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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03:04:09

이상훈(좌완투수)/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이상훈(좌완투수)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LG 트윈스 1기
3.1. 1993 시즌3.2. 1994 시즌3.3. 1995 시즌3.4. 1996 시즌3.5. 1997 시즌
4. 주니치 드래곤스
4.1. 1998 시즌4.2. 1999 시즌
5. 보스턴 레드삭스6. LG 트윈스 2기
6.1. 2002 시즌6.2. 2003 시즌
7. SK 와이번스
7.1. 2004 시즌
8. 연도별 주요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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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상훈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서울고등학교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좋은 폼을 가진 130km 후반의 공을 던질 수 있는 좌완 투수로 이름나 있었지만,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한다.[1]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휘문고와의 연습경기에서 호투를 했는데 이때 눈여겨본 고려대에 스카웃되었다고 한다. 한편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돈을 벌기 위해 대학 시절 여러 차례 학교를 이탈한 적도 있지만(정확하게 14번이라고 한다. 학교를 이탈하고 대회를 앞두고 잡히고 수차례 반복했다고 한다.), 학교 선배이자 절친인 임수혁임수혁 선수의 부친, 그리고 고대 시절 은사인 최남수[2] 감독의 도움[3]으로 대학야구 리그를 대표하는 좌완 투수로 성장했다. 고려대학교 시절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깨닫고 트레이닝을 늘리며 145km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좌완 파이어볼러로 한층 성장했다.[4]

같은 89학번인 구대성이 고교야구 때부터 대형 투수로 기대되었고 대학야구를 대표하는 좌완투수였던 반면, 이상훈은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이 되어서야 야구계의 주목을 받을 정도의 활약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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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시절
고려대학교 4학년이던 1992년 대학야구 춘계리그 때 성균관대학교와의 경기에서 무려 14타자 연속 탈삼진 이란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우며 단박에 서울 연고 프로 팀의 영입 0순위로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도 지옥에서라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였으니. 졸업을 앞두고 치른 같은 해 연세대와의 양교 정기전에도 선발투수로 출장,[5] 3 대 1의 역전 완투승을 거두었다. 이상훈은 이때의 승리를 자신의 선수시절 최고의 순간으로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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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입단 직후, 맨 왼쪽이 이광환 前 LG 트윈스 감독
LG 트윈스OB 베어스가 이상훈을 영입하기 위해 치열한 혈전을 벌였지만 결국 이상훈의 향방은 주사위 승부로 결정되었고, 두번째 판까지 OB가 이기고 있었는데 세번째 판에서 OB의 주사위가 1, 1이 나오는 바람에 21:16으로 LG가 승리했다. 서울 지역 드래프트 우선권을 얻은 LG 트윈스가 그를 1차 지명하면서 이상훈은 1993년 프로야구 역대 최초로 2억 원이라는 몸값에(계약금 1억 8천 8백만원, 연봉 1천 2백만원) LG 유니폼을 입었다.[6]

당시 이상훈을 주사위 던지기로 지명한 LG 스카우트가 구단에 전화로 "우리가 이상훈을 잡았다"며 흥분하면서 낭보를 전하고 있는데, 마침 그 자리를 지나가던 당시 KBO 이상훈 총재가 그 스카우트에게 "허허 스카우트 양반, 날 잡아서 뭐 어쩌려는 게요?"라면서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3. LG 트윈스 1기

3.1. 199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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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4월 10일 역사적인 데뷔 등판
데뷔 첫 해인 1993년에는 9승 9패의 성적을 기록. 아쉽게 두 자릿수 승수[7]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공헌했고,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탈락 직전의 팀을 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성적은 나쁘지 않았으나 93년은 KBO 역대급 투고타저인 시즌이라는걸 감안하면 썩 좋은 성적은 아니었다. 단적으로, 이상훈이 기록한 3.76의 평균자책점은 뒤에서 3등인 기록이었다. 게다가 93년은 워낙 대어급 신인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시즌이어서 9승밖에 올리지 못한 이상훈은 신인왕 후보 5명 안에조차 들지 못했다.[8]

