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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허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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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허순오[1] 許順五 | Hur Soon-oh | |
출생 | 1920년 2월 20일 |
평안북도 구성군 | |
사망 | 2009년 11월 24일 (향년 89세)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군인 |
최종 계급 | 준장 |
학력 |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주오대학 법대 졸업 (1943) 육군사관학교 7기 (1948)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1969) |
수훈내역 | 충무무공훈장 (3회) 화랑무공훈장 (3회) 보국훈장 국선장 보국훈장 천수장 보국포장 대통령표창 (2회) 6.25사변종군기장 보통상이기장 |
약력 | 육사 7기 졸업 (1948) 8사단 21연대 군수참모 제70보병연대 연대장 (1954) 1군사령부 심리전 참모 (1960) 제12보병사단 부사단장 (1961) 대한농지개발영단 이사장 (1961) 토지개량조합연합회 회장 (1962) 육군본부 원호관리국장 (1964) 계엄사령부 구호처장 (1964) 국회 국방부부 연락장교단장 (1964) 제31보병사단 사단장 (1965) 한국전력 전무이사 (1968) 한국전기안전공사 초대 이사장 (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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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2. 생애
1920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1936년 오산학교 입학, 1943년 일본 주오대학 법대를 졸업했다.한국 전쟁 당시 영천·신녕전투에 참여하였다. 당시 김용배 대령 휘하의 21연대는 아군의 무질서한 후퇴로 인해 적의 후방에 고립되었다. 21연대는 조선인민군 3개 연대[2]를 상대로 3일간 분전했으나 탄약과 식량이 고갈되었다. 하지만 4일차 되는 날 연대보급소에 있던 허순오 군수참모가 병사 셋을 이끌고 드리쿼터에 탄약과 식량을 가득 싣고와 21연대는 극적으로 살아난다.
- [ 김용배 대령의 증언 ]
- >9윌5일 영천 북쪽 50리쯤인 자천 쪽에 배치된 아군부대가 적 무정군단의 공격을 받고 밀려났어요. 자천에서 급하게 심한 공격을 받아 어떤 연대는 후퇴명령도 없이 물러나 버렸어요. 나도 후퇴명령을 받지 못했어요. 21대의 원위치를 고수하다보니까 인접부대는 모두 후퇴했고, 적은 후방 50리의 영천까지 점령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21연대는 완전히 고립되어 적진 후방에 남게 됐어요. 할 수 없이 자천 서북쪽의 수풀 우거진 고지에 사주방어 진을 쳤읍니다.적은 45연대·103연대·73연대 등이 우리 연대를 공격해 왔어요. 독 안에 든 쥐 격이 됐지만 이때 우리 연대장병은 놀랄 만큼 잘 싸웠어요. 낮에는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은폐와 차폐를 하는 등 가능한 한 공격이나 정면 대결은 피했습니다. 사주방어의 둘레를 나중에는 10리 정도로 좁혔어요. 밤에는 1개 분대 또는 2개 분대의 병력으로 10여 개의 특공대를 조직해 여러 방향에서 적진을 기습했구요. 이 특공대 기습이 적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때 장교들이 지원해 특공대장이 돼 나갔지요.이런 식으로 3일을 싸웠는데도 웬일인지 사단본부와 무전연락이 안돼요. 3일 동안 고립전원상태에서 포위되니까 식량과 탄약이 제일 큰 문제입디다.3일째 늦게 유재흥 군단장과 겨우 무전이 됐는데 곧 반격할 테니 계속 지금 위치에서 싸우라고 합디다. 4일째 되는 날 영천 남쪽의 연대보급소에 있던 군수참모 허순오 소령이 드리쿼터에 비스킷과 탄약을 가득 싣고 왔어요. 정말 3년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기분이더군요. 허 소령은 사병 3명을 데리고 적중을 결사적으로 돌파하고 온 거예요. 갑자기 환성이 터지고 연대 장병의 사기가 충천했어요.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 비스킷을 두개씩 나누어 먹었읍니다.
