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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8:27

홍길동(조선)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조선 초의 실존 인물 홍길동(洪吉同).

2. 생애

"국적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해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때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시오소서"
조선왕조실록 1500년(연산군 6년. 경신년) 10월 22일(계묘) 기사[1]
의금부의 위관(委官) 한치형(韓致亨)이 아뢰기를, "강도 홍길동(洪吉同)이 옥정자(玉頂子)와 홍대(紅帶)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官府)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그 권농(勸農)이나 이정(里正)들과 유향소(留鄕所)의 품관(品官)들이 어찌 이를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체포하여 고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을 모두 변방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하리까."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39권, 연산 6년 12월 29일 (기유) 기사
"그리고 이 도둑들은 옥관자(玉貫子)를 갖추고 있다 하니 홍길동이 당상(堂上)의 의장(儀章)을 갖추고 있던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중종실록 70권, 중종 26년 1월 1일(병술) 기사

조선 시대에 실존했던 유명한 전국구 도적.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2] 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편에 기록되어 있다. 정승과 판서를 지낸 소설판 홍길동만큼은 아니지만 여기 홍길동도 아버지 홍상직이 무관직을 지낸 적 있는 양반 집안이었다. 조정의 고위직과는 거리가 있는 종성절제사(鍾城節制使)를 지냈다.

홍상직의 아버지 홍징은 고려 말 권신 염제신의 사위였다. 염제신의 아들이면서 이인임의 수족이었던 염흥방과는 처남 매부 관계라서 무진피화 때 염흥방 일파로 몰려 아버지 홍징과 다른 형제들은 처형됐고 홍상직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전라도 장성으로 은둔해 터를 잡았다.

홍상직의 외손자는, 연산군 시기에 영의정을 지내고 후일 반정에 가담하는 유순(柳洵)이다. 염제신의 사위로는 홍징, 이송 등이 있는데 이송의 아들이 세종 대 과학자 이천이다. 즉 홍상직과 이천은, 같은 염제신의 외손자인 것이다.

홍길동 형들의 대에 이르러 홍길동의 가문은 실세로 떠오른다. 홍길동 위로는 적자 출신인 형 홍귀동과 홍일동(1412?~1464)이 있었는데, 이중 홍일동이 계유정난에 참여해 원종공신 2등훈에 책록되었던 것. 홍일동의 실제 벼슬은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홍일동은 유명한 대식가이기도 했다. 동시대 사람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 "그 사람은 진관사에서 생활할 때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세 바릿대, 두부국 아홉 주발을 먹었다. 그 사람이 산 아래 왔을 때 식사를 대접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 홍일동은 찐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먹었다. 세조가 이 소식을 듣고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홍일동은 사실임을 아뢰었고 세조는 장사(壯士)라고 말했으나 평상시에는 미숫가루를 먹고 맑은 술만 마셨으며 밥을 먹지 않았다. 1464년에 그 사람이 명 사신을 접대하다가 홍주에서 폭음으로 죽었을 때 사람들은 배가 터져 죽었다고 생각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야사엔 대식가 홍일동의 소문을 들은 세조가 홍일동을 궁으로 불러 얘기를 해보려했는데, 홍일동이 불교신자인 세조 앞에서 척불배불을 논하자, 이에 노한 세조는 당장 그 자리에서 홍일동을 죽이려했다. 하지만 홍일동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도 않고 척불배불을 외치자, 그 의연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세조는 칼을 거두고 술 한 양동이를 상으로 내렸는데, 홍일동은 그 자리에 한 양동이를 원샷하고도 모자라는지 입맛만 다셨다. 그걸 본 세조는 추가로 두 양동이를 하사했고, 두 양동이를 모두 비운 후에야 홍일동은 세조에게 절을 하며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감사를 표했다고.

홍일동의 딸이자 홍길동의 조카인 숙의 홍씨성종의 총애받는 후궁이었으며, 7남 3녀를 낳았다. 조선 전기 경향사족의 서얼은 경향사족의 돈벌이 등을 대신 처리하던 위치였던 데다가 조카가 숙의 홍씨이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홍길동을 건드릴 수조차 없었으니, 통념과는 달리 조정관리가 비호할 만큼 이 굉장히 든든한 인물이었던 것.

고로 현실판 홍길동은 의적이라기보다는 정계의 빽이 매우 강력한, 오늘날로 치면 과 결탁한 조직폭력배, 정치깡패 등의 두목 같은 성격이 매우 강했다고 볼 수 있다. 홍길동이 갑자기 기록이 사라진 것도 숙의 홍씨를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런 배경을 가진 홍길동은 전국구 도적패를 이끌었는데, 평범한 도적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부하 중에서 일부가 벼슬아치와 결탁하거나 가끔씩 당상관으로 행세했다는 기록도 있다. 자기 형인 홍일동이 진짜로 당상관이었으니 형이 입던 옷 갖다 입으면 될 정도로 당상관 행세하기도 매우 쉬웠다. 이로 봐서는, 높으신 분들과의 친목 관계를 잘 이용했던 인텔리 범죄자이면서 검계의 폭력배들을 이끄는 무력까지 겸비한 능력자였다.

