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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혼(soul)}은 각 문화권에서 생물의 본질적인(혹은 중요한) 무언가를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특정한 개념을 일컫는다. 그러나 각 문화권 및 학파마다 영혼의 의미는 상이하여 매우 큰 다의성을 가지고 있다.2. 명칭
희랍어 (로마자 전사) | 라틴어 | 프랑스어 | 독일어 | 영어 | 한국어 |
ψυχή (psychē ) | anima | âme | Seele | soul | 혼 |
πνεῦμα (pneuma) | spiritus | esprit | Geist | spirit | 영 |
νοῦς (nous) | ratio, intelligentia, mens | raison, intelligence | Vernunft, intelligenz | reason, intelligence | 지성 |
서술의 엄밀함을 위해 soul을 이 문서에서만은 '혼'으로 spirit을 '영'으로 구별하고, 이 문서에서는 soul 개념을 중심으로 다룬다.
3. 다의성
사실 psychē=soul=혼이라는 용어만 공유하고 있을 뿐, 각 문화권 및 철학/신학 학파에서 말하는 영혼은 매우 큰 다의성을 가지고 있으며, 거의 동음이의어에 가까운 상이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이미 희랍 철학에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가 말하는 '혼'psychē은 달랐고, 영pneuma은 학파에 따라서는 혼psychē와 동일시되기도 하고 차별화되기도 하고 '동일 대상의 다른 뉘앙스'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대에는 혼psychē을 다루는 학문(psychology, 심리학)과 의학(psychiatry-정신의학)이 있지만, 이들이 다루는 혼psychē은 플라톤이 말한 혼psychē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3.1. 고대 그리스 철학의 관점
3.1.1. 플라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통솔하는) 것, 심사 숙고하는 것, 그리고 또 이런 유(類)의 모든 일을 우리가 혼psychē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든 부여해 주고서는 이것들이 그것 특유의 기능이라고 말해서 옳을 그런 것이 있겠소?"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사는 것'의 경우는 어떻소? 이건 우리가 혼의 기능이 아니라고 말하겠소?"
"뭣보다도 그것의 기능입니다."
플라톤, 『국가』 353d, 박종현 역주, 서광사, 22005(11997)
플라톤에게 혼은 인간 그 자체와 동일시되며 불멸한다. 반면 몸은 단지 인간(=혼)이 잠깐 입고 있는 옷에 불과하며 필멸한다. 그런 의미에서 '몸은 혼의 감옥'이라는 요지의 극단적인 표현도 사용한다.[3] 이러한 플라톤의 영혼관은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플라톤의 대화편 속 소크라테스가 죽음 앞에서 의연한 것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영혼관에 기반하고 있다. 대화편 속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단지 필멸의 옷인 '몸'을 벗어던지고 참된 자신이 해방되는 과정이며, 따라서 '소크라테스를 처형하는 아테네인들'이 '처형당하는 소크라테스'보다 딱히 더 좋은 상태인 것은 아니다.[4] 플라톤은 후대의 서양 영혼론들과 비교할 시, 몸과 혼을 가장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게 특징이다. 때문에 매우 직관적이면서도, 희랍의 전통적인 종교관과도[5]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직관적인 설명과 종교적 경건함 때문에, 플라톤의 영혼관은 고대 그리스도교의 영혼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비록 스콜라학 시대부터 주류 신학에서 퇴출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영성신학 및 대중신심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사는 것'의 경우는 어떻소? 이건 우리가 혼의 기능이 아니라고 말하겠소?"
"뭣보다도 그것의 기능입니다."
플라톤, 『국가』 353d, 박종현 역주, 서광사, 22005(11997)
또한 플라톤은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혼이 삼부(三部) 구조로 되어 있어서 감각적인 욕정의 원리인 탐욕혼(貪慾魂, έπιθυμητικόν)이 복부에 자리 잡고 있고, 용기와 정기의 원리인 기혼(氣魂, θυμοειδές)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생각의 원리인 지혼(知魂, λογιστικόν)이 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지혼은 불멸의 신적(神的)인 성격을 띠고 있다.
3.1.2.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므로 필히 영혼psychē은 가능태로 생을 지니는 자연적 물체의 형상으로서의 실체[6]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Peri Psychēs 421a20, 오지은 역주, 아카넷, 2018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Peri Psychēs 421a20, 오지은 역주, 아카넷, 2018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자연 철학적인 원리인 질료 형상론(質料形相論, Hylemorphism)으로 설명한다. 모든 사물의 구조 원리가 그렇듯이 모든 생물의 구성 원리는 질료(hylē, materia라틴어와 형상(eidos, forma라틴어)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생명체의 형상', 혹은 '몸의 형상'이 혼이다.
몸을 혼과 오직 우유accidens적으로만 결합되어 있는 껍데기로 본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몸은 혼과 하나의 유일한 실체를 구성하며 불가분적이다. 곧, 몸과 혼은 '실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혼의 불멸성'의 경우, 희랍의 전통적인 종교관에 부합하고 매우 직관적인 플라톤의 관점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논쟁적이다. 일단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능동 지성은 불멸한다. 그런데 과연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능동 지성'을 인정했는지 여부는 고대 주석가들부터 중세의 스콜라학자들을 거쳐 현대의 고전학자들에게 이르기까지 매우 악명 높은 난제이다.
플라톤에게는 영혼psychē이 온전히 영pneuma적 본성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분명 영pneuma적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오로지 능동 지성(能動知性)의 기능뿐이다. 죽음 이후의 존속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플라톤에게는 영혼 전체가 불사적이고 이데아들의 세계로 복귀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분명하게 신적이고 불사적인 것은 오로지 능동 지성의 기능뿐이다.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성 토마스 개념사전』Dizionario Enciclopedico del Pensiero di San Tommaso d'Aquino (2000) , 이재룡·안소근·윤주현 번역, 한국성토마스연구소, 22021(12020), p.455.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성 토마스 개념사전』Dizionario Enciclopedico del Pensiero di San Tommaso d'Aquino (2000) , 이재룡·안소근·윤주현 번역, 한국성토마스연구소, 22021(12020), p.455.
그런데 온 자연에는 한편 각각의 유에게 질료인 어떤 것이 있고(이것은 가능태에서 그 모든 것들이다), 다른 한편 그 모든 것들을 만든다는 점에서 원인이자 작자(作者)인 또 다른 것, 즉 재료에 관계하는 기술처럼 되어 있는 것이 있으므로, 영혼에도 이 차이들이 있음이 필연적이다. 그리고 실제로, 한편 모든 것들이 된다는 점에서 그러한 지성이 있고, 다른 한편 모든 것들을 만든다는 점에서 그러한 지성, 즉 빛과 같은 어떤 상태로서의 지성이 있다. 어떤 방식으로는 빛 역시 가능태로 있는 색깔들을 활성태energeia로 만드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지성은 그 본질에 있어 활동으로서, 분리될 수 있고 영향 받지 않으며 섞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드는 것이 영향 받는 것보다, 그리고 원리가 질료보타 언제나 더 고귀하기 때문이다. [활성태상의 앎은 그 대상과 동일하다. 그리고 가능태상의 앎은 한 사람에서는 시간적으로 앞서지만, 일반적으로는 시간적으로도 앞서지 않는다.] 이 지성은 어떤 때 사유하고 다른 때 사유하지 않고 그러지 않는다. 그리고 분리되었을 때 이 지성은 오로지 바로 그것인 바이고, 이 지성만이 불사적이며 영원하다(하지만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지성은 영향 받지 않는 한편, 영향 받는 지성은 가멸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 없이는 그 무엇도 사유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Peri Psychēs 463a10ff(3권 5장), 오지은 역주, 아카넷, 2018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Peri Psychēs 463a10ff(3권 5장), 오지은 역주, 아카넷, 2018
그뿐만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그가 다시금 플라톤적 이원론으로 복귀한 게 아닌가 싶게 만드는 언급도 있다. 그는 『영혼론』 3권5장에서 하나의 가설을 개진하는 바, 그에 따르면 어쨌거나 하나의 영혼기능, 오직 인간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영혼기능, 즉 합리적 사고(활동)가 물적 기초에서 독립적으로 있을 수 있다. 그가 ‘누스’(nous)라고 부르는 영혼기능이 바로 그것이다.그것은 개체의 죽음을 넘어 존속할 수 있는 유일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초개체적 원리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형신료설은 대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한석환, “아리스토텔레스 영혼 정의의 몇 가지 문제” , 숭실대학교, P. 168
한석환, “아리스토텔레스 영혼 정의의 몇 가지 문제” , 숭실대학교, P. 168
3권 5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유 메커니즘을 소위 '능동 지성nous'과 '수동 지성nous'의 구분으로 설명하고, 수동 지성은 우리의 죽음과 함께 소멸하는 반면에 능동 지성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430a23~25). 이 둘이 무엇인지, 그러니까 이것들이 인간 지성의 두 측면을 뜻하는지 아니면 각각 신과 인간 지성을 가리키는지가 앞서 말한 오랜 논쟁거리였다. 이 논쟁의 출발점으로 고대 주석가들 중 대표적으로 두 인물을 꼽을 수 있는데, 한 명은 테오프라스토스(BC 4~3c)이고, 다른 한 명은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이다.
