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타 모토시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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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B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 ||||||||||||||||||||||||||||||||||||||||||||||||||||||||||||||||||||||||||||||||||||||||||||||||||||||||||||||||||||||||||||||
1961 | 1963 |
NPB 일본시리즈 우승 코치 |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1973 |
NPB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 | |
1981 | 1989 |
1957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신인 | ||||
1956년 아키야마 노보루 (타이요 훼일즈) | → |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58년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58~1959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선수(MVP) | ||||
1957년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60년 아키야마 노보루 (타이요 훼일즈) |
1959년 센트럴리그 최다 승리 | ||||
1958년 카네다 마사이치 (고쿠테츠 스왈로즈) 31승 | → |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27승 | → | 1960년 호리모토 리츠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29승 |
1958~1959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승률 투수 | ||||
1957년 키도 요시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708[1] | → |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690(1958년)[2] .711(1959년)[3] | → | 1960년 아키야마 노보루 (타이요 훼일즈) .677[4]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221815><tablebgcolor=#221815> |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
{{{#!wiki style="margin: 0 -10px" {{{#f49c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 1934년 ~ 현재 | ||||
초대 미야케 다이스케 (1934~1935) | 2대 아사누마 요시오 (1935~1936) | 3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36~1942) ★★★★★★★ | 4대 나카지마 하루야스 (1943) ★ | 5대 나카가미 히데오 (1944~1946) | |
6대 나카지마 하루야스 (1946~1947) | 7대 미하라 오사무 (1947~1949) ★ | 8대 미즈하라 시게루 (1950~1960) ★★★★★★★★ | 9대 카와카미 테츠하루 (1961~1974) ★★★★★★★★★★★ | 10대 나가시마 시게오 (1975~1980) ★★ | |
11대 후지타 모토시 (1981~1983) ★★ | 12대 오 사다하루 (1984~1988) ★ | 13대 후지타 모토시 (1989~1992) ★★ | 14대 나가시마 시게오 (1993~2001) ★★★ | 15대 하라 타츠노리 (2002~2003) ★ | |
16대 호리우치 츠네오 (2004~2005) | 17대 하라 타츠노리 (2006~2015) ★★★★★★ | 18대 타카하시 요시노부 (2016~2018) | 19대 하라 타츠노리 (2019~2023) ★★ | 20대 아베 신노스케 (2024~) | |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단일리그 우승 |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 ||||
나가시마 시게오 (1975~1980) | → | 후지타 모토시 (1981~1983) | → | 오 사다하루 (1984~1988) |
오 사다하루 (1984~1988) | → | 후지타 모토시 (1989~1992) | → | 나가시마 시게오 (1993~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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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타 모토시 藤田元司 | Motoshi Fujita | |
출생 | 1931년 8월 7일 |
사망 | 2006년 2월 9일 (향년 74세) |
출신지 | 에히메현 니이하마시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구제 에히메현립 니이하마 중학교 → 에히메현립 사이죠키타 고등학교 게이오기주쿠대학 |
사회인야구 | 니혼석유(1956) |
신체 | 180cm, 80kg |
투타 | 우투우타 |
포지션 | 투수 |
프로 입단 | 1957년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7~1964) |
지도자 경력 |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코치 (1965~1973) 타이요 훼일즈 투수코치 (1975~1976)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1981~1983, 1989~1992) |
프런트 경력 |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카우터 (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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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해설가.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입단한 데다 어깨 부상으로 인하여 겨우 8시즌만 활동했지만,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로서 5번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2차례의 일본시리즈 제패에 공헌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고, 감독으로서도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의 뒤를 이어 요미우리를 리그 우승 4회, 일본 제일 2회로 이끈 명 지도자였다.2. 아마추어 시절
에히메 현 니이하마 시에서 태어난 후지타는 구제 에히메현립 니이하마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재학 도중 태평양 전쟁 종전과 함께 학제 개혁이 이뤄지면서 현립 사이죠 북고등학교로 전학을 가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2차례 지역예선 결승에 진출했으나 번번히 결승에서 탈락하면서 끝내 코시엔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고교 졸업 후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진학하여 학교의 에이스로 자리매김 했고, 무엇보다도 강속구를 자랑하는 정통파 오버핸드 스로 투수로 도쿄 6대학 리그의 스타로 떠올랐다. 도쿄 6대학 리그 통산 63시합 등판에 31승 19패, 227탈삼진 이란 출중한 기록을 남겼지만 후지타가 재학할 시기에 케이오가 우승한 것은 1학년 때인 1952년 춘계 리그 우승이 전부였던 탓에 비운의 에이스 라고 불리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사회인 야구 니혼석유에서 활동한 후지타는 1957년 시즌을 앞두고 대학 선배인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권유를 받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이 때 후지타의 나이는 26세로 프로 입문은 다소 늦은 편이었는데, 이는 중학교~고등학교 당시 학제 개혁으로 인해 구제중학교가 고등학교로 새롭게 바뀌는 과정에서 생긴 학년 혼란 등에 후지타를 포함한 수많은 학생들이 휘말렸고 여기다 유급, 전학까지 겹쳐 고등학교를 2년 늦게 졸업한 탓이었다.