3.2. 1994 시즌

이듬해인 1994년에는 김태원-정삼흠과 선발 삼두마차를 이루며 1선발로 맹활약, 18승으로 조계현과 공동 다승왕에 올랐고 LG가 그 해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데 1등 공신으로 남았다. 골든글러브를 수상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성적이었지만, 그 해 태평양 돌핀스 소속으로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40세이브(세이브포인트가 아니다.)를 올린 마무리 투수 정명원의 임팩트에 밀려 아쉽게 수상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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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준 前 단장과 함께

3.3. 199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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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1995)

파일:이상훈1995시즌.jpg
MBC-LG 42년 구단 역사상 유일하게 단일시즌 WAR 1위를 기록한 시즌[9]

1995년에도 20승으로 2년 연속 다승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의 좌완 선발 20승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고 있었다가, 그로부터 22년 뒤, KIA 타이거즈양현종이 20승 5패를 기록하며 토종 좌완 선발 20승 투수 가운데 세번째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10] 시대의 차이는 있지만 류현진, 김광현, 봉중근 등의 기라성 같은 좌완들도 해내지 못한 업적이다. 그렇지만 MVP는 OB 외야수 김상호에게 넘겨 주었으며, 본인도 롯데 자이언츠와 맞붙었던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11][12][13][14] 어찌 됐건 1995년의 이상훈은 1998년의 김용수, 2001년의 신윤호와 함께 단 한명도 나오지 않은 LG 출신 MVP에 거의 근접했던 선수였다.

당시 역대 KBO 최고 라이벌 매치라고 할정도로OB 베어스김상진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여, 둘의 선발 대결이 있다고 하면 매진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역대 전적은 이상훈의 3:0 압승.

포스트 시즌에서의 부진과 달리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나온 1995년 2회 한일 슈퍼게임의 1, 5차전에 선발 등판해 일본프로야구 올스타 팀을 상대로 12이닝 1실점이라는 엄청난 호투를 펼치기도 했다. 특히 1차전은 일본도 전력을 기울인 베스트 멤버였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인 피칭이었고, 일본과 상당한 수준 차이를 느껴야 했던 1991년 1회 대회에 비교해서 대한민국일본과도 비등한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1등 공신. 그래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1차전 선발 등판 전 일본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일본 기자들이 선동열에게 "1차전 선발을 맡느냐?" 물었을 때 선동열은 "올해 대한민국에 20승 투수가 있다. 그에게 물어 보라!"고 나름 멋진 대답을 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7이닝 가까이 무실점으로 일본 타선을 틀어막았는데, 안타를 많이 주지 않은 제구가 상당히 잘 된 경기였기 때문에 선동열의 대답을 증명한 셈이 되었다.

3.4. 1996 시즌

그러나 1995년 페넌트레이스 4일 등판 - 포스트시즌 - 한일 슈퍼게임까지 이어지는 혹사의 후유증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1996년 시즌 도중 척추분리증까지 발병하면서[15] 더 이상 선발로 출전이 힘들어지며 마무리인 김용수와 보직을 맞바꿔 중간계투마무리로 활약했다.[16]

3.5. 1997 시즌

다시 선발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김용수의 고집으로 2년 연속 마무리를 맡았다. 본격적으로 마무리로 돌아선 1997년에는 10승과 37세이브로 47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하면서 구원왕 타이틀 홀더가 되었다.[17] 이는 당시 정명원이 보유하고 있던 한 시즌 세이브포인트 기록을 깬 신기록이었으며[18], 이후 진필중에 의해 기록은 다시 깨졌다.[19]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최해식1997년 한국시리즈 당시 이상훈의 구위가 좋아 해태 타이거즈 타자들이 '내가 발라블라요[20]'라고 말하면서 맞대결했고 이상훈의 동기생 이종범과 요절한 에이스 투수 김상진 덕분에 우승을 차지했다고 술회했다.