테오프라스토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능동 지성과 수동 지성은 모두 인간 지성이다. 지성이 "밖으로부터"(GA 2,3, 736b28) 들어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은 비록 난해하지만, 이 지성은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 영혼 안에 있게 된 우리의 지성이며, 이 지성 자체가 능동 지성과 수동 지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해서이다. 반면에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에 따르면, 밖으로부터 들어온다는 지성은 능동 지성만 가리키고, 이 지성은 우리 영혼 안에 있는 능력이 아니라 순수 형상으로서의 신이다. 나아가 알렉산드로스는, 우리가 사유한다는 것은 신이 우리의 수동 지성을 도구로 삼아 활동함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첫 번째 해석의 강점은 생물의 영혼을 이 책 전체의 일관된 소재로 놓고, 그중에 인간의 지성을 3권 4~8장의 일관된 소재로 본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이 해석을 택하면, '그동안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의 영혼을 논해 왔지만 유독 3권 5장에서만 신을 언급하고는 다시 생물의 영혼에 대한 논의로 돌아갔다'라는 식의 부담스러운 독해를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해석의 강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능동 지성을 빛에 비유한 대목과 관련하여(3,5, 430a4) 빛의 기원이 시각 외부에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빛은 "불 또는 이런 어떤 것이 투명한 것에 와 있음"이고(2,7, 418b16~17, 20), 불 또는 이런 어떤 것이 동물 영혼의 외부에 있으니, 능동 지성도 기본적으로는 인간 영혼의 외부에 있다고 주장하는 데 힘을 실을 수 있다. ... 각 해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큰 틀에서 어떻게 바라보는지만 짚어 보면 이렇다. 첫 번째 입장은 불사적인 것이라 해서 이를 곧장 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인간 지성도 영원한 것들에 든다고 봄으로써 영원한 것들의 계열은 인정한다. 그리고 두 번째 해석은 우리가 사유할 때마다 늘 우리 지성에 현존하여 우리 지성을 활성태로 만들고 있는 적극적인 신의 모습을 그린다.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Peri Psychēs 역자 해제, 오지은 역주, 아카넷, 2018, pp.325-327.
테오프라스토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능동 지성과 수동 지성은 모두 인간 지성이다. 지성이 "밖으로부터"(GA 2,3, 736b28) 들어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은 비록 난해하지만, 이 지성은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 영혼 안에 있게 된 우리의 지성이며, 이 지성 자체가 능동 지성과 수동 지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해서이다. 반면에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에 따르면, 밖으로부터 들어온다는 지성은 능동 지성만 가리키고, 이 지성은 우리 영혼 안에 있는 능력이 아니라 순수 형상으로서의 신이다. 나아가 알렉산드로스는, 우리가 사유한다는 것은 신이 우리의 수동 지성을 도구로 삼아 활동함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첫 번째 해석의 강점은 생물의 영혼을 이 책 전체의 일관된 소재로 놓고, 그중에 인간의 지성을 3권 4~8장의 일관된 소재로 본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이 해석을 택하면, '그동안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의 영혼을 논해 왔지만 유독 3권 5장에서만 신을 언급하고는 다시 생물의 영혼에 대한 논의로 돌아갔다'라는 식의 부담스러운 독해를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해석의 강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능동 지성을 빛에 비유한 대목과 관련하여(3,5, 430a4) 빛의 기원이 시각 외부에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빛은 "불 또는 이런 어떤 것이 투명한 것에 와 있음"이고(2,7, 418b16~17, 20), 불 또는 이런 어떤 것이 동물 영혼의 외부에 있으니, 능동 지성도 기본적으로는 인간 영혼의 외부에 있다고 주장하는 데 힘을 실을 수 있다. ... 각 해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큰 틀에서 어떻게 바라보는지만 짚어 보면 이렇다. 첫 번째 입장은 불사적인 것이라 해서 이를 곧장 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인간 지성도 영원한 것들에 든다고 봄으로써 영원한 것들의 계열은 인정한다. 그리고 두 번째 해석은 우리가 사유할 때마다 늘 우리 지성에 현존하여 우리 지성을 활성태로 만들고 있는 적극적인 신의 모습을 그린다.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Peri Psychēs 역자 해제, 오지은 역주, 아카넷, 2018, pp.325-327.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누었다.
- 생혼(生魂): 이는 식물 안에 있는 생명력의 근원이다.
- 각혼(覺魂): 이는 동물 안에 있는 생명력의 근원이다. 첫째 혼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 지혼(知魂): 이는 인간 존재 안에 있는 생명력의 근원이다. 둘째 혼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3.2.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는 영혼도 원자로 구성된다고 보았으며, 더 나아가 죽을 경우 영혼도 소멸한다고 보았다. 그와 동시에 감각이 소멸한다고 생각했고, 소멸한 뒤에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기에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3.3. 그리스도교적 관점
Non enim anima est alia ab illa forma, per quam in re illa poterant designari tres dimensiones
혼은 그것을 통해 사물에 삼차원을 지정할 수 있었던 형상과 다른 형상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有와 본질에 대하여』De ente et essentia 마리에티판 제3장, 정의채 역주, 바오로딸, 22011, p.57
혼은 그것을 통해 사물에 삼차원을 지정할 수 있었던 형상과 다른 형상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有와 본질에 대하여』De ente et essentia 마리에티판 제3장, 정의채 역주, 바오로딸, 22011, p.57
위에서 간략히 언급했다시피, 고대 그리스도교 영혼관은 플라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몸과 혼의 직관적인 이분법, 혼의 불멸 등 플라톤 영혼관의 많은 요소는 그리스도교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플라톤의 영혼관은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온전히 수용하기에 중대한 난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성경의 영혼관은 플라톤과 같은 매우 이분법적인 혼-몸 이분법이 분명히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성경에 혼-몸 이분법처럼 보이는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7],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에서 인간은 각 개인 하나하나가 한 실체로 여겨지며, 이 하나의 실체를 어떤 측면에서는 '혼'이라 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몸'이라 한다.
헬라 철학계에서는 인간을 영혼과 육신이라는 두 요소 혹은 영과 넋과 몸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다. 바울로는 헬라 철학계의 표현을 사용하지만 각 요소가 총체적 인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히브리식 사고방식이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보면 육체(몸)이고, 어던 면에서 보면 영혼(넋: 그리스어로는 프쉬케. 히브리말로는 네페슈=생명체)이며, 또 어떤 면에서 보면 정신(영: 그리스말로는 프네우마. 히브리어로는 루아흐=하느님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바탕)이다. 하느님은 총체적 인간, 즉 모든 면에서 본 인간을 보호하며 구원하신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데살로니카 전 5,23 주석(번역 및 주해: 요제프 빌헬름 팀프테Joseph Wilhelm Timpte), 분도출판사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데살로니카 전 5,23 주석(번역 및 주해: 요제프 빌헬름 팀프테Joseph Wilhelm Timpte), 분도출판사
바울로는 근본적으로 성서와 셈족 문화에 뿌리박고 있다. 바울로가 인간을 언제나 통째로 보며, 결코 영혼과 육신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사실(이것이 헬레니즘 인간관의 특징이다)이 이 점을 뚜렷이 말해 준다. 인간은 언제나 영혼과 육신 그리고 자신의 모든 능력과 힘 안에서 존재하며, 이것들은 각기 그때그때 인격체의 한 측면만 나타내고 강조한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Paulus von Tarsus: Apostel und Zeuge (1996) , 이종한 번역, 분도출판사, 2008, pp.305-306.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Paulus von Tarsus: Apostel und Zeuge (1996) , 이종한 번역, 분도출판사, 2008, pp.305-306.
