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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생애를 서술하는 문서.2. 생애
2.1. 젊은 시절
2.1.1. 집안
1908년 4월 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카라얀의 가문은 본디 그리스 출신으로 1767년 카라얀의 고조부인 요르요스 카라얀니스(Γεώργιος Ιωάννης Καραγιάννης)가 고향인 그리스 코자니(Κοζάνη)를 떠나[1]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빈으로 이주해 최종적으로 작센 선제후국의 켐니츠에 정착했다. 작센에 정착한 카라얀니스와 그의 형제들은 이후 상업, 의료 계통에 종사하면서 1792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로부터 귀족 작위까지 받으면서 성 앞에 귀족을 상징하는 von(폰)을 붙였다. 카라얀의 아버지 에른스트 폰 카라얀은 잘츠부르크의 의사였다. 카라얀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수준급의 아마추어 클라리넷 연주가였고,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카라얀의 본명은 헤리베르트 리터 폰 카라얀이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하면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귀족의 특권도 폐지되며 귀족의 성 앞에 붙는 von도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카라얀의 성 앞에 붙는 von도 공식적으로는 호적(?)에서 사라졌으며, 작위인 Ritter (기사) 역시 사라져 퍼스트 네임도 Herbert로 바뀌었다. 1984년 10월 내한했던 카라얀의 여권에는 Herbert Karajan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카라얀이 성 앞에 von을 계속 사용한 것은 예술가로서 일종의 예명으로 사용된 것이다.[2]2.1.2. 유년 시절
그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형 볼프강 폰 카라얀과의 경쟁심 때문이라고 한다. 카라얀은 몸집이 작아 덩치가 큰 형에게 항상 열등감을 가졌으며, 피아노를 시작한 것도 그런 경쟁심에 의해서라고.(또한 카라얀의 내성적인 성격도 한몫하였다.) 카라얀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했지만 건초염으로 추정되는 손가락 기능 이상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2.1.3. 대학 시절 (1926~1929)
결국 카라얀은 1926년 빈 공대(Technical University of Vienna)에 진학하였다.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카라얀은 공대에 다니면서 효율을 높인 엔진을 개발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고, 후에도 새로운 형태의 관개 시설 개발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공대를 그만두고 빈 음대(University of Music and Performing Arts, Vienna)에 들어가게 된다. 건초염 등으로 인해 피아니스트로 성공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울러 잘츠부르크에서의 은사인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의 조언 등을 받아들여 지휘자의 길을 택한다.1929년 빈 음대를 졸업한 직후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지휘자로 데뷔하였다. 이때 지휘한 작품은 무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후안', 차이스키의 교향곡 제5번 등이었다. 이때 청중 가운데 있었던 울름 오페라극장의 극장장의 초빙을 받아 독일 울름 가극장의 지휘자가 된다.
2.1.4. 울름 오페라극장 (1929~1934)
당시 울름 오페라극장의 상황은 매우 열악해 단원이 약 20명 정도, 합창단은 16명에 불과했다. 가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기 직전에 극장장의 초대로 울름 오페라극장이 야심차게 준비한 로엔그린 공연을 본 카라얀은 신세계를 경험하면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고 한다. 악보상으로 아홉 대의 트럼펫이 찬란한 팡파레를 터트리는 장면[3]에서 단지 한 대의 트럼펫만 용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 빈 국립 오페라를 견학하면서 공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은 20대 전반을 울름에서 보내면서 나름 성실하게 임했다. 없는 악기는 카라얀 자신이 피아노를 치며 메워 나가야 했고, 때로 큰 악기들을 수레에 실어 나를 때 직접 도와야 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직접 연주를 맡는 지휘자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으나, 연주자 뿐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시점에서 음악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며, 음악을 막상 연주해보려고 할 때 느끼는 그 압박감을 느끼고 이겨내 흡수한 후에야 음악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 또한 이 조그마한 오케스트라로 살로메같은 큰 곡들을 연주했는데, 때문에 초기에는 보다 귀 깊숙이서 들리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고("I learned to hear in my inner ear a sound that was acceptable."), 자그마한 디테일들을 살리려는 노력은 리허설로 끝내고, 본 무대에서는 마음 속으로 들었다("I hear inside myself")고 말했다.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 배상금을 갚느라 경제학원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최악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겪던 상황[4]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취업을 했다는 것 자체가 다행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카라얀이 울름 오페라극장에 취임했던 1929년은 세계 대공황이 발생한 해로, 간신히 회복세로 접어들던 독일 경제가 미국발 세계 경제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아 다시 나락으로 추락하던 상황이었다. 세계 경제 대공황 당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같은 메이저 악단조차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5]
20대 초반의 젊은 지휘자였던 카라얀은 처음에 울름 가극장의 부지휘자(assistant Kapellmeister)였다. 그러다가 1933년 1월 나치가 집권한 직후에 울름 극장의 카펠마이스터였던 오토 슐만(Otto Schulmann)이 쫓겨나게 되었고, 카라얀이 그 자리로 승진하게 되었다. 슐만이 추방되는 것을 지켜본 카라얀은 나치의 권력을 실감하게 되었고, 얼마 후 나치당에 가입하였다. 카라얀은 1933년 4월 8일에 처음으로 나치에 입당을 신청하였다.
2.1.5. 아헨 오페라극장 (1934~1942)
1934년 아헨 독일가극장과 아헨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된다.[6] 독일 최연소 음악감독이라고 한다. 당시 상당수의 지휘자들이 나치 집권을 피해서 또는 경제난을 겪고 있던 독일을 떠난 덕을 좀 봤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을 떠난 많은 지휘자들 중에 발터나 클렘페러처럼 유태인의 혈통을 갖고 있어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난 이들도 있었고, 유태인이 아니더라도 나치에 반대해 독일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배경과 관계없이 20~30년대 최악의 경제 상황에 있던 독일을 떠나 경제적으로 훨씬 나은 처우를 받았던 미국 등지로 떠난 이 역시 적지 않았다.소도시 울름과 달리 큰 도시였던 아헨은 오페라 극장 또한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시설이 충분히 갖추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카라얀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카라얀은 훗날 아헨에서의 시절을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나중에 부인이 되는 엘미 호르가레프와 친한 친구들과 이웃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았고, 70명이 넘는 규모의 오케스트라와 대편성 합창단도 지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카라얀의 이름도 빠르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헨 오페라 극장에 부임한 직후인 1934년 여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빈 필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1937년에는 최고의 오페라 극장인 빈 국립 가극장에서 지휘하였고, 이듬해인 1938년에는 베를린 국립 가극장에 초빙되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성공을 거두었다.
아헨 시절부터는 독일에 꽤 이름을 날리는 지휘자가 되었다. 사실 아헨의 음악 감독이 될 때도 울름에서의 오케스트라 조련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고 이 덕분에 다른 도시에서도 카라얀을 데려가려고 하기도 했었다. 이런 유명세는 훌륭한 기량을 가진 성악가들을 발탁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는데 30~40년대 최고의 리릭 소프라노로 손꼽히는 엘리자베스 그뤼머, 이름가르트 제프리트 같은 성악가들이 카라얀이 발탁한 대표적인 예시이다.