3. 프로 시절
입단 첫해인 1957년 17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획득한 후지타는 1958년 29승, 1959년 27승을 올리며 2년 연속 MVP를 수상함과 동시에 교진군의 센트럴 리그 제패에 크게 공헌했으며, 1959년 6월 25일 천람시합(천황이 직관하는 경기)으로 열린 대 오사카 타이거즈 와의 홈 경기에서 나가시마 시게오의 9회말 끝내기 홈런에 힘입어 완투승을 거둔 적도 있었다.[5]
그런데 대학시절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비운의 에이스 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1958년 일본시리즈 부터 다시 달라 붙었으니, 그 해 시리즈에서 후지타는 상대인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이나오 가즈히사와 더불어 6시합에 출장하여 평균자책 1.09의 쾌투를 보였음에도 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1승 2패에 그쳤고 팀도 니시테츠에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특히 3승 1패로 시리즈 우승에 단 1승만을 남긴 5차전, 3대 2로 앞선 9회말 2사 3루라는 1아웃만 잡으면 우승 확정인 상황에서 마운드에 있던 후지타는 시리즈 5차전 까지 15타수 1안타로 물방망이를 자랑하던(...) 세키구치 세이지에게 통한의 동점 적시타[6]를 얻어 맞았고, 이것이 결국 이날 이나오 가즈히사가 때린
이듬해 1959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난카이 호크스의 에이스 스기우라 타다시에 맞서 2~4차전 연속으로 등판하는 괴력을 선보였지만 스기우라가 1~4차전 전부 마운드에 올라 전부 승리를 거두며 교진의 우승은 물론 후지타의 투혼에 찬물을 끼얹었다(...).[7] 더불어 후지타는 1958년 4차전부터 1961년 5차전까지 일본 시리즈 5연패(連敗)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다.[8]
이후 무리한 등판으로 어깨가 고장난 후지타는 1960년 시즌 이후 성적이 급속도로 하락했고, 1961년, 1963년 일본시리즈 우승 멤버에 포함은 되었지만 정작 후지타는 시리즈 내내 선발 등판하여 초반에 KO 당하거나 구원 투수로 나와 대량실점 하는 등 영 좋지 않은 모습만 보였다(...). 1963년 시즌부터 선수 겸 코치로 뛰었고, 1964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상기 언급과 같이 프로 입문 시기가 다소 늦기도 했지만 불과 8년에 불과한 현역 시절이었다.[9]
현역 시절 등번호 18번을 달고 훌륭한 활약을 보였으며, 이 18번을 호리우치 츠네오가 물려받아 준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18번은 교진군의 에이스 투수가 대대로 세습받는 번호가 되었다. 후지타 모토시-호리우치 츠네오-구와타 마스미-스기우치 도시야를 거쳐 2022년 현재는 스가노 도모유키가 18번을 달고 있다. 교진이 인기팀이었던 지라 각 팀의 에이스가 18번을 다는 관습은 전 야구계로 퍼졌고, 현재도 일본프로야구 에이스의 번호의 대명사는 18번이다.
8시즌 동안 통산 성적은 364경기 등판, 119승 88패, 평균자책 2.20, 924탈삼진.
4. 지도자 시절
4.1. 요미우리, 다이요 코치
현역에서 은퇴한 후지타는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 밑에서 1군 및 2군 투수코치, 스카우트 등을 역임하며 호리우치 츠네오, 다카하시 카즈미, 스가와라 카츠야 등을 키워낸 한편으로 부상으로 신음하던 와타나베 히데타케와 나카무라 미노루를 부활시키는 데 일조했고, 지병인 부정맥과 어깨뼈 탈골로 고생하던 미야타 유키노리[10]를 중무리 투수로 전향시켜 재미를 보면서 요미우리 V9 시대의 한 축을 떠맡았다.그러나 한편, 부업으로 경영하던 사업체의 인사상 트러블을 해결하려 야쿠자를 동원하고 1969년 중의원 선거 때 야쿠자와 선거운동에 참여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구단으로부터 근신 1개월을 받은 흑역사도 있다(검은 안개 사건 참조).
