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2000년생 축구선수 캄비아소에 대한 내용은 안드레아 캄비아소 문서 참고하십시오.
에스테반 캄비아소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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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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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테반 캄비아소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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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前 축구 선수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에스테반 캄비아소 Esteban Cambiasso | ||
본명 | 에스테반 마티아스 캄비아소 델레아우 Esteban Matías Cambiasso Deleau | ||
출생 | 1980년 8월 18일 ([age(1980-08-18)]세) |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 |||
국적 | [[아르헨티나|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77cm | ||
직업 | 축구 선수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코치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1996~1998) CA 인데펜디엔테 (1998~2001) CA 리버 플레이트 (2001~2002) 레알 마드리드 CF (2002~2004) 인테르나치오날레 (2004~2014) 레스터 시티 FC (2014~2015) 올림피아코스 FC (2015~2017) | |
코치 | 콜롬비아 대표팀 (2018 / 수석 코치) | ||
국가대표 | 52경기 5골 (아르헨티나 / 2000~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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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 선수. 별명은 엘 꾸추 (El Cuchu).[1]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년동안 인테르에서만 뛴 레전드이다.
2. 클럽 경력
2.1. 초창기 ~ 레알 마드리드 CF
1995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여 1996년 형인 니콜라스 캄비아소와 함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유소년 팀에서 생활했다. 1998년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인데펜디엔테에서 3년을 보내고, 2001년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었다.
02/03 시절 레알 마드리드로 돌아와서 마켈렐레와 같이 중원에서 호흡을 맞추며 나름 꾸준히 기용이 되었다. 이 당시 페레즈 회장은 공격 라인은 라울,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호나우두 등 유명 스타들로 수비 라인은 팀 내 유소년 출신의 신예 선수들로 구성하는 지단 - 파보네스 정책을 실시했는데 캄비아소는 그 수혜자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03/04 시즌 마켈렐레가 첼시로 떠나자 캄비아소는 이반 엘게라와 같이 데이비드 베컴의 중앙 미드필더 파트너로 기용이 된다. 맨유 시절 오른쪽 윙으로만 기용되던 베컴과 신예 둘이 맡았던 레알 마드리드의 중원은 처참했고 결국 레알 마드리드는 덴마크의 미친 개로 불리던 터프한 중앙 미드필더 토마스 그라베센을 영입하게 된다.
팀 내 입지가 좁아진 캄비아소는 2004년 7월 인테르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아 이탈리아 무대로 진출하게 된다.
2.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인테르 입단 이후 곧바로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은 캄비아소는 데얀 스탄코비치, 알바로 레코바 그리고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등과 함께 중원의 축으로 자리잡았다.인테르가 세리에를 제패하던 시절. 즐라탄, 캄비아소, 마이콘 이 셋이 인테르의 공격진, 미들진, 수비진을 책임지는 세 축이었다. 가장 공신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평점으로 봐도 2000년대 후반기 세리에 A 최고의 미드필더는 캄비아소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훌륭한 활약을 보였다.[2]
08-09 시즌부터 좀 더 후방으로 배치되면서 수비가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비아소는 종종[3] 활발한 오버래핑과 공격가담을 보이며 전개를 이끌었다. 칼치오폴리 사태 이후 무리뉴 1년차까지 인테르가 공격전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들어오면서도 세리에A를 정복할 수 있었던건 중원에서 버텨준 캄비아소와 우측면을 먹었던 마이콘의 공헌이 매우 컸다.