2.1.6. 베를린 국립 가극장과 제2차 세계대전 (1938~1945)
1938년 드디어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국립가극장과 베를린 필에 각각 데뷔했다. 특히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데뷔하면서 지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신문에서 지칭한 '분더 카라얀' 즉 '기적의 카라얀'은 이후 카라얀을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되었다. 이 기사는 노장 지휘자들도 카라얀에게 배워야 한다라고 오버했는데, 이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등을 분노케 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정식 음악감독이 되었다. 1938년 4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도 데뷔하였다. 메이저 무대에서는 신인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이미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된 만큼, 베를린 필의 첫 초청에 대해서도 충분한 리허설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기까지 했다.[7] 결국 그래도 몇 달 후 베를린 필에 데뷔하게 되었는데,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처음 지휘한 순간 베를린 필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악단임을 느꼈다고 훗날 술회했다. 그 해 7월에 그는 아헨에서 알게된 11살 연상의 오페레타 가수 엘미 호르가레프[8]와 첫 번째로 결혼한다.그러나 1939년에는 그의 커리어에서 상당히 독특한 사건이 일어난다. 1939년, 카라얀은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9]에서 유고슬라비아 국왕 초청 갈라 콘서트를 지휘하고 있었다. 당연히 카라얀은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공연 중 바리톤 루돌프 보켈만이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부르던 도중 실수를 해 결국 연주를 중단해야 했다. 그런데 극장에 관객으로 와있던 히틀러가 분노해서 옆에 앉아있던 위니프레트 바그너(리하르트 바그너의 며느리)에게 카라얀이 앞으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할 수 없게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나중에 카라얀의 탈나치화 재판에서 증거자료로 제출되기도 했다. 괴벨스 등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푸르트벵글러를 항상 높이 평가한 반면에 카라얀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히틀러나 괴벨스는 카라얀에 대해 '아무래도 푸르트벵글러보단 급이 아래'라는 평을 내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스승이었던 파움가르트너가 나치의 박해를 받아서 제자인 카라얀도 나치에 좋은 인상은 아니게 되었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카라얀을 신진 지휘자의 대표격으로 선전했다. 이미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베를린에서 가장 중요한 지휘자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었다. 푸르트벵글러가 괴벨스의 지지를 받은 반면, 카라얀은 상대적으로 괴링의 지지를 받았다.[10]
1942년 재력자 집안 출신의 이혼녀 아니타 귀터만과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유태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당 내부에서 활동에 일부 제약을 받기도 했다. 아내의 할아버지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카라얀을 격찬하는 선전을 하기도 했던 괴벨스는 카라얀이 결혼할 당시 혈통조사를 방해했다고 한다. 전쟁 직후 아내의 혈통이 묘하게도 그에 대한 나쁜 여론을 어느 정도 환기시켜주는 전화위복이 되기도 했다.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서 그동안 전쟁에 징집되지 않았던 카라얀이었지만, 전쟁 말기에 징집 대상이 확대되자, 그동안 징집 면제를 받아왔던 카라얀도 군입대에 대한 여론의 압박을 받았다. 카라얀은 기왕 입대할 거라면 공군으로 가서 파일럿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괴링과의 연줄을 이용하여 공군에 들어갈 생각도 했다.[11]
그러나 결국 전쟁 말기에 푸르트벵글러 등과 마찬가지로 제3제국을 탈출하고 말았는데, 밀라노에서의 콘서트를 핑계로 아내와 베를린을 떠난 후 종전할 때까지 귀국하지 않고 밀라노와 인근 북부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밀라노에서는 전재산을 잃어버리면서 알거지가 되었는데, 카라얀 부부가 투숙했던 호텔에 독일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민병대가 호텔을 털어버렸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했지만, 길거리를 배회하던 중 다행히 한 이탈리아 음악 애호가의 호의로 그의 집에 머물게 되어 숙소를 해결할 수 있었다. 카라얀의 아내는 영어 통역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카라얀 자신은 악보 공부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면서, 지휘 자리를 알아봤는데 여의치 않아서 밤무대 같은 곳에서라도 지휘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이 시절 카라얀은 매우 열심히 공부했는데, 매일 자신이 목표로 한 양의 공부를 다 하지 못하면 스스로 끼니를 거름으로써 스스로를 벌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꽤나 능숙하게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종전 후 간신히 지인들과 연락이 닿은 카라얀은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향했는데,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이 여정 역시 쉬운 일이 아니어서, 기차 안에서 통역 알바를 하면서 여비를 벌기도 했고, 중간 경유지의 삼류 극장에서 지휘를 해서 여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2.2. 전후 재기 (1945년 ~ 1954년)
2.2.1. 활동금지
종전 후 독일 내에 머물렀던 다른 거물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약 2년간 연주활동이 제한되었다. 활동 금지 기간 동안 푸르트벵글러 등 다른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카라얀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카라얀은 2차 세계대전말 밀라노에 피신해 있다가 전재산을 털리고 잘츠부르크에 있는 부모님에게 얹혀 살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 카라얀에게 구세주로 나타난 이가 바로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카라얀의 재능에 주목해 왔던 레그는 미래에 녹음할 연주들에 대해 미리 선지불하는 형식으로 카라얀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다. 1946년 1월부터 카라얀과 레그는 이미 빈 필과 음반 녹음을 시작했다. 비록 카라얀이 연주활동을 금지당한 상황이었지만 레그는 녹음은 공식적인 음악회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제재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연합국의 제재를 피해갈 수 있었다.1948년 카라얀은 연합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무혐의를 인정받아 지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컴백한 후 여러 곳에서 활동했지만 특히 주목할 만한 곳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극장,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다.
1949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사망하자 그가 묵던 숙소에 찾아가고 단원들과 그가 생전 거닐던 산책길을 걸으면서 추모했다.
2.2.2. 푸르트벵글러의 견제
카라얀이 활동을 재개하자 푸르트벵글러의 견제도 다시 시작되었다.[12] 베를린 필에서는 물론이고 빈 필과 국립 오페라극장에서도 푸르트벵글러는 자신과 카라얀 중에서 양자택일하라고 엄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푸르트벵글러는 나치로부터 빈 필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던 바 있었기 때문에 빈 필은 푸르트벵글러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의 이러한 처사에 대해 지인들에게 불평하지 않고 언젠가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자리라고 말하며 크게 연연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을 모두 보유하고 있던 EMI의 월터 레그는 두 지휘자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과 절친했던 레그마저 점차 꺼렸다.[13] 결국 푸르트벵글러의 녹음 프로듀서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14] 푸르트벵글러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자신은 빈 필과 오페라를 녹음할 때 실황으로 하는데 카라얀은 전부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던 것.
2.2.3.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0년대 카라얀의 음반 녹음은 주로 EMI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로 이루어졌다. 음반 산업의 미래를 내다본 월터 레그는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의 필요성을 느껴 자신이 직접 영국 내의 우수한 연주자들을 접촉, 모집하여 1946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카라얀은 1948년 이 악단과 첫 녹음을 시작했는데, 푸르트벵글러의 견제로 빈 필을 지휘하기 힘들게 되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밀접한 관계[15]를 맺게 되었고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전까지 카라얀의 사실상 모든 녹음이 이 악단과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카라얀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사실상 이끈 지휘자였지만 상임지휘자 등의 정식 직책은 갖지 않았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이기도 해서 1959년까지 상임지휘자가 없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로 창단되어 처음에는 스튜디오에서 녹음만 했고, 대중들 앞에서 연주하는 일은 없었지만, 카라얀과 레그는 악단의 성장을 위해서는 공개 콘서트를 가질 필요성이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아 공개 음악회도 열기 시작했다. 이어 1952년에는 유럽 순회 공연까지 가졌다. 이 때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직접 관람했던 토스카니니는 큰 감명을 받아 나중에 직접 런던을 방문하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을 남겼다. 토스카니니가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외의 악단과 남긴 유일한 정규 녹음이다. 이 유럽 순회 공연의 마지막 공연은 베를린에서 열렸는데, 이는 언젠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것이라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카라얀의 포석이었다. 이 순회 공연에 사비를 털어 지원했던 월터 레그도 카라얀의 이러한 바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연주회를 "카라얀을 베를린으로"라고 불렀다.[16] 실제로 이 공연은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 종전 후 푸르트벵글러 때문에 베를린에서 연주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 공연을 통해 카라얀은 베를린 시민들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또 카라얀은 연주회 뒷풀이에 베를린 필 단원들을 초청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친목을 도모할 기회를 마련했는데, 이자리에서 베를린 필의 핵심 단원들과 친분을 쌓아두기도 했다. 이 공연 이후에 카라얀을 베를린 필 정기연주회에 초청할 것을 요구하는 여론이 더욱 높아졌고 결국 베를린 필은 푸르트벵글러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1953년 11월 카라얀을 정기연주회 지휘자로 초빙했다.
카라얀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지만 어느 선 이상 깊이 진전되지는 못했다. 카라얀의 목표는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는 것임을 월터 레그도 잘 알고 있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된 1955년부터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악대 복무 요원들을 중심으로 창설된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나치 치하의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지휘자였던 카라얀과 단원들 간에는 심리적인 거리감이 있었던 듯하다. 1955년 말 미국 순회공연에서 카라얀과 단원들 간에 사고가 터졌다. 순회공연 중 어느날 카라얀은 모종의 이유로 기분이 상하여 연주회가 끝난 후 청중들의 커튼 콜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날 리허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 출신의 한 바이올린 단원이 일어서서 카라얀이 커튼 콜에 응하지 않은 것은 영국의 동맹국으로 2차 세계대전을 도와준 우방인 미국 시민들에 대한 결례라고 비난하면서 카라얀이 미국 청중들에게 공개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었다. 카라얀에게 항의한 단원은 이 순회공연을 위해 충원된 임시단원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갈등은 확대되지는 않았고 카라얀도 이 사건을 문제삼지는 않았다. 이 일과는 별개로 순회공연 당시 플룻 수석이었던 단원은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원'에서 카라얀의 지시를 무시하고 템포보다 약간 늘어지게 연주했는데 카라얀이 의외로 아무 말 않더라며 호기롭게 말하기도 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된 1955년부터는 오토 클렘페러가 이 악단을 지휘하는 빈도가 크게 늘었다.
