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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20:45:34

클라우디우스 1세/생애

1. 생애
1.1. 즉위 이전1.2. 즉위1.3. 내정 개혁과 관료제 구축1.4. 사회, 경제 정책과 오스티아 항구 건설1.5. 빵과 서커스1.6. 영토 확장과 브리타니아 원정1.7. 메살리나와 소 아그리피나1.8. 사망
1.8.1. 사망 이후 복권과 재평가

1. 생애

1.1. 즉위 이전

클라우디우스 1세는 기원전 10년 8월 1일 아버지 대(大)드루수스의 임지인 루그두눔[1]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탈리아 쪽 연구에 따르면, 태어날 당시의 이름은 아버지가 친부에게 가면서 개명하기 전까지 쓴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고, 아버지 생전에 재차 개명해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코그노멘으로 게르마니쿠스를 사용하는 것을 원로원에서 승인받은 후에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로 불렸다. 이후 서기 6년, 큰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상속인이자 양자로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되자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당주 자리를 물려받으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가 되었다.

위로는 형 게르마니쿠스와 누나 리빌라가 있었고,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은 후유증으로 길고 가는 다리를 지녔고, 특히 10대 전까지는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고 한다. 사춘기 무렵 부터는 하체에 힘이 붙으며 증세가 다소 나아지긴 했지만, 평생 자유롭게 걷지는 못했다. 또 긴장할 때마다 고개가 자주 흔들리고 간혹 침을 흘리는 증상이 있었고, 일설에 따르면 왼쪽 팔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정신이나 지적인 능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걸을 때를 제외하면 크게 눈에 띄는 장애는 없었다고 한다. 다만 동시대 정적들의 묘사를 보면 단순한 소마마비가 아니라 뇌성마비의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BBC 드라마에서는 이 뇌성마비 설을 채택해서 배우가 실제 뇌성마비 환자의 행동을 연구하여 열연한 일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뇌성마비 주장은 제정과 클라우디우스를 폄하하기 위한 조작으로 보고 있다. 소아마비와 미세한 말더듬 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

이런 신체적 결점에도 클라우디우스는 형 게르마니쿠스와 누나 리빌라처럼 키가 크고 상당히 매력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회적 책무로서 군 복무를 해야 하는 로마 상류층, 특히 최상류층인 황실 사람에게 신체적 장애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던 터라, 어린 시절부터 황실 내에서 썩 좋지 않은 대접을 받으며 무시당하곤 했다.

설상가상으로 황실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감독한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와 어머니 소 안토니아는 가급적 클라우디우스의 바깥 출입을 자제시키려고 했고, 성년식 이후에도 가정교사를 항상 곁에 붙여 놓았다. 이 때문에 클라우디우스는 어려서 뿐 아니라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정교사와 가문의 해방노예 및 노예들을 크게 의지했는데, 할머니와 어머니, 심지어 누나까지도 클라우디우스가 가문의 체통을 떨어 트린다며 천덕꾸러기 취급했다.

특히 친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는 손자 클라우디우스를 매일 혼내곤 했고, 그를 집안의 수치로 생각했다. 리비아 드루실라는 동시대에나 후대에나 로마인들이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볼 수 있는 '목소리 크고 자존심 강한 전통적 할머니'의 전형" 이라고 찬탄할 정도로 집안에서 보수적인 이탈리아 할머니로 유명했다.[2] 그녀는 본인의 혈통과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자신의 혈육들에 대한 기대가 큰 것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키가 크고 잘생기긴 했지만 다리 한쪽을 절어 보행이 불편한 클라우디우스는 이런 그녀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고, 리비아는 늘 클라우디우스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리비아의 홀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클라우디우스의 누나 리빌라가 누군가가 ‘훗날 자신의 동생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자, 큰 소리로 “로마인들에게 그런 잔인하고 부당한 불행이 닥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린 일도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남편인 아우구스투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클라우디우스를 가족의 밥상머리에서 떼어놓고 가정교사, 해방노예와 밥을 먹게 했다고도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내에게 이 문제를 여러 번 지적하며 가부장권까지 활용해 아내에게 경고하는 한편으로, 클라우디우스의 백부이자 본인의 후계자인 티베리우스와도 리비아의 이런 냉담한 태도를 해결하고자 깊은 대화를 나눴던 것이 리비아와 주고 받은 서한 곳곳에서 드러난다.

바로 위의 친누나 리빌라도 비슷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클라우디우스를 더 심적으로 힘들게 한 것은 친할머니 리비아보다 누나 리빌라였다. 그녀는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인 클라우디우스에게 늘 냉담한 태도를 취하며 대놓고 무시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부부와 딸이 없는 백부 티베리우스가 친딸처럼 아껴, 아우구스투스 부부가 손수 '작은 리비아'라는 뜻의 리빌라라는 애칭을 지어줄 정도로 황실 내 총애가 대단했다. 리빌라는 어릴 적에는 특출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다워져 성년식 이후에는 미녀로 이름이 높았다. 그녀를 실제로 본 이들은 품격 있고 아름다운 고전적 미인의 전형으로 칭송했다. 게다가 리빌라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1순위 후계자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약혼하여 미래마저도 창창했다. 아우구스투스 부부는 식사 때마다 리빌라에게 상석을 내어주면서 돋보이게 해줄 정도로 편애하여, 외손녀 소 율리아와 대 아그리피나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정도였다. 리빌라에 대한 편애가 어찌나 심했는지, 후일 게르마니쿠스와 결혼하게 되는 대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주 중에서 유일하다시피한 개념인이었음에도 리빌라와 원수지간이 되었다.[3]

그러다보니 리빌라는 어릴 적부터 거만하고 시기, 질투가 많았다.리빌라는 남동생 클라우디우스를 곧 아우구스타에 오를 본인의 짐으로 여겨 늘 깔보고 무시했을 뿐 아니라, 동생에게 호의를 베푼 이들까지 적대적으로 대했다. 리빌라는 어릴 적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늘 미워한 오빠 게르마니쿠스와 새언니 대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를 알뜰히 챙기는 것도 질투했다. 이는 1살 위의 사촌 오빠로 후일 그녀의 재혼 상대가 될 소 드루수스도 마찬가지였다. 리빌라가 남편 소 드루수스를 존중하면서도 늘 데면데면한 원인 중 하나는 그가 게르마니쿠스 부부와 함께 남동생 클라우디우스와 친형제처럼 우애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런 와중에도 클라우디우스가 누나 리빌라를 좋아해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유화적이고 온건한 태도 탓에 후일 클라우디우스는 정적들에게 공처가라고 놀림을 듣거나, 아내에게 휘둘리고 귀부인들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 소 안토니아(율리아 안토니아)는 남편을 일찍 잃은데다 막내아들 클라우디우스가 소아마비로 장애를 얻기까지하자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세 자녀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다. 외삼촌이자 시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구도에서 막내아들인 클라우디우스가 아우구스투스 일가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소 드루수스보다 상속 순위가 밀리자, 몇 년 동안 시어머니 리비아에게 세 자녀를 맡긴 것도 이런 이유였다. 그녀는 막내 클라우디우스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게으르고 의존적인 삶을 보내는 것을 경계해, 유독 차갑게 굴며 정을 잘 주지 않았다. 율리아 안토니아는 비슷한 또래의 귀부인들과 달리 매우 전통적인 로마-이탈리아 어머니였고,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면서 아버지가 할 훈육까지 담당해 무척 엄했다. 따라서 일찌감치 제위계승에 밀리고 로마 귀족들에게 조롱거리가 된 막내아들 클라우디우스에게 강한 정신력을 심어주고자 누구보다 엄하고 쌀쌀맞게 훈육했다.

수에토니우스를 비롯, 제정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혐오한 역사가들은 소 안토니아를 장애가 있는 아들을 학대한 몰상식하고 악랄한 어머니로 기록하고 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녀는 친아들 클라우디우스를 혼낼 때 “괴물”이라고 하거나 “자연이 시작만 해놓고 마무리 짓지 못한 인간”이라고 부르고 종종 무시했으며, 모자라 보이는 사람을 보면 "내 아들 클라우디우스처럼 멍청하다"라고 했다고 한다. 편지를 써도 게르마니쿠스나 리빌라에게 보낼 때와는 달리 길이도 짧았을 뿐 아니라 그나마도 혼내는 내용 일색이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서 흔히 보이는 과장과 왜곡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 소 안토니아는 여장부였고, 전통적인 로마 여인들처럼 손수 자신의 세 아이에게 젖을 먹여 키웠으며 아이들의 교육에 굉장히 적극적이라 아이가 잘못하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혼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엄청난 가문의 후광, 막대한 재산, 엄청난 수의 클리엔테스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았다. 또 여느 귀부인들처럼 연회장을 들락거리며 사교에 열중하는 일도 없었고, 지인을 위해 황제에게 청탁하지도 않았으며, 함부로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거나 험담하는 일도 없었다. 한마디로, 동시대의 보통 로마 귀부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외삼촌 아우구스투스도 강압적으로 재혼명령을 내렸다가 도리어 조카가 뜻대로 살아가도록 힘을 실어줬고, 잔정 없는 티베리우스도 안토니아를 크게 존경해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도움을 줬다.

이런 안토니아는 남편 사후 아버지 역할과 어머니 역할을 동시에 해야 했고, 죽은 남편이 남긴 세 아이에 대한 사랑과 기대도 상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가 막내아들을 엄하게 대한 것도 단순히 학대나 냉대가 아니라, 막내아들이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게 되면서 일찌감치 로마인들이 중시하는 군 경력을 쌓지 못하게 된데다 제위 계승 서열까지 밀린 것을 감싸지 않고 더 강하게 키우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후일의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의 어머니를 늘 그리워하며 존경했다는 여러 일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클라우디우스는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신과 형, 누나, 여러 조카와 자신의 딸까지 손수 키운 어머니를 유독 존경했다.

이렇게 할머니, 어머니, 누나에게 사랑받지 못한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할머니 리비아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친절했던 점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리비아에게 매일 서한을 보내, 태도를 바꾸라고 한 것과 함께, 클라우디우스가 10대가 되면서 꾸준한 훈련 속에서 다리를 저는 증세가 나아진 것이 컸다. 그렇지만 황실 여인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유년기를 고통스럽게 만든 가정교사들을 계속 고용했고, 이들에게 클라우디우스가 게으르고, 타의존적인 삶에서 벗어나도록 훈육하라고 명령했다. 황실 가정교사들은 대개 아우구스투스가 상당히 고민해 제국 각지에서 이름을 날리는 명사들이 많았는데, 이중 어린 클라우디우스를 유독 힘들게 한 이들은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붙여주지 않고 할머니 리비아가 손수 고용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생전 남긴 서한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표현으로는 "우리와 인격 자체부터 수준이 다르고 낮은 자들"로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리비아는 클라우디우스를 성년식 전후로 가정교사 겸 생활보조인으로 배속된 이들을 통해, 감시하고 혹독하게 훈육케 했다. 그들은 몸이 불편하고 제위와 일찌감치 멀어진 황족 클라우디우스를 대놓고 무시했고, 클라우디우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가혹할 정도로 혹독한 벌을 내렸다. 왜냐하면 그들을 고용한 황실여인들이 약한 신체에 강한 정신력을 얻게 해야 해방노예들에게 빌붙어 살 생각을 안할 거라고 생각해, 더 엄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시종을 보내 이를 확인하고 감시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들의 방법은 클라우디우스에게 큰 상처가 됐고, 평생동안 그 트라우마가 심각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성인식 이후에도 황실 가족들이 "의지력이 부족하고 형편없다"는 이유를 들어 가정교사를 붙여 감시 받은 삶이 상당히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이때 그는 어릴 적 삶을 떠올리면서 자신을 돌본 가정교사들을 존경하지 않았다고 고백했고, 훗날 그들을 떠올리며 "야만인", "마굿간 감독관" 등으로 지칭했다.

하지만 황실 내에서 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클라우디우스를 무시하지 않고 잘 챙겨줬다. 여러 황족 중 본래부터 쌀쌀맞고 츤데레인 백부 티베리우스는 가족회의에서 장애 있는 조카에게 정을 많이 주지도, 무시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 재위 기간 동안 파트리키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명망과 인품 모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도 괜한 야심으로 문제를 안 만들었다. 티베리우스 또한 상당히 가족적인 사람으로, 아우구스투스와 조카의 장래 문제를 진지하게 상담했을 뿐만 아니라, 말년에 클라우디우스를 차기 황제 후보감으로 고려했을 정도였을 정도로 능력과 인품을 크게 인정했다.

