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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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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준3. 능력과 재위 시국의 관계4. 여담5. 묘호에 성(聖)이 들어가는 왕6. 성인으로 시성받은 왕7. 예시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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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군()이란 어질고 이 뛰어난 군주를 일컫는 말이다. 반댓말은 폭군이다.

거룩할 성(聖)이 들어가지만 종교적인 거룩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동아시아의 성(聖)은 서양Saint, 즉 종교적인 거룩함이 아니라 가장 드높은, 인간으로서 완전한 경지를 일컫는다. 다만 서양에서는 실제로 성인으로 추성된 군주들이 있다.

군주라는 직책특정 무리들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집단에서 이 국가를 이끌어 나가며 구성원인 국민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고 국가의 보호하에 편안하게 살도록 노력하는 직업이며, 따라서 성군이라 함은 전술한 군주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군주를 일컫는다. 요약하자면 군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평가로 명군 중에서도 평가가 높은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칭호다.

2. 기준

당연하지만 기본적으로 인품이 매우 어질면서도 군주로서의 능력 또한 뛰어나야 하고 정치력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조선인종과 같이 성품은 어질지만 정치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1] 인군(仁君)으로 불리며, 더 나아가 정치를 심각하게 못할 경우 어진 성품을 덮어버리고 암군이라 평가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연왕 쾌요와 순을 본받아 성군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아들이 아닌 신하에게 선양을 하지만, 이로 인해 연나라는 쑥대밭이 되어 멸망 직전까지 몰리고 연왕 쾌도 암군으로 평가 받는다. 촉한후주 또한 화낸 기록이 손에 꼽힐 정도로 순하고 선한 성격이었지만 국가 멸망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암군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반대로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고 정치를 잘해도 윤리적인 문제가 있으면 역시나 성군이라는 소리를 듣기 힘들다. 고려조선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고려 광종의 경우에는 비롯 호족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하지만 엄청난 사람들을 죽이는 끔찍한 공포정치를 재위기간 내내 실행하였고 이로인한 부작용과 후폭풍이 그의 사후 몰아닥쳐서 복수법이라는 폐단까지 나타났으며, 고려 숙종의 경우에도 군주로서의 능력은 좋았으나 보위에 오른 조카를 반 강제로 내쫓고 권좌를 차지하였으며 또한 그 보위를 차지하기 위해 외척 인천 이씨 가문의 이자의와 숙종 본인에 반대하던 수 많은 정적들을 죽여서 역시나 성군이라는 평가를 듣지 못하는 편이다.

조선의 경우를 보아도 역시나 엄청난 무훈과 인망을 고루 갖춰 조선을 세웠지만 왕씨를 멸족시키려고 한 태조 이성계[2][3][4], 그의 아들이자 조선의 기틀을 세웠으며 자신이 직접 후계자로 선택한 아들한국사 최고의 성군으로 만들었다는 평을 들으면서도 패륜적인 행적 때문에 역시나 비판을 받는 태종 이방원의 사례가 존재한다. 중국의 경우에도 당나라 시절 현무문의 변을 통하여 형제들을 모두 숙청하고 당고조 이연으로부터 왕위를 선위받아 황제가 된, 당나라 태종의 사례가 있다. 다만 이런 경우 대개 명군이나 능군으로 평가받기는 한다. 일단 많은 창업군주가 이 반열에 속하지만 석경당 같은 경우는 예외로 한다. 하여튼 이런 이유로 창업군주 또는 정복군주는 명군으로는 분류되도 성군으로는 분류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3. 능력과 재위 시국의 관계

마지막으로 업적 면에서는 당시의 시국이 큰 영향을 끼친다. 아무리 왕이 성품과 능력이 고루 좋아도 이미 나라가 국가 막장 테크를 타버린 시국에 등극할 경우 나라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하지만 도저히 본인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던 비운의 군주들도 적지 않게 있다. 헌제, 조모, 콘스탄티누스 11세, 숭정제 등. 설상가상으로 아예 그 왕의 대에서 나라가 끝장난다면 당연히 역사는 승자에 의해 역사가 쓰이므로 평가절하 당하기 일쑤라 더더욱 성군으로 평가받기 힘들다. 애초에 난세에는 상당수의 군주가 암군 또는 폭군이고, 그 상황에서 여러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도덕적인 선택도 강요받기 마련이라 도덕적인 것으로 이름을 날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성군인 경우가 많지 않다.

개인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영웅사관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성군이라고 하는 개념을 한 인간이 가진 개성이라기보단 한 시대의 총체적인 역량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왕조에서 좋은 군주는 연달아서 나오는 경우가 많고, 나쁜 군주도 연달아서 나오기 십상이다. 정말 확률적인 문제라면 시기에 상관 없이 좋은 군주가 나올 확률이나 나쁜 군주가 나올 확률은 비슷할 것이다.[5] 멍청한 왕이라고 해도 시대가 좋으면 묻어가는 경우가 있고, 총명한 군주도 시대를 잘못 태어나면 성군이 되지 못 하는 게 현실이다. 예를 들어 (왕은 아니긴 하나) 흥선대원군은 역사의 변혁이 별로 없던 시대에 지도자가 되었다면 그 개혁 의지나 역량은 비교적 높게 평가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화를 이루어야 했던 19세기였기 때문에 수구적인 지도자로 평이 매우 갈린다.