어차피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된 카라얀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를 청산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견한 일이었다. 1960년 카라얀과 EMI와의 계약 연장이 불발되면서 카라얀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관계는 완전히 끝을 맺는다. 카라얀은 훗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베를린 필과 달리 직업으로서 음악을 대했고 악보에 나타난 것 이상을 들려주지 못하는 악단이었기 때문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헤어지는 것이 슬픈 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2.2.4.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녹음용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실제 콘서트를 위한 카라얀의 악기는 주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담당했다. 카라얀은 1948년말부터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시작하였는데, 곧 푸르트벵글러에 의해 빈 필을 지휘할 수 없게 되자 빈에서의 활동은 빈 심포니로 집중되었다. 당시 푸르트벵글러의 빈 필과 카라얀의 빈 심포니의 경쟁은 빈 시민들을 즐겁게 했다. 1950년 카라얀과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독일 투어를 떠나기도 했다. 이웃 독일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의 지원도 받은 투어였다. 그러나 음반 녹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1950년대 당시 빈 심포니의 기량은 썩 좋지 않았다. 당시 빈 심포니의 해외 공연 리뷰를 보아도 연주력에 대한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다. 어떤 비평가는 적잖은 청중들이 빈 필의 공연으로 잘못 알고 왔다가 실망하여 돌아갔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다수의 기사들도 카라얀의 지휘 솜씨가 매우 훌륭하며, 조건이 맞는다면 청중들도 빈 필과 빈 심포니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라고 평하기도 했다. 당시 빈 언론들도 매일 빈 최고의 두 오케스트라가 선보이는 대결로 빈 청중들이 즐거워하고 있다고 평했다. 카라얀은 1950년대 초중반 동안 빈 심포니의 사실상의 수장이었지만 정식 직책에 취임하지는 않았다.[17] 카라얀은 당시 빈 심포니 단원 선발에서도 결정권을 행사하는 등 상임지휘자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장차 빈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되길 원했던 카라얀은 빈 청중들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기 위해 빈 심포니가 필요했다. 하지만 빈 심포니는 유럽에서 일류 오케스트라는 아니었기 때문에 카라얀이 정식으로 상임지휘자에 취임해 자신의 이력에 새기는 것을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2.2.5.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1951년 전후 처음으로 재개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지휘자로 선임되었다. 크나퍼츠부쉬와 함께 페스티벌 공연을 절반씩 나누어 지휘했다. 바이로이트 측에서는 처음에 푸르트벵글러에게 접촉했다가 거절당했는데, 나중에 대신 카라얀이 선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푸르트벵글러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페스티벌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미 카라얀과 크나퍼츠부쉬를 섭외하여 스케줄을 정한 후였기 때문에 페스티벌 측이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이자, 푸르트벵글러는 개막 콘서트라도 지휘하겠다고 해서 성사된 것이 그 유명한 베토벤 교향곡 제9번 공연이었다. 51년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이 동시에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자, 리허설 연습 시간 등을 두고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의 기싸움도 있었다. 카라얀은 바이로이트에서 51년에는 니벨룽겐의 반지[18]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52년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다.그러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는 52년을 끝으로 2시즌 만에 결별했다. 바이로이트 경영진과 의견 차이와 신바이로이트 연출에 대한 이견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카라얀은 빌란트 바그너가 연출한 텅 빈 무대를 보고는 도저히 악상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빌란트 바그너는 카라얀이 청중들에게 자신이 보일 수 있게 지휘 포디엄을 높여 달라고 하는 등 바이로이트에서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했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카라얀과 바이로이트의 이른 결별은 음악애호가 입장에선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담으로 바이로이트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유명한 합창 지휘자 빌헬름 피츠는 카라얀이 바이로이트에 추천한 사람이었다. 피츠와 카라얀은 아헨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일하면서 알게 되었다.
2.2.6.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의 독일부문 음악감독이 되어 이탈리아 오페라 지휘도 재개했다. 여기에는 사바타와의 친분이 작용하였다. 밀라노에서 첫 시즌에는 직함대로 독일 오페라로 레파토리가 제한되었지만 이듬해부터는 직함이 무색하게 독일, 이탈리아 오페라를 가리지 않고 지휘하게 되었다. 이 시절 카라얀은 마리아 칼라스를 비롯하여 여러 정상급 이탈리아 성악가들과 알게 되었고, 나중에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되었을 때, 밀라노의 이탈리아 가수들을 빈으로 초빙하여 빈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19]
2.3.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와의 관계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를 존경하고 그 둘의 음악을 융합하는 것이 자신의 이상이라고 말해왔다. 카라얀은 그들의 음악을 매우 열심히 연구했던 것 같다. 카라얀의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카라얀은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지휘자가 된 이후에도 푸르트벵글러의 음악회에 항상 변장하고 찾아와서 들었다고 한다.카라얀이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트벌의 탄호이저 공연(토스카니니는 1931, 32년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지휘했다.)을 보기 위해 자전거로 수백킬로를 달려 바이로이트까지 갔다고 한다. 카라얀이 만년의 인터뷰에서 밝힌 일화에 따르면 젊은 시절 고향 잘츠부르크의 공연장에서 피아노를 치려고 들어갔는데 그 방에 우연히 토스카니니가 들어왔다고 한다. 리허설이 뜻대로 안 돼서 화가 나있던 토스카니니는 그 방에 카라얀이 있는지 모른 채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했다고 한다.[20] 토스카니니가 공연하러 왔다는 소문을 접한 젊은 카라얀이 그의 연습 장면을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공연장에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월터 레그에 따르면 1952년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에로이카를 녹음했을 때 카라얀은 대기실에서도 계속 토스카니니의 녹음을 듣다가 지휘대에 올랐다고 한다. 이 녹음 직후에 카라얀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유럽 투어를 떠났는데, 밀라노 공연에서 카라얀의 에로이카를 들은 토스카니니는 크게 감명을 받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 계약까지 맺었다. 토스카니니가 만년에 NBC 오케스트라 이외의 악단과 남긴 유일한 녹음이다.
그러나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에 대한 음악적인 흠모에도 불구하고 토스카니니와 인간적인 접촉을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토스카니니 뿐만 아니라 다른 선배 거장들과 굳이 일부러 인연을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 단 한번 토스카니니가 신예 카라얀에게 조언을 해준적이 있는데 "크레센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피아노부터 포르테까지 단 한 번에 밀어붙어야한다"는 조언으로 카라얀은 이 원 포인트 레슨이 지휘실력을 쌓는 데 매우 주요했다고 회고했다.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과의 관계는 널리 알려진 편이다. 푸르트벵글러가 극도로 카라얀을 혐오했기 때문에(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K라고 불렀다고 한다.[21] 카라얀은 종전 이후부터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할 때까지 베를린 필과 빈 필을 거의 지휘하지 못했다. 빈 필 단원의 증언에 의하면 푸르트벵글러는 빈 필 단원들에게 자신과 카라얀 중에 택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에게 일종의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푸르트벵글러가 모르게 변장을 하고 자주 푸르트벵글러의 공연에 참석해 음악을 듣고 갔던 그 일화. 하지만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에 취임한 이후 카라얀은 무엇보다도 먼저 푸르트뱅글러의 자취와 음악적 유산을 지워나갔다. 어쩌면 푸르트뱅글러가 카라얀을 가장 꺼리며 혐오했던 이유가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그것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옛부터 클래식 음악 지휘자들의 라이벌에 대한 질투와 견제는 다른 어느 전문직에 비해도 과한 편이다.
놀랍게도 푸르트뱅글러가 카라얀을 인정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암보이다. 총보를 모두 외워서 눈을 감고 지휘하는 것 하나는 인정을 했다고....
2.4. 베를린 필과 빈 국립 가극장의 대권을 잡다 (50년대 중후반)
1954년 11월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사망 후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대권을 잡았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카라얀이 상임지휘자가 된 것은 당시 카라얀이 대세였다 뭐 이런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사정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고 복잡한 역학 관계가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언론과 음악계에서는 카라얀 뿐만 아니라 첼리비다케, 요훔, 뵘, 카일베르트 등 다양한 인물들이 비중있게 거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필 단원들도 여러 지휘자들에 대해 열띤 논의를 벌이고 있었다.요훔은 자신이 차기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여 베를린에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고 한다.[22] 첼리비다케는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기 직전 즈음에 베를린 단원들과 격렬한 말다툼을 벌인 끝에 관계가 파국에 이르러 차기 후보에서 완전히 제외된 상태였다. 뵘은 당시 빈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를 겸직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 보였다. 카라얀의 경우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시절부터 푸르트벵글러 때문에 베를린 필을 거의 지휘하지 못했고, 푸르트벵글러가 죽기 몇 개월 전에서야 겨우 다시 베를린 필의 무대에 설 수 있었다. 푸르트벵글러 만년에는 건강 문제로 베를린 필을 자주 지휘하지 못했으며 베를린 필 단원들은 이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상임지휘자의 의무로서 좀 더 많은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내지는 거의 강요 수준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1953년에는 베를린 필을 자주 지휘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푸르트벵글러도 베를린 필에 한발 양보해서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지휘해도 자신이 반대하지는 않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카라얀과 베를린 필과의 유대관계는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서는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베를린 필 단원들은 많은 음반을 녹음하던 카라얀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이 멀어지게 된 배경에는 레코딩을 혐오하는 첼리비다케의 성향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된 데는 특히 1955년 베를린 필의 미국 순회 공연이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10주년인 1955년 독일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것은 독일이나 미국 양측에 큰 이슈였다. 당시 아데나워 서독 수상도 이 순회공연에 각별하게 신경을 쓰고 있을 정도였다. 2차 대전에서의 적대관계 직후 찾아온 냉전 체제 하에 냉전의 최전선에 서며 전후 재건 과정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았던 서독은 이 순회공연이 미국 국민들의 대독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 순회 공연은 당연히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면서 순회 공연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 공연이 추진되던 당시에도 푸르트벵글러의 건강에 대한 깊은 우려가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푸르트벵글러에게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대한 대비도 미리 논의되고 있었다.[23] 이 공연을 추진하던 기획사와의 계약에는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지 못한다면 기획사가 승인하는 다른 지휘자가 지휘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자 기획사가 대신 요구했던 유일한 지휘자는 카라얀이었다. 베를린 필 측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기 전에 유사시에 카라얀에게 미국순회 공연을 맡아달라고 언질을 하기도 했다. 미국 공연을 3개월 앞둔 상황에서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였고, 미국순회공연의 지휘자 자리는 그렇게 카라얀에게 돌아갔다. 카라얀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푸르트벵글러 사후 약 2주간의 논의 끝에 카라얀을 차기 상임지휘자로 내정했다.
