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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자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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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colbgcolor=#bf1400> 경희궁 자정전
慶熙宮 資政殿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신문로2가)
건축시기 1620년 (창건) / 2001년 (복원)
파일:external/dunggu.com/gyeonghuigung15.jpg
<colbgcolor=#bf1400> 자정전

1. 개요2. 역사3. 정문4. 구조5. 여담6.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경희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임금신하들과 함께 정무를 보고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이다. 경희궁 정전 숭정전의 바로 북쪽 뒤편에 있다.

'자정(資政)' 뜻은 '정사(政)를 돕는다(資)'이다.# 현재 현판은 서예가 송천 정하건 선생(松泉 鄭夏建. 1939 ~ )이 썼다.#

2. 역사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었다. 편전으로 처음 사용한 시기는 1624년(인조 2년)부터이다. 이괄의 난으로 중건한 지 얼마나 됐다고 창덕궁창경궁이 불타자 인조가 경희궁[1]을 사용하면서 그 때 비로소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빈전으로 주로 사용했고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는 용도로 쓰기도 했다. 숙종, 영조 연간까지 활발히 사용되었으나 정조 이후부터는 사용이 뜸해졌으며 순조가 간간히 이용할 뿐이었다. 빈전[2]으로서의 사용이 빈번하고 접근성의 문제도 있어서, 조선 후기에는 내전과 가까운 흥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했다.

1865년 고종경복궁 중건을 하면서 경희궁을 헐어 경복궁 공사의 자재로 썼다. 이 때 자정전도 철거했다. 흔히 일제가 없앴다고 알고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 중건일기》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 숭정전을 찍은 사진을 보면 자정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정전이 없다. 이로 보아 고종 시기에 자정전을 없앴음을 알 수 있다.
파일:알레베크 사진엽서 경희궁 숭정전.jpg
<colbgcolor=#bf1400> 1901년 이전에 촬영한 경희궁 숭정전 사진
(프랑스어 교사인 샤를 알레베크가 제작한 사진 엽서의 사진)
일제강점기 이후 일제는 자정전 터에 경성중학교 교사를 세웠다. 8.15 광복 후에는 서울고등학교가 사용하다가 1990년대에 서울특별시문화재청에서 경희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기존 학교 건물을 철거했다. 그 뒤 발굴 조사를 거쳐 2001년 복원을 완료하여 오늘에 이른다.
파일:복원 공사 중인 자정전.png
<colbgcolor=#bf1400> 복원 공사 중인 자정전. 왼쪽 사진은 북쪽에서, 오른쪽 사진은 남쪽에서 바라 본 모습이다.[3]

3. 정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희궁 자정문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구조

파일:자정전 내부.png}}} ||
<colbgcolor=#bf1400> 자정전 내부
내부는 칸막이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대들보 위를 우물천장으로 가려 서까래가 바로 보이지 않게 했다. 그리고 실내에도 단청을 칠하여 보존성을 높임과 동시에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다른 궁궐과 달리 내부의 옥좌 및 당가[5]복원되지 않았고 바닥도 전돌이라 신발을 벗고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파일:자정전 축.png}}} ||
<colbgcolor=#bf1400> 자정전과 자정문의 축
정문 자정문은 자정전과 일직선 상에 있지 않으며 자정전보다 더 서쪽에 있다. 이 역시 지형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자정문의 동쪽 칸과 자정전의 서쪽 칸이 마주보고 있다.
파일:서궐도 자정전.png}}} ||
<colbgcolor=#bf1400>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에서 묘사한 자정전
위에 언급한 것처럼, 조선 후기에 들어 다른 궁궐의 편전과 마찬가지로 혼전/빈전의 기능을 주로 맡았다. 이에 따라 혼전/빈전에 설치하는 복도각을 설치했다. 여기서 복도각은 혼령이 드나드는 길이란 의미를 가진다. 고종 시기 자정전을 철거할 때 같이 헐었다. 2001년 자정전 본전을 복원할 때 같이 짓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른다.
파일:자정전 전돌1.png}}} ||
<colbgcolor=#bf1400> 자정전 전돌 유구
자정전 서쪽 측면 출입문과 붙어있는 복도각 아래에 실제 조선 시대 당시의 전돌 유구를 발굴하여 보존 중이다.

5. 여담

파일:경희궁 서암.jpg}}} ||<width=494>
파일:서암의 샘.png
||
<colbgcolor=#bf1400> 태령전 뒤에 있는 서암 <colbgcolor=#bf1400> 서암의 샘
자정전에서 태령전으로 넘어가는 길에 거대한 바위가 있다. 이를 서암이라 한다. 원래 ‘왕의 바위’란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렀는데 왕의 기운을 나타낸다 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동생 집 뺏고[6] 경희궁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숙종 때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란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큰 돌에 ‘瑞巖(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겼다.

6. 매체에서

2000년대 후반 들어 문화재 보호 등의 이유로 경복궁, 창덕궁 촬영이 어려워지면서, 드라마, 영화 제작사에서는 경희궁에서 촬영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숭정전이나 태령전에서 촬영하는 경우가 많고, 자정전은 지나가는 배경 정도로만 등장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파일:장희빈 65회 자정전.png
파일:사도 자정전 내부.png
<colbgcolor=#bf1400> KBS2 《장희빈》 65회에 등장한 자정전[7] <colbgcolor=#bf1400> 영화 《사도》에 나온 자정전 내부
KBS2 드라마장희빈》에서는 숙빈 최씨(박예진 분)의 처소로 나왔고 영화사도》에서 대왕대비 인원왕후(김해숙 분)의 빈전 내부를 이 곳에서 찍었다. 상복을 입은 영조(송강호 분)와 사도세자(유아인 분)가 절하는데 그 와중에 영조는 인원왕후의 사망이 사도세자 때문이라며 또 갈군다(…).


[1] 당시 이름은 경덕궁.[2] 빈전(殯殿):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3] 사진 출처: MBC Archive.[4] 보통 전통 건축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5] 옥좌 위에 만들어 다는 모형.[6] 원래 경희궁 자리가 광해군의 동생 정원군의 집터이다. 광해군에게 아들역모로 억울하게 몰려 죽고 집마저 뺏기면서 정원군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나중에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로 즉위하면서 뺏긴 집을 도로 다시 찾은 모양새가 되었다.[7] 참고로 극본을 맡은 강태완은 사실 신봉승 작가로, 당시 가명으로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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