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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1:30:33

줄리아나 도쿄

ジュリアナ東京 / JULIANA'S T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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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와의 연관성3. 특징4. 컴필레이션 음반5. 영향
5.1. 대한민국5.2. 대중매체에서
5.2.1. 만화 & 애니메이션5.2.2. 게임5.2.3. 음악5.2.4. 기타

1. 개요

도쿄도 미나토구 시바우라에 1991년~1994년까지 있었던 디스코 클럽. 1,200제곱미터, 최대 2천 명 수용. 초창기 하드코어 테크노[1], 하우스 등 당시 유행하던[2] 클럽 일렉트로 댄스 음악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클럽이다. 일본1990년대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로서, 90년대 이후의 일본 음악계에 끼친 영향력이 막대했다. 줄리아나 도쿄 이후 일본 대형 디스코 클럽의 계보는 2000년대 벨파레로 이어졌다.

줄리아나 도쿄에서 가장 가까운 철도역은 타마치역이었다. 줄리아나 도쿄가 입점해있던 건물은 오늘날 TBWA 하쿠호도의 사무실로 바뀌었으나, 당시의 입구만큼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와의 연관성

줄리아나 도쿄는 1991년에 문을 열어 1994년 문을 닫았다. 1990년대의 클럽이므로, 시기적으로만 보면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훗날 일본의 각종 언론이나 대중매체에서 줄리아나 도쿄를 버블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내세우며, 이 때문에 일본인들조차 줄리아나 도쿄가 버블 시대의 클럽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2021년 11월, 줄리아나 도쿄의 부활 이벤트를 다룬 테레비 아사히의 뉴스 보도. 여기서도 줄리아나 도쿄를 버블 시대의 상징으로서 표현하고 있다.

이런 혼란이 있는 이유는 줄리아나 도쿄가 영업했던 시기가 오늘날 경제학/역사학적으로 정의된 거품경제 시대는 아니지만 거품경제 시대의 연장선이었기 때문이다. 1991년에 거품경제가 막을 내렸다는 것은 후대에 주가 등의 수치를 바탕으로 임의로 정의내린 것일 뿐이고, 일본 거품경제는 1991년이라는 특정 시점에 일제히 무너진 것이 아니라 넓게 잡으면 1994~95년까지 조금씩 꺼져간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당시의 일본인들은 거품이 꺼졌다는 인식은 커녕 경제 호황이 거품이었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즉 줄리아나 도쿄에 다녔거나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1980년대 버블 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 주제는 일본인들 본인들조차, 특히 당시를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헷갈려하는 내용이므로, 인터넷에 여러 질답이 올라와 있다. 사례 1 사례 2

정작 진짜 버블의 절정이었던 1980년대 중후반 유명 클럽으로 꼽혔던 "마하라자"[3][4], "킹&퀸" 등은 대중매체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비교적 대중적인 콘셉트로 운영되었던 줄리아나 도쿄와는 달리 진짜 1980년대의 디스코 클럽들은 복장 규정이 까다롭다거나 하는 등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후대에 많은 사람들에게서 회자되지도 않는 것이다.

3. 특징

춤이나 몸매에 자신이 있는 여성들이 춤을 출 수 있는 특별무대를 일반무대보다 높이 만들어서, 남자들이 춤추는 여성들을 잘 쳐다 볼 수 있도록 만든 실내 인테리어가 화제가 되었다. 물론 댄서들의 노출도도 꽤 높았다. 이 무대를 '오타치다이(お立ち台)'라고 한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이 오타치다이 때문에 불순한 목적으로 찾아오는 고객이 늘어났던 점을 줄리아나 도쿄 폐점의 원인으로도 꼽는다. 이 '오타치다이'를 구경하려고 지방에서 관광객이 몰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경찰의 단속 때문에 1993년에 오타치다이를 철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단상 위에 오른 여성들의 치마 속을 촬영해대는 남자들은 단속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단속의 대상은 여성의 옷차림이었다. 외부에서의 검열에 대한 의식은 작업복을 벗고 과감한 무대 의상을 입음으로써 전혀 다른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었던 여성들의 유일한 방출구가 사라지게 만들었으며, 다시 현실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클럽을 찾는 여성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여성들이 반대로 남성들이 옷을 벗는 누드바로 가버렸기 때문에 더더욱 줄리아나 도쿄의 몰락이 가속화되었다고 한다.

2008년에는 1일 한정으로 줄리아나 도쿄 부활 이벤트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였다고 한다.