그러나 카라얀과 베를린 필 간의 계약은 세부 조건의 합의에서 난항을 겪어 쉽게 체결되지 못했다. 1955년 2월말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미국 순회 공연을 떠날 당시에도 카라얀은 상임지휘자직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였고 베를린 필과 관련된 아무런 직함도 없었다. 그러나 카라얀은 일생일대의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카라얀은 베를린 시의회와 베를린 필 운영진을 조르고 구슬리고 협박한 끝에, 마침내 이 중요한 순회공연을 떠나기에 앞서 진행된 공식 인터뷰에서 "카라얀이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을 지휘한다"는 발언을 하도록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카라얀은 대중에게 자신이 베를린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에 확정된 것과 같은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여론은 카라얀의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취임을 기정사실처럼 여기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미국 순회공연 이후에도 카라얀과 베를린 필 측은 세부적인 사항에서 이견이 있어 계약에 싸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카라얀은 다른 권리를 약간 포기하고서라도 자신의 계약기간을 종신으로 확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종계약은 1956년 4월 25일에서야 이루어졌다.
평생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염원해왔던 카라얀은 자신에게 돌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했다. 카라얀은 훗날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저질렀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베를린 필과 미국 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에 카라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카라얀은 그토록 염원했던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촌각을 다투면서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중한 어머니를 한 번도 찾지 못했다.[24][25] 카라얀은 훗날 아주 가까운 지인들에게 종종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베를린 필과 계약서에 싸인을 하기도 전인 1956년 3월 카라얀은 고향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측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여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또 1956년에는 홧김에 사표를 낸 칼 뵘[26]의 뒤를 이어 빈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하였다. 그러자 베를린에서는 카라얀이 빈 국립가극장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 베를린 필을 이용했다고 분개하는 기사가 났다. 그러자 카라얀 본인이 직접 나서서, 정말 빈의 지휘자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면 베를린 필과 종신으로 계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면서 베를린의 여론을 진화했다. 카라얀은 1964년 극장 경영진과 마찰을 빚고 사임할 때까지 빈 국립 가극장에서 매우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며, 비판적인 세간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연출까지 했다. 빈 국립 오페라 소속 성악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카라얀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유연하고 효율적이며 타협적인 지휘자였다고 한다. 또 공연시 성악가의 컨디션에 사소한 문제라도 있으면 이를 즉각 감지하고 현장에서 즉석으로 템포를 변화시켜 성악가들을 수월하게 해줬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즉흥적인 템포 변화는 반주하는 오케스트라가 빈 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27]
1958년 10월 모델 출신의 금발여성 엘리에트 무레와 세 번째로 결혼하였다. 이 결혼은 카라얀의 남은 여생 동안 지속되었다. 아니타와의 두 번째 결혼 생활도 비교적 무탈하고 원만했지만, 아니타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크게 작용했고, 언젠가는 카라얀과 이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수년간 기다려왔던 엘리에트의 노력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엘리에트와의 세 번째 결혼은 적어도 겉으로는 화목하게 유지되었고, 엘리에트는 비록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었지만 카라얀을 열심히 내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혼한 아니타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엘리에트 폰 카라얀은 지금도 잘츠부르크에 거주하고 있다.
2.5. 60년대
전후 EMI에 전속되어 활동해왔던 카라얀은 DG , DECCA와도 계약을 체결하여, 1959년 3월에 두 음반사와 각각 첫 녹음을 시작했다.
베를린 필과 전속계약을 맺고 있었던 DG는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전부터 지속적으로 카라얀에게 접촉해왔다. 마침내 카라얀이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에 취임하자 그를 영입하기 위해 엄청난 거액을 제시했고, 마침내 카라얀과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한편 카라얀은 DG와 계약은 맺은 것과 비슷한 시기에 DECCA와도 계약을 맺었다. DG가 베를린 필과의 녹음을 위한 방편이 있었다면 DECCA와의 계약은 당시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던 빈 필(빈 국립 가극장)과 녹음을 위해서였다.
반면 종전 이후 지속되던 EMI와의 계약은 1960년에 종료되었다. EMI와의 계약이 종료된 것은 월터 레그와의 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처음에 카라얀에게 은인으로서 다가온 레그는 한동안 레코딩 계획을 주도했으며, 카라얀은 레그의 계획에 따라 녹음을 진행했다. 그러나 베를린 필과 빈 필의 지휘자가 된 이후 카라얀의 위상이 급변함에 따라 레그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차이가 있는 듯하다. 일단 카라얀은 시대에 뒤떨어진 EMI의 녹음 기술에 실망하고 있었다. 경쟁사인 DECCA가 1955년 발빠르게 스테레오를 도입하였고, DG 또한 녹음기술 혁신을 이어갔으나 EMI는 1950년대 말까지 MONO 녹음을 고수했다. 1957년 1월 카라얀이 베를린 필에 취임한 후 첫 음반 녹음이 이루어졌는데, 이 역시 모노 녹음이었다. EMI는 다소 뒤쳐지기는 했으나 50년대 말 스테레오를 완전 도입했고, 카라얀과 EMI측 모두 재계약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카라얀은 DG, 데카와도 계약을 맺고 있었던 만큼 이제 레그의 영향력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당시 EMI 경영진은 계약 갱신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한 끝에 결국 재계약을 포기했다. 주요한 이유는 카라얀이 높은 개런티를 요구했고 EMI 경영진들도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지휘자임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있었다는 점[28], 당시 사내에서 월터 레그를 껄끄럽게 여기던 경쟁자들이 레그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 EMI와의 계약이 끝나면서 10여년간 지속되어 왔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도 자연스레 청산되었다.
1960년 7월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감독직을 사임했다. 사임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일부 언론과의 불화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주로 오스트리아의 과중한 세금 때문에 직을 내려 놓았다는 해석이 많다. 예술감독을 사임한 이후에도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전과 다름없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63년 새 베를린 필하모니 홀이 개관하였다. 개관공연으로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공연했다. 새 베를린 필하모닉 홀은 한스 샤룬이 설계한 것으로 유명하며, 건축설계학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한다. 한스 샤룬의 설계는 카라얀 자신이 직접 뽑은 것이다. 그러나 완공된 필하모니 홀은 음향에서 다소 문제점을 노출했으며, 지속적인 보완을 거쳤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 역시 음향 문제 때문에 전용 홀이 완공되고도 70년대 중반까지 10년 이상을 달렘[29]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녹음을 진행했다.[30] 70년대 중반 베를린 필이 필하모니 홀에서 녹음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음향상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 인근에 있기 때문에 녹음에 어려움이 있었던 현실적인 측면도 있다.
1964년 행정 당국과의 마찰로 빈 국립 가극장 음악 감독직을 사임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 측과 감정의 골이 상한 카라얀은 자신이 눈감을 때까지 조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지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1964년 카라얀이 빈 국립 가극장을 사임한 직후 고향이었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측은 카라얀이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떠나겠다는 말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카라얀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마침내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감독에 다시 재취임하였다.[31] 카라얀은 오스트리아에서 지휘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한 발언을 '빈에서 지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축소하였다. 카라얀은 실제로 1977년까지 빈에서 지휘하지 않았다. 1977년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주연으로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 공연으로 빈 국립 가극장에 복귀할 때까지 빈 필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만 지휘했다.
1965년 시벨리우스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음악제에 초청받아 베를필 필과 헬싱키에서 시벨리우스 교향곡 4번을 공연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운영의 전권을 가지게 된 카라얀은 1967년 3월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을 창설하였다. 이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이외의 극장에서 카라얀 자신의 이상대로 최고 수준의 바그너를 지휘하고자 했던 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여름에 개최되는 잘츠부르크 페스트벌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겹치기 때문에 최고 수준의 바그너 가수들을 섭외함에 있어서 바이로이트와 경쟁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는데 이것이 부활절 기간에 열리는 별도의 페스티벌을 창설하게 된 큰 원인으로 보여진다. 개관 연주로 카라얀은 자신의 장기인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과 페스티벌의 메인 오페라 공연으로서 바그너의 발퀴레를 공연했다. 카라얀은 1967년부터 4년간 매해 차례로 발퀴레, 라인의 황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을 공연함으로써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공연과 음반녹음을 완결했다. 카라얀은 오스트리아 정부 또는 잘츠부르크 주 정부에 보조금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은 음반 녹음을 병행함으로써 제작비를 충당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은 실제 공연보다 반년 정도 앞서 음반 녹음 세션을 가졌다. 녹음을 마친 후에 배우들과 연출을 준비하는 단계로 넘어갔는데 이때 카라얀은 피아노 반주 대신 먼저 녹음된 음원을 틀어놓고 연출을 연습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당시에는 전례없던 방식이었기 때문에 오페라 연출계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미리 녹음된 음반은 시중에 발매되기에 앞서 부활절 페스티벌 청중들에게 카라얀 친필 사인이 있는 한정판으로 먼저 발매되었다.
