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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말생(대왕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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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작중 행적
2.1. 태종 재위 시절2.2. 세종 즉위 후2.3. 뇌물 사건으로 몰락하다2.4. 복귀 후

1. 개요

KBS 대하드라마 대왕 세종의 등장인물, 배우는 정동환으로, 불멸의 이순신에서 윤두수 역할이 대표적이다. 타 방송사 시대극에서는 SBS 야인시대최동열, 연개소문의 연태수를 맡았다.

태종 때부터 관료로 재직했던 대신으로, 세종 즉위 후 김도련 뇌물 사건으로 몰락하였다가 세종의 비호를 받아 세종 재위 말기까지 살아남는 역사적 자취는 유사하나, 세종 즉위 직후 가장 큰 세종의 정적이라는 포지션으로 재해석되어 타 사극과는 상당히 다르게 묘사되었다. 방법은 잘못됐어도 개인의 영달이 아닌 국가를 생각하는 자신만의 생각이 확고한 충신이기 때문에 연기에서 결연함을 위주로 한 톤에 아주 약간의 느글느글함만 더해졌다.

2. 작중 행적

2.1. 태종 재위 시절

1화부터 등장하는 데, 지신사로[1] 있었으며, 조용히 직무에 수행하는 비서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이 때는 작중 감사 전문이자 정객인 박은의 측근에서 정치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서, 장차 어심을 떠보기도 하는 등 정치적인 야심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2.2. 세종 즉위 후

태종이 세자 이도에게 선위한 후, 세종을 옆에서 돌보면서 또한 행보를 감시하기 위해 세종의 지신사로 붙여준다. 이 때부터 세종의 행보를 견제하고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집현전 학사를 뽑는 일에 조말생을 시키게 되는데, 박은이 집현전 영전사가 되자, 집현전에 박은의 사람을 심어둬야 하다고 조언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심복인 김문을 집현전에 넣어 집현전의 동태를 파악하게 한다.

이후 심온의 옥사로 인해 태종 라인의 군부 인사였던 강상인, 전임 병판이 죽자 태종이 자신이 갖고 있는 병권을 통제하기 위해[2] 조말생은 병조판서로 제수된다. 조말생은 병판에 제수되는 즉시 우군의 이순몽과 좌군의 박실을 자기 라인으로 만들고, 중군장인 최윤덕은 틈만 나면 북방으로 파견하면서 견제한다.[3] 그리고 병판으로 제수된 뒤부터, 조말생은 세종의 가장 큰 정적이 된다.

서운관의 실수로 인해 홍수를 가뭄으로 잘못 예측하고, 일식 일자가 빗나가는 등의 사고가 터지자 하늘이 노한 것이라고 세종을 몰아 붙이고, 수해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을 효령대군이 사찰에서 돌보아 민심이 효령에게 쏠리고 숭유억불의 국시가 흔들리게 되자, 같은 왕족이자 핏줄인 효령을 치든지, 아니면 밀실 정치의 현장인 집현전을 폐쇄하든지 양자일택하라는 식으로 세종을 압박한다. 이 때문에 집현전 짬밥 먹고 세종에게 감화된 박은이 조말생에게 무릎까지 꿇으면서 본인만 날리고 집현전은 존치해달라고 하자,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박은에게 실망과 분기를 표출한다. 결국 박은의 거래를 받아들여 박은만 파직하고 집현전은 살리는 쪽으로 거래를 하게 되는데, 평소에 남 털어서 약점 잡아서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키던 박은답지 않게[4] 무릎까지 꿇며 인정에 호소하는 설득 방식을 선택한 이유가 마지막인만큼 협잡이 아닌 정치를 하고 싶었다는 박은의 말에 고민한 듯하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인 김문에게 어차피 박은 날렸으니 정치적 목적은 달성한 것이며, 그럼에도 자신의 정치적 스승으로서 존경했기 때문에 기쁘지만은 않다고 소회를 밝힌다.