곧, 성경에 따르면 혼psychē은 몸과 함께 단일한 인간 실체를 구성하면서도, 이 인간 실체의 특정한 면을 드러내는 단어이다. 이는 플라톤의 영혼관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의미이다.
더군다나 플라톤의 영혼관은 그리스도교의 내세관과도 중대한 충돌을 일으켰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초점은 분명히 '몸의 부활'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천국)의 종말론적 도래이다. 비록 신약 성경에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를 언급하는 듯한 구절은 있지만(1코린토 5장), 기본적으로 신약의 구원론은 거의 온전히 '몸의 부활'에 맞춰져있다. 플라톤의 영혼관대로라면, 십자가는 예수의 '껍데기'에만 해를 끼쳤을 뿐 '예수 그 자체'인 혼에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며, 예수의 최종적 승리는 (마치 『파에돈』의 소크라테스처럼)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여 혼이 해방되는 것으로 쟁취된다. 하지만 성경의 묘사는 이와는 정반대에 가깝다. 예수의 몸은 결코 '껍데기'로 묘사되지 않고, 십자가형은 '몸이라는 껍데기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분명히 부정적인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의 공포 앞에서 괴로워했다.[8]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메시아의 승리를 알리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따라서 비록 고대 교회가 플라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지주의 등 극단적인 플라톤주의는 고대 교회에서 이미 이단으로 배격되었다.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평범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구원론의 초점을 '몸의 부활로서의 천국'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로서의 천국'에 둔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강력한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플라톤(Platon)은 그리스 세계에서 오래전부터 형성되었던 ‘영혼의 불멸적 표상’을 수용하고 새롭게 논증하여 영혼과 육신의 본질적인 이질성을 주장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영혼은 단순하고 정신적이며 신적이어서 결코 소멸될 수 없는 불멸의 실재로 파악된다.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영적 실재는 불멸의 실재이고, 영혼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정신의 관념에 대한 인식’은 영혼이 물질계에 유폐되기 이전에 관념 세계 속의 삶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성취된다. 또한 영혼과 육신의 결합은 비본래적인 것이며 따라서 종래에 가서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은 육신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사건으로서 이는 곧 ‘인간을 소외시키는 현존 방식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간주된다. 영혼을 불멸하는 실재로 파악하는 플라톤의 견해가 주로 동방 교회의 오리게네스(Origenes)와 서방 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은 교부들에 의해서 그리스도 교회에 수용되기에 이른다. 오리게네스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피력하면서 영혼만을 인간의 본질로 파악한다. 그는 현세의 삶보다 선재(先在)한 영혼이 죽음 속에서 육신으로부터 해방될 때에 인간 구원이 실현된다고 보는 플라톤 사상과 같은 견해를 취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영혼만을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로 파악한다. 그는 영혼이 하느님에 의하여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본다. 그에게 있어서 육신은 원죄(原罪) 이후에 사욕편정으로 말미암아 영혼에 저항하고 오히려 영혼으로 하여금 악으로 빠지도록 유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동방 교회나 서방 교회를 막론하고 육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원론적 인간관이 교부 시대를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초대 교회의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신학’은 후퇴되고 대신 개인적인 영혼 구원 사상이 그리스도교계의 전면에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육신 부활을 통한 전인(全人)으로서의 구원관’보다는 육신과 구별되는 영혼만이 구원된다는 개인주의의 내세 신앙이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점차 팽배하게 되었다. 플라톤-그리스도교의 입장은 13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극복된다. 특별히 이러한 신학적 극복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대표적으로 추진되었다.
서한석.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타난 ‘전인(全人)으로서의 부활관’과 교회의 종말론적 가르침에 대한 신학적 고찰」. 신학전망. 2017; 196 7-8
서한석.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타난 ‘전인(全人)으로서의 부활관’과 교회의 종말론적 가르침에 대한 신학적 고찰」. 신학전망. 2017; 196 7-8
아무튼, 플라톤식 영혼관과 그리스도교의 불편한 동거는 스콜라학 시대까지 계속되었고, 스콜라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수용하면서 대격변이 일어나게 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식 영혼관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교식으로 소화해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영혼anima은 인간의 육체가 그것을 통해 현실태의 존재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존재]은 형상에 고유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영혼에 관하여』De anima, a.1.[9]
토마스 아퀴나스, 『영혼에 관하여』De anima, a.1.[9]
혼을 몸의 형상으로 보는 영혼관은, 혼과 몸의 불가분한 관계를 말하는 성경의 영혼관과도 아주 잘 조화될 뿐만 아니라, 특히 '몸의 부활'이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갖는 중요성을 부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몸 없는 혼'은, 곧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로서의 천국에 있는 혼은, 비록 천국의 지복직관을 누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격'persona조차 아닌 무언가이다. 혼은 오로지 몸 덕분에 인격을 형성할 수 있다.
혼은 육신에서 분리되어 있어도 육신과 결합 가능한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혼은 ... 개체적 실체라고 불릴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손이나 인간의 여타의 어떤 부분도 그렇게 불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페르소나의 정의도 그 명칭도 혼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1,29,2,ad5., 정의채 역주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1,29,2,ad5., 정의채 역주
물론 이는 '중간 상태'로서의 천국에서 혼이 누리는 지복직관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혼은 '인격'persona이라는 말로는 불러선 안 되며, 부활에 비하면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몸에서 분리된 혼은, 전체의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부분이 그렇듯이, 불완전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혼은 본성적으로 인간 본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혼이 다시 한 번 더 몸과 결합하지 않고서는, 그의 궁극적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 『대이교도대전』Summa Contra Gentiles 4 c.79.
토마스 아퀴나스, 『대이교도대전』Summa Contra Gentiles 4 c.79.
'지성이 뇌에 종속하냐 혼에 종속하냐'는 해묵은 질문도, 이러한 영혼관에서는 아주 명료하게 답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왜냐하면 감각적 사물들의 질서에서 제1질료가 가장 하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지성적 실체들의 질서에서는 인간 영혼이 가장 하위이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은 자신의 고유한 상태인 이해(intelligere)를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인 가지상(可知像, species intelligibilis)들을 (보다 상위의 지성체[知性體]들이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생득적인 것으로 지니고 있지 않다. 인간 영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그 안에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tabula rasa)와 같기 때문에, 가지상들에 대해 가능태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은 외부 사물들로부터 가지상들을 감각 기관들을 매개로 수용해야 하는데, 이 감각 기관들은 육체적 기관이 없이는 그 고유의 기능들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결합해야 한다. [...] 그런데 지성적 영혼이 결합하는 육체의 성품은 가장 잘 조화를 이루는 물리적 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인간의 육체의 특수한 성품까지도 고찰하기를 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인간의 육체가 인간이 최상의 감각을 지닐 수 있도록 질서지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상상력(imaginatio)과 기억(memoria), 감각적 사고력(cogitativa)과 같은 내적 감각들의 좋은 조건을 위해서는 뇌의 좋은 상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자신의 몸집에 비해 더 큰 뇌를 지니도록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의 작용이 보다 자유롭기 위해 머리는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동물들은 등을 구부린채 다니는 데 반해, 오직 인간만이 직립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직립을 소유하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심장에 많은 생기(spiritus)들이 생성될 수 있게 해주는 열이 많이 있어야 하며, 그렇게 그 풍부한 열과 생귀를 위해 육체는 직립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영혼에 관하여』De anima, a.1.[10]
물론 머리의 열을 방출하기 위해 사람이 직립한다는 토마스의 말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틀린 말이다. 그러나 상상력, 기억, 사고력이[11] 뇌의 작용이라는 점을 토마스는 분명하게 전제하고 있고, 뇌를 포함한 육체가 혼의 껍데기일 뿐이라는 플라톤식 견해를 분명히 반대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영혼에 관하여』De anima, a.1.[10]
혼을 몸의 형상으로 보는 관점은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교과서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개신교에서도 비록 교리서 차원의 명시는 없지만 성경에 가까운 관점으로 인정되고 있다.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은 영혼을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해야 할 만큼 심오하다. 말하자면 물질로 구성된 육체가 인간 육체로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영혼 때문이다. 인간 안의 정신과 물질은 결합된 두 개의 본성이 아니라, 그 둘의 결합으로 하나의 단일한 본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가톨릭 교리서 제365항
가톨릭 교리서 제365항
인간의 몸과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영혼만으로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하다. 즉 영혼만 불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혼만으로 창조하지 않은 것처럼 참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을 몸과 영혼의 단일성으로 본다는 것은 영혼을 동물적인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비슷하다. 영혼과 육체는 ‘형상’을 통해서 분리시킬 수 없는 단일성이 되었다. 몸과 영혼의 단일성이라는 교리는 1312년 비인 공의회를 통해서 결정되었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 인간론에서는 인간 영혼의 선재설을 주장한 플라톤보다는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독교 신학에 훨씬 가까웠다. 즉 인간의 몸과 영혼의 일치를 주장하는 기독교 신학이 영혼을 동물적인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유사하다는 말이다.
