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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21:28:56

헤이즈 오피스

헤이즈 코드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
2.1. 출범 배경2.2. 제한 사항2.3. 폐지
3. 관련 항목


1. 개요

Hays Office

1930년대 초기부터 1950년대까지[1] 실질적으로 할리우드를 지배했었던 검열기관. 진정한 의미에서 미국 영화의 표현의 자유심의가 충돌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었다.

2. 역사

2.1. 출범 배경

1910년대에 미국 영화는 상당한 대중매체화가 진행되며 인기가 높아졌다. 그러나 영화의 소재 및 내용에 대하여 정해진 제한이 없다시피 했고, 몇몇 영화들은 (요즘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지만)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수위가 높았다고 한다.[2] 이에 영화란 매체의 폭력성, 선정성에 대하여 저명 인사, 언론계, 시민단체 등이 속속 문제를 제기하면서 관련된 논쟁이 연이어 나타나기 시작했고, 1915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영화가 수정헌법 1조를 적용받을 자격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Mutual Film Corporation v. Industrial Commission of Ohio case)을 선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21년에 인기 코미디 영화 배우 로스코 아버클의 살인사건 연루 스캔들이 파장을 일으키며 영화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빠르게 추락하게 되었고, 다수의 주 정부가 검열 위원회 설립을 추진하는 동시에 정치인들도 영화에 대한 검열 법안들을 발의하는 등 영화계에 대한 압력이 높아져가고 있었다.

휘몰아치던 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윌리엄 헤이즈를 포함한 할리우드 영화사의 관계자들은 정부의 영화 검열과 금지 행위 간섭을 막도록 자율적인 제작 규정을 만들기로 논의해, 구체적인 제한 사항들을 명시한 영화 제작 규정을 1930년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MPPDA[현]의 초대 회장이자 규정 시행에 큰 영향을 끼친 윌리엄 해리슨 헤이즈(Will H. Hays)의 이름을 딴 '헤이즈 코드(Hays Code)'란 별명으로 더 유명해진다. 처음에 규정은 4년 동안 완만한 강도로 시행되었으며 대공황의 여파를 타개하기 위해 영화사들이 대중한테 다소 자극적인 영화들을 제작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에 매거진을 포함한 언론계에서 조롱적인 논조의 기사들이 여럿 실릴 정도로 유명무실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1920년대까지 각 주들마다 설립된 주립 검열 위원회의 결정으로 인해 개봉될 예정이던 영화가 어떤 주에선 부분적인 편집을 하거나 어떤 주에선 상영이 금지된 사례는 많이 나타났다.

한창 상영되고 있던 프리 코드 영화들에 대해 다른 한편에선 점점 많은 불만과 비난이 일었는데, 1933년 설립된 종교 단체 가톨릭 품위 군단의 자체 등급 제정과 영화에 대한 보이콧과, 페인 펀드 스터디에서 진행한 영화가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5년간의(1927년 ~ 1932년) 연구 자료가 베스트셀러 도서 목록에 실릴 만큼 팔리면서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풍조가 다시금 발현되기 시작했다. 사회적 환경의 변화는 많은 언론 매거진이 해당 자료를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해 불리하게 작용해 정치적인 통제의 증가라는 악영향을 끼쳐, 헤이즈 코드는 1934년 6월 13일 설립된 규정 집행 사무국(PCA)에서 같은 해 7월 1일 이후 개봉한 모든 영화가 제작 규정의 승인 증명을 받아야 하는 개정안의 채택과, 같은 해 가톨릭 품위 군단의 회원들한테 높은 인지도가 있었던 조셉 브린(Joseph Breen)[4]이 PCA의 책임자로 부임하고 1954년 은퇴할 때까지 더욱 꼼꼼하게 개정되어 1950년대 전반까지 미국 영화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화감독, 각본가, 영화 제작자들한테 있어선 무척 충격적인 일이었으며 영화 배우들도 규정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게되었다. 물론 이런 규제 속에서도 <말타의 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시민 케인> 등의 명작들도 배출되었다.

2.2. 제한 사항


이를 해석하면 영화에서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는 영웅극, 사상, 성별 대결, 공포, 범죄(갱스터), SF, 판타지 등의 여러 주제들을 완전히 봉쇄할 수도 있는 규정이다. 게다가 좀더 자세히 보면 유용하게 사용이 가능한 영화의 스토리적 장치들도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실제로 1930~50년대에 개봉한 미국 영화들을 보면 표현을 완곡하게 돌려서 묘사 & 연출하는 영화들이 많았고, 스탠리 큐브릭이 활동 초기에 서유럽(영국)으로 이주했던 결정적인 계기도 영화 제작 규정의 제한과 간섭을 벗어나 영화를 제작하기에 보다 자유로운 여건의 환경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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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 Shalt Not”.
헤이즈 코드의 규제 사항을 한 컷으로 요약해주는 짤. 사진작가 A. L. ‘Whitey’ Schafer[19]의 1940년도 풍자 사진 작품.

