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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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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정보
역사 학부 대학원 캠퍼스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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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혁
2.1. 1939 ~ 1980 : 설립 및 사회참여 전통수립 2.2. 1980 ~ 1996 : 진보적 종합대학발전 시기2.3. 1997 ~ 2002 : 교육개혁 우수대학으로 도약 2.4. 2003 ~ 현재 : 산학협력 활성화 및 지역거점 특성화

1. 개요

한신대학교의 역사를 소개하는 문서이다.

2. 연혁

2.1. 1939 ~ 1980 : 설립 및 사회참여 전통수립

한신대의 초기 역사는 장로회 교단의 역사, 교단의 분열과정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장로회 및 장로회 계열 주요 신학교 항목의 내용을 참고하면 좋다. 이 학교는 애초에 갈라선 이유부터가 성서비평학 수용 여부였을 정도로, 보수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의 개신교 풍토에서 진보주의 성향을 맨 처음 표방한 신학대학이었고, 1940년 대학 출발부터 진보적 학풍에서 시작되었다. 즉 한국 개신교 중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이다.

1980년 종합화 이후에도 그 성향을 계승하여, 신학과 외에도 모든 일반 학과가 전반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전반적으로란, 학생 및 총학생회 뿐 아니라 교수진부터 재단까지도 포괄하는 의미. TV나 라디오를 보면 아시겠지만, 모 교수는 진보측 패널로 거의 고정되어서 나온다. 대표적인 개신교계 진보 인사인 문익환 목사도 동문이자 교수로 재직하였다. 참고로, 배우 문성근의 아버지가 맞다. 문익환 목사 또한 신정통주의 경향을 가진 프린스턴 신학교 석사 출신이다.

2.2. 1980 ~ 1996 : 진보적 종합대학발전 시기

초기에 그려진 밑그림은 이른바 문사철(문학, 사학, 철학)을 중심으로 한 사범대학 중심의 학교를 세우려고 하였다. 현재의 한신대가 인문대 학과 위주로 구성(한신 인문학 강세의 이유) 되어 있으며 일부 학과들의 교직이수 과정이 남아 있는 이유도 이 때의 영향이다. ( 각 과들이 과자체든 과명이든 많은 변화 및 변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신은 인문학의 힘을 믿고 중시하는 풍토때문에 인문대학은 변동없이 계속 함으로 문사철 강세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사실 한신대학교에서 인문대 외의 학과들, 특히 아예 문과가 아닌 공대체대 등의 학과들은 대부분 한참 뒤에야 생긴 것이다. 1980년에 종합대학으로써 '한신대학'으로 교명을 바꾸고 1981년에 현재의 경기 캠퍼스가 개교한다. (인문학 전통은 있으나 실질적으론 공대 및 미디어광고홍보학과만 팍팍 밀어준다.)

2.3. 1997 ~ 2002 : 교육개혁 우수대학으로 도약

2.4. 2003 ~ 현재 : 산학협력 활성화 및 지역거점 특성화

교육부 주관 '2018년 대학 기본역량진단' 평가에서 "자율개선대학"으로 선정


[1] 그리고 이것이 장로교 총회에서 인정받지 못해 신학교가 정식으로 인가받지 못함에 따라 장로교 주류와 고신파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다.[2] 이것이 총신대학교이다[3] 한신대 입장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정의해서 그것을 누명이라 할 수도 있지만, 보수 신학자들의 정의는 다를 수 있고 따라서 여기에 서술된 자체를 자유주의 신학이라 칭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4] 그러나 경기노회가 김재준을 면직시키지 않았기에 결국 다음해(1953) 4월에 열린 38차 대구총회에서 총회장이 직접 면직을 선언했다.[5] 대한예수교였다고 설명하는 글도 있다.[6] 물론 기장 그들만의 총회다. 단지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생각하여 총회 회기를 잇는 것 뿐[7] 성’경'은 신적 권능에 의해 전승된 유일무이한 권위를 가진 '경전'으로서, 문자적 의미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봄[8] 성'서'는 하나님을 체험한 인간들이 생산한 역사적 전승이므로, 역사적 컨텍스트를 기반하여 그 한계를 인정하고 해석, 연구된다고 본다. 최근엔 고등비평보단 역사비평이라는 이름이 더 적합하고, 요즘은 보수교단소속 성서학자들도 상당수가 역사비평을 사용함[9] 그래서 일부에서는 개혁주의를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 나타난 경향이라고도 한다. 그 외 신학자이자 실존주의에 속하는 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10]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