또 카라얀은 오페라 제작비를 절감하면서 세계 유명 극장에서 최고수준의 오페라 공연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유명 극장 간의 공동제작을 구상해왔는데,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하면서 실제로 이를 구현했다. 즉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제작한 프로덕션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로 그대로 옮겨서 상연한 것이다. 이로 인해 카라얀이 직접 뉴욕 메트 오페라 데뷔가 이루어졌다.[32] 하지만 각 오페라 극장간 스케줄을 조율하는 문제 이외에도 극장간 무대 규격이 다른 문제 등 현실적인 제약이 많아 카라얀의 이러한 구상은 곧 폐기되었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이 끝나고 70년대에 들어선 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트벌에서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텔로, 파르지팔 등을 공연했으며, 음반 녹음과 병행하려는 방식을 이어나갔으나 음반사의 이해관계와 항상 맞아떨어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카라얀은 57년 베를린 필과 일본 순회 공연에서 자신의 공연이 생중계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후 영상 매체에 크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60년대 중반에 방송용 음악회 녹음을 한 후 흑백으로 슈만 교향곡 4번, 베토벤 교향곡 5번,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등을 촬영을 하였고, 이어 컬러로 베토벤 교향곡 6번을 녹화하였는데 휴고 니벨린의 지나치게 난잡한 카메라 워크에 실망하여 이후 카라얀 자신이 직접 촬영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카라얀 스스로가 카메라 기술을 배웠다. 이듬해에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녹화를 거쳐 70년대초에 유니텔을 통해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 후기 교향곡 등 영상물의 촬영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이후 발매되는 영상물들은 음향과 영상미를 출중히 보여주는 공연 동영상의 모범 사례들로 남게 된다.
[33]
[34]
냉전이 한창이던 1969년에는 베를린 필이 소련의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공연함으로 국제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연주회에는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소련의 많은 음악가들이 참석하였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빗발치는 요구 때문에 수백장의 입석표를 추가로 발행했다.[35] 소련 당국은 연주회 프로그램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아닌 '서베를린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라고 표기했고[36] 첫날 공연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라얀은 다음날 공연 때 무대 위에 등장한 후 쳄발로에 앉은 채[37] 연주를 시작하지 않음으로써 무언의 항의를 표시했다고 한다. 한참 뒤에 관계자가 나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이라는 것을 공지한 후에야 카라얀은 지휘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소련 당국에서는 카라얀과 소련 음악가들의 접촉을 방지하기 위해 다음 공연 장소인 레닌그라드에 안개가 심해 일찍 떠나야 한다는 둥 핑계를 댔지만 서독 대사관과 카라얀의 기지로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38]
여담으로 카라얀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10번 연주 이후 레닌그라드로 이동한 카라얀이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이자 러시아의 지휘자였던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여 다시는 10번외의 교향곡 외의 교향곡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39]
카라얀의 지휘 마스터클래스. 1966년 영상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2.6. 70년대
1969년 샤를 뮌슈의 후임으로 1년여 동안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재임했다.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과 빈 필 이외에는 거의 지휘를 하지 않았던 카라얀이 신생 관현악단인 파리 오케스트라를 맡은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파리 오케스트라는 카라얀이 맡기 불과 1년전에 창설된 뉴비 악단이었는데, 자칭 문화대국 프랑스가 자국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문화대국이라는 자존심에 걸맞은 명문 교향악단을 만들겠다는 목표하에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1968년 창설되었다. 프랑스정부의 지원과 더불어 프랑스 출신인 카라얀의 와이프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근래에 발간된 한 서적은 카라얀이 파리 오케스트라를 잠시 맡은 이유가 레코드사와 재계약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카라얀의 포석이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59년 첫녹음을 시작했던 카라얀과 DG는 60년대말 계약이 만료되어 가고 있었고 카라얀과 DG는 재계약을 하기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60년대 동안 카라얀과 베를린 필, 그리고 DG는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 교향곡을 위시하여 다양한 레퍼토리를 녹음하여 이미 주요한 레퍼토리는 다 녹음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DG와 카라얀의 파트너쉽에는 약간의 이견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카라얀은 브루크너 교향곡과 오페라 녹음을 원했고 또 기존에 녹음한 레퍼토리의 재녹음을 원했다. 하지만 당시 DG의 정책은 다른 음반사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레퍼토리의 중복 녹음을 가급적 제한하는 것이었다. 지휘자 왕국이라는 별명 답게 DG는 카라얀 이외에도 많은 지휘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DG는 이미 요훔과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상태였다. 또한 DG는 고비용이 투자되는 오페라 녹음을 꺼리고 교향곡과 관현악곡 녹음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라얀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민 곳이 EMI였다. EMI는 1960년 카라얀과 계약을 종료되었지만 그이전에 녹음된 카라얀의 음반들이 여전히 높은 판매고를 올리자 카라얀과 재계약하지 않은 것을 내심 후회하고 있었다. 그동안 EMI의 경영진도 교체되어서 60년대말 EMI는 카라얀과의 계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마침내 69년 EMI와 새로 계약을 맺은 카라얀은 파리 오케스트라와 프랑스 레퍼토리를 EMI에서 내 놓은데 이어 베를린 필과 차이콥스키의 후기 교향곡 및 브루크너 교향곡 4번, 7번의 음반을 내놓았고 이 음반들은 매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얼마 후 DG도 카라얀과 재계약을 맺었다. 70년대 전반기에 DG와 카라얀은 기존에 녹음되지 않았던 슈만과 멘델스존 교향곡 전집, 말러 교향곡 5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관현악곡 등으로 레퍼토리를 확대했다. 한편 DG는 오페라 녹음에 상당히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70년대 전반기에 카라얀은 DECCA에서 푸치니의 라보엠과 나비부인을, EMI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녹음했다. 게다가 카라얀은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등 소련 음악가들과도 협연하고 싶어했는데 영국 음반회사인 EMI는 이에 더 유리했다. EMI와 계약하고 처음 만든 음반이 위의 3명과 협연한 베토벤의 삼중협주곡 음반이었고, 이 음반은 45만장 이상이 팔려 EMI에게 큰 이익을 남겨주었다.
카라얀은 여전히 기존에 녹음했던 유명작품들을 다시 재녹음하고 싶어했는데, 카라얀이 EMI를 통해 재녹음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등이 높은 판매고를 올리는 것을 목도한 DG는 마침내 1975년 4월 20일 카라얀과 다시 포괄적인 재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재계약은 DG가 그동안 자제해왔던 재녹음을 전면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사실상 카라얀이 하고 싶은대로 녹음할 수 있도록 전권을 위임한 것이었다. 재녹음을 하든 뭘 하든 간에 카라얀이 경쟁사가 아닌 자사에서 음반을 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레코딩 프로듀서 역시 카라얀이 원하는 사람으로 구성하였는데, 카라얀은 EMI에서 알게 된 프랑스 출신의 미셸 글로츠를 중용했다. DG와 재계약을 한 후 카라얀이 가장 먼저 녹음한 곡은 그토록 재녹음하고 싶어했던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이었다(1975년 4월 22일).
