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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12:39:26

마리우 자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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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 자갈루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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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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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 자갈루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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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우승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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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前 축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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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이름 마리우 자갈루
Mario Zagallo
본명 마리우 조르지 로부 자갈루
Mario Jorge Lobo Zagallo
출생 1931년 8월 9일
브라질 합중 공화국 알라고아스주 아탈리아시
사망 2024년 1월 5일 (향년 92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
[[레바논|]][[틀:국기|]][[틀:국기|]] |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67cm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1]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선수 아메리카 FC (1948~1949)
CR 플라멩구 (1950~1958)
보타포구 FR (1958~1965)
감독 보타포구 FR (1966~1970)
브라질 대표팀 (1967~1968)
브라질 대표팀 (1970~1974)
플루미넨시 FC (1971~1972)
CR 플라멩구 (1972~1974)
보타포구 FR (1975)
쿠웨이트 대표팀 (1976~1978)
보타포구 FR (1978)
알 힐랄 FC (1979)
바스쿠 다 가마 (1980~1981)
사우디 대표팀 (1981~1984)
CR 플라멩구 (1984~1985)
보타포구 FR (1986~1987)
방구 AC (1988~1989)
UAE 대표팀 (1989~1990)
바스쿠 다 가마 (1990~1991)
브라질 대표팀 (1994~1998)
포르투게자 (1999)
CR 플라멩구 (2000~2001)
브라질 대표팀 (2002 / 감독대행)
기타 브라질 대표팀 (1991~1994 / 기술고문)
브라질 대표팀 (2003~2006 / 기술고문)
레바논 대표팀 (2011~2024 / 고문)[2][3]
국가대표 33경기 5골 (브라질 / 1958~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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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번(브라질 / 1962 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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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2.3.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경력4. 사망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5.2.2. 개인 수상
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브라질축구선수 출신 감독.

스타 플레이어 출신 감독의 성공적인 예시 중 시초 격인 인물로 FIFA 월드컵 역사상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인물이다.[4]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48년 아메리카 FC에 데뷔한 자갈루는 1년간 뛰다가 1950년에 CR 플라멩구로 이적하여, 1953년부터 1955년까지 리우데자네이루 주립 리그에서 3연패를 이끌었다.

이후 1958년에 보타포구 FR로 이적하여 1962년에 리우데자네이루 주립 리그, 리우-상파울루 토너먼트를 비롯한 6개의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클럽 축구 역사상 최초의 6관왕을 달성한다. 이후 1965년에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58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했고 1958년 스웨덴 월드컵[5]에 출전했다. 개최국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 브라질은 5:2 대승을 거두며 브라질의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이루었다. 자갈루는 직접 골을 넣고 펠레의 헤딩골까지 어시스트했다.

1962년 칠레 월드컵[6]에도 참가했는데, 조별리그 첫 경기인 멕시코전에서 펠레의 어시스트로 1골을 넣어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체코슬로바키아와의 2차전에서는 펠레가 부상으로 결장했지만 마리우두가 펠레의 공백을 훌륭히 메웠고, 가린샤가 제대로 폭발하여 승리를 거뒀다. 스페인과의 3차전은 아마리우두가 2골을 넣어 2:1로 승리했는데 자갈루는 이 경기에서 아마리우두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이후 8강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가린샤의 선제골을 코너킥으로 어시스트했고 브라질은 3-1로 잉글랜드를 이겼다. 4강에선 칠레를 상대로 가린샤와 바바의 골을 어시스트했고 브라질은 다시 한 번 결승전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전반전 요제프 마소푸스트에게 선제골을 먹혔긴 하나 자갈루가 아마리우두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1-1 균형을 맞췄다. 이후 브라질은 2골을 넣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게 3-1로 이겼다. 이렇게 브라질은 월드컵 2연패를 달성한다. 자갈루는 이 대회에서 6경기 1골 5도움을 기록하며 도움왕에 올랐고, 당연히 대회 올스타팀에도 선정되었다.

2.3. 플레이 스타일

기술적이고 헌신적인 윙어였다. 엄청난 스피드와 체력으로 수비 진영에서 볼을 달고 역습하는 것을 즐겼으며, 헌신적으로 수비 가담을 하기도 했다.

3. 지도자 경력

국가대표팀에서 펠레와 마찰을 빚었던 감독 주앙 사우다냐가 월드컵을 세 달 앞둔 시점에서 경질된 직후 자갈루가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이 때 자갈루는 열린 마인드를 가지고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제르송, 펠레가 자발적인 회의로 직접 고안해낸 전술을 팀 메인 전술로 받아들이며 팀 선수들과의 활발한 소통을 꾀하였다. 이러한 자갈루의 개방적인 성격 덕에 전임 감독 사우다냐의 압박에 눌려 있던 브라질 팀은 창의성과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결국 1970년의 브라질은 가히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며 FIFA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성적(예선 포함 12경기 12승, 본선 6경기 19골 등)을 거둘 수 있었다. 참고로 자갈루가 감독을 맡았을 때 나이가 38세였는데, 이는 역대 월드컵 우승 감독 중 두 번째로 젊은 나이이다.[7]

1994년 미국 월드컵[8] 당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기술 고문으로 다시 한 번 월드컵을 들어올렸다.

