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c224> 호세 리살 José Rizal | |
<colbgcolor=#233F89> 본명 | 호세 프로타시오 리잘 메르카도 이 알론소 레알론다 José Protasio Rizal Mercado y Alonso Realonda |
출생 | 1861년 6월 19일 |
스페인 제국 필리핀 도독령 라구나주 칼람바 | |
사망 | 1896년 12월 30일 (향년 35세) |
스페인 제국 필리핀 도독령 마닐라 바굼바얀 | |
신체 | 161cm[1], 약 45kg[2] |
학력 | 산토 토마스 대학교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
배우자 | 조세핀 브랙켄 |
종교 | 가톨릭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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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핀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의사, 발명가, 번역가, 사업가, 교육가 그리고 작가이다. 라몬 막사이사이와 함께 필리핀의 국부로 추앙받는다.스페인어 발음으로는 호세 리살[3]이지만 필리핀 현지에서는 리잘이라고 불린다.
2. 유학 시절
상글레이, 일본인, 타갈로그인, 스페인 메스티소 등이 혼혈된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지식인 일루스트라도스 중에서도 상류층에 속했다.부유한 스페인계 혼혈 자제나 스페인 식민지 당국의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학교인 산토 토마스대학을 졸업한 뒤 의사가 되기 위해 스페인으로 유학을 갔다.
스페인 명문대인 우니베르시닷 센트랄 데 마드리드(현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도 단기간에 해내어, 파리 대학과 베를린에서도 공부하였다. 당대 석학 중 한명인 루돌프 피르호의 추천을 받아 베를린 학회에 입회하였다. 여기서도 그는 여러 유럽 학자들에게 인정 받았다. 짧은 시간안에 숙달한 독일어로 학회에서 강의를 하는 그를 보고 유대인들도 놀라워했다. 오늘날의 필리핀인들이 2~4개의 언어를 구사하는데 비해 그는 19세기에 총 22개 국어를 일부는 능수능란하게, 나머지는 모두 기초이상으로 구사하고 작문할 수 있었다. 부유한 집안이였기 때문에 유럽에서의 장기체류와 그의 학습욕구를 채우는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흔치않은, 보기드문 천재였다.
25세에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의사면허를 얻었다. 전공은 안과였으며 약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외에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인류학, 수학, 건축, 예술 등을 몇 개 정도의 언어로 숙달하거나 재능을 보였다. 당대 유명교수나 학자들이 엄청나다고 표현한 기록이 한 두개가 아니다. 당시에도 천재라는 평을 받았고, 현재 문헌 연구에도 천재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여러 정황들이 여럿 발견된다. 공부에만 몰두한 단순히 학생이 아니라, 권총 사격, 펜싱, 무술도 자주했고 보통이상의 준수한 실력이었다고 한다.
돈, 명예, 권력, 사치 등 세속적인 가치를 최고로 여겼던 그 당시 필리핀인들과 다르게 그가 가치있다고 여긴것은 서양 학문이였고, 만약 젊은 그가 독립운동을 하지않고 계속해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면 다방면에 뛰어난 천재학자로 족적을 남겼을 것이란 평이 많다.
리잘은 스페인에 체류하는 동포들에게 도박과 나태함을 금하고 성실하고 근면한 민족으로 인정받자는 편지글 형식의《동포들에게》를 발표하여 계몽 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그는 '나태하고 야만스런' 필리핀인에게 문명을 전해준 스페인 식민제국의 식민통치가 정당하다고 자화자찬하는 책《수세소스 데 라스 이슬라스 필리피나스》(sucesos de las islas filipinas, 필리핀의 성공)에 대한 반박 글을 발표했고 스페인 필리핀 도독부의 관리, 대농장주, 스페인 신부들이 필리핀인들을 우둔한 이미지로 왜곡하여 식민제국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식민주의 현실을 폭로하는《놀리 메 탕헤레》(Noli Me Tángere, 나를 만지지 마라)[4]라는 소설을 발표했는데, 스페인 식민지배의 악랄함과 모순에 대한 비판론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 소설은 조국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지만 자유주의 사조가 유행하던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스페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호응을 얻었고, 이로 인해 스페인 정부는 리잘을 필리핀으로 추방하였다.
리잘이 스페인에 유학을 갔을 당시 리잘의 형도 스페인에 유학을 와 있었다.
