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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3:03:48

하나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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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마사히토 친왕비 하나코
正仁親王妃華子
파일:Princess_Hitachi_2012-1-2.jpg
이름 마사히토 친왕비 하나코(正仁親王妃華子)[1]
출생 1940년 7월 19일생(만 [age(1940-07-19)]세)
도쿄부 요도바시구
(現 도쿄도 신주쿠구)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가족관계 남편 마사히토 친왕
아버지 츠가루 요시타카(津輕義孝)
어머니 모리 히사코(毛利久子)
학력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여자 중등과
가쿠슈인여자 고등과
가쿠슈인여자단기대학
오시루시(お印)[2] 석남꽃

1. 개요2. 친정 및 성장 배경3. 친왕비로 간택되다
3.1. 황실 가계도
4. 아이를 낳지 못하다5. 현재

[clearfix]

1. 개요

일본황족.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의 아내(친왕비)이다. 즉 아키히토 상황에게는 제수, 미치코 상황후에게는 아랫동서, 나루히토 덴노후미히토 친왕, 구로다 사야코에게는 작은어머니, 마사코 황후키코 친왕비에게는 시숙모, 마코 공주, 카코 공주, 아이코 공주, 히사히토 친왕에게는 작은할머니가 된다.

일본적십자사, 일본이케바나예술협회, 일본동물복지협회, 일본승마연맹, 일본라틴아메리카부인협회의 명예총재를 맡고 있다.

2. 친정 및 성장 배경

츠가루 요시타카(津輕義孝) 백작과 모리 히사코(毛利久子)의 4녀(막내)로 태어났다.

본래 아버지 요시타카는 오와리 도쿠가와(尾張德川) 가문에서 분가한 도쿠가와 요시쿠미(德川義恕) 남작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외가인 츠가루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에 놓이자 외가로 입적되어 외가의 성씨와 작위(백작)를 계승했다.[3] 어머니 히사코는 조슈 번 모리 가문의 지번인 조후 번(長府藩)[4]의 번주 모리 모토오(毛利元雄) 자작의 장녀이다.

이렇게 하나코는 친가와 외가로부터 모두 화족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하나코는 전통적 황족ㆍ화족 학교인 가쿠슈인에 다녔으며, 가쿠슈인 여자단기대학[5] 문과(영어 전공)를 졸업했다.

시숙모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와는 7촌간이며, 넷째 시누이 이케다 아츠코의 남편 이케다 다카마사(池田隆政)와는 6촌간이다. 아츠코는 하나코의 가쿠슈인 여자단기대학 선배이기도 하다.[6]

하나코가 5살 때인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으며 큰 혼란을 겪었다. 신격화되어 오던 천황과 그 일족은 인간선언을 했다. 2년 후인 1947년 5월 3일 신헌법 시행으로 신분 제도가 폐지되어 화족들은 지위를 잃었고, 동년 10월 14일에는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이 황적이탈하여 구황족으로서 평민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화족이었던 하나코는 물론, 그녀의 친가와 외가도 이때 평민이 되었다. 그러나 구황족들과 화족들의 높디 높은 콧대는, 하루아침에 낮아지지 않았다.

3. 친왕비로 간택되다

1964년 9월 30일, 만 24세의 츠가루 하나코는 5살 연상의 요시노미야 마사히토 친왕과 결혼했다. 결혼으로 인해 마사히토 친왕은 태어나서 줄곧 써 오던 어칭호 '요시노미야' 대신 '히타치노미야'라는 미야고(궁호)를 받아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이 되었고, 츠가루 하나코도 남편을 따라 '마사히토 친왕비 하나코(正仁親王妃華子)'가 되었다.

하나코가 황실의 비(妃)로 선택된 이유는, 혈통 때문이었다.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가, 작은며느리는 화족 가문 출신으로 직접 고른 것이었다.

하나코 비가 화족 출신에 가쿠슈인 졸업생인 반면, 미치코 황태자비의 친정 쇼다(正田) 가문은 대재벌[7]이지만 평민이다.[8] 또한 미치코 황태자비는 가톨릭 미션스쿨세이신여자대학을 졸업했다. 평민 출신이며 가쿠슈인 졸업생도 아닌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마 아랫동서 하나코 비와 비교당하며 더욱 괄시를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미치코 황태자비는 평생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한 것으로 유명한데, 하나코 비의 남편 마사히토 친왕과 관련된 일화도 있다. 마사히토 친왕은 그리스도교에도 관심을 가져[9], 가톨릭 집안 출신이며 가톨릭 미션스쿨을 졸업한 형수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미치코 황태자비는 당연히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시어른들에게 알려져, 미치코 황태자비만 또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는 것이다.[10]

3.1.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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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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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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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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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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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4. 아이를 낳지 못하다

그러나 하나코 비는 평생 임신을 하지 못했다. 이는 남편 마사히토 친왕의 문제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손윗동서 미치코 황태자비는 이미 하나코가 황실로 시집오기 전, 1960년 2월 23일에 이미 황태손 격[11]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을 낳았다. 1965년에는 둘째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을, 1969년에는 셋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를 낳아 총 2남 1녀를 두었다.