대개의 황족, 아우구스투스의 측근 귀족들이 클라우디우스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티베리우스처럼 인간적으로만 대했다면, 황실 안에서도 소수의 인물들은 클라우디우스를 사랑하고 아꼈다. 친형 게르마니쿠스와 사촌형 소 드루수스, 외종조부이자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그들인데, 세 사람은 클라우디우스를 따뜻하게 대하고, 아꼈다. 따라서 제위에 오른 뒤,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세 사람을 그리워 했고, 이들의 인품을 칭송했다.

먼저 친형 게르마니쿠스는 본래부터 타고난 인격자로 유명한 사람답게, 가족애가 대단한 만큼 클라우디우스를 감싸고 끔찍할 정도로 아꼈다. 그는 바로 아래의 여동생(클라우디우스의 누나) 리빌라와 달리, 진심으로 클라우디우스를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는데, 단순히 형 노릇만 하지 않고 아버지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이는 바로 아래의 리빌라와 많이 다른 점이었다. 리빌라는 커갈수록 자신에게 짐이 되는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대놓고 무시하고, 자신의 어머니, 할머니 이상으로 공개석상에서 동생을 폄하하는 발언을 내뱉었다. 허나 게르마니쿠스는 다른 귀족아이들이나 동맹국 왕자들이 친동생을 무시하거나 괴롭힐 때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지켜줬고, 놀이 친구가 많이 없는 동생의 놀이 친구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군복무 중 로마를 방문해 잠시 머물 때에도 클라우디우스를 챙겼고, 결혼 후 분가한 상황에서도 본가에 들리면 늘 클라우디우스를 데리고 함께 여가생활을 보냈다. 이런 까닭에 클라우디우스는 형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사촌형이자 매형이 되는 소 드루수스 역시 훌륭한 인격자인 만큼이나, 게르마니쿠스처럼 황실 내 다른 식구나 귀족들이 클라우디우스를 비하할 때 이를 막아줬다. 그는 제왕교육을 로마에서 받아, 전선에 나가 군복무를 하는 게르마니쿠스 대신 클라우디우스를 챙겼고, 게르마니쿠스 죽음 소식을 듣자마자 판노니아에서 로마까지 말로 달려와서, 충격에 빠진 클라우디우스를 위로하고 그와 함께 게르마니쿠스 관을 마중하는 등 형, 매형, 아버지 역할을 다했다.

이런 다정다감한 모습은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편집적으로 자신의 혈육을 아꼈던 그는 누나의 친손자이자 자신의 혈육인 클라우디우스를 황실 내 또래 남성 황족 만큼이나 상당히 신경 썼다.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차갑고 가부장적인 모습과 달리 어떻게 해서던지, 클라우디우스가 로마 상류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자리잡도록 신경 쓰고 고민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앞에서 클라우디우스를 욕보이거나, 그를 경멸하는 것은 곧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대한 불경으로 간주. 반역죄로 큰 처벌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를 숨기고 싶어하고 멸시한 아내와 달리, 클라우디우스를 훌륭한 황족이자 자신의 친족으로 자리잡도록 훈련시켰다.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들과 전갈에서 언급했듯이, 티베리우스와 함께 자신의 몇 안 되는 혈육 클라우디우스의 미래에 대해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진심으로 클라우디우스를 걱정했고, 그를 사랑했다. 하여 아우구스투스는 바쁜 공무 와중에도, 자신의 외종손이며 양손자인 클라우디우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그의 미래를 상당히 신경썼다. 그렇지만 이런 그의 태도는 클라우디우스의 친할머니인 리비아에게 마음이 들지 않아, 그녀가 남편에게 반발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린 클라우디우스의 미래를 상당히 신경썼던 것으로 당대부터 유명했다. 아내에게 편지를 통해 아우구스투스는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티베리우스와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내린 결정이 힘들고 어려웠소이다.”라고 알렸는데, 이때 그는 리비아에게 “나는 걔가 형[4]처럼 공직의 단계들을 밞는 것을 반대하지 않소이다”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귀족들이 클라우디우스를 희롱하거나 멸시하는 것을 걱정하고 육체적 문제로 대중들에게 놀림거리나 비아냥거리가 되는 것에 걱정해, 대중의 조롱에 큰 심적 충격을 받을 수 있을 손자가 마르스 축제 때 황실석에서 키르쿠스 경기를 보는 것에는 끝내 반대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몸이 불편해 늘 다리를 저는 손자 클라우디우스를, 폭력적이고 학습의욕이 없는 자신의 친혈육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와 함께 어떻게든 로마 귀족, 황족으로 자리잡길 원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어린 손자가 방치되듯, 홀로 밥을 먹거나 로마귀족의 예절을 모르는 이들과 어울린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가부장권은 내세워 클라우디우스를 챙기라고 명령했다. 이때 그는 리비아에게 편지를 통해 양손자 클라우디우스가 올바른 행동을 하고 좋은 행실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아테노도루스, 술피쿠스 같은 사람들보다는 자신과 매일 같이 저녁 식사를 할 생각임을 통보하고, 주변의 반대목소리를 묵살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다른 황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와 매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조치를 취하면서, 클라우디우스를 감시하고 사소한 잘못에도 훈육이라는 이유로 혹독한 벌을 내린 가정교사들을 해고했다. 그리고 그는 손수 자신이 집무 시간 외의 시간을 보낼 때 클라우디우스를 곁에 놓고 그에게 다양한 것을 직접 지도했다.

클라우디우스와 매일 시간을 보내고, 그를 바로 옆에 두고 식사를 하고 예법을 가르친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가정교사 역할을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이 조치는 아우구스투스가 클라우디우스를 훈육해 자기혈육임에도 제왕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만은 타개하러는 목적도 있었다.

식사 자리, 연회 모임, 가족행사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어린 클라우디우스를 늘 옆에 두고 그와 대화를 나누고 어떤 말이라도 경청했다. 그러면서 그는 클라우디우스에게 로마 제국의 각종 현황을 주제로 늘 토론하면서, 몸이 불편한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의 혈육으로서 비상시 직을 이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또 일부러 귀족들이 보고를 하거나 방문할 때, 옆에 두고 이를 자연스레 참관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귀족, 원로원의 심리를 읽고 이를 이용하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익혀두게 했다. 그 결과, 클라우디우스는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 서거 후 백부 티베리우스에게 할아버지 생전 받은 황족 지위를 무시당하고, 그의 치세 끝까지 견제받는 상황 속에서도 티베리우스의 심기를 건들지 않고 세야누스, 마크로에게서 위험인물로 찍히지 않았다. 또 조카 칼리굴라가 제위에 오른 직후 집정관에 오른 뒤에도 조카를 돕는 최측근으로 활동하면서 능력을 선보일 수 있었으며, 칼리굴라가 암살된 위기 상황에서 가문의 멸문을 막고 원로원을 물갈이하고 자신을 향한 모든 반란을 조기 진압하는 능력을 선보일 수 있게 됐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과정을 통해, 누나의 외손자이자 자기의 혈육인 클라우디우스가 가진 비상함과 재능을 알게 됐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때 이런 성과에 크게 흡족해 하면서, 서한으로도 여러 번에 걸쳐 그 성과 속의 희망을 노년의 그가 느낀 기쁨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후 클라우디우스를 더 신경을 쓴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손자의 역사에 대한 흥미 등을 일찍이 알게 되자, 이를 빌미로 제왕교육 훈련으로 적극 활용해, 여러 명사를 손수 붙여줬다. 또 그를 위해 이런 부분의 명사들을 초대한 자리에 데리고 가서, 그들과 교류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클라우디우스의 사회적 명성까지 끌어 올렸다.

로마귀족들은 자녀의 정치, 법제, 사회훈련에서 역사학 교육을 중시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친구였던 당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5]를 손자 클라우디우스 스승으로 삼게 해서, 그가 하고 싶은 역사공부를 실컷 하게 해주었다. 서기 7년의 일이었는데, 17살이 된 클라우디우스를 위해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프라이토리아니 장교 수브리우스 플라부스를 붙여줬고, 리비우스에게 친히 부탁을 청해 그를 황궁으로 불러 자신의 혈육 클라우디우스를 지도해달라고 했다. 스토아 철학자 아테노도루스 역시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친히 붙여준 스승이었다. 아테노도루스는 소년 클라우디우스의 연설, 발성 등을 세부적으로 지도했는데, 그 성과는 아우구스투스조차 놀랄 정도로 훌륭했다. 어느 정도로 만족감을 줬는지, 아우구스투스는 아내와 측근, 친구, 티베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 내 손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연설이 명확하고 훌륭했다며 큰 만족감을 표하며, 자신의 손자가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놀랍지 않다고 극찬을 했다.

여기에는 아우구스투스가 후원하여, 손자 클라우디우스에게만은 자신조차 거론될 위험이 큰 공화정 후기 역사까지도 논하게 한 일도 포함됐다. 클라우디우스는 이런 배경으로 공화정기 로마의 내전과 정복전을 저술하고 연구했는데,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에도 할머니 리비아, 어머니 안토니아는 이런 저술이 아우구스투스가 서거한 뒤에 꼬투리 잡힐 위험이 크며, 클라우디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이자 안토니우스의 외손자라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문제가 됨을 걱정해 만류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본인과 가문의 미래를 위해 실제 저술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때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허락 아래, 키케로의 저서 등을 할아버지 집무실에서 읽는 등 몸이 불편해 공직 활동의 제약이 있는 한계 속에서도 경험을 쌓았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이 결정과 스승 선정은, 클라우디우스 본인과 당대, 후대인 모두에게 평가받길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되고 통치하는 동안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극찬을 받았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는 그에게 가문의 지원을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해주며, 클라우디우스가 원한다면 역사학 외의 다른 학문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고 응원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할아버지의 이런 지원과 격려 속에서, 여러 사람과 교류하고 일찍이 역사가로 명성을 쌓을 수 있게 된다. 이는 그가 성년식 이후 법률, 지리학, 의학 등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진 뿌리가 됐다. 이런 연유로 즉위 전까지 클라우디우스는 본인 이름으로 출판도 하는 전문 역사가로도 명망을 얻었다. 이렇게 어릴 적으로 학문 뿐만 아니라 사회경험도 풍부하게 쌓았던 터인지라, 가문의 수장으로서 활동할 때도, 짖궃고 까탈스러운 면모도 있었던 칼리굴라와도 무척 잘지냈으며 더 나아가 국정 운영에도 도움이 많이되었다.

이런 조치 외에도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를 아끼고 챙겼던 것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손자를 수치로 여기며 비난하는 리비아에게 편지를 통해 “그 아이가 진지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때면 매우 훌륭한 기품을 보여준다”고 칭찬했다. 또 그는 가족행사에 참석해 클라우디우스의 연설을 맨 앞에서 듣고 그 기쁨을 가감없이 표출했다. 그는 "식사자리에서 자신에게 엉뚱한 말만 하는 줄 알았던 (양)손자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그렇게 잘할 줄 몰랐다"면서, 리비아와 귀족들에게 "내 손자가 오늘 나에게 아주 큰 기쁨을 준다"고 말했고, 그의 목소리와 웅변술이 뛰어남을 칭찬하고 이를 측근 귀족들에게 전달해 그들이 클라우디우스를 좋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평가처럼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가 커갈수록 웅변 실력이 뛰어나고, 육체와 달리 정신력이 대단함을 무척 높게 평가했다. 특히 그가 주목하면서 칭찬한 것은 클라우디우스가 인격적으로 온화하고 예의바르면서도, 자기 바램처럼 용의주도하게 언행을 선보인 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몸이 불편한 클라우디우스에게 황제 보좌 사제, 복점관 외에는 군과 관련된 경력이나 뚜렷한 공직, 명예를 수여해주지는 않았다. 이는 로마 사회에서 황실 남성들과 상류층 남성들에게 군사적 업무 수행은 명예로운 경력을 걷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지만, 클라우디우스는 몸이 불편했기 때문에 형과 달리 힘든 군복무를 할 수 없었던 현실을 반영한 결정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가 정치쪽으로 나가고 싶어했음에도, 비군사적인 관직인 복점관 업무나 자신의 곁에서 제사를 돕는 사제 외에는 그가 원하던 군업무를 끝까지 못 맡게 했다. 다만, 그는 비공식적으로는 재무관, 안찰관, 법무관의 비군사적 업무를 체득하게끔 훈련시켰다.

