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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5:38:00

영혼

혼령에서 넘어옴

1. 개요2. 관점
2.1. 동아시아의 관점2.2. 유럽의 관점
2.2.1. 고대 그리스 철학의 관점2.2.2. 기독교적 관점
2.3. 기타 관점2.4. 학술적 관점
2.4.1. 영혼의 무게?2.4.2. 영혼과 뇌 관련 사고 실험
3. 매체4. 속어5. 언어별 명칭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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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로 묘사된 기독교 종교관의 영혼

1. 개요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가톨릭 성경. 말 그대로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번역본)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공동번역. 정교회성공회에서 사용하는 번역본으로,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동으로 번역한 번역본이다.)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고 하시니라.(킹 제임스 버전)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개역개정. 성공회 이외에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번역본)
요한 복음서 4장 24절
"훌륭한 신체에 고결한 정신이 깃든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식스가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흔히 유베날리스가 최초로 쓴 표현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저이다.[1]

사람육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정신의 근원이 되는 비물질적인 대상.

2. 관점

믿는 사람과 문화권마다 영혼의 개념이 다르다.

2.1. 동아시아의 관점

동아시아에서는 혼()도 ()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람이 죽으면 육체가 썩어 없어지듯이 영혼도 하늘에서 흩어진다고 생각했다. 동아시아의 세계관에서 기(氣) 개념은 오컬트 개념이 아니며 경험론적인 성격을 가지기에, 동아시아의 혼 개념은 초자연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온갖 민간 신앙이 짬뽕되어 결합되는 경우가 다반사라, 초자연적 개념이다. 이를테면 유교조상 제사는 원칙적으로는 초자연적 개념이 일체 배제되어 있으나, 실제로 제사를 지낼 때는 영혼이 들어오라고 대문을 열어놓는 식으로 진행된다. 혼백이 영혼이랑 같은 뜻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 혼백 중에서 혼(魂)만 영혼과 비슷한 뜻이고, 백()은 육체에 가까운 개념이다. 《예기》 교특생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魂氣歸于天, 形魄歸于地: 혼기(魂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형백(形魄)은 으로 돌아간다.

동아시아의 옛날 세계관에서는 사람이 뭔가 자연적이지 않고 억울하게 죽었을 경우, 백(魄)만 죽고 혼(魂)은 남아서 난동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액(), 살() 등으로 부른다. 물론 혼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흩어지지만, 흩어지기 전까지 난동을 부리기 때문에 무당이 '살풀이'를 해 준다고 본다. 동아시아의 귀신 이야기에서, 귀신이 툭하면 이 쌓여 있고 그게 풀려야 이승에서 물러나는 이야기가 많은 건 이런 개념들 때문이다. 또 불교윤회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흩어진 영혼은 소멸하는 게 아니라 다시 환생한다고 한다. 재패니메이션의 영향으로 귀신이 이승에서 물러나는 것을 성불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성불은 본래 '부처가 된다'라는 뜻이며 사람이 이승에서 물러날 때 성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표현은 아니다. 정토종의 믿음이 강한 일본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서방 정토로 갔으니 성불하였다"라는 식으로 표현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2.2. 유럽의 관점

2.2.1. 고대 그리스 철학의 관점

그리스 철학에서는 영혼을 인간 생활의 원칙으로 보았는데 플라톤은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영혼이 삼부(三部) 구조로 되어 있어서 감각적인 욕정의 원리인 탐욕혼(貪慾魂, έπιθυμητικόν)이 복부에 자리 잡고 있고, 용기정기의 원리인 기혼(氣魂, θυμοειδές)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생각의 원리인 지혼(知魂, λογιστικόν)이 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지혼은 불멸의 신적(神的)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자연 철학적인 원리인 질료 형상론(質料形相論, Hylemorphism)으로 설명한다. 모든 사물의 구조 원리가 그렇듯이 모든 생물의 구성 원리는 원질(原質) 혹은 질료와 체형(體形) 혹은 형상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모든 생명체의 체형 또는 형상이 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형상론은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 토마스 아퀴나스를 위시로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정립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플라톤이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 본 관점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의 극단적 이분법을 배제했고, 그 둘 사이의 관계가 매우 긴밀함을 강조했다. 현대인에게 쉽게 설명을 하자면, 인간의 이성감정은 '신경계전기 작용'과 '호르몬화학 작용' 등에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즉 영혼의 작용이면서, 동시에 신체의 작용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누었다.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해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영원히 살도록 되어 있는 영혼, 곧 지혼은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적인 본질과 활기를 불어넣는 원리 그리고 생명을 활동케 하는 원인이며, 육체와 결합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관점은 가톨릭 교회에서 그대로 수용하였고, 서구의 전통적인 영혼관으로 굳어진다. 현행 가톨릭 교리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트리엔트 공의회 《로마 가톨릭 교리서》(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 요리문답》)에 따르며,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한 자니라”라고 되어 있고, 현행 《가톨릭 교리서》에도 “하느님은 육체와 영혼으로 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으며 그리고 “영혼은 죽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관은, 후술하겠지만 그리스도교에 수용되어서 유럽의 전통적 영혼관을 이루게 된다. 물론 오늘날에는 동서양의 문화 교류로 인해서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중이므로, 서구의 오컬트에서도 선한 사람의 영혼이 한이 쌓여 이승에 남아 있다는 식의 이야기도 나올 수 있다.