한편 창업자 오리구치 마사히로는 인재파견업체 '콤슨'을 운영하다가, 2007년 고객에게 파견간병서비스[5] 비용을 부당청구를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결국 몰락하게 된다.

4. 컴필레이션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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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연예기획사인 현재의 에이벡스와는 달리, 클럽 뮤직 전문 레이블이었던 당시의 에이벡스에서는 줄리아나 도쿄 이름을 단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하드코어 테크노, 하이퍼 테크노, 이탈로 하우스를 수록한 앨범. 줄리아나 도쿄의 전성기에는 오리콘 주간 차트 10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잘 팔려서, 중고품이 물건너 한국의 북오프 신촌점에서도 이따금 발견될 정도였다.

여기에는 투 언리미티드, The Prodigy 등 실제 영미권, 유럽 차트에서 인기를 끈 곡들과 에이벡스에서 유럽 작곡가들에게 발주를 넣어 제작된 곡들이 섞여있으며, 호시노 야스히코, 키무라 타카시 등의 일본인 작곡가들이 쓴 곡들도 수록되었다. 후대의 일본 대중매체에서 줄리아나 도쿄의 상징으로 틀어제끼는 <Can't Undo This!!>가 바로 호시노 야스히코의 작품이다. 훗날 호시노 야스히코는 하마사키 아유미MAX에게 곡을 제공했고 키무라 타카시(t.kiruma)는 Favorite Blue, m.o.v.e의 프로듀서로서 각각 J-POP계에서 활약했다. 한편 코무로 테츠야의 곡도 몇 곡 실려있으나, 코무로의 전공 장르가 아니다보니 이 분야에서의 활약은 미미했던 편이다.

참고로 크레용신짱의 엔딩곡 마론공작(マロン公爵)의 «파티조인어스 대작전(パリジョナ大作戦)»와 유우코(ゆうこ)의 «신짱선창(しんちゃん音頭)은 해당 클럽에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CD 음반은 케이스 겉에 띠지를 두르는데, 줄리아나 도쿄 CD의 띠지는 특이하게도 줄리아나 도쿄의 무료 입장권 기능이 있었다. 띠지를 입장 목적으로 써버린 경우가 많아, 오늘날 줄리아나 도쿄 컴필레이션 시리즈의 중고 음반을 수집할 때는 이 띠지의 유무를 확인할 필요성이 크다.

5. 영향

5.1. 대한민국

한국에서는 원래의 줄리아나 도쿄가 문을 닫은지 한참 지난 2000년대까지도 상호를 모방한 나이트클럽들이 생겼다. 이정현이 리즈 시절에 선보인 부채춤도 줄리아나 도쿄의 영향력이 짙게 깔려 있었다는 의견이 있다. 다만, 일본의 줄리아나 도쿄보다는 '테크노 여전사' 이미지를 더 밀었고, 2000대 초반에 유행하던 밀레니엄하고 현대적인 사이버틱한 이미지를 벤치마킹했다는 것이 정론이다.

5.2.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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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전생 시리즈에 등장하는 시귀 보디코니언 문제의 부채[6]

일본의 서브컬쳐에서 보디콘 슈트를 입고 깃털 같은것이 달린 부채로 춤추는 모습은 줄리아나 도쿄의 패러디이다.

5.2.1. 만화 & 애니메이션

5.2.2. 게임

5.2.3. 음악

5.2.4. 기타



[1] 물론 지금의 BPM 170으로 이상으로 밀고나가는 J-CORE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흔히 레이브라고도 통용되던 브레이크비트 하드코어 혹은 이를 포함하는 당시 레이브 뮤직들, 혹은 그것이 일본화된 명칭 혹은 현지화된 개념으로(ex. 데스 테크노, 테크파라 등) 통용된 것들.[2] 유로비트는 안 틀었다. 줄리아나가 영업하던 91년~94년은 일본에서 유로비트의 인기가 하락했던 시기였다. 당시 이탈로 디스코나 유로비트로 유명했던 디스코/클럽은 킹&퀸, 마하라자 나이트 등이 있었다.[3] 1982년 오사카에서 개업한 클럽이며, 도쿄에서는 아자부주반에 지점이 있었다.[4] 일본 총리 기시다 후미오가 부인인 기시다 유코 여사와 첫 데이트를 한 장소로도 유명[5] 일본에서는 간병을 "개호"라고 부른다.[6] 사진 속의 인물은 1990년대 디스코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아라키 쿠미코"다. 지금은 여성들의 결혼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당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인 용과 같이 제로에서 마하라자 호텔의 디스코 퀸 캐릭터로 등장하는 '이소베 선생'의 실제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관련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