정용섭 목사(계명대 신학박사,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
정용섭 목사(계명대 신학박사,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
다만 결코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게 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혼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순한 복사물이나 '약간의 그리스도교 양념'만 뿌린 결과물이 아니고, 몇 가지 중대한 포인트에서 실체적 차이가 있었다. 곧 토마스는 혼과 몸이 실체적으로 결합하는 근거가 유일한 존재 현실(actus essendi)에 있는 것으로 확립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만을 고수한 채 이 위중한 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단지 질료형상설이란 열쇠로 인간을 읽는 것만으로는 어떻게 영혼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질료 안에서가 아니면 형상은 존재할 수 없으며 질료는 형상에 있어 고유하다. 성 토마스는 이 지점에서 자신의 근본적 직관을 활용하는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섰다. 그가 새롭게 제시한 개념은 '존재 현실'(actus essendi)인데, 이것은 그의 형이상학 전체를 규정 짓는 틀이다. 이 개념은 근본적인 완전함, 여타의 모든 완전성 가운데 최고의 완전성을 말한다. 즉, 그것은 모든 완전성의 완전성이자 모든 현실의 현실성이다.(perfectio omnium perfectionum et actualitas omnium actuum). 하이데거가 정확히 지적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망각하고 오직 실체에만 몰두했다. 그는 형상적 실체들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의 본질이 질료와 형상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질적 실재들의 부패는 질료와 형상을 공시에 이어주는 연결 고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에 기인한다.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질료형상설을 다시 취했으며 인간을 포함해서 형상적 존재들의 본질이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존재자는 본질만이 아니라 본질과 존재 현실(actus essendi)로도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존재의 현실이야말로 더욱 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그는 본질 대신 존재의 현실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는 가운데 영혼과 육체 간의 관계 문제 그리고 영혼의 불멸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해결책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고 상당히 오랫동안 유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성 토마스는 영혼과 육체가, 질료와 형상이 공통적으로 갖는 관계와는 다른 관계를 존재와 갖는다고 가르쳤다(따라서 질료와 형상은 단지 유비적으로만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범주들이다). 통상, 질료와 형상은 오직 합성될 때 존재를 갖는다. 질료나 형상 그 자체만으로는 개별적으로 고유한 존재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예컨대 일정한 형태를 갖지 않은 청동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를 갖지 못한다. 또한 구형(球形)만으로도 존재를 갖지 못한다. 청동으로 된 구체(球體)라야 비로소 존재를 버여받게 된다. 반면, 영혼과 육체의 경우 사정은 이와 다르다. 육체에 대한 영혼의 무한한 우위, 몇 가지 지극히 영적인 활동(이는 독점적으로 영혼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추리하고 성찰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에 기인하는 우위로 인해, 존재는 무엇보다도 영혼에 속하며 영혼에게 고유한 것이다. 사실,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작용을 갖는 것은 또한 그 자체로 존재와 실체를 갖는다. 반면 자신의 고유한 작용을 갖지 못한 것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갖지 못한다."『분석론 후편 주해』Expositio Libri Posteriorum Analyticorum, 1, lect.2, n.20.) "영혼은, 그 작용이 실증하는 것처럼, 물질에 묶여 있지 않은 존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질로부터 존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혼으로부터 존재를 받는 것은 바로 그 합성체이다."(『명제집 주해』Expositio Libri Peryhermeneias, II, d.19, q.1, a.1, ad3)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영혼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 현실을 갖추었다 해도, 자신의 고유한 활동을 수행하려면 육체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영혼은 육체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존재 현실에 참여하게 한다. 성 토마스는 이런 방식으로 영혼과 육체 사이에 있는 심오하고 본질적인 단일성을 탁월하게 독창적으로 설명한다. 이는 정확히 말해 인간의 존재 현실 그리고 인간 안에서의 존재 현실이 유일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존재론적인 우위로 인해 영혼에 속하는 이 존재 현실은 육체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그 자체로 연혼에 속하는 존재와 합성된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합성된 존재는 그 형상에서 유래하는 존재 이외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명제집 주해』Expositio Libri Peryhermeneias, II, d.8, q.5, a.2, ad2)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성 토마스 개념사전』Dizionario Enciclopedico del Pensiero di San Tommaso d'Aquino (2000) , 이재룡·안소근·윤주현 번역, 한국성토마스연구소, 22021(12020), p.555.
인간의 혼이 여타 생물의 혼과 달리 질료형상론을 유비적으로만 적용할 수 있는 예외적 존재자라는 서술은 언뜻 보기엔 기이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식물혼, 동물혼, 인간혼을 나누었을 때의 사고체계와 동일한 엔진에서 나온 결론이다. 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식물혼, 동물혼, 인간혼 구별에서는 뒤의 혼이(곧 더 상위의 혼이) 앞의 혼이 가진 능력을 그대로 가지면서도, 최고 존재에 훨씬 더 가까이 참여한다. 이런 접근법으로 토마스는 인간혼이 가진 특별함을 설명한다.성 토마스는 영혼과 육체가, 질료와 형상이 공통적으로 갖는 관계와는 다른 관계를 존재와 갖는다고 가르쳤다(따라서 질료와 형상은 단지 유비적으로만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범주들이다). 통상, 질료와 형상은 오직 합성될 때 존재를 갖는다. 질료나 형상 그 자체만으로는 개별적으로 고유한 존재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예컨대 일정한 형태를 갖지 않은 청동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를 갖지 못한다. 또한 구형(球形)만으로도 존재를 갖지 못한다. 청동으로 된 구체(球體)라야 비로소 존재를 버여받게 된다. 반면, 영혼과 육체의 경우 사정은 이와 다르다. 육체에 대한 영혼의 무한한 우위, 몇 가지 지극히 영적인 활동(이는 독점적으로 영혼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추리하고 성찰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에 기인하는 우위로 인해, 존재는 무엇보다도 영혼에 속하며 영혼에게 고유한 것이다. 사실,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작용을 갖는 것은 또한 그 자체로 존재와 실체를 갖는다. 반면 자신의 고유한 작용을 갖지 못한 것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갖지 못한다."『분석론 후편 주해』Expositio Libri Posteriorum Analyticorum, 1, lect.2, n.20.) "영혼은, 그 작용이 실증하는 것처럼, 물질에 묶여 있지 않은 존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질로부터 존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혼으로부터 존재를 받는 것은 바로 그 합성체이다."(『명제집 주해』Expositio Libri Peryhermeneias, II, d.19, q.1, a.1, ad3)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영혼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 현실을 갖추었다 해도, 자신의 고유한 활동을 수행하려면 육체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영혼은 육체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존재 현실에 참여하게 한다. 성 토마스는 이런 방식으로 영혼과 육체 사이에 있는 심오하고 본질적인 단일성을 탁월하게 독창적으로 설명한다. 이는 정확히 말해 인간의 존재 현실 그리고 인간 안에서의 존재 현실이 유일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존재론적인 우위로 인해 영혼에 속하는 이 존재 현실은 육체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그 자체로 연혼에 속하는 존재와 합성된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합성된 존재는 그 형상에서 유래하는 존재 이외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명제집 주해』Expositio Libri Peryhermeneias, II, d.8, q.5, a.2, ad2)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성 토마스 개념사전』Dizionario Enciclopedico del Pensiero di San Tommaso d'Aquino (2000) , 이재룡·안소근·윤주현 번역, 한국성토마스연구소, 22021(12020), p.555.