4. 주니치 드래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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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998 시즌

1997년 시즌이 끝난 후 LG 구단 측에 돌연 해외 진출 의사를 밝혔다. LG는 선수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이적료 200만 달러에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로의 이적이 성사되는 듯 했다. 하지만 당시 FA가 아니었던 계약 특성상 다른 MLB 구단들이 '우리도 이상훈을 영입할 권리가 있다'며 보스턴의 단독협상에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에는 MLB 사무국까지 개입하며 한-미 양국 간 포스팅 제도를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이상훈은 MLB 전 구단 스카우터들이 참여하는 공개 테스트를 진행했지만, 포스팅 응찰액이 60만 달러에 그치며 몸값이 반 이하로 뚝 떨어져버렸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금액에 LG 구단은 이적을 철회했고, 어차피 안고 갈 수 없던 이상훈은[21] 자매 구단인 일본의 주니치 드래곤즈에 임대료 2억 엔을 포함, 2년 간 임대 후 완전 이적 조건으로 떠나보냈다. 이 당시의 등번호는 17번으로, 등록명은 삼손 리(SAMSON LEE/サムソン•リー).

1998년에는 미국 진출 실패와 그에 따른 훈련 부족으로 인해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5월 9일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원정 경기에 8회 불펜투수로 등판하면서 NPB 데뷔전을 치렀는데, 모토키 다이스케에게 홈런을 맞는 등 부진했다.[22] 호시노 센이치 감독으로부터는 도중에 2군행을 통보받고, 지병인 요통과 혈행 장애가 재발하며 1승에 그쳤다.[23]

4.2. 1999 시즌

1999년에는 예전기량을 되찾아 선발투수로 3점대 초반의 방어율로 호투하였으나 그 때 발생한 혈행장애의 여파로 잠시 부상자명단에 있다가 중간계투로 컴백하여 빼어난 성적을 거뒀다. 1999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페넌트레이스 우승에도 공헌했다.[24] 다만 그 해 열린 1999년 일본시리즈에서는 팔꿈치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팀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게 패배했다.

훗날 이상훈은 LG 트윈스를 처음으로 떠날 때부터 프런트와 감정이 극도로 상해 있었다고 회고했다.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주 요인은 그가 야구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이광환 감독을 해임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앙금은 생각보다 쉽게 풀리지 않아서, 주니치와 2년간 맺은 임대 계약이 끝난 1999년, LG 쪽에서 주니치와 이적료 재협상을 통해 그를 완전 이적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순전히 'LG에 이익을 줄 수 없다'는 마음으로, 본인의 평생 꿈이었던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함과 동시에, "절대 일본에 남지 않겠다"는 충격 발언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가 바야흐로 주니치 드래곤즈가 다이에 호크스(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맞아 신나는 재팬시리즈를 치를 무렵(...)

다만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LG와의 감정 이전에 미국 진출에 대한 동경 자체는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99년 시즌이 종료되고 이상훈이 돌연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하자 주니치 대표 및 프런트는 그의 잔류를 위해 설득했지만,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오히려 "삼손, 좋아. 남자는 꿈을 가져야 해."라며 격려해 줬다고 한다. 이상훈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해준 호시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꼈었다고 말했다.

5. 보스턴 레드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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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본을 거쳐 1999년 말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한 후 2000년 콜업되어 숙원이었던 메이저리그 무대를 경험했다.[25] 불펜으로 9경기 11이닝을 던지며 방어율 3.09를 기록했는데 얼핏 보면 나쁘지 않아 보이나, 11이닝 동안 피안타 11개, 사사구 6개를 내주었으며 땅볼 유도는 거의 안되고 아웃카운트를 잡아도 깊숙한 외야 플라이 볼이라 매우 불안했다. 결국 이듬해에는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가 2001년 보스턴에서 완전히 방출당했고,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다시 한 번 메이저리그 승격을 노렸으나 2002년 초 방출되었다.