이후 세종과 독대한다. 세종이 자신을 "타고난 승부사"라고 칭하자, "정치는 승부가 아니옵니다"라면서 자르면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은 "조선이 소중화를 이루는 것과, 우매한 백성을 교화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임을 밝힌다. 이에 영감을 받은 세종이 숭유억불을 두고 "국시는 지키되 마음은 자르지 말라"는 식의 교서로 강압적인 억불이 아닌 유교로의 교화를 우선시하라는 교서를 내리자, 세종을 두고 대신들 앞에서 정치를 재미있게 한다고 평한다.

세종이 추진하는 정책마다 중신들의 반대 여론을 앞장서서 조성하는 데다가 나중에는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독단으로 군령을 내리는 등으로 인해, 결국 태종은 심온을 숙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왕권을 잠재적으로 위협할 인물이 남아 있으며 그게 조말생이라고 판단[5], 좌군절제사 박실에게 밀지를 내려 조말생을 추포하여 제거하라고 명령했으나, 이미 박실은 조말생 라인이었기 때문에 항명하여 조말생을 추포하지 않았고 조말생은 군부 인사들과 함께 상왕전 앞에 모여 태종의 뒤통수를 거하게 쳐버린다.[6][7]

이후 하도 정치적 공세에 시달린 세종을 보다못한 윤회와 이수 등 세종의 측근 인사들, 그리고 조말생에게 뒤통수 맞은 태종이 조말생을 위시한 중신들을 상대할 정치적 승부사가 세종에게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여, 결국 황희가 의정부 참찬에 제수되어 조정에 복귀하게 된다. 조선의 역법 도입에 반대하여 조말생을 위시한 중신들 대부분이 하급 관원들까지 동원해 직무 수행 거부에 돌입했는데, 황희가 복귀하여 이들 태반을 복귀시켜버리자, 조말생은 나머지 관원들의 복귀 및 협치 보장을 세종에게 약속하는 대신 황희에 대한 서경을 요구한다. 그리곤 황희가 박포의 처를 간통했다는 사실을 담은 폐기 문서를 몰래 인사 고적에 끼워넣는다. 사실이 밝혀지면 황희에 대해 서경권을 발동해 쫓아내면 되고, 만약 서경을 담당하는 집현전 학사들이 이 사실을 질문지에 고의로 누락하면 집현전을 날려버릴 속셈이었던 것.[8]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윤회가 상왕이 폐기를 명한 문서를 몰래 끼워넣었다면서 항의하지만 그게 폐기문서인지, 아니면 누락된 문서인지 모르며 그걸 입증해줄 상왕은 살아계시지 않으니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나온다. 결국 최만리가 박포의 처를 데려와 진실을 밝혔지만[9] 그럼에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며 황희에 대한 서경을 발동하는 쪽으로 중론을 모으려했지만 허조의 반대로 실패한다.

장영실 등용 문제로 집현전 내에서도 중론이 분열되는 가운데 조말생은 심지어 자신에게 손을 벌리는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고, 왕족인 경녕군에게까지 손을 벌리고 명나라에도 기밀을 팔까말까하는 가운데, 반대로 자신이 심어둔 집현전 학사인 김문의 배신으로 김문의 노모 명의로 되어있는 와가로 매관매직을 일삼았다는 사실이 황희에게 걸리게 된다. 황희가 장죄를 덮어주는 대가로 장영실 등용을 수용하고, 천문기기 제작을 명에게 유출하지 말 것을 요구하자 결국 이를 수용한다.

이후 세종의 장녀 정소공주의 죽음으로, 집현전 학사들 사이에서 심온을 복권하고, 심온의 옥사에 관여했던 대신들을 모조리 처벌해야 한다는 중론이 조성되어 이것이 사헌부, 사간원의 상소 폭주로 이어지면서 다시 정국이 어수선해진다. 조말생 본인도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병판으로서 북방에 파견될 사람으론 자신 대신 최윤덕을 보내어 정치적 대응을 하려한다. 다만 이 정국은 유정현이 책임 지고 사직함으로써 무마된다.

