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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20:14:44

유능했지만 실패한 지도자

1. 개요2. 유형
2.1. 창작물에서
3. 역사적 사례
3.1. 한국사3.2. 동양사3.3. 서양사
4. 창작물의 사례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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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사에서 나타나는 유형의 임금이나 통치자. 대부분은 그 국가, 왕조의 마지막 지도자다. 그런 한편 무질서가 판을 치는 난세를 기회로 삼아 세력을 떨쳤지만 끝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한 첫번째 지도자인 경우도 많다. 언뜻 생각하기에 한 나라 권력의 정점인 지도자가 뛰어나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 같지만, 지도자도 결국엔 일개 개인이므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2. 유형

자주 보이는 유형은 다음과 같다.

군주가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미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이 역시 '군주', '지도자'라는 존재를 초인으로 생각하는 영웅사관으로, 장기적인 구조와 메커니즘에 주목하는 현대 역사학에서는 별로 통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 외에 어떤 분야에서는 유능했지만 그만큼 다른 쪽에서 컸던 문제점이 패망의 원인이었던 경우도 있다. 여기의 사례는 나라가 막장 테크를 타고 패망이 예정되었지만 도망갈 수 없는 슬픈 운명이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집권할 경우 전대의 실책까지 모두 뒤집어 쓰거나 책임만 있고 권력 행사가 불가능하다면 누가 왕을 맡으려 하겠는가? 서로마 말기 황제들이 대표적이다. 결국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퇴위당하고 나서 그를 끌어내린 오도아케르나 동로마 측이 임명한 율리우스 네포스나 모두 황제위를 맡거나 행사하려 들지 않았다. 모두가 도망치고 떠날 수 없거나 눈앞의 위기를 외면할 수 없던 상대적인 개념인이 독이 든 성배를 들어서 여기 목록에 올라간 것이다.

2.1. 창작물에서

창작물에서는 또 다른 경우가 있다.

3. 역사적 사례

확실하게 어느 정도 유능했던 지도자만 추가할 것. 단순히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만 있었거나 인격만 좋았던 지도자는 제외.

3.1. 한국사

3.2. 동양사

3.3. 서양사

4. 창작물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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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5. 관련 문서


[1] 하지만 정황상 어머니의 죽음은 즉위 전부터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2] 엄연히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문제가 아니라 사림 측의 자폭이었다. 원인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자신을 등용한 사람의 통수를 까는 글을 지은 스승과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제자가 기레기 짓을 한, 현대에 봐도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짓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상세 사항은 무오사화 문서를 참고할 것.[3] 심지어 세종의 인재들은 능력들은 뛰어났지만 하나같이 마이페이스 기질이 강했고 비리도 심심치않게 저지르던, 군주 입장에서도 참으로 다루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결국 이 인재풀은 단종쿠데타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의해 박살났다. 그에 반해 선조 밑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상황이 어려운 와중에도 나라와 왕에게 충성했고, 나름 청렴했던 사람들이었던걸 보면 인재 복은 선조 쪽이 좀 더 좋았다 볼 수 있다.[4] 이는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이 빈약한 영향도 크다. 선조실록만 봐도 임진왜란 이전을 다룬 분량이 나머지 분량의 1/10에 불과하며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도 왜란의 와중에 소실되었다.[5] 이에 대해선 선조의 도를 지나친 질투로 인한 지속적인 견제 + 적자인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인한 유영경을 위시한 소북의 자리 흔들기 행위로 인해 왕위에 올라오기 전에 정신적으로 무너져 버렸고 이것이 즉위 후의 폭주로 이어진 것이라는 의견이 있으며 이는 학계에서도 지지받는 설이다.[6] 대표적으로 미친듯이 궁궐을 지어올린 것이 있다. 얼마나 지어올렸으면 신하들과 백성들의 반감이 컸을 정도이며, 고려의 암군인 충혜왕이나 의종과도 비견될 수준이다. 문제는 이게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폐허가 되고 재정도 좋지 않은 시점에서 그랬다는 것.[7] 다만 이쪽은 이집트처럼 적극적으로 개항했다가 나라가 망한 사례를 들며 어쩔 수 없었다고 보는 자들도 있다. 대원군 본인도 처음부터 거부하지 않았고, 프랑스 가톨릭 신부들을 접촉하려고 했지만 이들이 가톨릭 국교화 및 온갖 무리한 요구를 한 탓에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고 포기했다는 분석도 있다.[8] 당장 애종이 발굴한 금나라의 최후의 명장인 완안진화상이 1229년에 벌어진 대창원 전투에서 금나라 군 400명으로 몽골군 8000명을 물리쳤고, 이어서 1231년에 일어난 도회곡 전투에서도 몽골 제국의 이름난 명장인 수부타이를 격퇴시켰다. 참고로 이 전투는 수부타이의 일생의 유일무이한 패전이었다.[9] 자손으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남겼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이리저리 휘둘리다 훗날 속담까지 나올 정도로 유명한 오사카 전투 당시 주변과 함께 자결한다.[10] 이에 반에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지배층은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였고 외세를 끌어들이면서까지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다가 중국은 반식민지,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는 지금도 한국과 중국에서 고종황제와 서태후를 비난하는 이유 중 하나다.[11] 특히 독발수기능의 난 때 무명의 장수였던 마륭을 파격적으로 기용해서 전쟁을 종결시킨 용인술은 진짜 놀라울 정도다. 특히 문벌 귀족의 권력이 매우 막강해 귀족정의 성격이 매우 짙었던 서진 정권이라 더욱더 놀라운 성과이다.[12] 사마염이 붕어하고 2년 만에 사마휼이 성년이 되었다.[13] 그러나 당시 칠레 정치계의 친 오이긴스파 세력들은 오이긴스가 대콜롬비아 공화국의 시몬 볼리바르처럼 종신 집권하기를 희망했었다.[14] 비잔틴이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으로 들어간 것이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고, 요안니스 5세 때 이미 선례가 있었다.[15] 외교 부문의 지도자였고 동시에 마법나라 측에서 상당한 권력이 있는 것은 확실하였지만 limited 내에서 예상치 못한 적의 공격으로 사망하게 되었고 이후 외교 부문은 망했다.[16] 사실 파라미르는 죽은 게 아니었다.[17] 일단 세이버가 성배전쟁에서 승리하면 빌 소원은 나라를 재건하고 싶다. 정확히는 선정의 왕검을 뽑은 시절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에 가깝다. 하지만 이 방식을 쓰게 되면[18] 이 와중에 호루스는 끔살당했다.[19] 하지만 이후로 설정이 바뀌면서 유능하기만 한 지도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