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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1 09:14:46

체 게바라/생애


1. 개요
1.1. 유년기1.2. 의사에서 혁명가로1.3. 혁명은 성공, 경제는 실패1.4. 쿠바를 떠나다1.5. 볼리비아에서의 죽음1.6. 죽음 이후

[Clearfix]

1. 개요

체 게바라의 생애를 설명하는 문서.

1.1. 유년기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 (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이다.

산타페 주 로사리오의 귀족가 혈통을 이어 받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제법 큰 병원 원장이었으며,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잘 자랐다.[1] 하지만 부모가 둘 다 중립적 자유주의자라 어릴 적부터 스페인 내전 패배로 망명한 공화국 정부 인물들과 만나 진보적인 사고에 대한 지각을 넓혔다. 클수록 가정에 헌신적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커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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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의 체 게바라

체 게바라 평전에 의하면 어린 시절 에밀리오 살가리[2]의 소설들에 빠져 살았는데 이 소설들에서 반제국주의적 사고관을 배우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사색과 독서를 좋아했다고 한다.

체 게바라는 미숙아로 태어났다. 두 살이었을 때는 아버지의 팔에 안긴 채 차가운 여울을 건너다 천식에 걸려 평생 흡입기를 가지고 다녔다. 그럼에도 학창 시절 럭비를 즐겨 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시가를 즐겨 피웠다.[3]

1.2. 의사에서 혁명가로

원래 의사를 꿈꿔[4]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의대를 졸업했으나[5], 우연히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모터사이클로 남미 대륙을 여행하면서 빈부격차로 인해 좌절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무수한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농장의 노예들과 광산의 광부들, 빈민가의 빈민들을 보며 충격에 빠졌다.[6] 또한 과테말라에서 CIA 사주를 받은 군부가 토지개혁을 시도한 좌파 하코보 아르벤스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체는 이 당시 현실에 좌절하여, 의사 가운을 던지고 혁명에 종사하게 된다. 이것을 소재로 만든 영화가《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이다. 2011년 88살에 세상을 떠난 그라나도는 이 영화를 매우 호평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대한 비판적 평가 중에는 극적 재미를 위해 온건한 급진주의자로서 젊은 시절 체와 의견을 나누던 친구였던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바보스럽고 경박한 인물로 묘사해 버렸다는 것이 있음을 생각하면 꽤 너그러운 인물인 듯 하다. 참고로 그라나도는 체와는 달리 혁명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계속 의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체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나갔으며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체의 초청으로 쿠바로 와서 의과대학을 창립하고 생화학 교수로 일하며 쿠바에서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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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왼쪽) 및 피델 카스트로 (오른쪽)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했으나 실패로 끝나고[7] 쿠데타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자 멕시코로 탈출해, 1955년 7월 10일 평생 동지인 변호사 출신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집권하는 쿠바에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혁명군에 투신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을 겪은 베테랑 군인 알베르트 바요 아래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쳐[8] 강건한 병사로 단련되었다.

1956년 11월 25일, 멕시코툭스판에서 요트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한 82명의 전사들은 12월 2일 쿠바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륙 직후 바티스타 정부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체포되어 17명[9]으로 줄어들었다. 다음은 상륙에 성공한 혁명군의 명단이다.

이후 추가로 생존해서 합류한 6명의 대원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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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4일 벌어진 '라 쿠브레호 폭발 사건 (La Coubre explosion)' 추모를 위해 동지들과 함께 아바나에서 행진하는 체 게바라
왼쪽부터 피델 카스트로, 오스발도 도르티코스 토라도, 체 게바라, 아우구스토 마르티네스 샨체스, 안토니오 누녜스 히메네스.