2.2.2. 기독교적 관점

한편 그리스도교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 복음서에서 특히 영과 육을 구분해서 말하며, 기본적으로 이러한 이부적인 관점으로 시작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오 복음서 10장 28절 중 (공동번역 성서)
다만 예외적으로 데살로니카인에게 보낸 서간에서는(1데살 5:23) 사도 바울로가 삼부적인 관점(영과 혼과 육)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바울로의 분류법 중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케이스로 바울로는 통상 이런 분류법을 쓰지는 않는다. 공동번역에서는 심령과 영혼과 육체로 말하는데, 현 가톨릭 성경과 개역성경 및 개신교 표준새번역에서는 영과 혼과 육으로 옮긴다.
여러분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고 흠 없게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5장 23절 중 (공동번역 성서)
때문에 학자에 따라서는 제일 앞의 '여러분의 영' 부분을 '여러분 자신'의 동의어로 이해하여, '여러분 자신 곧 영혼과 육체'로 옮기기도 한다. 한편 가톨릭의 New Jerusalem Bible에서는 이를 각각 spirit, life, body로 옮겼다.

아무튼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학문화하는 과정에서 초대 교부(敎父)들은 이교도들의 유물론적 범신론적 또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가미하여 구구한 학설이 나왔다.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들어 영혼의 육체성을 주장하였고, 성 이레네오(St. Irenaeus)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오리제네스(Origenes)는 플라톤학파의 영향을 받아 영혼의 전생설을 지지하고 전생의 때문에 영혼이 육체 속에 갇히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잡다한 교부들의 설은 니케아 공의회 뒤 거의 없어지고,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성 아우구스티노, 네메시오(Nemesius, 4세기)와 증거자 성 막시모(St. Maximus Confessor, 6세기)에 이르러 이미 중세 스콜라 철학의 영육이 이부 구조적인 인간관이 형성되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형상론의 자연 철학을 따르면서 인간 혼은 개성을 가진 영체로서 육신의 체형 또는 형상이 된다고 정의하였다. 영혼은 죽은 뒤에라도 육신과 떨어져 단독으로 존재하나 살아있는 동안은 육신과 합하여 완전 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영혼은 육체와 합하기 위하여 만들어졌고 순수 영체로서 불사불멸하지만 천사와는 다르다. 영혼이 어떻게 생겨서 육체와 결합하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창조설로 낙착되었다.

가톨릭은 인간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도 의식 있는 개별적 존재로서 계속 존속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 시, 영화롭게 변화된 육체가 영혼과 재결합되어 부활할 것을 믿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수용했기에, 영혼이 이승에 남아서 빙의되거나 난동을 부리거나 하는 현상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구약에서 점쟁이가 저승에 있는 사무엘의 혼을 불러내는 이야기는 있다.(1사무 28장). 그래서 그리스도교적 영혼관을 지지하는 관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사무엘의 영혼이 나타난 것이 사탄의 속임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동아시아의 오컬트에서 귀신들이 할 법한 이런 짓들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는 악마들 담당이다. 당연히 선한 귀신이 도움을 줬네 마네 하는 동아시아적인 이야기는 전통적인 유럽식 영혼관에서는 어색해진다. 그렇지만 악마를 골탕 먹이는 이야기는 있다. 이를테면 악마가 인간과 계약할 때 소원수리의 대가로 대개 가져가지만, 솔로몬은 머리가 좋아서 영혼을 뺏기지도 않고 계속 악마의 재산을 갈취했다는 옛이야기가 있으며, 톨스토이의 소설 <바보 이반>에서도 악마를 골탕 먹이는 묘사가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도,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도 인간의 영육은 완전한 독립의 관계는 이루지 못한다. 완전한 독립을 주장한다면 영지주의적 관점이기 때문에 이단이다.

이러한 관점들로 볼 때, 유럽의 spirit이라는 '정신' 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가톨릭 신학자인 카를 라너는 인간을 "Spirit in the World'으로 설명했는데, 이는 "세계 내 영혼"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세계 내 정신"으로도 옮겨진다. 라너의 이런 관점은 자신에게 철학을 가르친 스승마르틴 하이데거의 이론으로부터의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개신교신학에선 다르게 보는 경우도 있다. 애초에 개신교 신학은 스콜라 철학이 그리스 철학에 지나치게 종속되어 있는 것을 비판하며 나왔기에 인간이 물질인 육체와 비물질인 영혼으로 이뤄져 있다는 이원론은 애초에 플라톤적 해석이라 본다.