6. LG 트윈스 2기

6.1. 200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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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출 후 KBO 리그 복귀 의사를 타진했고[26], 김성근 감독이 이를 받아들여, 귀국하자마자 친정팀 LG와 연봉 4억 7000만원에 계약하며[27] 복귀한다. 2002년의 팀의 4강 턱걸이와 준우승에도 고참 투수로서 공헌했다.[28] 구원 이닝으로만 100이닝을 넘긴 이동현장문석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혹사를 당했다. 한 달 반 늦게 시작했는데 85.2이닝이나 던졌다.[29]

특히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이미 많이 지친 몸을 이끌고 3경기 연속 등판하는 투혼을 보였으나 결국 시리즈 전적 2:3으로 뒤지고 있던 6차전에 9:6으로 앞서던 9회 말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맞은 후 강판당했고,[30][31] 뒤이어 등판한 최원호가 곧바로 마해영에게 역전 끝내기 홈런을 연속으로 내주면서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마운드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 최원호의 마지막 모습 이후 LG는 10년 동안 가을야구를 맛보지 못했고, 다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까지 21년이나 걸렸다.

6.2. 200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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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3년 시즌을 앞두고 무려 6억이라는 연봉을 받으며 삼성 이승엽에 이은 리그 연봉 2위이자 투수 최고 연봉을 받게 되었고[32] 투수로써는 드물게 팀의 주장을 맡았다. 시즌 초 노장진, 조웅천과 함께 구원왕 자리를 다투다가 시즌 중반기부터 슬슬 맞아나가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33][34] 9월 중 어깨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35] 그리고 이게 이상훈이 현역 선수로써 LG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나온 마지막이 되었다.

7. SK 와이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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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200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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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14일, 스프링캠프 기타 파동으로 인해 이순철 감독과의 트러블을 빚었고 오승준과 양현석을 상대로 SK 와이번스에 트레이드되었다.[36][37]

당초 SK는 이상훈을 트레이드로 영입해 전년도 마무리 투수이자 구원왕이었던 조웅천과 좌완-우완 더블 스토퍼로 쓰려는 계획을 세웠고,[38] 실제로 시즌 초반에는 괜찮은 공을 던졌으나 얼마 안 가서 급격한 부진에 빠졌고, 결국 2군으로 내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2일, 친정 팀 LG를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없다[39] 6억이나 되는 연봉[40]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은퇴를 선언했다. 한편 SK는 이상훈이 돌연 은퇴를 선언하자 감독, 코칭스태프, 프런트까지 나서 그를 여러 차례 만류했지만[41], 그가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임의탈퇴로 공시되며 은퇴 절차가 마무리됐다. 설상가상으로 같이 뒷문을 맡던 조웅천마저 전년도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조범현 감독이 시즌 초 구상했던 이상훈-조웅천 더블 스토퍼 체제는 완전히 붕괴되면서 이 해 SK 와이번스는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다.[42] 훗날 이상훈은 LG와 상대하게 되면 아예 포기할 상태까지 왔다고... 즉 예전 모습만큼 위력이 나오지 않아서 공을 놓았다고 한다. 다만, 이상훈의 기량이 전년도인 2003년부터 완연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43] 이상훈-조웅천 더블 스토퍼 체제의 붕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현역에서 은퇴할 때 은퇴 사유로 친정팀 LG를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없다는 이유를 들기도 했으나, SK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첫 경기인 2004 시즌 개막전은 다름아닌 친정팀 LG 트윈스와의 경기였는데, 이 때는 마무리로 등판해 세이브를 거두고 포효하기도 했으며, 다소 의외지만 이후에도 몇 차례 LG 타선을 상대로 틀어막으며 포효를 한 적도 있다. LG를 상대로는 공을 던질수 없는 분.gif