좀더 강력한 형상(forma)이 좀더 왕성하게 활동한다는 것은 자연본성의 진실이다. 그래서 다양한 형상들의 위계를 따라서 존재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무생물체의 경우엔 그 존재가 지속되는 동안 최소한의 활동 잔재가 남게 된다고 본다. 식물의 형상(植魂)은 무생물체를 흡수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다. 동물의 형상은 무생물체는 물론 식물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형상들의 위계에 따라 차별화된 왕성한 활동들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보다 수준 높은 형상들은 보다 포괄적인 존재의 모습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다. 훨씬 더 완벽한 형태를 갖춘 존재를 취하면서 최고의 존재에 훨씬 더 가까이 혹은 완벽하게 참여(分與)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형상을 통해 존재하는 것들은 하느님과 좀더 친밀하게 존재하고 그 아랫 수준의 형상에 의해 존재하는 것들을 여분의 것으로 취급한다. 다시 말해 상위의 존재는 그보다 하위의 존재가 소유한 것들을 이미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월터 패럴Walter Farrel, O.P.,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해설서 I』A Companion to the Summa. Vol 1., 조규홍 번역,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9, p.449.
물론 인간 혼의 불멸 주장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믿음을 철학에 강요하여 전개된 것은 아니다. 불멸의 혼에 대한 교리적 믿음과는 별개로, 인간혼의 불멸성은 고대에도 중세에도 현대에도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이 열띤 논쟁을 벌이는 난제인 '능동 지성' 논쟁에 토마스가 참여함으로써 주장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능동 지성'은 불멸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능동 지성'이 있는지 여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매우 모호하게 말해놓아서 모든 시대의 연구자들에게 심각한 난제가 되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서 인간의 능동 지성을 부정하고 (따라서) 인간 혼의 불멸성을 부정하는 철학자들이 제도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2] 특히 아베로에스주의 학자들이 그러했다. 교리적으로만 따지면 "그거 아닌데? 혼은 불멸하는데?"로 간단히 정리될 사안이지만, 해당 주장은 철학의 사안이기에 당장 토마스도 철학으로 응수해야 했다. 토마스는 능동 지성 논쟁에서 반대자들이 '교리'에 위배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던 게 아니다. 그건 이미 명백했고, 그런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제도권 철학계에선 현역인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를 철학으로 반박하기 위해 쓴 것이 토마스의 『지성 단일성』De Unitate IntellectusContra Averroistas이다.월터 패럴Walter Farrel, O.P.,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해설서 I』A Companion to the Summa. Vol 1., 조규홍 번역,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9, p.449.
우리는 앞서 언급한 입장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거스르기 때문에 오류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점은 누구에게나 쉽사리 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된 입장이 신앙의 가르침들을 거스른다는 점에 못지않게 철학의 원리들을 거스른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듯이, 이 주제와 연관된 라틴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소요학파 창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외에 이 주제에 대해 다른 저작을 결코 본 적이 없는 소요학파 사람들의 견해를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앞에서 말한 입장이 그의 말과 생각에 전적으로 반대된다는 점을 드러낼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지성 단일성』De Unitate Intellectus Contra Averroistas 제1장 (2번), 이재경 역주, 분도출판사, 2007
토마스 아퀴나스, 『지성 단일성』De Unitate Intellectus Contra Averroistas 제1장 (2번), 이재경 역주, 분도출판사, 2007
그러므로 이것은 신앙의 가르침이 아니라 철학자 자신들의 논변과 말을 통해 우리가 앞서 말한 오류들을 부수기 위해 쓴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지식이라는 거짓된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우쭐해하며, 우리가 여기서 쓴 것에 반하여 무슨 말이든 하고자 한다면, 구석진 곳이나 그렇게 어려운 문제에 대해 판단할 줄 모르는 소년들 앞에서 말하지 말고, 할 수 있거든 이 저술에 반대하여 글 쓰게 하라. 그는 자신의 실수에 반대하고 자신의 무지를 치유할 사람 중 가장 하찮은 나 말고도 진리를 사랑하는 여러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지성 단일성』De Unitate Intellectus Contra Averroistas 제5장 (124번), 이재경 역주, 분도출판사, 2007
토마스 아퀴나스, 『지성 단일성』De Unitate Intellectus Contra Averroistas 제5장 (124번), 이재경 역주, 분도출판사, 2007
3.4. 물리주의
자연주의한 형태로서 자연주의는 초자연현상을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물리주의는 특히나 우주 모든 것을 물리주의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해당 관점에서 애당초 영혼과 사후세계를 확증할 증거가 없거나 혹은 그런 개념을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보기에 때문에 이 관점에서 사생관은 영혼론을 주장하지 않는다.3.5. 동아시아의 관점
동아시아에서는 혼(魂)도 기(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람이 죽으면 육체가 썩어 없어지듯이 영혼도 하늘에서 흩어진다고 생각했다. 동아시아의 세계관에서 기(氣) 개념은 오컬트 개념이 아니며 경험론적인 성격을 가지기에, 동아시아의 혼 개념은 초자연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온갖 민간 신앙이 짬뽕되어 결합되는 경우가 다반사라, 초자연적 개념이다. 이를테면 유교의 조상 제사는 원칙적으로는 초자연적 개념이 일체 배제되어 있으나, 실제로 제사를 지낼 때는 영혼이 들어오라고 대문을 열어놓는 식으로 진행된다. 혼백이 영혼이랑 같은 뜻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 혼백 중에서 혼(魂)만 영혼과 비슷한 뜻이고, 백(魄)은 육체에 가까운 개념이다. 《예기》 교특생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魂氣歸于天, 形魄歸于地: 혼기(魂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형백(形魄)은 땅으로 돌아간다.동아시아의 옛날 세계관에서는 사람이 뭔가 자연적이지 않고 억울하게 죽었을 경우, 백(魄)만 죽고 혼(魂)은 남아서 난동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액(厄), 살(煞) 등으로 부른다. 물론 혼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흩어지지만, 흩어지기 전까지 난동을 부리기 때문에 무당이 '살풀이'를 해 준다고 본다. 동아시아의 귀신 이야기에서, 귀신이 툭하면 한이 쌓여 있고 그게 풀려야 이승에서 물러나는 이야기가 많은 건 이런 개념들 때문이다. 또 불교의 윤회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흩어진 영혼은 소멸하는 게 아니라 다시 환생한다고 한다. 재패니메이션의 영향으로 귀신이 이승에서 물러나는 것을 성불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성불은 본래 '부처가 된다'라는 뜻이며 사람이 이승에서 물러날 때 성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표현은 아니다. 정토종의 믿음이 강한 일본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서방 정토로 갔으니 성불하였다"라는 식으로 표현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3.6. 기타 관점
인도부터 유럽까지의 서양 세계관에서는 고대로부터 영혼을 육체와 구별되는 비물질적이고 초자연적인 불멸의 정신적 실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많은 이야기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거래를 인간이 허용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다만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귀신처럼 영혼이 지상에 머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죽으면 그대로 사심판을 거쳐 천국과 지옥과 연옥 중 한 곳으로 간 후, 최후의 심판 때(공심판)가 되면 새로운 몸을 갖고 부활해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믿기 때문에, 일상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말은 어떤 선행을 하건 상관없이 지옥행을 예약하는 패악적 행위를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될 때가 많다.(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계약이 그랬던 것처럼) 개신교에서는 연옥을 부정하고, 가톨릭은 인정하며, 동방 교회는 연옥이라는 용어는 안 쓰되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를 고백한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만화 등에서 나오는 것처럼 악마랑 특별한 계약을 맺은 사람만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전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들이다.