겨우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탈출한 혁명군은 그 곳을 기점으로 바티스타 정권의 폭정에 오래 전부터 지쳐 있던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기세가 성장하였다. 그리고 크고 작은 정부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나가며, 그들은 결국 2년 뒤인 1959년 1월 3일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여 독재자 바티스타를 쿠바에서 몰아냄으로서 쿠바의 혁명이 마침표를 찍었다.[11] 이것이 바로 포코 이론의 성공이었다.

1.3. 혁명은 성공, 경제는 실패

혁명 직후 쿠바의 일반 대사로 해외에 파견되어 이집트나세르, 인도자와할랄 네루, 유고슬라비아티토, 인도네시아수카르노비동맹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만나 반(反) 제국주의 및 반(反) 식민주의 외교 활동으로 우호를 다지게 된다. 심지어 UN 총회에서도 쿠바 대표로 참여했으며 북한에서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이 때부터 검은 베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사실 혁명 초기까지만 해도 피델 카스트로에 맞먹는 영향력이나 지위, 명성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는 그린마 호에 처음 탈 때까지만 해도 간부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게릴라의 유일한 군의관이였고, 후일 대민 의료지원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영향력과 지위가 올라간 것이다.[12]

이후 쿠바 국립은행 총재[13], 산업부장관에 발탁되어 농업국 쿠바를 산업화하려는 계획의 책임자가 된다.[14]

하지만 산업화와 금융 정책 등 경제 성적은 전반적으로 나빴다. 체는 애초에 금융이나 경제 전문가도 아니었고, 이상가였지 실무자가 아니었다. 은행총재이었지만 돈을 혐오해 지폐에다가 대충 '체'라고 휘갈겨 쓰거나, 실무를 보기 위해서 책상에 앉거나, 직접 실무를 보기보다는 대외활동을 통해 항상 구멍난 양말을 신고 직접 사탕수수 농장, 벽돌 공장에서 근로 활동을 더 많이 했다. 연출이라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사진 촬영을 좀 많이 했고, 언론 등을 통해 노동하는 사진들이 많이 퍼졌다.

게다가 너무 서투른 산업 국유화는 자본 이탈과 함께 미국의 경제 봉쇄라는 더블 펀치를 쿠바에 안겼다. 게다가 마침 불거진 중소 간의 충돌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편 가르기를 촉발시켰고 그 와중에 귀중한 시간까지 낭비되었다. 결과적으로 쿠바의 경제성장률이 침체되면서 체 게바라는 자아비판까지 해야 했으며, 이 커다란 실책으로 인해 라울 카스트로의 친소파가 쿠바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쿠바는 1970년대부터 80년대 전반기까지 동구권에 많은 의존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이 때 동유럽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커지는 바람에 동유럽 공산 정권과 소련이 붕괴되고, 미국이 피델 정부의 붕괴를 목적으로 동구권 국가들에게 쿠바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종용하면서 쿠바 경제에 큰 타격이 가해지는 바람에 1990년부터 199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쿠바는 공장 가동이 어려워지고 식량 수급도 줄어들어서 하루 2끼 정도나 겨우 먹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의 경제 제재로 공산 정권이 붕괴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와중에도 여러 가지 영리한 방안을 통해 어찌어찌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높게 평가할 만 하나 그 여파가 현재까지도 남아 있기 때문에 쿠바가 가난하다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노조가 기업 경영에 동참하게 하고[15], 물질적 유인이 아닌 도덕적 동기를 통해 노동실적을 장려하는 등 긍정적인 성과도 있었다. 장 코르미에의 평전에 의하면 체는 물질적 욕망을 노동의 이유로 삼는 행위는 우리가 깨부순 자본주의자들과 별반 다를 것 없다 했다. 즉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행위 자체를 악으로 봤다는 이야기이다.[16]

그래도 본업에 걸맞게 의사 출신인 게바라는 무엇보다 의료 개혁만큼은 자신있게 주도했다. 옛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쿠바로 초청하여 임상학 연구소를 설립하게 하고, 산티아고아바나 대학 등의 의대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쿠바가 미국과 단교된 상황에서 의학만큼은 상당히 발달할 수 있었던 것에는 체 게바라의 공로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1.4. 쿠바를 떠나다

