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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이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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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슬람에서 기원했지만 대다수 드루즈인들조차도 스스로를 별개의 종교로 분류한다.
  • * 일반적으로 시아파와는 별개의 종파로 분류되는 경우가 더 많다.
}}}}}}}}}


1. 개요2. 역사
2.1. 소은폐기2.2. 대은폐기
3. 독립 분파
3.1. 알레비파3.2. 알라위파3.3. 바비교(아잘리파와 바하이교)
4. 역대 이맘

1. 개요

통칭 마흐디파, 자파리파.

현대 시아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2이맘파는 후세인 이븐 알리의 아들들 가운데 알리 이븐 후사인 자인 알 아비딘(Ali ibn Husayn Zayn al-Abidin)을 정통으로 보았다.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바레인, 아프가니스탄 중부 지방에 분포해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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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룻딘 술라이만
제21대
앗 타이브
* 1.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알리의 이복 동생인 자파르의 손자 }}}}}}}}}


알리 자인 알 아비딘은 아버지가 후세인 이븐 알리이고, 어머니는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Yazdegerd III)의 황녀인 샤흐르바누(Shahrbanu)로서, 전설에 따르면 샤흐르바누는 페르시아가 패망한 뒤 우마르 혹은 우스만 혹은 알리의 노예가 되었는데 알리는 여성들을 해방시켜주고 누구와 결혼할 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했다. 샤흐르바누는 후세인을 선택해 혼인했다. 그렇게 알리 자인 알 아비딘은 아랍인의 최고 혈통인 쿠라이쉬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 황실의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났다고 12이맘파는 주장한다.

한편 후세인 사후 알리 자인 알 아비딘부터 자파르 앗 사디크까지 이맘들은 가문의 원수이자 찬탈자인 우마이야 왕조에 맞서 싸우지 않고 메디나에 은거하며 교리의 확립과 설파에 치중하였다. 이는 쉬아 공동체와 알리 가문에 대한 순니 지배층의 박해를 피하기 위함이었는데, 점차 이맘위와 칼리파위는 서로 분리되어 있고 하나님이 전자를 승리로 이끌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교리로 발전하였다.

8세기 초엽까지 서아시아의 쉬아 세력은 메디나의 후세인 혈통과 이라크 지역의 무함마드 이븐 알-하나피야 (알리의 서자) 혈통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후자인 카이사니야 세력이 주도적이었다. 후세인 가계는 그나마 적은 세력이 무함마드 알 바키르 대에 그의 동생 자이드 빈 알리가 무력 투쟁을 주장하며 자이드파로 갈라져 나가 더욱 분열되었다. 다만 700년 이븐 알 하나피야가 사망한 후 카이사니야가 하쉬미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일부 세력이 후세인 가계에 합류하였고, 716년 하쉬미야 이맘 아부 하쉼이 사망한 후에도 마찬가지로 일부 합류자가 있었다.

다만 대부분의 하쉬미야는 무함마드의 숙부 압바스의 후손인 무함마드 빈 알리를 이맘으로 모셨고, 그들은 740년대 3차 피트나를 통해 우마이야 조를 멸하고 압바스 왕조를 세우게 된다. 압바스 칼리파 조는 우마이야 칼리파 조를 멸망시킬 때 쉬아 세력과 협력했으나 건국 후에는 돌변하여 그들을 숙청했고, 하쉬미야 이맘이란 칭호 역시 버리며, 순니 칼리파임을 천명했다. 이후 아바스 조는 우마이야 조를 능가하는 강력한 수니파 제국을 건설했지만 통수를 맞은 쉬아 세력의 저항은 끊어지지 않았고 이집트나 페르시아 같은 비아랍계 지방과 아나톨리아 동부, 아제르바이잔 같은 산골 깡촌에서 세력을 불렸다. 특히 우마이야-압바스 교체기를 틈타 쉬아 이맘들은 지하 조직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하쉬미야가 사실상 사라지자 메디나의 자파르 앗 사디크가 주도적인 쉬아 이맘이 되었다. 그는 순니 4대 법학파 중 하나피, 말리키와 무타질라파 등의 창시자들을 가르치는 등 신학적으로 출중하였기에 순니 무슬림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자파르의 이맘위에 쉬아 세력은 점차 확장되었다. 비록 자파르 사후 후계자 문제에 있어 그의 요절한 장남 이스마일과 장손 무함마드 빈 이스마일을 지지하는 세력이 이스마일파로 분리되긴 했지만, 주류 쉬아는 능력 있는 아들이 계승해야 한다는 자파르의 뜻을 따라 삼남 무사 알 카짐을 지지하였다.