많은 경우에 영혼이라는 개념은 곧 자아와 동일한 것이며, 육체를 살아있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식으로든 영혼이 육체에서 빠지면 육체가 죽고, 영혼을 육체에 넣으면 되살아나거나 하는 서브컬처의 묘사가 이런 의식을 뒷받침한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양 세계관. 동아시아인들도 20세기를 거치면서 서양화되어 버린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영혼의 불멸을 지지한다. 대개의 문화권에서는 육체가 죽음을 맞아도 영혼은 존재한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동북아시아엔 영혼결혼식이라는 것도 있다. 또한 이 논리를 이용하여 환생에 대한 설정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는 영혼에 준하는 중음(antarabhava)나 의성신(manomaya-kaya)과 같은 존재 상태를 긍정하지만, 이러한 존재 상태가 윤회에 어떻게 개입하는지는 부파마다 설명이 조금 다르다. 상좌부는 죽는 순간의 의식이 재생연결식을 거쳐 바로 다음 생의 첫 의식으로 이어진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대승은 설일체유부의 영향을 받아서 죽음 이후 중음을 거쳐 육도윤회한다고 설한다. 하지만 타 종교에서의 영혼의 묘사와 유사한 특성을 보여주는 '미세한 몸'의 존재는 긍정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바이킹을 위시한 북유럽 민족들 사이에서는 과거 용맹히 싸우던 도중 죽은 자의 영혼은 발키리가 회수하여 천국 발할라에 모셔진다고 했다. 다만 이 발할라라는 동네가 다른 동네에서는 굉장히 지독한 지옥 취급받는 동네와 묘사가 거의 같다 보니 차라리 그냥 성불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지만. 북유럽 신화에서는 매일매일 싸움을 벌여 다 죽을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운다. 그 후 저녁이 되면 다시 살아나 돼지를 잡아 거하게 잔치를 벌이며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또 싸워야 한다. 이것을 최후의 날까지 무한 반복.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수라도라고 불렀다(...). 하지만 발할라의 주인인 오딘이 가지는 성격과 당시 북유럽 신화를 믿던 이들의 입장에서는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하다. 발할라는 용맹한 전사가 인도되는 곳이니 말이다.
살아있는 자의 영혼은 생령(生靈), 죽은 자의 영혼은 사령(死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생령은 사실 그냥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령은 보통 자연에 깃든 신령한 기운에서부터 요정이나 애니미즘의 대상을 가리키는 등 대상 범위가 넓다. 한편 성령은 보통 기독교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인데, 이는 일반적인 영혼과는 개념이 많이 다르다. 자세한 건 삼위일체 참고.
어떤 억울한 사유로 인해 죽어서도 계속 돌아다니는 영혼은 유령이라고 한다. 망령은 죽은 자(亡)의 영혼이라는 뜻이고, 원령은 원통해하는 영혼이라는 뜻. 악령은 악한 영인데,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악마의 영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여튼 싸잡아서 귀신이나 유령이라고 부른다.
인문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경우 영혼을 태초의 뒤엉킨 자연에서 분리된 주체와 객체와의 간극이라고 본다. 자신의 신체를 포함하여 자연을 객관적인 관조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이란 자연과 분리될 수 있는 주체의 자유 의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혼은 주체의 자유 의지의 형성점이자 주체를 자연과 분리시키는 분절의 경계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결과적으로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언가에 혼을 바친 듯 열심히 하는 뜻으로 '영혼의~'라는 수식어가 속어처럼 종종 붙는다. 대표적으로 영혼의 맞다이, 영혼의 백도어 등등.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통계에 따르면 94% 정도의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에 대해 긍정하고 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서양이나 동아시아이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옛날부터 보편적이었다 보니 당연한 수치일지도.
4. 매체
일본 창작물(특히 오컬트 계열)에서는 '영혼의 힘'이라는 의미로 영력이라는 요소가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건 서브컬처만의 용어는 아니고 본래 오컬트적 용어로 쓰인 것이 차용된 것이다. 여하튼 이게 높으면 유령같이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부가적인 능력이 주어지기도 한다. 그런 능력으로 인해 귀신에게 시달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고생하는 캐릭터도 상당히 흔한 클리셰. 흡수, 빙의 등으로 자신의 능력이나 다른 영혼이 갖고 있던 능력을 구사하든지 하는 용도로 쓰기도 한다.영혼이 파괴되는 것은 곧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므로 이로 인해 끝장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대개 영혼들은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기에 역시 그에 상응하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물리치는 상황이 흔하다. 판타지에서 많이 쓰이는 언데드의 경우, 자세히 보면 육체만 있거나, 영혼만 있는 경우를 모두 포함한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말은 주로 목표를 위해 그동안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무언가, 긍지나 신념 같은 것을 내팽개쳤다는 의미로 쓰인다.
김풍기 왈, 이것이 실리지 않으면 공이 스트라이크 존 한 중간으로 와도 스트라이크가 아니란다.
- 가면라이더 키바: 프론 팡가이아의 말과 지로가 라이프 에너지와 육체를 분리시키는 것을 보면 키바 세계관의 라이프 에너지가 영혼에 해당된다.
- 개그물: 무언가를 보고 놀랐거나 멘붕했을 때, 또는 바보 캐릭터가 태클을 거는 인물에게 구타를 당할 때 머리나 입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 닥터후: 11대 닥터가 영혼은 이야기, 즉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 레젠다리움: 페아와 흐로아 참조.
- 몰리 맥기와 유령: 육신이 죽어 빠져나온 영혼, 육신이 살아 있는 상태로 영혼만 빠져나온 영혼이 Ghost와 Wraith(한국어 더빙판에서는 각각 '유령'과 '혼령'으로 번역.)라는 별도의 개념으로 공존하며 전자는 아예 사후세계에 해당되는 차원인 유령 세계(Ghost World)에서 체계적인 사회를 이루며 산다.
- 소울: 삶과 존재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일까에 관해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작품으로, 작중 사후세계로 가는 길뿐만 아니라 태어나기 전의 세상도 등장한다. 비슷하게 같은 제작사의 이계가 등장하는 또 다른 작품도 있지만, 작품의 주제가 소중한 사람의 죽음과 그를 기억하는 멕시코의 추모 문화라는 점에서 스토리의 방향성과 메시지가 다르다.
- 스위트홈, 엽총소년: 괴물화 사태의 만악의 근원으로 등장한다.
- 새크리파이스: 영혼이 주 자원으로 활용된다.
- 수리검전대 닌닌쟈의 오토모닌: 가장 중요한 재료지만 인터넷 통신 판매로 구할 수도 있다.
- 신좌만상 시리즈: 영혼(신좌만상 시리즈) 항목 참조.
- 심슨 가족: 바트 심슨은 한국 기준으로 시즌 7, 4화인 《Bart Sells His Soul》에서 영혼을 팔고 온갖 기이한 일들을 겪는다.
- 아바타 아앙의 전설(프랜차이즈): 현실의 생명체와 대비되어 영생을 사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이며 영혼계라는 독립된 세계에 살고 있다. 작중 트위, 라, 코, 완시통 등이 등장한다.
- 언더테일: 인간의 영혼이 죽어서도 남아 있을 수 있는 건 의지라는 힘 때문이다. 괴물의 영혼은 인간보다 약해서 죽는 즉시 소멸하며, 인간의 영혼이 가진 만큼의 의지를 괴물이 갖게 되면 몸이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린다.