다만 이는 선수 본인이 여하튼 새로운 팀으로 트레이드 되었으니 일단 마음을 잡고 던져 봐야겠다고 노력해봤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 일찌감치 마음을 접은 케이스라고 봐야 한다. 상술했지만 실제로 은퇴 당시 먼저 6억이나 되는 잔여연봉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정도로 은퇴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프로선수의 진심은 연봉을 포기하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몇 개의 움짤로 희화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8. 연도별 주요 성적

8.1. KBO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3 LG 28 150⅔ 9 9 0 - .500 3.76 129 10 78 131
(4위)
65 63 1.35
1994 27 189⅔ 18
(1위)
8 0 - .692 2.47
(5위)
140 9 64 148
(2위)
58 52 1.04
1995 30 228⅓
(1위)
20
(1위)
5 0 - .800
(1위)
2.01
(2위)
150 12 51 142
(5위)
61 51 0.87
1996 41 99⅓ 3 3 10 - .500 2.54 70 8 42 95 32 28 1.08
1997 57
(5위)
85⅓ 10 6 37
(1위)
- .625 2.11 56 6 27 103 23 20 0.95
2002 52 85⅔ 7 2 18
(4위)
0 .778 1.68 53 8 33 92 18 16 0.97
2003 55 56⅔ 4 4 30
(1위)
0 .500 3.34 42 4 21 55 22 21 1.1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4 SK 18 14 0 3 3 1 .000 5.14 11 2 9 15 8 8 1.43
<colbgcolor=#ffff99> KBO 통산
(8시즌)
308 909⅔ 71 40 98 1 .640 2.56 651 59 325 781 287 259 1.05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3 7완투 3완봉
(5위)
1994 6완투 2완봉
1995 12완투
(2위)
3완봉
(2위)
1999 2완투 0완봉
KBO 통산 27완투 8완봉

8.2. NPB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8 주니치 11 32⅔ 1 0 0 0 1.000 4.68 32 6 13 33 22 17 1.35
1999 36 95⅓ 6 5 3 0 .545 2.83 75 8 34 65 30 30 1.10
<colbgcolor=#ffff99> NPB 통산
(2시즌)
47 128 7 5 3 0 .583 3.30 107 14 47 98 52 47 1.16

8.3. MiLB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포터킷 레드삭스(AAA) 45 71 5 2 2 0 .714 2.03 51 5 25 73 23 16 1.06
2001 43 53 3 5 4 0 .375 5.43 52 11 17 44 33 32 1.28
<colbgcolor=#ffff99> MiLB 통산
(2시즌)
88 124 8 7 6 0 .533 3.48 103 16 42 117 56 48 1.15

8.4. MLB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fWAR bWAR
2000 BOS 9 11⅔ 0 0 0 0 - 3.09 11 0 6 6 4 4 1.29 -0.1 0.3
<colbgcolor=#ffff99> MLB 통산
(1시즌)
9 11⅔ 0 0 0 0 - 3.09 11 0 6 6 4 4 1.29 -0.1 0.3