아바스 칼리파조 치하에서 알리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여겨지는 시아파의 이맘들은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았고,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있었다. 특히 자파르 때부터 쉬아 세력에 대한 압바스 당국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이맘들은 지하 조직을 통해 이슬람권 각지에 대표자 (와킬)를 파견, 일종의 종교세인 쿰스[1]를 징수하고 지령을 전달하였다. 비록 정치에 일선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이맘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자 압바스 당국의 위기감은 고조되었다. 그 결과 열두 이맘파의 12 이맘들 중 거의 절반 가량이 우마이야-아바스 칼리파들에게 독살당했고, 그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알 마문으로부터 후계자 지위까지 보장받았으나 결국 의문사당한 알리 알 릿다(이맘 레자)였다.

아바스 조의 제10대 칼리파인 알 무타와킬의 치세에 시아파의 제10대 이맘 알리 알 하디가 아바스 왕조의 궁정이 있는 사마라로 소환되어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였다가 독살되었다. 알리 알 하디의 아들인 제11대 이맘 하산 알 아스카리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자손은 나타나지 않았고 시아파 이맘의 대는 공식적으로는 끊어졌다.

그리고 제12대 이맘에 대한 시아파의 전설이자 교리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수니파는 제12대 이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산 알 아스카리는 자손이 없이 죽은 듯이 보였지만, 사실 그는 노예를 가장하여 아라비아를 여행하던 동로마 제국의 공주 나르지스(Narjis)와 결혼하여 아들을 보았다.[2] 하지만 아바스 왕조의 탄압을 우려하여 아들을 낳은 것을 비밀로 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제12대 이맘 무함마드 이븐 하산 알 마흐디(Muhammad ibn Hasan al-Mahdī)이다. 이맘 알 마흐디는 5세 때 아버지 하산 알 아스카리의 장례를 치른 다음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이는 하나님이 마흐디를 박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의 모습을 감춘 것("Ghaybah")이며, 마흐디는 미래에 이사와 함께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인류를 심판할 것이다...

2.1. 소은폐기

아랍어 ٱلْغَيْبَة ٱلصُّغْرَىٰ
영어 Minor Occultation

소은폐기(알-가이바 앗-수그라)는 874년 제11대 이맘 하산 알 아스카리의 요절(쉬아 측에선 독살로 여김) 이후 어린 아들 무함마드 알 마흐디 (이맘 알 마흐디)가 제12대 이맘으로 등극하며 시작되었다. 알 아스카리의 측근이었던 우스만 빈 사이드 알-아사디는 알 마흐디가 아바스 당국을 피해 은둔하고 있으며, 서신을 통해 대리인(나입)에게 지시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첫 나입으로 취임하니 이른바 소은폐기의 시작이었다.

2.2. 대은폐기

아랍어 ٱلْغَيْبَة ٱلكبرَىٰ
영어 Major Occultation

전승에 따르면 이슬람력 329년(서기 941년) 알-마흐디가 나입 앗-사마리에게 서신을 보내어 6일 후에 그가 사망할 것임을 예고했으며, 이후로는 더이상 나입을 두지 않고 완전한 은폐에 들어간다고 했다. 따라서 앗-사마리가 후임자를 지목하지 않고 사망한 이래 은둔한 이맘과 민중 간의 연결고리는 끊겼고, 그는 훗날 마흐디가 되어 세상을 구원할 때까지 은둔을 지속할 것이다. 그때까지도 알-마흐디는 12이맘파의 형식상 수장으로 남으며, 그의 뜻을 대리하여 아야톨라와 같은 율법학자들이 '파트와'를 내리게 된다.

2.2.1. 부와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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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중기에 일시적으로 페르시아 시아파 계열의 12이맘파 맘루크들이 부와이 왕조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었다.

음모론에만 의존하던 시아파 신학은 부와이 왕조 치하에서 무타질라 학파 및 순니파 샤피이파의 발전 과정을 벤치마킹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서기 995년 호라산 서부 투스에서 태어난 무함마드 투시쉬아파 부와이 왕조에 봉사하면서 무타질라파 철학과 쉬아파 교리에 입각하여 《하디스》 편집본을 만들고, 시아파의 관점으로 해석한 《쿠란》 주해서 《앗 타비얀 피 탑시룰 쿠란》을 편찬했다. 시아파 12이맘파 신도들은 특별히 존경심을 담아 셰이크 투시(투스 출신 석학님)라고 부르며, 이 외에도 존칭으로 아부 자파르(자파르 법학파의 대부)라고도 부른다. 순니파 앞에서 셰이크 투시 혹은 아부 자파르라고 하면 다른 사람으로 알아듣는 수가 있다.[3]

이전까지 주로 음모론에 힘입어 계속 끝없이 분열하던 시아파 12이맘파 신학은 무함마드 투시 이후 체계적인 교리를 갖춘 신학을 갖게 되었고, 이는 후대 시아파들이 12이맘파로 안정적으로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다.