다이요 훼일즈 투수 코치 시절의 후지타.
1974년 시즌 후 요미우리에서 퇴단한 후지타는 이듬해인 1975년 부터 다이요 훼일즈 투수 코치로 2년간 활동했지만 당시 다이요 마운드가 워낙 시망이라 빛을 보지 못하고(...)
4.2. 요미우리 감독 1기
1980년 시즌을 끝으로 해임당한 나가시마 시게오의 후임으로 요미우리 감독에 취임했다. 그런데 꽤나 유명한 사실이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오로지 요미우리에서만 선수 및 지도자로 활동한 사람만 감독에 앉을 수 있는 철저한 순혈주의를 고수하는 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지타는 다른 팀, 그것도 같은 리그의 경쟁 구단에서 코치로 활동한 적이 있는데도 이례적으로 감독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요미우리 이외의 구단에서 지도자 경력을 가진 후 요미우리 1군 감독에 취임한 인물은 후지타가 유일하다.[11]
이는 후지타가 상술했듯 현역 시절 전설적인 활약을 펼친 에이스이자 18번 등번호를 에이스 투수들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전통을 만들어 낸 요미우리가 자랑하는 슈퍼스타였고, 투수코치로도 V9을 이끌어 내는 등 능력이 검증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요미우리는 나가시마 체제에서 창단 이래 첫 최하위 추락을 겪고 V9 이후로 일본시리즈 우승도 이뤄내지 못하는 등 위기 의식이 팽배해 있어서 능력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고, 또 마땅히 감독을 맡을 인물도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순혈주의를 중시하는 요미우리 구단이긴 하나 후지타는 그러한 순혈주의도 무시할 수 있는 특별한 스타였던 것.
아무튼 후지타는 198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4개 구단 간의 경쟁 끝에 하라 타츠노리를 영입했고, 후지타 모토시(감독)-오 사다하루(조감독)-마키노 시게루(수석 코치)의 3두 지도체제를 수립하여 취임 첫해 센트럴 리그를 제패한 것에 이어 일본시리즈에선 오사와 케이지가 이끄는 퍼시픽 리그 우승팀이자 같은 코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닛폰햄 파이터즈를 4승 2패로 물리치며 1973년 이후 8년 만에 V9 시대 이후로는 최초의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했다.
그러나 취임 당시 요미우리 팬들의 절대적 지지를 차지하던 나가시마를 해임시키고 후임으로 온 감독이라는 이유만으로 나가시마 빠순이들을 비롯한 극성 요미우리 팬들에게 "나가시마를 쫓아낸 자"라는 말도 안되는 비난을 받았고[12]
사실 나가시마의 후임으로 막 은퇴한 상황이었던 오 사다하루를 바로 감독으로 올리기에는 아직 역량이 부족하다는 구단 수뇌부의 판단 하에 오가 감독감으로 제대로 성장할 때까지 후지타를 일종의 임시 사령탑으로 기용한 것이었으나 팬들이 이러한 구단의 계획을 알 리가 없었고, 결국 후지타가 팬들의 눈에 슈퍼스타인 나가시마를 몰아낸 자로 비춰지며 억울하게 비난받은 셈.
어쨌거나 친정팀 감독으로 돌아왔어도 다소 고단한 그라운드에서의 삶을 지내던 후지타는 1982년 센트럴 리그 2위를 기록했고[13] 1983년에도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순조롭게 준수한 성적을 마크했지만, 같은 해 일본시리즈에선 옛 동료 히로오카 타츠로가 이끄는 세이부 라이온즈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3승 4패로 아쉽게 패배했다.
시리즈 패퇴 직후 후지타는 감독 자리를 오 사다하루에게 물려주면서 3년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다시 NHK로 복귀하여 해설가 활동을 재개했다.
4.3. 요미우리 감독 2기
1988년 시즌 후, 이번엔 해임당한 오 사다하루의 후임으로 요미우리 감독 직에 복귀했다.