- 엘더스크롤 시리즈의 불멸자인 데이드라(데이드릭 프린스 포함): 육체가 죽어도 영혼이 고향인 오블리비언의 차원으로 가서 떠돌며 서서히 힘을 수복하고 다시 육체를 얻어 현실 세계에 강림한다고 한다. 문두스의 필멸자는 그런 거 없지만. 대신 노드족 한정으로, 싸우다 죽은 존재의 영혼은 소븐가르드라는 곳에 모셔지고, 그중에서도 특히 위대한 업적을 쌓은 영웅의 영령은 '명예의 전당'에 출입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 영원한 후일담의 네크로니카: 위의 영혼=점균 이라는 상황이 더 극적으로 나아가서, 세계 대전 중 점균체 무리가 가진 네크워크에 정신과 지식을 불어넣고 이 점균체를 이용해 죽은 자를 되살리는 네크로니카 기술이 개발되어 전쟁에 쓰였고, 이후 거리낌이 없어진 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아 인류는 종족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멸망하고, 페허와 괴물, 시체들뿐인 멸망한 세계에서 네크로니카 기술을 쓰는 네크로맨서들이 각자의 욕망대로 시체를 점균으로 되살려 가지고 노는 상황이다. 점균 네트워크와 그 안에 있는 정신만 유지한다면 뇌가 날아가도, 신체가 산산조각이 난다고 해도 점균 네트워크끼리의 작용으로 남은 신체의 파편, 타인의 살점, 심지어 잡동사니를 그러모아서라도 신체를 수복해 내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여준다.
- 유니미니펫: 문을 여는 자로 인해 유니랜드에 있는 다수의 버그펫 영혼들이 인간 세계로 흘러들어 와서 영혼이 없는 로봇펫 몇몇 마리에 기생하고, 특수 요원인 주인공 고양과 햄이 로봇펫들에게 빙의한 버그펫들의 트러블을 제지하는 내용이다. 차고로 고양과 햄도 버그펫처럼 영혼이 있다.
- 전학생: 오바야시 노부히코가 감독한 1982년 영화. 2007년에 감독 본인이 리메이크했지만, 1982년 작품이 더 유명하고 이쪽을 명작으로 친다. 두 사람(특히 남녀)이 서로 부딪히면서 영혼이 뒤바뀐다는 클리셰의 작품이지만, 이 영화에서 다루는 영혼에 대한 주제는 좀 더 심오하다. 일단 내용을 보면 카즈미(여)와 카즈오(남) 두 사람의 자아는 바뀌었는데 성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카즈미(여) 본체(?)의 성격과 카즈오(남)의 자아가 결합한 카즈미(여)의 인격은 바뀌기 전의 카즈오와 카즈미 누구와도 닮지 않았고, 이는 카즈오(남)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인격을 자아와 성격의 결합물로 봤을 때, 이 영화에서는 아래와 같은 도식이 발생한다.
발단 전개 -> 절정 결말 카즈미(1) = 카즈미의 자아 + 카즈미의 성격 카즈미(2) = 카즈오의 자아 + 카즈미의 성격 카즈미(1) = 카즈미의 자아 + 카즈미의 성격 카즈오(1) = 카즈오의 자아 + 카즈오의 성격 카즈오(2) = 카즈미의 자아 + 카즈오의 성격 카즈오(1) = 카즈오의 자아 + 카즈오의 성격
따라서 이 작품은 영혼을 '신체에 구속되지 않는 자아'와 '신체에 구속되는 성격'으로 구분함으로써 작품 내적으로는 영혼을 영과 혼(또는 동아시아적으로 혼과 백)의 결합물로 보는 인식에서 근거한 작품이 되고, 외적으로는 영혼이 바뀐 걸 성격과 행동거지가 바뀌는 것으로 묘사하는 나머지 작품과는 중요한 차별점이 생기는 것이다. 이 작품의 백미는 결국 원래대로 돌아간 뒤에 둘이 헤어지는 장면에서 서로 주고받는 인사. "바이 바이, 와따시."와 "바이 바이, 오레" 카즈미가 전학 오자마자 둘의 몸이 바뀌면서 시작하고, 원래대로 돌아가자마자 카즈오가 전학 가면서 끝난다. 작품 제목이 '전학생'인 이유. - 죽은 자의 제국: 영혼의 무게가 21 그램이라고 나오며, 시체에 의사 영소(유사 영체)를 인스톨시켜 '죽은 자'를 만들어낸다. 주인공 존 H. 왓슨은 해석기관에 의해 천공카드에 입력된 의사 영소가 아니라 진짜 영혼을 부활시키기 위해 세계 각지를 여행한다. 작중에서 나오는 영혼의 정체가 참으로 무시무시한데, 인류의 진화 도중 미토콘드리아처럼 끼어들게 된 점균류가 인간의 본래 이성을 억누르고 형성한 무언가라고 한다. 의사 영소라는 것 또한 결정화시킨 점균이라고.
- 창세기전 시리즈: 카오스 큐브라는 광석을 통해 영혼을 보존하거나 유도하여 환생 시기나 장소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이후 창세기전 3: 파트 2에서 멸망하기 전 미래의 아르케 과학은 영혼의 존재를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는 수준까지 진보하였는데, 여기서는 '영혼의 분자' 즉 '영자(靈子)'라는 개념을 설정하여 영혼의 존재를 설명한다. 이 '영자 연구'의 선봉에 있던 엠블라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사망하면 몸에서 영자라는 개체가 흩어지기 시작하며, 이 영자는 우주의 어느 곳으로 흩어진 후에 다시 모여 새로운 영혼과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때 인간이 인위적으로 영자의 흩어짐을 막거나 영자만을 끌어당기는 특정 매체를 이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가설은 있지만, 태초부터 존재했던 마검인 아수라와 살라딘의 희생으로 기적적으로 태어난 베라모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공적으로 성공한 사례는 없다.
- 타이탄 소울: 최종 보스의 이름이다.
- 타짜 3부 - 도일출: 나라에게 자기 영혼을 팔아버린다. 그리고 나중에 영혼을 도로 사면서 영혼을 팔아버리고 나서야 자신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고마웠다고 말한다.
- 퓨쳐라마: 로봇도 영혼을 가질 수 있으며 영혼 상태에서 잠도 잔다.
- 해리 포터 시리즈 - 디멘터: 영혼을 흡수하는 마법 생물이다.
- DEEMO - ANiMA: 라틴어로 영혼이라는 뜻이다.
- Don't Starve - 워톡스: 영혼을 먹고 영혼을 이용해 힐을 한다.
- F.E.A.R. 시리즈: 현대 배경 FPS이긴 하지만 초능력이란 설정까지 공존하고 있어서 유령이 자주 나온다. 주역 인물들이 영혼화된 경우엔 불쑥 튀어나와서 놀래키는 정도의 행패만 부리고 끝나지만 이름없는 영혼들은 죄다 적군이다.
- SD건담 삼국전 시리즈 - 여포 톨기스: 말버릇으로 이것을 외친다.
- SF물: 기계도 영혼을 가질 수 있는 지에 대한 여러 가지 고찰이 펼쳐진다. 대표적인 작품은 공각기동대. 고스트라는 걸 두고 과연 인간이 아니었던 존재가 고스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 이 작품의 스토리 근간을 차지한다. 일단 작중에 인간이 아니면서 고스트를 획득했다고 결론 내려진 캐릭터는 인형사와 타치코마 일동. 다만 공각기동대에서는 고스트를 순전히 물질적인 유물론적 정신 개념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통적인 영혼 관념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 TYPE-MOON - TYPE-MOON/세계관: 영혼은 기본적으로 윤회전생을 하며, 전생을 하면서 기원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단, 영웅 혹은 그와 동급인 악당이 죽으면 윤회에서 벗어나 영령이 된다.
- Warhammer 40,000 - 죽으면 이마테리움의 일부가 된다. 네크론의 경우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을 가졌을 때에는 영혼이 있었지만 기계 육신으로 옮기는 과정에 크탄들이 자신들의 영혼을 먹어치워서 영혼이 없다고 한다. 그 말은 원래는 영혼을 기계에도 담을 수준의 기술력이 된다는 말이다.