3. 혁명 활동과 최후
추방 이후 리잘은 본격적인 혁명 및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리잘은 스페인 정부에 식민 통치의 민주적 개혁을 요구함과 동시에 필리핀인들과 함께 자치 운동을 벌였으며, 리잘과 동시기에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무장 독립 투쟁 운동과는 다르게 평화주의적 독립 운동을 추구하였다.
리잘은 1892년부터 필리핀 독립 운동의 지도 기관인 필리핀 민족 동맹을 결성해 독립 운동을 지휘하였고, 그의 활동을 주목하던 스페인 총독부에 의해 1896년 10월 6일 쿠바로 가던 중 스페인에서 체포되어 민다나오 섬 다피탄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리잘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진료소를 만들어 무료로 주민들을 치료해주거나 현지 청소년들에게 기본적인 소양과 애족과 애민사상을 교육시키는 교육자이자 농장을 경영하여 농작물을 판매하는 등 농업인 겸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심지어 벽돌을 만드는 나무틀과 술파칸 (Sulpakan)이라는 시가 전용 라이터를 발명하여 발명가의 기질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후 스페인 정부는 무장 독립 투쟁의 배후라는 누명을 씌워 리잘을 체포하였고, 마닐라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는 변호사 없이 스스로를 변호했으나 끝내 누명을 쓰게 된다. 그 뒤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내에 있는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 감옥으로 이감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군법에 의해 반역, 선동, 그리고 내란음모 혐의로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리잘의 처형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평화적 혁명 운동을 지지하거나 그에게 감화했던 스페인과 필리핀 식민지 병사들의 탄원이 이어졌지만, 결국 탄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896년 12월 30일 마닐라에서 공개 총살형을 당해 숨졌다. 리잘은 죽기 전에 자신을 쏘려던 스페인군 소속 필리핀인들에게 뒤돌아서 등에 총을 맞고 쓰러졌으며,[5] 그래서 필리핀에 세워진 그의 최후를 재현한 동상도 등에 총을 맞은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하지만 리잘은 등에 총을 맞고도 죽지 않아 형을 집행하던 스페인 장교가 확인사살을 했고, 사후 호세 리잘의 시체는 스페인 식민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져 현재까지 찾지 못한 상태다.
리잘의 죽음은 필리핀인들의 가슴에 독립 의지를 불지르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그의 영향을 받은 에밀리오 아기날도,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등 많은 청년들이 필리핀의 독립 투쟁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리잘의 미망인 조세핀 역시 무장조직인 카티푸난에 들어가 참전한다. 그 결과 필리핀 제1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비록 당시에는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필리핀을 할양받은 미국이 개입해 독립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필리핀인들에 의해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되었다.
리잘이 죽고 나서 어머니와의 마지막 면회에서 어머니를 따라온 하녀에게 건네준 등잔의 밑바닥에서 그가 숨겨놓은 듯한 편지가 발견된다. 이른바 '마지막 인사(Mi último adiós, My Last Farewell[6])'이라는 절명시인데, 필리핀에서는 아주 유명한 시다.
Adiós, Patria adorada, región del sol querida,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나라여,
Perla del mar de oriente, nuestro perdido Edén!
동방의 진주여, 잃어버린 에덴이여!
A darte voy alegre la triste mustia vida,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너를 위해 바치리니
Y fuera más brillante, más fresca, más florida,
이제 내 생명이 더 밝아지고 새로워지리니
También por ti la diera, la diera por tu bien.
나의 생명 마지막 순간까지 너 위해 즐겁게 바치리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나라여,
Perla del mar de oriente, nuestro perdido Edén!
동방의 진주여, 잃어버린 에덴이여!
A darte voy alegre la triste mustia vida,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너를 위해 바치리니
Y fuera más brillante, más fresca, más florida,
이제 내 생명이 더 밝아지고 새로워지리니
También por ti la diera, la diera por tu bien.
나의 생명 마지막 순간까지 너 위해 즐겁게 바치리
그가 사망한 후 베를린 학회에서는 그를 추모하였고, 추도사에서 루돌프 피르호는 위의 시를 독일어로 낭독하였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도 그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다.
4. 기념
- 수도 마닐라엔 그를 추모하는 리잘 공원 (Rizal's park)이있으며 필리핀 정부군 의장대가 경계를 선다.
- 리잘을 성자로 추앙하여 리잘을 섬기는 소수의 종교집단이 있다. 리잘을 기념하는 날에 리잘공원에서 종교행사를 가진다.