김기현 박사(한국침례신학대학교 종교철학·현대영미신학)는 "인간에게 영혼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영', '영혼'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김 박사는 이 단어 의미를 살펴보며 설명하길, 성경에 나오는 영, 영혼을 원문으로 번역하면 '네페쉬(히브리어)'다. 네페쉬는 구약에 755회 등장한다. 영어로 soul, 한국어로는 영혼이라고 번역된다. 한스 발터 볼프(Hans Walter Wolff)의 해석을 인용하면서 네페쉬를 해석했다.
"네페쉬가 의미하는 것은 '영혼'이 아니다. 네페쉬는 인간 모습 전체와 특히 인간의 호흡을 총망라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인간은 네페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인간)가 곧 네페쉬이다."
-《구약성서의 인간학》(분도출판사) 29쪽.
네페쉬가 신체이자 영혼이고, 감정이자 의지라는 의미다.

김 박사는 영국 IVP가 출간한 《새성경사전》에 실린 '영혼'의 뜻도 소개했다. "대개 네페쉬는 죽으면서 떠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는 결코 죽은 자의 영혼으로 사용된 적은 없다." 김 박사는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됐다는 이원론에 사로잡혀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곧바로 천국으로 간다는 전통적 이해는 성경의 해석과 상당히 어긋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기독교의 관점에서 동물에게는 인간과 같은 영혼이 없다. 하지만 일부는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는 주류 기독교, 신학에서 인정하는 내용이 아니다. 참고

2.3. 기타 관점

인도부터 유럽까지의 서양 세계관에서는 고대로부터 영혼을 육체와 구별되는 비물질적이고 초자연적인 불멸의 정신적 실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이야기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거래를 인간이 허용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다만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귀신처럼 영혼이 지상에 머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죽으면 그대로 사심판을 거쳐 천국지옥연옥 중 한 곳으로 간 후, 최후의 심판 때(공심판)가 되면 새로운 몸을 갖고 부활해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믿기 때문에, 일상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말은 어떤 선행을 하건 상관없이 지옥행을 예약하는 패악적 행위를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될 때가 많다.(파우스트메피스토펠레스의 계약이 그랬던 것처럼) 개신교에서는 연옥을 부정하고, 가톨릭은 인정하며, 동방 교회는 연옥이라는 용어는 안 쓰되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를 고백한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만화 등에서 나오는 것처럼 악마랑 특별한 계약을 맺은 사람만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전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들이다.

많은 경우에 영혼이라는 개념은 곧 자아와 동일한 것이며, 육체를 살아있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식으로든 영혼이 육체에서 빠지면 육체가 죽고, 영혼을 육체에 넣으면 되살아나거나 하는 서브컬처의 묘사가 이런 의식을 뒷받침한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양 세계관. 동아시아인들도 20세기를 거치면서 서양화되어 버린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영혼의 불멸을 지지한다. 대개의 문화권에서는 육체가 죽음을 맞아도 영혼은 존재한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동북아시아영혼결혼식이라는 것도 있다. 또한 이 논리를 이용하여 환생에 대한 설정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는 영혼에 준하는 중음(antarabhava)나 의성신(manomaya-kaya)과 같은 존재 상태를 긍정하지만, 이러한 존재 상태가 윤회에 어떻게 개입하는지는 부파마다 설명이 조금 다르다. 상좌부는 죽는 순간의 의식이 재생연결식을 거쳐 바로 다음 생의 첫 의식으로 이어진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대승은 설일체유부의 영향을 받아서 죽음 이후 중음을 거쳐 육도윤회한다고 설한다. 하지만 타 종교에서의 영혼의 묘사와 유사한 특성을 보여주는 '미세한 몸'의 존재는 긍정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바이킹을 위시한 북유럽 민족들 사이에서는 과거 용맹히 싸우던 도중 죽은 자의 영혼은 발키리가 회수하여 천국 발할라에 모셔진다고 했다. 다만 이 발할라라는 동네가 다른 동네에서는 굉장히 지독한 지옥 취급받는 동네와 묘사가 거의 같다 보니 차라리 그냥 성불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지만. 북유럽 신화에서는 매일매일 싸움을 벌여 다 죽을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운다. 그 후 저녁이 되면 다시 살아나 돼지를 잡아 거하게 잔치를 벌이며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또 싸워야 한다. 이것을 최후의 날까지 무한 반복.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수라도라고 불렀다(...). 하지만 발할라의 주인인 오딘이 가지는 성격과 당시 북유럽 신화를 믿던 이들의 입장에서는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하다. 발할라는 용맹한 전사가 인도되는 곳이니 말이다.

살아있는 자의 영혼은 생령(生靈), 죽은 자의 영혼은 사령(死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생령은 사실 그냥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령은 보통 자연에 깃든 신령한 기운에서부터 요정이나 애니미즘의 대상을 가리키는 등 대상 범위가 넓다. 한편 성령은 보통 기독교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인데, 이는 일반적인 영혼과는 개념이 많이 다르다. 자세한 건 삼위일체 참고.

어떤 억울한 사유로 인해 죽어서도 계속 돌아다니는 영혼은 유령이라고 한다. 망령은 죽은 자(亡)의 영혼이라는 뜻이고, 원령은 원통해하는 영혼이라는 뜻. 악령은 악한 영인데,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악마의 영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여튼 싸잡아서 귀신이나 유령이라고 부른다.