카스트로는 결국 친소련 정책을 취하여 자국 내에 소련 핵미사일 기지 설치를 허용하고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얻어냈으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게바라는 소련의 진의에 대해 회의감을 품게 되었고 이는 소련의 점수 따기에 몰두하던 카스트로와 갈등하며 그와의 사이에 균열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특히 1965년 1월, 알제리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소련을 향해 “어떤 사회주의 국가(소련)는 제국주의 국가처럼 착취한다”라는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고, 이에 격노한 새 집권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그가 공직에서 사퇴하지 않으면 쿠바에 대한 모든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엄포를 놓게 되자 카스트로의 지시로 모든 공직에서도 사임하게 된다. 경제 정책 실패에 이어 터진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혁명 정권 내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결국 그 해 5월, 가족과 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고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쿠바를 등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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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고 있는 체 게바라
Hasta la victoria siempre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17]

체 게바라와 소련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체 게바라는 마오쩌둥혁명전략에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제정 러시아가 농업 국가라 해도 그 안에는 공장과 노동자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대부분 나라에서 공장의 노동자들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 전술을 적용하기엔 매우 어려웠다. 체 게바라가 활동할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공장 노동자들은 그 수가 정말 한 줌에 불과했다. 더욱이 극단적인 빈곤층과 빈농의 수가 너무 많아 공장 노동자들의 위치가 절대적으로는 빈곤층이나 상대적으로는 중류층~중하류층에 속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 모델은 쿠바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에게 있어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 모델은 맞지 않았다. 오히려 쿠바를 비롯한 제3세계 지역에서는 마오쩌둥식 혁명 모델이 적합했다.

2. 소련의 사회주의 국제분업 계획에서 쿠바는 당연히 농산물 생산, 특히 사탕수수 보급 기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탕수수 생산에만 의존하는 경제는 결국 경제적 예속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고, 단일작물 경작에 의존하는 경제가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쿠바 혁명정부의 지도부 모두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더욱이 사회주의 혁명 완수를 위해서는 반드시 산업화(공업화)를 달성해야만 했다.[18] 그러나 쿠바 혁명정부의 태도에 확신이 없었던 소련[19]은 쿠바 혁명정부가 만족할만한 지원을 해주지도 않았고, 지원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빠른 산업화를 통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꿈꾸던 쿠바에게 사탕수수 생산에 의존하는 경제의 유지를 강요하다시피 제안하는 소련은 새로운 경제적 종속 관계를 요구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20]

나중에 그가 향한 곳은 독립국 탄생이 한창이던 아프리카였고 그 곳에서 콩고 내전이 한창인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어가톨릭으로 공통점이 많은 남미와는 달리 생소한 환경의 아프리카는[21] 그가 생각한 세상이 아니었다. 자칭 공산주의자들은 약탈밖에는 관심이 없는 오합지졸들뿐이었다. 콩고 반란군은 술집, 매춘굴에 드나들면서 성병에 걸리기 일쑤였고 '다와 (Dawa)'라는 미신을 믿어서 마법의 약을 마시면 총알을 맞아도 괜찮다고 여겼다. 무기에 대해 부주의해서 권총으로 장난치다가 자기 허벅지를 날려먹기도 했다. 게다가 중국과 소련 간의 갈등은 이곳에서도 그의 발목을 잡아 친소 국가인 쿠바 출신의 그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콩고 공산 세력은 다짜고짜 적대시했다. 변장을 하고 콩고에 들어갔던 체가 정치장교 '고드프루아 샤말레조 (Godefroi Chamaleso)'에게 정체를 밝히자 샤말레조는 '이 사실이 절대 알려져서는 안됩니다. 절대로요! 국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겁니다.'며 당황해했다. 그나마 체가 믿고 존경하던 콩고의 지도자, '로랑 미투디디 (Laurent Mitoudidi)'가 체의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그는 바람이 심한 날 탕가니카 호를 건너다가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미투디디의 부하 둘이 그를 구하러 나섰는데 구출에 실패하자 마법의 힘이 자기들을 막고 있다면서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마투디디를 내버려두고 육지로 달아났다. 미투디디는 그대로 익사했다.