단, 검계라는 명칭이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홍길동 시대보다 훨씬 뒤인 약 200년 후 숙종 통치기 때이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명칭으로 불리지는 않았지만 사서에 기록된 홍길동의 행적은 보면 이후 검계와 큰 차이가 없긴 하다. 오히려 더한 점도 있는 걸 보면 검계의 전신격.

덤으로, 부친이 1424년 사망한 것을 고려할 때 활동 시기인 성종 말~연산군 초의 나이는 홍길동전 속 의적과는 다르게 최소한 70대 노인으로 추정된다. 부친이 죽은 후 유복자로 태어났다 해도 1425년생이니 잡혔을 때 만 75세이다.

실존했던 홍길동은 극악하고 냉혹해서 자신의 정체를 알릴까봐 자신을 숨겨준 가족을 죽이거나 얼굴 가죽을 벗겨서 매달아 놓기도 했다. 당시에는 홍길동의 성명이 욕설로 쓰일 정도였다. 특히 충청도의 피해가 극심했다.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문금리에 유독 홍길동 관련 구전이 많이 전해진다. 심지어 이 마을에 있는 금계산에는 '홍길동묘'라고 불리는 장소까지 있다. 홍길동이 1500년에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513년에 홍길동 때문에 충청도에서 세금이 전혀 걷히지 않는다는 기록까지 존재할 정도였다. 홍길동이 충청도를 얼마나 심하게 초토화 시켜 놓았는지 10년이 훨씬 지나고도 복구가 안 된 것이다.

그래서 유민이 대규모로 발생하고 세수가 안 걷힌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온다.
"(전략)충청도는 홍길동(洪吉同)이 도둑질한 뒤로 유망(流亡)이 또한 회복되지 못하여 양전을 오래도록 하지 않았으므로 세(稅)를 거두기가 실로 어려우니..."
- 중종실록 18권, 중종 8년 8월 29일 갑자 1번째 기사
당연히 조선 조정에서는 홍길동을 잡으려고 혈안이 됐지만 머리가 좋아서 관군들을 농락하면서 도망한 데다가 조선 조정의 관리들을 포섭해 비호받았는데 그 대표로 당상관을 지낸 무관 엄귀손이 있다. 엄귀손은 정3품 절충장군으로 탐관오리로도 유명했는데 홍길동과 결탁해 갖은 부를 축적했다. 홍길동은 엄귀손의 비호하에 조선 조정의 관리를 사칭하는 등 범죄의 판을 키우다가 결국 1500년에 체포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홍길동을 체포하고서 홍길동을 도운 사람을 처벌한 내용이 나온다. 체포된 홍길동을 처벌하는 논의는 있지만, 처형했다는 기록은 없다.

픽션인 신봉승의 <조선왕조 오백년> 원작에는 늪에 몰려서 생포되고 모진 고문 끝에 능지처참에 처해져 뼈가 분쇄돼 바람에 날아가는 것으로 처리하지만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홍길동을 도운 엄귀손이 고문받고 옥중에서 장독으로 죽었다는 기록은 있다.

결국 실존했던 홍길동의 정확한 생몰년은 불분명하다. 체포된 해에 사형됐다면 1500년에 죽은 것이 되지만 처형했다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사망연도는 알 길이 없다. 생년은 밝혀진 바가 없지만 홍길동의 형인 홍일동이 1412년 출생이므로 그 후라는 사실만 알 수 있다.

장성군에서 전해지는 얘기에는 1443년경에 태어났다는 설이 있는데 이 경우 잡혔을 때 57세로 막 환갑을 바라보는 초로의 나이로 보이지만 1443년생이라면 1424년 사망한 홍상직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백성 홍 아무개의 아들로 나온 듯 하다. 유복자로 가정해 1425년생으로 가장 적게 잡아도 75세에 잡힌 것이 된다.

홍길동이 탈옥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홍길동은 포도청이 아니라 의금부에서 추국했고, 훗날 중종 18년에 도적 60명의 탈옥을 방지하려는 논의에서 남곤이유청이 "지난번 경신·신서 연간에 있었던 홍길동의 옥사를 거울삼을 만합니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보아 홍길동의 옥사에서 탈옥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가지 설이 나오는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이 자세한 기록물이기 때문인데 자세해야 할 대도적 홍길동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다. 보통 산적 등이 발생하면 관군 출동, 사살, 체포, 문초, 처형 등 숫자까지 아주 세세하게 기록이 된다. 하지만 홍길동에 대한 기록은 체포했다는게 전부고 문초한 기록마저 엄귀손에 대한 것만 나오고 홍길동에 대한 것이 없다. 다만 기본적으로 <연산군일기>가 다른 실록들에 비해 다소 부실하거나 중간에 비는 부분이 많은 편이기는 하다.

이런 사정 탓에 홍길동 사건이 정부 고관까지 이어지는 수준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홍상직의 아들이라면 성종의 후궁 숙의 홍씨를 통해 성종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실록 편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연루되었기 때문에 축소 은폐되었다는 설도 있고 탈옥설, 가짜 바꿔치기설, 오야케아카하치 동일인물설에 끼워 맞추기 위한 근거없는 추측이 무성하다.

3. 여담



[1] 이게 홍길동에 대한 실록의 첫 기록이다.[2] 다만 철자가 조금 다르다, 실존 인물 홍길동은 동(同),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동(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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