199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어 남미 대륙 최초로 FIFA 월드컵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동시에 거둔 감독이 되기도 했다.[9]

1998년 프랑스 월드컵[10] 때 다시 한번 감독을 맡아 브라질 대표팀을 결승전으로 이끌었으나 에메 자케가 이끄는 프랑스에 0대 3으로 완패했다.

명실상부한 브라질 축구계의 제일 큰어르신이지만 소싯적에는 극성맞은 브라질 축구팬들에게 막대한 비난과 욕을 사발로 퍼먹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욕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1974년 서독 월드컵[11]에서 브라질은 펠레, 제르송의 은퇴부터 시작해서 펠레의 후계자로 기대받던 토스탕의 부상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은퇴로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죽을 쑤는 경기력을 보였는데 유고슬라비아스코틀랜드를 상대로 0 : 0 유기농 무를 캐는 굴욕을 당했고 아프리카 예선 우승팀인 자이르를 3 : 0으로 겨우 꺾어[12] 스코틀랜드를 골 득실 차에서 1골 차로 앞서 밀어내고 겨우 2라운드 8강 조별리그에 진출했다. 그러나 요한 크루이프가 버티던 네덜란드에 0 : 2로 패하면서 8강 조 2위로 탈락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는데[13], 이 패배에 빡친 브라질 축구팬들이 자갈루 감독의 자택을 습격해 기물을 파손하는 짓거리를 했고, 전원 기물파손 혐의로 브라질 현지경찰에 잡혀갔다. 그 뿐 아니라 당시 브라질에는 독감이 유행했는데 브라질이 월드컵 우승에 실패했다는 죄목으로 이 사람의 이름을 따 자갈루 독감이라고 명명했다. 즉, 사람을 독감 바이러스 취급해버린 건데, 이 정도의 인격 모독을 당한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또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에는 브라질을 결승으로 이끌었음에도, 결승전에서 대패했다는 이유로 청문회에 끌려가기도 했다. 당시 호나우두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고 수비적인 경기 운영은 결국 프랑스전 대패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2002년 11월 20일 대한민국과의 평가전에서 3-2로 승리하며 감독으로서 A매치 통산 100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호나우두가 2골을 넣고 호나우지뉴페널티 킥으로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 축구계의 위대한 원로에게 큰 선물을 안겼다. 참고로 이 경기는 대한민국의 축구 영웅 홍명보, 황선홍의 은퇴 경기로도 유명하다.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브라질 대표팀의 코칭스태프로 합류했다. 그러나 또 한 번 프랑스에 8강에서 막혀 발길을 돌렸다.

이후 CR 플라멩구, 플루미넨시 FC 등 브라질 명문 팀들을 이끌었다.

4. 사망

2024년 1월 5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병원에서 각종 합병증에 따른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서 그는 1958년 월드컵 우승 멤버들 중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6. 여담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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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컨드 스트라이커레프트윙[2] 기술고문(Coodinator)가 아니라 단순한 조언 역할을 맡는 '고문(Advisor)'이다.[3] 자갈루는 레바논계 이민자의 후손이다.[4]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한 인물은 프란츠 베켄바워디디에 데샹, 그리고 자갈루 셋뿐이다. 참고로 자갈루는 우승 당시 58년에는 이우데라우두 벨리니, 62년에는 마우루 하무스가 있어서 주장은 아니었고 베켄바워와 데샹은 주장이었다.[5]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6]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7] 제일 젊은 감독은 1930년 월드컵 우루과이의 감독이었던 31세 알베르토 수피시다.[8] 마지막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9] 이 기록은 남미 축구 역사상 리오넬 스칼로니와 자갈루 둘만이 가진 기록이며 전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유로와 월드컵 우승을 이끈 헬무트 쇤, 비센테 델보스케 단 4명만 달성한 기록이다. 다른 감독들은 코로나로 인한 스칼로니의 1년을 제외하면 2년 만에 달성했지만 자갈루는 27년이 걸렸다.[10] 첫 32개국 본선 진출 대회[11]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12] 참고로 당시 자이르 대표팀은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가 유고슬라비아전을 앞두고 유고슬라비아 출신 비디치 감독을 경질하는 바람에 감독없는 팀이었다! 그런데 유고슬라비아가 자이르를 9-0으로 대파하는 동안, 브라질은 우주의 기운을 받고도 고작(?) 3-0으로 이겼다.[13] 1974년과 1978년 월드컵은 8강도 조별리그 방식이었고 8강 각 조 1위만 결승행, 8강 각 조 2위는 탈락해서 3,4위전으로 갔다. 4강전이 없었다.[14] 1개월 후 당시 스웨덴 대표팀마지막 생존자였던 쿠르트 함린마저 사망하면서 1958년 월드컵 결승전에 참가했던 선수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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