인문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경우 영혼을 태초의 뒤엉킨 자연에서 분리된 주체와 객체와의 간극이라고 본다. 자신의 신체를 포함하여 자연을 객관적인 관조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이란 자연과 분리될 수 있는 주체의 자유 의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혼은 주체의 자유 의지의 형성점이자 주체를 자연과 분리시키는 분절의 경계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결과적으로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언가에 혼을 바친 듯 열심히 하는 뜻으로 '영혼의~'라는 수식어가 속어처럼 종종 붙는다. 대표적으로 영혼의 맞다이, 영혼의 백도어 등등.

내셔널 지오그래픽통계에 따르면 94% 정도의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에 대해 긍정하고 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서양이나 동아시아이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옛날부터 보편적이었다 보니 당연한 수치일지도.

2.4. 학술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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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지성계에선 후에 기독교라는 종교적 문제와 상관없이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물질적인 세계와 이상적인 세계는 구분되며 소통할 수 없고 다다를 수 없는 세계로 여겼기에 동아시아처럼 정신적 활동과 물리적 세계가 연결된다는 기(氣) 내지 천인감응 같은 사상은 없었다.

따라서 영혼의 유무는 과학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분야도 아니었고, 관심이 있는 분야도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인 기독교 신학 관점에 따라 영혼을 '정신'으로 해석하든, 동아시아의 관점에 따라 '기(氣)'로 해석하든, 이야기책에서 나올 법한 오컬트적인 영혼이든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과학은 유물론적인 학문이고, 영혼은 어느 쪽의 정의를 따르든 간에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영혼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반(Anti)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비(Non)과학적인 것이라고 정의되어 왔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영혼의 경우, 과학과 모순을 일으키지는 않으므로 반과학적이지는 않지만, 과학에서 다루는 영역 밖에 있었기에 비과학적이었다.

하지만 생물학심리학이 발달하고 인지 과학이 출현하면서 (신체와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고 주장되는 의미인 실체 이원론으로 한정하여)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과학의 역할이 커지게 되었다. 특히 가 인간의 의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근거가 곳곳에서 나타나자 '물리적 실체와 떨어진 영혼이 있다는 실체 이원론'은 위협받기 시작했다. 60년대에는 많은 심리 철학자들이 실체 이원론을 방어하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훌륭한 논증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점점 인지 과학적 증거가 쌓여가자 실체 이원론자들의 입지가 줄었다. 그리하여 현재 다수의 심리 철학자들을 비롯한 학계의 전문가들은 신체와 분리된 실체로서의 영혼의 존재를 배제하고 있다.[2]

심신 일원론 측에선 뇌과학적으로 접근한다. 대표적인 예로 허균 교수(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신경학과)는 뇌를 하나의 컴퓨터로 비유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진화를 거치며 생존해 온 선대의 특징들을 담은 우리의 는 이미 컴퓨터처럼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했다. 욕망, 가치 판단, 선택, 행동, 수행 평가, 학습 등 뇌 안에서 작용하는 모든 현상은 이러한 프로그래밍의 결과다.

한 예로 '욕망'을 살펴보자.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이 에 공급되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것도 욕망할 수 없다. 단순히 멍한 상태가 된다. 허균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자신의 강연에 청중들이 늦은 저녁 가 내리는 신촌 거리를 뚫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강당에 찾아와 강의를 듣는 것도, 도파민이 뇌에 공급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조현병의 예를 살펴보자. 조현병 환자들의 는 물질적인 손상이나 후천적인 요인으로 인한 기형적 성장, 혹은 발달 저해에 따른 도파민의 과다 분비로 인해 항상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하는 상태가 되어 환각과 환시로 인해 들어오는 정보가 왜곡되거나 과장되고 폭력적이며 앞뒤가 맞지 않는 기괴한 인지도식을 형성하여 살인 같은 극단적인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스로 사고할 수 있으며 사람의 몸에 깃들어 있는 인간이고 정수인 영혼이 존재한다면 심신이 분리된 것으로서 다만 뇌의 구조적 오류로 인해 그 사람의 사고 체계가 완전 마비에 이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에 대해 실제로 영혼이 존재한다고 해도 영혼이란 것이 행동을 옮길 때에 필요한 출력 기구 즉 신체 등이 고장 난다면 실제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해명하려는 경우가 있는데, 뇌가 출력 기구에 불과하다면 사고하고 생각하는 것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단지 행동만이 왜곡되어야 한다. 그러나 위 사례들은 이미 사고하는 것에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현재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심신 이원론을 주장하는 부류에서도 육체와 완전히 분리된 정신(영혼)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크게 줄어들고, 육체와 영혼이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이 강해졌다. 영혼은 육체를 주관하며, 육체는 영혼에 영향을 준다는 것.

사실상 이들의 주장은 이와 같다: 는 폰 노이만 방식을 초월해 스스로 경험에 따라 그 논리 회로를 송두리째 변경하는 성장하는 생체 컴퓨터에 가까운 존재이며, 심리학적으로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모종의 이유로 뇌가 만들어 낸 것이다. 허균 교수는 이를 착시 효과로 예를 들었다. 아래 그림을 보자.