미투디디의 부하들은 외국인이라면서 체의 명령을 듣지 않으려 했고 자신들이 트럭이 아니라면서 무거운 군장을 메려하지 않았고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 어찌어찌 쿠바군 40명이 콩고인과 르완다 투치족 160명과 함께 6월 29일 반데라 요새를 공격했지만 반군들은 대부분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쿠바군 하나가 전투 중 일기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쿠바가 콩고 반군을 지원한다는 것을 CIA가 알게 되었다. 체는 '이런 병력으로 승리란 불가능하다'며 좌절했지만 계속 쿠바 게릴라 부대를 모았고 콩고 반군에게 '너희들 같은 남자와 싸우느니 여자들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다그치며 수습하려 했다.[22] 그러나 10월, 정부군과 용병대장 마이크 호어의 연합군이 포함, 폭격기, 헬리콥터 등을 동원해 포위 공격하자 쿠바군과 반군들은 탕가니카 호로 패주했다.

11월 20일 체는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일부 부하들을 내버려두고 배를 타고 퇴각했다. 탄자니아로 도망친 체는 최측근 전우 셋에게 이렇게 물었다. "계속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측근들은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며 물었고 체는 "어디든지"라 답했다. 측근들과 부하들 모두 거부하고 소련 항공기 편으로 모스크바를 거쳐 쿠바로 돌아가고 체만 혼자 주 탄자니아 쿠바 대사관에 숨어 지냈다. 1965년 11월 25일 콩고군 참모총장이었던 모부투 세세 세코쿠데타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을 몰아내고 철권통치 시대를 열며 콩고 혁명은 끝이 났다.

1.5. 볼리비아에서의 죽음

"...pero usted en Bolivia no va a sobrevivir. Suspenda ese plan. Busque otras variantes. [...] No se suicide."
"...당신은 볼리비아에서 살아남지 못할거요. 계획을 중지하고 대안을 찾으시오. (중략) 목숨을 버리려 들지 마시오."
1966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후안 페론이 체 게바라에게 한 말.[23][24]

연이은 좌절에 피폐해진 체 게바라는 일단 남미혁명이라도 완수하겠다고 생각하여 머리카락을 뿌리째 뽑으면서 대머리 사업가로 변장했다. 마지막으로 체의 아내 알레이다가 자식들을 데려오자 '아버지의 친구 라몬 삼촌'이라고 속였으며 카스트로는 '완벽 그 자체였다. 아무도 그를 몰라봤다. 절친한 동지들조차 그에게 말을 걸면서 손님 대하듯 했다.'고 회고했다. 체가 볼리비아로 떠나기 전 날, 카스트로와 체는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에서 포옹하고 서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고 한다. 1967년 11월 4일, 체는 볼리비아에 입국하여 7일 리오그란데강[25]의 지류인 '냥카와수강 (Río Ñancahuazú)'에 게릴라 기지를 세웠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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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들과 함께 있는 체 게바라 (맨 오른쪽)