재계약 후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DG와 카라얀은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스키 교향곡 등 기존의 녹음된 주요 레퍼토리를 재녹음해 나갔으며, 또한 카라얀의 오랜 염원이었던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녹음도 추진되었다. DG에서 원하는 관현악 곡을 마음대로 녹음할 수 있게 된 카라얀은 EMI에서 녹음 비중을 크게 줄였다. 다만 DG가 아직 오페라 녹음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에 오페라 녹음은 계속 EMI에서 진행했다. 1979년부터 DG가 오페라도 녹음하기로 정책을 바꾸면서 카라얀과 EMI의 녹음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1975년말 척추 연골이 돌출되어 5시간에 걸친 큰 수술을 받았다. 이로인해 1976년 전반기 스케줄이 모두 취소되었다. 회복 이후 걸음걸이가 불편해졌다. 1978년 9월에 리허설 때 지휘봉을 줍다가 지휘대에서 넘어지면서 허리가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에는 단지 균형을 일어서 넘어진 것으로 발표가 났지만 카라얀 사후 출판된 전기들에 따르면 뇌졸중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1980년 1월에는 정기연주회 때 위해 청중들 앞에서 지휘대에 오르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1977년에는 십여년만에 마침내 빈 국립 가극장에 복귀하여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를 지휘했고 빈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40]
1979년 디지털 녹음 방식이 도래하였다. 카라얀은 70년대 후반 기껏 재녹음했던 레퍼토리를 80년대에 다시 디지털로 재녹음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만약 디지털 녹음 방식 5년 정도 더 일찍 도래했다면 카라얀이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 교향곡들을 70년대말과 80년대에 반복해서 재녹음했던 것이 한 번으로 줄고 대신 다른 신규 레퍼토리의 녹음이 더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1979년 가을 베를린 필과 중국에서 공연하여 화제를 모았다. 69년의 소련 공연과 함께 베를린 필 역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중요한 연주 중 하나다. 그러나 베이징에 전문 공연장이 없어 배구장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공연장 바깥에서 울리는 자전거들의 요란한 찌르릉 소리가 배구장 안까지 들렸으며, 일부 청중들은 음식물까지 먹으며 매우 산만한 분위기 속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2.7. 80년대 - 베를린 필과의 불화, 그리고 죽음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불화가 터진 계기는 80년대 초 자비네 마이어 입단 사건이다. 1982년 23세의 나이에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과한 자비네 마이어는 카라얀이 직접 수석 클라리넷 연주자로 발탁했다. 자비네 마이어는 이로써 베를린 필 100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관악기 단원이 되었다.[41]
자비네 마이어 이전에도 카라얀과 베를린 필 간에 불화는 있었다. 대부분 사건들이 자비네 마이어와 마찬가지로 관악기 수석단원을 뽑는 일과 연관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갈등들은 특히 비독일계 수석단원을 선발하거나 여성단원을 선발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42] 이미 1958년 카라얀이 폴란드 출신의 미셸 슈발베를 악장으로 영입할 때 일부 단원들이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한 적이 있었다. 본격적인 갈등은 1964년 호른 수석의 선발 건이었다.[43] 베를린 필의 오디션에 응하여 통과한 첫번째 후보는 스웨덴 출신의 벤그트 벨프라게였다. 그는 몇 개월간의 수습 기간 동안 베를린 필의 수석자리에서 연주했다. 카라얀은 벤프라게의 연주에 만족했으나 베를린 필의 호른 단원들은 그가 베를린 필에 걸맞은 독일적인 소리를 갖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입단을 부결했다. 이것은 베를린 필이 카라얀에게 처음으로 No라고 말한 사건이었다. 이에 분노한 카라얀은 파리 순회공연을 취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사태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는데, 그 유명한 게르트 자이페르트(Gerd Seiferd)가 나타나 호른수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독일 최고의 호른 연주자인 자이페르트가 들어오자 카라얀도 매우 만족했고 인터뷰에서 베를린 필은 자이페르트 같은 세계 최고의 연주자를 가진 악단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이렇게 갈등이 봉합되고 한동안 조용했다가 1969년 쵤러의 후임으로 플룻 수석을 뽑을 때도 약간의 잡음이 있었다. 카라얀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인 제임스 골웨이를 오디션에 초빙한 것이었다. 베를린 필 목관단원들이 타지 출신의 골웨이를 껄끄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명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어쨌든 골웨이는 이견이 없는 최고의 연주자였으므로 오디션을 무난하게 통과하여 5년간 수석으로 활동했다. 골웨이는 74년 퇴단한 이후 솔로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골웨이의 후임을 뽑을 때도 잡음이 있었다. 유력한 후보는 여성이었는데 카라얀은 이 여성 주자의 실력에 만족했지만 목관단원들, 특히 오보에 수석인 로타 코흐가 앞장서서 그녀가 베를린 필의 중압감을 이겨내기에는 멘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대해 결국 입단을 무산시켰다. 이 일은 결국 제임스 골웨이의 전임자였던 칼하인츠 쵤러(Karlheinz Zöller)가 베를린 필에 재입단하면서 다시 해결되었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조금씩 누적되었던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 자비네 마이어 사건이다. 클라리넷 수석 주자로 카라얀이 지지했던 자비네 마이어를 베를린 필의 목관 단원들이 소리가 너무 밝고 오케스트라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마침내 사단이 난 것이다. 한스요르크 셸렌베르거, 칼 라이스터 등 목관단원들을 중심으로 베를린 필은 카라얀의 독단적인 성향을 비난했고, 만년에 완고해진 카라얀도 자신의 예술적 견해가 단원들에게 무시당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 카라얀과 단원들의 갈등 사이에 끼어 곤란한 위치에 놓였던 자비네 마이어는 버티지 못하고 9개월 만에 베를린 필을 퇴단한다. 카라얀도 꼭 같이 연주해보고 싶었던 마이어가 쫓겨나듯 퇴단한데 대해 분노하여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후 마이어는 20여장의 클라리넷 연주곡 앨범을 내면서 세계 최고의 클라리넷 연주자로 명성을 떨치지만[44] 이때는 고작 24세에 불과한 어린 연주자였다.
84년 카라얀은 그해 연말까지 상임지휘자로써의 최소한의 의무인 정기연주회를 제외한 모든 녹음 일정과 순회공연, 외부 페스티벌 출연등의 부가적인 스케줄을 취소하였다. 당시 음반 녹음을 비롯한 외부활동으로 연봉의 다섯배의 수입을 올렸던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재정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빈 필은 84년과 85년 동안 카라얀과 차이콥스키와 드보르자크 교향곡 등을 녹음할 수 있었다. 한편 베를린 필의 수뇌부였던 셸렌베르거(오보에 수석)와 겔러만 등은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카라얀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지 논의하였는데, 꽤 효과적인 아이디어들이 튀어나와 대담하게 이를 실행에 옮겼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텔레몬디알과의 계약을 취소하고 출연을 거부하는 것으로 응수한 것이다. 텔레몬디알은 카라얀이 본인의 영상물 녹화를 위해 사적으로 설립한 회사였다[45] 텔레몬디알과의 계약 파기는 카라얀이 자신의 영상물을 남기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베를린 필 단원들이 카라얀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선택한 카드였다. 카라얀은 텔레몬디알의 영상물 촬영에 참여한 대가로 베를린 필에 높은 출연료를 지급하고 있었는데 베를린 필 단원들이 고수입을 포기하면서까지 텔레몬디알과의 계약을 취소하자 그들의 의도대로 카라얀은 큰 심적 타격을 받은 듯 하다. 카라얀은 사건 초반에는 베를린 필에서 자신의 권위의 우위를 재확인하는 선에서 일이 수습되고 베를린 필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길 원했던 듯한데, 텔레몬디알 계약 취소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고 베를린 필에서 마음이 떠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베를린 필은 카라얀 이외의 다른 지휘자들과 녹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베를린 필 단원들은 DG와의 전속계약마저 파기했다. DG는 전속계약의 대가로 베를린 필에게 다른 오케스트라보다 40% 높은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었는데 베를린 필은 이마저도 포기했다. 그러나 카라얀 없이도 잘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베를린 필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베를린 필 단원들 중 일부는 DG가 높은 로열티를 지급하는 것이 카라얀이 아닌 베를린 필 자체에 있다고 생각해서 DG와 재협상할 때 DG가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도 많이 했다. 게다가 베를린 필의 음반 녹음 제의를 받은 무티 등의 지휘자들은 대부분 카라얀과의 관계를 고려해 이를 거절했다. 가까스로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 겸 피아노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녹음이 성사되었지만 어떤 음반사도 카라얀의 심기를 거스르며 이 음반을 출시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녹음은 몇 년 동안 발매되지도 못했다. 한편 이때 베를린 필과의 녹음에 응해준 바렌보임은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크게 환심을 사게 되어 차기 상임지휘자 후보 1순위로 고려되기 시작했다. 더해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3일 후에 했던 특별연주에서 바렌보임이 출연료도 받지 않고 제안에 응한 것은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비록 상임지휘자는 아바도가 되었지만.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갈등을 조장 확장한 것에는 다른 오케스트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베를린 필의 내부 규정이 한 몫을 했다. 이는 베를린 필의 총감독 슈트레제만도 지적한 것으로, 단원을 가채용할 때 상임지휘자가 참석해야 하지만 투표권을 비롯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식적인 수단이 전혀 없다는 점, 그러나 단원이 가채용을 거친 이후의 임명과 해고에 대해서는 상임지휘자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 오케스트라가 불합격으로 결정한 연주자를 총감독이 직권으로 임명할 수 있다는 점 등 이율배반적이고 상호모순적인 규정들이 난무하는 베를린 필의 내부 규정들이 사태를 확산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 양측은 서로를 상처내기 위한 결정을 하면서도 이것이 규정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항상 강조하였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갈등 당시, 이 갈등은 다분히 일부 단원들(목관 단원들) 중심으로 주도된 측면이 있다. 셸렌베르거, 라이스터, 코흐 등 목관수석들은 카라얀과 마찰을 일으켰던 대표적인 단원들이었다. 베를린 필의 관악기 수석들은 해당 악기의 최고의 명인으로 꼽히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단원들 가운데서도 이들의 예술적 위치는 남다를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베를린 필의 관악기 수석들은 베를린 필을 비롯한 여러 오케스트라들과 비일비재하게 협연하는 비르투오소 솔로이스트들이다. 오케스트라의 리허설 과정에서도 십여명 단위로 거의 일방적으로 지휘자의 지시를 받는 현악기 단원들과 달리 관악기 단원들은 개인이 한 파트를 담당하기 때문에 리허설 때 지휘자와 커뮤니케이션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단원들의 개별 인터뷰를 보면 카라얀에 대해 우호적인 단원들도 대단히 많았던 것 같다. 28년 동안 콘서트마스터로 재직했던 다니엘 스타브라바는 카라얀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독재자'는 아니었으며 단지 음악에 대한 주관과 고집이 확실한, 강력한 지도자였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카라얀을 싫어하는 단원도 있었지만 다수는 카라얀을 좋아했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이탈리아의 가벼운 스타일을 추구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갈등이 훨씬 컸다고 말하고 있다. 25년간 트럼펫 수석을 지냈던 콘라딘 그로트 역시 카라얀을 싫어했던 사람도 있지만 좋아하는 단원들도 많았으며, 자신은 카라얀의 의견은 거의 법과 같이 신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호른 부수석 스테판 예치어스키도 카라얀과 일부 단원들 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카라얀과 호른 파트는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였고 자신도 카라얀과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베를린 필과의 갈등의 와중에 있던 1983년 허리 통증이 극도로 악화되어 다시 수술을 받았다. 실패할 위험성도 높았던 수술이라 계속 미루다가 통증을 견디기 힘들어지자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 수술에 임했다고 한다. 허리 통증 때문에 자가용 비행기나 포르셰를 몰기 힘들어서 대신 헬기를 조종하여 수술 병원이 있는 하노버로 갔다고 한다...