[1] 서울고 시절 OB 선수단이 종종 찾아와 원포인트 레슨도 해 주고 야구 장비도 주고 갔는데, 이 당시의 OB 감독이 바로 김성근 감독이다.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성근 감독이 투구폼을 교정해 주었고 그 결과 구속이 5km나 늘어났다고 한다. 이상훈과 김성근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되어 2002년 LG, 2014년 고양 원더스로 이어진다.[2] 고려대학교에서만 17년 동안이나 감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선동열, 박동희, 조성민을 비롯하여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고대 출신 야구 스타들은 모두 그의 제자인 셈. 1993년 9월 조성민이 등판한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이 깨지는 순간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향년 48세로 타계했다. 고려대학교는 10여일 후에 열린 연세대학교와의 정기전을 감독 없이 치렀고, 분투 끝에 최 감독의 영전에 승리를 바쳤다.[3] 최남수 감독도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다 보니 이상훈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고 원래 상경한 선수들만 숙소 생활을 했지만 이상훈의 집안 형편을 감안해 숙소 생활을 하도록 했다.[4] 2022년 현재에도 KBO 투수들의 평균 구속은 시속 143km 정도임을 고려하면, 1990년대 초에 그 이상의 속도를, 그것도 좌완으로 던졌던 이상훈의 능력은 더욱 높이 평가될 수 있다.[5] 당시 연세대의 선발은 휘문고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며 일찌감치 주목받은 신입생 임선동이었다.[6] 이상훈은 계약금 2억 밑으로는 절대 싸인 안한다고 하자 최종적으로 구단에서 연봉포함해서 맞춰준 금액이다.[7] 7월까진 3연속 완투승으로 9승을 기록하는 등 훌륭한 페이스였지만 3연속 완투승을 기록했을 때 팔꿈치 통증을 이유로 한 달 간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다.[8] 이 해 신인왕은 타율, 출루율, 장타율 1위였던 양준혁이었고 나머지 4명의 후보는 득표순으로 이종범, 김경원, 박충식, 이대진이었는데 김경원은 9승에 23세이브와 방어율 2위까지 기록했고 박충식과 이대진은 각각 14승과 10승을 했으며 방어율도 훨씬 낮았다.[9] sWAR 7.79. 타자 1위는 sWAR 7.39의 홍현우.[10] 좌완 선발 20승 기록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편이다. 최초의 좌완 20승 기록 소유자는 삼성의 김일융 으로 구원 5승 포함 무려 25승을 기록하여 프로야구 좌완 최다승 기록보유자이다.[11] MVP를 김상호에게 뺏긴 이유는 김상호가 잠실 홈런왕과 101타점, 한국시리즈 우승 버프도 있었지만, (특히 기자들에게) 무뚝뚝한 태도 때문에 기자들에게 평이 안 좋았던 것도 있었다. (이는 1996년의 박재홍도 마찬가지. 이유는 다르지만)[12] 이 해 포스트 시즌에서 부진했던 이유는 시즌 후반기에 김태원이 부진으로 전력에서 이탈하자, 대체 선발을 기용하는 대신 LG 선발진 전체에 3일 휴식 후 등판하는 로테이션으로 선두를 유지하기 위한 무리수를 시작됐고(이상훈 김기범 정삼흠 박철홍 순으로 돌아갔다.) 이 중 가장 이닝 소화력이 출중했던 이상훈에게 당연하게도 부하가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당시 이상훈은 시즌 중반까지 20승이 거의 확실해 보일 정도로 리그를 압도하는 페이스를 보였지만 4일 로테이션이 시작된 이후 급격하게 승수를 쌓는 페이스가 떨어졌으며, 결국 시즌 최종 등판에서 쌍방울을 상대로 간신히 20승을 달성했다. 마지막 등판 쌍방울전에서도 9회에 교체를 거부하며 끝내 완투를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상태로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 이상훈의 체력은 당연히 바닥나 있었고, 결국 롯데에게 난타당하는 요인이 됐다.