2.3. 뇌물 사건으로 몰락하다

세종이 여진족에 대한 귀화책을 천명하자, 또 이를 반대하고 나서면서 세종을 폐하고 경녕군을 옹립할 역심을 품게 된다. 이후 한양 대화재가 발생하자, 화재의 원인이 북삼도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방화라고 몰아붙여 북삼도민들을 군부를 동원해 추포하여 거센 추국을 벌인다. 그러나...

화재의 배후는 바로 조말생이었다. 수사 결과 방화에 군에서 사용되는 초석이 동원되었고, 이 초석을 김도련의 상단이 제공했으며, 이 김도련이 조말생과 노비 거래로 유착된 관계였기 때문. 조말생은 도성에 화재를 일으켜 민심을 이반시킨다음 경녕군을 옹립하려 했으나, 경녕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자신이 배후였으며, 김도련 상단으로부터 수수한 뇌물은 대명률에 의거하여 사형을 10번 구형받고도 남을 수준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맹사성과 이수가 군부를 동원해 그를 추포하기 직전까지 간다. 그러나 군부가 그를 체포하기 전 세종이 강휘를 동원해 미리 조말생의 신변을 확보했고, 조말생의 장죄 규모를 들은 세종은 경악한다.
세종 : 그 많은 재물이 왜 필요했나? 그대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사야? (멱살을 잡는다) 어디까지 갈 생각이었나? 그대에게 돈으로 벼슬을 산 자들은 학정에 주구가 되고, 허면 나의 백성은 굶주리게 된다. 알고 있나?! 안보, 안보, 안보! 그댄 안보란 패를 잘도 빼들고 과인을 겁박해왔다! 헌데, 헌데, 안보를 목숨보다 귀히 여기던 자가 북방에서 군사를 빼내려했다? 어떻게 돼도 상관 없다는건가? 그대가 용상을 훔치고 권력을 잡긴 위해선 이 나라가 망해도 좋으냐 물었다!
조말생 : 이 나라, 소신의 나라이기도 하옵니다. 안보, 특히 북방의 안보는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명국에서 반란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승하한 영락제의 아우이자, 황제의 숙부인 주고구가 그 수괴입니다. 적장 이만주가 그 자에게 붙었으니 이만주의 군사는 조선이 아닌 명국으로 향할 것입니다. (명나라와 여진의 내부 문제가 묘사된다.)
세종 : 과인에게 그대의 충심이 없는 것이 아쉽군. 이제, 그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라 보는가?
조말생 : 휘하들 앞에서 처형되는 것이 원이옵니다.
세종 : 충성 서약을 하고, 과인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어떤가?
조말생 : 그럴 의사 없사옵니다. 전하가 생각하시는 나라와 신이 생각하는 나라는 너무도 다르옵니다. 휘하들 앞에서 처형해주십시오. 그렇게 일벌백계를 해야, 신을 따르는 자들이 다른 마음 먹지 않을 터, 내란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신이 전하가 아닌 이 나라 조선에 바칠 수 있는 마지막 충심이옵니다.
세종 : 뜻대로 해주지.

조말생의 신변이 파악되지 않자 좌우군 절제사인 박실과 이순몽은 거병을 하려 했으나, 조말생은 비록 부패했으며 세종에게 정치적으로 반대를 했어도 조선의 관료였는지, 군부가 멋대로 거병을 하여 조선에 내란을 나는 것은 막았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말생을 원칙대로 처형하지 않고, 병판으로서의 능력을 신임하여 그를 유배보내는 것에 그친다.

함거에 올라 유배 가는 길에 최만리가 찾아온다. 자신에게 분기를 표출하는 최만리에게 조말생은 능글맞게, 날개가 떨어져도 새는 새라면서, 최만리에겐 "똑바로 해 이 멍청아"라고 하고는, 집현전이 제대로 못하면 내가 다시 날아오를 거라면서, 돌아오게 되면 집현전과 금상(세종) 모두 제대로 밟아주겠다고 다짐한 뒤 분노로 눈이 뒤집힌 최만리를 거하게 비웃으며 유배길에 오른다.[10]