84년 11월 일본을 거쳐 최초의 내한 공연을 가졌다. 당시 자비네 마이어 사건이 터지고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의 부가활동을 보이콧한지 근 반년만에 다시 복귀한 직후였기 때문에, 이 아시아 투어는 해외음악계에서도 제법을 관심을 모았었다. 일본으로 공연가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카라얀이었기에 아시아 투어에 임박해서 베를린 필에 복귀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당시 오사카 공연에서는 돈 후안의 시작 부분에서 앙상블이 엉켜서 중지하고 다시 처음부터 연주하는 망신을 겪기도 했는데,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갈데까지 간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나머지 연주는 좋았으며 DVD로까지 발매되기도 하였다. 며칠 후에 있던 내한 공연도 큰 찬사를 받았다. 내한 당시에 카라얀 부인이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예상치 않게도 지갑을 되찾게 되어 한국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내한 당시 카라얀은 외부인이 리허설을 몰래 참관하다가 걸리는 일이 발생하면 모든 공연을 취소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해를 넘겨 85년이 되어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수습단계에 들어갔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 모두에게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라얀은 빈 필과의 활동을 점차 늘려갔다.
1985년 빈 필, 빈 징베라인과 함께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하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 미사에서 모차르트의 대관미사를 지휘하였다. 이는 비오 10세에 의해 전례 중 오르간 외의 악기 연주가 금지된 이후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미사 때 오케스트라가 연주된 것이었다.
1987년 1월 1일에는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했으며, 이를 이유로 1986년 베를린 필의 송년음악회를 지휘하지 않아 베를린에서의 여론이 악화되었다.
1988년에는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총 6회로 예정된 돈 지오반니 공연을 3회밖에 지휘하지 못했다. 그해 하반기에는 건강 악화 때문에 베를린 필과의 공연을 취소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날 일본 투어를 위해 출국하자 베를린의 여론은 또 안좋아졌다. 한편 그해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일본 투어는 카라얀의 마지막 방일이 될 것이라는 예측 때문에 표를 구하기가 엄청 어려웠다고 한다.
1988년에 이르러 카라얀은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들(빈 필)과 더 많이 작업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1988년 11월, 카라얀이 만년에 남긴 최고의 녹음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을 녹음했다.
1989년 2월 빈 필과 뉴욕 투어에 나서 카네기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과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등을 공연하였다. 이 때 브루크너 8번은 대단한 일체감과 열기 속에서 연주되어 뉴욕 평단으로부터 격찬을 받았고, 빈 필 단원들도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 공연이었다고 한다. 사실 원래 이 공연은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순회공연으로 기획되었으나 취소되고 빈 필이 대타로 들어오게 된 공연이었다. 어쨌든 빈 필은 이때 뉴욕에서 열렬한 반응을 얻은 후 매년 3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Vienna Philharmonic Week이라 불리는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1989년 4월 24일 마침내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직에 사의를 표명했다. 카라얀은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허리와 관련하여 몇 차례 큰 수술을 받았고,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뇌졸중으로 베를린 필 지휘대에서 쓰러진 적도 있었다. 80년대 후반에는 건강 때문에 공연이 취소되는 경우도 많았다. 베를린 필 뿐만 아니라 카라얀이 진심으로 좋아했던 일본 공연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스케줄까지 취소했을 정도니 건강이 크게 나빠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건강 문제에 더해 베를린 필 및 베를린 주 정부와의 기싸움도 사임에 한 몫했다. 당시 베를린시는 새로 사민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사민당 정권은 카라얀과 베를린 필 모두에게 비판적이었다.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활발한 순회 공연 활동에 대해 이전 기민당 정권은 자유 베를린(서베를린)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이라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시의 재정적 지원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 정권을 잡은 사민당 정권은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외부 활동을 하며 높은 수익을 올리며 시의 재정적인 지원까지 받는 것을 몹시 못마땅해 했다. 사민당 정권은 전체 공연 스케줄의 3/4 이상을 베를린 밖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베를린' 필하모닉이냐면서 비판했다. 사민당 정부는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해외 공연을 줄이고 베를린 시민들을 위한 무료 공연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사민당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 상황에서, 카라얀은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과 정기연주회 횟수를 축소하는 것으로 계약을 변경할 것을 베를린 주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사민당 정부는 카라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4월 24일 카라얀은 베를린 주 정부 문화담당관과 만난 자리에서 결국 건강 문제로 더이상 계약상 명시된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어렵다면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는 카라얀 특유의 승부수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사민당 베를린 주 정부는 뜻밖에 사표를 수리(!)해 버렸다. 카라얀이 사표를 던진 바로 다음날 베를린 주정부는 언론을 통해 카라얀의 사임을 공식 발표했다. 카라얀이 사표를 던진 직후 카라얀을 지지하는 일부 베를린 필 단원들이 잘츠부르크에 있는 카라얀 자택까지 찾아왔지만 카라얀은 끝내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사임하기 직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베를린 필과 정부에서 오래전부터 추진해오던 이스라엘 순회공연 계획이 구체화되었는데, 그 일정이 1990년 4월로 잡혔다. 이를 두고 카라얀이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 때문에 4월에는 해외로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베를린 필이 일부러 카라얀 없이 가려고 4월로 일정을 잡았다고 보는 해석이 있다. 카라얀 역시 이에 대응하여 1990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에서 베를린 필을 대신할 호스트 오케스트라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섭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46] 카라얀이 1년만 더 오래 살았으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진귀한 장면이 연출될 뻔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에 사표를 던지기 전날인 4월 23일 카라얀의 마지막 녹음이 되어버린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 실황이 녹음되었다. 상당히 예외적으로 실황으로 녹음된 음반이었다. 빈 필 단원들의 회상에 따르면 원래는 실황이 아니라 평소와 같이 연주회 전 리허설 때 녹음이 진행될 계획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카라얀이 리허설 때 녹음을 진행하지 않더니 그냥 연주회를 라이브로 녹음해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고 한다. 이날 연주회는 정기연주회가 아닌 악우협회 주최 음악회라 재연없이 단 한번의 공연만 진행되었다. 다음날 카라얀은 베를린 주정부에 사의를 표했고, 다음날인 4월 25일, 카라얀의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직 사임이 언론에 공식 발표되었다.
7월 16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음악감독의 자격으로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 공연을 위한 리허설 기간 중[47]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이 때 그의 자택에는 부인 엘리에트는 산책을 나갔다가 들어와 씻던 중이고 그는 소니 사장 오가 노리오와 소니뮤직에서의 음반 발매와 아니프에 세워진 CD 공장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부터 좋지 않던 심장을 걱정한 주치의 발터 지몬이 심전도계를 가지고 왔음에도 중국 황제가 와도 방해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고, 이게 화근이 되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절친한 친구가 자기 보는 앞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 충격으로 얼마 후 오가도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며칠 후 자택이 있는 아니프 인근 성당에 매장되었다.
-고클래식 웹진 인용-
카라얀의 영결식은 일주일을 거쳐 7월 23일에 거행되었는데 쓰인 레퀴엠의 지휘는 리카르도 무티가 맡았다. 다만 베를린 필과의 관계는 틀어질대로 틀어진 지 오래라 무티의 지휘이긴 했지만 빈 필 하모닉과 빈 국립 오페라 합창단이 참여 했다. 사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도 추모 공연을 열었다. 오자와 세이지가 바흐 관현악 모음곡 3번 중 아리아를, 조지 숄티경이 베토벤 교향곡 3번 2악장을, 제임스 레바인이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일부를 지휘했고 당연히 빈 필하모닉과 빈 국립오페라 합창단이 연주에 참여했다.