[13] 게다가 그 해 이상훈이 기록한 5패 가운데 해태와 롯데에게만 각각 3패와 2패를 당한데다가 LG 트윈스 역시 롯데와의 상대전적이 6승 12패로 절대열세였다. 정삼흠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발진이 롯데를 상대로 부진했고, 타자 역시 송구홍한대화 등을 빼고는 상대전적이 별로 좋지 못했는데, 반면 김응국, 박정태 등은 LG를 상대로 3할대 중후반의 타율을 기록했고 이종운은 무려 4할 8푼을 상회했다. 한편 OB의 입장에서는 LG에게 6승 1무 11패의 난감한 전적을 지녔으나 롯데에게는 9승 1무 8패로 근소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롯데가 올라오는 것이 당연히 유리했으며, 2선발 권명철은 롯데를 상대로 3승 무패를 기록할 정도였다.[14] 만약 롯데와 해태와의 전적에서도 성적이 좋고 한국시리즈로 직행했으면 준비하는데 여유있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15] 현재도 의자에 앉을때 자주 뒤척일 정도로 여파가 남아있다고 한다.[16] 모르는 사람들은 혈행장애가 96년부터 있었다고들 알고 있는데 실제 혈행장애는 98년에 생겼다. 일본시절 초기에 선발로 활동하다가 혈행장애 때문에 중간계투로 보직이 바뀐 것.[17] 여기서 사람들이 또 착각하는 것이 97년 보직변경은 혈행장애 때문이 아닌 선발을 하고 싶었던 김용수가 천보성 신임감독에게 자신이 선발을 하겠다고 우겨서 바뀐 것. 김용수가 잘 해서 망정이지 부진했다면 아마 엄청난 욕을 먹었을 것이다. 당시 이상훈 광팬들은 김용수의 이기적인 행보에 실망하는 분위기였지만 김용수 광팬들의 쉴드로 인해 이건은 유야무야. 실제 김용수의 이기적인 성격 때문에 이상훈이 김용수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물론 마무리로 뛰어본 이상훈이 마무리에 매력을 느낀 것은 맞다.[18] 다만 순수 세이브 개수는 정명원이 더 많았다.[19] 그러나 실제로는 블론 세이브도 많았다. 과감한 승부를 즐기는 탓에 0B2S나 1B2S처럼 유리한 카운트에서 성급하게 잡으러 들어가는 경우도 잦았거니와, 스피드에 비해 공이 가벼웠던 탓이다.[20] 이겨버리겠다. 제압하겠다는 서남 방언이다.[21] 당시 해외 진출을 시켜주지 않으면 은퇴해버리겠다고 못 박은 상태였던 데다가 포스팅 실패 후에도 미국에 체류해 절대 귀국하지 않을 기세를 보였다.[22] 모토키에게는 그 후도 6월 6일 경기에서 1사 만루에서 주자 일소의 3루타를 맞기도 했다.[23] 원래는 팀을 떠나려 했으나 여기서 때려치우면 저기서도 되겠냐는 선동열의 일갈을 듣고 다음 시즌에 배수진을 친다는 마음으로 2군행을 받아들였다. 사실 구단에서도 이상훈을 방출하고 해태가 제안한 임창용을 영입하려고 했으나 이상훈의 자세를 보고 철회하였다.[24] 당시 주니치에 소속된 선동열, 이상훈, 이종범대한민국 3총사라고 일컬었다.[25] 트리플A에서 71이닝 동안 2.03이라는 ERA를 기록하는 등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이 당시 트리플A의 수준은 NPB보다 조금 높은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주니치에서 이상훈의 잔류를 설득한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26] 이상훈 홈페이지 게시판에 전단장이였던 어윤태 사장이 돌아와 달라는 의사를 표시했고 이상훈은 추후에 '잠실에서 뵙죠.'라는 말과 함께 복귀를 암시하기도 했다.[27] 당시 전 구기 종목 통틀어 최고액 연봉이었다.[28] 복귀 당시 이상훈의 혈행장애를 몰랐던 김성근 감독은 그를 선발로 쓰려고 했다. 사실 이 당시 LG는 선발 투수가 부족했다. 외국인 투수 2명(만자니오, 케펜)과 노망주 김민기를 제외하면 선발감이 없었고 그래서 해외 진출 전에 선발로 맹활약했던 이상훈을 선발진에 넣고 기용하려 했던 것이다.[29] 만일 풀타임을 소화했다면 100이닝 돌파 확정이었을 것이다.[30] 나중에 KBS N 스포츠의 한국프로야구 10대 레전드 - 이승엽편에서 밝히기를, 병살타를 유도하려고 했는데 이승엽에게 맞았다고 했다. 3점차에 아웃카운트가 2개 남아있었기 때문에, 병살유도보다 한타자씩 차근차근히 잡아나간다는 생각으로 던졌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31] 다만 이승엽만 잡았을 경우, 그 뒤에는 앞선 5차전에서 이상훈에게 쓰리런 홈런을 때린 마해영이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미 구위가 떨어진 이상훈 입장에서는 이승엽에게 병살타를 유도해서 경기를 빨리 끝내는 것이 최선책이었다.