2.3. 폐지

1948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판결한 파라마운트 판결의 영향으로 MPAA[20]의 미국 내에서 상영되는 외국 영화에 대한 제작 규정의 적용과 여덟 영화사들[21]의 영화계 겸업&겸영이 사문화&금지되었으며, 독립 영화관의 설립이 증가하면서 할리우드의 영화 시스템을 벗어난 제작자들과 독립 스튜디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텔레비전이 빠르게 대중화된 것과 영화관 티켓 가격 인상의 영향으로 미국인들이 영화관을 가지 않는 풍조가 생겨 수년 간 할리우드는 고전하기도 했으며, 파라마운트 판결로 규정에 제약받지 않고 상영이 가능해진 외국 영화들과 비교하여 퀄리티가 상향되지 못한 문제점을 겪었다.

1950년 이탈리아 영화 기적(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뉴욕 상영 이후 논쟁으로 국가 품위 군단(National Legion of Decency)[22]을 위시로 한 미디어 워치독의 비난에 영화 업계인들의 항의와 대립이 일었고, 2년 후 연방대법원이 판결한 미라클 판결(Miracle Decision)은 1915년의 오하이오 주 대 Mutual Film Corporation 판결을 뒤집고 영화가 수정헌법 1조에 따라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예술적 매체임을 상기시켜 줬으며, 영화에 대한 PCA의 규제 정당성 상실과 할리우드에서 헤이즈 코드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본격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1952년의 조셉 버스틴 대 윌슨 판결 이후 50년대 중기부터 헤이즈 코드의 세부 사항이 일부 개정되면서 제작진이 영화에서 표현 & 묘사할 수 있는 소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오토 프레밍거가 제작한 일부 영화들[23]빌리 와일더뜨거운 것이 좋아가 흥행을 거두면서 강력했던 규정의 위상이 무너질 조짐을 보였고, 1950년대 후기부턴 지난 여름, 갑자기(1959), 사이코(영화), The Dark at the Top of the Stairs(1960)처럼 조금 더 노골적인 주제를 연출한 영화들도 제작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에 개봉한 영국 영화들(Victim(1961), A Taste of Honey(1961), The Leather Boys(1963))은 성적인 주제를 다룸에도 1948년 파라마운트 판결 이후 외국 영화의 규정 적용이 해제되어 PCA의 영향력을 벗어나 미국 내 상영에 대한 제약을 피할 수 있었다. 1964년 개봉한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다룬 시드니 루멧의 전당포 업자가 신체 부위 노출이 나와도 승인 증명을 받은 첫 번째 영화로 뉴욕 타임스에 기사가 보도되는 주목을 끌었고, 1966년에 개봉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SMA[24] 라벨을 적용받은 첫 영화로 기록되었다. 전년도에(1965년) 판결한 연방대법원의 Freedman v. Maryland 판결은 미국 정부기관[25]의 영화 상영 검열에 대한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1966년 MGM이 배급한 영국 영화 욕망은 에로틱한 장면이 묘사된 이유로[26] 인하여 승인 증명을 받지 못했지만 상영을 막지 못하고 제작비의 열 배를 넘는 흥행을 거둘 만큼 규정의 영향력이 완전히 유명무실해지자, 1966년 MPAA의 신임 회장으로 선출된 잭 발렌티(Jack Valenti)는 현재와 가까운 영상물 등급제 시스템을 개발해 1968년 11월 1일부터 시행하면서 영화 제작 규정(헤이즈 코드)과 그에 기반되었던 영화 제작의 제한들이[27]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영화 제작 규정의 폐지와 영상물 등급제의 시행은 뉴 할리우드의 유행에 촉매체로 작용하여 현대 미국 영화사에 막대한 변화를 불러왔고, HBO 등의 매체가 나타나는 간접적인 계기도 남겨준 바 있었다. 또한 헤이즈 코드가 폐지되면서 규정 적용 이전에(& 1934년 규정이 더 강화되기 이전) 제작되었던 프리 코드 영화들에 대한 미국 내 극장들의 상영에 대한 제한도 완전히 해제되어 해당 작품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재평가를 불러오는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3. 관련 항목