- 필리핀의 대부분의 대학교에선 《리잘의 생애》라는 교과가 편성되어 있다. 이때 그의 어록 중 “총알 한 발이 흘리는 피보다도 잉크 한 방울이 더욱 강하다”란 발언을 강조한다.[7] 폭력적인 억압을 상대론 무혈투쟁이 명분을 지키기 유리하여 승리할 거란 뜻.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의 말이 맞긴 했다.
- 필리핀 페소에서도 전통적으로 도안으로 많이 쓰였으며, 현재는 1페소 동전에 그려져 있다.
- 국영방송인 GMA에서 제작하고 송출되는 필리핀 국가 영상엔 리잘이 수감되어 《마지막 편지》를 쓰고 스페인 군인들에 의해 총살되어 순국하는 장면이 나온다.
- 필리핀 해군의 첫 방공호위함인 호세 리잘급의 초도함의 함명으로 사용되었다.
4.1. 기념일
- 12월 30일은 그가 처형 당한 날로 호세 리잘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 라구나 주에서는 매년 리잘의 생일인 6월 19일 공휴일로 기념한다고 한다.
4.2. 기념지
-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의 로하스 거리(Roxas Street)에 그를 기념해 리잘 공원이 세워졌다. 리잘 공원 한 켠에는 호세 리잘의 처형 장면을 재현해 놓은 동상들이 설치 되고 훗날 관광지화가 되었다.
- 그가 수감된 산티아고 요새 감옥 근처에는 호세 리잘 기념관이 세워졌다.
- 리잘 주(州)의 주명도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 필리핀의 국립경기장도 그를 기념한 리잘 기념 경기장(Rizal Memorial Stadium)이다. 스포츠단지 전체의 이름이 리잘 메모리얼 스포츠 컴플렉스 이며, 리잘 기념 경기장을 비롯하여 리잘 기념 야구 스타디움, 리잘 메모리얼 콜로세움, 리잘 기념 수영장 등 리잘을 기념하는 명칭의 경기장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리잘 다목적 아레나는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의 남편이자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의 아버지인 베니그노 아키노 주니어를 기념하기 위해 애칭인 니노이를 따 니노이 아키노 스타디움으로 변경되었다.
5. 여담
- 호세 리잘은 필리핀 독립운동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저작은 모두 타갈로그어가 아니라 스페인어로 쓰여 있다. 사실 리잘뿐만 아니라 당시 필리핀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현지에서 스페인 문화를 받아들여 토착 귀족층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스페인 식민 체제에서 교육을 받아 스페인어를 모어로 쓰던 사람들이었다. 타갈로그어가 필리핀인들에게 국가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진 건 리잘이 죽고 몇십 년 지난 후이다.
- 혈통은 화교지만 중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스스로를 필리핀인이라 여겼다. 당연한게 이런 화교들인 상글레이는 무려 300년~1000년도 넘게 이전부터 필리핀에 와서 스페인 치하에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중국계라는 자부심은커녕 중국인의 정체성조차도 없었다. 물론, 중국이야 중국계라고 자랑하며 중국-필리핀 관계에서 실컷 우려먹고 있지만 말이다.
6. 매체
- 철권 시리즈의 캐릭터 조시 리잘은 호세 리잘의 여성형이며 실제로 이를 의도하고 작명된 이름이다.
[1] 출처[2] 출처 미국 사이트에서 호세 리잘의 체중을 45kg으로 추정했다.[3] 스페인어에서 z는 영어 th(본토 기준), s(중남미 기준)처럼 발음된다.[4]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나오는 말로 부활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나아갈 준비가 안 되었으니 나를 만지지 마라"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여 제목으로 썼다. 이 소설은 2015년에 전2권으로 한국에도 번역되었다. 교과서에는 “나에게 손대지 마라” 라고 쓰여있다.[5] 경위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가지인데, 자신을 쏘는 병사들에게 “너희도 피해자일 뿐이니 죄책감 가지지 말라”는 뜻으로 그랬다는 추측도 있고, 공개처형 당시 대중을 바라보고 죽음으로서 민족적 고취를 하려 했다는 해석도 많다. 지금은 후자가 더 지배적이지만 호세 리잘은 죽기 직전 그에 대한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기에 사람 심정을 산 사람은 알기가 어려우니(...)[6] 알 수 없는 이유로 원고에는 서명도 없고 제목도 없어 본인이 지은 제목은 알 수 없으나, 이 시는 보통 '마지막 인사'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7] 정확한 출처는 불명인데 어쨌든 우려먹기엔 좋아서 오늘도 우려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