1기 감독 시절의 데자뷔 였을까, 다시 감독이 된 후지타는 재취임 첫해인 1989년 센트럴리그 우승에 1989년 일본시리즈에서도 오기 아키라 감독이 이끌던 킨테츠 버팔로즈를 3연패 후 4연승으로(!)[14]누르고 생애 두 번째 일본 제일을 달성했다. 이듬해인 1990년 시즌 리그 2연패에 성공했으나, 세이부 라이온즈에 고배를 마시며 시리즈 준우승에 그쳤다.[15] 한편으로 1990년 미일 올스타전 1차전 에서 일본 올스타 감독을 맡아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1년엔 66승 64패로 5할 승률 이상을 달성 했음에도 리그 4위에 머무르면서[16] 감독 해임설에 휘말리기도 했으며 결국 1992년 시즌, 1위부터 최하위까지 불과 9게임차 밖에 나지 않는 각축전 끝에
5. 말년
그라운드를 완전히 떠난 후지타는 2000년 까지 NHK의 해설가로 일했고 1999~2003년 까지 거인 OB회의 회장을 지냈다. 2005년 에는 독립리그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의 에히메 만다린 파이어리츠 구단 자문역을 맡기도 했고, 그 외 야구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199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한편으로, 2004년 11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가담한 불쾌한 경력도 있다(...).
2006년 2월 9일, 노환에서 온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74세. 그의 장례식은 요미우리 구단 사상 세 번째 구단장[18] 으로 거행되었다.
6. 인물평
- 현역 시절의 경쾌한 투구 모습 이라던가 특유의 지적인 언행으로 일본 야구계에서 신사로 불리기도 했고, “투수 출신의 감독은 정신 야구의 본질로부터 동떨어지고 있다”고
까내리던평하던 노무라 카츠야도 그의 저서에서는 감독으로서의 후지타에 대해 높이 평가한 바 있다.
- 감독 시절 영입한 하라 타츠노리는 현역 시절 스승인 후지타에게 받은 은혜를 지금도 잊지 못하여 시간만 나면 종종 후지타의 묘소를 참배한다고 한다.
- 오쿠보 히로모토가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1992년 시즌 도중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오쿠보가 원정경기 도중 호텔 식당에서 홀로 다이어트 식단으로 식사를 하는 것을 본 후지타가 "그 정도밖에 안 먹었는데 배가 차겠느냐? 오늘은 열심히 연습했으니 더 먹거라."라면서 스테이크를 두 접시나 사 줬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과체중[19] 때문에 늘 감독들에게 식사에 관해 야단만 맞던 오쿠보는 후지타의 따뜻한 배려에 "후지타 감독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속으로 되뇌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그 덕분인지 그해 오쿠보는 84경기 출장에 타율 0.277, 15홈런, 43타점으로 커리어하이를 찍으며[20] 팀을 리그 하위권에서 2위까지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되며 후지타의 기대에 크게 부응했다. 이후 후지타의 사망 소식을 듣자 오쿠보는 가장 먼저 장례식장을 찾아와 크게 애통해 했다.
[1] 17승 7패[2] 29승 13패[3] 27승 11패[4] 21승 10패[5] 그런데 그날 나가시마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은 투수가 바로 무라야마 미노루 였다. 홈런이 나왔을 당시 고라쿠엔 구장의 조명 상태가 좋지 않아 나가시마의 타구가 좌측 파울폴을 맞았는지 빗겨 나갔는지 확실치 않았지만 마침 히로히토의 귀가 시간인 밤 9시 15분이 임박한 시점이었던 지라 주최측의 농간(?)으로 홈런이 되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아무튼 무라야마는 죽을 때 까지 그 때 얘기만 나오면 "그건 파울이었다" 라며 거품을 물었다고(...)[6] 일본 야구계에서는 세키구치의 이 동점타를 천만엔짜리 안타 라고 부른다. 이 해 세키구치는 10년 선수(FA제도의 전신) 자격을 얻어 타팀으로 이적하거나 원소속팀으로부터 재계약금을 수령할 수 있었는데, 이 안타 덕분에 니시테츠로부터 재계약금을 많이 받아냈기 때문. 쉽게 말하면 일본시리즈 대활약으로 인한 FA 대박.[7] 이 해 시리즈에서 후지타는 22이닝, 스기우라는 32이닝을 투구했다.[8] 이 기록은 무라야마 미노루(한신), 키타벳푸 마나부(히로시마)도 보유하고 있다. 참고로 김시진은 한국시리즈 통산 무승 7패 란 어마무시한 기록의 보유자이다(...) 포스트시즌으로 범위를 넓혀도 무승 9패(...)[9] 여담으로 당시 포수였던 모리 마사히코는 투수가 컨디션이 안 좋거나 실점을 하면 즉시 감독과 코치에 보고했으며 절대 자신의 탓으로 하지 않고 전적으로 투수에게 책임을 돌렸다. 