파일:external/www.newsnjoy.or.kr/207197_59542_4948.gif

이 그림에서 빨간 직선이다. 그런데 육안으로 볼 때에는 두 선이 굽어 보인다. 이는 주변에 있는 다른 선의 영향을 받아 뇌가 작용한 결과다. 이처럼 뇌는 사물을 인지할 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 , , 등의 감각 기관으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뇌는 머릿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데 관념론과 유사하다. 이것을 심신 일원론이라 하고, 뇌과학자들은 이처럼 인간의 영혼, 자아, 자유 의지, 윤리가치 등의 개념이 모두 다 실체가 아닌 환상적 부산물이며, 인간의 진정한 실체는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뇌에 의해 작동되는 불확실성의 정보 처리 기계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선 반론이 만만치 않은데, 인지 과학자들과 심리 철학자들은 이런 주장이 정신과 신체(뇌)의 결과를 너무 단순화한다고 비판하고 정신이 단순한 신체의 반영이 아니라 좀 더 복잡한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입장을 이원론속성 이원론이라 부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물리적 신체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영혼의 개념(해당 조건이 붙여진)은 부정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편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물질적으로 설명해 보려는 시도 중에 최근 양자역학으로 설명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로저 펜로즈(스티븐 호킹과 함께 블랙홀 연구로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와 해머로프가 주장한 Orch-or 이론(조화 객관 환원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나무위키에 등재되어 있다.)이 가장 유명하고 그 외에 헨리 스탭 같은 과학자가 주장하는 중이다. Orch-or 이론은 둘 이상의 양자의 상태가 서로 연결되는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현상에 기초하는데, 뇌세포 간의 연결에서 이러한 현상이 연속적으로 일어남으로써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의식이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뇌의 생화학적 작용이 어떻게 우리가 가진 통일된 의식, 관점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와 같은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양자가 의식의 근본적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모든 우주 현상의 근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관련된 책으로 펜로즈는 이와 같은 주장을 자신의 저서인 《마음의 그림자》로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양자적으로 설명하기에 뇌와 뉴런은 너무 크고, 그리하여 양자적 효과는 거의 상쇄되기 때문에 주류 과학계에선 이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 같은 비판에 다시 펜로즈와 해머로프 등이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또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양자 효과 연구 결과들이 등장하면서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어느 학자는 자유 의지에 대해 논할 때 거론되는 벤자민 리벳의 실험이 영혼을 반박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리벳의 실험은 대략 피험자에게 손을 들게 시켰는데, 피험자가 어느 손을 들지 결정하기 이전에 관련된 뇌 부위에 전기가 일어났다는 결과가 나와서 이걸 가지고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하지만 리벳의 실험은 예전에 시행됐고 실제로 디지털 시계를 사용하니 결과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어서 리벳 실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데, 설령 리벳 실험이 맞다고 하더라도 어느 학자[3]에 따르면, 위에서 말한 심신 일원론을 따르면 자유 의지와 관계없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곧이어 이 실험은 심신 일원론을 지지하는 증거이며, 경우에 따라 영혼을 부정하는 증거일 수 있다고 한다.

리벳 실험의 실험은 인정하나 그 실험 결과의 해석 혹은 실험 설계는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철학자들(과학 철학, 심리 철학)도 있다. 해당 실험이 자유 의지를 증명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혹은 설계까지도 맞지만 그 결과를 자유 의지가 없다고 해석하긴 어렵다. 등의 입장이다.

심신 이원론 측에선 가장 마지막까지 기대는 부분이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이다. 여기서 의식이란 전통적으로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여겨져 온 감정이나 느낌이라고 여겨지는 부분들을 말한다. 이런 의식의 영역 중 일부는 심신 일원론에서도 아직까지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대부분은 인간의 뉴런의 활동과 신경 전달의 뇌 과학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하도 뇌가 너무 방대해서 구체적인 원리를 아직 파헤치고 있어서 그렇지, 어느 정도 작동하는 방식과 구조는 이미 이론들로 증명된다. 심신 일원론이 영원히 의식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건 아니기 때문에 과학의 발전에 따라 언제든 주장이 뒤집어질 수 있기는 하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 예일 대학교 철학과 교수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의 동영상 강의를 들으면 된다. 강의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교수가 아마도 물리주의자인 듯하다. ~물론 영어 듣기나 읽기가 된다면...~ 이 링크에서 세션 탭으로 들어가면 강의 목록이 나온다. 특히 본문에 해당하는 내용은 4강 'Introduction to Plato's Phaedo; Arguments for the Existence of the Soul, Part II'이다.

국내에서는 소화기 내과의 정현채 교수가 대표적인 관련 논의자로 언급된다.예시 다만, 영혼 에너지가 있다는 영매의 주장이나 검증되지 않은 집단 최면 등을 근거로 사후 세계를 주장한다는 점을 들어 비판이 제기된다.

영혼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임사 체험과학적/의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져 왔고 학술적인 성취들도 존재했지만, 여전히 영혼이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만큼 과학적으로 확고한 가설이 존재하지 않다는 점과 데이터 수집에 매우 큰 한계가 있는 주제의 특성상 주류적인 정론으로 인정받지 못한다.[4] 게다가 관련 논의자의 전공이 주제와 거리가 있는 경우도 있으니 유명 대학 교수라는 간판 때문에 전공도 안 보고 그냥 과학적인가 보다 해서는 안 되고, 영적인 체험이나 심지어는 윤회 주장 등 현대 과학과는 완전히 괴리된 담론까지 등장하기 일쑤라 현대 과학계의 반응은 부정하는 편.