서기 6년 6월, 연장자인 큰아버지, , 사촌형이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인 율리우스 가문에 일찌감치 입양될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그 역시 본인 가문에 넣고자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리비아, 티베리우스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들을 무수공산으로 내주는 것 때문에 반대할 것이 분명했고, 아우구스투스 역시 이 부분을 무시하지 못해, 현실이 되지 못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의 친혈육인 그를 티베리우스가 직접 그 수장 자리를 넘겨 주는 형태로 잇게 했다. 이 조치는 아우구스투스가 고도의 정치적, 사회적 판단 끝에 내린 묘수였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로마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코그노멘을 드루수스에서 네로로 바꾸는데, 아그노멘인 게르마니쿠스 역시 유지해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로 이름을 바꾼다.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의 결혼으로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율리우스 가문에 단단히 묶이기는 했지만, 그 자체로 중요한 명문가였던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주도권을 본인의 법적 보호를 받는 혈육 클라우디우스가 쥐게 해, 그를 보호할 기반을 만든다. 이는 서기 14년 티베리우스가 즉위하고, 재위 초에 클라우디우스가 아우구스투스 생전 받은 모든 특권을 사실상 제한받을 때, 그가 명문가의 수장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이자, 티베리우스가 그를 함부로 숙청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진다.

서기 4년 이후,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보호 아래, 본격적으로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백부 티베리우스에게 이탈리아 내 기사계급들이 목소리를 낼 때마다 이들의 의견을 듣고 귀족들과 황제에게 그 의견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맡게 됐다. 그러다가 아우구스투스가 서기 14년 죽고, 티베리우스가 즉위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장에 당시 23세였던 클라우디우스를 직접 지명하거나, 그에게 유언으로나마 특권이나 관직도 하사하지 않았다. 대신 클라우디우스에게 자신의 친혈육으로서 유산으로 8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남겨줬고, 그를 본인의 손자로 명시해 그 지위와 명예를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황족으로 보장해줬다. 클라우디우스는 유언장을 통해, 요절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포함하여 상속 5순위자로 명시됐다. 그의 앞에 있는 황족은 친형 게르마니쿠스와 게르마니쿠스, 대 아그리피나 부부의 자녀들 뿐이었고, 소 드루수스는 클라우디우스 다음이었다. 따라서 이는 수십 년이 지난 뒤, 음모를 논하기 좋아한 호사가들에게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른 뒤에 조작하지 않았냐는 의심을 받았고, 현대에도 일부 학자들은 호사가들의 주장을 배척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우스에게 아우구스투스는 분명하게 본인의 손자이자 상속자라고 규정해, 공적 생활을 할 때 본인의 후광을 남겼다.

서기 14년, 티베리우스가 즉위하고 이 유언장이 공개된 일은 클라우디우스가 큰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 견제를 받는 이유가 됐다. 티베리우스가 즉위하자, 클라우디우스는 친삼촌에게 “저에게 공직을 줄 수 없으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거절 당하고 어쩔 수 없이 조용히 살게 된 이유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에서 소 드루수스보다 먼저 언급된 이유 등이 있었다. 이 사건 당시, 23세였던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황제를 보좌한 사제를 했고, 복점관으로 있었던 일 등을 배경으로 공적 생활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이는 진심이었는데 처음 그 소리를 들은 티베리우스는 생전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공직 대신 조카에게 콘술 휘장을 줬다. 그러자 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진짜 콘술 자리를 달라고 재촉했다. 이에 참다 못한 티베리우스는 “내가 너에게 주는 금화 40닢은 사투르날리아 축제와 시길라리아 축제 동안 장난감이나 사라고 주는거다.”고 차갑게 대꾸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큰아버지의 의중을 이해하고, 정치적 경력을 쌓으려는 꿈을 접었다. 여기에는 형 게르마니쿠스와 사촌형 소 드루수스가 연이어 요절하고, 그 틈바구니 속에서 세야누스와 같은 이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에 그는 약간의 제위 계승 가능성이 있음에도 언제라도 궁중음모에 엮일 수 있는 로마를 떠나, 교외의 저택과 캄파니아 별장 사이를 오가며 남들의 이목에서 벗어난 삶을 보냈다. 대신 그는 아우구스투스 생전처럼 원로원, 기사계급 사람들이 티베리우스에게 건의할 내용을 선별해, 이를 전달하고, 티베리우스의 의중을 파악해 그들에게 황제의 뜻을 알리는 황족 역할에만 최선을 다했다. 이는 양쪽 모두에게 평가가 좋았다. 그러나 큰아버지 티베리우스 시대에도 아우구스투스 생전 때처럼 티베리우스의 반대로 군과 관련된 공직 경험이나 공적 명예를 받지 못했다. 도리어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 요절 이후부터는 클라우디우스와 그 어머니 소 안토니아의 지위, 특권을 박탈하지 않을 뿐 거의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이목에서 벗어난 삶에 더 집중하는데, 이 과정에서 첫 아내가 불륜 후 출산해 낳은 딸을 아내와 처가 식구들이 일방적으로 클라우디아로 지으면서, 사회적으로 그 체통이 떨어지는 굴욕까지 경험한다. 따라서 이때에 제작된 초상 중에는 스트레스로 살이 빠진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이 굴욕 당시, 그와 어머니 소 안토니아는 이 문제로 귀족 사회에서 망신을 크게 당했다. 이들은 이 굴욕에도 명예를 위해 재판장까지 출석했고, 클라우디우스가 클라우디아라는 딸은 내 아이가 아니라는 인지 소동까지 벌이면서 재차 굴욕을 경험한다. 그 결과, 이혼 후 재혼과 명예회복 과정에서 클라우디우스는 술과 도박에 탐닉한다는 뜬소문에 시달리게 됐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세야누스의 음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6] 신체적 결함 때문에 권력계승 구도에서 배제된 것에는 장점도 있었다. 그는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황실 내의 음모에서 안전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 드루수스, 율리아의 자손들, 게르마니쿠스의 자손들이 유배와 처형, 의문사를 당할 때, 아우구스투스 혈육 중 성인이 된 남성 황족임에도 클라우디우스는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생전, 클라우디우스는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명문가의 수장이 되었고,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이미 로마사, 에트루리아사, 카르타고사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또한 골동품 수집가이자 골동품 감정사로도 명성이 자자해 많은 유명인사들이 그를 먼저 찾아왔다.[7] 여기에 더해 그는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형 게르마니쿠스의 후광으로 젊은 시절부터 이탈리아 내 평민들에게도 의외로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정계에서 활동하지 않았음에도 대중들의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카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즉위한 이후, 그의 첫 조치 아래 어머니 소 안토니아, 조카들인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 및 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함께 아우구스투스 생전 조치와 유언장 아래 보장된 황족의 모든 것을 정식 회복했다. 그러면서 조카의 도움으로 그토록 원하던 공직 경험도 정식으로 경험하게 됐다.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그토록 원했던 집정관(콘술)을 잠시나마 경험했으며, 2달간 함께 한 동료 집정관은 친조카이자 황제인 가이우스였다. 종종 조카를 대신해 황숙 자격으로 황제가 주최하는 행사를 주관해 성공리에 개최했다. 물론 이때 조카에게 식사자리에서 종종 농담거리로 놀림을 당하기도 했지만,[8] 클라우디우스는 처음 콘술이 되었을 때 4년 뒤 다시 콘술 자리를 약속받았다. 또 공식석상에서 대중들에게 존경을 받아서 “황제의 삼촌이시여 만수무강하십시오”라는 말도 들으며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으로 찬사를 받았다.

이미지와 달리 가이우스는 짦은 재위 기간 내내 황숙 대우를 훌륭히 해줬고, 그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9] 즉위 직후부터 가이우스는 삼촌 클라우디우스에게 억울하게 죽은 친형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동상 건립을 계획하고 이 사업을 진행시키도록 해줬다. 이때 공사 기일을 느리게 추진했다고 해서 누명이 씌워져 잠깐 위기의 순간이 오기도 했는데, 가이우스는 이런 누명을 쿨하게 무시하고 삼촌을 끝까지 밀어줬다. 또한 그는 두 여동생과 달리 삼촌의 재산을 뺏거나 금고형, 유배형 같은 처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삼촌의 생애 두 번째 집정관직을 약속해준 것 외에도 자신의 황실 내 입지를 강화시키고 율리우스 가문과 본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위상을 모두 높이기 위해 클라우디우스의 세번째 결혼을 직접 중매까지 해줬고, 갈리아 원정과 같은 굵직굵직한 대형 프로젝트에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황족이자 황제의 최측근으로 참가케하면서 적극적으로 후원해줬다.

1.2. 즉위

41년 1월 24일 근위대가 조카 칼리굴라를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클라우디우스도 암살 현장인 로마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전에 있었는데,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지시라고 한 까닭에 헤르마이움이라는 방에 들어가 있었다. 이때의 일에 관하여 더 정확히 기술한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조카인 가이우스 황제와 함께 극장에 있다가 헤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카시우스 카이레아의 명령에 따라 클라우디우스는 영문도 모르고 황궁에 들어갔고, 이때 소란이 벌어졌다. 야사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이 칼리굴라의 숙부이기에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겁에 질려 커튼 뒤에 숨었다. 그렇지만 디오는 클라우디우스는 야사와 달리 커튼 뒤에 숨지 않고, 황궁 안에서 가장 어둡고 안전한 곳에 피신했다고 한다. 칼리굴라와 카이소니아, 율리아 드루실라가 모두 살해된 뒤 카이레아의 지시로 클라우디우스를 죽이려는 움직임이 시작했다. 당시 암살을 결행한 카이레아 등은 아우구스투스 일가를 완전히 끝장낼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클라우디우스를 찾지 못했고, 때마침 병사 중 일부가 황궁 안에서 무언가 돈이 될 물건을 찾다가, 어두운 방 안에서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발견했다. 이들은 또 다른 근위대장 클레멘스의 부하들이었고, 칼리굴라의 죽음에 분개한 터라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남자혈육 클라우디우스를 찾자마자 정중히 예의를 갖추고 그를 로마 근교의 근위대 병영으로 모셨다.

반면 야사에 따르면, 병사들은 무슨 위기감인지 몰라도, 근위대 병영으로 가기 전 클라우디우스를 인질 겸 협상카드 삼기로 결심하고 그를 로마 근교의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로 끌고 갔다고 한다. 이게 오늘날 대중매체에서 통상적으로 활용되는 즉위 스토리인데, 이 야사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커튼 뒤로 숨어 있다가 황제감을 찾기 위한 군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숨어 있을 당시 발이 커튼에 보여서 걸리게 되었는데,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 병사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싹싹 빌다가 뒤늦게 자신을 모시러 온 것을 알고, 근위대와 함께 자택에서 나가서 그들에 의해 강제로 황제에 추대된다.[10]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의 칼리굴라의 암살 직후 상황을 살펴보면 원로원 의원들이 원로원 건물이 아니라 유피테르 신전으로 모였는데 그 이유는 로마의 공화정 복구를 위해서 모였고 때문에 (즉위는 하지 않았지만) 로마 제정의 시초였던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온 원로원 건물을 쓰지 않았던 이유다.[11] 그 외에도 (공화정 지지자였던) 집정관이 원로원의 지원하에 포룸 로마눔과 유피테르 신전을 군대로 장악한 상황이었다.[12]

호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칼리굴라 암살에는 직접적인 암살가담자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 사비누스 외에도 해방노예 칼리스투스,[13] 원로원 내에서 영향력 있는 여러 명의 원로원 인사들, 두 명의 근위대장을 움직일 수 있는 아레키누스 클레멘스,[14] 황제의 동선을 관리하던 황실 관리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주장과 달리 근위대장 클레멘스는 도리어 칼리굴라 암살 직후부터 죽은 황제를 위한 복수와 클라우디우스 생존 여부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었다. 당장 혼란한 황궁에서 안전한 곳을 찾아 숨은 클라우디우스를 구출한 이들도 이 사람 휘하의 병사들이었다. 따라서 수에토니우스와 100년 뒤 로마 길거리에서 정설처럼 떠 돌던 야사처럼 칼리굴라를 살해한 이들은 계획에 따라 결점 많고 병약한 육체를 가졌던 황제의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황궁으로 불러 가둔 뒤, 칼리굴라 일가의 학살을 마무리한 직후 그에게 황제 자리를 줬다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극적인 연출이 가미된 이야기일 뿐이다.