캄비아소는 적절한 포지셔닝으로 세컨볼을 따내어 자연스레 점유를 인테르로 가져왔고[4], 테크니컬한 수비로 상대의 공격을 컷팅하며, 동료에게 정확하게 가서 꽂히는 패스와 그것을 가능케하는 시야와 킥력을 아울러 갖추고 있어 팀이 움직이는데 있어서 핵심 중추가 되어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전방에서 공격이 풀리지 않을땐 직접 2선까지 올라가서 공격을 풀어주는 전개 능력까지 보여주는 등, 이 시절 캄비아소는 가히 당대 최고의 수미라고해도 부족하지 않을 엄청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세리에 미드필더 평점 1위를 몇 년간 캄비아소가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5]
트레블 시즌엔 웨슬리 스네이더의 영입으로 포백 앞 홀딩이란 비교적 제한된 롤을 받아서 오히려 활약이 줄었을 정도.[6] 하지만 트레블 시절에도 활약상은 여전히 돋보였다. 챔스 4강전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1차전에는 리오넬 메시를 묶어내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고, 2차전에는 사비 에르난데스를 견제하며 당시 바르셀로나가 자랑하던 티키타카를 무력화시켰다. 티아고 모타의 퇴장 후에는 사비 이외에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메시 사이의 패스를 끊어내는등 맹활약을 하여 팀을 챔피언스 리그 결승까지 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렇듯이 기복없는 활약을 이어가던 캄비아소 였지만 구단주가 모라티에서 토히르로 바뀌면서 트러블이 발생했다. 4.5m 유로였던 연봉을 1.2m으로 깎으라는것이 재계약 조건이었고, 이를 받아들일수 없었던 캄비아소는 재계약을 거부 의사를 밝혔다. 당시에도 인테르 팬덤이 들썩였지만 이후 캄비아소가 이탈하자 인테르는 중심을 잃고 정말 오랜 기간동안 방황하게 된다.
2.3. 레스터 시티 FC
자유계약이 된 캄비아소는 2014년 8월 28일 EPL 레스터 시티와 1년 계약을 체결하였다. 9월 22일 맨유전에서 2-3으로 뒤지고 있던 후반 63분. 왼발 중거리슛으로 동점골 겸 EPL 데뷔골을 기록했다. 팀은 5-3 대역전승을 거뒀다. 이후 리그 31경기 출장 5골을 넣으며 팀의 프리미어 리그 잔류에 크게 공헌하였다.맨유전 전후로도 캄비아소는 쭉 좋은 활약을 보였다. 특히 리그 후반에 들어서 레스터시티는 3백으로 전환하고 이후 무서운 상승세를 타면서 강등권에서 리그 중위권으로 올라서면서 시즌을 마무리지었는데, 캄비아소는 그 레스터시티의 상승세를 주도한 선수 중 하나로 꼽혔다. 중원에서 보여준 변함없는 활약으로 캄비아소는 팬들이 뽑은 14-15 시즌 레스터 시티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7]
당초 재계약이 유력시되었고 선수 본인도 재계약을 원했다고 알려졌지만, 심경의 변화가 발생해 레스터와 재계약을 거부하고 새 팀을 찾아나섰다. 나이젤 피어슨 감독의 갑작스런 경질이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피어슨의 후임으로 온 레스터 감독이 라니에리인데 캄비아소와는 인테르시절 호흡을 마친 사제관계였는데도 재계약을 거부한걸 보면 무슨 일이 있던걸로 보였다.
그리고 캄비아소가 떠난 다음 시즌 레스터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우승했다.
2.4. 올림피아코스 FC
2015년 8월 7일 그리스의 명문 올림피아코스와 2년 계약을 맺으며 이적이 확정되었다. 같은해 12월 5일엔 리그 데뷔골을 넣었으며, 2016년 7월 11일, 1년 재계약을 하였다.
2017년 9월 8일, 캄비아소는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이미 올림피아코스와의 남은 계약을 해지했고, 현재 UEFA에서 주관하는 코치 라이선스를 획득하여 유소년 및 하부 리그를 지도할 자격도 갖춘 상태이다.
