이었던 김재박은 "너 그러다 감독 오래 못한다." 라고 충고해 줬는데, 결국 그 충고가 예언이 되고 말았다.[30] 어찌되었던 구단에서 직접 계약기간 중에 잘라버린 것이니 2002년까지는 잔여 연봉을 받으면서 휴식기를 가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