DG와 오랫동안 몸담다보니 DG와 얽힌 이야기가 제법 많다. 데뷔 때와 70년대에 잠깐 EMI에 있다보니 역시 EMI와 얽힌 얘기조차 많으며 당시 소니 사장과 친해서 자신의 땅에 CD공장을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야망이 아주 컸는지 자신의 모든 녹음과 영상을 많이 남기려고 애썼으며, 그 결과 엄청난 레코딩이 남았고 이를 상술로 많이 써먹었다는 것은 전설. 고소 크리 먹이는 것을 좋아해서(?) 고소를 먹이는 일화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카라얀의 개관은 이 글을 읽어보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
[1] 당시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2]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안네 조피 폰 오터 등도 von을 사용하고 있다.[3] 물론 성부도 다르다.[4] 1920년대 당시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독일 사람들은 지폐를 양동이나 수레에 담아 날라야 했으며, 강도가 나타나 양동이에 있는 지폐는 버리고 양동이를 가지고 튀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5] 빈 필은 미국의 부호에게 지휘를 맡긴 흑역사가 있고, 베를린 필도 스스로 민간 오케스트라로서 자주성과 자부심을 포기하고 정부 보조금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6] 나치입당이 조건이라고 하는데 사실 당시 유태인 박해로 유태인 지휘자들이 대부분 독일을 떠났다. 그 예가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등. 결론적으로 카라얀은 출세를 위해 입당한 셈이다.[7] 당시 베를린 필 매니저가 리허설 없이 공연할 것을 요구하여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8] 엘미와는 나중에 이혼하기는 하지만 계속 친분을 유지해서, 카라얀이 세 번째 부인 엘리에트 사이에서 얻은 두 딸 이사벨과 아라벨의 숙모를 자처했다.[9] 일부 자료에서는 바이로이트 축제라고도 하지만, 카라얀이 공식적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처음 지휘한 것은 1951년이다.[10] 그래도 괴벨스가 카라얀을 싫어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괴벨스가 푸르트벵글러를 더 높이 평가하고 좋아했을 뿐. 카라얀 역시 괴벨스의 문화 선전에 쓰이긴 했다.[11] 연령 문제로 거절되었다는 얘기가 있다[12] 무엇 때문에 푸르트벵글러가 카라얀을 그토록 싫어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당시 그런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의 이름조차 부르기를 꺼려 K라고 불렀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는 지휘를 제2의 창조작업이라고 하며 지휘자의 주관적인 해석을 중요시했고 이의 대척점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인템포식 신즉물주의 연주를 매우 혐오했다. 카라얀은 당시 독일에서 토스카니니식 식즉물주의 해석의 대표 주자로 여겨져 언론에서 토스카라얀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 점이 푸르트벵글러가 카라얀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3] 물론 레그와 푸르트벵글러와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카라얀 때문만은 아니고 음악관의 차이 등 다른 이유도 있었다고도 하는데, 푸르트벵글러에게 있어서 토스카라얀의 음악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음악적인 식견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결국은 카라얀과 레그가 친한 게 주원인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 밖에도 월터 레그가 가끔 단원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을 보고 푸르트벵글러는 레그가 음악적인 지시를 한다고 생각하여 무척 언짢아했다고 하는데, 레그는 오케스트라의 오너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 이는 미묘한 문제다.[14] 하지만 1952년 트리스탄과 이졸데 녹음에서는 월터 레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하였다. 까다로운 푸르트벵글러와의 녹음 작업 때문에 레그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녹음이 끝난 후 매우 만족했던 푸르트벵글러는 음반표지에 레그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할 정도였다. 물론 푸르트벵글러와 레그의 해빙 무드는 일시적인 것이었다.[15] 카라얀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최고이며 앞으로 영국에서는 필하모니아와만 협업하겠다고 했는데 정작 단원들은 카라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듯하다.[16] 월터 레그는 사비로 유럽 순회 공연을 준비했고, 이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을 입었다.[17] 당시 빈 심포니에는 정식 상임지휘자 제도가 없었다. 다만 빈 심포니 홈페이지에서는 악단을 거쳐간 위대한 지휘자 중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18] 니벨룽겐의 반지는 총 2회 연주되었는데 카라얀과 크나퍼츠부쉬가 각각 1회씩 지휘했다.[19] 당시에는 한 극장에 소속된 가수가 다른 극장 무대에 서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시절이었다.[20] 토스카니니는 1937년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지휘한 바 있는데 이때인 듯하다. 자신의 수족인 NBC 심포니에서는 잘 안 풀리면 엄청난 분노를 폭발했던 토스카니니였지만, 거의 지휘해본 적이 없었던 빈 필에서 대놓고 화내기는 그래서 빈 방에서 혼자 화풀이하고 있었던 듯하다.[21] 카라얀에게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푸르트벵글러는 너무 세세한 실수에 집착하는 첼리비다케가 베를린 필을 망치고 있다고 말하며 그를 멀리하게 되었는데, 첼리비다케 역시 그냥 C라고 불렀다. 이외에도 푸르트벵글러는 별로 내키지 않는 사람들을 이니셜로 부르곤 했다.[22] 실제로 요훔은 푸르트벵글러와 가장 친한 지휘자이기도 했다.[23] 푸르트벵글러의 청력이 극도로 악화되어 1954년 9월 중순 베를린 필과의 리허설 도중에 더이상 진행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푸르트벵글러는 '이제 끝이군요'라는 말을 끝으로 지휘대를 떠났고 이후 칩거에 들어간 상황이었다.[24] 이것이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한때 가쉽거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25] 하지만 모자 간의 갈등 끝에 어머니가 스스로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26] 당시 칼 뵘은 모종의 스캔들에 휘말렸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27] 빈 필은 엄청난 연주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다른 오페라 하우스와 달리 거의 연중 내내 공연이 있는데다가 비독일계 오페라 하우스와 달리 레퍼토리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공연하는 오페라가 바뀌었다. 때문에 빈 국립 오페라의 리허설은 주요 부분만 선별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이외의 부분은 리허설 없이 바로 실제 공연에 들어갔다. 때문에 실제 공연에서 단원들과 지휘자, 성악가들은 서로 극도로 집중해서 호흡을 맞춰야 했다.[28] 당시 데이비드 빅넬과 월터 레그 등 EMI 클래식 부서에서는 카라얀은 동시대 거장 지휘자들 중 가장 유망한 지휘자 중 한 명으로 클렘페러, 스토코프스키 등의 거장 지휘자들은 곧 없어질 것이지만 그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활동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EMI 경영진들은 카랴얀보다는 존 바비롤리가 더 대세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29] 베를린 남부의 교외 지역. 베를린 자유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30] 필하모니 개관직후 녹음을 하는 오이겐 요훔이 카라얀에게 녹음하기 적합하지 않다고 조언한 것이 주요했다.[31] 빈 국립 가극장을 사임했기 때문에 이전에 세금 문제도 이제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32]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단장 루돌프 빙은 카라얀이 메트 오페라를 지휘하고 오케스트라 실력에 실망할까 염려했고 이는 사실이 되었다.[33] 1966년 1월 2일,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34] 1967년 4월,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와의 협연이다. 영상의 품질이 상당히 좋다.[35] 그래도 표를 구할 수가 없어 화장실 등을 통해 몰래 입장한 학생들도 있었는데 현재 세계적인 지휘자로 활동하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세묜 비치코프(...). 드라마틱한 것이 모스크바 음악홀의 배관을 타고 올라가 여자 화장실로 침투한 후 공연을 보다가 걸려서 쫓겨났다고(...)[36] 애초에 이 공연 자체가 동독의 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동베를린은 동독의 수도였기 때문에 서베를린 소속의 베를린 필이 베를린시 전체의 대표성을 지닌 명칭으로 공연하는 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37] 첫날 공연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1번이어서 카라얀은 쳄발로를 치며 지휘했다. 이날 두번째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38]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카라얀은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를 보고 동행한 소련 공무원에게 안개가 너무 심해 길을 잃을 것 같아 내릴 수 없다는 뼈있는 농담을 했다.[39] 카라얀은 1960년대 중반에 이미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을 DG를 통해 녹음 했는데 1969년 모스크바 실황. 이후 1976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1981년에 다시 DG를 통해 녹음된 것 이렇게 4번을 제외하고 그 외에 연주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공산진영에서 가장 위대한 지휘자는 므라빈스키로 인식되었고 그가 남긴 명반들도 차이콥스나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곡이 주를 이루었다. 카라얀이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만 거의 하던 므라빈스키의 연주를 듣고 강력한 사운드와 표현력에 감동하고 동경했다고 한다. 카라얀은 므라빈스키를 존경하는 선에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을 연주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라이벌로 인식되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주 레퍼토리인 말러나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미국에 망명한 작곡가의 음악들을 연주했다고 볼 수도 있다.[40] 카라얀은 1963년에 빈 국립 가극장을 떠나면서 오스트리아에서 지휘를 할 일이 없을것이라 했다 얼마 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총괄하면서 빈에서 지휘할 일이 없을것이라 일축했고 결국 이 공연 이후로 그 말을 취소했다.[41] 몇 달 전 바이올린 연주자 한 명이 베를린 필 최초의 여성 연주자로 입단했지만, 관악기 파트에서는 자비네가 최초의 여성 단원이었다. 스물세 살 여성 연주자를 그것도 '수석' 자리에 앉히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42] 푸르트벵글러 때도 비독일인 단원은 있었다. 플룻 수석 오렐 니콜레 등[43] 카라얀은 이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주자인 앨런 시빌에게 베를린 필의 호른수석자리를 제의했지만, 앨런 시빌은 고심 끝에 자녀 교육 문제 등으로 카라얀의 제의를 거절한한 바 있었다.[44] 지금 자비네 마이어가 클라리넷 연주에서 미치는 영향력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클라리넷의 여제.[45] 현재 소니에서 발매되고 있는 모든 영상물이 텔레몬디알에서 제작한 것이다.[46] 빈 필은 시즌 중 거의 매일 오페라 공연이 있기 때문에 부활절 페스티벌에는 참여할 수가 없다. 때문에 부활절 페스티벌은 오페라 경험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이 호스트 오케스트라를 맡게 된 것.[47] 이 공연에는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1941~), 레오 누치(Leo Nucci·1942~), 조세핀 바스토우(Josephine Barstow·1940~) 등과 함께 한국인 소프라노 조수미가 오스카 역으로 참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