포코 이론에 나온 대로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공산당과 연계해 볼리비아 농촌에서 혁명을 일으키려 했으나 소련에게서 낙인찍힌 그를 볼리비아 공산당은 대놓고 내놓은 식구 취급했고 여기에 지휘권 문제까지 불거지자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이 정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1966년의 마지막 날, 볼리비아 공산당 서기장 '마리오 몬헤 (Mario Monje Molina)'는 자신이 볼리비아 투쟁을 지휘하겠노라 우겼고 체도 지휘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라고 싸웠다. 이튿날 몬헤는 볼리비아인 게릴라에게 남고 싶으면 남되 당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남은 볼리비아인은 12명이었다. 몬헤는 공산당 간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큰 문제가 곧 터질 것 같다. 그럴 경우 우리가 나서서 막든가, 매장당하든가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볼리비아 농민들[27] 또한 이 외지인들을 반기기는커녕 적대시하여 신고를 하는 지경이었고, 스페인 식민제국의 거점이던 쿠바가 백인 비율이 높았던 것과 달리[28] 볼리비아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그 혼혈 혈통인 메스티소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들 현지 원주민들은 백인인 체 게바라의 명령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애초에 스페인의 압제에서 해방하겠다고 스페인군을 상대로 식민지 독립전쟁을 일으켜 맞서 싸운 남미 국가의 독립 운동 지도자들(시몬 볼리바르,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마누엘 데 벨그라노, 호세 아르티가스 등) 대다수가 자신들이 백인 문명인이라는 백인우월주의적 의식을 가지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탄압/배척해 왔던 역사가 있었으니 이에 시달렸던 원주민들은 역시 백인인 체 게바라도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사실 볼리비아에서 공산당 지지 세력은 농민들이 아니라 광부나 도시 노동자였으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심지어 오랜 동지인 카스트로조차 침묵했다.

거기에다 헬리콥터[29]를 이용한 미국의 추적이 더해졌다. 너무 유명해진 그는 미국에게도 카스트로 다음가는 눈엣가시로 여겨졌고, 그의 입국이 확인되자 CIA가 나서서 그린베레에 의해 양성된 볼리비아군 정예 레인저 부대를 인간 사냥에 투입했다. 그의 목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비롯한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영양실조이질에 시달리며 11개월 동안 추격을 피해 게릴라전을 벌이며 도망다녔으나 끝내 확실한 거점을 만들지 못해 점점 한계에 몰렸다. 결국 1967년 10월 8일, 추로 협곡[30] 전투에서 본대와 떨어진 상태로 몇 안 되는 부하들과 함께 볼리비아 정부군 레인저 부대의 매복에 걸려 그 자신도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된다.[31]

그 당시까지만 해도 체 게바라는 고국 쿠바와 세계의 좌파 지식인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구명운동을 펼칠 거라고 믿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일단 체 게바라는 게릴라전이긴 했지만 군복을 입은 전쟁 포로이므로 교전단체로 인정받을 수 있고, 설령 그렇지 않고 전범으로 기소하더라도 범죄자를 정식 재판 없이 즉결처분을 하는 것은 법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체 게바라가 생포될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M2 카빈과 탄약이 없는 M1911 권총 한 자루, 단도, 롤렉스 GMT 마스터 시계, 파이프 담배 두 개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그의 가방에서는 1만 5천 달러도 발견됐다고 한다. 또한 그는 당시 이발과 면도를 오랫동안 하지 않아 매우 지저분한 모습이었고,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전통 신발인 모카신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체 게바라는 근처에 있는 라 이게라[32] 마을의 한 학교에 감금됐고, 다음 날인 9일에 CIA의 지령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는 그를 살려두면 훗날 큰 화가 생길거라고 판단하여 체를 비밀리에 죽이기로 결단하였다. 그래서 체는 비밀리에 볼리비아 병사들에게 처형된다. 하지만 당시 볼리비아에는 사형 제도가 없었으므로 대외적으로는 게바라가 전투 중 부상으로 숨졌다고 발표하였다. 그를 사형시킬 때 몇몇 병사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억지로 술을 먹여서 취하게 한 뒤 총으로 쏘았다는 설이 있다. 그는 처형 직전 빈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사형 집행을 주저하는 병사에게 "당신이 날 죽이려고 온 것을 알고 있다. 떨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라! 당신은 단지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 뿐이다! 나는 그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일갈했다고 전한다.