그러나 위와 같은 신경 생리학적인 발견이 영혼에 대한 일부 관점에 대한 논의에는 유효할 수도 있겠지만[5]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유무를 밝히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보기엔 의심스럽다. 아리스토텔레스-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영혼은 말하자면 육체의 형상이며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영혼관에서는 영혼은 육체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온전한 인간을 이룬다. 그러므로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영혼이 온전히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거나 뇌가 인간의 정신 활동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존재 여부는 상술된 것처럼 과학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는 편이 올바를 수 있다.

2.4.1. 영혼의 무게?

사람이 죽을 때 무게를 재 보면 죽는 순간 무게가 약간 줄어드는데 이것이 영혼의 무게라는 말도 있고 21 그램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상 신빙성은 없다. 영혼이 21그램이란 소리는 과학동아에서도 명백히 허구임을 알리는 기사도 존재한다. 맥두걸이 실험한 환자의 수는 고작 6명이며 측정치도 전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경련하거나 몸을 움직일 것이므로 정교한 무게 측정은 어렵다고 한다. 또한 이 영혼 21그램 연구는 과학계에서 전혀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고 한다.(2014년 7월 과학동아 기사 링크) 혹자는 35 그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게다가 21그램 정도 변하는 건 사람이 죽을 때와 시체일 때 벌어지는 생리 현상 등을 고려하면 사실 "영혼"이라는 개념을 개입시킬 이유가 전혀 없다. 간단하게, 죽으면서 항문요도를 조이고 있던 괄약근이 풀어져 흘러나오는 배설물 무게만 해도 21그램은 거뜬히 넘어갈 것이며, 그 양은 점점 늘어난다. 애초에 인간이 숨이 넘어갔다고 바로 죽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심장사 자체보다는 심장사로 인해 세포들이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고 급격하게 죽어나가기 시작하는 과정이 그 원인인 데다 애초에 시체라는 존재 안에서도 부패 과정에서 굉장히 다양한 생리 현상들이 벌어진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시체조차도 완전히 백골화되기 전까지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른 생물체가 됐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복제 복구해서 되살릴 유전자가 남아 있다면 (그것이 현재 기술로 어렵다고 해도) 죽은 것이 아니다. 또한 애당초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으로서의 영혼은 물질을 초월하는 존재인데, 물질적 실체로서의 신체 질량이 몇 그램이 줄어드는 것을 통해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겠다는 발상이 자가당착에 가깝다.

사실 '죽는 순간'을 규정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심장이 멈추면? 호흡이 멈추면? 뇌 내 전기 화학적 작용이 없어지면? 몸이 완전히 썩어 문드러지면? 애초에 '죽음'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2.4.2. 영혼과 뇌 관련 사고 실험

이 내용은 위에서 언급된 셸리 케이건의 사고 실험으로, 그의 저서인 「죽음의 관하여」에 저술된 내용이다. 기본적으로 물질주의 관점에서 영혼을 봤으며, 결론적으로는 영혼은 없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논의를 잇기 전에 전제한 내용이다.

뇌가 없으면 그건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이원론자들은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말한다. 아니라고 말하면 장땡이긴 하다만, 그 경우에는 영혼이 몸도 뭣도 아닌 두뇌로 발생한 현상, 즉 뇌가 인격이란 걸 인정하는 셈이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뇌가 영구적으로 손상되어 사라진 숨만 쉬는 식물인간이라도 영혼이 있다고 주장할 수밖에.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뇌가 생체를 담당하는 부분 빼고 모두 망가졌다면 살아있는 게 아니다. 인간인지에 대한 여부는 철학에 맡겨 두더라도, 인격체라 볼 수 없다. 대화도, 일도, 행동도 할 수 없음에도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에 반박해, 뇌가 없으면 몸에 귀속된 영혼도 없다고 주장해 보자. 그러면, 만일 사고 실험으로서 좌뇌와 우뇌를 가르면 영혼은 어느 쪽으로 가게 되는가? 일단, 줄기세포로 배양 뇌를 만드는 등 과학 기술이 발전하여 두뇌만으로 인격과 생명을 유지할 만한 기술이 생겼다고 치자. 그리고 사고로 좌뇌와 우뇌가 분리되어 두 사람이 수술을 받고 깨어났다고 생각해 보자. 이론적으로는 생각과 경험이 제거된 인공 두뇌를 결합한다면 이후 상당한 적응 기간이 요구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살 수는 있을 거다. 이에 대한 결론은 크게 3가지로 갈리는데 첫째는 이렇다.