조카 칼리굴라가 암살되어 율리우스 가문의 직계가 끊기게 된 이후,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남자 혈육임에도 율리우스 가문 사람이 아닌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인 까닭에 카이사르 가문 남성 중 첫 클라우디우스 사람으로 처음 즉위했다. 이는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가 정식으로 친양자로 입적될 때,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 외손자인 클라우디우스가 친형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티베리우스 밑으로 입양되지 못한 속사정이 컸다. 더욱이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로마인과 아우구스투스, 원로원 모두 '율리우스 씨족 중 카이사르 가문 = 클라우디우스 씨족 중 네로 가문'을 똑같은 가문으로 생각하고 모두 카이사르 가문으로 불러 로마인들에게 클라우디우스는 단순한 입양이나 멸문한 가문을 이은 승계자가 아닌 비상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프린켑스 세나투스, 임페라토르 직 승계였다. 당장, 클라우디우스와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로 티베리우스의 동생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이라는 설도 있었다. 이는 호사가, 풍자작가들의 주장 외에도, 여러 가지로 모든 로마인들에게 정설로 인식됐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이 아이의 친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가 어쩔 수 없이 보내고도 끝내 다시 본인 집으로 데려왔고, 드루수스의 29년 생애 내내 그를 진심으로 친아들로 여겼기 때문이다.

어쨌든, 클라우디우스는 50살의 나이에 로마 제국의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에 대해 디오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 드루수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는 조카 가이우스 생전에 집정관을 역임한 경력 외에는 어떤 정치적 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제국의 권력을 손에 넣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그는 클라우디우스가 느닷없이 제위에 오른 것 같아도, 실은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황제로서 필요한 다양한 능력을 교육받고 이를 키워 놀라움을 안겼다고 서술했다. 실제로도 클라우디우스는 내전 직전의 위기 상황 속에서, 양할아버지가 일찍이 그를 판단한 것처럼 상당히 치밀하고 날카로운 행보를 보여준다. 당시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공화정 복귀 세력이 공화정 복귀를 시도했고, 집정관이 수도 경비대를 이용해 로마 주요 지역을 점령했다. 황제 개인국고와 카이사르 가문의 전재산은 원로원과 집정관에게 모두 압류됐고, 황실에 고용된 게르만족 경비대 병사들은 근위대 병사들과 무리를 지어 칼리굴라의 원수를 갚겠다고 일부 원로원 의원과 카이레아 부하들의 가족들을 붙잡아 죽였다. 민중들도 분개해, 저마다 무리를 지어 원로원이 죄없는 젊은 황제를 살해했다며, 원로원을 다 죽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 안에서는 카이사르 이전의 공화정 체제 복구를 하자는 주장부터 아예 술라 이전의 공화정으로 복귀하자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법무관 임기를 갓 끝낸 베스파시아누스와 같은 이들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억울하게 시해됐다. 당장 복수부터 의결하라"며 공화정 체제 복구를 시도한 원로원 의원들과 말싸움을 벌였고 그 사이 클라우디우스 생존 소식과 클레멘스를 중심으로 한 칼리굴라 부하들과 근위대 9대 대대 거의 대부분이 암살범을 따른 20명 남짓의 반역자들을 체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렇게 되니 원로원은 밤 늦게까지 이 문제로 서로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를 비롯한 황제파 인사들 대다수는 원로원 회의가 산회하자마자 클라우디우스 곁으로 달려갔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클라우디우스는 패닉상태에서 근위대 병영으로 이동했는데, 병영 도착 이후 차분하고 냉정한 행동을 보이며 근위대 병사들을 설득했다. 야사에 따르면 벌벌 떨었다고 하나, 도리어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하면서 죽은 칼리굴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탄 클레멘스와 근위대 대대장들을 위로했다. 이어 그는 근위대 병영 안에 들어온 직후, 황제로 공포됐다.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훌륭한 목소리로 근위대 병사들을 설득했다. 이 사건에 대해 디오는 클라우디우스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병사들이 죽은 가이우스(칼리굴라)를 위한 복수를 외치면서 자신들이 죽더라도 무조건 카이사르 가문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한명씩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그러자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의 마음을 확실히 잡기 위해 병사 개인 당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보너스를 하사했다. 이렇게 그는 근위대에게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을 받아냈다. 이후 그는 근위대에게 명을 내려 국법에 따라 칼리굴라와 그 일가의 암살을 주도한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 등을 인도받았다. 이들은 클라우디우스가 근위대에게 충성을 서약받은 직후 사실상 구금된 상태였기 때문에 황제를 암살한 죄로 체포돼 즉시 처형됐는데, 이중 추가 심문이 예정된 율리우스 루푸스는 자살했다. 동시에 그는 로마 민중들을 대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의 명예와 공훈을 행사 등을 통해 알리며 군중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 뒤, 근위대를 이용해 로마와 이탈리아 내 모든 정보를 보고받았다고 한다. 이 결과, 클라우디우스는 없다시피한 정치활동 경력에도 불구하고, 조카 암살 24시간도 지나기 전에 로마 내의 혼란을 잠재웠다. 또 공화정 세력의 위협은 억누르면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업적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제정 우호 여론을 퍼트린다.

이때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길 기다렸다는 듯, 계획대로 신속히 움직였다. 원로원 회의는 평소와 달리 유피테르 신전에서 열렸는데, 이들의 회의 내내 주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의 카이사르 가문 남자는 절대 안 된다.”였고 과거 공화정 시대로의 회귀 여론이 들끓었다. 아울러 당시 집정관이 수도 경비대를 이용해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일대와 유피테르 신전을 장악한 뒤 원로원과 보조를 맞췄다. 이런 까닭에 실제로 공화정 복귀 분위기가 현실화되는 듯 했다. 그러나 원로원의 바램과 달리 칼리굴라의 뒤를 잇게 된 클라우디우스는 반나절도 안 된 시간에 이미 근위대를 장악한 뒤 황제 암살범과 이에 동조한 근위대 내 대대장 등을 모조리 반역죄로 체포해 처형시킨 상황이었다. 또 원로원은 압도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카이사르 가문 사람들은 안 되지만, 우리들이 내세울 사람이 없지 않느냐”는 주제를 놓고 이야기가 벌어진 탓에 상황파악 역시 제때 하지 못했다.

따라서 수도 경비대를 장악한 원로원은 이런 논의 끝에 자신들의 권위를 지킬 요량으로 클라우디우스와 근위대에게 사절을 보내 원로원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이탈리아 내의 유일한 최정예 부대인 근위대는 애초부터 원로원과 칼리굴라 암살을 비밀리에 주도한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들 스스로 정치적으로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을 버릴 이유가 없었다. 또 그들이 옹립한 클라우디우스가 개인당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보너스를 준 까닭에,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수도 경비대를 동원해 항복하라고 요구하는 원로원은 그들에게 아니꼬운 존재였다. 그래서 근위대는 원로원의 서한이 공개된 직후 오히려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지지를 더욱 확실히 했다. 여기에 더해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파 인사들과 클라우디우스의 개인 고문들은 원로원 내 논쟁에 참여해 싸우기 보다는 새 황제 밑으로 하나 둘 모여 들었다. 이들은 클라우디우스에게 원로원의 경고성 서한을 무시할 것을 조언하면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근위대를 움직여 명백한 반역행위를 펼치는 원로원 전체를 끝장내야 한다고 강하게 권고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의 무력수단으로 앞세워질 것이 분명해진 수도 경비대는 원로원을 내팽개친 뒤, 근위대와 마찬가지로 클라우디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선언했다.

사실 원로원은 몸이 불편하고, 경력도 짧은 집정관 경력 외에는 전무한 클라우디우스를 얕잡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고, 사람 자체도 온화하고 성품이 나쁘지 않아서 젊은 시절부터 원로원의 생각 이상으로 로마와 이탈리아 민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또 그는 아버지와 형의 후광으로 제국의 주력인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일대의 군단병들에게 인기가 상당히 많던 황족이었다. 따라서 이미 로마의 모든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근위대를 장악해 통제하던 클라우디우스는 상술했듯 고문들의 권고에 따라 무장한 근위대를 대동해 원로원으로 찾아갔다. 이때 그는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복귀에 따르겠다는 의사표시 대신 존중하겠다고 언급했으며, 이 사태를 갑작스럽고 있어서는 안 될 반역행위로 재규정하면서 자신이 암살범 카이레아 등을 인도받아 국법에 따라 암살집단 전체를 즉시 처형한 사실을 공표했다. 또 일부 불충한 세력에게 황제가 죽음을 맞았다고 언급하면서 억울하게 죽은 조카가 원로원에게 '기록말살형'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부탁하는 연설을 했다. 이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정중함이 묻어난 경고성 부탁이었는데, 이때 클라우디우스의 예상치 못한 칼리굴라 암살 직후 상황 정리를 두 눈으로 본 원로원은 무력감 속에 근위대를 등에 업고 있는 클라우디우스의 의견을 따라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 암살 이후 전면적인 사면과 정보통제를 시작하고, 원로원을 설득해 조카 칼리굴라에 대한 기록말살형을 막은 직후, 급히 가매장된 조카 시신을 수습해 정식 장례 절차 후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했다. 동시에 근위대와의 합의 아래 칼리굴라 암살에 가담했던 주범들을 처형시켜 또 다른 암살을 방지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황제 가문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을 시작하는데 우선 자신의 할머니이자 지금까지 즉위한 3명의 황제의 직계가 되는 리비아에게 신성한 영예를 수여했고 아버지 대 드루수스와 어머니 소 안토니아를 기리는 행사를 매년 로마 키르쿠스 경기장에서 벌였다. 그 외에도 형이자 칼리굴라의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의 희곡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등 율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 가문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을 벌여서 공화정 복구 여론을 잠식시키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양할아버지이자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세웠다. 또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대리석 아치(개선문으로 추정)를 만드는 등 친 황제 여론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디오의 지적처럼 원로원 귀족들은 여전히 클라우디우스의 목숨과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명줄을 끊어 놓을 생각을 품어, 클라우디우스를 어떻게든 없애고 싶어 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연설 이후 30일 동안 원로원 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조카 칼리굴라가 4년 내내 암살 미수 음모를 겪다가 피살됐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본인과 면담을 요청한 이들을 아무나 만나주지 않았고, 설령 면담을 하더라도 완전 무장한 근위대 병사들을 곁에 두고 남녀노소 모두 몸을 수색케한 뒤에야 겨우 만나줬다고 디오는 말한다. 아울러 클라우디우스의 지시로 베스파시아누스가 근위대와 게르만 경호대를 설득해, 칼리굴라 암살에 가담한 생존자와 원로원 인사 몇명을 축출해 죽인 뒤 피의 복수는 일단 멈췄다고 한다.

1.3. 내정 개혁과 관료제 구축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건강치 못한 몸상태 탓에 일찌감치 제위계승후보에서 밀려났지만, 아우구스투스의 후원 아래 역사, 법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레 자신만의 통치철학과 정국 분석의 식견을 쌓을 수 있었다. 또한 어린 나이부터 명문가 수장이 되면서 가문 내 수많은 클리엔테스들을 후원하고 대규모의 행사들을 개최해왔다. 따라서 즉위 당시 뜻밖의 강인한 성품과 연설 솜씨, 정치적 식견으로 자신을 얕잡아보던 원로원을 놀라게 만들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붙여준 스승 리비우스 밑에서 로마사를 연구하면서, 로마가 어떻게 성장하고 정치, 사회 제도들이 구축되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여기에 더해 어린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곁에 클라우디우스를 배석시켜 식사시간과 여가시간마다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교육시켜 로마와 속주 정세 파악이나 현안 이해 및 분석도 예리했다.[15] 그는 즉위 당시부터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통치철학과 정책들을 자신의 길라잡이로 삼고,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처럼 이전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와 달리 원로원에게 유화적이고 존중적인 태도를 취했고, 진심으로 원로원에게 협력을 구했다. 클라우디우스는 평소에는 원로원 평의석에 앉아 원로원 의원들을 존중했고 특별한 정책을 입안할 때만 집정관 사이에 앉거나 호민관 좌석에 앉았다. 그는 원로원의 모든 모임에 빠짐없이 출석해 자신의 부족함을 알리면서 먼저 도움을 구했다. 또한 원로원에게 먼저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고 요청을 받았을 때만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그 역시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황제로서 원로원 중심의 회귀를 바라지 않았고, 해묵은 특권으로 평가된 원로원 특권들을 줄여나갔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시대는 내내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원로원과 분위기가 여러모로 비슷했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로서 로마가 항구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로마 내 이탈리아와 속주간의 분리보다는 통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46~47년 68년간 사장된 감찰관 직을 부활시켜 내전 승리 후 아우구스투스처럼 원로원 구성을 인위적으로 교체시켰다. 클라우디우스는 과거 카이사르에게 시민권을 받고 율리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로 편입된 갈리아 코마타 지도자들의 후손들을 대거 원로원 의원에 임명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게 협력하던 갈리아계 로마인들이 이탈리아 본국인과 비슷한 위치에 서도록 만들었다. 타키투스가 수록한 연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강력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정복당한 사람들을 도외시하는 정책 때문에 라케다이몬(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결국 쇠퇴한 것이 증명되지 않았던가? 그와 달리 우리 창건자 로물루스는 창칼을 맞대었던 민족을 바로 그 날 당일에 로마인으로 귀화시켰을 정도로 현명했다'면서 원로원 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갈리아인의 원로원 입성을 추진했다고 한다.[16] 동시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해 불만을 품거나 야심을 품은 원로원 내 귀족 세력의 반발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원로원의 군대 통제권과 원로원 임명 속주 권한들을 약화시켰으며, 행정의 효율성과 프린켑스 권한 강화를 목적으로 원로원 관할 국고를 황제 휘하의 재무관 2명이 담당하도록 바꿨다.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 개혁을 진행하면서 여러 부문에서 거둬들인 세입들을 피스쿠스(황제 국고)로 돌리면서, 곡물 공급, 수로 관리, 홍수 조절, 이탈리아 내 가도 및 운하, 항구 관리권까지 황제 관할로 바꿨다. 동시에 자신의 유능한 해방노예 3인방을 황제 비서로 활용했다. 이 결정에 관해, 당대 클라우디우스를 비판하는 정적들이나 후대 역사가들은 클라우디우스가 집안 해방노예들에게 좌지우지됐다고 비하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는 주인으로서 위엄이 있었고, 그들을 제대로 통제해 국정을 돌봤다. 이는 피해방인 3인방도 비슷해, 그들은 클라우디우스를 진심으로 따르고 충성을 다했다.