3.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호세 페케르만이 이끄는 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에 들어갔다.4. 국가대표
캄비아소는 아르헨티나 각급 연령별 대표팀을 거쳐왔으며 이때 후안 로만 리켈메, 파블로 아이마르, 왈테르 사무엘과 동료로 지내면서 만 17세의 나이에 1997년 FIFA 세계 청소년 대회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 참가해 조국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2년 후 대회에는 주장으로도 참가했다.성인 국가대표는 2000년에 데뷔하였는데 명성에 비해 국제대회 커리어는 빈약한 편이다. 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 준우승과 월드컵은 2006년 독일 월드컵 8강 진출이 마지막 무대였고[8], 코파 아메리카는 2007년 대회 준우승을 제외하면 우승 경력도 없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때는 선발되지 못했다. 당시 마라도나는 이과인, 테베즈를 전방에 세우고 메시를 프리롤로 삼았으며, 측면에 막시 로드리게스와 앙헬 디 마리아를 주전으로 기용하고 중원은 마스체라노에게 맡겼다. 공수를 완전히 분리해서 원 볼란치 마스체라노를 핵으로 삼는 전술이었는데 어차피 한명만 기용할거니 필요없다고 생각했는지 캄비아소를 제외했다.[9][10] 하지만, 당시 캄비아소는 09-10 시즌 인테르의 트레블 멤버였으므로 전술적 변화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자원이었고, 하다못해 마스체라노의 백업 역할로 쓸 작정이더라도 선발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보카 지구 출신인 마라도나가 파테르날 지구 출신인 캄비아소를 차별해 엔트리에서 제외했다는 것이 정설로 취급받는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 구성을 살펴보면 마라도나의 의도대로 흘러간다면 문제 없지만, 부상, 카드트러블 같은 불의의 상황이 닥치거나 경기가 예상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폭탄이 될 위험성이 굉장히 높았다.
왼쪽 풀백은 노련하지만 기동력이 떨어져 가던 에인세였고 안살디나 인수아 같은 젊은 풀백이 선발되지 않았다. 오른쪽은 센터백인 오타멘디와 미드필더가 본업인 호나스 구티에레스를 뽑아서 전문 풀백이 없다. 센터백은 굳이 이모저모 따진다면 흠을 잡을 수 있지만 에이스로 꼽히던 왈테르 사무엘, 의문시되던 아리엘 가르체를 제외하면 뽑힌 선수나 왜 안 뽑혔냐는 얘기를 듣는 선수나 고만고만한 수준이다. 미드필더진에선 마스체라노가 다치거나 카드가 쌓이면 대체할 수비형 미드필더도 없긴 했다.
그리고 조별리그 1차전 나이지리아 전에서 베론이, 2차전 한국전에서 사무엘이 부상당하면서 마라도나의 플랜이 꼬이기 시작하다 독일전에서 터졌다.
캄비아소는 상술했듯이 공수겸장의 만능 미드필더로 마스체라노와 충분히 함께 쓸수 있는 선수고, 사네티도 좌우 풀백은 물론 윙백과 측면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모두 수행할 수 있어 감독의 전술 폭을 확 넓혀줄 수 있는 선수였는데, 아무리 마스체라노를 중심으로 전술을 짰다 하더라도 단기전에서 어떤 팀을 상대하고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니 옵션을 다양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큰 결정이었다. 더군다나 이해는 인테르가 이탈리아 클럽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한 해였다.
경쟁자라도 출중했으면 모르겠는데 페르난도 가고나 에베르 바네가도 아니고 마리오 볼라티, 하비에르 파스토레가 뽑혔다는 점[11]을 생각하면 일단 벤치에 두더라도 캄비아소를 뽑지도 않을 이유는 없었던지라 당시에는 논란이 심했다.
그러나 2011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캄비아소는 이도 저도 아닌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아르헨티나는 자국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8강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2011 코파에서 캄비아소가 보여준 부진 때문에 극렬 마라도나 까들을 제외하면 이 문제에 대해서 마라도나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많이 줄어들었다.
단, 그렇다고 해서 2011 코파 아메리카에서 부진했다는 이유로 2010년 캄비아소를 안뽑은게 마라도나의 혜안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는건 어폐가 있다. 대표적으로 스네이더만 봐도 2010년에는 네덜란드를 하드캐리하며 실버볼을 수상했지만 그 다음 대회인 유로에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채 조별리그 3전 전패를 당했다. 때문에 2011 코파에서 부진했다는 이유만으로 2010년 당시 인테르 트레블의 주역 중 하나였던 캄비아소가 뽑아봤자 못했을거라 단언할 수는 없다. 이후 캄비아소는 소속팀의 부진과 맞물려 선발에서 제외당하면서 두번 다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는 선발되지 못했다.[12]
5. 플레이 스타일
2000년대 중후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최고이자 교본으로 언급되는 선수 중 하나.[13]공수겸장의 만능 미드필더. 왕성한 활동량과 기민한 위치선정으로 상대팀의 패스 줄기를 끊어내고 순식간에 상대방 진영으로 치고 올라가 공격에 가담하는 플레이가 일품이었다. 태클이나 대인마크 등 수비적인 능력은 또 다른 월드클래스 수비형 미드필더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에게 뒤졌지만,[14] 슈팅과 시야, 패스, 공격가담 측면에선 캄비아소가 더 나았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포지션에 비해 공격포인트를 꽤 많이 쌓는 타입. 상기했듯이 스텟 외에도 전반적인 전술 이해도가 굉장히 뛰어나 공격 가담도 곧잘 하는가 하면 리베로 역할도 맡았다.