5. 속어
인터넷에서는 "마지막까지 죽을 힘을 다해 쥐어짜낼 수 있는 자원" 혹은 "최후의 보루로 꼭 남겨야만 하는 가장 내밀한 자존심"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 용례로는 "영혼까지 끌어모았다",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영혼까지 끌어모았다"는 말은 줄여서 "영끌"이라고 하는데 내집마련 자금 마련을 위해 은행 대출부터 퇴직금 중간 정산 등을 통해 돈을 있는 대로 죄다 끌어모으는 이들이 "영끌했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영화를 예매만 하고 보지는 않아 그 영화의 예매율만 올려주는 행위를 영혼 보내기라고 한다.
6. 언어별 명칭
<colbgcolor=#f5f5f5,#2d2f34> 언어별 명칭 | |||
한국어 | 넋, 얼, 영혼(靈魂), 혼령(魂靈), 영령(英靈), 혼백(魂魄) | ||
령혼(靈魂)(문화어) | |||
한자 | 靈魂(영혼), 魂靈(혼령), 英靈(영령), 魂魄(혼백) | ||
그리스어 | ψυχή(psychí), πνεύμα(pnévma) | ||
ψυχή(psukhḗ, 프시케), πνεῦμα(pneûma)(고전 그리스어) | |||
독일어 | Geist(가이스트) | ||
라틴어 | anima(아니마), animus, spīritus | ||
러시아어 | душа́(dušá), дух(dux) | ||
산스크리트어 | आत्मन्(ātmán, 아트만), त्मन्(tmán), विज्ञान(vijñāna) | ||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 alma(알마) | ||
스페인어 | espíritu | ||
아랍어 | رُوح(rūḥ), نَفْس(nafs) | ||
영어 | soul(소울), spirit(스피릿) | ||
gāst(고대 영어) | |||
soule(중세 영어) | |||
이탈리아어 | anima(아니마) | ||
일본어 | [ruby(霊, ruby=れい)][ruby(魂, ruby=こん)](reikon, 레이콘), [ruby(魂, ruby=たましい)](tamashii), [ruby(魂, ruby=こん)][ruby(魄, ruby=ぱく)](konpaku, 콘파쿠), [ruby(霊, ruby=れい)]/[ruby(靈, ruby=れい)](rei, 레이), [ruby(霊, ruby=たま)]/[ruby(靈, ruby=たま)](tama, 다마/타마) | ||
まぶい(mabui), [ruby(魂, ruby=たましー)](tamashī)(오키나와어) | |||
[ruby(魂, ruby=たまち)](tamachi)(요나구니어) | |||
중국어 | 靈魂/灵魂(línghún), 魂魄(húnpò) | ||
케추아어 | nuna(누나) | ||
튀르키예어 | ruh, can, tin(틴) | ||
روح(ruh)(오스만어) | |||
프랑스어 | âme, esprit(에스프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기타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0px" | <colbgcolor=#f5f5f5,#2d2f34> 고트어 | 𐍃𐌰𐌹𐍅𐌰𐌻𐌰(saiwala), 𐌰𐌷𐌼𐌰(ahma) | |
나바호어 | iiʼ sizíinii | ||
네덜란드어 | ziel, geest | ||
마오리어 | wairua | ||
마인어 | roh, jiwa, nyawa, ruh | ||
만주어 | ᡶᠠᠶᠠᠩᡤᠠ(fayangga) | ||
몽골어 | сүнс(süns)/ᠰᠦ᠋ᠨ᠋ᠡᠰᠦ(sünesü) | ||
베트남어 | tâm hồn, linh hồn(靈魂) | ||
아이누어 | rama/ラマ | ||
에스페란토 | animo(아니모) | ||
체로키어 | ᎠᏓᎾᏔ(adanata) | ||
태국어 | วิญญาณ(win-yaan) | ||
토하라어 | āñcäm(토하라어 A: 아그니 방언) | ||
āñme(토하라어 B: 쿠차 방언) | |||
페르시아어 | روح(ruh), روان(ravân), جان(jân), نفس(nafs) | ||
포르투갈어 | espírito | ||
폴란드어 | dusza | ||
핀란드어 | sielu, henki | ||
하와이어 | ʻuhane | ||
히브리어 | נְשָׁמָה(n'shamá), נֶ֫פֶשׁ(néfesh, 네페쉬), רוּחַ(rúakh) | ||
힌디어 | आत्मा(ātmā), रूह(rūh), नफ्स(naphs) | ||
روح(rūh), آتما(ātmā)(우르두어) | }}}}}}}}} |
성령을 라틴어로 spiritus sanctus라 한다.
7. 관련 문서
[1]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의 Περὶ Ψυχῆς{{{-2
[
Peri Psychēs]
는 De anima라틴어, On the Soul영어라고 하지, 누구도 De spiritu라틴어나 On the Spirit영어이라 하지 않는다. 또한 거의 모든 서양어 성경에서는 psychē와 pneuma를 위의 표에 맞춰서 번역한다.[2] 사실 서양에서 psychē와 pneuma만 관습적 번역어가 통일되어있을 뿐, nous의 번역어는 통일되지 않았다.[3] "우리 인간들은 일종의 감옥 속에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나거나 도망치려 해서는 안 된다."(플라톤, 『파이돈』 61b, 전헌상 역주, 이제이북스, 2013)[4] "아니, 벌써 떠날 시간이 되었군요. 나는 죽으러, 여러분은 살러 갈 시간이. 우리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신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분명치 않습니다."(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42a, 강철웅 역주, 이제이북스, 2014) 다만 죽음이 '몸이라는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임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자살은 부정적으로 봤다. 사실 앞 각주에서 인용한 파이돈 역시도 자살을 반대하는 대목으로, 신의 허락 없이 인간이 '몸'이라는 감옥에서 임의로 탈옥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이다. "자네도 자네의 소유물 중 어떤 것이, 자네가 그것이 죽기를 바란다는 표시를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죽인다면, 그것에게 화를 낼 것이고 벌이 있다면 벌을 내리지 않겠나?"(플라톤, 『파이돈』 62c, 전헌상 역주)[5] 몸을 혼의 껍질로 보기에 시신을 화장(火葬)하는 풍습이 발달했으며, 신화속의 헤라클레스도 사후 '껍데기'인 몸을 화장하자 '헤라클레스 그 자체'인 혼이 승천했다.[6] (발췌자 주석) 독자에겐 매우 혼란스럽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도 '형상과 질료의 복합물'도 모두 '실체'라 부른다.(참고: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039b21)[7] "육신은 죽여도 영혼psychē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 10,28,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새번역 성경』)[8]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마르 14,35-36,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새번역 성경』)[9] 텍스트 출처: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성 토마스 개념사전』Dizionario Enciclopedico del Pensiero di San Tommaso d'Aquino (2000) , 이재룡·안소근·윤주현 번역, 한국성토마스연구소, 22021(12020), p.457.[10] 텍스트 출처: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성 토마스 개념사전』Dizionario Enciclopedico del Pensiero di San Tommaso d'Aquino (2000) , 이재룡·안소근·윤주현 번역, 한국성토마스연구소, 22021(12020), p.507.[11] 이는 지성(nous희랍어, intellectus라틴어)과는 다른 개념이다. '지성'은 인간을 여타의 동물과 구별해주는 능력이며, 원숭이나 돌고래 등 여타의 동물들도 가지고 있는 기억력, 사고력, 상상력 개념과 구별된다. 토마스는 지성이 인간의 몸보다는 혼에 고유하다고 보았지만, 인간의 몸은 혼의 고유한 존재 현실에 참여하고 인간의 혼은 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혼-몸 단일성이 이루어진다고 봤다.[12] '중세에 이런 말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었을까' 싶겠지만, 그런 걱정은 후기 근대 가톨릭의 이미지를 중세에 잘못 투영한 것이다. 스콜라학 시대 교회는 대학이 매우 주도적인 기능을 했으며, 교리와 충돌하는 철학적 명제를 공공연하게 주장할 수 있었고, 설령 단죄 받더라도 복귀와 복권, 사문화가 매우 활발하였다. 당장 토마스 아퀴나스도 사후에 단죄 받은 적이 있지만 빠르게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