서신비서가 된 사람은, 나르키수스라는 그리스인 해방노예였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나르키수스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총명했고 꼼꼼했으며,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자기 목숨도 내놓을 정도로 충성심과 의리가 대단하면서도 쓴소리도 아끼지 않던 클라우디우스의 그림자 같은 이였다. 그래서 즉위 직후, 클라우디우스는 이런 나르키수스의 재능을 높게 쓰기 위해, 그에게 황제의 도장을 찍어 제국 전역에 모든 법과 정책들을 전달하도록 했다. 이때 그는 효율적인 연락체계 구축과 빠른 정보 교환을 위해, 군용으로만 쓰던 우편망을 민간에 개방했다.

각 속주들이 황제에게 보낸 탄원서 심의는 칼리스투스에게 맡겼다. 악명 높은 근위대장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의 외조부로 유명한, 이 그리스인 해방노예는 황제의 형 게르마니쿠스와 그의 살아남은 아들 칼리굴라의 복심과 같은 인사였는데,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 암살 이후에도 그를 높게 썼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 법무부 장관과 같은 역할을 맡으며, 황제가 읽어야 할 방대한 탄원서가 요건에 맞는지 검토해 각하 처리 업무를 처리해 이를 보고했다.

재무부 장관에는 어머니 소 안토니아 생전부터 헌신해온 팔라스를 임명했다. 황궁과 황실 식구들의 사무, 국고 관리 사무와 함께 속주 내 모든 국고와 황제 대리인 통제를 담당하게 될 중책인 만큼, 팔라스는 클라우디우스가 가장 믿을 만한 인사였고 팔라스의 충성심은 대단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팔라스라는 해방 후 이름을 가지고 있는 팔라스는 그리스 아카이아 왕족의 후손으로 나라가 망해 노예로 팔려온 이의 후예였다.

클라우디우스의 부모인 드루수스, 안토니아 부부 생전부터 클라우디우스와 칼리굴라를 도운 이 그리스인 해방노예는, 대 드루수스 생전부터 아주 어린 나이에 동생과 함께 충성을 다했고 주인 부부의 인품을 대단히 존경했다. 그래서 그는 나르키수스와 함께 몸이 불편한 클라우디우스에게 목숨도 내놓을 정도로 그 충성심이 대단했다. 팔라스는 31~38세 사이 즈음의 나이에 해방됐다. 그는 세야누스 일당의 감시 속에서 소 안토니아의 친필서한을 품에 안고 로마를 빠져나와 카프레아이 섬까지 들어가 목숨을 걸고 티베리우스를 접견해, 여주인의 친필서한과 뜻을 전했다. 이때 그는 마음이 완전히 마모된 황제에게 권신 세야누스의 음모를 알리고 황제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살아생전 세야누스를 경계했던 일화를 근거로 거론해 시큰둥하던 노황제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그를 크게 칭찬하면서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후일의 칼리굴라)를 자기 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고, 조카 클라우디우스를 감시하는 세야누스 일당을 떨어뜨리라고 명했다. 이후 세야누스가 몰락하는데, 세야누스가 교수형에 처해진 직후 소 안토니아는 로마로 돌아온 팔라스에게 자유를 주면서, 손수 자기 아버지의 이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주고 팔라스의 동생 펠릭스와 그 가족들에게도 해방노예의 지위를 내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계속 고마움을 표현하며, 팔라스에게는 자신의 외삼촌 아우구스투스에게 분할받은 황제령 아이깁투스의 노른자 땅 일부까지 개인영지로 내려줬다. 이런 배경 때문에 팔라스는 4억 세스테르티우스라는 재산을 보유한 거부가 됐다. 그럼에도 그는 여주인 소 안토니아와 그녀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및 그 직계손들을 은인으로 여겨, 자기 목숨도 걸 정도로 충성심이 대단했다.

이렇게 인사조치를 취한 뒤, 그는 ‘아미시 카이사리스(카이사르의 친구들)’이라고 불리는 추밀원을 확대시켜 내각을 개편해 자신이 효과적으로 행정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동시에 그는 황제와 내각을 도울 행정부 내 부서(scrina)를 세분화시키고 특별국들을 신설했다. 따라서 이 조치들은 예전보다 프린켑스의 권한을 강화시켰고, 자연스레 관료제가 확대, 정착되는데 기여했다. 따라서 로마의 행정 효율성을 크게 증가됐다.

1.4. 사회, 경제 정책과 오스티아 항구 건설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롤모델인 아우구스투스처럼 이탈리아 내 서민들의 삶을 안정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는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10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막대한 자금을 빌려줘 이들에게 막대한 빚을 지게 만드는 고리대를 엄격히 금지시키고 강하게 처벌했다. 또한 고리대금업자들이 저지르는 악랄한 행위들을 근절시켰으며, 식량에 붙던 전매세를 폐지해 세금 부담으로 인한 지역 사회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클라우디우스는 조카 칼리굴라 때 진행된 수로, 상하수도 사업을 이어받아 이를 제국 전역으로 확대시켰으며, 칼리굴라가 원로원에게 빼앗은 제국 조폐국을 다시 원로원에게 되돌려주지 않고 황제가 완전히 장악했다. 이 조치는 원로원에게는 실망스러운 조치였지만, 칼리굴라 시대 때 황제가 장악하게 된 조폐국 권한은 제국의 화폐 인플레이션을 예방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공공 개혁의 일환으로 수로, 상하수도, 운하 외에도 제국 속주 간의 무역과 공업 발전에 힘을 쏟았으며, 그 일환으로 그의 업적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오스티아 항구 건설을 시작했다. 클라우디우스가 벌인 초대형 토목공사 사업인 ‘오스티아 인공 항구 건설’은 그동안 모래톱에 막혀 로마 항구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오스티아를 제국 수도의 외항으로 만들어 로마 내 곡물 운송과 가격 조절 문제를 일순간에 해결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로마 외항으로 건설된 신도시 오스티아의 건설은 캄파니아 지방에서 육로로 220km나 이동해야 할 곡물과 무역품들이 저렴한 비용에 로마 시민들에게 제공하도록 도와줬다. 하지만 오스티아 건설은 소비도시 로마와 오스티아의 등장으로 손해를 입게 된 선주들의 불만을 촉발시켰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손해를 입은 선주들을 대상으로 파선 보험, 세금 면제, 6년간 곡물 운송을 담당한 사람들을 위한 로마 시민권 부여 등으로 보상해줬다.

1.5. 빵과 서커스

클라우디우스는 양할아버지인 외종조부 아우구스투스, 조카 칼리굴라처럼 '빵과 서커스'의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클라우디우스는 조카 칼리굴라처럼 게임 관람을 좋아했다. 이런 클라우디우스의 성향은 로마 제국의 다양한 국가축제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민중들과 섞여 함께 호흡하면서 국가축제로 열린 소년체전과 전차 경기를 즐겼다. 이런 모습은 형 게르마니쿠스, 사촌형이자 매형 소 드루수스와 비슷했는데, 정작 그가 열광한 것은 검투경기와 모의해전이었다.

즉위 직후,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리는 경기를 매년 개최하면서, 검투사들의 기예를 다양한 방법으로 연출해 그들의 쇼맨쉽을 극대화하고 여러 검투사가 제 기량을 뽐내게 무대를 꾸몄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선수들도 있어 즉위 직후부터 실력이 뛰어나고 재능 있는 검투사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용감함을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머리가 비상하고 영리한 사람인 만큼 그는 단순히 즐기지만 않고, 이를 시기적절하게 잘 활용했다. 그는 축제와 여러 경기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았다. 집권 직후, 충성하사금을 지급하면서 아버지 대 드루수스를 기리는 경기를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에서 열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와 그 양자 대 드루수스에 대한 향수가 강한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와 병졸들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심을 이끌어냈고, 황궁과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며 칼리굴라 원수를 갚겠다고 눈에 불을 켠 게르만 호위대들의 지지까지 이끌어냈다. 조카 칼리굴라 암살 이후 정국 속에서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카가 살아생전 즐긴 전차경주 경기를 꾸며 민중들에게 조카에 대한 좋은 기억을 이끌어냈다. 이어 암살 배후인 원로원을 견제할 요량으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드루수스를 찬사하는 행사를 열면서, 로마 건국 800주년 기념 행사를 크게 열었다. 이때 그는 조부 아우구스투스가 110년마다 기간을 계산해 정치적 목적에서 연 800주년 행사를 바로 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모두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강조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가 푸시네 호수에 모의해전을 열어 로마인들을 초대했을 때,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그리움에 젖은 이탈리아 내 로마인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이는 오스티아 항구 건설, 브리타니아 개선식 등에서도 계속 활용됐다.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오스티아 항구 건설 이후 열린 모의해전에서 범고래를 이용해 새롭고 독창적인 모의 탐험 행사까지 열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의 쇼맨쉽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해, 배 위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함께 탄 프라이토리아니 장병들에게 그물을 던지게 하고 창으로 상대편 배를 공격하면서 브리타니아에서 잡아온 범고래들을 활용해 사투를 펼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이 외에도 그는 극장, 경기장 개보수를 끊임없이 하고, 전차 경주 중 발생하는 트랙 문제 등 안전 점검에도 최선을 다했다. 화재로 소실된 폼페이우스 극장이 재건축되고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 내 원로원 관람석 확충 및 편의시설 개선, 전차 트랙을 벗어난 전차로 벌어지는 사고 예방 펜스 설치 등도 그의 명령으로 모두 집행됐다.

1.6. 영토 확장과 브리타니아 원정

클라우디우스의 내치와 경제 정책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17]의 연장선이었지만 그의 대외 국방정책은 이들과 비슷하면서도 과거 카이사르가 사용한 ‘총사령관이 직접 군대를 통솔해 충성을 받고 휘하 군단병들에게 정복과 보상을 통해 군단의 충성을 받는 형식’에 가까웠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카이사르의 방식을 답습한 이유는 자신의 개인적 야망보다는 즉위 직후 혼란을 틈타 일부 원로원 의원들을 포섭해 군대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킨 달마티아 총독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 반란 사건, 46년 소요로 발생한 트라키아 문제, 칼리굴라의 최대 실책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살해로 시작된 마우레타니아 반란이 복합적으로 연이어 발생한 이유가 더 컸다.

먼저 반란을 일으킨 달마티아 총독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는 원로원 일부 중진급 의원들과 내통해 클라우디우스를 얕보고 군을 일으켰는데, 일찍부터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이래로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던 게르마니아, 일리리쿰, 달마티아 일대의 군단병들과 지휘자들은 충성심을 버리지 않고 불참했다. 여기에 더해 불참했던 군단 지휘자들이 미신을 이용해 반란에 호응한 이들까지 돌아서게 만들면서 반란은 며칠만에 싱겁게 진압됐다. 클라우디우스 즉위 후, 트라키아 왕국은 잦은 소요 사건으로 마케도니아, 그리스 일대의 속주들의 평화까지 위협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의외로 공세적으로 대처해 트라키아는 로마에 황제 속주로 합병됐다. 반면 마우레타니아 반란의 경우, 2년간 치열한 전투 끝에 로마는 이 일대를 안정화시키고 왕국을 두 개로 쪼개 황제 속주로 개편했다.