첫째. 영혼은 실제로 두 갈래로 갈라져 각각의 좌뇌와 우뇌의 깃든다. 그러나 두뇌를 수백, 수천 조각으로 가르면 그건 영혼이 수백, 수천 개가 됨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면 일반인의 뇌도 썩으면 수억 갈래로 분해되므로 영혼도 수억 갈래로 분해될 거다. 물론 반박으로 인격이 유지되는 선까지 영혼이 유지된다고 할 수 있지만, 영혼도 결국 두뇌의 구성 물질에 따라 바뀌므로 영혼이란 건 딴말할 거 없이 두뇌에서 비롯됐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뇌의 상태에 따라 사람(인격)이 바뀌는데 굳이 영혼이란 설명을 들이기보단 뇌 과학으로 설명하는 게 정상적이고 합당하단 생각이 들 거다. 만약 영혼이 신체와 별개라면, 두뇌가 갈라지건 말건 그대로 있을 테니까 말이다.

둘째. 한쪽 뇌로 간다. 더 인간적이든 원본에 가깝든 좌뇌 혹은 우뇌 쪽 사람으로 진짜 자신인 쪽으로 간다는 설명이다. 근데 그럼 반대쪽 사람은 절반은 자신인데 뜬금없이 인간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상식선에서 생각해 봐도 좌뇌 쪽으로 자신의 영혼이 갔다고 해서 우뇌 쪽 사람이 감정도 못 느끼고 감각도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는 게 웃긴 점이다. 근데 또 이걸 좌뇌의 영혼이 간다고 해서 우뇌가 영혼이 없어 감정이나 감각이 사라지는 게 아니게 된다고 하면 감각, 감정을 다 느끼는데 영혼이 없다는 해괴망측한 답이 나온다(...) 이렇다면 영혼의 의미는 없어질 거다. 영혼이 감정과 인격을 책임지는 게 아니라면, 영혼의 부재에도 인격이 있다면 그건 있으나 마나 한 거니까. 사람들은 모두 인격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누가 어느 쪽으로 영혼이 갔는지 알 수 있을까? 딱 보고서, 우뇌 쪽 인간이 더 영적이므로 우뇌는 영혼이 깃든 인간이고 좌뇌 인간은 껍데기다~ 이렇게 주장 못 한다는 거다. 지금 당장도 당신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직접 아는 방법은 없는데 누구 맘대로 영혼이 있고 없고를, 없다면 그 인간은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못한다는 거다. 극단적으로 말해 트루먼 쇼처럼 모든 사람들이 속이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당신은 알 수 없다.

셋째. 두 인간으로 갈라졌으므로 영혼은 원본인 인간을 찾지 못하고 소멸한다(승천한다). 둘째에 나온 문제의 연장선이다. 인격이 멀쩡한데 영혼이 사라져서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그 둘은 뭐가 되는가. 다만 좌뇌는 산술적, 우뇌는 예술적인 부분을 관장하므로 인격이 반씩 갈리긴 할 거다. 하지만 애초에 뇌가 반쪽으로 갈라지고 그 반쪽을 인공 두뇌로 대체한다면 그 뇌에 자의식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문점을 품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과학 철학적 해석일 뿐.

위 사고 실험은 영혼뿐만 아니라 인간 의식 활동이나 자아 개념에 대해서도 이것이 과연 올바른 개념인지 생각해 봐야 할 여지를 주기에 뇌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분야에서도 이 주제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위 실험에서 영혼을 의식/자아로 바꿔본 뒤 1인칭 시점으로 의식/자아가 어디로 갈까 생각해 보면 된다.

이 사고 실험을 통해 유추해 볼 경우 인간 의식, 자아 등은 수많은 정령에 의해 만들어진 복합체이거나 혹은 신체 내부 신경망에 의해 정의된, 외부와 독립된 논리계 System이거나 아님 이 둘 사이임이 유력하다 볼 수 있다. 전자는 정령들이 재구성되면서, 후자는 논리계가 재편성되면서 원래 있던 자아나 의식이 각각 새로운 자아, 의식 안으로 녹아들 것이다.

그러나 위의 사고 실험의 문제점은 종교마다, 사상가마다 영혼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가 각각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아퀴나스적 관점에서 영혼이란 육체의 형상이며 생명의 원리이다. 따라서 영혼이 뇌에 위치하느니 뇌를 가르면 영혼이 어디로 가냐느니 하는 위의 사고 실험은 이러한 영혼관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3. 매체

일본 창작물(특히 오컬트 계열)에서는 '영혼의 힘'이라는 의미로 영력이라는 요소가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건 서브컬처만의 용어는 아니고 본래 오컬트적 용어로 쓰인 것이 차용된 것이다. 여하튼 이게 높으면 유령같이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부가적인 능력이 주어지기도 한다. 그런 능력으로 인해 귀신에게 시달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고생하는 캐릭터도 상당히 흔한 클리셰. 흡수, 빙의 등으로 자신의 능력이나 다른 영혼이 갖고 있던 능력을 구사하든지 하는 용도로 쓰기도 한다.

영혼이 파괴되는 것은 곧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므로 이로 인해 끝장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대개 영혼들은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기에 역시 그에 상응하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물리치는 상황이 흔하다. 판타지에서 많이 쓰이는 언데드의 경우, 자세히 보면 육체 있거나, 영혼 있는 경우를 모두 포함한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말은 주로 목표를 위해 그동안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무언가, 긍지나 신념 같은 것을 내팽개쳤다는 의미로 쓰인다.