그러니 마사히토 친왕과 하나코 비 부부가 결혼 후 쇼와 시대였던 1960년대나 1970년대, 또는 늦어도 1980년대 초반기 즈음에 아들이나 딸 등 자녀를 출산하였다고 해도,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황태자비 부부를 앞질러 일본 황실 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했을지는 불확실하다.

장남이자 천황 승계 서열 1위에 황태자 지위를 갖고 있던 아키히토와 달리, 마사히토는 차남에다가 쇼와 시대였던 1960~80년대 당시에는 천황 승계 서열 2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미치코 황태자비가 딸만 낳고 하나코 비만이 유일하게 아들을 낳는 상황이 되지 않는 이상, 하나코 비가 남편 마사히토 친왕과의 사이에서 임신에 성공해 자녀를 낳았다고 해도 나가코 황후는 장남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황태자비 부부, 차남 마사히토 친왕과 하나코 친왕비 부부 소생의 손주들을 특별히 차별하거나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 마사히토 친왕은 후계자가 아니긴 하지만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가 딸 넷 끝에 어렵게 두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고부갈등이 없진 않아 있었을 듯하다.

5. 현재

남편 마사히토 친왕은 내성적이지만 온화한 성격으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고 있다.

자식 문제와 천황 승계 문제 등으로 사이가 험악한 조카들인 형 나루히토 천황 &마사코 황후 부부와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키코 비 부부와 달리, 현 아키히토 상황&미치코 상황후 부부와 마사히토 친왕&하나코 친왕비 부부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편이라고 한다. 쇼와 덴노가 살아 있었던 시절까지는 자식 문제와 아내들의 출신 성분 문제로 인하여 두 사람간의 사이가 미묘하긴 했었으나, 쇼와 덴노가 1989년 사망하고 아키히토 황태자가 새 일본 천황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어느 정도 많이 좋아진 편이라고 한다.

황실전범양자입양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히타치노미야 부부의 애완견에 대한 애정은 사실상 자녀에 버금갈 정도로 각별하다고 한다

이후 마사히토 친왕은 암 연구를 계속하여, 1969년부터 재단법인 일본 암 연구회 암 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2001년 1월부터는 암 연구회 명예총재로 있다.

2018년 들어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이 공개 공무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이 상태는 2019년 4월 30일 및 5월 1일 천황 생전 퇴위 및 생전퇴위에 따른 새 천황 즉위 행사,5월 22일 적십자사 행사에서도 유지된 것으로 보아 일시적인 부상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 보도에 의하면 화족 출신답게 예법에 상당히 민감한 편이라고 하는데, 과거 손윗동서인 미치코 상황후에 대한 황실 차원에서의 시집살이에 그녀도 어느 정도 관여했을 정도로, 주로 손윗동서의 예법 부분을 지적하면서 이래서 평민은 안 된다고 질타하는 쪽이었다. 그 이후 사이가 회복되긴 했지만 이러한 예법에 민감한 성향은 나이가 든 지금까지도 여전한 모양인지 과거 한 황족들의 모임에서 황족의 예법을 어기고 평범한 여자들처럼 언니 마코 공주와 대화하던 카코 공주에게 "황족답게 행동하라"면서 한 마디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카코 공주는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황족으로서의 예법을 일절 지키지 않았기에, 역시 아키시노노미야 결국 하나코 비는 자녀에게 황족으로서 필요로 하는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않고 방임만 하는 후미히토키코 비에 대해서도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보도를 할 정도라고 한다.

2019년 9월 황실회의에 참석하는 2명의 황족들을 뽑는 선거에서 후미히토와 함께 연속해서 담당하는 게 결정되었다.

[1] 결혼 전 이름은 츠가루 하나코(津輕華子)[2] 일본 황실에서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휘장, 마크.[3] 정작 본인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맏딸 야스코(泰子, 1931~2023. 하나코 비에게는 맏언니)의 차남을 사양자로 들였다.[4] 군인 노기 마레스케가 이 지역 출신이다.[5]가쿠슈인 여자대학[6] 이케다 아츠코가쿠슈인 여자단기대학 문과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가정생활과로 전과하여 졸업했다.[7] 닛신(日淸) 제분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제일 큰 제분회사라고도 한다.[8] 미치코 황후의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화족(백작)이었지만, 친가인 쇼다 가문은 평민이다.[9]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한 적도 있다.[10] 일본 황실종교신토이기 때문에, 며느리가 타 종교에 대해 믿거나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시집살이 구실이 될 수 있었다.[11] 일본 황실에 공식적으로 '황태손'이라는 직함은 있지만 황태자가 없을 시에만 황태손으로 책봉된다. 나루히토 친왕은 만 31살인 1991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