한편 브리타니아의 불온한 상황에 대한 로마의 개입 필요성은 이미 가이우스 황제 때부터 제기되었었고, 실제로 가이우스는 40년에 브리타니아 원정을 결정하고 원정군을 갈리아 해안에 집결시키기까지 했으나 여러가지 사정 상 실제 원정을 하지는 못하고 돌아왔었다. 43년,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 내 로마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을 보호하고 브리타니아 내 광물, 목재, 가축 등을 획득하며 노예를 확보할 목적,[18] 쿠노벨리누스와 그 아들 카라타쿠스 세력의 팽창으로 인해 위협을 느낀 친로마파 브리타니아인들의 개입 요청,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일대를 위협하던 드루이드교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에게 5만 명의 로마군 지휘를 맡겨 대대적인 브리타니아 전쟁을 시작했다. 이때 로마군은 켄트 상륙 후 2일 간 전투를 치러 승리를 거두고 템스 강으로 진격했다. 오늘날 런던 일대에서 행군을 멈춘 원정군은 그곳에서 자신들과 합류할 총사령관 클라우디우스를 기다렸다. 처음으로 군사 행동에 나선 클라우디우스는 먼저 도착해 주둔 중인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휘하 로마군에 합류해 브리타니아 원정군을 이끌고 드루이드교의 보호자를 자처한 카라타쿠스를 신속히 공격했다. 클라우디우스가 합류한 로마군은 그동안 친로마 세력과 로마 제국 내 갈리아, 게르마니아 일대를 위협하던 카라타쿠스의 본거지 카물로도눔(현 콜체스터)을 장악한 뒤, 이곳에서 11명의 브리타니아인 왕들의 항복을 받았다.

브리타니아인들에게 항복을 받아낸 클라우디우스에게 원로원은 투표를 거쳐 황제의 개선식을 통과시키고, “브리타니아를 정복한 자”라는 뜻을 가진 ‘브리타니쿠스(Britannicus)’라는 존칭을 결정해 클라우디우스와 그 가족들이 대대로 사용하도록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에 로마군을 상주시켜 브리타니아 일대 정복 및 속주 건설 사업을 지시내린 뒤 로마로 귀환해 44년 개선식을 거행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에 보조군에게 제대시 로마 시민권과 속주민과의 통혼권을 수여하는 것이 정착화 또는 시작되었다.

1.7. 메살리나와 소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우스는 황제, 행정가로서의 능력은 탁월했지만 사생활에선 여성편력이 심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매우 기백이 없었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어머니, 누나 등 같은 집안 식구들에겐 무시당했던 탓인지 해방 노예들에게 도움받으며 지내던 습성을 황제가 되고서도 버릴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황제 업무를 함에 있어서는 해방 노예들에게 휘둘리지 않았지만 사생활에 있어서는 피해방인 3인방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또한 클라우디우스는 당대 로마인들조차 "진짜 박복한 운명이다"라고 평할 정도로 아내 복이 없었다. 그는 네 번의 결혼 생활 동안 상당한 공처가였기에 그의 아내들이었던 플라우티아, 아일리아, 발레리아 메살리나, 소 아그리피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네 번의 결혼 모두 그는 아내에게 무시받거나 권력 장악을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

사실 클라우디우스는 어린 시절 외종조부이자 보호자였던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에 따라,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딸로 대 율리아(아우구스투스의 딸)의 외손녀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약혼했다. 하지만 레피두스 부부는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에게 불충한 행동을 저질렀고, 소 율리아와 아우구스투스 사이가 최악이 되면서 약혼이 파기된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외손녀 소 율리아를 진짜 미워해, 자신의 피가 흐르는 클라우디우스가 불충하고 믿을 수 없는 레피두스, 소 율리아의 딸과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을 표명하면서 약혼을 파기시켰다.

이후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남동생의 딸(혹은 손녀) 리비아 메둘리나와 약혼했다. 하지만 새 신부가 결혼식 당일 갑자기 사망해, 식도 못 올리고 또 다시 결혼이 미뤄졌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자신과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모두에게 충성을 다한 기원전 2년 집정관이자 장군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의 딸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를 양손자 클라우디우스의 신부로 간택해, 결혼시켰다.

클라우디우스의 신부가 된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오랜 친구인 귀부인 우르굴리나의 손녀로, 그 친정은 그녀의 아버지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장군 외에는 막장 인물들이 가득했다. 그녀의 할머니 우르굴리나는 어릴 적부터 친구인 리비아 드루실라를 믿고 법을 무시한 무법자로 유명했다. 그래서 후일 그녀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부자의 최측근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죄를 묻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다가 기어이 고소해 법정에 세웠는데, 리비아 드루실라가 소꼽친구인 우르굴리나를 구하기 위해 막대한 보석금을 지불해 풀려난다. 이 사건은 후일 리비아, 티베리우스 모자 사이가 극도로 악화된 원인이 됐다.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의 남동생으로 클라우디우스의 처남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역시 문제 많기로 유명했다. 그는 24년 법무관을 지냈는데, 첫 아내와 사별 후 맞이한 후처 아프로니아를 창문 밖으로 집어 던져 죽인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기소 이후, 여러 증거를 토대로 자고 있던 아내를 집어 던졌다는 누명과 사별한 첫 아내 친정을 저주하는 주술을 부린다는 혐의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꼼꼼한 조사 덕에 면해 무죄로 혐의를 벗었다. 하지만 재판 과정 내내 화제를 모아, 무죄판결 후 그는 귀족으로의 권위가 크게 훼손했다며 동료들의 조롱거리가 됐다. 그 이유는 그가 법정에서 무죄를 호소하며 내민 증거와 증언들 때문인데, 부부싸움의 원인이 아내가 마법과 주술에 취해 그에게 이상한 물약을 먹여 벌어진 것이 밝혀지고 흥분한 아내가 주먹을 휘두르자 이를 방어하던 중 그녀를 세게 밀어 정당방위가 인정됨에도 로마귀족으로서의 체면이 크게 깎였다. 그래서 재판이 끝났을 때, 그의 할머니 우르굴리나는 단검을 손자에게 보내 자살하는 것이 어떠냐고 이를 질타했다.

이런 이유로 클라우디우스와 첫 아내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의 결혼 생활은 늘 잡음이 일었는데, 더 큰 문제는 아내의 태도였다. 첫 아내 플라우티아는 남편 클라우디우스가 소아마비로 다리 한쪽이 불편하고, 자신감이 빈약한 것을 약점삼아 은연 중 무시했고, 늘 냉담했다. 다행히 첫 결혼에서 장남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를 얻었는데, 이 아이는 어머니의 방치 속에 배를 공중으로 던져 먹다가 기도가 막혀 요절했다. 그래서 24년 초, 부부 관계가 최악이 됐다. 처남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재판까지 터지면서 상황은 최악이 됐다. 클라우디우스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상술한 실바누스 재판이 열리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손이자 티베리우스의 친조카 클라우디우스 이름이 계속 언급된 것은 클라우디우스, 소 안토니아를 열받게 했다.[19] 그래서 부부관계, 고부관계 모두 최악이 됐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여러 남성과 바람을 피운 것이 들통나면서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는다.

이 시기, 그녀는 둘째를 임신 중이었는데, 간통 중 잉태한 아이인 것이 밝혀지자 사람 좋기로 유명한 클라우디우스는 큰 충격을 받는다. 클라우디우스는 아내를 끝내 용서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24년, 간통과 살인 방조 혐의로 강제이혼당했다. 이혼 5개월 뒤, 그녀는 딸을 출산하는데, 해방노예 보테르와 간통 중이었고 누가 친부인지 모르는 아이에게 당당히 클라우디아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렇게 되자 소식을 들은 소 안토니아와 클라우디우스는 격분해, 집안 노예들을 시켜 인지를 받기 위해 온 클라우디아에 대한 인지를 거부하고, 갓 태어난 딸을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 집 현관에 눕혀 놓으라고 명령했다. 즉, 친자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노예로 키우든지 죽이든지 하라고 통보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첫 결혼이 파탄나자, 클라우디우스는 얼마 안 가 두번째 결혼을 올려, 아일리아 파이티나를 아내를 맞이한다. 서기 4년 집정관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카투스의 딸 아일리아 파이티나는 정숙하고 미인으로 이름났고, 클라우디우스가 결혼생활 중 맞이한 아내 중 가장 상냥했다. 이 결혼에서 클라우디우스는 본인과 황실에게 인정받은 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를 얻었다. 그러나 이 결혼생활은 서기 31년 그녀의 집안이 대를 잇기 위해 입양한 양동생 세야누스 때문에 강제이혼으로 파탄난다. 클라우디우스, 아일리아 파이티나 부부는 세야누스와 친분이 없고, 교류하지 않았지만 세야누스가 아일리아 파이티나와 법적으로 남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진노를 샀다. 설상가상 조카 칼리굴라가 제위에 오른 뒤, 젊은 황제가 숙모와 세야누스의 관계를 좋게 여기지 않자 서기 38년 강제로 갈라서게 됐다.

이렇게 본인의 생각과 달리 클라우디우스는 두 번의 정식 결혼을 모두 실패하는데, 48살의 나이에 조카 칼리굴라의 도움[20]으로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이때 맞이한 아내가 세 번째 아내였던 메살리나였다. 15세에 불과한 메살리나가 18살이던 때 두 사람은 칼리굴라의 직접 중매 아래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예쁘지 않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세번째 아내가 된 메살리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이 결혼에서 그는 차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얻었다.

하지만 황후가 된 메살리나의 사치와 욕심으로 발생한 각종 고발과 부정행위들은 클라우디우스의 명성을 크게 실추시켰다. 그리고 세 번째 결혼생활은 그의 의도와 다르게 황후 메살리나의 간통과 중혼으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면서 완전히 파탄나고 말았다. 메살리나는 자신이 황실의 적통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손 브리타니쿠스를 낳은 것을 무척 자랑으로 여겼고, 황후에 오른 직후부터 여러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이때 그녀는 브리타니아 개선식에서 자신이 개선장군인양 설치며, 국가적 기념일을 제대로 망쳤다. 따라서 이 일로 그녀는 군인들과 민중들에게 많은 욕을 먹었다. 또 그녀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불법을 해서라도 얻고자 한 사람이라서, 남편의 이름으로 고소장을 제출해 죄없는 부자들을 고발하고 그 재산을 모두 가로챘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의 명성은 크게 흠집이 가는데, 그 희생자 중에는 칼리굴라의 막내여동생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막내딸 율리아 리빌라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메살리나는 자신의 여러 연인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공모해 48년 오스티아로 시찰나간 클라우디우스를 폐위시키기로 음모를 꾸몄고, 실리우스와 ‘진짜’ 결혼식을 올렸다. 초대형 중혼 스캔들은 클라우디우스도 눈치를 못 챌 정도로 은밀히 진행됐지만 유능한 충신 팔라스가 동료인 나르키수스, 칼리스투스와 함께 신속히 클라우디우스에게 사태를 보고하면서 궁정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때 실리우스는 간통, 중혼 및 국가 반역죄로 체포돼 공모자들과 함께 즉시 처형되었다. 하지만 아내를 진심으로 연민하던 클라우디우스는 주동자인 메살리나 처벌에는 뜸을 들여 계속 미뤘다. 따라서 나르키수스는 결단력이 부족한 클라우디우스를 대신해 메살리나가 머물던 루쿨루스 별장에 사람을 보내 황제의 명이라 밝히고 그녀를 죽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이렇게 세 번째 결혼이 파탄난 이후, 측근 팔라스의 강권 등에 따라 네 번째 결혼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혼상대를 고르는데 해방노예 심복 3인에게 각각 후보를 제출하게 하여 그중에서 선택하였다. 당연히 그 3인은 각자의 권세가 달린 중대사였고, 각자 생각하는 구도도 달라 이는 권모술수가 판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르키수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브리타니쿠스가 고작 5살짜리 아이에 불과하고, 브리타니쿠스가 평소 이복누나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매형이자 외삼촌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를 잘 따르고, 이들 부부도 그를 매우 아끼는 점을 생각해 아일리아 파이티나와의 재결합을 제안했다. 세야누스 사건 때문에 강제로 갈라섰다는 점, 아일리아 파이티나가 매우 정숙하고 상냥해 브리타니쿠스에게 인격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점도 고려돼, 클라우디우스는 이 주장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때 팔라스가 끼어 들었다. 팔라스는 자신의 옛 주인 소 안토니아와 칼리굴라의 삶을 망치고,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목숨을 빼앗은 세야누스와 어떻게든 이어진, 세야누스의 양누이 아일리아 파울리나가 황궁에 돌아오는 것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클라우디우스에게 이를 상기하면서, 황실의 안정과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황제의 조카이자 율리우스 가문의 유일한 여성인 소 아그리피나와의 결합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그는 클라우디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며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이나 어쩔 수 없는 속사정으로 성씨가 클라우디우스 네로인 것을 거론해, 정치적 정당성까지 설파했다. 이렇게 되자 클라우디우스는 팔라스의 강권과 설득을 받아들여, 조카 율리아 아그리피나를 재혼 상대자로 결정내린다.