2.2.2. 사파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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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파 수피 계열인 사파비 가문이 12이맘파를 국교로 하는 사파비 왕조를 이란에 건국하면서 12이맘파의 영향력이 이란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슬람의 도래 이후 이란은 10~11세기의 부와이 왕조와 북부 타바리스탄의 국가들(알라비 왕조, 바반드 왕조, 아사신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수니파였다. 보수 순니파를 지원하며 시아파를 탄압하는데 열과 성을 바쳤던 대셀주크 제국의 명재상 니잠 알 물크도 이란인이었다.[4] 현존하는 페르시아권 국가 중에서도 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은 이란과 달리 현재까지도 수니파가 주류이다. 하지만 사파비 왕조 이후로 이란은 시아파 국가가 되었다. 사파비 제국의 건국 세력이었던 키질바시들은 사파비야 수피 교단을 믿었으나 해당 교단이 지나치게 극단주의적이었고, 결국 사파비 제국이 자리를 잡으면서 사파비야 수피 교단은 점차 해체되고, 좀 더 온건하고 안정적인 성향이었던 자파르 법학파가 주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파비 왕조는 수니파와 노골적으로 대립하며 성립되었고, 이는 10%가량에 달하는 시아파의 급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그 시아파 절반이 이란이다. 언제나 소수파로 존재할 줄 알았던 시아파가 수니파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신호탄은 수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실제로 현대 순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란이나 시아파를 칭할 때 '사파비'라는 용어를 아직도 사용하는 편이다. 이 구도는 현대 이란, 그리고 현 무슬림 세계의 수니•시아의 대결 구도로 이어졌다.

3. 독립 분파

본격적으로 열두이맘파가 되는 7대 이맘 무사 알 카짐의 전에 갈라져 나간 분파는 자이드파, 이스마일파, 파트히야[5], 와키피야[6] 등이 있다. 하단에는 그 이후의 열두이맘파, 즉 자프리파(Jafri)가 분열되며 형성된 집단들만 다룬다.

3.1. 알레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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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알라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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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바비교(아잘리파와 바하이교)

19세기 중반 이란 카자르 왕조의 내각이 영국의 영향으로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시아파 율법학자들의 기득권이 약화되었다. 정부는 서구식 법원을 신설하여 《샤리아》를 폐지하는 정책을 취했으며, 종교기금을 규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세속적 학교의 설립을 후원함으로서 마드라사를 견제했다. 정부는 또한 시아파 순교자를 추모하는 종교극도 금지시키려 했다.

카자르 왕조의 완강한 세속주의 확립 태도에 맞서 보수 울라마들이 봉기했다. 그 중에서도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종교적 확신을 추구하던 시아파의 염원에 다시 불을 붙이는데 성공했다. 알리 무함마드는 12이맘파의 12번째 이맘이 무슬림과 단절된 것이 아니며, 무슬림 사회에는 숨은 이맘의 의지를 해석해주는 사람이 언제나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1844년 알리 무함마드는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며 바압(문)이라고 선언했고, 나중에는 아예 자신이 진정한 (12번째) 이맘이라고 선포했다. 아울러 새로운 경전인 《파르시 바얀》을 발표하고 《바얀》이 《꾸란》을 능가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고무되어 이란의 여러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결국은 모두 진압되었다.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1850년에 살해되었고 그 추종자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었다. 아잘리파라고 불린 한 집단은 카자르 왕조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고 1905년 혁명에 적극 동참했다. 두 번째 집단은 바하울라라는 수피 지도자를 추종했는데 바하울라는 1863년에 '예언자'를 자칭하고, 아예 이슬람에서 다른 종교로 갈라져나온 바하이 신앙을 창시했다.

4. 역대 이맘

자파리 열두 이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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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랍어로 숫자 5를 뜻하는 캄사의 변형형. 수입의 1/5를 납부하는게 원칙이었다[2] 시작부터 윤색의 낌새가 강하게 느껴지지만 종교적인 설화니까 그렇다고 치자(...). 조상의 아내는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왕녀, 직계 모친은 동로마 제국의 왕녀라는 차이 빼고는 알리 자인 알 아비딘 탄생 설화와 별 차이점도 없다.[3] 순니파 입장에서는 이븐 시나 같은 특별히 과학 쪽에 걸출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중세 시아파 신학자들을 듣보잡 이단 신학자 123 시리즈로 취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4] 다만 그의 종교 정책에 관련해서는 이견이 많다. 시아파에 맞서서 샤피이파를 후원하는 과정에서 하나피파와 여타 사변철학 학파들까지 견제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니잠 알 물크가 후원하던 보수 순니파 신학자 알 가잘리 역시 이란인이었다.[5] 무사의 작은형 압둘라와 그의 아들 무함마드를 지지하는 세력[6] 중간에 사망한 이맘이 마흐디로 재림할 것이라며 그 후계자들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 주로 자파르나 무사 사후에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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