2.4. 복귀 후

병조판서를 맡던 이수가 명의 첩보기관 동창의 기습으로 인해 사망하고, 여진족이 여연(오늘날 중강진)을 습격해 백성일 죽이거나 생포하고 군량미를 빼앗는 일이 벌어진다. 이는 세종이 조선의 전신국가 고려의 정통성을 이어받는 국경비를 찾아내면서 여진족들을 토벌하여 고토를 찾는다는 명분이 되었다. 이에 전쟁준비를 하면서 최윤덕으로부터 "그를 복직시켜야 한다"며 과거 세종을 위협하던 조말생을 복직시키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지만 세종 또한 이를 알고 있었고 황희를 보낸 상황이었다. 황희를 본 조말생은 과거 조말생이 황희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였고 동맹가를 치냐는 말에 감을 전혀 잃지 않음을 보였다.
"전하께 전해주시겠습니까? 이 사람을 다시 찾은 걸, 후회하지 않으실 거라고 말입니다."[11]
북방 개척을 결심한 세종에 의해 병조판서로 재등용되고 때마침 여연에서의 여진과의 전투에서 소중한 인연인 담이를 잃고 악에 차 있던 김종서의 멘토가 되어 북벌을 지휘하게 된다.[12] 황희가 그를 다시 불러오기 위해 찾아왔을 때, 바로 "동맹가를 치는 겁니까?"라면서 북벌의 구체적인 동선을 가늠함으로써 그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보였고, 최고의 병판이라는 최윤덕의 말이 헛말이 아니라는 듯, 야심을 틈타 바로 동맹가 부자를 사로잡아 그가 이만주를 지원하지 못하게 발을 묶어버리는 전과를 거둔다.[13]

여진 정벌 후로는 정치적 생명은 끝장났지만 세종이 목숨은 붙여줬기 때문에 복귀 전에 엄포를 놓았던 것과 달리 세종에게 정치적 압박을 넣지는 않는다. 극 중 조말생의 인간적인 면모를 시청자의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부터다. 비록 유배를 갈 때부터도 "다시 돌아오면 젊은 관원들과 세종을 철저히 이겨주겠다"라고 경고한 데다가 복직되어서도 세종의 정책들을 망상이라 일컫긴 하지만 그 망상이라고 여겨졌던 일들이 점점 빛나는 현실이 되어가는 시간을 보내면서 생각이 조금은 바뀐 듯하다. 무려 제3자인 명나라왕진이 보기에도 "조선 군왕에 대한 그대의 충성심을 믿는다."라고 할 정도였다.

세종이 문자 창제를 천명한 뒤, 이를 듣지는 못했지만, 세종의 정적으로 성장한 최만리를 위시한 집현전 일부 학사들이, 세자빈 봉씨의 추문이 터진 시국에서도 세종이 세자의 대리 청정을 강행하자, 이는 세종 본인이 문자 창제에 몰두하기 위한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하고, 문자 창제가 빈청의 중신들에게도 공론화될 위기에 처했을 때, 대제학이었던 윤회가 이를 제대로 해명을 못하자, 조말생이 대신 나서서 무마시켜줬다. 대리 청정을 하고 강녕전으로 물러난 이유는 매우 위중한 세종의 환우 때문이라고 어의까지 동원하며 대신들의 의혹을 덮어버린다.
윤회 : 국본의 청이 아무리 간절했다해도, 금상의 환우를 조작해 정국을 돌파할 패로 쓰다니요?!
조말생 : 환우는 사실이야. 물론 그 증세를 좀 과장하긴 했지만.
윤회 : 허나...
조말생 : 금상 걱정이나 하기 전에, 자네 몸이나 돌보게. 이 부실한 인사야. 얼마나 나빠?
윤회 : 어찌 아셨습니까?
조말생 : 어의가 자네를 진단한 의원한테서 주워들은 모양이더구만. (윤회가 급히 나가려 한다.) 그 입은, 내가 잘 단속해 두었어.
윤회 : 국본을 왜 도왔습니까? 대감께 국본이 대체 어디까지 이야기 한겁니까?
조말생 : 문자 창제 말인가? 국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허나, 허조의 말을 듣곤, 음... 이거구나. 짐작은 했지.
윤회 : 알면서도 도왔단 말입니까?
조말생 : 죽을 날 받아 놓고도, 금상의 망상에 놀아나는 자네가 딱해서, 적선한 셈 쳤어.
윤회 : 끝까지 기밀을 지켜주시겠단 겁니까?
조말생 : 난 자네나 또한 금상과 달리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야. 문자 창제 같은 건 의욕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 어차피 되지도 않을 일 굳이 빈청에까지 끌어들여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겠지.
윤회 : 대감, 만일에, 만일에 말이지요. 대감께서 망상이라 믿는 그 일이 현실이 되는 일이 오면, 대감께서 하실 일이 지금보단 더 많아지실 겁니다.
조말생 : 몸이나 잘 챙겨, 이 멍충아!