사실 클라우디우스가 조카 아그리피나와 결혼하기로 한 건 정치적인 이유가 컸다. 친형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종손임에도 다른 남자 친척들과 달리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되지 못하고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사람으로 남아야만 했다. 하지만 당대 로마인들은 예전부터 두 가문을 하나의 가문이라고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나마 율리우스 가문이 제위를 계승해왔던 것을 고려하면, 클라우디우스가 ‘문서상’ 율리우스 가문이 아닌 것은 정치적으로 약점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즉위 직후부터 무리해서라도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임을 부각하고, 아버지 대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일거라는 풍자시까지 다시 들춰내 강조해야만 했다.[21] 이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이며, 게르마니쿠스의 딸로 생존해있던 율리우스 가문 사람인 친조카와의 결혼은 상당한 무리수였음에도 그는 조카와의 재혼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근친혼이 흔했던 로마에서도 삼촌과 조카의 결혼은 상당한 무리수였고, 당시 사회 전체 분위기도 “율리우스 가문=클라우디우스 가문인데 이건 법적으로도 너무 근친혼이잖아”라면서 반대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이때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오랜 측근인 원로원의 중진 루키우스 비텔리우스[22]가 앞장서 소 아그리피나와 클라우디우스의 결혼을 옹호하는 쇼[23]를 해가면서까지 반발을 무마해야 했다. 어쨌든 결국 클라우디우스는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하게 된다.
메살리나와의 관계도 그렇고, 그의 계후가 된 아그리피나와의 관계도 그렇고 클라우디우스는 아내들을 사랑했지만 그녀들에게 무시당하고 끌려다녔다. 그 결과, 그의 뜻과 달리 친아들 브리타니쿠스는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 소 아그리피나와 세네카의 갈등에 휘말려 명을 달리하게 된다.

1.8. 사망

즉위할 당시 반백발이었고 회색 눈동자를 가졌으며 키는 컸지만 한쪽 발을 절었다고 한다. 또 식탐이 심했고 버섯을 아주 좋아했는데, 결국 독버섯에 중독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아그리피나가 아들 네로를 옹립하기 위해 유명한 독살 전문가인 로쿠스타에게 독약을 제조시켜 클라우디우스가 좋아하는 버섯에 독을 넣어 먹였으나, 바로 죽지 않자 역시 아그리피나에게 포섭된 황실 주치의 가이우스 스테르티니우스 크세노폰이 구토를 유도한다는 명목으로 독이 묻은 깃털을 목에 넣어 독을 다시 주입해 살해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그는 죽기 4년 전 옥타비아의 남편 아헤노바르부스(네로)를 양자로 삼은 상태였다. 하지만 정황상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남편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24]를 후계자 후보로 고려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브리타니쿠스가 제위에 오르기를 계획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과 브리타니쿠스를 무시하고(클라우디우스가 네로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한 건 아니었으므로, 친아들 브리타니쿠스가 유력한 후계자이다) 네로를 추대한 건 폭력과 살인이 동반되지 않았을 뿐이지 반쯤 쿠데타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아그리피나와 그녀를 따르던 네로 옹립파들은 오늘날까지도 클라우디우스 독살설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다.[25]

클라우디우스 급사 당시 로마의 여론은 재미없고 변덕이 심하다고 생각해 클라우디우스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는데,[26] 젊고 재기 발랄한 네로의 첫 등장은 원로원과 민중들에게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따라서 유언장에서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가 공동 제위계승권자로 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 아그리피나와 세네카,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 등이 브리타니쿠스가 어리다는 명분을 내세워 휴지조각처럼 무시했다. 이때 원로원도 세네카가 적어준 첫 연설문을 읽어 나간 네로를 지지하면서, 네로만을 황제로 승인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중들도 네로가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워낙 매력 넘치는 젊은이였기에 네로에게 호의적이었다. 때문에 독살설까지 도는데도 이 비합법적인 제위 계승 문제는 별 말 없이 넘어갔다.

1.8.1. 사망 이후 복권과 재평가

클라우디우스 급사 직후, 그 양자이자 사위인 네로는 그를 즉시 신격화했다. 그러나 이런 네로 정권의 조치와 달리, 실권을 쥔 소 아그리피나, 세네카, 부루스의 행동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이는 친정 이후 네로도 비슷해, 그는 세네카와 함께 노골적으로 클라우디우스를 황제 부적격자 취급했다.

그 시작은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가 죽기 직전, 사람을 보내 충직한 해방노예 출신 장관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나르키수스를 살해한 사건이었는데, 이 행동과 동시에 진행된 또 다른 조치는 세네카와 아그리피나가 부루스와 함께 클라우디우스의 집무실으로 사람을 보내 황제가 남기거나, 작성 중인 모든 서신을 불태운 것이었다. 이는 로마에서 분명한 불법 행위였다. 허나 원로원은 당시 네로 정권이 자신들 앞에서 모든 조치를 아우구스투스 시대처럼 되돌려주겠다는 당근을 받은 터라, 또 네로 취임연설문 발표 후 "있을지 모를 반역자 명단도 없애주겠다"는 의미를 보여준 조치로 해석돼 일단 넘어간다. 하지만 나이든 티베리우스 이후 젊은 칼리굴라의 등장을 환영하던 원로원과 로마인들이 곧 염증을 느낀 것처럼, 클라우디우스를 계승한 네로를 환영하던 원로원과 시민들은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된다.[27]

네로 집권 직후부터 아그리피나, 세네카, 부루스는 클라우디우스 흠집내기에 열중한다. 다만, 어쨌든 법적으로 부부관계였고 혈연으론 숙부와 조카 사이이었으므로 소 아그리피나 생전에 클라우디우스는 무시받진 않았다. 하지만 브리타니쿠스, 소 아그리피나가 연이어 네로 손에 제거된 직후부터, 또 클라우디아 옥타비아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네로에게 살해된 이후부터, 클라우디우스는 네로 시대 내내 완전히 무시받고 조롱받는 무능한 황제로 구박받게 된다. 이를 주도한 인사는 네로와 세네카였다.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에게 공주와의 불륜, 고리대금업 등을 이유로 여러 번 숙청대상이 됐던 세네카[28]는 로마귀족과 민중들 앞에서 풍자극을 발표했다. 하여 이 풍자극 상연이 그 조롱의 상징이자 그 시작이었는데, 그 작품의 제목은 <아포콜로신토시스>로 잘 알려진, <신격 클라우디우스를 호박으로 만들어보기>라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를 가리켜 신격화되긴 했어도, 침을 흘리고 다리를 저는 머저리이며, 스스로 똥을 누다가 똥을 싸고, "나는 똥을 눴습니다"라고 기뻐했다가 하늘에서 제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조롱받고 호박이 되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즉, 황제 스승이자 정권의 수상 자리에 있던 인사가 대놓고 풍자극이라고 하면서 클라우디우스의 장애를 조롱한 건데,[29] 세네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클라우디우스의 사적 대화체 서한 내용을 비하하고, 그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정책을 이어받아 취한 훌륭한 정책들도 선대 황제들의 안 좋은 이미지와 묶어 사회 암덩어리로 취급했다. 또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을 희화화했다.

네로는 클라우디우스가 대중들 앞에서 조롱받는 가운데에서, 스승이 발표한 풍자극을 극찬하며 낄낄댔고 이후에도 매일같이 양부 클라우디우스의 삶과 죽음을 희화화했다. 이때 그가 한 행동은 현대인의 입장에서도 패륜의 전형이었는데, 가족애와 를 강조한데다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일 수록 보수적이고 가족애와 효심이 강한 것이 추앙받는 로마 사회에서 네로의 행동은 기겁할 만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네로는 세네카 등과 함께 습관처럼 클라우디우스를 비꼬았고, 대중들이나 원로원 의원들이 클라우디우스를 언급할 때면 그들을 조롱하면서 “(클라우디우스가) 세상에서 바보 노릇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머문다', '잠깐동안 쉰다' 등을 말하고 싶을 때나 연설 중 분위기가 지루할 때면 사람들 앞에서 클라우디우스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면서 웃음을 유발하거나 ‘계속 머문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 'morari'의 첫 음절을 일부러 길게 늘이면서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던 클라우디우스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었다. 또 그는 양부의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고, “늙은 바보”, “멍청하고 잔인한 노인네”라고 불렀다. 이 외에도 그는 클라우디우스의 말투를 흉내냈고, 버섯을 가리켜 신격화된 클라우디우스를 비꼬는 명칭으로 바꿔 불렀다. 여기에 더해 네로는 세네카 등이 클라우디우스를 비하할 때 맞장구쳤는데, 한술 더 떠 버섯을 "신들의 음식"이라고 칭하고 낄낄댔다.

그렇지만 네로의 각종 만행 중 결정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의 친황제파 인사, 장군들의 분노를 산 건 네로가 대대적인 '새로운 가문의 탄생'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면서, 그들 입장에서 보면 아우구스투스 일가보다 깜냥도 안 되는 네로의 본가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을 새로운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문으로 묶어 신격화한 조치였다. 굳이 비유하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리고 박힌 돌 자체를 전면부정해버린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세네카의 클라우디우스 조롱 풍자시는 그 프로젝트의 서막이었는데, 역사가 레빅에 따르면 황금궁전은 이 프로젝트의 상징이었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분석이 맞다면, 원로원과 귀족들이, 또 플라비우스 왕조의 세 황제가 네로의 모든 흔적을 왜 없애버리고 대대적으로 아우구스투스 일가와 클라우디우스 복권에 힘을 쏟았는지 대충 눈치를 챌 수 있다. 어쨌든 네로는 어머니를 제 손으로 죽인 직후부터 클라우디우스를 언급하지 않았고, 자신의 친가족 구성도 개편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브리타니쿠스를 세트로 묶어 자신과 새로운 황실 가문과 구분하면서, 그들을 밀실정치로 일관하는 프린켑스들로 취급해버린다. 당연한 말인데, 네로는 이때 신격 클라우디우스 신전 건설을 사실상 흐지부지로 만들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연이어 발표한다.

때문에 네로가 몰락한 뒤, 집권한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는 자신들의 정당성 강화와, 로마인들이 중요하게 여긴 '은인과 그 가족에게 해야 할 클리엔테스 의무'를 보여줄 요량으로 클라우디우스와 그 직계 후계자 브리타니쿠스를 화려하게 부활시킨다. 이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칼리굴라 아래에서 안찰관, 법무관에 연이어 추천받아 원로원 의원이 되고, 클라우디우스의 도움으로 군단장, 총독, 집정관이 된 뒤 원로원 귀족으로 편입된 고마움,[30]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인들이 아우구스투스 직계 일가에게 갖고 있는 향수, 게르마니쿠스 신화를 고려해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베스파시아누스는 본처와 사별한 후,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 소(小) 안토니아의 해방노예인 카이니스와 사실혼 관계가 되어[31]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집안과 사적인 관계도 깊게 맺고 있었던지라, 정치적 손익계산과는 별개로도 베스파시아누스에게는 클라우디우스와 그 일가에 대한 감정이 각별할 이유가 여럿 있었다. 어쨌든 플라비우스 왕조 이후, 클라우디우스는 완전히 신격화됐는데, 플라비우스 왕조의 티투스 황제는 자신의 죽마고우 브리타니쿠스를 완전히 신원복구시키면서 그 아버지인 클라우디우스의 인품과 업적을 대대적으로 되살리고 네로 때 폐기된 클라우디우스 생일을 기념일으로 부활시킨다.[32][33] 따라서 플라비우스 왕조 이후부터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생일과 그의 브리타니아 정복 기념일은 최소 4세기 후반까지 로마군과 민간의 8월 축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외에도 로마 황제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업적을 기린 기념비 옆에 의도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 기념비 등을 설치하고 홍보해, 베스파시아누스 이래 로마 황제의 정통성은 클라우디우스와 그 후계자 브리타니쿠스에게서 나옴을 강조했다.