[1] 시행 시기는 1968년까지였으나, 1950년대 중기부턴 여러 내외적인 요인들로 인해 규정이 약화되는 조짐을 보였다.[2] 규정 시행 이전의 영화를 총칭해 pre-code films, Pre-code movies로 부르기도 한다.[현] 미국영화협회의 전신 기구[4] 인생사에 대해선 링크를 참조할 것. 참고로 아들이 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이자 상이군인이었는데 전후 잠깐 배우 생활을 해 장 르누아르의 <강>에서 인도를 방문한 미국인 상이군인 역으로 나오기도 했다. 정작 르누아르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아들은 이후 은퇴했고 2000년 타계했다.[5] 해당 사항을 준수하기 위해 제작 중인 영화들의 시나리오와 각본을 부분적으로 바꿔야 했었던 작품들이 많았다. 사례들은 tv tropes의 hays code 문서 tropes 문단을 참조할 것.[6]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에선 일부 예외 사례가 있었다. (Woody Woodpecker의 The Screwdriver와 루니 툰의 Thugs With With Dirty Mugs 등)[7] 해당 사항의 위반으로 판단되어 승인 증명이 거부된 것과 주연 배우의 일부 노출 씬으로 하워드 휴즈가 제작했던 1943년 영화 무법자는 첫 개봉 얼마 뒤에 상영이 취소당해, 3년 뒤 재개봉을 하면서 흥행에 성공했다.[8] 루니 툰의 검열된 11편(censored eleven) 중 clean pastures 편이 1937년 개봉 당시 PCA 측이 규정에 위반됨을 이유로 지적해서 거의 상영금지될 뻔했던 후문이 있었다.[9] 여러 잔 정도를 마시거나 배역이 숙취한 장면의 경우처럼 가볍게 표현되거나 알코올을 포함한 약물들을 오남용해 이에 대한 악영향을 중점적으로 다룬 연출이 미비한 작품들은 규제에서 제외되었다.[10] 햄릿, 스파르타쿠스서부극을 포함한 고전, 중세, 근대의 역사(주로 20세기 이전)를 주제로 다룬 영화는 해당 사항에서 사실상 예외였다.[11] 규정 시행기간 동안 (68운동 이전까지) 성소수자에 대한 대체적인 인식은 서구권에서도 우호적이지 않았다.[12] 흑인민권운동으로 인식이 달라지기 이전에, 혼혈 미국인들은 한방울 원칙으로 비백인 취급을 받는 일이 많았다.[13] 미국 흑인, 아시아계 미국인, 히스패닉,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 묘사는 해당 사항에서 대체로 예외였다. 하지만 1950년대 중기부터 애니메이션에서 미국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묘사가 사문화하는 등의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14]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은 1939년 당시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15] 1968년작 혹성탈출 1편에선 마지막에 이 욕설이 사용되었지만 개봉한 시기가 등급제로 전환하기 직전인지라 규정에 걸리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등급제가 시작된 것은 1972년 대부 즈음부터로, 대부는 R등급을 받았다.[16] 다만 헤이즈 코드가 시작된 시기에도 미국에선 대놓고 화장실 유머를 하는게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던 모습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으며, 앨프리드 히치콕의 1960년작 '싸이코'에서 최초로 변기가 나왔다.[17] 1940년대 이전의 미국에서 반유대주의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꺼리는 여론도 많았다.[18] 이런 사항에 최대한 걸리지 않기 위해 톰과 제리루니 툰처럼 황금기에 제작된 미국 애니메이션들에선 캐릭터들이 짧고 빠르게 연달아서 키스를 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었다.[19] 1920년대부터 50년대까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던 사진작가로 주로 유명 배우들의 포트레이트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작가이다.[20] 미국영화협회(1922년 설립)의 약칭.[21] 이들 중 5곳(MGM,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 컬럼비아 픽처스, RKO 라디오 픽쳐스)은 Big 5이자 할리우드 업계의 메이저 배급사들이었다.[22] 문서 참조 초창기의 명칭은 가톨릭 품위 군단(Catholic Legion of Decency)으로 창립 당시 신시내티의 가톨릭 대주교 존 T. 맥클라스를 포함한 가톨릭 신자들을 주축으로 설립된 종교 단체이며, 미국에서 제작 & 개봉되던 영화들을 자체적으로 검토하고 등급을 매기며 기독교의 품위와 도덕을 훼손하지 않는 영화에 대한 후원을 서약한 가톨릭 신자 회원들의 영향력과 개신교를 포함한 다른 기독교 종파들도 영화에 대한 PCA의 검열과 NLD의 행동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단체의 최전성기인 1950년대 초까진 미국 영화들의 흥행을 실질적으로 판가름할 영향력을 자랑했다. 영향력이 약화된 계기는 연방대법원의 조셉 버스틴 대 윌슨 판결과, 1957년 교황 비오 12세의 miranda prorsus 회칙 발표, 단체 내 회원들의 세대 교체 등이 크게 작용했다.[23] 푸른 달(1953)과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1955)를 제작하는 중에 영화의 내용, 주제를 두고 PCA가 규정 승인 증명을 거부했지만, 이러한 제약에 반대한 프레밍거의 항거와 그에 동참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 MPAA와 PCA에 여러 번 항소를 제기한 소동이 벌어졌었고, 국가 품위 군단에서도 낮은 등급을 매겼으며 주립 검열 위원회의 결정으로 상영이 금지된 주도 여럿 있었지만 두 영화 모두 양호한 실적을 거두며 흥행하였다.[24] Suggested for Mature Audiences[25] 자세한 정보는 미국의 영화 검열 영어 위키피디아 문서 참조[26] 가슴부터 잠깐이지만 음모가 노출되는 등 성적 묘사가 있는 영화였다.[27]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등급 배정과 관련해 제작진이나 영화사에서 일부 장면을 편집하는 사례들이 2020년대 현재에도 종종 나오지만, 이전처럼 영화의 제작 과정에서 관리 당국이나 기관의 규정에 따르던 제약들은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