고려 덕종조선 문종처럼 시대, 인품, 능력에 이르기까지 모두 완벽한 인물이었지만 재위 기간이 짧은 그야말로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6]

4. 여담

성군으로 끝까지 이름을 남기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 왕들의 경우 왕자 시절이나 치세 초중반에는 좋은 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였으나 말년에 가서 타락해 암군이나 폭군으로 강등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페르시아크세르크세스 1세, 양나라양무제, 당나라현종, 청나라건륭제, 백제동성왕의자왕, 태봉궁예, 고려공민왕, 조선연산군광해군등이 있다.

역사의 승자들에 의해서 성군이 조작되기도 한다. 특히 국가를 세운 군주의 경우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경우로 이는 그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안정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북한의 경우 반드시 후계 권력자가 전임 권력자를 미화시키고 성군으로 추앙하는 방식으로 정권 이양을 꾀하고 있다.

5. 묘호에 성(聖)이 들어가는 왕

본 문서에서 서술하는 기준과 별개로, 성스러울 성(聖)을 묘호로 받은 군주도 드물게 있다. 글자의 의미나 부여된 빈도, 받은 사람들의 면면만 봐도 어지간한 글자보다도 상당히 격이 높은 글자이며, 이 인물들은 적어도 당대 해당 왕조에서는 끝판왕급 성군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 군주 중에서는 성스러울 성(聖) 묘호를 당대에 받은 군주는 단 한 명도 없다. 다만, 시호에 성스러울 성(聖) 자가 포함된 군주들은 존재하는데 고구려 초대 동명성왕, 백제 제26대 성왕, 신라 일성왕, 실성왕[7], 성덕왕, 원성왕, 소성왕, 문성왕, 진성여왕 그리고 고려 태조 등의 사례들이 그런 경우들이다. 그외에는 시호가 아닌 별호로서 '성조(聖祖)'라는 호칭으로 불린 군주들은 고려 태조 왕건, 현종 왕순, 문종 왕휘, 조선 태조 이성계[8]와 역시나 별호로서 '성종(聖宗)'이라 불리웠던 태종 이방원[9]의 사례가 있다.

6. 성인으로 시성받은 왕

기독교 성인으로 시성받은 군주를 가리킨다. 성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복자, 가경자, 하느님의 종까지 다 성군으로 치기도 한다.

다만 시성받은 국왕 중에서도 행적에 논란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성받은 니콜라이 2세가 있다.

7.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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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



[1] 인종은 재위기간이 겨우 8개월 정도였기에 능력을 다 보여주기도 전에 일찍 요절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2] 다만 당시 시대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이전 왕조를 탄압하는 것은 새 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한 작업이었다. 당장 고려만 하더라도 통일국가인 신라가 약해지자 삼국시대의 왕족을 지칭하면서 등장한 후삼국시대의 일원이다. 또 다시 전국시대가 될 가능성을 아예 제거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 당시에는 태조 이성계 뿐만 아니라 주요 개국공신들 대부분도 왕씨 몰살을 주장했었다.[3] 다만, 왕씨 몰살은 태조 본인의 자발적인 의지보다는 당시 조선 건국에 참여한 개국공신들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막상 태조 본인은 지속적으로 왕씨 몰살에 반대하였음이 여러 연구들을 통해서 밝혀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상길. (2009).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禪學》(선학), 23).[4] 사실 백성들에 대한 애민심으로만 따지자면 태조 이성계는 오히려 성군에 가깝다. 실제로 그는 조준의 사전개혁을 전폭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거의 백여년간 누적된 구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수탈에 신음하던 민중들을 구원하여 신왕조를 개창했다.[5] 단, 완전히 무작위로 나온다 해도 어느 순간에 같은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6] 다만 문종은 세종의 치세 후반부터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세종을 대신에 업무를 해왔기 때문에 나랏일 자체는 비교적 오랫동안 했다. 정작 왕이 된 후에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이 오래 견디지 못해서 문제였지만.[7] 지증왕 이전의 신라 왕인 경우 왕의 이름을 따서 왕을 불렸는데, 일성왕의 이름인 일성(逸聖)과 실성왕의 이름인 실성(實聖)에 성스러울 성(聖)이 들어가 있다.[8] 세종 시절인 1446년(세종 28년)에 세종용비어천가의 팔준(八駿)에 대한 내용을 보고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을 시켜 태조의 여덟 마리 말들을 그리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팔준도'로 당시 세종은 이 팔준도에 대해 이듬해인 1447년(세종 29년)에 관료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 시험에서 이 팔준도를 제목으로 하는 글을 짓도록 했다. 이 때 신숙주성삼문이 올린 글귀과 찬시들을 보면 당대 집현전 학사들이 '태조(太祖)'를 '성조(聖祖)'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종의 '별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9]용비어천가》 10권, 제109장에 태종 이방원을 성종(聖宗)이라 불러 그의 별호가 '성종(聖宗)'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