포코 이론의 실패와 몰락을 모조리 보여준 게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활동이었다.

1.6. 죽음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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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체 게바라의 시신을 부검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사진사 프레디 알보르타가 찍었다.

볼리비아 정부는 그의 죽음을 입증하기 위해 그의 손을 잘라 고향 아르헨티나에 또는 카스트로에게 보냈다.[33] 얼굴이 이미 훼손되었기에 그의 데스마스크는 정확하지 않았고, 그 대신으로 그의 손을 보냈는데, 이는 그를 식별할 증거가 그의 지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다가 30년이 지난 1997년, 유족을 포함한 볼리비아-쿠바 합동 조사단에 의해 바예그란데[34]의 어느 폐쇄된 활주로에서 발굴되었다. 이후 쿠바 정부는 추모 주간을 선포하고 대규모 국장 행사를 진행했다. 심지어 산타클라라에 체 게바라를 추모하는 사원까지 생겼다. 2013년에 볼리비아 정부의 협조 아래 체 게바라의 일대기가 담긴 일기와 편지, 신문기사, 사진, 문서 등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1] 그런데 동생은 가난하진 않았지만 부자도 아니었다고 묘사한다. 특히 학창 시절이 아주 가난하게 표현된다.[2]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대다수 지역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으나 이탈리아 및 스페인어권, 포르투갈어권 지역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탈리아의 쥘 베른이라는 호칭까지 듣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모험 소설가.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말레이시아를 배경으로 한 산도칸 시리즈와 앤틸러스제도 해적 시리즈가 가장 유명하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답지 않게 앤틸러스제도 해적 시리즈를 제외한 대다수 소설의 주인공은 비백인종이고 백인은 악당이거나 취급이 좋아도 주인공의 조력자 정도였다. 비단 체 게바라 뿐만 아니라 아옌데, 푸치니, 움베르토 에코 등이 그의 애독자였고 특히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소설에서 여러 번 살가리를 언급했다. 살가리의 소설은 그의 생전에 이미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나 비평가들에게는 혹평받았고, 거기에 가난까지 겹치면서 살가리는 191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3] 천식 환자이면서도 시가를 피우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시가는 궐련과 달리 기본적으로 연기를 목(기관지)으로 삼키지 않고 입에 머금어 향을 즐기고 내뱉기 때문이다. 특히 정글에서 야영할 때 모기를 쫒는데 시가 연기가 좋다는 이유로 더욱 즐겨 피우게 되었다고 한다.[4] 동생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5] 알레르기 연구로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6] 20세기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노예들은 실존했으며, 그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 채찍을 맞으며 일을 해야 했다.[7] 당시 과테말라는 총선에서 당선된 진보적 성향의 대통령 아르벤스가 정치를 이끌었다. 물론 진보적인 정치인을 용납하지 않았던 미국은 1951년 아르벤스가 정권을 잡아 개혁을 시작하기도 전에 언론을 통해 그를 공산독재자 폭군으로 왜곡하고, 아르벤스가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소유의 토지를 국유화하려고 하자,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고 했던 것은 물론, 1954년 그를 자진사퇴하게 만들었다. 물론 여기서 아르벤스를 자진사퇴하게 만들었던 미국의 방식은 우익 쿠데타였고, 쿠데타 이후 과테말라에서는 피바다가 벌어졌다.[8]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거나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총을 들어 사살했다고 한다.[9] 12명이 남았다는 설도 있다.[10] 대장 피델의 친동생이다.[11] 아바나에서의 혁명이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바티스타는 이미 외국으로 도피해 있었고, 민중들과의 협공으로 수많은 정부군들의 항복을 받아낸 덕분이었다.