아르헨티나가 6-0 대승을 거뒀던 2006년 월드컵 조별리그 아르헨티나 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전에서의 두번째 골은 전성기 캄비아소가 어떤 선수였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8강에서 탈락했지만 캄비아소와 에르난 크레스포와 후안 로만 리켈메를 주축으로 한 아름다운 축구는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2007년 말에는 FIFA 랭킹 1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CA 리버 플레이트 (2001~2002)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002 C[15]
- 레알 마드리드 CF (2002~2004)
- 라리가: 2002-03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3
- UEFA 슈퍼컵: 2002
- 인터컨티넨탈컵: 2002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4~2014)
- 세리에 A: 2005-06, 2006-07, 2007-08, 2008-09, 2009-10
- 코파 이탈리아: 2004-05, 2005-06, 2009-10, 2010-11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5, 2006, 2008, 2010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9-10
- FIFA 클럽 월드컵: 2010
- 아르헨티나 U-20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1997
- 남아메리카 유스 챔피언십: 1997, 1999
6.2. 개인 수상
- ESM 올해의 팀: 2005-06
- 인테르 올해의 선수: 2005
- 레스터 시티 올해의 선수: 2014-15
- 인테르 명예의 전당: 2020
7. 기타
- 3형제 중 막내다. 큰형 페데리코는 변호사이자 에스테반의 대리인이었고, 작은형 니콜라스는 역시 축구선수로 골키퍼였으며 에스테반과 함께 레알 마드리드에 갔으나 마찬가지로 방출되었다. 차이점은 유럽에 머지않아 돌아간 에스테반과는 달리 아르헨티나에서만 뛰다 은퇴했다.
- 한때는 이렇게 풍성했던 시절도 있었다.
- 어릴 적엔 축구를 싫어하고 대신 농구를 매우 좋아했으며 가족들도 농구선수가 되길 바랐다. 첫 운동선수 경력도 농구선수로 시작했다. 그러나 팀에서는 캄비아소가 축구를 하길 원하였고[16] 페르난도 레돈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축구선수가 되었다.
-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 나온 월드컵 역사상 최고로까지 꼽히는 수비 진영부터 이어진 26회의 패스가 전혀 끊기지 않고 골문까지 들어간 티키타카 빌드업에 의한 '팀 골'의 마무리를 장식한 선수이다. #
- 하비에르 사네티의 소울메이트다. 함께 식당도 하고 그가 개최하는 자선행사에 가장 자주 참석한다.