모리가 주전 포수가 되고 나서 투수들이 벤치에 돌아오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코치가 폭로한 적이 있는데, 모리가 저런 보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0] 정민철, 조성민, 정민태 등 한국인 선수들끼리 경쟁하던 교진군 시절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에 맞서서 정민철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가토리 요시타카 수석코치도 정민철을 밀었지만, 나가시마는 조성민을 밀고 있었다. 정민태는 가토리 코치와의 불화가 심했고 2022년 스톡킹에 출연하여 가토리 코치를 비난하였다. 미야타는 2006년에 사망하였다.[11] 2군이나 3군 감독의 경우 주니치 드래곤즈의 코치직을 거쳐 3군 감독에 취임한 카와이 마사히로 등 예외가 있긴 하지만, 1군 감독까지 오른 케이스는 현재까지 후지타 뿐이다. 후지타의 현역시절 동료였던 히로오카 타츠로와 모리 마사아키는 야쿠르트 스왈로즈(1978)와 세이부 라이온즈(1982-84, 1986-88, 1990-92)를 여러 차례 우승으로 이끌며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줬으나 요미우리의 순수혈통주의 때문에 끝내 요미우리 감독과는 인연이 없었다.[12] 당시 후지타는 하루에도 수백 통이 넘는 나가시마 팬들의 협박 편지를 받아야 했고 그 중에는 "네 딸을 죽이겠다"라며 면도날을 동봉한 악질적인 내용의 편지도 있었다.[13] 다만 이 해 시즌은 최후반 20시합을 6승 10패 4무로 부진하며 모든 일정이 끝난 후 주니치 드래곤즈가 자신들을 제치고 역전 우승을 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씁쓸한 결말을 맞았다.[14] 후지타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3년 연속으로 교진을 누르고 일본시리즈 우승을, 특히나 1958년에 리버스 스윕으로 우승을 달성한 당시 주전 멤버 중 한 명이 오기인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 하다.역사는 반복된다 게다가 이 해 일본 시리즈는 바로 3연패로 패할 위기에 몰린 교진 선수단이 일부 언론에 의해 부풀려진 킨테츠 선수와의 인터뷰 기사에 각성해 나머지 4경기를 이기는 대역전으로 우승한 시리즈이다. 당시 요미우리는 4차전부터 1번타자를 야수 최고참인 한큐출신의 미노다 고지로 바꾸기까지 했다. 미노다는 시리즈 타율은 저조했으나 선봉장역할을 충실하게 했다. 킨테츠로서는 창단 후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목전에 두고 처참하게 역관광 당하며 우승을 놓쳤다.[15] 하필 당시 세이부 감독은 현역 시절 교진군에서 배터리를 이뤘던 모리 마사아키였다(...). 덧붙여 1983년 시리즈 준우승 시 세이부 감독도 교진군 동료이자 명 유격수 였던 히로오카 타츠로 였으니. 세이부, 그리고 옛날 동료와의 상성은 영 꽝인듯 그 대신 현역 시절 일본시리즈에서 자신을 물먹인 니시테츠(오기 아키라), 난카이(오사와 케이지) 선수 출신 감독들은 전부 철저히 앙갚음 해줬다...[16] 이 해 리그 우승팀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였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듬해인 1992년엔 히로시마가 전년도의 요미우리와 똑같은 성적, 순위를 찍었다(...)[17] 그 해 최종 순위는 2위 였지만 오쿠보 히로모토를 세이부 라이온즈 에서 트레이드 해오기 전까지 교진은 4~5위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이 때문에 정규시즌 도중 후지타의 휴양설, 해임설이 나올 정도로 분위기는 안 좋았다. 시즌 중반부터 오쿠보가 팀을 거의 혼자 하드캐리 하면서 순위를 끌어 올렸지만 최종성적은 67승 63패로 2위치고는 저조한 성적이었다. 이것도 한신 타이거스와의 공동 2위에 4위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는 불과 1게임차였다(...) 참고로 상단 각주에 나오듯 이해 히로시마의 성적은 91년 요미우리가 찍은 성적과 동일하다.[18] 첫 번째는 1947년 시즌 도중 장티푸스로 급사한 쿠로사와 토시오(그의 등번호 4번은 요미우리의 영구결번이다), 두 번째는 1982년 사망한 미즈하라 시게루 이다.[19]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오쿠보는 은퇴 후 연예계에서 활동할 때 데이브 오쿠보(Dave Okubo) 라는 예명을 사용했는데 데이브가 바로 데부(デブ, 뚱보라는 의미)에서 따온 이름일 정도로 현역 시절 비대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20] 비록 규정타석 에는 진입하지 못했지만, 오쿠보가 홈런을 친 날 요미우리는 거의 필승(必勝)이었을 정도로 뛰어난 적시타 능력을 자랑했다. 오쿠보가 5번 타자로 활약할 당시 3, 4번은 코마다 노리히로와 하라 타츠노리가 번갈아가며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