윤회에게서 유언 비슷한 말을 듣자 순간 울컥하면서 호되게 꾸짖기도 하며 그가 사망한 후 상갓집에 갔을 때는 매우 슬퍼하며 눈물까지 보인다.[14]

세월이 흘러 영중추원사(이후 영중추부사)로 일하게 되었을 때는 세종을 마구 몰아붙이던 시절과 달리 매우 유순한 노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한 때는 정적으로서 서로 부딪혔던 황희와도 명나라와 충돌하는 정국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훈민정음 반포 때에는 이를 반대하기 위해 삼사 언관들을 동원하려는 최만리, 정창손 등보다 선수를 쳐서 사간원 관원들이 문자 창제를 지지하게 움직여놓고는 허탕친 정창손에게 "사간원이 이렇게 어심을 빨리 파악할 줄은 몰랐다. 이런 걸 두고 태평성대라 하는 것 아니겠나"라고 능글맞게 던진다. 그리고는 세종을 암살하려는 명나라 정보 조직 동창의 무리를 포획하는 지대한 공을 세운다.[15] 그리고 이를 주도했던 명의 환관 왕진에게 "이 사실이 명에 있는 당신의 정적들에게 알려지면 매우 곤란하게 될 것"이라고 압박하는 등 왕년의 정객 포스도 뽐낸다. 이후 끝까지 살아남아 엔딩 부분인 훈민정음 반포 조례 때는 당당히 황희의 바로 다음 자리를 차지한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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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1년 조말생의 직위는 우부대언이다.[2] 중군장이었던 최윤덕을 위시로 한 군부 인사들이 대마도 정벌 준비 기간 동안 왜관의 간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라는 태종의 명에 항명한 것도 원인이다.[3] 다만 최윤덕의 입을 통해 조말생이 병조판서로서의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다고 평가된다. 인물의 특성에 따른 공정하고 적절한 직무 배치와 업무 지시, 가난한 수하들을 사비를 털어 챙겨주는 등 인심까지 얻어 군부의 충성심을 이끌어내었다고. 무술이나 전술 지휘에 능하지는 않지만 인사 기용과 업무 지시 능력이 탁월하고 전략적 식견이 뛰어난데다 적국 관련 정보 수집력과 정세 파악력은 가히 독보적이며 침투 공작에도 능해서 여진 정벌기에는 오밤중에 자기 집에서 자고 있던 여진족 오도리부 족장 동맹가(먼터무) 부자를 순식간에 납치해와서 오도리부의 공세를 차단해버리기까지 한다.[4] 심지어 조말생에게 무릎 꿇기 직전까지도, 박은은 집현전 학사들을 동원해 인사고적을 뒤져서 조말생을 털어잡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인사고적을 털어사 나오는 게 없자 자신을 던진 것.[5] 심지어 태종 앞에서 대놓고 우린 택군을 한 경험이 있는 자들이니 현 군왕이 숭유억불 국시를 받들지 않는다면 다른 군왕을 찾겠다고 하면서도 차라리 태종이 병권과 주요 권력을 다시 가지라는 등 정치적 수사를 현란하게 구사한다. 태종이 그 말을 듣고는 이미 병 때문에 정사에 손 놓았는데도 다시 정사에 관여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6] 이는 태종이 병조에 박아둔 최측근 강상인이 심온 사건으로 태종 본인에게 처형당하며 태종과 군부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탓도 있다.[7] <대왕 세종>이 역사 왜곡으로 크게 비판받는 점들 중 하나가 바로 태종의 병권 회수 장면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소헌왕후의 폐출에 조말생이 동참하자 태종이 "그래? 그 친구 많이 컸구먼?"이라고 한마디 남기는게 전부인데 딱 그 정도가 적당한 묘사다.[8] 질문을 담당했던 정인지는 고민 끝에 결국 한 번만 눈 감으면 되겠지라는 생각에 질문지에 박포의 처와 관련된 사안은 누락시켰지만, 양심과 정치적 신념에 의해 질문 종료 직전에 다시 이를 밝히는 쪽으로 선회한다.