김풍기 왈, 이것이 실리지 않으면 공이 스트라이크 존 한 중간으로 와도 스트라이크가 아니란다.

4. 속어

인터넷에서는 "마지막까지 죽을 힘을 다해 쥐어짜낼 수 있는 자원" 혹은 "최후의 보루로 꼭 남겨야만 하는 가장 내밀한 자존심"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 용례로는 "영혼까지 끌어모았다",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영혼까지 끌어모았다"는 말은 줄여서 "영끌"이라고 하는데 내집마련 자금 마련을 위해 은행 대출부터 퇴직금 중간 정산 등을 통해 돈을 있는 대로 죄다 끌어모으는 이들이 "영끌했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영화를 예매만 하고 보지는 않아 그 영화의 예매율만 올려주는 행위를 영혼 보내기라고 한다.

5. 언어별 명칭

<colbgcolor=#f5f5f5,#2d2f34> 언어별 명칭
한국어 넋, , 영혼(), 혼령(魂靈), 영령(靈), 혼백(魂)
령혼()(문화어)
한자 (영혼), 魂靈(혼령), 靈(영령), 魂(혼백)
그리스어 ψυχή(psychí), πνεύμα(pnévma)
ψυχή(psukhḗ, 프시케), πνεῦμα(pneûma)(고전 그리스어)
독일어 Geist(가이스트)
라틴어 anima(아니마), animus, spīritus
러시아어 душа́(dušá), дух(dux)
산스크리트어 आत्मन्(ātmán, 아트만), त्मन्(tmán), विज्ञान(vijñāna)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alma(알마)
스페인어 espíritu
아랍어 رُوح(rūḥ), نَفْس(nafs)
영어 soul(소울), spirit(스피릿)
gāst(고대 영어)
soule(중세 영어)
이탈리아어 anima(아니마)
일본어 [ruby(霊, ruby=れい)][ruby(魂, ruby=こん)](reikon, 레이콘), [ruby(魂, ruby=たましい)](tamashii), [ruby(魂, ruby=こん)][ruby(魄, ruby=ぱく)](konpaku, 콘파쿠),
[ruby(霊, ruby=れい)]/[ruby(靈, ruby=れい)](rei, 레이), [ruby(霊, ruby=たま)]/[ruby(靈, ruby=たま)](tama, 다마/타마)
まぶい(mabui), [ruby(魂, ruby=たましー)](tamashī)(오키나와어)
[ruby(魂, ruby=たまち)](tamachi)(요나구니어)
중국어 靈魂灵魂(línghún), 魂魄(húnpò)
케추아어 nuna(누나)
튀르키예어 ruh, can, tin(틴)
روح(ruh)(오스만어)
프랑스어 âme, esprit(에스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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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 고트어 𐍃𐌰𐌹𐍅𐌰𐌻𐌰(saiwala), 𐌰𐌷𐌼𐌰(ahma)
나바호어 iiʼ sizíinii
네덜란드어 ziel, geest
마오리어 wairua
마인어 roh, jiwa, nyawa, ruh
만주어 ᡶᠠᠶᠠᠩᡤᠠ(fayangga)
몽골어 сүнс(süns)/ᠰᠦ᠋ᠨ᠋ᠡᠰᠦ(sünesü)
베트남어 tâm hồn, linh hồn()
아이누어 rama/ラマ
에스페란토 animo(아니모)
체로키어 ᎠᏓᎾᏔ(adanata)
태국어 วิญญาณ(win-yaan)
토하라어 āñcäm(토하라어 A: 아그니 방언)
āñme(토하라어 B: 쿠차 방언)
페르시아어 روح(ruh), روان(ravân), جان(jân), نفس(nafs)
포르투갈어 espírito
폴란드어 dusza
핀란드어 sielu, henki
하와이어 ʻuhane
히브리어 נְשָׁמָה(n'shamá), נֶ֫פֶשׁ(néfesh, 네페쉬), רוּחַ(rúakh)
힌디어 आत्मा(ātmā), रूह(rūh), नफ्स(naphs)
روح(rūh), آتما(ātmā)(우르두어) }}}}}}}}}
유럽의 spirit 개념은 선술했듯이 동아시아의 영혼 개념과는 일대일 대응되지 않는다. 영혼과 성령 정도가 어감에 적당하다. 귀신에 대한 대용으로도 쓰이는데, 현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은 고리타분해지고 미신적인 ghost보다 좀 신앙적인 뉘앙스를 가진 spirit를 쓰려는 경향이 많다.

성령라틴어로 spiritus sanctus라 한다.

6. 관련 문서


[1] 신학자 세르티앙주의 저서 《공부하는 삶》.[2] 백도형(2011), '심리철학과 심신문제', In 박영태(Ed.),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창비, 2011[3] 모기룡. (2013). 결정론의 환상과 기능류어로서의 자유의지. 인지과학, 24(3), 237-270.[4] 임사 체험에 대한 학술적 논의들이 정리된 기사임사 체험에 대한 학술적 논의를 다룬 EBS 다큐멘터리[5] 영혼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같은 생각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