[1] 게르마니아 전쟁을 지휘하던 대 드루수스는 20대 중반의 나이부터 갈리아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총독으로 있었다. 이때 그의 아내인 소 안토니아는 황족이자 상류층 부인임에도 남편 임지로 거처를 옮겨 첫째 게르마니쿠스 외의 4명의 자녀를 모두 루그두눔 내 총독 관저에서 낳고 손수 키웠다.[2] 제정 이후 로마인들은 리비아 드루실라의 이런 이중적 면모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히 존경했다. 특히, 그녀가 가진 보수적이고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전통적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에는 동시대 정적들 뿐 아니라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와 같이 제정을 혐오한 후대 로마인조차 큰 존경심을 표했다. 리비아 드루실라는 자신의 야망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온갖 모략을 꾸미는 한편으로 불륜과 같은 남녀 문제, 가정 문제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극도로 엄격한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로마인이 이상적으로 여긴 현모양처의 전형, 즉 영악하면서도 부도덕하지 않은 귀부인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3] 소 율리아 역시 리빌라만 예뻐한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격렬한 증오심을 드러내곤 했다. 아우구스투스와 소 율리아의 관계는 당연히 최악으로 치달았는데, 이는 나중에 아우구스투스가 외손녀 소 율리아에게 간통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고, 그 남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까지 반역죄로 처형한 일련의 사건으로 확대된다.[4]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5] 아우구스투스와는 비슷한 나이대였으며 서로 우정을 쌓은 친구였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황제의 친구임에도 정치쪽과는 담을 쌓고, 흔히 <로마사> 또는 <로마 건국사>로 알려져 있는 142장의 <아브 우르베 콘디타 리브리(Ab Urbe Condita Libri)> 저술에 몰두했다.[6] 세야누스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신의 딸을 클라우디우스의 아들(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배를 던져 먹다가 질식사로 사망하면서 세야누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7] 이 무렵, 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 위대한 영웅 대 드루수스의 아들이자 영웅 게르마니쿠스의 유일한 친동생이었고, 역사가로서도 상당한 뛰어난데다 명문가의 수장이었다. 따라서 수많은 클리엔테스들의 방문은 당연했고 유명인사들이 그를 찾아오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8] 조카 칼리굴라가 작은아버지 클라우디우스를 식사자리에서 놀리긴 했지만, 네로세네카처럼 클라우디우스를 희화화해서 조리돌림식으로 인격이나 명성에 흠집을 내지는 않았다.[9]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일찌감치 제위계승서열에서 밀려난 친삼촌이 자신에게 기본적으로 정치적 부담거리가 되거나, 자신에게 위협이 안 될거라는 것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와 피 한 방울 안 섞인 입장이었고, 자신의 아들인 소 드루수스가 클라우디우스보다도 상속서열이 뒤쳐지는 등 취약한 정통성 때문에 클라우디우스를 눌러둬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게르마니쿠스로 내려오는 계승권을 이어받았고, 부모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물려받은 칼리굴라는 정통성에 아무 문제가 없었기에 클라우디우스에게 밀릴 것이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클라우디우스 본인의 성품이나 성격도 워낙 온화해서 칼리굴라 입장에서는 자신의 몇 없는 친혈육인 작은아버지를 굳이 견제할 이유도 없었다. 황위를 넘볼 가능성이 없는 친척은 조력자, 조언자로서 유용했기 때문이다.[10] 흥미롭게도 조카(당무종)에게 무시받다가 조카가 급사하고 준명군 축에 끼는 인물로 당선종이 있다. 당선종의 아들 당의종도 심각한 막장은 아니었으나 예술에 빠져 정무에 소홀했고 요절했다는 점에서 네로와 비슷하다.[11]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칼리굴라편 60장[12]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클라우디우스편 11장[13] 그리스인 노예로 칼리굴라에게 자유를 얻었다. 이 사람의 외손자가 네로 시대와 네 황제의 해 당시 악명을 떨친 근위대장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이다. 그는 검투사와 칼리스투스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지만, 반란 당시 “사실은 내가 칼리굴라 사생아다.”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뻔한 거짓말이라서 부하들에게 거짓선동을 한다는 이유로 호응도 못 얻고 죽임을 당했다.[14] 카이레아, 루푸스 이전의 근위대장으로 마크로 숙청 당시 이를 담당한 인사 중 한명이다. 암살 가담에 대한 세간의 추측과 달리, 이 사람은 암살자들이 클라우디우스를 인질처럼 데리고 오자, 9개 대대를 결집시켜 그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친황실파와 함께 전임자를 위한 복수를 외치며 원로원을 제압했다. 그는 41년 근위대 병영 안에서 카이레아와 루푸스가 자신들의 암살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자, 칼리굴라 일가 암살에 동참한 20명 남짓의 암살자들을 황제암살 혐의로 체포하고 클라우디우스 지지를 외친 뒤 로마 내 혼란을 잠재웠다고 한다.[15] 이런 이유로 백부 티베리우스는 승하 직전 가이우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대신 클라우디우스에게 먼저 제위를 맡기고, 이후 율리우스 가의 두 혈육이 공동으로 다음을 맡게 할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고 타키투스는 기록했다.[16] Transformations of Romanness의 9p, 원문: 'the Emperor Claudius, in Tacitus' version of his speech about admitting Gauls to the senate, says: 'What else proved fatal to Lacedaemon and Athens, in spite of their power in arms, but their policy of holding the conquered aloof as alien-born? But the sagacity of our own founder Romulus was such that several times he fought and naturalized a people in the course of the same day!'[17] 이미지와 달리 칼리굴라 시대의 내치와 경제 정책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의 방식과 유사했으며, 그가 건설한 로마 내 수도교 건설, 속주 각지에 건설한 운하 건설 등은 후임인 삼촌 클라우디우스와 비슷했다.[18] 여담으로 브리타니아 전쟁으로 가장 크게 이득을 본 인사 중 한명이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에게 믿지 못할 사람으로 평가돼 숙청될뻔한 인사이자 네로의 스승으로 유명한 세네카이다. 그는 브리타니아에서 고리대업과 노예 무역 등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다고 알려져 있다.[19] 이 재판에서 클라우디우스 이름이 계속 오르내린 것은 후일, 클라우디우스가 칼리굴라 즉위 직후 집정관이 된 이후 정적들의 먹잇감이 되어 뜬소문과 인신공격 소재로 자주 활용돼 클라우디우스와 황실 식구들을 곤혹스럽게 했다.[20] 칼리굴라는 자신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 위상과 장래를 확고히 하고자 삼촌 클라우디우스의 결혼을 직접 주선해 양친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15세의 메살리나를 신부로 간택해 결혼식을 진행시켰다.[21]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가 결혼 3개월 뒤에 아우구스투스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가 태어난 직후 사람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아버지가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이라고 믿었고, 클라우디우스 재위기간에도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22] 네로 사후 즉위한 4명의 황제 중 한명인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의 아버지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게르마니쿠스의 친구이자 최측근이었고, 피소 재판 당시 피소의 만행과 게르마니쿠스의 사망 과정을 낱낱이 폭로해 주목을 받았다. 비텔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 클라우디우스의 오랜 벗이기도 했다.[23] 제국 통치를 위해서는 사소한 윤리적 문제 정도는 눈감아줘야 한다는 것. 원로원 의원들도 중요성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눈감아주고 넘어가게 된다.[24] 공화정 후기의 종신독재관 술라의 후손으로 모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그의 할머니는 네로의 할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대 안토니아의 딸 도미티아(네로의 고모)였다.[25] 대표적인 예로는 네로때 즉결처형된 나르키수스가 있다. 그는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아그리피나를 따르던 팔라스와 달리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를 후원하고 있었는데, 아그리피나는 눈엣가시였던 나르키수스를 토목사업 자금 횡령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아울러 타키투스에 따르면 나르키수스 역시 아그리피나를 팔라스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유를 만들어 두 사람 모두를 실각시키려고 했다.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기 며칠 전 아그리피나가 통풍에 시달린 나르키수스를 요양차 지방 온천으로 파견보냈던 것도 클라우디우스 암살을 나르키수스가 저지할까봐여서라고 한다.[26] 귀족들과 달리 민중들에게 클라우디우스가 욕먹은 이유 중 하나는 검투사 경기에서 클라우디우스가 잘못 행동한 이유가 컸다. 당시 민중들은 클라우디우스가 패배한 검투사를 살리길 원했는데, 정석대로 관용을 베풀어야 할 황제가 뜬금없이 사람이 죽을 때 어떤 표정을 보이는지 궁금하다면서 검투사의 죽음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는 메살리나의 반란 이후 사람이 안좋은 쪽으로 달라졌다는 평가가 많이 있다.[27] 다만, 네로를 환영했던 원로원과 시민들의 감정은 티베리우스 사후의 칼리굴라 때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원로원이야 클라우디우스를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순한맛' 내지 '물러터진 늙은이' 정도로 보던 터라 네로 정권의 클라우디우스 폄하를 환영할 법했지만, 민중들은 말년에 검투사 경기에서 좀 삐딱해져서 그렇지 공명정대하고 성실히 업무를 다한 클라우디우스를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짠돌이, 자기 중심적인 냉혈한으로 취급하지 않았다.[28]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는 유독 세네카를 싫어했다. 칼리굴라는 세네카의 웅변실력과 재능을 견제하면서 야심 많은 세네카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각종 불법행위 등이 적발되자 진노해 평소 싫어했던 세네카에게 사형판결까지 거의 내릴 뻔 했다. 이때 세네카는 천식으로 비쩍 마른 자신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변론을 펼쳐 겨우 사형을 면했고, 칼리굴라가 41년 암살당하면서 넘어가게 됐다. 이후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에게도 미움을 받았는데, 황후 메살리나에게 황족과의 불륜을 이유로 고발됐다. 이때 그는 클라우디우스에게 진노를 사고 간통 혐의로 8년간 코르시카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 세네카는 소 아그리피나의 도움으로 겨우 유배지에서 돌아온 뒤, 힘을 키워 나갔으며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기 전에는 소 아그리피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 뒤 친구 부루스를 근위대장에 앉혔다.[29] 정작 로마사 관련 항목에서 걸핏하면 까이는 그 시오노 나나미도 "로마의 신들은 클라우디우스를 동정했을 것이고, 아우구스투스라면 클라우디우스를 단죄하지는 않고 나름 인정해 주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몇 안 되는 시오노 나나미의 제대로 된 평가다.[30] 로마에서 멸시받는 고리대금업과 세무공무원, 경매업자에 종사한 기사계급 출신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명예로운 경력 초기부터 한미한 배경으로 인해 원로원과 민회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칼리굴라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능력과 성품을 보고 원로원을 견제할 자신만의 세력으로 만들 요량으로 법무관 입후보와 당선을 도와줬다. 이러니 베스파시아누스는 당연히 칼리굴라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충성파가 되었고, 칼리굴라가 암살됐을 때 법무관 임기 막바지임에도 원로원에게 "당장 법대로 반역자들을 처벌하라"고 연설하고, 끝까지 원로원에 남아 공화정 복귀를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친황제파로 이름을 얻은 베스파시아누스는 클라우디우스 대에도 황실에 충성을 다하며 명예로운 경력을 이어나갔다.[31] 아우구스타 칭호는 받지 못했으나, 해방노예 출신이었음에도 75년 사망 전까지 사실상 황후 역할을 했다. 이 문서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던 것처럼 안토니아와 클라우디우스 집안의 해방노예들인 나르키수스, 팔라스, 칼리스투스 등이 단순한 황제 개인의 수발을 넘어 제국의 정책을 좌우했던 만큼, 카이니스 역시 베스파시아누스의 출세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32] 티투스는 브리타니쿠스와 동문수학한 베프였다. 더군다나 네로가 브리타니쿠스를 살해할 때 같은 독을 먹고 거의 죽을 뻔 했고 실제로 같이 쓰러져 의식을 잃어가며 네로의 변명과 친구의 죽음을 모두 지켜봤다. 그래서 티투스는 네로를 진짜 싫어했고, 클라우디우스와 브리타니쿠스 이야기만 나오면 울거나 침울해했다.[33] 이는 플라비우스 왕조가 자신들의 제위계승 명분과 정당성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그리고 그들의 정통성을 이은 클라우디우스와 브리타니쿠스에게서 정당성을 이었다"고 주장했고, 원로원이 여기에 쌍수를 들며 즉시 승인해준 덕이 컸다. 그리하여 플라비우스 왕조 이후부터 로마 황제들의 권력 정당성은 클라우디우스와 브리타니쿠스가 됐고, 네로는 '없는 사람' 내지 '부적격자'로 취급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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