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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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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연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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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인
파일:조중연.jpg
<colbgcolor=#eeeeee,#222><colcolor=#000000,#e5e5e5> 이름 조중연
趙重衍 | Cho Chung-Yun
출생 1946년 1월 18일 ([age(1946-01-18)]세)
충청북도 보은군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중동중학교 (졸업)
중동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 65 / 학사)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수비수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eeeeee,#222><colcolor=#000000,#e5e5e5> 선수 산업은행 축구단 (1969~1974)
해병대 축구단 (1970~1972 / 군 복무)
지도자 고려대학교 축구부 (1973~1974 / 코치)
현대 호랑이 (1983~1986 / 코치)
현대 호랑이 (1986 / 감독 대행)
현대 호랑이 (1987)
중동고등학교 축구부 (1989~1994)
행정가 대한축구협회 (1998~2003 / 기술위원)
대한축구협회 (2004~2008 / 부회장)
대한축구협회 (2009~2013 / 회장)
동아시아 축구 연맹 (2011~2013 / 회장)

1. 개요2. 선수3. 지도자4. 해설가5. 행정가6. 대한축구협회 회장
6.1. 공적6.2. 실책
7. 평가8. 논란
8.1. 배임 연루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대한축구협회 회장(제51대)을 맡았다.

2. 선수

선수로는 그렇게 부각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중동중 시절 처음 축구에 입문한 그는 당대 명문인 고려대학교 축구부에 스카우트되었고 청소년 대표에 선발된 적은 있으나 그 정도가 내세울만한 경력이다. 당시 산업은행 축구단도 대통령배를 우승하는 등 나름대로 잘 나가는 팀이긴 했지만 선수 시절에는 상당히 모범적인 선수였다고 한다. 고려대 재학시절에도 훈련은 똑같이 받았으나 수업은 빠지지 않았으며, 1969년 금융단 축구연맹전에서는 갓 입단한 신인선수 신분으로 선수대표 선서를 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이 시절은 지금과 달리 축구팀 자체가 많지 않았다. 조중연이 산업은행 축구단에 입단하던 시기, 당시 대한민국 축구계는 전국실업축구연맹전에 7개 구단, 금융단 축구연맹전에 11개 구단이 있었다. 이후 1970년 양대 리그 개념의 두 리그는 전국실업축구연맹전으로 통합되어 18개 구단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현재의 K리그와 다르게 한 구단의 선수단이 20여명이 전부였던 시절이다. 지금의 축구 선수 규모에 비하면 절대적인 성인 선수 자체가 적었다는 이야기다. 국가대표에 뽑히지 않았다고 해도, 실업팀에서 주전으로 뛰지만 국가대표로 뽑히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국가대표 바로 아래급의 선수라는 것이다.

3. 지도자

산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접은 조중연은 당시 대부분의 금융단 소속 선수들이 은퇴 후 은행 직원으로 취직하던 관행과는 달리 은퇴하고 바로 고려대학교 코치를 맡는다. 2년만 하고 결국 산업은행에 입사하긴 하지만. 산업은행 울산지점에 근무하다 당시 학성고 이사장 이후락의 지시로 학성고 축구부의 창단에 힘쓰게 되고 이때의 경력을 인정받아 1983년 프로축구 슈퍼리그에 참가할 현대 프로축구팀 창단 실무를 맡게 된다. 이 때 김호곤 현 울산 감독과 함께 코치를 맡게 되고 문정식 당시 현대자동차보험 실업팀 감독을 초대 감독으로 내정한다. 그리고 3년 후 문정식 감독이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대신 현대의 사령탑을 맡아 첫해에 현재의 리그컵에 해당하는 프로선수권 우승컵을 얻는다.

그러나 그 해 김종부의 스카웃을 두고 복잡한 사정, 그러니까 간략히 서술하자면 조중연이 고대 동문이라는 인맥을 내세워 김종부를 영입하기로 합의했으나 김종부는 현대와 대우 양팀과 이중계약을 맺은 것으로 확인되었고, 대한축구협회의 중재결과 김종부를 대우로 보내기로 결정되자 현대의 왕회장께서 빡돌아서 이럴 바엔 팀 해체하라고 지시한 것에 따라 감독직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4. 해설가

지도자 은퇴 후 KBS에서 축구해설을 맡았는데 올드 축구팬들은 선수, 지도자, 해설가, 행정가로서의 조중연 중 해설가로서의 조중연을 가장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해설을 잘했던 모양. 여담으로 조중연이 축구협회로 들어가면서 KBS에서 후임으로 영입한 해설위원이 이용수 교수이다. 추후 조중연이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 영입하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축구계 야권에 서서 조중연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는 복잡한 인연.