[12] 포코 이론에 따라 쿠바 혁명 전쟁 당시 혁명군의 주요 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주민에 대한 봉사와 이를 통한 지지였다. 쿠바 혁명 전쟁 중 게바라가 매우 뛰어나고 중요한 존재였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쿠바 빈농들에게 절실히 필요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의료 봉사'를 제공할 수 있는 '의사'였다는 점이었다.[13] 이 시절 새로운 은행 건물을 건설하고자 직원들이 새 건물의 청사진을 들고 왔을 때, 체 게바라는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며 매우 화를 냈다는 일화가 있다. 자신은 천식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안데스산맥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쿠바 국립은행 건물의 층수는 20층.[14] 카스트로가 회의 중 "여기서 경제 전문가 (economista)가 있나?"라고 묻자 게바라가 바로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그럼 자네가 국립은행 총재일세."라고 말했는데, 사실 게바라는 공산주의자 (comunista)를 찾는 줄 알았다고 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고 당시 파격적이었던 경제 인사를 두고 나온 얘기이다.[15]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기업에서 영감을 얻었다.[16] 헬렌 야페의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 참고.[17] 체가 쿠바에서의 삶을 내려놓고 또다른 혁명을 위해 볼리비아로 떠나며 남긴 말.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의 혁명 광장에 체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함께 새겨져 있다.[18] 카를 마르크스는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달 후 공산사회가 등장할 것이다'라고만 말했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 발달 후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있는 것 다 쥐어짜서 공업에 투입해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심지어는 마오쩌둥조차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위해 '대약진운동'이라는 대참사를 일으켰다. 이렇게 공산주의 국가들이 공업화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이론상 공산사회는 산업자본주의 사회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9] 라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혁명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사회주의자였으나, 피델 카스트로의 정치 성향은 애매했다. 그래서 쿠바 혁명군은 공산주의 혁명군보다 반 바티스타 연합군에 가까웠다. 실제로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지지자 중에는 극우부터 극좌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초기 혁명 정부 주요 인사가 타국으로 망명하는 사태가 심심찮게 발생했다. 미국은 바티스타 정권에 반대하고 사탕수수 농장 및 각종 산업시설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카스트로에 대해 섣불리 공산주의자라고 규정 내렸지만, 쿠바의 상황에서 누가 혁명을 일으키든 - 심지어 우파가 혁명을 일으켰더라도 국유화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이었던 것이다.[20] 사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통해 체 게바라가 보는 시선대로 이뤄졌다. 미사일 위기가 끝나고 소련은 쿠바로부터 사탕수수, 시가, 노동자 등을 수입했기 때문이었다. 저걸로 쿠바는 그나마 소련 붕괴 직전까지 먹고 살 수 있었으나 소련 붕괴 이후 미국과의 수교 재개까지 쿠바는 경제 위기를 겪어야 했다.[21] 아프리카에서 공식으로 스페인어 쓰는 나라는 적도기니 단 한 국가이다. 스페인에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모로코에서도 어느 정도는 쓰이긴 하지만 스페인어 사용국으로 쳐주지는 않는다.[22] 정작 이 말을 들은 콩고 반군들은 화를 내기는커녕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야말로 리얼 당나라 군대다.[23] O'Donnell, Pacho (8 October 2012). "Opiniones de Perón sobre el Che". Pagina 12 (in Spanish). Retrieved 28 September 2015.