[9] 박포의 처는 남편인 박포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를 황희가 구해주었고, 그로 인해 황희에게 의지하면서 연심을 품어 황희가 그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알게 된 박포가 황희가 간통을 했다고 상소를 올린 것이며, 상왕인 태종이 박포의 처와 직접 만나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신변을 보호해주기로 했다는 것.[10] 이 때문에 후일 최만리가 조말생을 능가하는 세종의 정적으로 각성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11] 이때 최윤덕과 대화를 나누는 시점인 세종이 조말생이라면 자신의 복직령을 받아들일 것이며 그는 비록 횡령을 하면서 재산을 탐내어도 조선에 대한 충심은 진심이기에 여진족을 확실히 손봐줄 것을 확신하며 복직시켰는데, 이를 들은 최윤덕은 묵묵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만큼 자신의 스승인 이수와 담이를 포함한 북부의 백성들이 살해당하는 사실에 자신의 정적이었던 조말생을 복직시킬 정도로 얼마나 열받았는지를 보여주면서도 조말생의 능력을 인정하고 굳게 믿고 있음을 동시에 보여준다.[12] 과거 조말생을 축출해내기 위해 단독으로 시위까지 했던 김종서가 조말생을 발견하자마자 스스로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이에 조말생이 "나를 잡아죽이라고 하던 놈이 내 밑에서 배운다?"라고 묻자 김종서도 는 더럽게 미워도 능력만큼은 그 역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인지 "북삼도를 지킬 길을 찾을 수만 있다면 악귀에게 배우는 것을 마다하겠습니까?"라고 답하자 이를 들은 조말생은 유쾌하게 웃는다.[13] 이때 자신은 세종과는 달리 온정이 없는 인물임을 밝히며 동맹가 부자가 자신의 친우이자 세종의 스승인 이수를 죽인 점을 들먹이며 조용히 노기가 담긴 말을 해서 차가운 분노를 드러낸다. 특히 온정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동맹가의 어깨를 발로 짓이겨 밟으면서 칼처럼 서늘하게 무표정으로 강조하는 모습이 압권인데, 조말생도 비록 세종의 정적이었던 위치 상 세종의 최측근인 이수하고도 갈등이 있긴 했어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며 친우로 여긴만큼 이수가 여진족에게 살해당했단 소식을 듣고 여러모로 빡쳤던 모양.[14] 극 중에서 냉혹하기 그지없었던 조말생의 인간적인 부분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 물론 최윤덕에게 "매우 공정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까지 두루 갖춘 최고의 병판"이라는 평을 들은 바 있으나 그 때는 어디까지나 세종의 정적으로서 성가신 면이 많이 비추었기에 최윤덕이 말한 조말생의 훌륭한 면모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볼래야 볼 수가 없었다.[15] 물론 이는 견원지간이던 최만리가 동창과 모의하여 세종을 암살하려 했으나 죄책감을 느껴 스스로 조말생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를 미리 자수한 것이 컸다.[16] 사실 이 시점에 이르러 태종 때부터 등장한 노신들 중 유이하게 살아남은 이가 저 두 사람이다. 허조, 맹사성 등은 한글 창제 이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심지어 세종의 측근인 이수와 윤회, 신장도 일찍 떠났다.), 마지막 회 초반에 나오던 최윤덕도 훈민정음 반포 당시(1446년) 이전에 세상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