당연히 지금 보면 굉장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과거 KBS가 스포츠 중계의 스탠다드를 이끌었던 시기의 방송 관계자들은 이런 축구 해설을 선호했다. 지금은 지상파 3사나 케이블 채널들 중계가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지고 시청자들에게 어필하는 추세다.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골라보는 선택의 폭도 그만큼 넓어지고, 방송사들 입장에서도 각자 중계 방송의 퀄리티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그 당시에는 해외 축구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했고 축구 이론이 전혀 잡히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현재처럼 신변잡기 만담으로 시간을 때우기도 어려웠고, 전략전술에 대해서 얘기하기도 어려운 시기였다. 무엇보다 시청자들의 축구경기를 보는 안목이 지금처럼 높은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문용어를 사용하면 무슨 소린지 모르고, 해외 선수를 소개하려해도 어마어마한 슈퍼스타가 아니면 몽땅 듣보잡 취급하던 시절이라. 게다가 당시는 국대경기나 K리그 포스트시즌 정도는 지상파에서 중계해주던 시절이다. 지금처럼 '스포츠는 케이블에서' 시대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경직된 사회분위기였다. 그래서 재밌고 유쾌하게 해설을 하는건 그당시 현실에서는 어려웠고 주 레퍼토리가 '고국에 계신 국민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류의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해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크게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경기의 맥을 짚거나 적당히 시청자의 수준에 맞춰 해설을 하면서 어느정도 지적인 이미지의 해설을 했다.

5. 행정가

1998년 김정남 현 프로축구연맹 총재의 후임으로 대한축구협회 전무 겸 기술위원장직을 맡으면서 행정가로서 본격적으로 입문한다. 아마 현대 프로축구단 창단을 주도한 경력을 현대 구단주였던 정몽준 당시 회장이 좋게 봐 준 듯. 이미 1993년 정몽준이 회장으로 취임한 직후 축구협회 이사로 선임되지만 이때는 실무직이라기보다 명예직의 성격이 강했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성적부진을 물어 대회 도중 차범근 감독을 경질하고 자신도 책임을 지고 기술위원장 직에서는 사임한다. 다만 전무 직책은 계속 수행한다. 이것 때문에 많은 팬들은 차범근 감독을 희생양으로 삼고 자기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대표팀 성적에 따라 책임이 좌우되는 기술위원장 직에 대해서는 분명히 책임을 지고 물러나긴 했다. 전무 직은 직접적으로 성적에 책임을 지는 자리는 아니긴 하다.

그는 전무로 있으면서 이전 축구협회 집행부의 전무들이 시도하지 못 했던 정책들을 입안하고 실행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항목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단적인 지표만 제시하자면 조중연 전무 임명당시 축구협회 1년 예산은 30억원이었는데, 조중연 회장 임기가 종료된 현재 예산은 1천억에 달한다.

전무로서 조중연의 업무 수행은 선수출신 행정가들에 대한 편견(공만 차느라 업무수행능력은 형편없다)을 극복하는 데 어느정도 일조했으며 이후 김호곤, 김진국, 김주성 등 선수출신 행정가들이 축구협회의 요직을 수행하는 계기가 된다. 조중연 본인도 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승진하고, 정몽준 회장에 의해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한국축구의 수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와 반대로 축구협회의 안팎으로 인적 구성의 과정에서 소위 '축피아'라 일컬어지는 파벌을 공고히 하여 이래저래 부침이 심했던 조광래호, 최강희호, 박종우 세레머니 사과편지 논란을 거치기도 했다

6. 대한축구협회 회장

2009년 회장 선거에서 야권을 대표하여 출마한 허승표 후보와의 경선에서 승리하여 4년 임기의 51대 회장에 취임한다.

회장 임기 동안 일단 한국축구의 성적 면에서는 화려했다. 월드컵 16강, FIFA U-20 월드컵FIFA U-17 월드컵의 8강 진출, 여자 U-20 월드컵 3위와 U-17 월드컵 우승, 올림픽 동메달 등 각급 대표팀은 나가는 족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이는 자국 축구전반에 대한 선순환으로 이어져, 임기 동안 K리그 팀들은 매 시즌마다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하였고 그 중 3번 우승컵을 안았다. 성적뿐만 아니라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U리그도 기틀을 착실하게 다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행정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저지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조광래 감독 경질 과정이라거나 코칭스태프 임금 미지급 건, 비리직원 퇴직금 지급, 박종우 세레머니 사건 때의 대응 등이다. 아래에서 자세히 서술.

이런저런 일들로 여론이 좋지 않자 조 회장은 회장직 재선 도전에 나서지 않겠다고 불출마 선언을 한다. 나이도 있고 회장 임기가 끝나면 자연스레 축구계 원로로 물러날 듯.

2013년 1월 28일 협회 회장 선거에서 정몽규 프로축구연맹 총재가 당선되자 현장에서 곧바로 회장직 이임식을 갖고 협회 일선에서 물러났다.

6.1. 공적

6.2. 실책

7. 평가

전반적으로 볼 때 조중연의 실무추진능력은 선수, 지도자, 해설가, 행정가로 모두 활동해 본 풍부한 경험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며, 이는 조중연 이후 선수출신 행정가가 협회 내에서 중용되는 흐름에 기여한다. 언론매체에선 조중연이 선수출신 최초의 축협 회장이라고 보도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으로 이미 이종환 회장이 선수출신으로 회장에 역임한 바가 있다. 조중연은 두번째 선수출신 회장.