- 국내 인테르 팬으로 유명한 축구해설가 박찬우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이다. 본인만의 주관적인 축구선수 베스트 11 이나 인테르 베스트 11을 뽑을 때 캄비아소를 항상 꼽는다. 한국에서 캄비아소가 저평가 받는다며 분노한 적도 있다.[18]
8. 같이 보기
1 아본단시에리 · 2 아얄라 · 3 소린 ⓒ · 4 콜로치니 · 5 캄비아소 · 6 에인세 · 7 사비올라 · 8 마스체라노 · 9 크레스포 10 리켈메 · 11 테베스 · 12 프랑코 · 13 스칼로니 · 14 팔라시오 · 15 밀리토 · 16 아이마르 · 17 쿠프레 18 M. 로드리게스 · 19 메시 · 20 J. 크루스 · 21 부르디소 · 22 L. 곤잘레스 · 23 우스타리 |
호세 페케르만 |
[1] 스페인어로 추장이라는 뜻이다.[2] 2000년대 이탈리아 최고의 미드필더인 안드레아 피를로조차도 리그 내 활약만으로 보면 캄비아소에 비교하기 힘들 정도다. 물론 피를로는 유럽 대항전이나 국가 대항전에서 그 특유의 마왕스러운 경기 지배력을 보였지만.[3] 대표적으로 챔피언스리그 맨유 원정경기.[4] 전성기 에메르손이 잘 보여주던 플레이[5] 가제타 평점으로 2008-09 시즌은 6.59로 리그 1위였고 2009-10 시즌은 6.52로 리그 2위를 기록했다.[6] 다만 이 시즌은 인테르 미드필드의 밸런스가 워낙 좋았던 시즌이었다.[7] 참고로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로는 제프 슐루프가 뽑혔다.[8] 조별예선에서 1골을 기록했지만, 8강전 독일과의 승부차기에서 실축하며 4강 진출이 좌절되기도 했다.[9] 쓰리백을 쓸 때는 베론이 마스체라노 파트너로 들어갔으나 베론이 다치고 나선 아예 마스체라노가 중원을 통째로 책임졌다.[10] 이때 또 다른 아르헨티나의 레전드이자 인테르 동료였던 하비에르 사네티도 니콜라스 오타멘디에게 밀려서 제외되었는데 아르헨티나는 8강에서 독일의 슈바인슈타이거에게 중원이 유린당하고 필립 람에게 우측면이 뚫려서 완패했다.[11] 사실 볼라티가 뽑힌 것을 제외하면 가고, 바네가, 파스토레 3인은 각기 특색이 있는 수준이다.[12] 세르히오 바티스타가 후임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시 대표팀으로 돌아왔고 캄비아소-바네가-마스체라노로 중원을 꾸린 아르헨티나는 스페인-브라질-포르투갈과 연달아 평가전을 벌여 모두 승리하긴 했으나 2010년에서 단 1년 후 12팀 참가하는 코파 아메리카 8강 탈락이라 말할 거리도 없다.[13] 다만 캄비아소의 역할은 포백을 보호하고, 수비진에서 빼앗은 공을 안전하게 전진시키는 (물론 요즘 각광받는 후방 빌드업과는 다소 다른 개념으로) 전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에 가까웠다. 그러나 타고난 축구 지능을 활용해서 슬금슬금 공격에 가담하는 능력이 일품이라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14] 이건 어디까지나 마스체라노의 수비 능력이 월드 클래스급으로 손꼽히는 수준이라서 그런 것이지, 캄비아소 역시 수비력은 뛰어난 선수였다. 마스체라노가 투쟁적인 플레이를 기반으로 대인마크 및 태클링, 공간 장악에 능하다면 캄비아소는 패스 경로 차단 및 마스체라노와 마찬가지로 공간을 메꾸고 상대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등 지능적인 수비가 장점인 편이다. 물론 마스체라노 역시 지능적인 수비에 능했다.[15] 클라우수라(Clausura)[16] 참고로 캄비아소 형제를 발굴한 사람은 아르헨티나의 명 스카우터 라몬 마도니. 둘을 설득하려고 엄청 노력했다고 한다. 캄비아소의 아이돌 페르난도 레돈도도 이 사람이 발굴했다.[17] 사실, 캄비아소의 발언이 완전 틀린 것은 아니다. 하피냐의 재능을 고려하면 이적료는 합당하나, 근 2년간 하피냐는 부상으로 제대로 경기도 못 치르고 폼도 별로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의 이적료는 꽤나 비싸기는 했었다.[18] 반대로 가장 싫어했던 선수는 주앙 마리우. 이때문에 세리에 경기를 중계할때 인테르 경기를 맡게되면 격해지는 경향이 있다.
분류
- 1980년 출생
-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 인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 CA 인데펜디엔테/은퇴, 이적
- CA 리버 플레이트/은퇴, 이적
-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CF/은퇴, 이적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은퇴, 이적
- 레스터 시티 FC/은퇴, 이적
- 올림피아코스 FC/은퇴, 이적
- 아르헨티나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선수
- 2007 코파 아메리카 베네수엘라 참가 선수
- 2011 코파 아메리카 아르헨티나 참가 선수
- 2005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독일 참가 선수
- 1997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말레이시아 참가 선수
- 1999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나이지리아 참가 선수
- 1995 FIFA U-17 세계 축구 선수권 대회 에콰도르 참가 선수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명예의 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