김용배씨 (당시 8사단 21연대장)의 회고
- [ 허순오 소령의 증언 ]
- >나는 영천의 조금 남쪽 연대보급소에 있었는데 21연대가 적 후방에서 실종(?) 돼버렸어요. 적 후방으로 군수보급을 할 수 없거니와 도대체 연대의 위치를 알 수가 있어야지요. 참 답답하고 미칠 지경입디다. 그러다가 9월7일 하오에야 연대위치를 알았어요. 드리쿼터 한 대에 보급품을 싣고 사병3명을 데리고 내가 직접 나섰습니다. 샛길로 차를 몰고 가다가 적 도로 경비병한테 두 번이나 습격 받았어요. 다시 길을 찾아 북상했지요. 적 점령지역이지만 아직도 틈바구니가 많았어요. 그리고 그때는 죽어버렸으면 하는 심정이어서 겁도 안 납디다.
허순오씨 (당시 8사단 21연대 군수참모)의 회고
5.16 군사정변때는 혁명군 쪽에 가담하여 1군사령관 체포 작전에 참여하였다. 당시 1군 심리전참모였던 그는 휘하 선전중대원 80여명을 이끌고 사령관 숙소를 포위하는 역할을 하였다.
- [ 허순오 대령의 증언 ]
- >18일 새벽6시를 결행시간으로 정했어요. 포병참모 정 대령이 고사포12문을 사령부 요소 요소에 배치하고 나는 선전중대 2개 소대를 완전 무장시켜 통근차로 가장하여 사령관 숙소를 포위한다는 계획을 세웠지요. 포병사령관의 지원을 못 얻어 고사포로 포위하고 포병부대라고 했어요.
허순오씨 (당시 1군 심리전참모)의 회고
1962년 토지개량조합연합회 회장 직을 역임했을 때, 그는 취임하자마자 무능자, 부패자, 축첩자 250명(직원의 26%)를 해임했다. 또한 경제규모에 맞춘 1군 1조합 원칙으로 700여개의 조합을 200개로 줄였다. 당시 토지개량조합은 일제가 만든 '조선수리조합 시행령'을 적당히 응용해 사용하고 있었고, 이를 본 허순오 대령은 독립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냐며 토지개량사업법을 제정한다.
이후 그는 31사단장 등을 역임한 후 1968년 2월 27일 예편발령된다. 예편 후 한국전력 전무이사, 한국전기안전공사 초대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2007년 1월 29일, 세 아들들과 함께 영천호국원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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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육군준장 허순오님께서 미국/캐나다에 거주하는 아들2명과 함께 방문하셨다. 허장군께서는 현충탑 참배와 묘역을 둘러보시고, 특히 영천대첩기념비에 명각되어 있는 8사단 21연대 기념석의 전우들 이름을 한명한명 확인하시며 회환의 눈물을 흘리셨다...(중략)...허순오 장군께서는 당시 전투에 함께했던 수많은 전우들을 회상하며, 이제 이세상에서 만날 수 없는 하늘나라 영혼을 향해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며 소리없는 흐느낌에 주위의 모든 이를 숙연케 했다. 현충탑참배시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함은 물론 방명록 서명시 한자로 그뜻을 또박또박 적어나가는 모습에 주위의 모든 이는 호국안보의 중용성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기에 충분했다.
2009년 11월 24일, 평생동안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했다.
3. 사건사고
1970년 6월 19일 총포화약류단속법 위반으로 경찰에 입건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서 노획한 소련제 따발총 2정, 실탄 95발, 탄창 2개를 다락방에 보관, 6월 13일 옆집에 불이 나 짐을 챙기다가 소방활동을 하던 경찰에게 적발당했다. 그래도 이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는 모양.4. 자서전
이순의 고개를 넘으면서: 인생론고희를 맞이하여: 인생론[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