위 항목을 찬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조중연의 정책은 당장 눈에 보이지도 않고 결과가 나오려면 오래 걸리지만, 가장 중요한 장기적인 플랜이다. 일반 대중들에게 축협의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아 틈만 나면 "일본은 유망주를 저렇게 키우는데 한국은 지원을 안하고 어쩌고..."하는 염려에 대한 나름대로의 방안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실책을 보면 대표팀 감독 선임 때의 잡음, 여타 추문에 대한 졸속대응으로 비난을 자초했다. 즉, 수수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을 잘했으나, 당장당장의 임기응변이 필요할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굳이 듣지도 않아도 됐을 비난들을 알아서 자초한 것.

대부분의 국내 스포츠 협회에 등에서 주먹구구식의 운영을 할때 기초공사 등의 부분에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은 분명 공적이다.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알 수 있는 부분. 그러나 당장의 신속한 결단이 필요한 일에서는 여러가지로 아쉬운 부분을 많이 남겨, 축구협회라는 거대 조직의 수장의 면모로는 아쉬움을 많이 보인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행정가로서는 뛰어난 실무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나, 리더로서는 정치력이나 처신에 물음표가 나오던 행보를 보였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여,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한 인물.

8. 논란

8.1. 배임 연루

2017년 9월 14일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가 황보관, 이회택, 김주성 등과 같이 업무상 배임혐의로 입건됐다. 이듬해에 황보관, 이회택, 김주성 등에 대해서는 혐의없음으로 사건종결되었으나, 조중연 회장과 협회 직원 1인은 약식 기소되어 2019년 1심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조중연을 비롯한 축구협회 임원들이 공금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업무추진비 명목으로 지급된 법인카드로 220여회 1억1000만원 상당을 업무와 무관하게 사용하였다고 하며, 조중연의 경우 2011년 7월 콜롬비아에서 열린 U-20 월드컵 대회, 2011년 11월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아시아연맹 총회와 올림픽 도하 경기, 2012년 헝가리에서 개최된 국제축구연맹 총회와 국가대표 평가전에 부인과 동행했다고 하며, 부인의 항공료 등 약 3000만원을 협회 공금으로 부정 처리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지인들과 골프를 치면서 골프장 비용 1400만원을 법인카드로 결제하기도 했다.#


[1] 부산, 인천(아시안게임), 대구(유니버시아드)[2] 제주도에서 개최되는 백록기 전국고교축구대회가 사상최초 전경기 천연잔디 개최로 주목을 받은 것이 불과 2003년이다.[3] 단기 토너먼트의 경우 흔히 생각하는 선수 혹사 외에도, 최상위 성적을 거둔 소수의 팀 외에는 치르는 경기가 적어 선수들의 경기 감각이나 경험 등이 떨어지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그에 비해 리그는 모든 팀이 일정 수의 경기를 치르기 때문에 각 팀이 경기 감각을 유지하기 쉽고 경기 경험도 늘어나면서 선수들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지는 장점이 있다.[4] 이 제도가 아래 서술한 유소년 육성책과 지도자 육성책과 맞물리면서, 진학을 미끼로 학부모에게 갑질하며 금품수수를 일삼던 구태의연한 지도자들이 감소하게 되는 효과도 노릴 수 있다.[5] 물론 그런 감독들이 돈만 많이 준다고 오는 건 아니다.[6] 돈들여가면서 유학보내놨더니 조작질이나 한 선수도 있다만(...).[7] 라이센스 급수에 따라 맡을 수 있는 팀이 제한된다. D급은 8세 이하, C급은 초등학교와 U-12, B급은 중고교와 U-17, 각급 대표팀을 맡으려면 A급 이상.[8] 당시 조중연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1954년에 대량실점을 한 이후로 1986년부터 아르헨티나,이탈리아,독일등 세계 강호들과 만났지만 지금처럼 처참한 결과를 내지는 않았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는 발언을 하였다.[9] 선수마다 4강 진출에 기여한 정도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오랫동안 한 팀으로서 함께 훈련해왔고 후보 선수는 주연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10] 히딩크, 코엘류, 본프레레, 아드보카트, 베어벡까지 모두 같은 에이전시가 연결점이었다.[11] 한 명은 K리그 시즌 도중에, 한 명은 시즌을 한창 준비해야 할 시기에 빼가듯이 감독 선임.[12] 조광래가 국대 감독이 되기 훨씬 전인 2000년 초반 축구 월간지 베스트 일레븐과 인터뷰에서 조광래는 조중연을 신랄하게 깐 바 있다.[13] 둘은 현대에서 감독과 선수 사이였던 인연이 있다.[14] 월드컵 최종 예선까지만 대표팀을 지휘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15] 직접 읽어보고 각자 판단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