[32] 이 당시 일화. LG와 삼성 양 구단은 전년도인 2002년 최고의 활약을 펼쳐온 각 구단의 두 선수를 연봉왕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도장을 찍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나, LG 쪽에서 2003년 FA가 되는 이승엽의 상징성을 인정하고 먼저 이상훈과 계약하겠다고 발표, 6억이라는 금액에 도장을 찍었다. 반면 삼성 쪽은 이승엽에게 5억 후반~6억 사이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LG가 이상훈에게 6억을 안겨주는 걸 보고 이승엽의 연봉을 6억 3000만원으로 정해 주었다고 한다.[33] 평소에 앓고 있던 혈행장애와 직전 해인 2002년 너무 무리했던 탓도 있다.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80이닝 이상을 던졌고, 거기다 부산 아시안게임, 그리고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연투를 했으니...[34] LG는 6월 승률 3할, 2할대의 롯데와 두산에 충격적인 6연패를 당했는데 마지막 경기인 6월 8일 두산전에서 이상훈이 6-3으로 앞서던 9회초에 충격적인 7실점을 기록하면서 무너졌다.[35] 그래도 쌓아놓은 세이브가 있던지라 세이브 1위를 차지했다. 다만 구원왕은 세이브포인트에서 앞서던 조웅천에게 넘겨주고 말았다.[36] 견해적 차이겠지만 홈구장 더그아웃에 기타를 치는 건 좋지 않다는 건 물론 동료나 상대팀 선수들에게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순철 전 감독의 생각이었고, 이후에 밝히길, 고양 원더스가 해체될 무렵 이순철과 만나 트레이드를 하게 된 경위를 듣고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다만 대놓고 나쁘게 말하는 게 싫었을 수도 있다.[37] 여담이지만 당시 삼성에서도 투수진 보강을 위해 이상훈의 트레이드를 제안했는데, 삼성이 내밀었던 카드는 2년차 좌완 투수던 권혁이었다. 마침 새로 부임한 선동열 수석코치가 이상훈과 고려대 선후배 출신이기도 하고 일본 주니치에서 같이 뛰었던 적도 있어서 이상훈을 삼성으로 데려오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LG 측에서 추가로 현금을 요구하고 김응용 당시 삼성 감독이 막판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고. 그외에도 롯데 역시 뒷문 보강을 위해 이상훈의 트레이드를 고려했다고 하나, 양상문이 롯데 감독으로 부임했고, LG 투수코치 출신이라 이상훈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던 데다가 적지 않은 나이, 부상 경력, 높은 몸값 등을 고려하여 그냥 논의에 그쳤다고 한다.[38] 2004년 SK 팬북을 보면 이상훈과 조웅천의 인터뷰 및 2004 시즌 SK의 더블 스토퍼 운영에 대한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39] 여담이지만 SK에서의 데뷔전은 개막전인 문학 LG전이었는데 이 경기에서는 세이브를 기록했다.[40] 20년 전 물가로 현재와 비교하면 실질적으로 더 많은 액수다. 거기에 이 연봉은 공을 한 번도 안 던져도 자동으로 받는 금액이었다.[41] 조범현 감독이 직접 상훈아, 차라리 나랑 같이 그만두자!라고 말했을 만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42] 물론 이 해 SK가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또 다른 원인은 시즌 중반 외국인 타자 틸슨 브리또가 상대 덕아웃을 습격한 사건으로 20경기 출전 정지를 당한 것도 있었다.[43] 당시 나이도 33세로 선수로써는 적지 않은 나이었고, 고질병인 손가락 혈행장애와 어깨 탈구증세가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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