[24] 생전 체 게바라는 1959년에 2번, 1966년에 1번 마드리드를 방문했고, 페론은 1958년부터 귀국 이전까지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 당시 스페인은 이른바 유럽 최후의 파시스트로 불리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의 우익 군사독재국가였다. 프랑코는 본국에서 쿠데타로 쫓겨난 자기 친구 페론을 흔쾌히 받아주었는데, 페론은 같은 반자본주의자로서 체 게바라에게 동정적이었지만 프랑코에 밉보이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그와 접선했다.[25] 미국-멕시코 국경을 흐르는 리오그란데강과 이름이 같으나 다르다. 볼리비아의 리오그란데강은 마모레강의 지류이며, 마모레강은 마데이라강의 지류, 마데이라강은 아마존강의 지류이다. 즉 볼리비아의 리오그란데강은 크게 보면 아마존강의 일부이다.[26] 국내에서는 냥카와수를 잘못 읽은 낭카우아수로 잘못 알려졌다. 심지어 그냥 낭카우아수라고 하는 바람에 강 이름이 아니라 어디 마을 이름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27] 볼리비아는 당시 남미국가로는 이례적으로 자작농 비율이 높았다. 그 이유는 체가 오기 14년 전인 1952년에 혁명이 일어나서 토지 개혁이 이미 진작에 실시된 데다가 1964년 쿠데타로 민주 정권을 뒤엎고 들어선 독재 정권에서도 토지 정책만큼은 뒤집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반발이 적어서였다. 애초에 게릴라 전쟁에서 농민들이 게릴라를 지지한다는 요상한 신화가 국공내전베트남 전쟁에 대한 구사관 때문에 전가의 보도처럼 돌아다니지만 국공내전 시기에 자작농과 소작농 할 것 없이 농사 짓고 살던 사람들은 부농들과 힘을 합쳐서 식량을 징발하려는 공산당에 저항했다고 국민정부 보고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마오쩌둥이 상하이 임시 당중앙에 보낸 보고서에도 나온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민심을 얻은 베트콩이라는 혁명신화를 북베트남이 이겼으니까 대충 그러려니 하고 묻고 지나가서 그렇지 남베트남 농민들은 부패하고 미국에 얹혀사는 사이공의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언정 공포정치를 강요하는 베트콩은 더 싫어했다. 당장 90년대까지 대책도 없이 미화되던 지리산 빨치산들을 정작 빨치산 치하를 겪은 지역 주민들이 호의적으로 기억하고 있던가? 다만 나중에 볼리비아가 원자재값이 폭락하고, 이후로 구조조정 작업을 겪는 과정에서 코카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미국에서는 코카농사를 중단하려는 압력을 가한 주제에 기본 인프라까지 민영화하려는 만행까지 저질러 결국 에보 모랄레스를 비롯한 좌파 세력의 지지 기반이 되기는 했다.[28] 현대 쿠바 인구의 60% 이상이 혼혈이 거의 되지 않은 스페인계 백인이다. 아르헨티나우루과이, 코스타리카 정도를 제외하면 상당히 백인 비율이 높고, 순혈 백인 혈통 외모인 체 게바라를 낯설어할 환경이 아니었다.[29] 이게 정말 컸는데, 아무리 게릴라들이 산에 숨어 있더라도 헬리콥터 시점에서는 어디에 있다고 대략적이나마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쯤에 게릴라가 있다 싶으면 (적중률은 신경쓰지 않고) 헬기에 달린 기관총을 난사하면 될 일이었다. 지상의 게릴라들 시점에서는 헬리콥터의 기관총 사격만 가지고도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된다.[30] 스페인어로 La quebrada del Churo이지만 Churo 대신 Yuro라고 구글에 써도 검색된다.[31] 생포 당시 체 게바라가 "쏘지 마라! 나는 체 게바라다.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것이 더 가치 있다."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른 증언에 의하면 생포 직전에 옆에 있던 동료가 "그는 체 게바라 사령관이다. 예의를 갖춰라."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이 최후의 말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데 생포 세력이 워낙에 적대적인 CIA였기 때문이다. 비굴해보이는 말투 자체가 조작의 여지가 있다.[32] 라틴 문자로는 La Higuera.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체 게바라의 벽화도 나온다.[33] 체의 시체 사진을 찍은 사진사 알보르타의 증언에 따르면 손은 미국 CIA로 보내졌다고 한다.[34] Vallegrande de Bolivia. 동부권 저지대 산타크루스에서 체 게바라가 죽었던 라 이게라 마을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체 게바라 박물관도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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